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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38 : 덩샤오핑 시대(중월 전쟁, 천안문 사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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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38 : 덩샤오핑 시대(중월 전쟁, 천안문 사태)

두바퀴인생 2010. 7. 2. 03:22

 

 

 

중국의 역사 138 : 덩샤오핑 시대(중월 전쟁, 천안문 사태) 

 

덩샤오핑 시대 (1978년~1989년)

화국봉에 대해서는 2년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덩샤오핑은 의지가 굳고 매우 지적이었던 농부 출신의 혁명가, 체구가 극히 작고 늙어가는 그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의 지도자로서 비공식적이긴 했지만 거대한 인물로 부상하였다. 사실 그는 중국을 이끈 농부 출신의 몇 안되는 혁명가 중의 하나였다. 그 몇 중에는 마오쩌뚱과 한나라고조명나라의 태조가 있다.

 

등소평은 중국 공산당 내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을 조심스럽게 선동.설덕하여 복권되었으며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마오쩌뚱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화궈펑을 교묘하게 따돌리고 권력으로부터 축출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권력 변동 때와는 달리,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고위직으로부터 물러나있었지만 신체적으로는 해를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권할 수 있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문화혁명에 대한 재평가와 출신성분제도를 혁파한  이 두 가지 결정으로 인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먼저 문화혁명에 대한 재평가로 그 시기에 벌여졌던 극단적인 행위와 이로 인한 고통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  출신성분제도는 공산 혁명시기에 있었던 조상의 행위를 근거로 전 중국을 농민 계급과 지주 계급의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버렸었고 이 제도 아래에서는 지주 계급은 제도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으나 이 두 계급의 경계선을 허물고 관리들을 등용ㅇ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두 행동은 그가 그의 정적을 따돌리기 위한 주요 전략 중의 일부였다고 믿고 있으며 문화혁명에 대한 대중의 비판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그 사건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 시기에 고통받았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그가 중국공산당에 대한 통제력을 서서히 재장악하면서 화궈펑은 수상에서 물러나고 자오쯔양(조자양)이 그 자리에 교체되었고, 후야오방(호요방)이 당의장이 되었다. 그의 공식 직함은 비록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의장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그는 중국의 지도자중에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이었다.

 

본래 실제 권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상과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손에 있지만, 주석은 국가를 대표하는 역할을 감당하도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상과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별도의 사람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본래의 계획에는 당에서는 정책을 개발하고 정부에서는 수행하도록 하여, 마오쩌둥이 했던 것처럼 권력이 개인의 취향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분립되도록 했다.

 

덩샤오핑은 정치체제는 공산당을 견지하면서,경제 체제는 시장 경제를 도입하는 등의 경제 개방정책 등 실용주의 노선을 취하여, 중국의 근대화를 진행시킨 인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마오 시대의 과오에 대하여 깊이 통찰하고 중국을 위해 진정한 방향이 무엇인가를 절실히 깨닭고 중국의 근대화를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한 지도자로 칭송받고 있다. 마오 시대는 한마디로 마오 자신의 독재와 신격화를 위한 광란의 시대였다. 한국 전쟁, 대약진 운동, 반우파 투쟁, 티베트 침공, 문화대혁명 등을 을으켜 수천만 명에서 1억이 넘는 한족들과 소수민족들이 피해를 당하였다. 특히 농민보다 지식인.대지주.관료출신, 황족후예, 당 고급관료, 군부, 소수민족 등 수많은 인민들이 피를 흘려야 했다. 이렇게 고통받던 중국을 진정으로 근대화시킨 인물이며 오늘날 미국과 다시 패권경쟁을 시도하고 있는 강대국으로  다시 발돋움 하게 되었다.    

 

덩샤오핑

덩샤오핑
(중국어 간체: 邓小平, 정체: 鄧小平)
덩샤오핑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중화인민공화국제3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임기 1981년~1989년 11월 7일
전임: 화궈펑(2대)
후임: 장쩌민(4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중화인민공화국의 제5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임기 1978년~1983년
전임: 저우언라이(제4대)
후임: 덩잉차오(제6대)

출생일 1904년 8월 22일
출생지 쓰촨 성 광안
사망일 1997년 2월 19일
정당 중국공산당

덩샤오핑( 鄧小平, 등소평) , 1904년 8월 22일 ~ 1997년 2월 19일)은 중국의 정치가로 중국 공산당의 소위 2세대의 가장 주요한 인물이다. 오랜 정치 경력을 거치며, 권력을 다졌으며,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등소평하면 생각나는 흑묘백묘론은 이념보다는 현실을 중요하게 생각한 그의 실용주의 노선을 잘 말해준다.

생애

덩샤오핑의 동상

 

 

 

그는 중국 쓰촨 성 광안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 호찌민, 저우언라이 등과 마찬가지로 1920년 프랑스에서 공부하였고, 1926년 모스크바 중산(中山)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9년 제7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4년 대장정(大長征)에 참가하였다. 1945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된 후, 국무원 부수상·재정 부장·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총서기·중소 회담 중공측 대표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6년 문화혁명 때 실권하였으나, 1973년 부수상으로 다시 복권되었다.

 

1975년 당 부주석 겸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으나, 1976년 천안문 사태로 실각하였다. 이듬해 다시 전직위를 회복하였고, 1982년까지 당 부주석·참모총·부수상·당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 등을 지냈다. 1987년 중국 당 국가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정치국 상무위원·공산당 중앙 고문위원회 주임을 겸직하여 중공의 최고 정치 실력자로 군림했으나, 1994년 사실상 은퇴하여 노환과 숙환에 시달리다 사망하였다.

 

그는 세 번의 결혼을 했다. 첫 번째 아내는 장 시유안으로 모스크바에 있을 때 함께 공부한 동료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그의 첫아이를 낳고 며칠 뒤인 24살 때 죽었다. 그 아이 또한 아기 때에 죽었다. 두 번째 아내인 진웨이잉은 그가 1933년에 정치적인 공격을 받게 된 직후 그를 떠났다. 세 번째 아내인 줘린윈난 성의 한 실업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1938년에 공산당의 당원이 되었고, 그 이듬해 야난에 있는 마오쩌둥의 동굴 앞에서 덩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5명의 자식을 두었다(2남3녀).

젊은 시절

학생시절 중국 공산당(CPC)에 가입한다. 그는 장정의 베테랑이었으며 마오쩌둥(모택동)의 오랜 전우였다. 마오쩌둥은 혁명 직후 그를 공산당의 비서장으로 임명한다.

 

1957년반우파투쟁에서 마오쩌둥을 공식적으로 지원한 이후,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의 비서장이 되어 나라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한 아사사태로 마오쩌둥에게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자, 덩샤오핑은 좀 더 큰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유소기와 그는 최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마오쩌둥을 명목상의 지도자로 앉히려는 계획을 세웠다. 유소기와 덩샤오핑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을 때, 경제 개혁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당 조직과 전체 인민들 사이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 당시 마오쩌둥은 자신이 권력에서 소외될까 염려하고 있었다.

 

권력의 누수를 걱정한 마오쩌둥은 문화혁명을 유발시켰고, 이 시기에 덩샤오핑은 실각하여 당직에서 은퇴한다. 1974년 복귀하지만 재차 1976년에 고초를 겪었다. 당시 그가 겪은 가장 큰 고초는 홍위병에 쫓겨다니던 큰아들이 추락사고로 장애인이 된 것이었다.그 해 마오쩌둥의 별세로 다시 복직한다.

혁명

의지가 굳고 매우 지적이었던 농부 출신의 혁명가, 체구가 극히 작고 늙어가는 그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의 지도자로서 비공식적이긴 했지만 거대한 인물로 부상하였다. 사실 그는 중국을 이끈 농부 출신의 몇 안되는 혁명가 중의 하나였다. 그 몇 중에는 마오쩌뚱과 한나라고조명나라의 태조가 있다.

 

등소평은 중국 공산당 내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을 조심스럽게 선동하여, 그를 복권시켜주었으며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마오쩌뚱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화궈펑을 교묘하게 따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화궈펑을 권력으로부터 축출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권력 변동 때와는 달리,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고위직으로부터 물러나있었지만 신체적으로는 해를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권할 수 있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두 가지 결정으로 인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한 가지는 문화혁명에 대한 재평가였다. 그는 그 시기에 벌여졌던 극단적인 행위와 이로 인한 고통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 하나는 출신성분제도를 혁파한 것이었다. 그 출신성분제도는 공산 혁명시기에 있었던 조상의 행위를 근거로 전 중국을 농민 계급과 지주 계급의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버렸었다. 이 제도 아래에서는 지주 계급은 제도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두 행동은 그가 그의 정적을 따돌리기 위한 주요 전략 중의 일부였다고 믿고 있다. 문화혁명에 대한 대중의 비판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그 사건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 시기에 고통받았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그가 중국공산당에 대한 통제력을 서서히 재장악하면서 화궈펑은 수상에서 물러나고 자오쯔양(조자양)이 그 자리에 교체되었고, 후야오방(호요방)이 당의장이 되었다. 그의 공식 직함은 비록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의장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그는 중국의 지도자중에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이었다.

 

본래 실제 권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상과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손에 있지만, 주석은 국가를 대표하는 역할을 감당하도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상과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별도의 사람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본래의 계획에는 당에서는 정책을 개발하고 정부에서는 수행하도록 하여, 마오쩌둥이 했던 것처럼 권력이 개인의 취향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분립되도록 했다.

개방

덩샤오핑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덩샤오핑이 권력에 있을 때, 서방과의 관계가 확연히 증진되었다. 덩샤오핑은 해외순방을 했고, 서방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다. 1979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만났다. 카터 대통령은 마침내 UN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정식 인정했다.

 

덩샤오핑이 이루어 낸 것들 중의 또 하나는 1984년 12월 19일 영국과 중국간에 체결한 중영 공동 선언이다. 이 조약에 따라서 홍콩이 1997년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었다. 99년동안의 조차를 마치는 홍콩에 대하여 덩샤오핑은 향후 50년간 홍콩의 자본주의체제를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1국 2체제라고 불리며 이러한 접근 방법은 중국 본토와 대만이 통합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지는 않았다.

중국식 자본주의

덩사오핑의 개혁이 목표는 4대 근대화에 요약되어 있는데, 농업의 근대화, 공업의 근대화, 과학의 근대화, 기술의 근대화이다. 근대화되고 산업화된 국가가 되는 목표를 성취하려는 이 전략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다.

 

덩샤오핑은 중국은 공산주의의 초기단계에 있고 당의 의무는 중국식 공산주의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은 경제 정책 결정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감소시켰다. 마르크스-레닌주의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가치관의 우선 순위를 하향 조정하여 덩샤오핑은 어떤 정책이 단순히 마오쩌둥이나 더 보수적인 진연과 관계가 없다고 해서 거부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덩사오핑은 자본주의 국가의 정책과 비슷하다고 해서 어떤 정책을 반대하지 않았다.

 

 

1975년 베이징에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는 덩샤오핑.

 

 

덩샤오핑이 경제 개혁이 일어나도록 하는 이론적인 배경과 정치적 지원을 제공했지만, 덩샤오핑 본인으로 부터 나온 경제 개혁은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개혁은 지역 지도자들로부터 소개되었는데, 이러한 것들은 종종 중앙 정부의 지도방향과 충돌하곤 하였다. 이러한 개혁이 성공적이었고 유망하다고 밝혀지면 대규모로 여러분야에서 채택되었고 종국에는 국가 전체에 소개되었다. 많은 개혁이 동아시아의 호랑이들에 의해서 경험된 것들이었다.

 

이것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의 패턴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는 대부분의 개혁들이 고르바초프 자신에 의하여 제안되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페레스트로이카의 하향식 접근과 대조되는 덩샤오핑의 개혁은 상향식 개혁이 성공의 열쇠였다고 이야기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덩샤오핑의 개혁은 기술적으로 숙련된 관료들에 의하여 계획된 중앙 집중적 대규모 경제 제도를 소개하였다. 이것은 마오쩌둥의 대중 선동적인 경제 건설 방식을 버린 것이다. 소비에트 모델이나 마오쩌둥의 모델과 다르게 시작 경제를 통한 간접적인 관리 방식이었고, 이 방법은 대부분 서구 국가의 경제 계획과 조정 매커니즘을 본 딴 것이었다.

절차의 제도화

경제를 개혁하고 개방하면서, 덩샤오핑은 그 절차를 정형화하여 공산당의 힘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덩샤오핑의 후속 행보는 지도부가 본래 의도했던 것보다 더 큰 권력을 갖도록 야기했다. 1989년에 양상쿤 주석은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의장인 덩샤오핑과 협력하여 주석의 명의로 1989년 텐안먼 시위를 진압하도록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과 당의 다른 원로들에게 발탁된 촉망받는 후계자였고, 당 서기 자오쯔양을 대신할 인물로 뽑혔다. 장쩌민은 학생 시위대에게 온건하다고 평가되었다. 텐안먼 사건과는 직접적으로는 관련되지 않았지만, 장쩌민은 텐안문 사건 이후에 상하이에서 비슷한 시위를 예방하기 위한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중앙위원으로 승진되었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19일 장쩌민을 권력의 중심에 올려 놓은 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덩샤오핑의 유산

언론인 짐 로워은 덩샤오핑의 1979년에서부터 1994년의 개혁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인류 복지 향상의 가장 큰 향상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언급한 것과 같이 덩샤오핑의 정책은 공산주의 틀안에서 외국 자본에 경제를 개방하였고 시장을 개방하였다. 그가 죽고 난 뒤 장쩌민의 지도아래 중국은 연평균 8%의 GDP 성장을 계속 했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을 기록했다. 천안문 사태를 불러 일으켰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개혁 절차가 제도화되고 농민혁명가에서 교육을 잘 받은 전문기술인으로 세대 교체가 이루어져서 정치 제도는 안정되었다. 사회 문제도 중국 본토가 매년 빠르게 근대화되고 번역하게 됨에 따라 개선이 되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개혁은 몇 가지의 남겨진 과제를 가지고 있다. 시장개혁의 결과로 1990년대 중반에는 중앙정부소유의 국영기업들이 부실화되었고, 그들이 이윤을 내지 못하고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그들은 정리될 필요가 있다.

 

마침내, 공산당의 지배를 유지하면서도 마오쩌뚱의 공산주의적 가치보다 실용주의가 더 낫다는 것을 확증시키는 덩샤오핑주의는 서양에 많은 질문들을 생겨나게 했다. 중국과 그 밖의 여러 관찰자들은 더 역동적이고 풍성해지는 중국 사회를 하나의 당이 어느 정도까지 통제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덩샤오핑 이론 

 

덩샤오핑 이론이란 중국의 혁명가이자 정치가인 덩샤오핑이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中全會)' 이후 '사상해방'과 '실사구시'라는 두가지 틀 속에서 20년간 개혁 개방정책을 추진해 오면서 탄생된 이론이다.

 

'종합국력의 증강', '생산력의 발전', '인민생활의 향상' 등 3가지 중 어느 하나에 유리하다면 자본주의적 요소도 과감히 도입할 수 있다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의 정신적 토대이자 실천강령이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이른바 '문혁4인방'(장칭(江靑)·왕훙원(王洪文)·장춘차오(張春橋)·야오원위안(姚文元))이 권력으로부터 축출되자, 76년 '4.5 천안문사건'으로 숙청당했던 덩샤오핑이 재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1977년 7월 복권된 덩샤오핑은 1978년 12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각본에 없던 연설을 통해 문화혁명 종결 이후의 3년에 걸친 논란을 정리하는 개혁개방의 기본사상을 제시하였다.

 

이 연설에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사상의 기본관점은 실사구시이며, 그리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원리를 중국혁명의 구체적 실천과 함께 결합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사상이 해방되지 않고, 사상이 경직화되면 많은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면서 '본본주의'(本本主義: 책에 쓰여진 내용을 무조건 옳다고 하면서 이에 맹종하는 태도, 그리고 상부의 지시를 분석, 검토도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수행하는 태도)를 우려한 후, 간부와 대중의 사상을 과감히 해방시키지 않으면 4개 현대화(경제, 과학, 농업, 국방의 현대화)는 무망하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한편으로는 ""사회주의노선, 공산당지배, 마르크스·레닌주의·마오쩌둥사상, 무산계급독재의 견지""라는 '4항 기본원칙'을 강조함으로써 정치적 개혁은 '개혁ㆍ개방의 효율적 추진과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 발휘'라는 단서 하에서 제기됐다.

 

개혁개방과 관련한 덩샤오핑의 이론은 이른바 '흑묘백묘론(黑猫白猫', 즉 '쥐만 잘 잡는다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가릴 필요가 없다'는 이론으로 대표된다. 즉, 생산력 발전만 잘 잡는다면 사회주의적인 방식이든, 자본주의적인 방식이든 가릴 필요가 없다는 철저한 실용주의 노선이다.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개혁노선은 자본주의.사회주의를 따지지 말고 인민을 잘 살게 해주라는 '남순강화(南巡講話)'에서 절정에 이른다.

 

덩샤오핑은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2일까지 무창, 심천, 주해 등 중국 남부 경제특구 지역과 상해를 순방하면서 그 성과를 직접 확인하고 이를 만족해 하며, 앞으로의 심화된 경제개혁, 개방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긴 연설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남순강화로서, 그 내용은 주로 경제개혁. 개방정책 견지와 이의 가일층 심화, 확대에 관한 것으로 이후 대외경제부문의 개혁, 개방정책이 더욱 확대되었다.

 

 

개혁.개방 정책

 

 

개혁개방(改革開放)이란 중화인민공화국덩샤오핑의 지도 체제아래에서, 1978년 12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 11기 중앙위원회 제 3회 전체회의에서 제안되었고, 그 후 시작된 중국 국내 체제의 개혁 및 대외 개방정책을 말한다.

시장경제 이행기(1978년 - 1992년)

마오쩌둥 시대의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다시 살리기 위해, 현실파 덩샤오핑은 「네 개의 현대화」를 내걸어 시장경제 체제로의 이행을 시도한다. 기본 원칙은 선부론으로 대표되듯이, 먼저 부유해질 수 있는 조건을 정하고 부유해져서, 그 영향으로 다른 것이 풍요해지면 좋다고 하는 생각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절대평등주의(네거티브 웰페어)를 벗어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에 따라 농촌 지역에서는 인민공사가 해체되어 생산책임제, 즉 경영자주권을 보장하고, 농민의 생산의욕 향상을 목표로 했다. 도시 지역에서는 외자의 적극 유치가 장려되어 광둥성선쩐, 푸젠성아모이 등에 경제특구상하이, 톈진, 광저우, 따롄 등의 연안부 여러 도시에 경제기술개발구가 설치된다. 화교나 구미 자본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으로 자본이나 기술 이전 등 완수하는 한편, 기업의 경영자주권의 확대 등의 경제체제의 개혁이 진행되었다.

 

개혁개방 정책은 동시에 중국 사회에 큰 모순을 낳았다. 농촌 지역과 도시 지역, 연안부와 내륙부에 경제 격차가 확대되어, 관료의 부정부패가 한층 심각해졌다. 인플레나 실업도 눈에 띄게 늘었고, 공산당에 대한 불만은 높아지고 있었다. 1989년에는 천안문 사건이 발생하여, 개혁개방은 일시 중단하게 된다.

사회주의 시장경제(1992년-)

1992년 이후, 다시 개혁개방을 추진하여 있어 경제성장은 단번에 가속화 되었다. 그러나 도시와 농촌, 연해부와 내륙부의 지역 격차는 심화되어, 특히 농민의 불만이 높아졌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아래에서, 장쩌민, 주룽지 정권은 격차 해소와 경제개혁에 드라이브를 걸게 된다. 격차 해소를 서부 대개발, 국영기업 개혁에 따른 실업자의 증대, 민공조, 삼농문제라고 하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를 안고서도, 지금 중국 경제는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성장하여, 생산대국의 지위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일본의 뒤를 잇는 제4의 시장으로 기대되고 있다. 2001년에는 WTO의 회원 가입을 완수한다.

 

2002년부터 후진타오 정권이 발족하였다. 2020년의 GDP를 2000년의 4배로 잡고(연평균 7. 2%성장), 중진국이 되는 비전을 제시하고, 전면적인 「소강사회」(小康社會)를 건설하는 것을 새롭게 목표로 내걸었다. 「소강」(小康)이란 예와 법을 통해 백성들을 다스려 편안하게 한다는 말로 여기에서는 의식이 뒤처지지 않고, 한층 더 생활이 향상되어, 의식이 충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연안부뿐만이 아니라, 내륙부의 경제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 목적이다.

 

2003년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원자바오가 수상으로 선출되어 주룽지의 경제개혁을 계승하게 되었다. 2004년에는 사유재산권 보호를 명기한 헌법 개정안이 전국인민대표회에서 채택되어 주식 제도, 기업통치 제도 등, 국유기업의 개혁을 위한 정책도 제시되고 있다. 또 2007년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는, 사유재산의 보호를 명기한 물권법, 국내기업과 외자기업의 소득세율의 격차를 시정하는 기업소득세법이 채택되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나 2010년 상하이 엑스포 개최도 결정되어, 개혁개방 정책은 한층 더 진전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후진타오 정권은 화목한 사회라고 하는 각 계층 간 조화로운 사회실현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개방 정책

중국정부는 1978년 경제체제의 개혁을 결정하는 것과 동시에 대외개방 정책도 계획했다. 1980년부터 차례로 광둥성선쩐, 주하이, 샨터우, 푸젠성아모이하이난 성에 5 곳의 경제특구를 설치했다. 1984년에는 따롄, 진황도, 톈진, 옌타이, 칭다오, 연운항, 난통, 상하이, 닝보, 원저우, 푸저우, 광저우, 전장(湛江), 베이하이의 14개 연해 도시를 개방했다.

 

1985년 이후, 장강 삼각주, 주강 삼각주, 남 트라이앵글(아모이, 촨저우, 장저우), 산둥 반도, 랴오둥 반도, 허베이 성, 광시 좡족 자치구경제개방구로서 연해 경제개방 지대를 형성했다.

 

1990년 중국 정부는 상하이 푸둥신구의 개발과 개방을 결정해, 일련의 장강 연안도시의 개방을 한층 더 진행해 포동신구를 용두로 하는 장강 개방지대를 형성했다. 1992년 이후는 변경 도시나 내륙의 모든 성도와 자치구 수도를 개방했다. 이어진 조치로 1년에 15곳의 보세구, 49곳의 국가급 경제기술 개발구와 53개소의 하이테크 기술산업 개발구를 설정해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은 연해, 연강, 연변, 내륙지구를 결합해 전방위, 다차원, 광역의 대외 개방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대외 개방지구에서는 다양한 우대정책을 실시해 외향형의 경제, 수출 확대, 선진기술 도입 등의 면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중월 전쟁

 

중월전쟁( 中越戰爭)은 1979년 2월 17일 국경분쟁을 시작으로 일어난 중화인민공화국베트남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한다.

 

1979년 베트남캄보디아에서 킬링필드라고 하는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자국의 국경에서 분쟁을 일으킨 민주 캄푸챠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캄보디아 내전에 개입하여, 폴포트 정권을 캄보디아에서 내쫓았다.

 

폴포트 정권을 지원하던 중국 정부는 보복을 위해 20만의 육군을 윈난 성 등에서 베트남 북동부에 침공해 베트남과 이른 바 중월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난지형에 예상 외의 베트남의 강력한 반격으로 큰 희생자를 내고 철수하고 말았다. 난사제도, 서사제도 문제와 관련하어 중월 관계는 더욱 냉각되었다.

 

중월전쟁
(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일부)
Vietnam china.jpg
중국의 침공 루트
날짜 1979년 2월 17일~1988년 1월
장소 중국-베트남 국경 부근 일대
결과 결말 불명확, 중화인민공화국의 전술적 승리 후 후퇴
교전국
중국의 국기 중화인민공화국 베트남의 국기 베트남
지휘관
중국의 국기 양더즈(杨得志)
중국의 국기
쑤시여우(许世友)
베트남의 국기 반티엔둥
병력
총병력 20만 명, 광저우 군관구
63형 전차 400대
젠6형 전투기
총병력 18만 명, 민병대 및 국경수비대
A-37 전투기 수십기
피해 상황
2만 5000명 전사
총 6만 2000명 사상
63형 전차 380대 격파
젠6형 전투기 15대 격추
2만 명 사상
A-37 전투기 5~6대 격추

 

배경

1975년 베트남 전쟁의 승리로 남북 베트남은 공산 통일되었고, 그 여파로 인접국인 캄보디아라오스마저 공산화 되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전쟁 중에 중국의 물적, 인적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았으나, 역사적으로 베트남인들의 대중국 감정이 좋지 않은데다가, 공산 정권이 남베트남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화교를 탄압하여 양국관계는 험악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 공산당은 공산권 국가들을 양분한 소련-중국 분쟁에서 소련측을 지지하여 중국의 분노를 샀다. 이에 동시에 친중국적인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관계도 악화되었으며, 급기야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이 발발하여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친베트남 괴뢰정권을 세우자, 중국은 캄보디아 전선에 머무르던 베트남군의 주력을 철수시키기 위해서 베트남의 북부를 침공하였다.

전쟁 과정

국경인 윈난성에 집결했던 중국군은 1979년 2월 17일 국경을 넘어 공세를 시작하였다. 베트남 북부는 열대 산악 지형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의 이동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당시 베트남군은 주력 부대가 캄보디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침공군에 맞선 병력은 민병대와 국경 수비대뿐이었다.

 

그러나 베트남군은 수 십년간의 실전경험이 있고 현지 지형에 익숙했지만, 중국군은 60-70년대를 흔들었던 문화대혁명의 와중에서 통신이나 장비면에서 근대화가 지체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중국군은 커다란 희생을 내면서 계속 전진하여 국경에서 40km떨어진 교통의 요지인 란손을 3월 6일 점령하였다. 이후 중국은 일방적으로 "징벌적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철군한다"고 발표하여 란손을 철저히 파괴하고 국경 밖으로 철수하였다.

결과

중국군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주장하며 철군했으나, 실제로는 처음에 의도했던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의 철군을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목표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내내 국경선의 확정을 둘러싸고 중국군과 베트남군의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다가 1989년에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로부터 철군하자, 평화 협상이 시작되어 1999년 협정이 체절되었고, 중국-베트남 간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이 와중에서 1980년대 내내 베트남에서는 해상로를 통한 화교들의 탈출이 계속되어 보트피플이 동남아 해상을 떠돌기도 했다.

 

천안문 사태

1989년에는 북경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시민의 시위가 일어났다. (6·4 천안문 사태) 그러나 정부는 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그 일련의 민주화 운동 희생자 수는 중국공산당 정부의 보고와 여러 나라의 조사가 차이가 있지만, 수백 명에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톈안먼 사건(천안문 사건, 天安門事件)은 1989년 6월 4일, 후야오방의 사망을 계기로 톈안먼 광장에서 발생한 학생과 시민의 민주화 시위를 중국 정부가 군을 동원해 무력 진압한 사건이다. 6·4 톈안먼 사건, 6·4 사건, 천안문 사태, 북경 대학살 사건 .텐안문 학살등으로도 불린다.

 

 

애초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천여 명이 발생한 사건이다. 국제적십자협회는 2,000 여명의 사망자를 발표했다. 비공식 집계로는 5천여 명 사망, 3만여 명 부상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 후 중국 공안부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정식 발표한 것을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었으며, 군인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

배경

덩샤오핑중국 공산당 내 개혁파들인 후야오방자오쯔양을 자신의 후계자로 정하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런데 1982년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한 후야오방덩샤오핑의 기대와는 달리 사상 해방, 언론 자유, 개인 자유의 신장, 법치주의, 당내 민주화 등 민주주의 노선의 과감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치 개혁은 당내 보수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후야오방은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은 오랜 침묵 끝에 사망했다.

 

중국의 시위사태가 후야오방의 사망을 계기로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실용파가 집권하면서 추진해 온 개혁·개방 정책이 중국인의 생활수준 향상도 가져왔지만 여러 정치·경제적 부작용도 양산함에 따라, 정부에 대한 불만도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 불만은 중국 공산당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고, 후야오방의 정치 개혁 노선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덩샤오핑은 경제 개혁을 통해 중국의 근대화와 강대국 도약을 추진하였지만, 정치 개혁을 할 의사는 그다지 없었던 것이다.

경과

  • 4월 15일 - 후야오방(胡耀邦) 사망과 함께 베이징 시를 중심으로 학생, 시민 시위 시작. 이들은 후야오방의 당 총서기직 해임 이유를 밝힐 것과 그의 명예 회복을 요구.
  • 4월 21일 - 경찰과 충돌이 빚어지면서 시위 참여 대학이 10여 개로 늘어났고 베이다오(北道)를 주축으로 한 47명의 저명한 학자들이 학생운동 지지 성명 발표.
  • 4월 22일 - 후야오방 장례식. 시안(西安)에서 군중이 10여 대의 차량에 불을 지르고 성(省) 정부를 습격하며 공산당 타도 외침.
  • 4월 26일 -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이 리펑(李鵬) 총리에게 시위 강경 진압 지시. 인민일보는 이 날짜 사설을 통해 학생 시위를 ‘반혁명 폭동’으로 규정.
  • 5월 13일 - 학생 수천 명 천안문 광장서 무기한 단식농성 시작. 시위 인원 며칠 새 200만 명으로 급증.
  • 5월 19일 - 자오쯔양, 단식 농성장 방문해 학생들에게 자신이 너무 늦게 온 것에 대해 사과.
  • 5월 20일 - 베이징 일부 지역에 계엄령 선포.
  • 6월 4일 - 0시 57분. 계엄군 본격적인 진압작전 개시. 중국 정부, 진압과정에서 민간인 300여 명이 사망하고 7천여 명이 부상했다고 발표. 비공식 집계로는 5천여 명 사망, 3만여 명 부상이라는 주장도 있음.

사망자수

여러 출처에서 사망자수를 각기 다르게 추정하고 있다.

  • 10,000명 사망 (민간인과 군인 모두 포함) - 소련
  • 7,000명 사망 - 나토
  • 4,000 ~ 6,000명 사망. 그러나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 - 에드워드 팀펄레이크
  • 3,700명 이상 사망 (실종자, 비밀처형, 의료행위 거부를 제외) - 인민해방군 탈영자가 관리들 사이에 기록된 문서가 떠돌았다고 증언
  • 공식적으로 6월 4일 새벽 2,600명이 사망 (후에 부인) - 중국 적십자사. 익명의 한 적십자사 관리는 약 5,000명이 사망하고 30,000명이 부상당했다고 추정
  • 국제 앰네스티와 몇몇 시위 참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1,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타임지에 개제. 국제 앰네스티의 다른 증언에 의하면 수백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추정.
  • 300 ~ 1,000명 사망 - 서방 외교관
  • 뉴욕 타임스의 니콜라스 D.크리스토프에 의하면 400 ~ 800명이 사망. 그는 병원 직원들과 의사, 관리로부터 수집된 정보를 기초로 수치를 작성했다고 밝혔다.
  • 기밀이 해제된 NSA 문서에 따르면 180 ~ 500명이 사망. (사태 초기의 피해자 수치들을 참조)
  • 241명 사망 (군인 포함), 7,000명 부상 - 중국 정부
  • 2006년 말까지 186명의 사망자가 신원이 확인됐으나 전체 피해자수의 극히 일부분이라고 주장 - 천안문 어머니회. 천안문 어머니회는 이 명단에 사태 이후에 자살한 사람들까지 포함시켰다.

영향

사건 이후 서양 세계와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중국 내 덩샤오핑의 정치적 입지가 축소되었다. 강경파의 압력으로 덩샤오핑은 권좌에서 물러났으며 개혁 정책들이 하나씩 뒤집혔다. 이념이 중시되고 개혁 이전의 중국으로 돌아가려는 반동의 움직임이 강화되었다. 1991년 덩샤오핑은 베이징을 떠나 군과의 유대 관계를 공고히 하며 강경파에 대한 반격을 준비한다.

현재

2005년 11월 18일 ‘후야오방 기념대회’를 시점으로, 후진타오 중국 주석이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복권을 조심스레 추진하고 있으나, 여전히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를 언급하는 것은 위험한 일로 되어 있다. 후야오방에 대한 재평가는 곧 천안문 사태의 재평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쉽게 손을 댈 수 없는 뜨거운 감자이다. 지금도 매년 6월 4일을 전후하여 천안문 광장에는 중국 공안이 대규모로 배치되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검색엔진 구글에서도 중국정부의 요청으로 중국어 구글에서는 천안문사태에 대해 정보검색을 하지 못하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안문 사태 이후 1990년대에는 장쩌민 정권 아래에서, 덩샤오핑 노선에 따른 경제 개혁개방 정책이 진행되어,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릴 만큼 경제는 급성장했다. 그러나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수반된 빈부격차의 확대나 환경 파괴로 인한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또 경제에 걸맞는 정치 민주화는 진행되지 않다고는 국내외의 비판도 뿌리 깊다.

  

역대 최고 실권자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역대의 지도부를 ‘제○대 영도인’이라고 부르지만, 화궈펑 정권은 너무나 짧았기 때문에 제2대 영도인은 덩샤오핑 정권을 가리킨다. 현재의 후진타오 정권은 제4대 영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