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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14 (중화민국의 시련 1 : 원세개의 야망과 최후)

두바퀴인생 2010. 6. 10. 10:58

 

 

중국의 역사 114 ( 중화민국의 시련1: 원세개의 야망과 최후 )

 

 

 

중화민국의 시련 1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v  d  e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원세개의 야망

손문으로부터 임시 대총통의 자리를 물려받은 원세개가 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한 최초의 공작은 내각의 경질이었다. 원세개의 대총통 취임은 1921년 3월 10일 이었고 3월 25일에 성립한 제1차 내각은 총리대신 '당소의'를 포함한 각료 10명 중 육군.해군.외교.내무를 원세개의 심복들이 차지했다. 혁명파는 겉으로 실질적인 동맹회 중심의 내각이라고 평했지만 그것은 지나친 환상에 불과하였다. 권력의 핵심부서는 원세개파가 장악함으로써 혁명파로서는 원세개의 독주를 견제하는 정도의 힘밖에 없었다.

 

1차 내각이 발족한 지 채 열흘도 못 되어 직례도독의 자리를 둘러싸고 원세개와 내각이 대립한 끝에 내각이 해산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원세개가 직례성 의회가 선출한 직례도독 '왕지상'을 남경 주둔군에서 근무하도록 명하자 '당소의'는 임시 약법을 어기는 원세개 밑에서는 총리 역활을 수행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6월 16일 내각을 해산하였다.

 

원세개는 이외에도 내각에 압력을 가함은 물론 자기의 정책에 반대하는 참의원들에게 위협과 공갈도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원세개의 독단적인 행위에 동맹회는 몹시 당황하였다. 동맹회의 '송교인' 등은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정당내각을 구성하여 원세개의 약법 위반 행위를 제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앞으로 있을 선거에 대비하여 입헌파와 동맹회 우파의 포섭 공작을 벌인 끝에 8월 25일에는 의회 최다수 정당인 국민당 창당대회를 북경에서 열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서도 손문은 원세개를 돕기 위하여 철도건설 계획 작성에 골몰하였고, '황흥'은 원세개에게 국민당 가입을 설득하는 등 '송교인'의 의회주의 노선에 따른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제 국민당은 내용적으로 혁명정당이 아니고 혁명당인 동맹회는 거의가 국민당에 흡수되었다. 그 결과 1912년에서 1913년 봄에 걸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상하 양원인 중.참의원 870명 가운데 국민당이 329명을 차지하여 제1당의 자리를 확보하였다.

 

원세개는 의회 기능을 말살해야만 자기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3월 20일 의회주의 노선의 제일 유력자인 '송교인'을 상해에서 암살토록 하였다. '송교인'이 암살되자 배후 인물이 원세개라는 사실이 이 사건을 수사한 강소도독이 원세개의 비서 '홍술조'와 주고 받은 전보에 의해 판명되었다.

 

이때부터 원세개는 혁명파에 대한 무력 탄압에 들어갔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영국 등 5개국 은행에서 2천 5백만 파운드의 선후 차관을 계약하였다. 더욱이 일본은 중립을 지켜오던 지금까지의 자세를 바꾸어 원세개를 통한 중국 침략 정책으로 전환했다.

 

'송교인' 암살 사건과 국회를 무시한 선후 차관 체결 문제는 원세개를 비판하는 대중 운동으로 번져갔다. 그런데 국민당 내부에서는 그 해결책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주장이 엇갈려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 손문은 무력 타도를 주장하였고 '오경렴'은 반대하였으며 '염석산' 등 일부 국민당 도독들은 원세개의 정책을 지지하는 등 분열상을 보였다. 이에 원세개는 국민당 내부 갈등을 이용하여 자신을 비판하던 '이열균.호안민.백문울' 등 3명의 도독을 파면하였다.

 

그러자 1913년 7월 12일 강서도독 '이열균'은 손문의 지령에 따라 강서 호구로 가서 토원 사령부를 설치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7월 15일에는 강소도독 '정덕진', 18일에는 광동의 '진형명', 이어 안휘.호남.사천의 각성이 차례차례 토원 제의에 호응하여 독립을 선언하니 이것이 이른바 '제2혁명'이다.

 

그러나 원세개는 '단기서'를 제1군, '풍국장'을 제2군으로 편성하여 7월 25일 '호구'를 함락하고 8월 18일에는 '남창'을 함락함으로써 강서의 토원군을 궤멸시켰다. 이에 강소도독 '정덕진'은 독립을 취소하였고 '항흥'도 남경에서 탈출했다. 9월 1일 마침내 남경이 무너지고 상해의 '진기미'의 토원군도 무너졌다. 이렇게 해서 제2혁명은 2개월도 채 못되어 혁명군측의 패배로 끝났다.

 

제2혁명을 진압한 원세개는국민당을 억누르기 위하여 좌파를 체포, 살해하는 한편 중간파와 우파에 대한 매수공작을 전개하여 국민당과 대결하는 진보당을 결성시켜 지지 세력으로 흡수하였다. 원세개는 임시가 아닌 정식 대총통이 되기 위해 공작을 펴 여론을 조작하고 우선 정식 대총통 선거를 10월 6일 실시하기로 하였다.

 

선거 당일 평복 차림의 군경 수천명이 공민단이라는 깃발을 들고 국회를 에워싼 다음 "공민이 바라는 대총통을 뽑지 않으면 의원들은 한 발짝도 밖에 나가지 못한다."고 협박하는 가운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두어 둔 채 원세개를 대총통에 선출하였다.

 

이어 원세개는 국회를 해산하기 위해 정치회의를 구성하여 국회 해산 및 지방의회 폐지를 결의토록 했다. 또 1차 약법회의를  열어

1. 외교 대권을 총통의 전권으로 한다.

2. 선전포고 및 강화 조약의 체결도 참의원 동의 없이 할 수 잇다.

3. 관제.관규 및 국무원.대사.공사의 임명도 총통의 전권으로 한다.

 

그는 독재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임시약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모두 뜯어 고쳤다. 이렇게 해서 원세개의 독재권력 체제가 구축되기에 이른다.

 

손문, 다시 망명길에..

1913년 9월 1일 남경이 원세개군에게 함락되고 제2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손문은 원세개가 끝내는 민국을 폐지하고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오를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그는 역적 원세개를 타도하고 민국을 수호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대만을 거쳐 일본으로 향했다. 손문을 태운 배가 일본 고베항에 도착할 무렵, 원세개가 일본 정부에 손문의 체포를 의뢰한 후 였으므로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수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선장이 재빨리 손문을 선장실에 숨겨 위기를 모면했다. 손문은 그날 밤 야음을 틈타 거룻배로 옮겨 탄 후 암벽을 기어올라 어렵게 일본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손문은 일찍이 친교가 있었던 전 일본수상 '이누가이'의 도움으로 일본 체류가 허용되어 도쿄로 갔다.

 

손문은 도쿄에서 '중화혁명당'의 조직에 착수했다. 그는 혁명당을 조직함에 있어 신해혁명 이래 제2차 혁명이 실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거울삼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을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1. 지도자에 절대 복종.

2. 엄격한 조직.

3. 당내 불순분자 배제

 

손문이 도쿄에 왔다는 소식이 비밀리에 전해지자  '진기미.거정' 등 혁명 동지들이 속속 합류했다. 그들의 망명생활은 매우 곤란했지만 사기는 충천하였다. 손문은 그들과 협의하여 중화혁명당의 규약과 입당 서약서를 직접 작성하였다. 중화혁명당은 절강성 출신 '왕통'을 비롯하여 5명의 입당자를 필두로 하여 일본과 상해 등지에서 입당자가 잇따랐다. 장제스는 상해에서 입당하였는데 중국 본토 거주자로는 최초였다. 장제스는 1887년 절강성 봉화현에서 출생하였으며 1906년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다음해인 1907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손문의 혁명 운동에 찬동하고 있었다.

 

당시 입당서약서는 매우 엄격한 것으로서 "중국을 위망에서 구하고 자신의 신명과 자유.권리를 희생하며 민권.민생주의를 달성하기 위하여 분투하겠다."는 서약과 아울러 다음 몇 가지 선서를 하게 되어 있었다.

1. 종지를 실행한다.

2. 명령에 복종한다.

3. 직무에 충성을 다한다.

4. 생사를 같이한다.

 

입당 후 장제스는 일본으로 건너가 손문과 단독으로 만났다. 장제스는 이 자리에서 앞으로의 활동 계획과 젊은 혁명가가 지녀야 할 정신자세 등에 대하여 많은 지도를 받았다. 모든 창당 준비를 마친 손문은 7월 8일 성립대회를 열었으며 약 3백 명이 참가한 가운데 " 민권.민생주의 실행, 전제정치 배제하고 민국을 건설함을 목적, 혁명이 봉기하는 날부터 헌법이 반포되는 날까지를 혁명의 시기로 정하고 군.국가의 책임은 우리 당원이 진다." 는 등의 내용을 된 39개조로 된 '중화혁명당 규약'을 공표하였다.

 

손문은 9월 1일 '중화혁명당 선언문'을 발표하여 원세개 토벌에 분투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 후 중화혁명당은 굳은 결의로써 상해에서 봉기하였으나 공격 직전에 상해 진수사 '정여성'에게 정보가 누설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중화혁명당은 1914년 9월 중화혁명군을 창설하여 손문을 대원수로 추대하고 각 성에 사령장관을 두었다. 10월 25일 손문은 도쿄에서 쑹칭령(宋慶齡)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동북 3성과 강소.절강에서 봉기를 계획했으나 바꾸었다. 그 후 원세개의 심복인 '정여성'을 암살하고 수륙 양면 작전을 폈으나 작전의 미숙과 중과 부적으로 아깝게 실패하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과 원세개의 황제 등극

1914년 8월 4일 영국과 독일 사이에 선전이 포고되고 제1차세게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1902년에 맺은 영일 동맹을 구실로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하였다. 영국은 산동 반도에 있는 독일의 해군을 격멸해 줄 것이라는 기대로 일본의 참전을 일단수긍하였으나 일본이 중국에 대한 부당한 무력을 행사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일본에게 참전하지 않아도 된다고 통고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물러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들은 1차대전을 천우의 기회로 삼아 천연자원이 풍부한 중국과 남태평양에서 세력을 뻗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9월 2일 일본의 혼성 1개 여단이 산동 반도 북쪽 '용구'에 상륙했다. 원세개 정부는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립을 선언하고 교주만 부근의 범위를 넘어선 작전을 삼가할 것을 일본과 독일에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의 요구를 묵살하고 교주만에서 제남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중국에 되돌려주겠다는 명목으로 독일에게 그 권익의 전부를 일본에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요구는 한낱 겉치레일 뿐이었고 그 저의는 침략전쟁을 위한 포석이었다.

 

다음해인 1915년 1월 18일 일본은 원세개 정부에 대하여 세계가 경악할 만큼 악명 높은 21개 요구조항을 제시하였다. 다음은 그 요구 내용의 일부이다.

1. 산동성의 독일 권익을 일본이 승계, 새 철도 부설권

2. 여순.대련의 조차권, 남만주 철도 권리 기한을 다시 99년간 연장, 동부 내몽골,남만주 일대 권익 소유

3. 한양.대야.평향의 철.석탄광의 경영 독점권

4. 중국 연안의 섬 외국 임대 금지

5. 중국정부 군사.재정기관에 일본인 고문 배치, 타 외국인 보다 다수.

 

일본 공사는 이 21개 조항을 원세개에게 제시하면서 황제 제도의 부활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21개조 요구를 수락할 것을 강요했다. 이러한 일본의 무리한 요구사항에 대하여 중국 각계에서 비난이 비등한 가운데 원세개는 일본측과 구체적인 교섭에 들어갔다. 원세개는 황제 즉위에 대한 일본의 양해를 얻어낸 후 영.미.프.러시아 등에 대해서도 양해공작을 폈다. 일본은 21개 조항을 얻어내기 위해서 일시적인 약속을 해준 것 뿐이었다. 원세개의 황제 즉위 행동이 노골화되자 일본은 원세개의 세력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태도를 바꾸어 황제 제도 부활을 반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원세개는 10월 18일 황제제도 부활을 위한 '국민대표회의 조직법'을 공포하였다. 이것은 국민의 이름으로 원세개를 황제로 추대하기 위한 관제 국민대회를 열겠다는 사전 공작이었다.

 

10월 28일 일본.영국.러시아의 중국 주재공사들은 합동으로 황제제도 부활을 반대하는 권고문을 보냈다. 그러나 원세개는 민의를 따른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3국의 권고안을 무시하고 계속 추진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나라는 3개국에서 프랑스.이탈리아가 가담하여 5개국으로 늘어났다.

 

원세개는 반대하는 외국과 절충을 벌여오다가 1915년 12월 11일 참정원으로 하여금 '국민대표대회'를 개최하여 투포를 실시한 결과 총 1천9백 93표 전원 만장일치로 참정원에 전권이 위임되었다. 이어서 참정원은 '국민대표대합의데표'의 자격으로 원세개에게 황제 즉위 추대서를 제출하였다. 원세개는 일단 사양하는 척하다가 다음날인 12일 이를 수락하고 장관.문관에 대한 봉작과 서훈을 하였다. 그리고 1916년(중화민국 5년) 1월 1일 중화민국 '홍화' 원년으로 고쳤다. 원세개가 황제에 오르기 위해 사용한 돈은 무려 3억 달러나 되었다. 실례로 황제 옥좌 장식에 45만 달러, 집무실 온수 난방 설치비 2천 5백만 달러나 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로 되돌리려는 야망과 욕심으로 가득찬 원세개의 황제 등극은 토원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황제제도 반대와 원세개 정권에 반대하는 강력한 여론을 배경으로 호국 전쟁이라는 제3혁명이 일어나 원세개의 홍헌제국은 단기간에 막을 내리게 된다.

 

원세개의 최후와 군벌의 등장

국법을 무시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원세개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마침내 토원(討袁)의 함성에 불꽃을 일으켜 그 불길이 중국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토원의 주체 세력은 '호국군'이었으며 호국군의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은 '채악'이었다. 채악은 신해 혁명당시 신군을 이끌고 운남성을 해방시킨 사람으로 그 후 운남도독이 되었다. 원세개는 '채악'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를 북경으로 소환하여 감금하였다. 그러나 '채악'은 교묘히 북경을 탈출하여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일본으로 갔다가 대만.홍콩.하노이 등지를 거쳐 운남성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2차 혁명 때 활약했던 '이열균'이 손문의 명을 받고 먼저 와 있었다. '채악.이열균'의 도착으로 토원의 봉기는 급속도로 진전되어 12월 25일 운남성은 마침내 독립을 선포하고 토원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이들은 토원군을 호국군으로 명명하고 3군으로 편성하여 제1군은 '채악'이 지휘하고, 제2군은 '이열균', 제3군은 '채악'의 후임으로 운남도독으로 와 있던 '당계요'가 지휘하였다. 호국군은 각성에 다음과 같은 봉기 궐기문을 돌렸다.

1.국민이 합심하여 공화국을 옹호하고 황제제도를 저지한다.

2. 중앙과 지방의 권한을 정하고 각 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도모한다.

 

이어 제1군은 사천, 제2군은 광서를 공격하고, 제3군은 운남을 지키기로 하였다. 이에 원세개는 운남 원정군을 급파했지만 날로 세력이 확대되어가는 호국군의 기세를 꺽지는 못하였다. 호국군의 기세가 날로 강화되자 광서.귀주.호남.광동 등 서남부 각성이 호국군에 호응하여 독립을 선포하자 토원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호국군의 기세가 날로 고조되자 원세개의 심복들인 '풍국장.장훈.이순.주서.근운봉' 등 5명의 장군들이 원세개에게 "조속히 황제제도를 취소하고 민중들의 노여움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비밀전보를 보냈다.

 

원세개가 호국군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이들 장군들의 힘을 이용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이제 이들마져 배신하니 원세개도 최후의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3월 21일 원세개는 정부 요인들을 모아 긴급회의를 열어 침통한 표정으로 황제제도 취소의 뜻을 밝혔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찬성하였으나 몇 몇 측근들이 반대하자 원세개는 풍국장 등 장군들이 보내온 전보를 보여 주었다. 그러자 그들도 입을 다문 채 허공만 쳐다 보았다.

 

3월 23일 원세개는 정식으로 황제제도 취소를 발표하였다. 황제에 오른 지 83일 만에 원세개의 황제제국의 꿈은 무너졌다. 그러나 여전히 대총통으로서 권좌를 지키면서 서세창을 국무경, 단기서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하는 등 황제 반대파들을 그의 세력권에 영입하여 재기를 꾀하려 하자 이러한 음흉한 원세개의 행위를 본 민중들의 원세개 타도의 불길은 더욱 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