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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77 : 백제의 역사 23 (제14대 근구수왕)

두바퀴인생 2010. 11. 20. 01:09

 

 

한국의 역사 77 : 백제의 역사 23 (제14대 근구수왕)

 

제14대 근구수왕

근구수왕(近仇首王, ? ~ 384년, 재위 : 375년 ~ 384년)은 백제의 제14대 왕이다. 근초고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삼국사기》,《양서(梁書)》에는 수(須), 《신찬성씨록》에는 귀수(貴首) 또는 근귀수(近貴首)로 《속일본기》(續日本紀)에는 귀류(貴流) 또는 구소(久素)로 기록되어 있다.

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
History of Korea-375.png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1. 三國史記 券第二十八 百濟本記 第六

   

생애

즉위전 인 369년 가을 음력 9월에 고구려고국원왕 사유(故國原王 斯由)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자 반걸양(半乞壤)의 치양성(雉壤城)에서 싸워 이들을 격퇴하고 추격해 수곡성(水谷城)까지 영토를 넓혔다.

 

다음 372년에는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였다.

 

375년 11월에 왕위를 이은 후도 고구려와는 교전을 계속하여 선대의 근초고왕이 교류한 동진(東晉)과 화합하여 고구려하고 대립하는 외교 태세를 유지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기에는, 379년 3월에 동진에 조공 하려고 했지만 해상에서 폭풍을 맏아, 되돌려 왔다고 하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고, 양서(梁書) 백제전에서는 '동진 태원(太元)년간(376년 ~ 396년)에 백제왕 수(須)가, …중략… 생구(生口, 노예)를 헌상 했다' 라는 기록되어 있다.

 

재위 9년째에 384년 4월에 사망하였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왕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온조왕(溫祚王) 온조(溫祚)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2 다루왕(多婁王) 다루(多婁) 기원후 28년 ~ 77년 온조왕의 아들.
3 기루왕(己婁王) 기루(己婁) 77년 ~ 128년 다루왕의 아들.
4 개루왕(蓋婁王) 개루(蓋婁) 128년 ~ 166년 기루왕의 아들.
5 초고왕(肖古王) 초고(肖古) 166년 ~ 214년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6 구수왕(仇首王) 구수(仇首) 214년 ~ 234년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7 사반왕(沙伴王) 사반(沙伴) 234년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8 고이왕(古爾王)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234년 ~ 286년 개루왕의 차남.
9 책계왕(責稽王) 책계(責稽) 286년 ~ 298년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10 분서왕(汾西王) 분서(汾西)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아들.
11 비류왕(比流王) 비류(比流) 304년 ~ 344년 구수왕의 차남.
12 계왕(契王) 계(契) 344년 ~ 346년 분서왕의 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초고(肖古), 여구(餘句) 346년 ~ 375년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14 근구수왕(近仇首王) 구수(仇首), 수(須)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아들.
15 침류왕(枕流王) 침류(枕流) 384년 ~ 385년 근구수왕의 장남.
16 진사왕(辰斯王) 진사(辰斯) 385년 ~ 392년 근구수왕의 차남.
17 아신왕(阿莘王) 아신(阿莘) 392년 ~ 405년 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腆支王)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405년 ~ 420년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久爾辛) 420년 ~ 427년 전지왕의 아들.
20 비유왕(毗有王) 비유(毗有), 여비(餘毗) 427년 ~ 455년 구이신왕의 아들.
21 개로왕(蓋鹵王) 경사(慶司), 여경(餘慶) 455년 ~ 475년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22 문주왕(文周王) 모도(牟都), 여도(餘都) 475년 ~ 477년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23 삼근왕(三斤王) 삼근(三斤) 477년 ~ 479년 문주왕의 아들.
24 동성왕(東城王) 동성왕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479년 ~ 501년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무령왕 사마(斯麻), 여융(餘隆) 501년 ~ 523년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26 성왕(聖王) 성왕 명농(明襛) 523년 ~ 554년 무령왕의 아들.
27 위덕왕(威德王) 위덕왕 창(昌) 554년 ~ 598년 성왕의 장남.
28 혜왕(惠王) 혜왕 계(季) 598년 ~ 599년 성왕의 차남.
29 법왕(法王) 법왕 선(宣), 효순(孝順) 599년 ~ 600년 혜왕의 아들.
30 무왕(武王) 무왕 장(璋), 서동 600년 ~ 641년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31 의자왕(義慈王) 의자 641년 ~ 660년 무왕의 아들.

 

 

 

 

 

 

제14 근구수왕 실록

(?~서기 384년, 재위:서기 375년 11월~ 384년 4월, 8년 5개월)

 

호방한 성격의 근구수왕과 숙적 고구려

근구수왕은 근초고왕의 아들이며 왕비 진씨 소생으로, 375년 11월에 근초고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가 그를 장남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는 근초고왕의 맏아들은 아니다. 이름은 '휘수諱須)'인데, 풀이하자면 '감히 수를 칭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수(須)'란 제6대 왕인 구수왕을 일컫는다. 즉, 구수왕의 이름을 쓰고 있으나 감히 그렇게는 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역설적으로 구수왕의 혈통이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구수왕 2세를 의미하는 근구수왕이라는 묘호와도 일맥 상통하는 이름이라 하겠다.

 

근구수왕은 태자 시절부터 많은 활약을 했다. 근초고왕 24년(369년)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치양에 쳐들어 왔을 때, 고구려에 망명했던 백제인 사기의 도움으로 고구려 정예병 5천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기도 했고, 371년에 평양성 공격에도 참여하여 군대를 지휘했다.

 

<위서>에 나오는 개로왕이 북위에 올린 표문에 보면 '신의 조상 수(須)께서 군사를 정비하고 번개같이 나아가 기회를 포착하고 달려가 공격하여 화살과 돌이 잠시간 오가더니 소의 머리를 베어 매달았습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서 개로왕이 언급한 '수'는 바로 근구수왕이며, '소'는 고국원왕이다. 표현이 과장되긴 했지만, 고국원왕이 백제와 전쟁을 치렀다 죽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개로왕이 근초고왕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근구수왕의 이름을 들먹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이 내용은 371년 평양성 공격의 주역은 근초고왕이 아니라 근구수왕이었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에도 근초고왕이 '태자와 함께' 평양성을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평양성 공략은 실질적으로 지휘했던 사람은 근초고왕이 아니라 근구수왕이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이런 사실은 근구수왕의 무예가 뛰어나고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던 왕이었음을 방증한다. 이를 증명하듯 근구수왕은 재위 3년(377년)에 다시 한 번 평양성 공략에 나섰다. 이는 375년에 빼앗긴 수곡성을 탈환함과 동시에 376년 11월의 고구려 침략을 응징하기 위한 조치였다.

 

평양성 공격은 그해 10월에 실시되었는데, 음력 10월이면 이미 겨울로 접어든 때였다. 371년 고국원왕을 죽일 때도 겨울로 접어든 시기로 음력 10월에 공격을 시도했는데, 이번에도 같은 시기를 택했다. 10월은 추수가 끝나고 농한기로 접어드는 때로 충분한 군량과 군사가 확보되는 시점이었다. 반면에 고구려엔 전염병이 돌고, 가믐이 계속되고 있었다.

 

근구수왕이 이끌고 간 병력은 3만이었다. 하지만 평양성 함락에는 실패한 듯하다. <삼국사기>에는 이 전쟁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한 달 뒤인 11월에 고구려군이 백제를 공격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말하자면 평양성 공격에 나선 근구수왕은 처음엔 선전하다가 11월에 이르러서는 전세가 불리해져 퇴각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고구려도 전쟁을 치를 형편은 아니었다. 오랫 동안 지속된 가믐과 갑자기 들어닥친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놓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제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틈을 타 거란이 고구려 북쪽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어려움은 고구려만 있는게 아니었다. 백제도 380년에 전염병이 돌았고, 그해 여름에는 땅이 갈라지는 이변이 발생했다. 갈라진 땅의 깊이가 다섯 길, 너비가 세 길이나 되었다고 하니, 가히 두려움에 떨 만한 수준이엇다. 382년에는 백제에도 심한 가믐이 들어 흉년이 지속되자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먹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런 탓에 고구려와 백제 양국은 근구수왕 재위 기간 동안 더 이상의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근구수왕 시대의 내치는 다소 의아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것은 재위 2년에 근구수왕이 자신의 외삼촌 '진고도'를 내신좌평으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는 내용이다. 근초고왕 대에도 역시 진고도의 형제로 보이는 '진정'이 정사를 독점했는데, 근구수왕 대에도 역시 외척인 진고도가 정사를 맡은 것이다.

 

비류왕 대까지만 해도 대개 정사는 왕족들이 주관했다. 외척이 조정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은 근초고왕 대에 와서 처음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근구수왕 대에도 이어진다.

 

이렇듯 <삼국사기>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모두 외척에게 정사를 맡긴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왕은 그들에게 정사를 맡겨두고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 의문은 한반도 백제와 대륙백제로 나뉜 당시의 백제 영토 관리 체제를 이해해야만 풀린다. 한반도 백제는 당시 외척인 진씨 일족들에게 맡기고, 대륙백제는 왕이 직접 다스리는 형태를 이해해야만 <삼국사기>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군구수왕도 왕위에 오른 뒤로는 근초고왕이 그랬듯이 한반도 백제는 외척인 진씨 일족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대륙백제의 정사를 주관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근구수왕 대의 대외 관계는 대개 고구려는 적대하고 나머지 대국인 동진은 우대하고, 신라와 가야 및 왜와는 평화를 구축하는 형태였다. 말하자면 고구려를 최대의 라이벌로 삼아 영토 싸움을 지속하고, 나머지 국가와는 화친하여 고구려와의 패권 다툼에서 우위를 지키려 했던 것이다.

 

그런 근구수왕의 치세는 그리 길지 못햇다. 그는 재위 10년째인 384년 4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죽기 두 달 전에 대궐 뜰에 있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죽음이 예고된 상태였고, 오렛동안 지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근구수왕에 대해선 왕비의 이름이 남아 있다. 그의 왕비는 아이부인으로 맏아들 침류왕의 어머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녀가 어느 성씨 출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당시 유력한 외척이던 진씨 일족일 가능성이 높다. 자식은 침류왕 이외에도 진사왕이 후비 소생의 배다른 차남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