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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12 (광서제 시대 : 손문의 등장,중국동맹회.황화강 사건) 본문
중국의 역사 112 ( 광서제 시대 : 손문의 등장,중국동맹회,황화강 사건)
존속 기간 : 1616년 - 191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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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없음) | |||||
국가: 공금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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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선양(1636~1644) 베이징(1644~1912) 39°55′N, 116°23′E | ||||
공용어 | 만주어, 중국어 | ||||
정부 형태 | 전제군주제 천명제 (1616 ~ 1626) 강희제 (1661 ~ 1722) 선통제 (1908 ~ 1912) | ||||
정부수립 • 성립 (후금) •국호 개칭 •중국 통일 •신해혁명 •해체 |
1616년 1636년 1644년 1911년 10월 10일 1912년 2월 12일 | ||||
면적 • 면적 • 내수면 비율 |
9,984,670 km² 2.8% | ||||
인구 • 1820년 어림 • 인구 밀도 |
383,100,000명 명/km² | ||||
통화 | 위안 (1889년부터) |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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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신화·삼황오제 | |||||||
황하・장강 문명 | |||||||
하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 |||||||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 |||||||
주 기원전 1122~기원전 256 | |||||||
서주 | |||||||
동주 | |||||||
춘추 시대 | |||||||
전국 시대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 221~기원전 206 | |||||||
한 기원전 206~서기 220 | |||||||
전한 | |||||||
신 8~23 | |||||||
후한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촉, 오 | |||||||
진 265~420 | |||||||
서진 | |||||||
동진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20~589 | |||||||
수 581~618 | |||||||
당 618~907 무주 690~705 | |||||||
오대십국 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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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서하 1038~1227 | ||||||
남송 | 금 1115~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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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1271~1368 | |||||||
명 1368~1644 | |||||||
청 1644~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1911~현재 | |||||||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
역대 황제
건주 여진(建州 女眞) 추장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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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 시조 (淸始祖) (청 태조 추숭) |
- | 애신각라포고리옹순 (愛新覺羅布庫里雍順) |
- |
- | 청 조조 (淸肇祖) (청 태조 추숭) |
원황제 (原皇帝) |
애신각라맹특목 (愛新覺羅孟特穆) |
1405년 ~ 1433년 |
- | - | 순황제 (順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충선 (愛新覺羅充善) |
1433년 ~ 1467년 |
- | - | 흥황제 (興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탈라 (愛新覺羅脫羅) |
1467년 ~ 1481년 |
- | - | 정황제 (正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석보제편고 (愛新覺羅錫寶齊篇古) |
1481년 ~ 1522년 |
- | 청 흥조 (淸興祖) (청 태조 추숭) |
직황제 (直皇帝) |
애신각라복만 (愛新覺羅福滿) |
1522년 ~ 1542년 |
- | 청 경조 (淸景祖) (청 태조 추숭) |
익황제 (翼皇帝) |
애신각라각창안 (愛新覺羅覺昌安) |
1542년 ~ 1571년 |
- | 청 현조 (淸顯祖) (청 태조 추숭) |
선황제 (宣皇帝) |
애신각라탑극세 (愛新覺羅塔克世) |
1571년 ~ 1583년 |
제1대 | 청 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
1583년 ~ 1616년 |
후금(後金, 1616년 ~ 1636년)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1대 | 청 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
천명(天命) | 1616년 ~ 1626년 |
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
천총(天聰) | 1626년 ~ 1636년 |
청(淸, 1636년 ~ 1912년)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
숭덕(崇德) | 1636년 ~ 1643년 |
- | 청 성종 (淸成宗) (청 세조 추숭) |
무덕수원광업정공 안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 安民立政誠敬義皇帝) |
애신각라다이곤 (愛新覺羅多爾袞) (도르곤) |
- | - |
제3대 | 청 세조 (淸世祖) |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 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 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
애신각라복림 (愛新覺羅福臨) |
순치(順治) | 1643년 ~ 1661년 |
제4대 | 청 성조 (淸聖祖) |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 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 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
애신각라현엽 (愛新覺羅玄燁) |
강희(康熙) | 1661년 ~ 1722년 |
제5대 | 청 세종 (淸世宗) |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 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 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
애신각라윤진 (愛新覺羅胤禛) |
옹정(雍正) | 1722년 ~ 1735년 |
제6대 | 청 고종 (淸高宗) |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 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 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
애신각라홍력 (愛新覺羅弘曆) |
건륭(乾隆) | 1735년 ~ 1795년 |
제7대 | 청 인종 (淸仁宗) |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 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 (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 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
애신각라옹염 (愛新覺羅顒琰) |
가경(嘉慶) | 1795년 ~ 1820년 |
제8대 | 청 선종 (淸宣宗) |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 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 (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 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
애신각라민녕 (愛新覺羅旻寧) |
도광(道光) | 1820년 ~ 1850년 |
제9대 | 청 문종 (淸文宗) |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 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 (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 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
애신각라혁저 (愛新覺羅奕詝) |
함풍(咸豊) | 1850년 ~ 1861년 |
제10대 | 청 목종 (淸穆宗) |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 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 (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 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
애신각라재순 (愛新覺羅載淳) |
동치(同治) | 1861년 ~ 1875년 |
제11대 | 청 덕종 (淸德宗) |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 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 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
애신각라재첨 (愛新覺羅載湉) |
광서(光緖) | 1875년 ~ 1908년 |
비정통 | - | 대아가 (大阿哥) (대황자<大皇子>) |
애신각라부준 (愛新覺羅溥儁) |
보경(保慶) | 1899년 |
제12대 | 청 공종 (淸恭宗) |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 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 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말대황제<末代皇帝>, 손황제<遜皇帝>) |
애신각라부의 (愛新覺羅溥儀) (푸이) |
선통(宣統) | 1908년 ~ 1912년 |
원세개의 등장
이홍장이 신축 조약을 체결한 후인 1901년 11월 7일 직례총독 재임 중에 사망하자 산동순무 원세개가 이홍장의 후임으로 직례총독의 자리에 올랐다.
의화단 사건 후 대부분의 군수뇌들이 전사하거나 '동복상'과 같이 문책을 당해 몰락했으나, 오직 신식 육군을 장악한 원세개만은 건재하여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는 이홍장의 북양 군벌의 무력을 배경으로 권세를 장악했듯이 신식 육군을 배경으로 직례총독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당시 원세개는 40대였다.
원세개
원세개는 이홍장의 북양군마저 흡수하여 '북양상비군'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참모.군비.교련의 3처를 두어 '당기서.풍국장.왕사신'을 각각 그 처장에 임명함으로써 원세개의 군사적 권력은 이홍장이 생존시 장악하였던 군권을 능가하였다.
원세개는 진사시에 급제도 못할 정도로 학문적 실력이 없었으나 그의 증조부 '원갑삼'이 '이홍장'의 맹우였다는 인연으로 이홍장의 막하에 들어가 조선에 파견되면서부터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는 권력을 추종하는데 남다른 후각을 지니고 있었는데 때에 따라서는 배신을 밥먹듯이 하면서 기민한 행동으로 청국 유일의 실력자가 되는 행운을 안았다.
청나라 황족과 만주족의 중신들은 이 같은 원세개의 출현에 불안과 위기감을 느꼈는데 증국번이나 이홍장 은 당당한 진사 출신으로 학문과 사려가 깊은 믿음직한 인물로 인정되었으나 진사시에도 급제 못 한 원세개는 어느 모로 보나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무식쟁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찌감치 원세개의 군권을 박탈하여 그의 세력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결국 원세개는 직례총독에서 해임되고 군기대신에 임명되었다. 군기대신은 황제의 고문이지만 실제는 군권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세개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그가 장악하고 있었던 북양군은 형식상으로 직례총독 휘하에 있었으나 사실은 원세개 개인의 입김이 많이 작용하고 있었다. 또 군기대신은 총리아문의 대신처럼 겸임을 원칙으로 하였기 때문에 의화단 사건 이후 총리아문이 외무부로 개편되면서 그는 외상을 겸하게 되었다. 원세개는 오히려 외국과 빈번한 교류로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원세개가 가장 두려워 한 것은 서태후가 죽는 일이었다. 변법파들의 쿠테타 음모를 고발하여 처리하는 과정에서 광서제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태후가 죽고 광서제의 친정체제가 시작되는 날에는 제일 먼저 죽임을 당해야 할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원세개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는데 체질이 허약했던 광서제가 오랫동안 병상에 있었고 서태후의 죽음과 동시에 광서제도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39세에 죽은 광서제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 '재풍'의 큰 아들 '부의'가 겨우 3세로 즉위하여 '선통제'가 되었다. '선통제'는 태조 '누르하치'의 12대 손으로 청조의 마지막 황제였다. 나중에 선통제는 '신해혁명'으로 폐제가 되었다가 후일 일본 군벌이 세운 만주국의 괴뢰 황제가 되기도 하였다.
'선통제'의 나이가 너무 어려 순천왕 '재풍'이 섭정으로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의화단 사건 이후 국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청조가 추진하던 입헌 정치를 보다 강력하게 추진한다는 구실 아래 만주 황족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구축하려 하였다. 또 순천왕은 원세개의 횡포를 트집잡아 그를 처형하려 하였다. 그러나 원세개는 순천왕의 그러한 의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여유만만하였다. 순천왕이 아무리 자신을 처형하려 해도 막강한 군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 감히 어떻게 하랴는 느긋한 심정이엇다.
원세개의 처형에 장지동 등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혁명파의 폭동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던 이 때에 원세개를 처형함은 각지의 군벌들이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조언하였다. 이에 순천왕은 '경관'이라는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하여 암살하려 하였다. 원세개는 위기를 맞앗으나 군기대신 한 사람인 '나동'이 자객 소식을 전해주어 재빨리 수염을 깍고 풍대역에서 3등차를 타고 천진으로 탈출하여 그곳 조계에 숨어 버렸다. 원세개는 자신에게 무슨 불리한 일이 생기면 족절이라는 병을 핑계로 은거하거나 칩거하는 술수를 부리기도 하였다.
원세개는 정계에서 일단 사라졌으나 이것은 일시적 종막에 불과하였고 그의 나이 45세로 그는 반드시 다시 재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손문(쑨윈)
쑨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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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6년 11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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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5년 3월 12일![]() |
국적 | ![]() ![]() |
직업 | 의사·정치가·혁명가·작가 |
종교 | 조합교회(Congregationalist) |
쑨원(중국어 정체: 孫文, 병음: Sūn Wén 손문[*], 1866년 11월 12일 - 1925년 3월 12일)은 중국의 정치가이며 혁명가, 사상가, 중국 국민당(中國國民黨) 창시자이다. 호(號)는 일선(중국어 정체: 逸仙, 병음: Yìxiān 이시옌[*], 광둥어: Yat-sen 얏센), 본자(本字)는 덕명(중국어 정체: 德明, 병음: Démíng 더밍[*]),별명은 중산(중국어: 中山, 병음: Zhōngshān) 또는 나카야마 쇼우(일본어:
생애
쑨원은 1866년 11월 12일 광동성 향산현(香山縣) 부근의 취형촌(翠亨村)의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도천(道川)은 일찍이 마카오에서 재봉 일을 하다가 그 뒤로 그 사치함을 더럽게 여겨 농촌으로 되돌아 왔다. 큰 형은 손미(중국어 정체: 孫眉, 병음: Sun Mei 쑨메이[*]이고 자는 덕창(德彰)이다.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상업에 종사하였다.
- 1879년: 하와이 주로 유학.
- 1892년: 홍콩 서양 의학원 졸업.
- 1894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만주족 축출, 중국 회복, 연합 정부 건설"을 강령으로하는 흥중회(興中會)를 조직.
- 1895년: 홍콩 흥중회를 창설. 10월에 흥중회는 광저우에서 봉기를 모의하지만,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 해외로 망명.
- 1896년: 영국 런던에서 청나라 공사관에 체포, 영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풀려남.
- 1904년: 일본, 하와이, 베트남, 사이암 (지금의 타일랜드), 미국 등지에서 화교와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혁명을 전파.
- 1905년: 필리핀, 독일, 프랑스 등의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혁명 단체 조직.
- 1906년 - 1911년: 해외의 모금 활동 등으로 중국 내의 여러 봉기를 지지.
- 1911년 10월 10일:무창(武昌)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신해 혁명 발발.
- 미국에서 12월 하순경 귀환, 17개 성 대표자들에 의해 임시 대총통에 추대됨.
- 1912년 1월 1일: 남경(南京)에서 임시 대총통 (中華民國 臨時 大總統) 취임을 선포하고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구성.
- 1913년 3월: 위안스카이가 국민당 대리 이사장 쑹자오런(宋敎仁)을 암살,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무력 타도할 것을 주장.
- 7월: 2차 혁명 주도, 실패. 일본으로 도피.
- 1914년: 동경에서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조직.
- 1915년: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가서 10월 25일에 동경에서 쑹칭링(宋慶齡)과 결혼.
- 1916년: 위안스카이 사망, 단기서가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음.
- 1917년: 서남군벌(西南軍閥)과 연합하여 광주에서 군사정부를 세우고 대원수(海陸軍大元帥)에 추대되어 임시약법 수호 투쟁.
- 10월: 러시아 10월 혁명
- 1918년: 군벌과 정치인들의 배척을 받아 5월에 대원수직을 사임, 일본을 거쳐 상해로 감.
- 1919년 5.4운동.
- 10월 10일: 중화혁명당을 국민당으로 개칭 (동맹회의 국민당 국회는 1913년에 위안스카이에 의해 해산된 바 있음).
- 1920년: 복건성과 광동성 주둔군에 회군을 명령하여 광동에서 계계군벌(桂系軍閥) 축출.
- 11월: 광주에서 다시 임시약법 수호 운동.
- 1921년: 광동 신정부 수립, 임시 대총통 취임.
- 1922년 6월: 진형명(陳炯明)의 반란. 광주를 떠나 상하이로 옮김.
- 7월: 중국 공산당이 5.4운동 정신 계승과 반제국주의를 강령으로 상해에서 비밀리에 결성됨.
반란 후, 코민테른과 중국 공산당과 합작하기 위하여 이대교(李大钊) 등 유명 공산당 인사들을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게 함.
- 1923년 1월 1일 국민당의 개진(改進)을 발표, 제1차 국공합작 시작.
- 2월: 광주로 돌아가 다시 육해군 최고사령부를 창건, 대원수(海陸軍大元帥)의 이름으로 군권과 정무를 총괄.
- 8월: 장제스(蔣介石)를 포함한 대표단을 소련으로 파견.
- 10월 소련에서 파견된 보로딘(Borodin)을 고문으로 초빙.
- 8월: 장제스(蔣介石)를 포함한 대표단을 소련으로 파견.
- 2월: 광주로 돌아가 다시 육해군 최고사령부를 창건, 대원수(海陸軍大元帥)의 이름으로 군권과 정무를 총괄.
- 1924년 1월: 쑨원의 주관으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광주에서 소집. 중국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 황포군관학교 설립
- 1925년 3월 12일 북경에서 사망하였고, 유해는 이 년간 북경 벽운사(碧雲寺)에 임시 안치되었다가, 난징으로 옮겨 장례를 치렀다.
명칭
청조와 일제, 그리고 군벌 등의 정적들에게 평생 추적을 당하면서 중국 국내외 여행이 많았던 그는 여러 차례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의 호칭은 잘 알려진 쑨원(孫文)과 중산(中山) 외에도 여러 개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호적상의 본명은 쑨더밍(중국어 정체: 孫德明, 병음: Sūn Démíng 손덕명[*])이며 아명은 쑨디샹(중국어 정체: 孫帝象, 병음: Sūn Dìxiàng 손제상[*])이다.
쑨원(중국어 정체: 孫文, 병음: Sūn Wén 손문[*])이라는 이름은 그가 10세 무렵부터 사용한 이름이다. 자(字)는 재지(중국어 정체: 載之, 병음: Zàizhī 자이즈[*]). 원래의 호(號)는 일신(중국어: 日新, 병음: Rìxīn 리신[*])이었으나 홍콩 서양 의학원의 중문학 스승의 권유로 일선(중국어 정체: 逸仙, 병음: Yìxiān 이시옌[*])으로 바꾼다, 일신과 일선은 광동어로 발음하면 "Yat-sen 얏센"으로 같은 발음이다.
잘 알려진 중산(中山)은 정식으로 만든 호가 아니라 1897년 무렵부터 사용한 "나카야마"라고 하는 일본 성씨 가명이다. 쑨원이 광주에서 1895년 17세의 나이로 가담한 혁명이 실패한 후, 외국으로 수 년간 피신했을 시기에 일본에서 사용한 가명 中山樵 나카야마 쇼(なかやましょう)[*](중산초)에서 유래한다.
정치활동 및 업적
1895년 무렵부터 평생 동안 청나라에 반대하는 혁명을 주도했다. 1905년 남경에서 동맹회 (1912년의 신해혁명 후에 국민당으로 개편) 를 조직해서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제시했고 1913년 중국국민당을 창시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록은 쑨원 말년의 "소련, 코민테른, 중국공산당과의 합작"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강조하는 면이 있다. 반면, 중화민국(대만)의 기록은 장제스가 1918년 이후로 쑨원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는 점을 감안하여서, 그리고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점에서 쑨원에게 지극히 우호적이나, 그의 국공합작 내용이나 공산계열에 우호적이었던 활동은 다소 축소되어 기술되는 경향이 있다.
쑨원과 군벌의 관계를 말하면, 1912년 위안스카이와의 회합 후 그에게 배반을 당해 북양군에 의해서 그의 조직이 와해되고, 다시 1917년 광주 지역에서 서남군벌과 합작한 조직에서 1918년 축출되었으며, 1921년 광동에서 조직한 세력도 1922년 진형명의 반란 등으로 타격을 입는 등, 군벌 조직으로부터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실제로 그의 대표적인 수장(首長) 직위를 살펴보면 1912년 1월에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中華民國 臨時大總統)으로 있다가 2월에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1917년에 광주에서 대원수(海陸軍 大元帥)로 있다가 1918년에 축출되며, 1921년에 비상 (임시) 대총통(非常(時期)大總統)으로 있다가 진형명의 반란을 맞이한다. 중화민국의 실제적 실권을 쥐는 1923년에야 민정적 명칭인 대총통이 아닌, 군사적 성격이 강한 대원수(海陸軍大元帥)가 된다.
그는 광동 지역에 기반을 두고 국내는 물론이며, 하와이에 있던 큰 형 쑨메이(중국어 정체: 孫眉, 병음: Sun Mei 손미[*]) 등의 도움으로 해외의 화교와 유학생을 규합하며 해외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의 삼민주의 등의 사상은 민중의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그의 삼민주의는 중국과 대만 양 측에서 모두 높이 인정받고 있다.
그의 중국 혁명 정신이 남긴 영향은 아직도 그의 초상화가 본토 중국 및 대만의 정치 행사에 자주 사용될 정도로 크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기념일 등에는 그의 대형 초상화가 천안문 광장에 걸리며, 2004년 대만의 천수이볜 총통 취임식에서도 쑨원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대만의 국부(國父)로 칭송받으며, 본토 중국에서는 국부로서라기보다는 ‘혁명선행자’(革命先行者)로서 존경받고 있다.
중국동맹회 결성
중국 대륙을 잠식하는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국 민족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1905년 '손문'은 '흥중회'를 중심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국혁명 동지회'를 결성하였다. 청일 전쟁 때 하와이에서 결성된 '흥중회'가 러일 전쟁의 격동기를 지나면서 더욱 강력한 조직으로 변모한 것이다.
'손문'은 태평천국이 멸망한 2년 후인 1866년 광동성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10세 때 마을의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12세 때 형 손미를 찿아 하와이로 건너가 그곳에서 중등 교육을 받으면서 구미 열강의 정치.역사.과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 후 홍콩으로 돌아와 광주의 '남화의학당'과 '홍콩'의 '서의서원'에서 의학을 공부하면서 '정사량'을 비롯한 훗날의 혁명 동지들을 사귀게 되었다.
1892년 7월 '서의서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마카오'와 광주에서 의사 생활을 하면서 많은 동지들과 시사를 논하면 교유하였고 1894년 천진으로 가서 당시 직레총독이며 북양대신이었던 '이홍장'에게 정치의 개혁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제출하였으나 거부되면서부터 손문은 혁명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1894년 10월 하와이로 건너간 손문은 화교들에게 '반청 혁명'을 부르짖고 11월 말 '호놀롤루'에서 '흥중회'를 결성했다. 그 다음해인 1895년 2월에는 홍콩으로 돌아와 옛 동지인 '정사량.육호동'과 함께 '흥중회 본부'를 설립하였다.
흥중회의 정치적 목표는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국을 회복하며 합중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만주족인 청왕조를 타도하는 것 외에 민주적인 공화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흥중회 회원은 화교 상인.노동자.지식인.어부 등 각계 인사가 총망라되었다.
손문은 같은 달 광주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육호동' 등과 함께 광주에서 흥중회 분회를 설립하였다.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10월 22일을 기하여 봉기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당일 아침 홍콩에서 무기와 인원을 수송하는 과정에서 차질이 생겨 봉기 계획은 일단 중지하였다. 그러나 연락이 제대로 안되어 '육호동' 등 3명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손문은 일본으로 탈출하였으나 그에게는 막대한 현상금이 걸리게 되었다.
손문의 광주 봉기 실패 후 혁명의 불꽃은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1904년에는 호남성 '장사'에서 '화흥회'가 설립되고 호북 '무창'에는 '과학보습소', '상해'에는 '광복회'가 설립되었다.
또 1905년에는 '진독수.백문울' 등이 안휘성에, '악왕회.정권.정조음' 등이 복건성에 '익문사'와 '한족독립협회'를 세우는 등 혁명 단체가 속속 결성되었다.
이처럼 각지에서 혁명 단체가 결성되자 이들 단체를 통합하여 혁명 운동을 더욱 강화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07년 7월 혁명 운동의 선구자 손문이 혁명 동지 '황흥'과 같이 제단체의 연합을 주창하여 결실을 보게 되었으며 대표들은 '손문을 주석으로 하고, 만주족을 몰아내며 중화를 회복하여 민국을 창립하며 지권을 평균한다'는 4개의 강령을 동맹회의 강령으로 정하였다. 이 혁명파의 지도적인 인물로 '손문,황흥,장병린' 등은 공동으로 전략을 세워 혁명 봉기 후 정권 수립에 대비한다는 데 합의했다.
황화강 사건
손문이 이끄는 중국동맹회가 결성된 이후 신해혁명이 성공하기까지에는 여러 차례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 수많은 혁명 의사들이 희생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더욱이 여려 차례 일어난 봉기가 중국동맹회에 의해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다른 혁명 단체에 의한 것도 많았다.
1908년 '안휘성' 신식 군대에서 '신군 사건'이 발생했다. '신군'이란 원세개가 만든 신식 군대로 신군의 청년 장병 가운데는 손문의 혁명 사상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악왕회'라는 비밀단체를 만들어 한족 국가 건설의 결의를 다지고 간부인 '범전갑'은 1908년 10월 23일 서태후와 광서제의 죽음 소식을 듣고 10월 26일을 기하여 봉기하기로 하고 각 진영의 간부와 연락하여 '웅성기'를 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 이렇게 해서 성 밖에서 신군은 일제히 봉기했으나 성안의 군대가 내응하지 않고 해군 또한 봉기에 반대하였고 탄약의 부족으로 실패하여 '범전갑'은 체포.처형되고, '웅성기'는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였다. 그후 '웅성기'는 다시 중국에 잠입하여 유럽에서 귀국하는 섭정왕 두 동생 '재도'와 '재순'을 할빈역에서 암살하려다 밀고로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1910년에는 광동의 신군이 구정을 기해 일제히 봉기할 계획을 세웠다. 지금까지는 혁명파가 신군의 간부를 설득하여 봉기하였으나 이번에는 혁명파 청년들이 신군 가운데 잠입하여 봉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혁명파 청년들의 적극적인 행동은 노련한 감시자의 눈에 띄어 봉기 계획을 알아차린 신군의 수뇌들이 무기고의 탄약을 모두 감추어 버리는 바람에 이러한 사실을 모른체 200여 명이 봉기하여 무기고를 점령하였으나 탄약이 없어 실패하고 말았다. 봉기의 주동자 '예영전'은 전사하고 신군 23표의 책임자 '조성'은 어렵게 탈출하였다.
이렇듯 봉기가 살패를 거듭하자 입헌파 기관지 <신민총보>,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까지도 혁명파의 간부들이 편안히 앉아서 애매한 민중만 죽음에 몰아넣는다고 비난하였다. 그런데 손문은 광주 봉기가 실패하고 또 여러 차례 봉기가 실패하자 군자금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모금을 위해 세계 순례의 길에 오르고 있었다.
<민보>의 격렬한 비난에 분통을 터뜨린 '왕조명'은 <민보>의 보도가 잘못이라는 실증을 보여주기 위하여 북경으로 잠입하였다. 북경에 올라온 '왕조명'은 '웅성기'가 폭살하려다 실패한 바 있는 두 황족을 북경 도착 때 폭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들이 북경 도착시 많은 출영객으로 인해 거사가 어려워 예정을 바꾸어 섭정왕 순친왕을 폭살할 계획으로 순친왕이 자주 통과하는 다리 밑에 폭탄을 장치하였으나 이것마저 통행인의 신고로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수색 끝에 폭탄 표피를 만든 대장간이 발각되어 '왕조명'도 체포되어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이때가 1910년 4월의 일이다.
최후의 봉기 실패 사건은 1911년 4월 29일에 있었던 '황화강 사건(72열사 사건)'이었다. 이 '72열사 사건'은 봉기 장소로 의견이 대립하였는데, 조성은 광동 신군 사건의 실패를 거울삼아 봉기 장소를 장강 유역으로 옮겨 먼저 호북을 점화한 다음 호남.사천.강소.안휘의 4개성이 호응하고 또 하남.임회 등지에서 북상하여 북경을 공략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혁명파에는 광동.복건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은 먼저 광동을 점령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결국 봉기 장소를 광주로 결정되었다.
1911년 4월 초순 봉기 1회분의 무기로 일본에서 권총 115정, 총탄 4천 발이 도착될 예정이었으나 이를 운반하는 책임자가 홍콩 근방까지 왔다가 검사가 철저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기를 모두 바닷물에 버렸으나 후속분은 예정대로 순조롭게 홍콩에 도착하였다.
홍콩에 도착한 무기는 극비리에 광주로 운반될 예정이었으나 광주에서 동맹회원 '온생재'의 테러 사건이 일어나 경계가 삼엄하였다. '온생재'는 영록의 조카인 광주장군 '부기'에게 5발의 총탄을 퍼부어 사살했다. 광주 신군 사건을 진압한 수사제독 '이준'을 죽인다는게 잘못되어 '부기'를 죽인 것이다. '온생재'는 자수하여 처형되었고 경계가 삼엄하고 무기 수송도 늦어지고 미국에서 송금마져 늦어져 봉기는 4월 29일로 연기되었다.
이 봉기를 총지휘하기 위해 '황흥'이 홍콩에서 광주로 잠입하였다. 이때 어느 여성 회원이 홍콩에서 광주로 급히 달려와 혁명파의 동지로 여겼던 '진경파'가 사실은 당국의 스파이라는 사실을 보고하면서 봉기를 연기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황흥은 이미 주사위는 던져 졌으니 예정대로 결행할 것을 결심했다. 그런데 이 여성회원이 보고한 내용이 정확한 것이었음이 나중에 판명되었다.
청나라 정부측은 밀정의 보고에 의해 혁명파의 움직임을 면밀히 탐지하고 있었다. 봉기가 시작되어 혁명파의 결사대가 총독 관저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은 완전히 비어 있었고 수사제독 '이준'은 대군을 잠복시켜 거물을 쳐놓고 있었다. 혁명파는 혈로를 뚫고 겨우 탈출하였으나 도중에 혁명파와 내통하여 순덕에서 광주로 달려오던 '방영삼영' 부대와 마주쳤다. 그러나 사전에 서로 연락이 되지 않아 서로 적으로 오인하고 발포하는 바람에 같은 패끼리 혈전이 벌어져 애석하게도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청군은 혁명파의 시체 72구를 연고 없는 시체로 취급하여 공동묘지에 장사지내기로 하였으나 '반달'이라는 사람이' 황화강'이라는 곳을 묘지로 제공하여 그곳에 합장되었다. 이들 '72열사'를 기념하는 비가 지금도 남아 있어 열사들의 혁명 정신을 전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