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58 : 백제의 역사 4 (제1대 온조왕) 본문

카테고리 없음

한국의 역사 58 : 백제의 역사 4 (제1대 온조왕)

두바퀴인생 2010. 11. 2. 02:02

 

 

 

한국의 역사 58 : 백제의 역사 4 (제1대 온조왕)

 

 
제1대 온조왕

 

온조왕(溫祚王, ? ~28년, 재위 :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은 백제의 시조이다. 아버지는 고구려인 우태이며, 어머니는 동명성왕이 고구려 건국 후 혼인한 소서노이다.

 
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
History of Korea-375.png
375년 백제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위례성 (기원전 18년 ~ 기원전 1년)
한성 (기원전 1년 ~ 476년)
웅진 (476년 ~ 538년)
사비성 (538년 ~ 660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0년 추정
76만호(3,800,000명 추정)
성립 기원전 18년
멸망 660년
초대 군주 온조왕
기원전 18년 ~ 28년
최후 군주 의자왕
641년 ~ 660년
성립 이전 마한, 부여
해체 이후 신라
주석
  1. 三國史記 券第二十八 百濟本記 第六

생애

고구려의 왕자였으나, 동명성왕의 적자 유리부여에서 고구려로 와 태자가 되자 위기를 느껴 형인 비류와 함께 한반도로 남하했다.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자리를 잡았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수도를 정하고 나라의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다. 미추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 살 수 없어 백성들이 위례로 떠나자 비류는 자결했고, 온조는 이들을 받아들인 뒤 나라의 이름을 백제라 하였고, 이 이름은 성왕남부여로 바꿀 때까지의 국호가 되었다. 이때 본래 성(姓)은 (解)였으나,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이후 부여(扶餘)를 성으로 삼았다.

 

백제 건국 설화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상기한 시조 온조설에 입각해 있으나, 백제의 건국에 대해서는 시조 비류설시조 구태설 등 다른 설도 있다.

 

기원전 17년 음력 3월 족부(族父: 왕의 7촌 형제) 을음(乙音)을 우보로 삼았다.

 

기원전 16년 음력 9월에 말갈이 침입해 왔지만, 백제에게 대패해 달아났다. 그 군사력을 바탕으로 기원전 15년에는 동예와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11년에는 말갈의 대대적인 공격이 이루어졌지만, 10일만에 식량이 떨어져 후퇴하다가 온조왕에게 500명이 죽었다.

 

기원전 8년에는 동예의 국경에 목책을 세웠는데, 동예가 말갈과 함께 목책을 부수고 백제인 100명을 죽이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후에 백제는 동예와의 관계를 끊고 목책을 세웠다.

 

기원전 4년에는 도읍을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옮기자 그 틈을 노려 동예가 기원전 1년에 위례성을 함락했다.

 

서기 1년에는 말갈이 쳐들어왔지만 추장이 생포되였다. 그리고 위례성을 쳐들어간 보복으로 동예를 쳐들어갔지만 폭설 때문에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4년 음력 8월에는 석두고목에 성을 쌓았고,

 

6년 음력 7월에는 남쪽 경계에 목책을 쌓았다. 하지만 마한의 압력으로 목책을 철거했다.

 

7년 음력 2월에는 왕궁의 우물이 넘첬고 말이 소를 나았는데 머리가 하나고 몸이 2개였다. 온조왕은 그것이 길조라고 생각하여 합병계획에 들어갔고,

 

9년 음력 2월에는 마한을 기습공격해 패망시켰고 마한은 원산성 등지에서의 최후의 저항을 끝으로 백제에 병합되었다. 단, 마한 전토가 모두 병합된 것은 아니고 노령 이남의 전남 지역은 일단 백제의 맹주권을 인정하며 한동안 독립을 유지해 침미다례를 형성했다. 

 

10년 음력 7월에는 대두산성을 쌓았고

 

16년 음력 10월에는 마한의 옛 장수 주근우곡성을 거점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반란은 1달 만에 진압되고 주근은 자결했다.

 

그 후, 백제는 탕정성(온양군), 고사부리성을 쌓았고 원산성(전주시)과 금현성을 수리했다.

 

22년 음력 9월과 11월에는 말갈이 술천성, 부현성을 습격하였지만 간신히 적을 퇴치했다.

 

온조왕은 28년 음력 2월에 생을 마감했다.

 

가계

 

동시대 고구려, 신라

 

 

 

 

 

 

제1대 온조왕 실록

(?~서기 28년, 재위:서기전 18년 10월~서기 28년 2월, 44년 4개월)

 

온조왕의 팽창정책과 백제의 강성

비류와 함께 낙랑의 남부도위에 예속된 대방 지역으로 망명한 온조는 모후 소tj노와 비류의 명령에 따라 한반도의 마한 땅으로 찿아든다.. 이에 마한 왕은 동북 변경의 색리국을 온조에게 내주었고, 온조는 재종숙부 을음을 우보로 임명하고 그에게 군사관계를 총괄하게 하여 한강 동북부에 도성인 위레성을 쌓는 등 국가적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온조 일행이 색리국에 터전을 잡고 점차적으로 팽창정책을 실시하자 북방의 말갈과 동쪽의 동예(한반도 낙랑국)가 스스로 위협을 느끼고 백제를 경계하였다. 그리고 서기전 16년 9월에는 마침내 말갈이 백제의 북쪽 국경을 침입한다. 이에 온조는 정예군을 총동원하여 첯 싸움에서 말갈에게 대패를 안겨 주었다.

 

백제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음을 확인시킨 온조는 서기전 15년 8월에 동쪽의 동예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여 성사시킨다. 하지만 동예는 여전히 백제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말갈은 서기전 11년 2월에 3천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도하였다.

 

온조는 위례성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수성전을 펼쳤으며, 말갈군은 10일 동안 지속적인 공격을 퍼부었으나 성문을 뚫지 못하였다. 그러자 말갈군은 군량이 떨어져 퇴각하기 시작하였고 온조는 정예군을 선발하여 말갈을 대부현까지 추격하여 적병 5백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게 된다.

 

하지만 말갈의 침략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2년 뒤인 서기전 9년 10월에 말갈이 몇백 명의 군사들이 변경을 노략질하자 온조는 2백 명의 군사를 보내 대적케 하였으나 백제군이 패퇴하게 되자 온조는 직접 호위군 1백 명을 이끌고 전장으로 달려가 적을 물리친다.

 

이후 말갈과 백제의 국지전은 끊이지 않았고, 서기전 8년에는 동예가 말갈과 결탁하여 백제의 증산 목책을 파괴하고 주민 1백여 명을 죽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때문에 온조는 독산과 구천 두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양국의 교통로를 차단하엿다.

 

한편, 이 무렵 대방 지역에 남아있던 비류와 소서노 일행은 한나라 낙랑의 압박으로 견디다 못해 한반도로 이동해 오게 된다. 그러자 온조는 고민에 빠지는데 비류가 오게 되면 자연적으로 왕위를 내 놓아야 할 판이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돌아갈 것을 권유하였지만 소서노는 온조의 행위에 크게 분개하면서 군사를 동원하여 온조를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소서노는 위례성 공격하다 실패하고 이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는데, 이 사건으로 온조는 스스로 어머니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빠져 내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천도 명령을 내려 한강 남쪽으로 백성들을 이주시켜 위례성을 세우게 된다.

 

이 때 한강 남쪽에는 성곽도 궁궐도 없는 상태였다. 때문에 온조는 한동안 행궁생활을 하면서 서기전 4년 정월에 궁궐이 완공되자 비로소 한성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이처럼 온조가 한성으로 옮겨 가자 위례성은 텅비게 되었고, 그 틈을 노려 동예는 서기전 1년 군사를 동원하여 위례성을 점령 후 성곽을 불태우고, 이듬해에는 말갈이 습격해 왔으나 온조가 이끄는 군사에 의해 칠중하에서 대패하였고, 그들을 이끌던 추장 소모는 생포되어 마한으로 압송되었다.

 

이 사건 이후 온조는 동예가 위례성을 불태운 것을 보복으로 동예의 우두산성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였으나 폭설로 인해 좌절되었다.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석두와 고목에 성을 쌓았고, 2년 뒤인 서기 6년 7월에는 남쪽 경계를 확정짓기 위해 웅천에 목책을 세웠다.

 

이 일은 마한 왕의 심한 반발에 부딪혀 백제와 마한 간의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었고, 결국 마한의 압력에 굴복한 온조는 웅천의 목책을 철거해야만 했다. 이렇듯 마한에 의해 자존심이 상한 온조는 마한을 복속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후 온조는 마한 복속 계획을 꾸준히 추진하였고, 마침내 서기 8년 7월부터 구체적인 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당시 마한은 대륙에서 이주해온 백제, 신라, 변한 등의 세력에 밀려 국력이 극도로 약해져 있었다. 더구나 마한은 중앙집권적인 조직이 아니라 지방분권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붕괴되고 있었다. 이에 온조는 신라, 동예, 변한, 말갈 등이 선수를 치기 전에 마한을 공격하여 복속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3개월 뒤인 그해 10월에 사냥을 핑계하여 대군을 마한 지역으로 이동시킨 다음 불시에 마한의 궁성을 습격하였다.

 

백제의 기습을 받은 마한은 미처 손쓸 틈도 없이 무너졌고, 급기야 원산과 금현, 두 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백제에 항복하는 상황에 처했다. 서기 9년 2월에는 원산과 금현 두 성도 항복하였고, 온조는 그 곳 성민들을 모두 변방인 한강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이렇듯 마한을 차지함으로써 영토를 대폭 확장시킨 온조는 서기 10년 7월에는 대두산성을 쌓았고, 3년 뒤인 서기 13년 정월에는 지방 행정조직을 체계화하기 위해 전국을 남부와 북부로 나누었다. 2년 뒤인 서기 15년 8월에 다시 동부와 서부 2부를 설치함으로써 4부 차제를 확립하고 국가 기상을 일신하였다.

 

이 무렵 우박, 지진 등으로 기근이 닥치는 바람에 백성들이 너무 굶주려 서로 잡아 먹는 사태가 발생하고, 곳곳에서 도적이 들끓었다. 설상가상으로 회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마한의 잔여세력이 서기 16년 10월에 우곡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주도한 인물은 마한의 엣 장수 주근이었다. 그는 한 때 백제에 항복하였다가 지진과 기근으로 사회기 혼란해지자 고구려로 피신한 마한 왕조를 불러들이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온조가 5천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우곡성을 무너뜨리자 그는 스스로 목을 메어 자살하였다. 온조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그의 시체를 두 동강 내고, 그의 처자들도 함께 처형하였다.

 

이 사건 이후 온조는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18년 7월에 탕정성을 쌓고, 그곳에 대두성 주민을 이주시켰으며, 8월에는 원산성과 금현성을 수리하는 한편 고사부리성을 쌓았다.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대다수의 부역을 철폐하였다.

 

이렇게 안정을 되찿고 있는 가운데 22년 9월에 온조는 말갈이 술천성을 침략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또한 11월에는 말갈이 다시 부현성을 습격하여 주민 1천여 명을 죽이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에 온조는 말갈의 재차 침입을 막기 위해 한강 이북에 거점을 마련하기로 하고, 한강 동북방의 15세 이상되는 장정들을 대거 소집하여 위례성을 수리하고 병력을 주둔시켰다.

 

온조의 이같은 조치로 한동안 말갈의 침입은 사라진다. 그 무렵 발해만 연안의 남옥저가 몰락하여 그 유민 20여 가구가 배를 타고 백제에 귀순하였고, 온조는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거주토록 하였다.

 

이처럼 온조는 백제의 기틀을 갖추는 데 모든 힘을 쏟다가 서기 28년 2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온조의 가족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에게 장자가 있었고, 그가 다루왕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아들이 있었으니 당연히 왕후도 있었을 것이다.

 

'온조'란 의미는 이름이 아니라 '백제의 왕', '모든 것의 왕', '가장 큰 왕' 등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태조'나 '고조'의 표현과 같은 의미이다.

 

 

                          

 

 

 

 

 

 

백제 임금들의 연대표

 

대수 왕호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온조왕(溫祚王) 온조(溫祚) 기원전 18년 ~ 기원후 28년 아버지는 동명성왕 혹은 우태. 어머니는 소서노이며, 백제의 시조.
2 다루왕(多婁王) 다루(多婁) 기원후 28년 ~ 77년 온조왕의 아들.
3 기루왕(己婁王) 기루(己婁) 77년 ~ 128년 다루왕의 아들.
4 개루왕(蓋婁王) 개루(蓋婁) 128년 ~ 166년 기루왕의 아들.
5 초고왕(肖古王) 초고(肖古) 166년 ~ 214년 소고왕(素古王), 속고왕(速古王). 개루왕의 장남.
6 구수왕(仇首王) 구수(仇首) 214년 ~ 234년 귀수왕(貴須王). 초고왕의 아들.
7 사반왕(沙伴王) 사반(沙伴) 234년 사비왕(沙沸王), 사이왕(沙伊王). 구수왕의 장남.
8 고이왕(古爾王) 고이(古爾), 구이(久爾), 고모(古慕) 234년 ~ 286년 개루왕의 차남.
9 책계왕(責稽王) 책계(責稽) 286년 ~ 298년 청계왕(靑稽王), 책찬왕(責贊王). 고이왕의 아들.
10 분서왕(汾西王) 분서(汾西) 298년 ~ 304년 책계왕의 아들.
11 비류왕(比流王) 비류(比流) 304년 ~ 344년 구수왕의 차남.
12 계왕(契王) 계(契) 344년 ~ 346년 분서왕의 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초고(肖古), 여구(餘句) 346년 ~ 375년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비류왕의 차남.
14 근구수왕(近仇首王) 구수(仇首), 수(須) 375년 ~ 384년 근초고왕의 아들.
15 침류왕(枕流王) 침류(枕流) 384년 ~ 385년 근구수왕의 장남.
16 진사왕(辰斯王) 진사(辰斯) 385년 ~ 392년 근구수왕의 차남.
17 아신왕(阿莘王) 아신(阿莘) 392년 ~ 405년 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腆支王) 전지(腆支), 여영(餘映), 여전(餘腆) 405년 ~ 420년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구이신(久爾辛) 420년 ~ 427년 전지왕의 아들.
20 비유왕(毗有王) 비유(毗有), 여비(餘毗) 427년 ~ 455년 구이신왕의 아들.
21 개로왕(蓋鹵王) 경사(慶司), 여경(餘慶) 455년 ~ 475년 근개루왕(近蓋婁王). 비유왕의 아들.
22 문주왕(文周王) 모도(牟都), 여도(餘都) 475년 ~ 477년 문주왕(汶洲王). 개로왕의 아들, 혹은 개로왕의 동생.
23 삼근왕(三斤王) 삼근(三斤) 477년 ~ 479년 문주왕의 아들.
24 동성왕(東城王) 동성왕 모대(牟大), 마모(摩牟), 마제(麻帝), 여대(餘大) 479년 ~ 501년 문주왕의 조카, 좌평 곤지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무령왕 사마(斯麻), 여융(餘隆) 501년 ~ 523년 동성왕의 아들, 혹은 곤지의 아들.
26 성왕(聖王) 성왕 명농(明襛) 523년 ~ 554년 무령왕의 아들.
27 위덕왕(威德王) 위덕왕 창(昌) 554년 ~ 598년 성왕의 장남.
28 혜왕(惠王) 혜왕 계(季) 598년 ~ 599년 성왕의 차남.
29 법왕(法王) 법왕 선(宣), 효순(孝順) 599년 ~ 600년 혜왕의 아들.
30 무왕(武王) 무왕 장(璋), 서동 600년 ~ 641년 법왕의 아들, 혹은 위덕왕의 서자.
31 의자왕(義慈王) 의자 641년 ~ 660년 무왕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