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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3 : 백제의 역사 39 (제28대 혜왕- 29대 법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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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3 : 백제의 역사 39 (제28대 혜왕- 29대 법왕)

두바퀴인생 2010. 12. 6. 02:55

 

 

한국의 역사 93 : 백제의 역사 39 (제28대 혜왕- 29대 법왕)

 

제28대 혜왕

혜왕 (惠王, 527년~599년, 재위:598년~599년)은 백제의 제28대 군주이다. 성은 부여(扶餘), 이름은 계(季)이고, 헌왕(獻王)이라고도 하며, 성왕의 둘째 아들이다. 40여 년을 통치한 위덕왕의 동생이다.

 

<수서>백제전에는 「昌死, 子余宣立, 死, 子餘璋立.」라고 있어, 창(위덕왕)의 아들 선(법왕), 선의 아들 장(무왕)이라고 전하고 있어 혜왕은 기록되지 않았다.「일본서기」에는 흠명 천황(긴메이 천황) 16년(555년) 2월에 성명왕(성왕)이 죽은 일을 알리기 위해서 창(위덕왕)이 보낸 사자로서 혜왕의 이름이 나타나 위덕왕의 남동생인 것을 적고 있다.

 

위덕왕 초기에 로 가서 군사 1000명을 데려오는 역할을 하였다. 후일 위덕왕이 붕어하자 아좌태자 대신에 왕위에 올랐지만 고령으로 사망하고 아들 부여선이 법왕으로 등극한다.

 

가계

  • 부왕 : 성왕
  • 모후 : ?
  • 왕후 : ?
    • 아들 : 법왕 선(法王 宣)
      • 손자 : 무왕 장(武王 璋)?

 

 제29대 법왕

법왕(法王, ?~600년, 재위: 599년~600년)은 백제의 제29대 군주이다.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孝順). 혜왕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법왕은 불교를 매우 숭상하여 왕흥사와 미륵사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불교를 너무 숭상한 탓에 백성들에게 물고기를 잡는 그물과 도구들을 태워버리고, 산에 있는 매를 풀어주라는 다소 황당한 명을 내렸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죽었다.

 

한편, 《삼국사기》에선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족

  • 부왕 : 혜왕
  • 모후 : ?
  • 왕후 : ?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왕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온조왕(溫祚王) 온조(溫祚)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2 다루왕(多婁王) 다루(多婁) 기원후 28년 ~ 77년 온조왕의 아들.
3 기루왕(己婁王) 기루(己婁) 77년 ~ 128년 다루왕의 아들.
4 개루왕(蓋婁王) 개루(蓋婁) 128년 ~ 166년 기루왕의 아들.
5 초고왕(肖古王) 초고(肖古) 166년 ~ 214년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6 구수왕(仇首王) 구수(仇首) 214년 ~ 234년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7 사반왕(沙伴王) 사반(沙伴) 234년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8 고이왕(古爾王)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234년 ~ 286년 개루왕의 차남.
9 책계왕(責稽王) 책계(責稽) 286년 ~ 298년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10 분서왕(汾西王) 분서(汾西)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아들.
11 비류왕(比流王) 비류(比流) 304년 ~ 344년 구수왕의 차남.
12 계왕(契王) 계(契) 344년 ~ 346년 분서왕의 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초고(肖古), 여구(餘句) 346년 ~ 375년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14 근구수왕(近仇首王) 구수(仇首), 수(須)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아들.
15 침류왕(枕流王) 침류(枕流) 384년 ~ 385년 근구수왕의 장남.
16 진사왕(辰斯王) 진사(辰斯) 385년 ~ 392년 근구수왕의 차남.
17 아신왕(阿莘王) 아신(阿莘) 392년 ~ 405년 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腆支王)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405년 ~ 420년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久爾辛) 420년 ~ 427년 전지왕의 아들.
20 비유왕(毗有王) 비유(毗有), 여비(餘毗) 427년 ~ 455년 구이신왕의 아들.
21 개로왕(蓋鹵王) 경사(慶司), 여경(餘慶) 455년 ~ 475년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22 문주왕(文周王) 모도(牟都), 여도(餘都) 475년 ~ 477년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23 삼근왕(三斤王) 삼근(三斤) 477년 ~ 479년 문주왕의 아들.
24 동성왕(東城王) 동성왕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479년 ~ 501년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무령왕 사마(斯麻), 여융(餘隆) 501년 ~ 523년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26 성왕(聖王) 성왕 명농(明襛) 523년 ~ 554년 무령왕의 아들.
27 위덕왕(威德王) 위덕왕 창(昌) 554년 ~ 598년 성왕의 장남.
28 혜왕(惠王) 혜왕 계(季) 598년 ~ 599년 성왕의 차남.
29 법왕(法王) 법왕 선(宣), 효순(孝順) 599년 ~ 600년 혜왕의 아들.
30 무왕(武王) 무왕 장(璋), 서동 600년 ~ 641년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31 의자왕(義慈王) 의자 641년 ~ 660년 무왕의 아들.

 

 

 

 

 

 

제28대 혜왕 실록

(?~서기 599년, 재위:서기 598년 12월~ 599년 12월, 1년)

 

늙은 혜왕의 왕위 찬탈과 짧은 재위

혜왕은 성왕의 둘째 아들이며, 이름은 계이다. 그는 위덕왕과 함께 성왕을 보필했으며, 왕자시절부터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성왕이 전사한 직후인 555년 2월에는 위덕왕의 명을 받고 왜로 가서 실권자 소아모독과 흠명천황을 만나 병기와 군대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일로 왜국 조정은 논란을 거듭하였고, 그 같은 논쟁은 약 1년 동안 계속되었다. 계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왜에 머물다가, 왜 조정이 백제를 지원하겠다는 확답을 하자, 556년 정월에 귀국하였다.

 

왜의 흠명천황은 그의 귀국길에 무기와 양마를 보태주고, 여러가지 진귀한 보물을 선물로 안겨주면서 축자국의 수군으로 하여금 그를 호송토록 했으며, 따로 축자국의 화군이 지휘하는 병력 1천을 붙여주었다.

 

어렇듯 혜왕은 위덕왕 즉위 초기에 중요한 역활을 수행하였고, 이후로도 위덕왕을 도와 여러 가지 정책을 수립하고 지휘하였다. <삼국사기>는 그의 직책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디만, 관례로 봐서 그는 상좌평의 직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위덕왕 시절 정책의 대부분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보면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상좌평 직책에 만족하지 않았다. 597년 4월 위덕왕의 태자 아좌가 왜에 파견되는데,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왕권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위덕왕이 아좌를 왜에 파견한 것은 수나라와 고구려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어 백제의 옛 땅을 되찿으려는 의도였다. 왜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수와 고구려가 전쟁을 벌이는 동안, 뒤를 치겠다는 뜻이었다. 아좌가 이 같은 막중한 대사를 위해 왜에 건너간 그 때, 위덕왕은 노환을 이기지 못하고 병석이 누웠고, 왕권은 자연스럽게 혜왕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아좌가 왜에서 돌아오자, 혜왕은 세력을 결집하여 아좌를 제거하고 왕위계승권을 차지한 것이다. 그리고 598년 12월에 위덕왕이 죽자, 마침내 혜왕은 왕위에 올랐다.

 

이 때 혜왕은 일흔이 넘는 노인이었다. 비록 왕좌를 탐하여 조카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지만, 그도 세월의 힘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왕위에 오른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이듬해에 그는 생을 마감하였다. 

 

  

 

제29대 법왕 실록

(?~서기 600년, 재위:서기 599년 12월~ 600년 5월, 5개월)

 

왕권 강화를 위해 불제자를 자처한 법왕

법왕은 혜왕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선 또는 효순이다. 599년 혜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으며, 그는 이미 혜왕 시절부터 왕권을 행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위덕왕이 죽고, 혜왕이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실제 위덕왕의 태자 아좌를 제거하고, 왕위를 확보한 사람은 효순이었다. 당시 혜왕은 일흔을 넘긴 나이였고, 즉위한 지 채 1년도 안되 죽은것으로 보아, 노환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혜왕은 왕좌를 유지할 입장이 되지 못했고, 50대의 그의 아들인 효순이 아좌태자를 제거하고 왕권을 찬탈한 주범이었을 것이다.

 

사촌인 아좌태자를 죽이고 불법적으로 왕위에 오른 그는 그런 비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불교를 장려했던 모양이다. 법왕이라는 그의 묘호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는 즉위하면서 살생을금하고, 민가에 기르는 매와 새를 놓아주도록 했으며,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도 모두 태워버리도록 지시했다. 말하자면 불교 계율을 국법에 도입하였던 것이다.

 

이는 마치 조선시대 수양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정적인 조신들을 대거 참살하고 심지어 형제들까지 죽인 뒤에 불교를 장려했던 것과 유사하다.

 

어쨌던 법왕은 불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였고, 즉위 한 달 만에 왕흥사를 창립하고 승려 30명에게 도첩을 내리는 행사도 거행하였다. 또한 기근이 들었을 때는 칠악사 절간에서 기우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가 이렇듯 불교 진흥에 열을 올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성왕이 전사한 뒤로 백제의 왕권은 극도로 약화되어 있었고, 그런 상황은 위덕왕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혜왕과 법왕이 태자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면서 왕실의 위엄은 더욱 실추되었고, 약화되었다. 법왕은 이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왕권확립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는 불교 계율을 적용하여 신법을 만들고, 신법에 반대하는 정적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법왕의 신법은 채 5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600년 5월에 막을 내렸다. 불교 교리를 국법에 도입한 것도 문제지만, 아좌태자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에 대한 백성들의 비난과 조정 대신들의 반발을 무마시키지 못하고 친위 세력과 정적들간에 벌어진 대립 과정에서 살해된 것으로 판단된다.

 

법왕의 가족 사항은 기록이 없다. 법왕이 살해되고 무왕이 오랫동안 서인으로 살았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 아니라 위덕왕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