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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87 : 백제의 역사 33 (제23대 삼근왕) 본문
한국의 역사 87 : 백제의 역사 33 (제23대 삼근왕)
삼근왕(三斤王, 465년?~479년, 재위: 477년~479년)은 백제의 제23대 왕이다. 임걸(壬乞)이라고도 하며 문주왕의 맏아들이다. 《삼국유사》에는 삼걸왕(三乞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 즉위했을 때의 나이가 13세에 불과하였으므로 좌평 해구(解仇)에게 국정을 위임하였다.
기원전 18년 ~ 66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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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 |
공용어 | 고대 한국어 |
수도 |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
정치체제 | 군주제 |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
76만호(3,800,000명 추정) |
성립 | 기원전 18년 |
멸망 | 660년 |
초대 군주 |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
최후 군주 | 의자왕 641년 ~ 660년 |
성립 이전 | 마한, 부여 |
해체 이후 | 신라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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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478년 봄에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燕信)과 함께 대두성(大豆城)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왕은 좌평 진남(眞男)에게 군사 2000를 주어 대두성을 공격하고 덕솔(德率) 진로(眞老)에게 군사 500명을 주어 해구를 추격해 죽이게 했다.
그리고 공모자 연신이 고구려로 도주하자 그의 3족을 멸해 거리에 매달았다.
재위 3년인 479년 봄과 여름에는 가뭄이 매우 심했고 11월에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전에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던 데 공을 컸던 덕솔 진로에게 도리어 암살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가계
- 부왕 : 문주왕
- 모후 : ?
- 왕후 : ?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 왕호 | 시호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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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온조왕(溫祚王) | 온조(溫祚) |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 |
2 | 다루왕(多婁王) | 다루(多婁) | 기원후 28년 ~ 77년 | 온조왕의 아들. | |
3 | 기루왕(己婁王) | 기루(己婁) | 77년 ~ 128년 | 다루왕의 아들. | |
4 | 개루왕(蓋婁王) | 개루(蓋婁) | 128년 ~ 166년 | 기루왕의 아들. | |
5 | 초고왕(肖古王) | 초고(肖古) | 166년 ~ 214년 |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 |
6 | 구수왕(仇首王) | 구수(仇首) | 214년 ~ 234년 |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 |
7 | 사반왕(沙伴王) | 사반(沙伴) | 234년 |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 |
8 | 고이왕(古爾王) |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 234년 ~ 286년 | 개루왕의 차남. | |
9 | 책계왕(責稽王) | 책계(責稽) | 286년 ~ 298년 |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 |
10 | 분서왕(汾西王) | 분서(汾西) | 298년 ~ 304년 | 책계왕의 아들. | |
11 | 비류왕(比流王) | 비류(比流) | 304년 ~ 344년 | 구수왕의 차남. | |
12 | 계왕(契王) | 계(契) | 344년 ~ 346년 | 분서왕의 아들. | |
13 | 근초고왕(近肖古王) | 초고(肖古), 여구(餘句) | 346년 ~ 375년 |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 |
14 | 근구수왕(近仇首王) | 구수(仇首), 수(須) | 375년 ~ 384년 | 근초고왕의 아들. | |
15 | 침류왕(枕流王) | 침류(枕流) | 384년 ~ 385년 | 근구수왕의 장남. | |
16 | 진사왕(辰斯王) | 진사(辰斯) | 385년 ~ 392년 | 근구수왕의 차남. | |
17 | 아신왕(阿莘王) | 아신(阿莘) | 392년 ~ 405년 | 침류왕의 아들. | |
18 | 전지왕(腆支王) |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 405년 ~ 420년 | 아신왕의 아들. | |
19 | 구이신왕(久爾辛王) | 구이신(久爾辛) | 420년 ~ 427년 | 전지왕의 아들. | |
20 | 비유왕(毗有王) | 비유(毗有), 여비(餘毗) | 427년 ~ 455년 | 구이신왕의 아들. | |
21 | 개로왕(蓋鹵王) | 경사(慶司), 여경(餘慶) | 455년 ~ 475년 |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 |
22 | 문주왕(文周王) | 모도(牟都), 여도(餘都) | 475년 ~ 477년 |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 |
23 | 삼근왕(三斤王) | 삼근(三斤) | 477년 ~ 479년 | 문주왕의 아들. | |
24 | 동성왕(東城王) | 동성왕 |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 479년 ~ 501년 |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
25 | 무령왕(武寧王) | 무령왕 | 사마(斯麻), 여융(餘隆) | 501년 ~ 523년 |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
26 | 성왕(聖王) | 성왕 | 명농(明襛) | 523년 ~ 554년 | 무령왕의 아들. |
27 | 위덕왕(威德王) | 위덕왕 | 창(昌) | 554년 ~ 598년 | 성왕의 장남. |
28 | 혜왕(惠王) | 혜왕 | 계(季) | 598년 ~ 599년 | 성왕의 차남. |
29 | 법왕(法王) | 법왕 | 선(宣), 효순(孝順) | 599년 ~ 600년 | 혜왕의 아들. |
30 | 무왕(武王) | 무왕 | 장(璋), 서동 | 600년 ~ 641년 |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
31 | 의자왕(義慈王) | 의자 | 641년 ~ 660년 | 무왕의 아들. |
제23대 삼근왕 실록
(서기 465년~ 479년, 재위:서기 477년 9월~ 479년 11월, 2년 2개월)
세 근(斤)짜리 어린 삼근왕의 서글픈 치세
삼근(三斤, 혹은 임걸(壬乞), 일본서기에는 문근(文斤)으로 기록)왕은 문주(文周)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477년 4월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477년 9월에 문주왕이 해구에게 살해되자 13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군권과 조정을 모두 병관좌평 해구(전지왕대의 해구와 다른 인물)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왕권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해구의 정권 장악은 곧 모든 권력이 외척인 해씨 가문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뜻인데, 이는 다른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유력한 호족 세력으로 한때 가장 힘있는 외척 중의 하나였던 진씨 세력에겐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진씨 세력은 고이왕 대에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여 아신왕 대까지 약 160년간 유력한 외척으로 백제 조정을 장악했었다. 하지만 전지왕 등극 과정에서 몰락하여 해씨 세력에게 권좌를 내주고 정권의 뒷면으로 사라졌는데, 마침내 과거의 영화를 되찿을 기회를 맞게 된 것이다.
해씨가 정권을 주도하고 있던 중에 개로왕이 죽어 한성이 몰락하였고, 그 이후에 해구가 정권을 장악하고 내신좌평 곤지와 문주왕을 죽이고 어린 삼근을 허수아비로 앉혀놓자, 백성들과 여타 귀족들은 해씨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488년 2월에 진씨 세력의 거두인 좌평 진남이 병력 2천을 일으켜 궁성을 장악하였고, 다급해진 해구는 은솔 연신과 함께 백강(금강) 북쪽으로 달아나 대두성(현재 공주시 사곡면 무성산성)에 거점을 형성하고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진씨 세력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진남은 덕솔 진로의 정예병 5백을 앞세워 대두성을 홤락시키고 해구를 죽이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해구 편에 섰던 은솔 연신은 패색이 짙어지자 고구려로 달아났고, 그의 처자들은 체포되어 웅진 저잣거리에서 참수되었다.
어린 삼근왕은 이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며 구경만 해야 했다.
<삼국사기>는 좌평 진남이 혁명군을 일으켜 연신의 군대를 대두성으로 몰아냈을 때, 삼근왕이 대두성에 대한 공격을 명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진남이 혁명을 일으킬 때 이미 삼근왕의 신변을 확보한 상태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삼근왕은 오래 살지 못했다. 진남이 혁명에 성공하자 이듬해 11월에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그가 이렇듯 어린 나이에 죽은 것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말하자면 그는 살해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