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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25 (중화민국의 시련 12 : 시안사건과 제2차 국공합작) 본문
중국의 역사 125 (중화민국의 시련 12 : 시안사건과 제2차 국공합작)
1934년 제5차 포위 토벌전에서 강서 소비에트 공산정권을 섬북의 아주 외딴 곳으로 몰아 낸 장제스는 그 후 군사력 배양에 온 힘을 기울였다. 장제스는 신해 혁명 이후 군사력이야 말로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구미 열강으로부터 신무기를 구입하여 장비 현대화를 기하고 직계 중앙군도 만들었다. 1936년 당시 총병력은 약 2백 만으로 그 중 1백만 명이 장제스 직계 군대였다. 이와 같이 무력면에서 중국 최고의 실력자임에는 분명하였으나 일본의 공세에 중국의 허약함을 내세워 오로지 굴복하면서 반공 투쟁에 우선하는 정책에 집착하였다. 그의 공식적인 슬로건은 공산당을 우선 제거하여 내치를 우선 안정하고 뒤에 외적에 대치한다는 '선안내 후양외'였다.
한편 '북상항일'을 내세우고 장정을 끝낸 마오는 일년여 휴식을 취하면서 진용을 재정비하고 정세를 주목했다. 이미 그는 '준의 회의'에서 항일을 위해 북상한다는 대목표 아래 근거지를 섬서성으로 하여 장제스 군대의 포위망 안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는 1935년 8월 1일 중공 중앙과 중화 소비에트 정부 연명으로 '8.1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항일전을 위해 모두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6년 5월 5일 국민정부에 '정전강화 일치항일'을 주장하는 전문을 보내고 1931년 이후 일본의 만주 침입에 항거하는 학생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장제스 정부의 탄압을 받아 한때 침체되기도 하였으나 북부 중국에 대한 일본의 새로운 침공에 항의하여 1935년 이른바 '12.9 운동'으로 알려진 강력한 항일 시위가 벌어졌으며 지식인들도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항거 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일본 상품 불매 운동, 일본인 배척 운동을 전개하면서 일본의 위협과 남경 정부의 관망 정책에 대해서도 비난의 화살을 갸눈 것이었다.
이와 같은 동요은 1936년에도 계속되어 공산당과 국민당의 통일 전선을 지지하는 움직임은 1936년 5월 '송경령.하향응.장내기'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전국구국연합회'를 정점으로 고조되고 있었다. 이 단체는 지식인.상인 및 노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중국 동북 지방 도시에서 공산주의자와 협조하고 있었다.
그 해 7월 전국구국연합회의 네 지도자는 국공 양당에 서한을 보내 내전 중지와 정책 변경을 요구하였으나 국공 양당의 기본 정책을 전환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마오는 장제스에게 항일을 강요했고 장제스는 선안내 후양외의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그 해 10월 장제스는 20개 사단을 동원하여 제6차 포위 토벌전을 개시하였으며 11월에는 전국구국연합회 간부 7명을 불법단체를 조직한 혐의와 적비와 손을 잡고 정부 전복을 꾀하였다는 이유로 체포하였다.
1936년 10월 31일은 장제스의 50회 탄생일이었다. 장제스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국내외의 국민들로부터 신형 비행기 68대가 헌납되어 남경에서는 성대한 축하비행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이때 제6차 홍군 토벌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낙양에서 그의 탄생일을 맞았다.
그러나 그날로부터 40여 일 후 동북군의 장학량과 서북군의 양호성이 장제스를 서안에 감금하는 '서안 사건'이 발생하였다.
시안사건
시안 사건 또는 시안 사태, 시안 사변(중국어 정체: 西安事變, 간체: 西安事变, 병음: Xī'ān Shìbìan)는 1936년 12월 12일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이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제스를 산시 성의 성도(省都) 시안(西安) 화청지에서 납치하여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국민당군과 홍군은 국공 내전을 중지하고 제2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져 함께 대 일본 전쟁을 수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배경
장쉐량과 동북군
젊은 원수로 알려진 장쉐량(중국어 정체: 張學良, 병음: zhāng xué liáng 장학량[*])은 중국 동북지방 즉, 만주의 군벌인 장쭤린(중국어 정체: 張作霖, 병음: zhāng zuò lín 장작림[*])의 장남이었다. 1928년 장쭤린이 죽자 그 위치를 물려받은 장쉐량은 만주의 젊은 독재자 이자 군벌로 위세를 떨쳤는데 1931년 9월 본격적인 일본의 만주 침략이 시작되자 근거지를 잃은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의탁하였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중국 중부지방에서 동북군(만주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홍군과의 국공내전의 부사령관으로 삼았다.
5년 전 '9.18 사건'에 의해 동북 3성에서 쫓겨난 장학량의 동북군은 북경에 머물면서 국민당군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홍군이 다시 섬북에 모습을 나타내자 장학량은 '서북초비 부사령'에 임명되어 홍군 토벌에 임했다. 그러나 장학량은 남경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로 인해 그의 정치적 입장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장정으로 옌안을 수도로하여 동북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장쉐량 휘하의 동북군은 고향인 만주를 일본에 빼앗긴 상태여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많았고 홍군과의 의미없는 소모전에 지쳐있었다. 특히 홍군은 동북군 포로들에게 '진짜 적은 같은 중국인인 홍군이 아니라 만주를 침탈한 일본군이라'는 지속적인 "항일선전"을 폈고 이들이 다시 동북군으로 돌아와 동북군 사이에는 항일에 대한 요구가 점점 커지게 되었다. 장쉐량 자신도 홍군과의 접촉을 통해 좌익의 영향을 받았고 대 일본 전쟁에 소극적인 장제스의 난징정부의 "선 통일, 후 저항" 정책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장학량은 남경 정부와 공산주의자 홍군 간에 화해가 바람직하나도 생각하고 국지전에서 몇 차례 패하자 장제스가 주장하는 제6차 포위 토벌전에 매우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936년 초 장쉐량의 동북군은 홍군과 비밀리에 접촉을 갖고 서로 적대적인 행위를 중지하고 일본과 항쟁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장학량은 저우언라이와 비밀리에 접촉했으며 저우언라이는 그의 친구를 서북의 독군 양호성의 참모로 만들기 위해 파견하였다. 양호성은 처음에는 반공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장학량의 군대가 서안에 주둔하자 공산당과 협조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또 장쉐량은 만주시절부터 내려오던 동북군 장교단을 젊고 진보적인 좌파로 채우고 공산군과의 접촉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접촉은 장제스의 난징정부에는 철저한 비밀리에 이루어진 것이다.
반란의 서막
1936년 장제스는 중국군 총사령관 및 행정직 주석직도 겸하고 있었고 장쉐량은 동북군의 원수로 점차 두 사람사이의 긴장은 커지고 있었다. 반일감정이 고조된 서북지역의 민심을 뒤로한채 장제스는 공산군 토벌에만 몰두하였고 이에 소극적인 동북군을 점차 신뢰하지 않고 직접 난징의 군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홍군토벌을 준비하였다. 장학량은 일찍이 장제스에게 항일을 외면하는 한 부하들에게 명분이 부족하다면서 항일을 위하여 내전을 종식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으나 장제스는 공산당을 제거하는 것을 엄명함으로써 장학량의 입장이 안처하게 되었다.
11월 21일 동북군을 대체하여 공산군 토벌에 나선 난징 국민당군 제1군이 홍군에게 참패를 당하자 장제스는 직접 시안으로 날아가 반드시 홍군을 분쇄하고자 하는 결의를 다지고자 하였다.
경과
긴박하게 돌아가는 시안
12월 7일 장제스는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전용기편으로 직접 시안에 도착하였다. 그래서 장제스는 직접 시안에 도착하여 시안 동쪽에 있는 화청지에 머물면서 동북군의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였으나 동북군의 젊은 장교들은 대 일본 통일전선 수립 및 소련과의 동맹 및 내전 종식을 요구하였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과의 항전을 거듭촉구했으나 총통은 듣지 않았다. 동북군 지휘관들은 다시한번 장총통에게 항일전을 촉구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양호성(楊虎城) 장군 휘하의 4만 명의 서북군도 더 이상 홍군과의 소모전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동북군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12월 9일에는 수천명의 학생들이 반일시위를 벌였는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장제스의 헌병대가 발포, 두명의 동북군 지휘관의 자식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장쉐량이 중간에서 성난 학생군중을 무마하여 더 이상 큰 사건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장제스는 제6차 홍군토벌전 계획을 발표하고 총동원령이 임박하였음을 알렸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경질하고 토벌군사령관을 교체할 계획을 세웠고 장제스의 친위병력인 남의사(藍衣社)는 항일을 주장하는 동북군 장교에 대한 블랙리스트까지 작성 동북군의 핵심세력을 제거하고 공산군 토벌에 찬성하는 장군들로 대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2월 11일 밤 10시 장쉐량은 동북군, 서북군의 합동사단장회의를 소집하고 본격적인 반란에 돌입하엿다. 동북군 1개사단과 서북군 1개연대를 시안 외곽을 이동하라는 비밀명령이 떨어지고 총통과 그 참모진을 '체포'하기로 결정되었다.
총통의 체포
12월 12일 새벽 5시 동북군과 서북군의 반란군은 오전 6시까지 시안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고 국민당군 참모부와 남의사 요원들은 구금상태로 들어갔다. 장제스 총통은 시안에서 16km정도 떨어진 온천휴양지 화청지라 부르는 임동(臨潼)에 머물고 있었는데 새벽 5시 장쉐량의 부하들이 장제스의 호텔을 급습하여 약간의 유혈사태를 치른 후에 잠옷바람이고 맨발로 이산으로 도망친 총통을 발견 체포하여 곧바로 서안으로 압송하였다.
반란에 성공한 직후 동북군과 서북군은 다음과 같은 8개의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 난징정부를 개편하고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서 구국의 공동책임은 분담케 할 것.
- 내전을 전면적으로 즉각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할 것.
- 상하이의 애국운동 지도자들을 석방할 것.
- 모든 정치범을 사면할 것.
- 인민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 애국적 단체를 조직할 인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 쑨원 박사의 유지(遺志)를 이행할 것.
- 전국구국회의를 즉각 소집할 것.
감금당한 장제스는 불안하고 초조하였으며, 장학량.양호성도 앞으로의 대책 마련에 확고한 자신이 없었다. 결국 설득의 명수로 알려진 저우언라이가 조정에 나섰다. 불구대천의 적 장제스와 저우언라이가 무릎을 맞대고 앉앗다. 그리고 저우언라이가 항일의 중대성과 긴급함을 조리있게 성의 있는 태도로 설명하였다.
이 요구 조건에 대하여 중국 공산당과 중화소비에트 정부, 홍군은 즉각 찬성을 표시하고 공산당 대표들이 시안으로 날아왔고 공동항일투쟁 의사를 발표하였다. 12월 14일에는 동북군 약 13만 명, 서북군 4만 명, 홍군 9만 명으로 구성된 "항일연합군"이 구성되고 장쉐량이 연합군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홍군과의 전투명령은 즉각 중지되었고 항일연합군은 새로운 전열을 가다듬고 일본과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는 국민당의 사전검열로 서북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는일체 보도되지 않았고 장쉐량은 그저 반란군으로 묘사될 뿐이었다. 난징의 국민당 정부는 총통의 체포와 구금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서북지역의 반란군을 응징할 준비를 하였고 이는 난징정부의 내부권력 투쟁양상으로 번지게 되었다.
총통의 석방
구금되어 있는 동안 장제스는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와 면담을 가졌고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과 그녀의 오빠 송자문이 을 비롯한 난징정부의 대표단이 시안으로 날아와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 장학량과 만난 뒤 저우언라이와 타협 공작을 벌였다. 대다수 동북군 장교들은 장제스를 '인민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산당 및 다른 온건파들은 장제스가 그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어야만 10년간의 국공내전이 종식되고 위신이 깍이지 않은 채 난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제스의 실각이나 죽음은 또 다른 내전의 빌미가 되고 결국 일본만 이득을 본다는 것이다.
동북군의 젊은 청년장교단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8개 요구항에 대한 문서를 요구하는 저우언라이에게 "말한이상 성실히 지킬 것이며, 행한 이상 결과가 나올 것이다."라고만 하고 문서를 남기는데 끝까지 반대하였다. 결국 문서 서명확인 없이 12월 25일 석방되었다. 반란군, 공산당과 난징 정부 대표들 사이에 정확하게 어떠한 합의가 도출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장제스는 더 이상 내전이 없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보장했고 장쉐량이 제공한 비행기 편으로 난징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이때 장제스의 체면은 손상하지 않기 위해 장쉐량 자신도 함께 난징으로 가서 스스로 반란에 대한 처벌을 기다렸다.
결과
난징정부의 정책 변화
시안 사건 발생이후 3개월간 중국내 정세는 180도 선회하게 되었다.
장쉐량은 난징에서 총통에게 스스로 처벌을 요청하였고 12월 31일 군사법정에서 10년 금고형과 5년간의 공민권 박탈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날로 장제스의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 다시는 동북군이나 어떠한 군사권도 갖지 못했고 사실상 장제스의 포로로 1950년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도주할 때도 데려갔으며 대만에서도 오랫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있었으며 시안 사건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양호성은 사건 다음해인 4월 외유길에 올랐다가 항일 전쟁의 발발로 귀국하였을 때 체포되어 1949년 9월 중경에서 살해되었다.
장제스는 반란을 막지 못한 무능을 탓하며 사의를 표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는 사실상 정치적 연극에 불과했다.) 이후 국민당 정권내 대대적인 '친일파'관료들의 숙청이 이루어졌고 그 자리는 '구미파(歐美派)'로 채워졌다. 이어 열린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형식적으로 반란군의 8개항을 거부했으나 국가의 당면한 최대의 문제는 "공산당 축출과 통일"이 아니라 "실지회복"임을 결의했다. 또한 장제스가 오랫동안 연기해온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 결의하고 조속히 민주제도를 도입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정치적 발언과 언론의 자유를 선포하고 정치범을 석방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공산당에는 4개항의 화평조건을 제시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홍군을 해체하고 국가의 단일 군사력(국민당군) 아래 편입할 것.
- '소비에트 공화국'을 해체할 것.
- 쑨원 박사의 "삼민주의"와 배치되는 공산주의 선전활동을 중지할 것.
- 계급투쟁을 포기할 것.
이러한 요구조건을 제시하면서 난징정부는 반란군의 요구사항과 공산당의 '협력'제안을 거부하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교묘하게 반란군의 8대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는 책략을 썼다. 이러한 정책은 난징정부 내에서도 강경파의 반발이 있었지만 장제스는 유화정책 강행하였고 2월에는 교묘하게 동북군을 이동시키고 서북군을 국민당군으로 편입시키면서 3월에는 서북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으며 이후 서북지역을 장악한 상태에서 공산당과 협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제2차 국공 합작
장제스는 공산당의 대표자 저우언라이 등과 여러차례 협상하면서 마침내 공산당과의 협력관계를 시작했고 공동으로 항일투쟁을 벌인다는 약속을 하였다.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으로 일본이 본격적인 중국 침략을 강행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 합작을 이루어 일본과 전쟁에 나섰고 이 관계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제2차 국공 합작은 중일 전쟁 기간 동안 일본 제국에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내전을 중지하고 서로 연합한 것을 말한다. 1937년부터 일본이 패망한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성립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은 1927년 제1차 국공 합작이 결렬 된 이후 수차례에 걸쳐 공산당이 지배하는 소비에트 지역을 포위·공격했다. 제5차 토벌전 공격으로 타격입은 홍군은 서남부에서 중국 북서부로 근거지를 옮기는 장정을 단행하고 산시 북부지역으로 옮겨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이에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군은 대대적인 제6차 공산당 토벌전을 준비했다.
한편 일본군의 허베이 지방으로 침략이 노골화되자 중국에는 항일여론이 들끓고 공산당은 장정 도중에, 코민테른의 반(反)파시즘을 위한 인민전선 채택에 부응하여 거국적인 항일을 호소하는 8·1선언을 발표하고 국민당에 내전 중지와 항일을 위한 제휴를 제안했다. 이 제안은 장제스로 부터 즉각 거부되었으나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이 시안 사건을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내전이 정지되었고, 양측은 공동 항일 투쟁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하자 국공 합작이 성립되었다. 그래서 항일 민족 통일전선은 급속도로 구체화되어 장제스는 7월부터 8월에 걸쳐 3백여 명의 정치범을 석방하고 소련과 4개 조항의 '중.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등 점차 일치 항일 자세를 명확히 하였다. 공산당은 8월 말경 "항일 구국 10대 강령'을 발표하고 9월 23일에는 '정성 단결 일치 항일' 선언을 발표하였다.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 합법적 존재를 승인하고 항일 전쟁에서 중국 공산당과 합작할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제2차 국공합작이 현실화 되었다.
내용
2차합작으로 국민당 정부는 이제까지 불법화 했던 공산당을 합법화 했다. 공산당의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하고 정치범을 석방하였으며 1938년 일종의 민주의회인 국민참정회를 설치하여 국민당 1당독재에서 벗어나 공산당을 비롯한 다른 당파, 각계인사들을 참여시켰다. 반면 공산당은 토지개혁의 중지, 소비에트 정부 해체, 국민당 정부의 통치를 받는 지방정부로의 편입(사실상 자치) 등을 골자로 하는 국민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공산군인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八路軍)과 국민혁명군 신편제4군(新四軍)으로 재편성되었다. 팔로군과 신사군은 국민혁명군 소속이긴 하지만 독자적으로 작전권과 지휘권을 가졌고 장제스의 지시를 받지 않았다.
대일 항전초기에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일본군의 기계화 병력에 패배하고 후퇴를 거듭했다. 그러나 팔로군과 신사군등 특유의 유격 전술로 일본군 후방에서 활약하면서 주력 부대를 고스란히 살릴 수 있었고 그 세력을 넓혀갔다. 공산당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자 위기를 느낀 장제스는 1938년 10월 우한 함락을 계기로 공산당에 비협조적으로 나왔고 은근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40년 12월 장제스는 신사군을 안후이 성과 장쑤 성에서 소개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신사군 장교들이 반발하자 국민혁명군을 동원하여 포위 공격한 신사군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서 양측의 긴장관계는 점차 악화되었고 서로를 믿지 않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종전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의 점령지에 대한 배분를 둘러싸고 무력충돌을 하게 되고 합작이 결렬되었다. 만주를 비롯한 중국 북부에서는 공산당이 우세하였는데 결국 제2차 내전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