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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20 (중화민국의 시련 7 : 장제스 등장, 북벌과 통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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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20 (중화민국의 시련 7 : 장제스 등장, 북벌과 통일)

두바퀴인생 2010. 6. 17. 04:36

 

 

중국의 역사 120 (중화민국의 시련 7 : 장제스 등장, 북벌과 통일)

 

 

 장제스

 

장제스(중국어 정체: 蔣介石, 병음: Jiǎng Jièshí, 영문 표기: Chiang Kai-shek, 통용: 장개석,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 또는 장중정(중국어 정체: 蔣中正, 병음: Jiǎng Zhōngzhèng)은 중국의 군인, 정치·군사 지도자이다. 종교는 기독교이며, 황푸군관학교 교장, 국민혁명군사령관,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 중국 행정원장, 국민정부군사위원회위원장, 중국 국민당 총재, 삼민주의 청년단 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5월 20일부터 1949년 1월 21일까지는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중국 본토의 국가원수를 지냈고 1950년 3월 1일부터 1975년 4월 5일까지 2~5대 중화민국 총통을 역임했다. 1930년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다.

 

장제스
출생 1887년 10월 31일(1887-10-31)
청나라의 국기
청나라 저장 성(浙江省) 펑화 현
사망 1975년 4월 5일 (87)
중화민국의 국기
타이완
사인 병사
거주지 중화민국의 국기타이완 타이베이
국적 청나라의 국기청 제국
중화민국의 국기중화민국
별칭 장중정(蔣中正)
학력 바오딩군관학교
직업 독립운동가, 사상가, 정치가, 중화민국 총통
종교 기독교
배우자 마오푸메이(毛福梅), 야오이청(姚怡誠), 천제루(陳潔如), 쑹메이링(宋美齡), 일본여인(첩)
자녀 장징궈(蔣經國), 장치엔화, 장웨이궈
부모 장지총(蔣肇聰), 왕차이위(王采玉)
친척 장샤오옌(손자)·쑨원(인척)
장제스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
별명 장중정(蔣中正)
태어난 곳 청제국 저장 성(浙江省) 펑화 현
죽은 곳 타이완
복무 중화민국 육군
근무 육군, 황포군관학교, 국민당군 원수,
주요 참전
전투/전쟁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생애

유소년기

1887년에 청 제국 저장 성(浙江省) 펑화 현(奉化県)에서 소금상인 장지총(蔣肇聰)과 왕차이위(王采玉)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중산층 상인 집안이었는데 아버지는 장제스가 8살때 갑자기 죽었다. 전통에 따라 장제스는 이웃마을의 여인 마오푸메이와 결혼하였는데 이 결혼에서 아들 장징궈과 딸 장치엔화를 낳았다.

청년기

장제스와 쑨원

 

장제스가 청소년기를 보낸 시기는 중국 군벌의 군웅할거와 외세의 침입으로 군사적으로 중국이 매우 약해진 시기였고 야심많았던 장은 군문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1906년 바오딩군관학교에서 군사수업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여 1909년 5월 27일 21기로 졸업하였다. 일본에서 그는 다른 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봉건 청조에 반대하고 중국에 새로운 공화국을 세우고자하는 열망을 가지고 중국동맹회에 가입했다.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장은 일본 제국군에서 복무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지자 중국으로 돌아와 혁명군을 이끌었고 군사적인 재능을 보여 쑨원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후 위안스카이의 반동정책에 맞서 싸웠고 잠시 상하이의 지하 폭력조직인 청방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그는 다시 쑨원의 휘하에서 군사업무를 보았고 1923년 쑨원과 그의 아내 쑹칭링을 암살범의 기관총 공격에서 구해내어 쑨원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이무렵 쑨원은 소비에트 연방과 손잡고 제1차 국공합작을 실시했는데 이때 장제스는 군사자문단으로 소비에트로 가서 소비에트군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당시 중국 혁명의 성공여부는 바로 군사력에 달려있었는데 쑨원은 혁명을 실천할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광저우황푸군관학교를 설립하였고 장제스는 그 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장은 이 학교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많이 길러냈으며 황푸학교는 국민당내에서 장제스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

권력에 오름

북벌기간중 장제스, 1926년

 

1925년 3월 12일 쑨원이 죽자 국민당의 권력을 놓고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국민당 우파로 기울었고 쑨원의 또다른 신임을 받고 있던 왕징웨이는 국민당 좌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상대적으로 왕보다 국민당내의 서열이 낮았지만 황푸학교 출신의 부하들의 지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산함 사건을 빌미로 결국 국민당 권력을 잡았다.

 

한편 국민당은 1925년 국민혁명군을 창설하고 장제스는 그 총사령관이 되어 군벌들로부터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쳤는데 이때 국민당군은 세 개의 파로 나뉘어 북쪽으로 진군했다. 이때 우한으로 진군한 왕징웨이등 국민당 좌파는 우한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과 별개의 우한국민당 정부를 세우고 장제스와 대립하게 되는데 난징상하이를 탈환한 후 장제스는 국민당내 좌파와 공산당을 소탕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927년 4월 12일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대대적인 공산당 소탕작전을 펼치고 이후 중국 전역에서 대규모 공산주의자 학살이 일어났다. (4.12사건 참조) 이 사건으로 좌파을 일소한 장제스는 거침없이 북벌을 단행하였고 1928년 6월 베이징을 탈환하고 마지막 남은 펑톈군벌 장쉐량을 복속시켜 마침내 중국을 국민당의 깃발 아래 통일 시켰다.

 

한편 장은 유력하고 부유한 가문인 쑹가문과 유대를 맺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 1927년 쑹메이링과 결혼하였다.

 

장제스는 국민당 정권의 총통이 되어 강력한 군을 바탕으로 권력을 잡았다. 원래 쑨원의 계획대로라면 그는 새로운 중국은 민주적인 절차와 헌법을 가져야 했으나 장은 당면한 현안문제들 (잔존 군벌의 불안, 중국 공산당의 분열, 가속화 하는 일본의 침략)등을 들어 자유주의적 운동을 탄압하고 완전한 개혁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제스는 특히 공산당이 지배하는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기 전까지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지 않기로 하였고 일본은 야금야금 대륙을 침입해 들어왔다. 그는 1930년부터 지속적으로 공산당 지배지역에 대한 토벌전을 벌였는데 완전히 섬멸할 수 없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들에게 유교적 국가숭배의식을 부활시켰고, 신생활운동을 전개했으며 자신을 곧 국가와 동일시하는 정책을 폈다. 특히 남의사와 같은 정보기관을 동원하여 공산주의자와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하였다. 한편 한국의 독립운동을 승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중일 전쟁과 국공합작

장제스와 그의 부인 쑹메이링, 스틸웰

 

계속되는 토벌전으로 중국 공산당은 결국 주요 근거지인 장시 성 해방구를 잃게 되고 홍군은 필사적인 후퇴전술을 택해 중국대륙을 돌아서 산시 성에 이르는 이른바 대장정을 감행한다. 장제스는 옌안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공산당 근거지에 대한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시안 사건을 일으키고 이로서 상황은 급변하여 장제스는 제2차 국공 합작을 결성하여 항일 전쟁에 들어간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장제스는 국민정부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기고 1941년 연합군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 전 4년동안 중국은 단독으로 일본과 교전했다.

중화민국 총통

카이로 회담. 왼쪽부터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1943년 11월 미국루즈벨트, 영국처칠, 소련스탈린이집트 카이로에 모여서 '카이로 회담'을 하였다. 이때 한국 독립 문제를 거론하였고 회의에서는 '한국 민중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킨다'는 결의를 얻어냈다. 그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건의한 것에 대해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으로 하여끔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시킨 것의 원인은 윤봉길의 의거에 있다고 보았다. 1945년부터는 다시 중국공산당과 사이에 국공내전이 발발하여 1949년에는 종국적으로 패배하여 대만으로 도피하게 된다.

한국 임시정부 지원

장개석은 쑨원의 정통 후계자임을 내세웠다. 1919년 8월 쑨원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한다는 방침을 밝힘에 따라 장제스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별다른 지원을 보이지 않았다. 국민당 내에는 황푸군관학교와 조선의용단 인맥인 김규식·김원봉의 일파와 관계를 맺는 군부내 파벌이 존재하였고 장제스는 임시정부나 김규식·김원봉 일파에 대한 특별한 지지입장은 표명하지 않고 있었다.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장제스는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한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수시로 지원금을 보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키던 김구조선민족혁명당 김규식·김원봉 등을 설득하여 연합전선 구축을 권고하기도 했다.

타이완 총통

타이완으로 건너가 그 후 1950년에 총통으로 취임하고 본토 회복을 위한 몇 차례 대륙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내치에 전념하여 한때 부패했던 국민당 조직을 개편했고, 공산 중국에 맞서는 자유의 선봉으로 나섰다. 1950년 6월 대한민국에서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남한에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1949년 대한민국 진해시 이승만 대통령 별장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11월 중화민국을 방문해 장개석 총통과 정상회담을 하였다.

 

1955년 미국은 국민정부와 타이완 방위를 보장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의 방위우산으로 편입하고 그 원조에 힘입어 그후 20년 동안 타이완의 경제발전을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72년초 닉슨의 중공 방문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면서 타이완은 고립되었고 그러던 와중 1975년에 사망하였다. 그가 죽자 아들 옌자진 대행체제를 거쳐 장징궈가 국민당 주석 및 타이완 정부 수반으로 그 뒤를 이었다.

평가와 비판

중정 기념관.

 

장제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관하여는 중화민국의 지도자로서 칭송받는 면과 공산주의자를 탄압한 4·12 쿠테타를 일으킨 독재자로서 비판받는 부정적인 평가의 양면이 존재한다. 장제스는 국공내전에서 패한 이유가 국민당의 부정부패이었기 때문에, 중화민국의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를 강력한 처벌로 일소하였다. 하지만, 국민당이외의 정당들은 형식적인 정당에 불과한 국민당 1당독재, 좌익정치세력에 대한 백색테러로 불리는 우익테러,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탄압으로 중화민국의 민주주의가 늦게 뿌리내리게 한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기타

가계

  • 마오푸메이(毛福梅)
    • 장남 : 장징궈(蔣經國)
    • 장녀 : 장치엔화
  • 야오이청(姚怡誠)
  • 일본 여인
  • 천제루(陳潔如)
  • 쑹메이링(宋美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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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의 등장

 

중산함 사건이 매듭지어진 후 국민정부가 취해야 할 최대의 임무는 손문의 뜻을 이어받아 북벌을 완성하는 일이었다.군벌 세력을 몰아내고 국민당의 손으로 전국을 통일하는 것은 손문 이래의 염원이자 지상목표였다. 그런데 그것을 어느 때 어떻게 수행하느냐가 큰 과제였다.

 

중산함 사건을 종결지은 장제스는 4월 3일 국민정부에 대해 북벌을 건의하였고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4월 16일 장제스를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추천하였다. 이어 6월 5일 장제스는 국민정부로부터 국민혁명군 총사령에 임명됨으로써 북벌 계획은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 무렵 북방 군벌은 한 때 세력을 떨치던 단서기가 실각하고 대신 국민군을 자처하는 풍옥상이 부상했다. 장작림의 봉천군, 손전방의 신직례군, 오패부의 구직례군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호각지세를 이루고 있었다.

 

국민정부로부터 북벌 전권을 위임받은 장제스는 마침내 7월 9일 북벌 전쟁을 개시하였다. 공산당은 북벌이 시기 상조라며 반대하였으나 막상 북벌이 개시되자 노동자,농민을 움직여 호응하였다. 총사령부의 진용을 보면 참모장에 이제침, 행영참모장에 백승희, 비서장에 소력자, 정무국장에 진공박 등이었고 혁명군은 8군으로 편성하여 총병력 10만 명이었으나 그 후 귀주군을 합하여 다시 9군, 10군으로 편성하였다.

 

북벌군의 제1목표는 오패부의 세력하에 있는 무한으로 정하여 재4,6,7,8군이 중앙군으로 무한을 공략하고, 제2,3,5군은 우익군으로 남창.구강을 공략하고, 제1군은 복건.절강을 공격하고, 제9,10군은 조익군으로서 형주.사시를 공략하기로 하였다.

 

북벌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중앙군은 8월 12일 장사를 점령하고 10월 10일에는 무창을 공략하여 오패부를 하남으로 몰아냈다. 우익군은 총사령관 장제스의 지휘하에 손전방군을 격파하여 11월 8일에는 남창을 점령하고 강서성을 국민정부의 수중에 넣었다. 북건을 공격했던 제1군은 12월 12일 복주를 점령하데 이어 절강군 진의의 호응으로 항주까지 점령하였다.

 

계속하여 북벌군은 상해와 남경을 공략하여 3월 22일에는 상해, 24일에는 남경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해서 양자강 이남은 국민정부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됨으로써 군사작전은 일단락을 보게 되었고 혁명 정세는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무한과 남창의 분열

북벌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서 양자강 이남의 노동자 .농민들은 중국 공산당의 치밀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조직화되어 1926년 호남에서 조직화된 노동자.농민 수는 6만 명에서 11만 명으로 급증하였고 이런 추세는 폭풍처럼 확산되어 1927년 2월에는 적어도 2백만 명에 이르렀다.

 

이와같은 농민 운동의 확대는 공산당 세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정치적 역량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좌우 양파의 세력변동에 영향을 주어 등연달.송경령(손문 미망인).하향응 등을 중심으로 하는 좌파와 협동하여 반우파 투쟁을 전개시켜 장제스를 중심으로 하는 우파와 심각한 대립을 초래하게 되었다.

 

좌우 양파 대립은 국민정부 이전 문제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장제스는 남창을 점령한 후 총사령부를 그곳에 설치하고 국민정부의 남창 이전을 주장하였으나, 국민당 중앙 및 국민정부 연석회의에서는 무한 이전을 결의하여 1927년 무한에서 정무를 집행하였다. 무한 정부는 좌익 법률가인 서겸,손문 미망인 손경령, 손문의 큰 아들 손커가 지배했다.

 

그러나 우파는 장제스의 주장에 동조하여 남창에 본부를 두고 결집함으로써 사실상 국민당 및 국민정부의 좌우 양파는 무한과 남창으로 분열되었다. 장제스는 자기 편이 된 북부 군벌과 상해의 금융인들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면서 2월과 3월에는 좌익과 결별하려는 연설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무례함과 잔임함을 비난하였다. 이에 무한의 좌익 세력은 장제스의 당권.군권.정권 등을 박탈하여 총사령관직을 박탈하고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격하한다고 결의했다.

 

4.12 쿠테타

중국 최대의 도시 상해는 1919년 이후 노동 운동의 중심지이면서 중국인 금융단체와 세계 열강들의 주요 근거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중요성으로 좌파든 우파든 상해를 장악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고 치열한 상해 쟁탈전이 벌어졌다.

 

1926년 11월과 1927년 2월 등 2회에 걸쳐 상해의 공산주의자와 노동조합은 상해 북부의 군사 요새에 대해 무장봉기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3월 18일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상해 총공회는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80만 명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저우언라이.나역농의 지도하에 5천 명의 노동 무장 치안대가 가세하는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21일 손전방군 및 봉천파의 장총창의 북방 연합군을 패주시킴으로써 군벌로부터 상해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22일에는 상해 시민대회를 열어 31명의 임시혁명위원회 및 19인의 정무위원을 선출하여 혁명시정부 조직을 결성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상해의 '3월 혁명'으로 '북벌 전쟁' 중의 노동자 투쟁에서의 승리였다.

 

이보다 앞서 1월3일 무한에서 영국 수병과 무한 노동자 사이에 불상사가 발생하여 노동자들이 무장 치안대를 선두로 영국 조계를 점령하였고 1월 6일 구강에서도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 구강의 영국 조계도 중국측에 회수되었다.

 

장제스 군대가 상해에 도착한 것은 3월 23일이었다. 상해의 '3월 혁명' 이후 각 열강들은 혁명에 대한 무력 간섭을 발동했다. 그것은 3월 24일에 있었던 '남경 사건'이 계기가 됐다. 이 남경 사건은 국민혁명의 전환점이 되어 장제스로 하여금 반동화 구실을 주게 되었다.

 

이른바 '남경 사건'이란 3월 24일 국민혁명군이 남경에 들어 왔을 때 혁명군의 병사가 영국.미국 영사관.교회에 들어가 선교사를 살해한 사건을 말한다. 그러자 양자강에 대기하던 영국.미국 함대가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남경 시내를 포격하여 2천 명 이상의 민중과 병사들이 희생되었다. 조사에 착수한 외국조사반은 선교사 폭행 사건이 혁명군에게 패퇴하던 봉천 군벌 병사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증거를 포착하였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이야 어찌되었던 열강들의 생각하는 문제는 이 국민혁명이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상해에 도착한 장제스는 상해 부르주아 지지를 얻어 일본.영국.미국.프랑스 등과 정치적 협상을 벌여 각국의 중립 양해 아래 청방.홍방 등의 비밀조직을 매수하였다. 이들 두목들은 상해의 아편 무역과 밀수를 지배했으며 기습작전에 필요한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장제스는 4월 12일 상해의 노동자들에게 무장해제를 명하고 상해 총공회를 습격하여 공산당원을 체포하고 혁명시 정부와 국민당 상해시 당부를 봉쇄하고 노동자들에게 무차별 발포하여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또 15일에는 광동에서도 같은 사건이 일어나 노동자의 저항은 실패로 돌아갔다. 저우언라이와 같은 공산당 지도자 일부는 도망쳤고 무력이 부족한 노동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4월 18일 장제스의 국민당 우파는 무한의 혁명 정부에 대항하여 남경에 국민정부를 조직하였다. 이로써 중국에는 국민당 좌파 및 공산당 연합정부인  '무한 정부', 장제스가 주도하는 국민당 우파의 '남경 정부', 그리고 북경의 군벌 정부의 3정권이 대립하게 되었다. 이들의 세력판도를 대별하면 무한 정부는 광서.호북.호남을, 남경 정부는 강소.절강.안휘.복건.광동을 장악하였고, 군벌 정부는 황하 이북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였다.

 

무한 정부의 와해

4.12 반공 쿠테타로 상해에서 패퇴한 무한의 국민 정부와 국민당 중앙당부는 곧바로 장제스의 파면과 토벌을 선언했다.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의 유대는 그 후 약 3개월에 걸쳐 유지되었으나 그 내부에서 반동 회의의 경향이 급속히 출현함으로써 분열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정세하에서 중국 공산당은 무한에서 제5차 전대회를 개최하여 혁명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으나 오히려 분열을 조장하는 결과만 초래하였다. 무한 정부가 장악한 지역의 혼란과 분열은 남경정부에 의해 행해진 경제봉쇄 작전과 군사적 난국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4월 하순 한구의 부두에는 열강들의 군함이 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한구의 외국기업은 활동을 정지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부유층은 현금을 챙겨 한구를 떠남으로써 무한 정부는 경제적 타격이 심화되어 파산 상태에 몰렸다.

 

이런 위기 상태에서 6월 1일 스탈린으로부터 중국 주재 코민테른 대표 '로이'에게 긴급 훈령이 떨어졌다. 이 지령의 내용은 부유층 토지 몰수, 당원 2만 명 무장화, 5만 명의 노동자.농민 선발, 혁명재판부 설치 등으로 급격한 변화 이상의 지시였다. 그런데 '로이'는 이 훈령을 무한 정부의 주석이며 국민당 좌파인 '왕조명'에게 보여줌으로써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의 결렬은 가속화 되었다.

 

7월 13일 중국 공산당은 대시국선언을 발표하여 국민당의 반동화를 공격하는 한편 무한 정부에서 퇴거를 권고했다. 이에 '왕조명'도 7월 15일 공산당과의 분리를 선언하고 국민당.국민정부 및 국민혁명군에게 공산당원의 축출을 권고하였다. 계속해서 28일 '국공분리 선언', '중국 공산당에 고함'을 발표함으로써 3년 7개월에 이어졌던 '제1차 국공합작'의 결렬과 함께 무한 정부도 붕괴되었다.

 

무한 정부의 붕괴는 국민혁명의 성격에 변화를 가져왔다. 손문의 미망인 '송경령'이 항의성명을 발표해 국민당이 반공으로 변화된 데 대해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반공정책은 손문의 정책이 아니며 그의 정책을 추종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손문의 추종자라 볼 수 없다. 당은 혁명의 당이 아니며 단지 군벌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당은 민중을 압박하는 기계나 도구로 변하여 현재의 노예를 이용하여 한마리의 기생충을 살찌우는 결과만 초래할 것이다. 지금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여 중국에서 혁명을 회피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송경령'은 무한 정부가 붕괴된 후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망명지인 모스코바에서 1927년 12월 그녀의 동생 '송미령'이 장제스와 결혼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장제스의 중국 통일

국공합작이 결별된 후 무한 정부는 장제스의 하야를 요구하는 등 면목을 약간 세우는 조치를 취한 후 8월 19일 당을 청소하고 당권 확립을 조건으로 남경 정부와 통합을 선언함으로써 명목상으로도 무한 정부는 완전히 소멸하였다. 장제스는 화해 무드를 조성하기 위하여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을 사임하고 한때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928년 1월에는 다시 국민혁명군 총사령으로 복귀하였다. 이어 2월의 국민당 제2기 4중전회에서 장제스는 국민혁명군위원회 주석이 되고 3월에는 중앙정치회 주석에 취임함으로써 명실 상부한 군.정의 실권자가 되었다.

 

당내 결속이 이루어지자 장제스는 북벌 재개를 선언하고 새로운 국민혁명군을 편성하였다. 제1군단은 총사령 '장제스', 제2군단은 '풍옥상', 제3군단은 '염석산', 제4군단은 '이종인'이 지휘하는 4개 군단으로 편성했다.  1928년 4월 북벌군이 북상을 개시하자 '손전방.오패부' 등의 군벌은 이미 양자강 이북으로 피하였으며 북경에는 봉천 군벌인 '장작림'이 군벌들을 규합하여 '안국군총사령'이라 칭하면서 그의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총공격을 개시한 북벌군은 충천한 사기와 강력한 공격력으로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2개월 후인 6월 8일 북경을 무혈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날 북경의 하늘에는 국민당의 깃발이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7월 6일 장제스는 '풍옥상.염석산.이종인' 등과 함께 북경 교외의 서산 벽운사에 모여 손문의 영구 앞에 분향하고 북벌의 성공을 보고했다. 국민혁명군이 광주를 출발한 지 거의 2년 만에 수없이 많은 정치적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구군벌을 몰아내고 일단 북벌에 성공함으로써 장제스 국민당 승리의 날이었다. 그러나 이 북벌의 2단계 과정에서 두 가지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일본의 산동 출병'과 '장작림의 폭사사건'이다.

 

국민혁명군에 의한 북벌이 시작되자 일본은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청도와 제남에 약 2천 명의 군대를 파견하였고 뒤이어 1928년 4월 북벌이 재개되자 당시 일본의 '다나카 '내각은 다시 4천 명의 군대를 추가 파병하였다.

 

한편 5월 1일 국민혁명군이 산동의 군벌을 무찌르고 제남에 입성하자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긴장감이 돌았다. 5월 3일에는 양군 사이에 약간의 충돌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은 1만 5천 명을 추가로 청도에 파병하였고 제남을 총공격하였다.

 

장제스는 일본과 거류민을 보호하는 등 화해 정책을 추구하여 왔으나 일본의 병력 증파에 대하여 도발행위로 간주했다. 장제스는 가능하면 일본과 직접 충돌을 회피하면서 북벌을 계속하여 북경에 입성하였으나 바로 그 때 장작림 폭사사건이 발생하였다.

 

안국군 총사령관 '장작림'은 북벌군이 계속 북상하자 북경과 천진을 사수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일본은 장작림이 패배할 것을 에상하고 '장작림'의 패잔병이 동북 3성으로 도망칠 경우 그를 추격하는 국민혁명군이 일시에 이 지역으로 몰려들 것을 염려한 끝에 공사 '요시자와'에게 훈령을 내려 '장작림'이 심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였다.

 

6월 3일 장작림을 태운 특별 열차가 북경을 출벌하여 심양역에 도착하기 직전인 4일 오전 5시 만철선과 교차하는 지점에 도착하는 순간 '꽝'하는 굉음과 함께 열차가 폭파되면서 '장작림'은 폭사하였다.

 

'장작림' 폭사사건은 일본 관동군 '가와모토' 대좌가 게획하였는데 그들이 장작림을 폭사시킨 것은 동북 3성을 혼란에 빠뜨려 이를 기화로 관동군이 이 지역을 장악하여 일본의 권익을 확보하기 위한 음모였으며 3년 뒤에는 만주사변을 일으킬 전초전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당초 일본 군부가 예상했던 것과는 엉뚱하게 귀결되엇는데, '장작림' 폭사 소식을 들은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이 북경에서 심양으로 달려와 후계자가 되었다. 일본 군부는 '장학량'을 조종하여 국민혁명군과 결별하도록 할 계획이었으나 '장학량'은 그들의 조종에 넘어가지 않고 일본의 흉계에 의해 '장작림'이 폭사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중국의 대세도 장제스에게 기울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장학량'은 일본과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1928년 12월 말 남경 정부와 합류하였다. '장학량'은 남경 정부로부터 '동북방면 총사령'에 임명되었고 '봉천성.길림성.흑룡강성'의 동북 3성에는 청천백일기가 나부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