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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19 (중화민국의 시련 6 : 손문의 죽음과 국민당의 분열) 본문
중국의 역사 119 (중화민국의 시련 6 : 손문의 죽음과 국민당의 분열)
손문의 죽음과 국민당의 분열
1924년 8월 광주에서 '상단군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광주에는 '진염백'이라는 영국 은행의 매판(수출입 중개인)을 우두머리로 하는 상인들로 구성된 광주상단이라는 조직이 있었다. '진염백'은 영국 정부를 배경으로 혁명정부에 불온한 행동을 일삼아왔다. 손문은 그들이 무기를 밀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장제스'에 명하여 '등언화(대본영 부관')와 협력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진염백'의 배후에는 영국이 도사리고 있었다. 영국은 손문이 소련과 제휴하는 것을 경계하여 소련과 대항할 상인들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무기를 사들이게 하였다. 손문의 지시를 받은 장제스는 '등언화'와 함께 '백아담'에서 '진염백'의 무기 밀수선을 발견하고 황포 군관학교로 예인하여 정박시키고 9천 정의 무기를 압수했다.
8월 19일 손문은 상인단에 서한을 보내 '진염백'의 음모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상인단에 반역행위를 하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상인단은 8월 20일 압수한 무기의 무조건 반환과 상인단의 군사 조직으로 연방총부를 조직하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손문이 이 요구를 거절하자 상인단은 총파업에 들어갔고손문은 무력행사까지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지금까지 배후에서 '진염백'을 조종하던 영국이 끼어 들어 중국 정부가 무력을 사용한다면 영국도 상인단을 지원하겠다고 맞섰다. 손문은 9월 1일 '대외선언'을 발표하고 제국주의 열강들의 반혁명 지원 행위를 비난하면서 영국 수상에게 '중국 내정간섭'에 항의하는 전문을 보냈다. 이러한 조치로 긴급사태는일단 수습되었다.
이 무렵 북방 군벌의 정세도 매우 복잡하여 봉천 군벌인 '장작림'과 직례 군벌인 '조곤.오패부' 등이 충돌 일보 직전에 이르렀다. 9월 16일 마침내 '장작림'과 '오패부' 사이에 제2차 '봉직 전투(봉천파와 직례파의 싸움)'가 일어났고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손문은 18일 북벌에 나섰다.
정부군의 북벌로 광주가 텅비자 10월 11일 상인단은 선전 삐라를 뿌리면서 정부를 모욕했다. 이어 상인단의 무장부대가 출동하여 정부군과 대결할 태세마저 보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정부군은 13일 '오철성'으로 하여금 3천 명의 경위군을 통솔케 하여 광주로 급파하였고 호남군 3천 명도 광주 현지로 이동시켰다. 14일 손문은 전군의 지휘를 장제스에게 위임한다는 명령을 보냈고 15일 오전 4시 장제스가 지휘하는 정부군이 반격을 개시하자 상인단과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정부군의 분단 포위작전이 효과를 거두어 상인단 부대는 순식간에 무너져 대부분 투항함으로써 사건은 쉽게 진압되었다.
이번 전투에서 승리의 주역은 황포 군관학교 군관들이었는데 처음으로 모습을 민중들 앞에 나타낸 군관들은 일사분란한 행동으로 광주 시민들의 열렬한 박수와 갈채를 받으면서 환영을 받았다. 이로써 군관학교는 앞으로의 북벌 전쟁에서 백전백승하는 관문의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1924년 11월 13일 손문은 북경 정부의 군벌 '장작림'과 '단기서'로부터 회담 요청을 받고 북경으로 가는 도중 황포 군관학교를 방문하여 격려하였다. 북경 군벌은 제2차 '봉직 전투'에서 '조곤.오패부'가 실각하고 '장작림.풍옥상'이 승리함으로서 '단기서'가 다시 새로운 실권자로 등장하였다. 손문의 북경 방문은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손문은 북경으로 가는 길에 일본에 들러 불평등조약 폐지 운동에 대한 일본측의 이해와 지원을 요청했다. 고베에서 유명한 '대아시아주의'라는 제하의 연설로 주목을 받았고 이 연설에서 '일본이 아시아의 발전을 위해 패도를 버리고 왕도를 선택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어 12월 31일 손문이 북경에 도착하자 15만 명의 북경 시민들이 그를 환영함으로써 중국 국민의 손문에 대한 기대를 여실히 반영했다. 그러나 이때 손문은 지병인 간장병이 급속히 악화되어 다음해 1월 24,25일 이틀간 전혀 식사도 못한 채 체온이 상승하고 맥박이 빨라졌다. 26일 손문은 협화의원으로 옮겨져 개복 수술을 받았으나 의사는 간암이라고 진단했다. 쾌유를 비는 온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 채 1925년 3월 12일 혁명의 거목 손문은 59세를 일기로 마침내 북경에서 객사했다.
손문은 죽음에 임하여 세 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아마도 그것은 순문의 생애를 결산하는 뜻깊은 염원이며 바램이었을 것이다.
<당원에 대한 유서>
"내가 국민혁명에 힘을 바친 지 어언 40년, 그 목적은 오로지 중국의 자유.평등을 구하는 데 있었다. 40년의 경험으로써 깊이 깨우 친 것은 우리가 이 목적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민중을 일깨워야 하며, 평등으로써 세계 민족과 연합하여 공동 분투해야 할 것이다.현재 혁명은 아직도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의 동지들이여! 모름지기 내가 저술한 <건국방략> <건국대강> 및 '제1회 전국대표대회 선언문'에 의거, 계속 노력하여 관철하기 바란다. 이것이 부탁을 드리는 이유이다."
<가족에 대한 유서>
"나는 국사에 전력하느라 가산을 다스리지 못했다. 남기는 서적.의복.주택 등 일체는 나의 처 송경령에게 주어 이것으로 기념이 되게 하라. 나의 딸은 스스로 장성하여 능히 자립하라. 바라건대 각각 자애하고 또 나의 뜻을 이어갈 것을 부탁한다."
<소련에 대한 유서>는 생략
손문의 시신은 영구 보존을 위해 방부조치가 취해졌다. 북경 정부는 국장을 제의했으나 국민당의 북경 주재 위원은 국민 평등이라는 손문의 사상을 고수하여 국장을 거절하였다. 손문의 관은 1925년 3월 19일 24명의 동지들에게 운구되어 년도에는 12만 명의 군중들이 나와 손문을 배웅했다. 4얼 2일 영구는 북경의 '백운사'에 안치되엇다가 손문의 유언에 따라 그로부터 4년 후 전국이 통일된 1929년 6월 남경의' 자금산'에 안장되었다. 손문의 죽음은 중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언론들까지도 애도성명을 발표하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손문이 죽은 후 국민당 내부에서는 분열의 움직임이 두르러지게 나타났다. 공산당원이 공산당원의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고 당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는 것은 손문의 위대한 정치적 포용속에서는 가능했으나 그의 사후에는 사실상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1925년 7월 광동에서 열린 국민당 1기 3차 중앙위원회 저체회의에서 국민정부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정부 주석에 '왕조명', 재정부장에 '요중개'가 취임하여 손문의 유언을 관철하려는 좌파가 우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다음달인 8월 20일 '요중개'가 우파에 의해 사살됨으로써 좌우의 대립은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요중개'의 암살 사건은 국민당과 정부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사건 직후 '요중개' 암살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수사 결과 '호의생.임직면.주탁문'에게 체포령이 떨어졌다.
체포령이 떨어지자 세 사람 중 임직면만 체포되고 두 사람은 자취를 감추었다. '임직면'은 심문하는 과정에서 "요중개는 공산당이므로 국민정부의 요직을 맡을 수 없다."고 진술하면서도 범행은 극구 부인했다. '요중개' 암살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진상이야 어쨌던 당내 좌우파 대립은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해 11월 우파의 '대계요.장계.임삼.거정' 등 원로 국민당원의 일부가 북경 교외의 서산 '벽운사'에 모였다. 이들은 4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란 이름으로 공산당원의 국민당원 자격 박탈과 왕조명의 6개월간 당적 박탈 및 공산당적을 가진 중앙위원 9명에 대해 제명을 결의했다. 그러나 광동의 좌파는 이 서산의 모든 결의가 무효라고 주장하고 1926년 1월에 국민당 2차 전체회의를 열어 '이대소'를 중앙위원, '마오쩌둥'을 중앙위원 후보, 손문의 미망인 '송경령'과 요중개의 부인 '하향응'을 각각 중앙위원에 선출함으로써 다시 좌파가 우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을 대하는 국민당의 태도는 뿌리 깊은 것이었다. 장제스는 이 대회에서 비로소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군을 배경으로 한 그는 이때부터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황포 군관학교 졸업생은 이미 3천 명이 넘었는데 이들 가운데는 정부 및 당내에 요직을 차지한 자가 많아 장제스의 지위가 확고해지는 가운데 그 해 2월에는 국민당혁명군 총감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반공에 대한 체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장제스가 반공적인 체질을 드러내게 된 최초의 사건은 이른바 '중산함 사건'으로 , 중산함 함장 '이지룡'이 마음대로 군함을 광동에서 황포로 회항한 일에 대해 장제스가 반란 음모로 탄핵한 데서 비롯되었다.
'중산함'은 4년 전에 있었던 진형명의 반란으로 55일 동안 해상에서 손문과 운명을 함께 했던 '영풍함'으로 손문이 죽은 후 그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 손문의 호를 따서 '중산함'으로 개명한 것이다.
1926년 3월 18일 오후 5시 수리를 마친 중산함이 명령도 없이 황포 군관학교로 회항해 "교장의 명령에 따라 여기에 대기한다."고 군관학교 교육장 '등연달'에게 통고해 왔다. 당시 교장 장제스는 마침 광주에 가 있었는데 이 보고를 받은 그는 자신이 중산함의 화항을 명령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황포에 정박한 중산함은 총포의 덮개를 벗기고 계속 보일러에 불을 때면서 임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9일에는 더욱 의심스러운 일이 있었는데 한 동지가 장제스에게 "오늘 황포에 갈 계획이냐?" 고 물었고 그가 갈 계획이라고 대답하자 그 동지는 다시 전화로 언제쯤 갈 것인가?" 라고 세 번이나 물었다. 세 번이나 전화를 받은 장제스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한 시간쯤 후에 공산당원이며 해군국장 대리인 '이지룡'이 전화를 걸어 "중산함을 광주로 회항시켜 참관단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어떻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장제스가 "중삼함은 언제 황포로 갔는가?"라고 묻자 "어젯밤에 왔노라."고 '이지룡'이 답변했다. "나는 황포로 가라는 명령을 내린적이 없으니 광주로 회항하는 것도 당신의 뜻대로 하면 될 터인데 나에게 구태여 묻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하자 '이지룡'은 중산함을 황포로 회항시킨 것은 교장의 명령임을 되풀이 하였다. 그런데 광주로 되돌아온 중산함은 여전히 불을 때고 있었다. 무엇인가 불온한 책동이 감지되자 장제스는 신속한 조치를 취해야 겠다고 판단하고 광주 위수사령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우선 해군학교 부교장 '구양격'에게 신속히 해군 함대를 장악하라고 명령하고 '이지룡'을 체포하여 엄중 취조하였다. 반란 평정 뒤 알려진 사실은 '이지룡'은 장제스가 광주에서 황포 군관학교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를 결박하여 중산함에 싣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데려가 억류시킬 작정이었다.
사건배후에 코민테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국민정부와 장제스는 보르딘 이하 18명의 러시아인 고문을 추방했다. 이로써 장제스는 소련인에 의해 국민당 지배를 약화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아울러 자신의 정치적기반을 굳건히 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