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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8 : 백제의 역사 34 (제24대 동성왕)

두바퀴인생 2010. 12. 1. 10:42

 

 

 

한국의 역사 88 : 백제의 역사 34 (제24대 동성왕)

 

제24대 동성왕

동성왕(東城王, ? ~501년, 재위: 479년~501년)은 백제의 제 24대 왕이다. 성은 부여(扶餘), 이름은 모대(牟大)·마모(摩牟)·마제(麻帝)·여대(餘大)이다. 21대 문주왕(文周王)의 아우인 좌평(佐平) 곤지(昆支)의 둘째 아들로서 담력이 있고 활을 쏘는 솜씨가 뛰어났다. 삼근왕 때 일어난 해구(解仇)의 반란을 평정한 뒤 정권을 잡은 진씨(眞氏) 세력에 의해 옹립되어 삼근왕의 뒤를 이었다.

 

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
History of Korea-375.png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
웅진 (476년 ~ 538년
)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1. 三國史記 券第二十八 百濟本記 第六

생애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491년(동성왕 3년)에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한 고구려말갈의 연합군을, 신라가야와 연합하여 격퇴했으며,

 

 484년(동성왕 6년)에는 중국 남조(南朝)의 유송(劉宋)에도 사신을 보내고자 시도하고, 이듬해인 485년(동성왕 7년)에는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에도 힘을 쏟았다.

 

488년(동성왕 10년) 백제를 침공한 북위의 기병을 사법명 등을 시켜 격퇴했으며,

 

493년(동성왕 15년) 신라의 왕녀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고,

 

494년(동성왕 16년)과 495년 두 해에 걸쳐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오는 고구려의 군대를 신라와 연합해 격퇴하는 등, 신라와의 동맹을 더욱 돈독히 다졌다.

 

498년에 공물과 세금을 바치지 않는 탐라국(지금의 제주도)을 친히 정벌하고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에 이르렀다가, 탐라국의 항복을 받고 그만두면서 탐라국을 복속시켰다.

 

웅진 천도 이후 계속된 혼란을 수습하는데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말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향락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으며 놀기만 했다.

 

499년(동성왕 21년)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나가자, 궁궐의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을 구제하자는 신하들의 권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500년(동성왕 22년) 봄에 웅진성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짓고 사치스러운 정원을 만들었다. 또한 신하들이 간언하는 것을 귀찮아하며 궁궐의 문까지 닫아버릴 정도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501년(동성왕 23년) 겨울 음력 11월, 사냥을 나갔다가 폭설을 만나 근처에서 머무르던 중, 왕의 정책에 반발을 한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에게 살해당했다. 시호(諡號)는 동성왕(東城王)이다.

 

무령왕과의 관계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측의 저서인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곤지의 둘째 아들이고 동성왕의 동생이라고 한다. 한편 그의 딸 보과부인은 신라 법흥왕의 후궁이 되었고 남모의 외조부가 된다.

 

가계

  • 아버지 : 곤지(昆支)
  • 아들 혹은 이복형 : 무령왕 사마(武寧王 斯麻)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령왕이 아들이지만, 다른 문서를 검토하면 무령왕은 배다른 형이다. [1]
  • 왕후 : 왕후 - 신라 이찬 비지의 딸
  • 딸 : 보과공주 - 신라 법흥왕의 후궁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왕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온조왕(溫祚王) 온조(溫祚)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2 다루왕(多婁王) 다루(多婁) 기원후 28년 ~ 77년 온조왕의 아들.
3 기루왕(己婁王) 기루(己婁) 77년 ~ 128년 다루왕의 아들.
4 개루왕(蓋婁王) 개루(蓋婁) 128년 ~ 166년 기루왕의 아들.
5 초고왕(肖古王) 초고(肖古) 166년 ~ 214년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6 구수왕(仇首王) 구수(仇首) 214년 ~ 234년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7 사반왕(沙伴王) 사반(沙伴) 234년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8 고이왕(古爾王)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234년 ~ 286년 개루왕의 차남.
9 책계왕(責稽王) 책계(責稽) 286년 ~ 298년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10 분서왕(汾西王) 분서(汾西)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아들.
11 비류왕(比流王) 비류(比流) 304년 ~ 344년 구수왕의 차남.
12 계왕(契王) 계(契) 344년 ~ 346년 분서왕의 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초고(肖古), 여구(餘句) 346년 ~ 375년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14 근구수왕(近仇首王) 구수(仇首), 수(須)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아들.
15 침류왕(枕流王) 침류(枕流) 384년 ~ 385년 근구수왕의 장남.
16 진사왕(辰斯王) 진사(辰斯) 385년 ~ 392년 근구수왕의 차남.
17 아신왕(阿莘王) 아신(阿莘) 392년 ~ 405년 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腆支王)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405년 ~ 420년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久爾辛) 420년 ~ 427년 전지왕의 아들.
20 비유왕(毗有王) 비유(毗有), 여비(餘毗) 427년 ~ 455년 구이신왕의 아들.
21 개로왕(蓋鹵王) 경사(慶司), 여경(餘慶) 455년 ~ 475년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22 문주왕(文周王) 모도(牟都), 여도(餘都) 475년 ~ 477년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23 삼근왕(三斤王) 삼근(三斤) 477년 ~ 479년 문주왕의 아들.
24 동성왕(東城王) 동성왕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479년 ~ 501년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무령왕 사마(斯麻), 여융(餘隆) 501년 ~ 523년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26 성왕(聖王) 성왕 명농(明襛) 523년 ~ 554년 무령왕의 아들.
27 위덕왕(威德王) 위덕왕 창(昌) 554년 ~ 598년 성왕의 장남.
28 혜왕(惠王) 혜왕 계(季) 598년 ~ 599년 성왕의 차남.
29 법왕(法王) 법왕 선(宣), 효순(孝順) 599년 ~ 600년 혜왕의 아들.
30 무왕(武王) 무왕 장(璋), 서동 600년 ~ 641년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31 의자왕(義慈王) 의자 641년 ~ 660년 무왕의 아들.

 

 

 

 

 

 

제24대 동성왕 실록

(?~ 서기 501년, 재위:서기 479년 11월~ 501년 11월, 22년)

 

동성왕의 강단 있는 정치와 되찿은 옛 명성

동성(東城)왕은 비유왕의 아들이자 개로왕과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차남이며, 이름은 모대(혹은 마모)이다. 462년에 어린 나이로 아버지 곤지를 따라 왜에 갔으며, 478년 4월에 백제 조정의 요청을 받은 왜왕 웅략천황에 의해 백제 왕에 천거되어 귀국하였다. 귀국 후 삼근왕이 살아 있엇던 까닭에 비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다가, 479년 11월에 삼근왕이 죽자, 백제 제24대 왕에 올랐다.

 

동성왕 초기에는 진씨 세력에 의해 조정이 움직였는데, 해구에 대항하여 반군을 일으킨 진남이 병권을 쥐고 병관좌평에 올라 있었고, 해구의 목을 친 진로가 덕솔로서 군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재위 4년(482년)에는 진로가 병관좌평에 올랐는데,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진남은 상좌평으로 승격된 듯하다.

 

진로는 그로부터 동성왕 재위 19년까지 약 15년 동안 병관좌평에 머무르면서 군권을 장악하고 잇었는데, 이 때까지는 진씨 정권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진씨 이외에도 조정의 중추 세력으로 등장한 세력이 있었는데, 이들은 싸(沙)씨, 백씨, 연씨 등이다.

 

이는 동성왕 6년에 내법좌평 사약사를 남제에 보내 조공하려 하였고, 8년에 백가를 위사좌평에 임명하엿으며, 19년에는 달솔로 있던 연돌을 병관좌평에 임명한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수서>에 백제는 큰 성씨로 사, 연, 리, 해, 정, 국, 목, 백씨 등이 있었다고 한다. 사,연씨는 동성왕을 전후하여 성장한 성씨이다. 해,연씨는 온조 일행이 망명해올 때 함께 온 부여 출신 성씨로 해씨는 온조왕 본가 쪽 성씨이고, 연씨는 외가 쪽 성씨이다. 리, 정, 백, 사씨 등은 마한 본토배기 출신이며, 목, 국씨는 왜에서 건너온 듯하다. 그런데 이 여덟 성씨 중에 진씨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 동성왕 이후에 진씨 일족이 몰락했음을 의미한다. 동성왕 19년에 진로가 죽은 뒤로 <삼국사기>에 진씨 일족의 이름이 전혀 거론되지 않는 것도 그 점을 증명해주고 있다.

 

재위 19년에 진로의 후임으로 연돌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통해 이 무렵부터 동성왕이 진씨 일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성왕은 즉위 이후 줄곧 백제의 옛 명성을 되찿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때문에 여러 번 전쟁을 치러야 했다. 첯 전쟁은 일방적으로 당한 싸움이었다. 재위 4년 9월에 말갈이 한산성(남한산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 3백여 호를 포로로 잡아갔다.

 

당시 백제는 정치와 군사 모두가 불안한 상태였기에 말갈을 공격할 힘이 없었다. 때문에 동성왕은 이듬해 봄에 직접 한산성으로 가서 열흘 동안 머무르며 군사와 백성을 안심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동성왕은 궁실과 성곽을 보수하고 외침에 대비했다. 그 무렵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선비의 탁발 씨가 세운 북위와 마찰을 일으켜, 전쟁으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싸움의 원인은 아마도 백제가 대륙 영토를 회복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토 회복에 주력하던 동성왕은 개로왕 대까지만 해도 백제 영토였던 산동성 지역의 옛 대방 땅을 장악했을 것이고, 그 곳을 지배하고 있던 북위는 488년에 대방 땅에서 백제를 몰아내기 위해 군사를 동원했을 것이다.

 

북위가 쳐들어오자 동성왕은 저근, 양무 등의 장수를 보내 방어전을 펼친 끝에 북위 군대를 막아냈다. 북위를 패퇴시킨 동성왕은 남제에 표를 올려 전공을 세운 장수에게 관직을 내려 줄 것을 요청하여 뜻을 이뤘다.

 

북위는 490년에 다시 한 차례 공격을 가해왔다. 이번에는 수십만 기병을 앞세우고 기세좋게 쳐들어왔지만, 백제 장수 사법명 등의 전술에 말려 참담한 패배를 안고 퇴각해야만 했다.

 

이 사건 이후 백제의 힘은 막강해졌다. 그래서 재위 15년(493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할 왕녀를 요청했다. 이미 정비와 후비를 거느리고 있던 상황에서 다른 나라의 왕녀를 요청했다는 것은 그만큼 백제의 힘이 강성해졌다는 뜻인데, 신라도 그 점을 인정하여 이찬 비지의 딸을 동성왕에게 시집보냈다.

 

494년에는 신라가 고구려의 살수까지 진격하여 한바탕 싸움을 벌였는데, 이 싸움에서 신라가 패배하여 퇴각하였다. 그리고 퇴각하던 신라군이 견아성에서 고구려군에게 포위되어 일대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 때 동성왕은 군사 3천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구원해냈다. 이 때문에 이듬해 고구려가 백제 치양성을 공격해 왔을 때 신라군과 연합하여 막아냈다.

 

이렇듯 안팎으로 힘을 과시한 동성왕은 495년에 또 한 차례 남제에 표를 올려 북위와 싸움에서 전공을 세운 휘하 장수들에게 벼슬을 내려 줄 것을 간청하였다. 사법명을 포함한 백제의 장수들은 북위를 물리친 뒤에 대륙의 땅을 상당부분 회복하여 다스리고 있었는데, 남제의 황제가 그들에게 벼슬을 내려 그 곳이 백제의 땅임을 확인시키려 했다.

 

남제 황제는 동성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등에게 왕 또는 태수, 장군 등의 작호를 내려주었다.

 

재위 20년에 탐라(제주도)에서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자, 동성왕은 자신이 직접 탐라를 다스리겠다며 군대를 이끌고 무진주(광주)로 향했다. 이는 군왕의 위엄을 보이고자 시도한 것으로 탐라에서는 미리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이 달려와 사죄하였다.

 

왕권이 확립되었음을 확인한 동성왕은 이 때부터 사치스런 면모를 드러내면서 거만한 행동으로 돌변하였다. 499년 여름 큰 가믐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사태가 일어나고, 백성 2천 명이 고구려로 달아나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동성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궐 동쪽에 8미터 높이의 임류각을 세우고, 그 주변에 연못을 만들어 기이한 짐승을 기르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간관들이 이에 항의하여 글을 올렸지만, 동성왕은 듣지 않고 대궐 문을 닫아 버렸다. 또 우두성으로 사냥을 다니며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측근들과 임류각에서 밤새 연회를 벌이는 등 오로지 즐기는데 열중하였다.

 

또 신라에 대해서도 거만한 태도를 보이면서 위세를 부리자  서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에 신라에서는 백제 정벌론이 대두되었고, 이를 눈치챈 동성왕은 탄현에 목책을 세우고 가림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했다.

 

하지만 사치스런 행동은 그치지 않았다. 정사는 뒷전이요 사냥이나 다니면서 즐기기만 했다. 501년 겨울에는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을 하다가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에 머물러야 했다. 

 

이 때 백가라는 인물이 칼로 동성왕을 살해함으로써, 동성왕은 비명에 생을 마감하였다.

 

백가는 동성왕 8년에 위사좌평에 임명되었고, 23년 8월에 가림성 성주로 임명되어 그 곳으로 떠나야 했다. <삼국사기>는 이 때 백가가 가림성으로 가기 싫어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했으나 동성왕은 억지로 그를 가림성으로 보냈고, 이 때문에 백가는 동성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사냥 중에 길이 막혀 마포촌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림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동성왕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동성왕의 학정에 못이겨 국인이 살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단순한 원한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 학정을 견디다 못해 나라를 아끼는 마음에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 때 동성왕이 정사를 제쳐놓고 주색에 빠져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일본서기>의 기록이 신빙성이 있다. 즉 백가가 군대를 동원하여 개인적인 원한보다는 왕의 학정에 대항하는 측면이 더 강했다는 것이다.

 

동성왕의 가족관계는 자세하지 않다. 그가 이십대 초반까지 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첯 부인은 왜국 여자일 가능성이 높다. 귀국한 뒤에 진씨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째 부인은 진씨일 것이며, 재위 15년에 신라의 이찬 비지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으므로 적어도 부인이 세 명 이상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적고 있으나, <일본서기>는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의 앞뒤를 보아 무령왕은 동성왕의 아들이 아니라 개로왕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세 명의 부인을 고려할 때 아들도 여럿 있었을 것이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북위와의 전쟁 배경

북위와 백제가 싸운 이유에 대해서는 어느 사서도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분석해보면, 그 내막을 대충 알 수 있다.

 

동성와은 즉위 후 줄곧 백제의 옛 명성을 되찿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잃었던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지론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백제의 땅 중에서 가장 크게 잃은 곳이 역시 대방 지역의 대륙 영토였다. 한반도에서도 한강 북쪽 땅 일부를 고구려에 빼앗기기 했지만, 그것은 그다지 넓지가 않았다. 하지만 백제의 대륙 영토는 발해와 황해의 해안선을 따라 요서 지역에서 양지강에 이르는 광활한 땅이었다. 고이왕이 대륙을 개척한 이래, 근초고왕 대를 거치면서 크게 확대된 백제의 땅은 아신왕 대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에게 대폭 빼앗겼고, 다시 개로왕 대에 장수왕에게 한성이 함락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영토마저도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동성왕은 어떻게 해서던지 잃었던 대륙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옛 영화를 되찿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여러 모로 그것의 실현을 강구했을 법하다. 그런데 당시 대륙백제의 영토는 거의 북위가 소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백제는 북위에게 그 영토의 일부만이라도 돌려달라고 했을 공산이 크다.

 

백제가 옛 영토를 돌려 달라고 하자 북위는 당연히 어림없는 일이라고 일축했을 것이다. 이에 백제는 486년 3월에 북위의 라이벌인 남제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백제가 남제와 결탁하여 대방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아가서는 요서 지역의 옛 땅을 회복하려 하자, 북위는 무력으로 백제를 응징하려 했다. 그래서 488년에 백제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백제군의 강력한 방어진을 뚫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삼국사기>는 이 때의 일을 동성왕 10년 기사에서 '위나라가 우리를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는 짧은 문장으로 처리하고 있다. 중국 대륙 북방을 장악하고 있던 위나라가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위치한 백제를 침략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편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바다 건너편에 있는 위나라가 백제를 침략했다면, 당연히 배를 타고 공격해와야 하는데, 전혀 그런 내용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2년 뒤 사건을 기록한 <남제서>의 다음 기록은 <삼국사기>의 편자들을 한층 더 혼란스럽게 했을 것이다.

 

'위나라 오랑캐가 기병 수십만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했는데, 그 경계 안으로 들어가니, 모대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 군대를 통솔시켜, 오랑캐의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물리쳤다.'

 

수군도 아닌 기병이, 그것도 수십만이 백제를 쳐들어 왔다면, 그것은 필시 대륙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중국 대륙에 백제의 땅이 있었다는 뜻인데, <삼국사기> 편자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삼국사기> 편자들은 490년에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을 잘못된 것으로 보고, 아예 삭제해버렸다. 백제의 땅이 대륙에, 그것도 요서 지역에서 양자강에 이를 만큼 광활한 영토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처사였는지도 모른다. 과연 그들은 대륙백제를 정말 몰랐을까? 모든 것은 신라인 출신의 김부식에 의해 삭제되거나 축소되었고 없었던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제가 멸망 후 통일신라에 의해 백제의 역사는 폐기되거나 축소되었으며 한반도의 조그만한 국가로 격하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편자들의 한정된 시각은 고스란히 현대 사학계에도 이어져, 20년 전만 하더라도 대다수의 학자들이 이 기록을 잘못된 사료라고 해석했으니, 통일신라 이후 형성된 한반도사관의 깊은 골은 대륙 백제의 역사를 무려 1300년 동안 땅 속에 묻어버렸던 셈이다.

 

하지만 <남제서>는 당시의 일을 동성왕이 건무 2년(495년)에 올린 표문에서 잘 나타나 있다. 

 

'신은 예로부터 책봉을 받고 대대로 조정의 영예를 입으며, 분에 넘치게도 하사하신 부절과 도끼를 받아들고 여러 제후들을 극복하여 물리쳤습니다. 지난번 저근 등이 나란히 관작을 재수받은 은총을 입은 것으로 신과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지난 경오년(490년)에 험윤이 회계를 하지 않고 병사를 일으켜 깊숙히 핍박하여 들어왓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맞아 토벌하매, 밤중에 불시에 공격하여 번개같이 쳐들어가니, 흉노의 선우가 당황하여 무너지는 것이 마치 바닷물에 쓸려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적이 패주하는 기회를 타고 추격하여 머리를 베니, 들녘은 엎어진 주검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동성왕의 표문은 이처럼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때 쳐들어온 위나라의 군대를 수십만 기병이라고 명시한 것은 <남제서>의 편자들이었고, 동성왕은 그저 '험윤이 병사를 일으켜'라고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표문에서 드러난 사실로 이 때의 위나라의 침입은 처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험윤이 회개하지 않고 병사를 일으켜'라는 부분과 '지난번 저근 등의 관작을 제수받은 은총을 입은 것으로'라는 부분이 그 점을 증명하고 있다. 전자는 험윤이 이미 첯 침입에서 패배하였는데 반성하지 않고 또 침입을 감행했다는 뜻이며, 후자는 이 때 첯 침입을 막아낸 장수가 저근이었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 동성왕 10년(488년)의 '위나라가 우리를 침범했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남제서> 490년 경오년 기록과 중복되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다. 즉 위나라의 백제 침공은 488년과 490년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는 것이다.

 

동성왕이 표문을 올린 이유는 국제적인 공인을 맏기 위함이며 490년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남제의 황제가 직접 관작을 내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지금 나라가 고요하고 평온한 것은 사법명 등의 책략이 결실을 맺은 것이니, 그 공훈을 찿아 마땅히 기리고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매라왕으로 임시하고,찬류수를 행안국장군벽중왕으로 삼고, 해례곤을 행무위장군불중후로 삼으며, 목간나는 앞서 군공이 있는 대다 또한 누선을 쳐빼앗았으니 행광위장군면중후로 삼았습니다, 엎드러 원하건대 천자의 은혜로 특별히 가엾게 여기시고 청을 들어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신이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 태수 겸 장사 신 모유와 행건무장군 성양 태수 겸 사마 신 왕무 및 겸참군행진무장군 조선 태수 신 장색, 그리고 행양무장군 진명 등은 관직이 있으면서 사사로움을 잊고 오로지 임무를 공변되게 하며,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을 이행함에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제 신의 사신으로 임명함에 거듭되는 험난을 무릅쓰고 다니며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진실로 마땅히 관직을 올려줘야 함에 각기 행(行)으로 임명하여 임시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조정에서 특별히 관작을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내용에서도 위나라의 침입이 처음이 아니라는 대목은, '목간나는 앞서 군공이 있는 데다'라는 부분이 그것이다. 즉 목간나도 저근과 같이 위나라의 1차 침입을 막아낸 장수라는 것이다. 또한 목간나가 위나라의 '누선을 쳐 빼앗았다.'는 것은 위나라가 수군도 동원하였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동성왕이 올린 관작에는 모두 행자가 붙어 있는데, 이는 이는 임시직책이라는 뜻이다. 즉 관작은 황제가 내리는 것이기에 행자를 붙인 것이며 황제가 정식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남제의 황제는 '조서로써 허락하고 나란히 군호를 하사하였다.'고 <남제서>는 기록하고 있다.

 

동성왕의 표문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관작에 포함된 지명이다. 표문에서 동성왕은 행건위장군 광양 태수 겸 장사로 있던 고달을 행용양장군 대방 태수로, 행건위장군 조선 태수 겸 사마에 있던 양무를 광릉 태수로, 회매는 청하 태수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또 모유의 관작에 낙랑 태수, 양무의 관작에 성양 태수 등의 호칭이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보이는 광양, 광릉, 대방, 조선, 청하, 낙랑, 성양 등의 지명은 이미 밝혔듯이 낙랑은 하북성 발해 연안, 대방은 산동반도와 그 남쪽에 비정한 바 있으므로, 이 지명들은 모두 중국 대륙, 그것도 요서 지방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중국 해안 지역에서 찿아야 할 것이다. 짐작컨데 대방은 지금의 산동 지역, 낙랑은 그 북쪽, 조선은 낙랑 북쪽의 요서 지역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서하.서양.광릉.광양.청하 등은 강소성 지역에 자리한 백제 땅으로, 서하는 회수 주변, 광양과 광릉, 성양은 양자강 남북의 양주와 상주 일대, 청하는 양주 북쪽의 청강 지역을 비정한다. 즉 일곱 개의 지명은 백제가 영유권을 행사하던 대륙백제의 땅이라는 뜻이다.

 

또 표문에는면중왕, 도하왕, 아착왕, 매라왕, 백중왕 등의 작호가 보인다. 동성왕의 이런 요구는 대륙백제의 지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조처였을 것이다. 왕의 관작을 받은 이들은 대륙백제를 나누어 다스리는 총독같은 역활을 하고, 해례곤과 목간나, 여고 등은 불중후와 면중후, 불사후로 그들을 보좌하고, 낙랑.조선.성양.광릉.대방.광양 태수들이 그들 아래에서 대륙백제의 각 행정 지역을 맡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남제 황제가 내린 관작이 필요했던 것도 대륙에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북위의 군대를 몰아내고 대륙백제의 고토를 회복한 장수들은 동성왕대의 대륙백제를 다스리는 총독으로서, 왕과 같은 역활을 했다는 뜻이다.

 

이렇듯 백제는 두 차례에 걸친 위나라의 침공을 물리치고 대륙 영토의 상당부분을 회복하고, 국제무대에서도 그 영유권을 인정받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