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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15 (중화민국의 시련 2 : 군벌의 등장) 본문
중국의 역사 115 (중화민국의 시련 2 : 군벌의 등장)
중화민국의 시련 2 : 군벌의 등장
이러한 가운데 1916년 5월 초순 손문이 상해로 돌아왔다.
손문은 '원세개가 아직도 그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사태를 관망하면서 집권욕을 불태우고 있다.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무력으로써 흉적을 제거하고 헙법에 입각하여 사태를 해결하자."는 요지의 선언문을 발표하여 원세개 토벌의 고삐를 바짝 당겼다. 한편 원세개는 비열한 수단으로 혁명군에게 보복을 감행하였는데 혁명당 지도자인 '진기미'를 암살하였다. 원세개는 수 차에 걸쳐 진기미를 매수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거절당하자 혁명당원 '이해추'를 매수하여 중국인 3명과 일본인 2명과 같이 권총을 난사하여 '진기미'는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중국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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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신화·삼황오제 | |||||||
황하・장강 문명 | |||||||
하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 |||||||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 |||||||
주 기원전 1122~기원전 256 | |||||||
서주 | |||||||
동주 | |||||||
춘추 시대 | |||||||
전국 시대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 221~기원전 206 | |||||||
한 기원전 206~서기 220 | |||||||
전한 | |||||||
신 8~23 | |||||||
후한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촉, 오 | |||||||
진 265~420 | |||||||
서진 | |||||||
동진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20~589 | |||||||
수 581~618 | |||||||
당 618~907 무주 690~705 | |||||||
오대십국 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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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서하 1038~1227 | ||||||
남송 | 금 1115~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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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1271~1368 | |||||||
명 1368~1644 | |||||||
청 1644~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1911~현재 | |||||||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
중화민국 (타이완) |
원세개는 남방의 호국군과 산동의 혁명군의 양면 작전으로 더더욱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풍국장'이 제3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풍국장'은 서주에 있는 '장훈'과 안휘성 성장 '예사충'과 협의하여 5월 17일 아직 독립을 선포하지 않은 17성의 대표와 중앙의 대표를 남경에 모아 '남경 회의'를 열고 '원세개를 잠시 대총통의 자리에 두되 가능한 조속히 국회를 열어 대총통을 선출하자."고 제의했다. '풍국장'은 자신의 제의가 통과될 것으로 확신하였으나 산동성 대표가 원세개의 즉각적인 사직을 요구하자 각 성의 대표들도 이에 찬동함으로써 '풍국장'의 '남경 회의'는 무산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원세개는 자신의 호위군 3개 대대를 투입하여 각 성 대표를 위협한 끝에 다시 회의를 속개하여 원세개의 사임 요구는 철회되었고 다른 결론은 아무것도 내지 못하였다.
남경 회의가 흐지부지 끝난 후인 5월 22일 원세개는 또 한번 놀라운 전보를 받았는데,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사천 장군 '진환'이 결별을 선언하는 전보를 받은 것이었다.
원세개는 전보를 받는 순간 졸도하였고 잠시 후 정신을 차렸으나 바로 병석에 눕는 신세가 되었다. 강철같은 체질을 타고난 그는 15명의 처첩을 거느렸으며 인삼.녹용으로 담근 술을 밤낮으로 복용하면서 정력을 길렀으나 명약도 실의에 빠진 그를 구해내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1916년 6월 5일 밤 집권욕의 화신이며 권모술수의 대가이며 황제 제국을 꿈꾸던 원세개는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죽는 순간에도 "그눔이 나를 죽였지!"라며 권력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남을 원망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원세개의 죽음으로 그가 총괄하던 북양군벌은 '직례파'와 '안휘파'의 두 파로 갈라져 이른바 군벌 할거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직례파'는 '풍국장'을 영수로 하는 '조곤.오패부.손전방' 등으로 미국.영국을 배후로 하였고, '안휘파'는 '단기서'를 영수로 하여 '서수생.예사충' 등이 일본을 배후 세력으로 삼았다. 또한 북양군벌 외에 북방에서는 동북성을 근거지로 하는 '봉천파'의 '장작림'이 신흥군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3파는 북양군벌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다투게 되었고 남부에서는 운남의 '당계요', 광서의 '육영정' 등이 군벌을 형성하여 자파의 세력 확장에 힘을 쏟았다.
원세개가 죽은 다음날인 6월 7일 부총통인 '여원홍'이 대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여원홍'은 자신의 군사가 없어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 '단기서'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였다. 북양군벌의 '안휘파'의 영수인 '단기서'는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여 원세개가 제정한 신약법을 그대로 답습하려 하였다. 신약법은 모든 권리를 대총통에게 집중시킨 것으로 단기서는 '여원홍'만 조종하면 제멋대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손문은 이 같은 군벌들의 횡포를 염려한 나머지 대총통 '여원홍'에게 " 구약법(임시헌법)을 회복하고 국회를 존중하며 국민의 공복으로서 국민과 함게 국가 건설에 헌신해야 한다."는 요지의 전보를 보내고 구약법의 회복을 선언하였다.
손문의 선언에 호응한 해군 총사령 '이정신'이 예하 함대사령관과 함께 구약법을 준수하여 국회를 열지 않으면 해군은 독립을 선언하겠다고 발표하지 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단기서'는 6월 29일 '여원홍'의 이름으로 구약법을 회복하고 국회를 소집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구약법이 회복되자 8월 1일에는 북경에서 정식으로 국회가 열려 지방으로 흩어져 있던 국회의원들이 모두 북경으로 모여들었다. 1914년 원세개에 의해 해산되었던 국회가 실로 2년 만에 열리게 된 것이다.
'여원홍'은 국회에서 정식으로 대총통 선서를 하였고 국회는 '풍국장'을 부총통에 선출하였다. 그러나 '단기서'는 국회의 의사를 존중하기보다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야심만 있을 뿐이었다. 단기서는 먼저 각 성의 군사력을 장악하는 '독군단'을 만들어 그들을 자신이 장악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실권을 잡을 생각이었다. 이런 가운데 또 하나의 문제가 파문을 일으켰는데 1차대전에 중국이 참전하느냐 중립을 지키느냐 하는 문제였다.
참전 여부에 대하여 대총통 '여원홍', 부총통 '풍국장', 외교총장 '오정방 '등은 참전을 반대하였으나 '단기서'는 참전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의 속셈은 참전을 미끼로 일본에서 무기와 차관을 들여와 그것으로 자파의 세력을 강화하여 끝내는 전국을 장악하려는 야망 때문이었다.
5월 7일 참전 여부를 묻는 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단기서'는 원세개가 하였던 것처럼 어용단체인 '공민단' 3천 명을 동원하여 국회를 협박하는 과정에서 20여 명의 국회의원이 몰매를 맞자 국회는 심의를 중단하고 내각은 모두 사퇴하는 등 '단기서'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이에 의회는 내각 불신임을 의결하고 참전 문제도 새 내각이 들어선 뒤에 표결하기로 하였다. 궁지에 몰린 '단기서'는 '여원홍'을 통해 국회를 해산하려 하였으나 '여원홍'은 도리어 대총통 자격으로 '단기서'를 해임한다고 공표하였다. 당황한 '단기서'는 곧바로 전 독군에게 '여원홍' 타도를 호소하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산동.복건' 등 각 성의 독군이 독립을 선언하고 '단기서'의 호소를 거부하고 나왔다.
이렇듯 혼란한 상황을 지켜보던 '장훈'은 6월 2일 조정역을 자처하고 나섰다. 장훈은 '종사당'의 한 사람으로 청조의 부활을 꾀하던 자이다. 그는 이 혼란한 틈을 타 청조의 부활을 실현할 속셈이었다. '여원홍'이 '장훈'의 조정 제의에 응낙하자 '단기서'의 의사를 타진하였다. '단기서'는 국회를 해산하고 '여원홍'을 내쫓는다는 조건이라면 그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이에 '장훈'은 비밀리에 군대를 이끌고 북경에 입성하여 실권을 잡고 단기서는 도피하고 '여원홍'에게 국회해산을 강요했다. 힘이 없는 '여원홍'은 할 수 없이 6월 13일 국회를 해산시켰다. '장훈'은 곧바로 청조 복위 행동에 들어갔고 28일에는 변법자강책을 추진하기 위해 쿠테타를 추진하다 사전 발각되어 해외로 도망하였던 '강유위'가 북경에 들어와 '여원홍'에게 대정(천하의 정치)를 청조에 봉환하라고 강요했다. 이에 '여원홍'은 바로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고 대총통의 관인은 부총통 '풍국장'에게 전했다.
'장훈.강유위' 등은 7월 1일 폐제 '부의(선통제)'와 4명의 전왕비를 방문하여 무릎을 끓고 당시 겨우 12세의 폐제에게 "대정을 회복하여 주시옵소서!"하고 청조의 회복을 상주하였다. 어린 폐제는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장훈'은 '강유위.왕사진'과 같이 머리를 조아리고 '강유위'가 복위 조서를 낭독하자 만세 삼창을 했다. 이로써 청조의 회복이 실현된 셈이다.
그러나 이 같은 청조 회복의 연극은 '장훈'의 오산에서 나온 작품임이 곧 증명되었다. '장훈'은 서주에서 청조 회복을 위한 대회를 개최하고 '단기서.풍국장' 등이 청조 회복에 찬동할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일본의 세력을 등어 업고 있던 '단기서'는 7월 5일 일본으로부터 1백만 원의 군사비를 공급받고 군사를 동원하여 북경을 공략, 12일에는 장훈파의 군대를 완전히 무찔렀다. 이로써 장훈의 청조 복위 연극은 12일 만에 막을 내렸다.
중국의 군벌
7월 14일 '단기서'는 다시 국무총리로 복직하고 '여원홍'은 이번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풍국장'이 '여원홍'의 뒤를 이어 대총통이 되었으나 실권은 '단기서'의 손으로 넘어갔다.
'단기서'가 실권을 장악하자 프랑스 공사는 연합국측의 공사회의에서 결의한 바에 따라 '단기서'에게 독일 및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토록 촉구하였다. 일본은 참전 요구에 앞장서는 것처럼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단기서'를 최대한 이용하여 중국 침략 야욕을 진행시켜 나갔다. 일본을 이용하여 패권을 잡으려는 '단기서'의 야망과 중국에 자신들의 괴뢰정권을 만들어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일본의 야심은 서로 완전히 일치하여 중국의 앞날에는 먹구름이 드리웠다.
1916년부터 중국에 침투한 일본의 세력은 엄청난 것으로 '데라우치' 내각은 '단기서'에게 약 2년 동안 3억 원이 넘는 차관을 제공했으며 '단기서'는 이 자금으로 자신의 군대를 강화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중국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벌간에 혼란만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화민국 군정부의 수립
'삼민주의'라는 커다란 이상을 중국에 펼치려던 손문은 청조나 원세개와 같은 커다란 장애물이 제거된 후에도 '단기서'를 비롯한 군벌들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는 매국도 불사하겠다는 반역 행위를 자행하고 있어 이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손문은 1917년 7월 14일 '단기서'가 '장훈'을 밀치고 북경에 들어왔을 때 전보로 '민국 원년의 약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단기서'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손문은 17일 '주집진.장병린.진형명' 등과 함께 군함 '응서.해침'을 이끌고 상해에서 황포에 도착하여 광동도독 '진병곤'의 환영을 받았다.
손문은 19일 전국 국회의원들에게 전보를 쳐 '광동'에 모여 비상회의를 열 것을 호소했다. 손문의 호소에 따라 해군 총사령관 '정벽광'이 '단기'서 정부와 결별을 선언하고 제1함대 사령관 '임보택'과 함께 휘하 함대를 이끌고 '광동'으로 왔다. '광동'에 집결한 함대는 순양함 3척, 포함 6척, 보조함 4척이었다. '당소의.왕조명'도 '광동'에 합류하였다. 8월18일 손문은 그의 호소에 응한 120명의 국회의원을 '황포 공원'에 초대하여 연회를 열고 비상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비상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중화민국 군정부조직 대강' 13조가 결정되었다. 군정부 책임자로 육해군 대원수 1명과 원수 2명을 두기로 하였다. 대원수에 손문, 원수에 '당계요.육영정'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군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군대는 고작 해군과 새로 모병한 군정부의 위병뿐이었다.
10월 6일 '단기서'의 명령을 받은 '이우문'이 이끄는 호남 육군 제1사단이 '형양' 북동 40킬로미터 지점에 진출하여 군정부군과 충돌함으로써 마침내 '호법 전쟁'은 불을 뿜었다. 격전을 벌인 끝에 군정부군은 한때 '형양'을 빼앗겼으나 11월 들어 세력을 만회하여 '호남.사천'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군정부 내부에서 곤란한 문제가 일었다. '당계요.육영정' 등 원수로 선임된 군벌들이 자파의 세력 확충에만 혈안이 되어 손문의 명령에 움직이질 않았다. 게다가 손문을 지지하던 '정벽광'이 광동성장으로 취임하려 하자 광서군벌이 그를 암살하고 군정부의 위병마져 몰살 당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손문이 믿었던 국회마져 '정학계.익우계.민우계'로 갈라졌고, '육영정.당계'요 등 군벌들은 '정학계'와 결탁하여 북경의 '풍국장'과 은밀히 '남북화평회담'을 꾀하는 한편 손문을 축출할 방법까지 강구하고 있었다.
이들은 5월 4일 비상국회를 소집하여 '군정부 개조안'을 가결하고 5월 20일에는 총재 선거를 실시한 결과 '손문.당소의.오정방.당게요.임보역.육영정.잠춘훤 '등 7명이 총재로 선출되었다.
내부 분열로 난처해진 것은 군정부만이 아니고 북경의 북양 군벌도 마찬가지였다. 주전파인 국무총리 '단기서'와 화친파인 대리총통 '풍국장'이 날카롭게 대립했다. 단기서는 '호남.사천'에서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데 이어 '왕사진'이 국무총리가 되었지만 단기서의 전쟁 해결이라는 정책에는 변함이 없었다.
12월 3일 주전파들은 '독군단 회의'를 열어 풍국장에게 '토벌령'을 내리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따라 풍국장은 단기서를 '참전독판'으로 임명함으로써 단기서는 다시 군의 실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풍국장은 광동 군정부의 '당계요.육영정'에게 비밀리에 사자를 파견하여 화평 공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장강 유역 3독군도 풍국장의 화평 주장에 동조해오자 이에 힘입은 풍국장은 12월 25일 정식으로 정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다음해 1월 북경 정부군의 거점인 '악양'이 군정부군의 수중에 들어오자 이에 당황한 단기서 등 주전파는 봉천 군벌의 '장작림'을 북경을 수비하는 '직례성'으로 끌여들여 풍국장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풍국장은 할 수 없이 호남에 증원군을 파견하고 단기서를 다시 국무총리로 임명하였다.
새로 호남에 파견된 증원군은 '조곤'의 부하 '오패부'가 거느리는 부대로 북양군 가운데 정예부대로 이름이 높은 부대였다. '오패부'는 3월 17일 '악양'을 탈환하고 23일까지 '장사.형양'을 함락하여 호남을 제압하였다. 단기서는 무력 통일이 이제야 실현되는가 하고 낙관하였으나 '오패부'는 거기서 일단 공격을 멈추었다.
호남을 탈취당한 군정부군은 복건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 위해 5월 9일 공격을 개시하였다. 총사령 '진형명'이 중앙에서 지휘하고 '허숭지'가 좌익, 참모장 '등갱'이 우익을 지휘하여 폭넓게 포진하였다. 10일에는 '허숭지'의 좌익군이 복건의 제1여단을 격파하고, 24일에는 '상항'을 함락하여 기세를 올렸다.
이렇게 광주 정부군이 분전할 때 5월 4일 광동의 비상국회에서 '군정부 개조안'이 가결되자 손문은 남북이 모두 패권 투쟁에 열을 올리고 호법을 외치면서도 법을 따를 생각이 없는 현실을 개탄하고 자신의 임무를 그만 둘 생각으로 육.해군 대원수직을 사임하였다.
손문은 5월 20일 비상회의에서 집단지도체제를 위한 7명의 총재를 선출하기 전에 이미 실의에 잠긴 채 일본 상선을 타고 광동을 떠났다. 한편 단기서는 같은 해 9월 국회에서 '왕집당'을 우두머리로 하는 '신교통계'가 4백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여 그의 지배세력이 국회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자 풍국장을 대총통의 자리에서 몰아내려 하였다. 단기서는 개선투표를 실시하여 풍국장을 몰아내고 북양파의 원로 관료 '서세창'을 대총통으로 선출하였다.
단기서는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일본의 지도와 원조로 훈련된 자기 직속의 '참전군'을 투입하여 '당계요.육영정'의 서남 군벌을 제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열강들이 단기서의 이러한 행동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열강들의 압력을 받은 일본도 단기서에 대한 원조를 중단함으로써 입장이 난처해진 단기서는 할 수 없이 전투를 중지하고 1919년 1월 '남북화평교섭'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군벌 할거 체제가 굳어져 그 후 수십 년에 걸쳐 혼전을 되풀이 하면서 '단기서.풍국장.육영정.당계요.진형명.담연개.장작림,염석산.유상' 등의 군벌들이 패권을 다투는 시대가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