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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10 : 신라의 역사 9 (제4대 탈해왕 1) 본문
한국의 역사 110 : 신라의 역사 9 (제4대 탈해왕 1)
제4대 탈해왕
탈해 이사금 (脫解尼師今, 기원전 19년~80년, 재위 57년~80년) 또는 탈해왕(脫解王)은 신라의 제4대 왕으로, 성(姓)은 석(昔)이고, 휘는 탈해(脫解)이다. 서기 8년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며, 10년에 대보(大輔)로 등용되어 정사를 맡았다. 57년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왕이 되었다.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新羅
기원전 57년 ~ 9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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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6년 신라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경주
정치체제
군주제
성립
기원전 57년
멸망
935년
초대 군주
박혁거세
기원전 57년 ~ 기원후 4년
최후 군주
경순왕
927년 ~ 935년
성립 이전
진한
해체 이후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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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6년 신라 전성기 때의 지도
기원전 57년 ~ 기원후 4년
927년 ~ 935년
생애
삼국사기에 수록된 석탈해 설화에 따르면 본래는 왜의 동북쪽 1천 리에 위치한 다파나국(多婆那國) 출신으로,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녀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임신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는 일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알을 버릴 것을 명했고, 왕비는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싸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떠내보냈다.
금관가야의 바닷가에 닿았으나 가야인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건지지 않았고,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이르니 이 때가 박혁거세 거서간의 즉위 39년, 곧 기원전 19년이라 하는데,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탈해가 왕위에 오른 57년에 그가 62세였다는 같은 책의 기록과 모순된다.
한편, 석탈해는 인도 타밀인으로서 촐라 왕국 출신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치세 ]
24년, 남해 차차웅이 죽자 유리가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가 본래 덕망이 있었던 까닭에 왕위를 미루어 사양하였다.
57년,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76세에 왕이 되었다.
즉위 이듬해인 58년 봄 정월에 호공을 대보(大輔)로 삼았고 음력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탈해 이사금은 즉위 초에 외교에 힘을 기울여 59년 왜와 수교하였으며,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巖城)을 바치고 항복했다.
그러나 탈해 이사금 대에 신라와 백제는 계속 전시 상태였는데, 63년 음력 10월 백제의 다루왕이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땅을 개척하고 만날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했다.
64년 음력 8월에는 백제가 와산성(蛙山城)을, 음력 10월에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했으나 기병 2천명을 내어 쫓았다.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고 시림을 계림으로 개칭한 뒤 계림을 국호로 삼았다.
66년, 백제는 다시 와산성을 빼앗고 수비병 2백을 주둔시켰으나 신라는 곧 다시 빼앗았다.
67년 봄 정월에 박씨의 귀척(貴戚)으로써 나라 안의 주·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는데, 이름을 주주(州主)·군주(郡主)라 하였다. 음력 2월에 순정(順貞)을 이벌찬으로 삼아 정치의 일을 맡겼다.
70년에 다시금 백제의 침공이 있었으나 자세한 것은 전하지 않는다.
73년에는 왜인이 목출도(木出島)를 침범해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하였다.
74년에는 백제군이 변방을 노략, 탈해가 병사를 보내 격퇴했다.
75년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어서 진휼하였다.
음력 10월 백제가 와산성을 다시 공격, 함락되었으나 이듬해 음력 9월 회복하고 백제인 2백 명을 모두 죽였다.
77년 음력 8월에 아찬 길문(吉門)이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가야군과 싸워 1천 기를 베었다고 하나, 공격전이었는지 방어전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9년에는 장군 거도를 파견하여 현재의 울산 울주구, 부산 동래구에 해당하는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병합하였다.
80년 가을 음력 8월에 죽어 성 북쪽의 양정구(壤井丘)에 장사지냈다.
사후
그를 모시는 숭신전(崇信殿)이 세워졌으며 1980년 경주시 남쪽 탈해왕릉 앞으로 옮겨졌다.
사후 9대 왕 벌휴 이사금이 즉위하였으나 연대차이가 심하여 그의 손자 여부는 불확실하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백제
제4대 탈해왕 실록
(서기전 19년~서기 80년, 재위 서기 43년 모월~ 89년 8월, 역 37년)
1. 탈해의 출생과 망명 그리고 성장
석탈해ㅡ 박혁거세,김알지는 모두 알이나 황금상자에서 태어났고, 신라 왕실을 일군 박, 석, 김 세 성씨의 시조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뿐 아니라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가야를 세운 김수로도 한결같이 알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이들이 모두 알이나 황금상자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술한 것은 국조를 신비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의 나라가 하늘의 뜻으로 세워졌다는 것을 표방하기 위한 서술적 장치이다. 따라서 국조와 연관된 난생설화는 모두 후대인들어 지어 낸 허구라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 설화 속에는 사실적인 요소들이 녹아들어 있을 수 있고, 역사학에서 살피는 설화의 의미는 바로 거기서 찿을 수 있는 사실적인 요소에 있다. 탈해의 난생설화 속에서도 그런 사실적 요소가 발견된다.
<삼국사기>는 탈해의 출생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탈해는 본래 다파니국에서 태어났는데, 이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천 리 밖에 있다. 처음 그 나라 왕이 여국 왕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임신한 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처음 그 나라 왕이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하다.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하면서 버리도록 하자, 부인은 차마 알을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 가지고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것이 처음에는 금관국 해변에 닿았으나 금관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자 상자는 다시 진한 아포진 어구에 닿았는데, 이때가 곧 시조 혁거세 39년(서기전 19년)이었다. 그때 해변에 사는 할머니가 상자를 줄로 끌어 올려 열어보니, 한 어린이가 있었다. 그 노파가 이 아이를 대려다 길렀다.'
<삼국유사>의 내용도 이와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이가 들어 있던 상자가 배에 실려 있었고, 그 배에는 상자 외에도 많은 노비가 있었으며, 탈해를 발견한 노파는 혁거세왕의 뱃사공 어머니 아진의선이라는 내용 정도이다. 또 <삼국사기>는 탈해가 다파나국 왕자라 하였으나, <삼국유사>는 용성국(정명국, 완화국, 화하국으로 불렀으며, 당시 사람들이 왜를 한반도의 남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생각한 점을 감안할 때 울릉도 동남쪽에 위치한 오키제도의 한 섬으로 추측된다) 국왕 함달파와 적국녀 출신의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더욱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두 사서에서 공통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내용 중에 탈해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꾸며진 것으로 치부하더라도, 탈해가 왜국 동북쪽 일천여 리에 위치한 용성국 출신이라는 것은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이유로 탈해가 배에 태워져 바다에 버려졌는지는 알 수 없어도, 그 당시 아시아 지역 일부에서 아이를 배에 태워 바다에 띄움으로써 그 아이의 운명을 시험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탈해가 용성국 출신일 가능성은 다분하다. 또 상자와 노비가 같이 배에 있었다면 탈해는 용성국 왕자일 확율이 높다.
그렇다면 용성국 왕은 왜 탈해를 바다에 버렸을까?
기록대로라면 왕비가 알을 낳은 것이 이유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탈해의 출생을 신비화하기 위한 꾸며낸 내용이도 진짜 이유는 아마도 왕비의 불륜이었을 것이다. <화랑세기>나 <일본서기>등에서 드러나듯 당시 신라나 일본의 여자들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잉태하는 일이 잦았다. 그만큼 성적으로 자유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왕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륜을 통해 낳은 자식을 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미화시킨 대표적인 경우가 고주몽의 난생설화이다. 주몽의 어머니 유화는 처녀의 몸으로 부모의 허락도 없이 해모수의 아이를 통정하여 임신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부모에게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그런 가운데 태어난 아이가 주몽이다.
어쩌면 탈해의 어머니도 유화처럼 불륜을 저질러 아이를 낳고, 그 일로 인해 남편의 분노를 사서 아들을 배에 태워 바다에 띄웠는지 모른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용성국 왕이 금지옥엽 같은 아들을 버릴 이유가 없다.
어쨌던 버려진 탈해는 바다를 떠돌다가 신라국의 노파 아진의선을 만나 그녀를 어머니로 삼고 자랐다. 아진의선은 아이의 성을 석씨로 하였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이 있다. 석씨의 성은 까치와 관련이 있는데 까치 석자에서 새조자를 떼어내고 석자로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의 이름 탈해(脫解)는 궤짝을 풀고 알을 벗고 나온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탈해는 성장하자 키가 9척에 기풍과 정신이 뛰어나고 지혜가 높았다고 한다. 그는 고기잡이로 양모 아진의선을 봉양하였고, 학문과 지리에도 밝았다. 또 어린 시절부터 꾀가 많았다고 하는데, <삼국유사>는 그 증거로 당시 힘있는 신하였던 호공의 집을 속임수를 써서 빼았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호공의 집을 빼았었다는 이야기는 좀 과장된 이야기다. 호공은 원래 왜인으로 신라국에 귀순한 인물로 그는 혁거세왕 38년에 마한에 사신으로 가서 호방하고 맹쾌한 논리로 신라국의 위상을 높이고 돌아온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어린 탈해의 터무니 없는 잔꾀에 속아 살고 있던 집을 빼았겼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오히려 호공은 용성국 왕자인 탈해를 불쌍히 여겨 스스로 자기 집을 내 줬을 가능성이 높다.
또 호공은 고향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탈해를 반견을 것이며 거기다가 탈해는 왕족이고 나이도 어렸다. 그런 처지를 동정하여 호공이 자신의 집에 살도록 했을 것이다.
탈해가 왕위에 오르자 호공을 재상 격인 대보에 임명하였고 그를 총애하고 믿음직스러워했다는 뜻이다. 이는 호공에 대한 인물 됨됨이를 높게 평가했을 뿐만아니라, 탈해가 호공에게 많은 신세를 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즉 탈해는 어린 나이로 신라국에 망명하여 같은 왜인 출신인 호공의 도움으로 서라벌의 귀족 사회에 편입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