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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24 (중화민국의 시련 11 : 대장정)

두바퀴인생 2010. 6. 21. 03:43

 

 

중국의 역사 124 (중화민국의 시련 11 : 대장정)

 

 

대장정

 

대장정(大長征)은 중국 공산당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9600킬로미터의 거리를 걸어서 탈출한 사건이다.

 

장정(長征)
(
국공내전의 일부)
Chinese civil war map 03.jpg
장정 개략도
날짜 1934년 10월 - 1936년 10월
장소 중국, 장시 성에서 산시성까지
결과 중국 공산당홍군주력이 국민당군을 피해 도주에 성공함
교전국
국민당 기중국 국민당
동맹
군벌
중국 공산당 기 중국 공산당
지휘관
국민당 기 장제스 중국 공산당 기 마오쩌둥외 다수
병력
300,000명 제1방면군:
86,000명 (1934년 10월)
7,000명 (1935년 10월)

장정(長征)은 중국 공산당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9600킬로미터의 거리를 걸어서 탈출한 사건이다.

 

경과

1934년 10월 16일중국 남부 장시 성 서금 소비에트(공산당 점령지역, 해방구)의 8만 명의 중국 홍군(중국 공산당 군)이 군수품과 온갖 물자를 등에 지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1935년 10월산시 성 (섬서성)에 도착했다.

 

탈출은, 장제스가 1년 전부터 70만여 명의 대군으로 소비에트 주위에 철조망과 시멘트 요새를 설치,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치면서부터 예고됐다. 중국국민당군의 압박으로 소비에트 지역이 점점 생활 필수품과 의약품 등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게 되자, 공산당 지도부는 마침내 중국 남부의 장시 성푸젠 성 일대의 근거지를 버리고 중국 서북부의 오지인 산시 성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포위망이 가장 약한 서남쪽을 돌파한 홍군은 추격해 오는 국민당군과 각 지역의 적대적인 군벌 군대를 뿌리치면서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뒤에는 가족 대부분과 병들거나 부상 입은 2만 명을 포함한 2만 8000명의 홍군이 남겨졌다. 저우언라이주더, 린뱌오, 펑더화이 등이 이끄는 홍군이 1935년 10월 옌안에 도착해 자리를 잡기까지 행군한 거리는 무려 9600킬로미터나 되었으며, 당초 출발자 중에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인원은 불과 7천 명뿐이었다. 공군까지 동원한 국민당군의 탄압, 더위, 식량부족으로 도중에 죽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반(反)제국주의 등의 목표를 갖고 상하이에서 창립한 이후 15년 동안 중국 남부와 동부에서 이룩했던 공산주의 혁명의 성과를 모두 잃어버리고 첩첩산중에 움츠리게 된 것이다.

평가

중국 국민당 장제스 총통이나 다른 관측자들의 눈에는 이들이 마침내 뿌리가 뽑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정은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패배가 아니라 승리, 그것도 역사를 바꾼 대승리로 기록됐다. 홍군은 장정을 통해 혁명을 위한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다는 ‘신화’를 만들어냈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근거한 공산주의 혁명의 이념을 농촌지역에 전파할 수 있었다. 또한 대부분이 농민 출신인 홍군은 민폐를 전혀 끼치지 않았기 때문에, 장정은 중국 공산당이 농민들의 지지를 받게 한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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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사변 발발로 제3차 홍군에 대한 장제스의 토벌전이 중지되어 국민당군이 철수하자 홍군은 철수하는 국민당군을 뒤쫓아 곧 바로 소비에트를 확대했다. 그와 아울러 상해의 당 중앙은 유조구 사건에 관해 결의를 발표하고 '반제항일, 국민당 타도, 소비에트구 확대'를 전국에 호소했다.

 

한편 그 해 11월 21개 현과 인구 250만 묭을 지닌 중앙 소비에트구를 기반으로 강서성 서금에서 중화 소비에트 제1차 전국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헌번.노동법.토지법을 채택한ㅁ과 아울러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의 성립, 임시 소비에트 정부 수립을 선언하고 정부 주석에 마오, 부주석에 장국도와 항영, 군사위원에 주덕을 선출하고 수도를 서금으로 정했다. 소비에트 공화국의 성립은 일본의 만주 침략과 같이 국민당 정부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정권이 탄생하였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화국이 성립하였다 하더라도 중국 공산당의 앞날은 지극히 험난한 앞길이 놓여 있었다. 인구 1천만 명 이상 확보하고 비교적 확고한 영역을 갖춘 것처럼 보엿으나 그 후 3년 뒤에는 장제스의 포위 토벌에 패하여 강서 소비에트를 버리고 역사상 유명한 1만 2천 킬로미터의 대장정의 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만주 사변과 상해 사변이 일단 수습되자 1932년 6월 장제스는 서둘러 홍군에 대한 제4차 포위 토벌전을 개시햇다. 장제스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어 1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이 토벌 작전을 통해 몇 개월 만에 몇 몇 근거지에서 홍군을 격퇴했다.

 

호북 일대를 공격한 국민당군은 장구도 지휘하의 호북.하남.안휘의 근거지와 하룡의 근거지 호남.호북 서부를 제압하였다. 그 결과 제4군의 장국도는 사천 북부로 도망가 그곳에서 천섬 근거지를 세웠다.

 

1933년 초 장제스는 마침내 강서의 중앙 소비에트구로 진격하였다. 공산당 중앙은 근거지 안으로 국민당군을 깊숙히 글여들여 격퇴시켰던 종래의 유격전 전술을 바꿔성문 밖에서 적을 저지한다는 공격 작전으로 전환하였다.

 

1932년 초 공산당 중앙은 그때까지 채택했던 마오의 전략을 도주주의.패배주의로 규정하고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당시 홍군 총 병력은 20만 명, 총기 17만 정을 소유한 당당한 군대로 성장해 있었다. 

 

1932년 8월 수도 서금을 향해 진격하던 국민당군을 입구인 광창에서 직접 충돌하였다. 1933년 1월에는 국민당군에 야습을 감행한 끝에 2개 사단을 섬멸하는 서전을 장식하였다. 그로부터 1개월 후 두 번째 공격에서도 국민당군을 분쇄함으로써 장제스의 제4차 포위 토벌전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 무렵 마오는 말라리아병에 걸려 홍군에 대한 지도권은 거의 박탈된 상태였다. 그 대신 진방헌과 오토 브라운이라는 독일인이 군사상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1933년 8월 장제스는 대규모적인 제5차 포위 토벌전을 감행하였다. 장제스는 독일인 폰 젝트 장군을 군사 고문으로 삼아 그의 전술을 채택하여 중앙 소비에트구 주변에 수십만 개의 토치카를 구축하고 군용도로를 건설하여 토치카와 연결시키는 이른바 철의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서서히 포위망을 압축해 들어가는 작전을 폈다. 이 작전에는 1백만 명의 병력과 장비.전차.비행기까지 동원된 동시에 경제 봉쇄가 병행되었다. 장제스의 경제 봉쇄 작전은 곧바로 효과를 나타내어 1933년에는 이미 식량과 의약품이 궁핍해졌고 특히 소금의 부족이 심각하였다. 마오는 소금을 구하기 위해 포위망을 돌파하여 병력을 내보냈으나 대부분 국민당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장제스의 군사적.경제적 봉쇄 작전은 점점 소비에트구를 죄어 들어갔다. 장제스의 승리가 거의 눈앞에 다가왔을 무렵인 1933년 말 예측하지 못한 중대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해 11월  일찍이 상해 방어전에서 용맹을 떨친 채정개의 19로군이 홍군 토벌의 임무를 띠고 복건으로 파견되었으나 채정개는 그곳에서 광동 군벌 진명추.이세침 등과 함께 복건 인민 정부 정부를 수립하고 항일 구국을 내세워 독립 정권의 수립을 꾀하였다.

 

장제스는 채정개의 반란에 민감하게 대처하여 그들과 호응하려는 세력을 고립시킬 작전으로 다음해인 1934년 1월 강서.복건성에 군대를 파견하여 공산당과 접촉을 차단하는 한편 채정개의 19로군에 대해서 공격을 가하였다. 아직 체제가 미흡하였던 복건의 반란군은 장제스군에게 여지없이 궤멸되었다.

 

복건의 반란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마오는 과감한 전략을 제안하였는데, 홍군의 주력을 장제스의 심장부인 항주.소주.남경.남창 등에 투입시켜 토벌군을 포위망에서 후퇴시켜 분쇄하자는 안을 제시하였으나 진방헌.오토 브라운에 의해 거절되고 말았다.

 

북건 사태가 일단 수습되자 장제스는 다시 포위 토벌전에 전력을 기울여 1934년 4월 서금의 입구 광창을 점령하엿다. 홍군은고아창 남쪽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전략 거점을 사수하려 하엿으나 막대한 희생자만 내고 서금의 함락이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 해 초여름부터 공산당 중앙은 서금의 근거지를 포기하고 포위망에서 탈출하는 방안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연안 시절의 모택동-

1935년 장정을 끝마치고 안착한 공산당의 수도 연안의 토굴집(요동) 안에서

 

 

 





-모택동과 주은래-

문화대혁명 당시 공산당 내의 서열 1위는 모택동, 2위는 주은래, 3위는 모의 후계자로 지목된 임표였으며 4위는 강생, 5위는 모의 야심찬 부인이었던 강청이었다.

 



-모택동과 하자정-

양계혜가 처형당하고 1930년에 재혼한 부인인 하자정은 모의 아이를 셋이나 낳았지만 그에게 이혼당하고 말았다. 1934년, 홍군이 국민당군에게 쫓겨 대장정에 오르기 직전, 하자정은 아직 어린 두 남매를 강서성의 농부에게 맡긴다. 험난한 피난길에 아이들을 동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모택동은 중일 전쟁이 끝난 후에야 아이들을 찾아나설 수 있었지만 어디서도 농부와 아이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1937년, 연안에서 하자정은 모의 딸을 낳았지만  모가 다른 여인과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공산당 특별법정에 남편을 고발하지만, 법정은 오히려 모의 편을 들어 하자정모녀와  모와 바람을 피운 통역을 연안에서 추방시키고 만다.

 

 



-장개석과 모택동-

1945년 8월 찍은 사진. 일본의 항복 후, 두 사람은 중경에서 만나 회의를 갖는다. 서로의 속내를 감추고 만난 독재자들,,, 4년 후 공산당군(인민해방군)은 내전에서 승리하여 정식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김일성과 모택동(1954)-

둘 다 노동자.농민을 위한 지도자로는 탐욕이 넘쳐나는 모습으로  너무 뚱뚱하다는....

 

 



-모택동과 장남 모안영-

양계혜가 낳은 장남, 모안영은 동생 모안청과 함께 러시아에서 교육받았지만, 50년대 후반, 중소분쟁이후(어쩌면 그 이전부터) 모택동은 자신의 아들들을 러시아로 보내 교육시킨 것을 후회했다. 장남인 모안영은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휴가를 즐기는 모택동-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택동-

1950년대부터 임표에 의한 모택동의 우상화는 시작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것은 당연시되어 갔다.

 

 

 



-하향응과 모택동-

하향응은 송경령과 더불어 중국혁명의 어머니라고 할만한 인물이다. 그녀는 또한 중국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기도 하다. 국부 손문(쑨원)의 동지이자 국민당의 좌파였던 남편 료중개가 암살당한 후 그녀는 송경령과 더불어 국민당내부의 좌파를 이끌며 공산당과의 연합에 힘썼다.

 

 



-모택동과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

공산당 인사들은 부의를 신중히 다뤘다. 부의는 청조의 마지막 황제로서 공산주의가 어떠한 인간유형도(심지어는 황제조차도)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개조해 낼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산 증거였기때문이다. 1967년,문화혁명의 와중에 부의는 방광암에  걸려 돌봐주는 이 없이 병원의 한구석에서 쓸쓸히 죽었다.

 

 

 



-모택동과 에드가 스노우- 에드가 스노우는 중국홍군, 더 정확히 말해, 중국 최초의 공산주의자들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 책 "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해진 미국출신의 기자이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죽는 순간까지도 변함없이 중국공산당과 모택동을 신뢰했다. 그는 중국과 대결관계에 있는 소련이나 모택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철저히 나쁘게 썼다.

   

 

그 해 7월 '방지민'이 지휘하는 부대가 복건 북부에서 포위망을 똟고 탈출한 데 이어 8월에는 탈출하는 부대가 계속 늘어났다. 9월 들어 군사전략의 실패가 분명히 드러나자 '진방헌.오토 브라운'의 판단은 더욱 혼돈 상태에 빠졌다. 10월 초 모든 부대의 탈출이 결정되고 탈출 준비는 고작 1주일이었다. 당시 마오는 운도에서 말라리아를 앓고 있었다.

 

홍군은 10만 명의 장정군과 3만 명의 후위 부대로 편성하고 '마오.주덕.저우언라이.왕가상.유백승.오토 브라운'이 군사 평의회를 구성하여 장정군을 지휘하였고 후위 부대는 '진의.항영'이 지휘했다.

 

10월 10일 10만 명의 홍군 장정 부대는 '서금.운도.장정.영화' 등 각 근거지에서 가을 바람이 부는 강서 들판을 떠나 대장정의 길에 올랐다. 선두는 '임표'의 제1군단과 '팽덕회'의 제3군단이 담당하였으며 '저우언라이'의 부인 '등영초', '주덕'의 부인 '강극청', 마오의 부인 '하자정' 등도 그 대열에 끼었다.

 

장정의 길은 고뇌와 희망, 갈등과 우애가 뒤섞인 비장한 드라마였다. 장정길에 오른 지 2개원 반쯤 되어 홍군은 '준의(귀주성)'에서 12일 동안 휴식을 취하며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이것이 이른바 '준의회의'로서 마오가 홍군의 지도권을 회복한 중요한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마오는 당과 군의 간부들을 모아 놓고 홍군의 임무가 단순한 전투행위기 아니고 대중활동과 대중의 조직화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항일전을 위해 '섬북(선서.하남)'으로 진격한다"는 대목표를 천명했다.

 

이렇게 항일을 결정한 홍군은 다시 장정길에 올랐다. 대장정은 '사천.감숙'을 거쳐 '섬서'에 이르는 험난한 길을 지나 '섬서' 북부에 있던 '유지단'이 건설한 작은 근거지가 있었으므로 일단 그곳에서 항일 거점으로 하기로 하였다.

 

장제스는 홍군이 사천으로 들어갈 것을 예상하고 사천 북쪽의 장국도 근거지를 공격하자 장국도가 사천 서쪽으로 후퇴함으로써 마오의 제1방면군을 맞아들일 근거지가 없었다.

 

그러나 홍군은 마오의 특유의 작전을 전개하여 사천으로 향하는 척 하다가 급히 서쪽으로 진군하고 다시 뒤돌아서 '준의'로 돌아오는 등 장제스의 수색 작전을 교란시키며 '사천'에서 '감숙'으로 가는 길 대신 그 바깥의 '운남'에서 '서강'으로 향하는 이른바 중국의 서쪽을 크게 원을 그리며 북상을 계속하였다.

 

도중에 그들은 국민당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양자강 상류 '금사강'을 건너고 '대도하'를 건너기 위해 '안순장'에 다다랐다. '금사강'을 건넌 후에도 사천 지방을 북상하면서 국민당군의 공격을 받았다. 홍군은 처음 '안순장'에서 '대도하'를 건너려 하였으나 국민당군의 추격과 배가 모자라 그곳에서 140킬로미터 상류에 있는 '노정교'를 국민당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으면서 건너야 했다. 대도하의 도하는 임표의 선봉대가 24시간 만에 120킬로미터를 강행군하는 고투 속에 이루어 졌다.

 

어렵게 '대도하'를 건넌 홍군은 티베트로 향하는 해발 4천 미터의 대설산이 가로놓여 있었다. 홍군은 쓰러지는 병사들의 시체를 넘어 은백색의 설산을 넘었다.

 

홍군은 6월에 '호북'의 근거지를 출발하여 '사천'을 관통하여 '감숙'까지 온 장국도의 제4방면군과  사천 서쪽의 '무공'에서 만났다. 마오의 제1방면군은 2만 명, 장국도는 5만 명의 병력이었고 앞으로의 진로 문제로 의견이 충돌하였다. '양하구.모아개'에서 두 차례에 걸쳐 양군 간부회의가 열려 타협이 이루어졌다. 양군을 합쳐 동방,서방 종대를 편성하여 동방 종대는 마오가, 서방 종대는 장국도가 지휘하기로 하고 서방 종대는 장국도의 지휘하에 8월 말에서 9월 초 다시 북상하였다. 그들 앞에는 감숙.청해.서강.사천에 걸쳐 대초원 지대가 가로놓여 있었다. 우기에는 늪으로 변하여 도보행군이 불가한 지역이엇다. 그러나 홍군은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근 10여 일에 걸친 행군 끝에 막 초원을 벗어날 즈음 장국도는 더 이상 북상을 반대하고 자신의 사방 종대는 물론 동방 종대의 제4방면군까지 남하를 명령했다.

 

마오는 거의 대부분의 병사를 빼앗기고 약 8천 명의 병사만 대리고 다시 북상하였다. 장국도는 계속 남하하여 사천.서강 소비에트를 수립하였으며 제1방면군의 주덕과 유승백도 합류하고 있었다. 마오는 저우언라이.팽덕회.임표.동필무 등과 같이 9월 '남지구'에서 국민당군을 부찌르고 10월 '육반산'을 넘어 20일에는 섬북 소비에트의 제15군단 사령 '서해동'이 마중하는 '오기진'에 도착하엿다.

 

마오가 연안에서 50킬로미터 쯤 떨어진 궁벽한 소비에트구 '보안'에 도착한 것은 1935년 11월 7일이었다. 나중에 다시 연안으로 이동하였다. 마오는 병사들에게 장정의 완료를 선언하고 고뇌에 찬 홍군의 대장정은 이로써 끝이 났다.  

 

장정은 실로 엄청난 고통과 시련의 길이었다. 국민당군의 공격으로 수많은 희생을 치렀음은 물론 열여덟 개의 산맥을 넘고 열일곱 개의 강을 건넜으며 열두 개의 성을 가로지르는 장장 1만 2천 킬로미터의 대장정을 기록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36년 10월 사천에 남아있던 주덕, 호남.귀주의 근거지에서 1년 전에 떠났던 하룡의 제2방면군이 마오와 합류하였다. 이것은 홍군의 3대 주력이 합류한 것이며 마오의 연안 정권의 성립과 새로운 공산당사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