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우면산의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면서...) 본문
우면산의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면서...)
현충일은 그냥 놀러가는 날인가? 우리들에게는 잊혀진 날인가? 아니면 이 땅의 민족과 나라를 위해 젊음의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하고 이름 모를 산하에서, 이국의 월남 땅에서 아리따운 나이에 숨져간 영령들에게 죄송함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날을 되새겨 보는 날인가?
그러나 이 땅의 젊은이들은 한국 전쟁이 무언지, 6.25 동란이 무언지 알지를 못한다. "한국 전쟁은 이승만의 북침으로 일어난 전쟁이며 이러한 민족의 비극을 자초한 사람은 자유당 정권이며 미국이다. 월남전에는 미국의 용병으로 한국군이 참전하였으며 수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의 전쟁이다."라고 교육을 받았다면 또 그러한 이야기 조차 듣지 못했다면 우리는 또 다시 그러한 비극을 당하게 될 운명이 될 것이다. 역사를 잊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한다면 치매걸린 사람이거나 기억력을 상실한 장애인과 무엇이 다르랴!
우리는 중국의 역사에서 수많은 왕조의 흥망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서 고구려.백제의 말로, 신라의 말로, 고려의 말로와 조선의 망국을 보았다. 한 나라가 일어나 창업과 수성을 거쳐 태평성대를 누리면서 부와 재화가 넘쳐나고 살기가 좋아지면 반드시 그 다음부터는 타락하고 부패해지는게 인간들인지라, 그때부터 지도층은 사치와 방탕이 시작되고 금은보화와 주지육림 속에 파묻혀 수십 명씩의 처첩들을 거느리고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원하는게 인간들의 꿈이며 자신의 후손들이 천세 만세 이러한 번영을 누리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 나라는 망국의 길로 접으들게 된다.
그리고 나라의 지도층이 그러한 호사스런 생활을 누리는 동안 백성들은 탐관과 고혈에 시달리며 농토를 빼앗기고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부정과 비리가 만연하고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고 정의와 양심이 사라지면 나라는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능력보다는 아부를, 정의 보다는 불의를 선호하게 된다. 가진자는 더욱 갖게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되며 빈익빈 부익부, 부의 편중 현상인 양극화가 극대화되면 갖지 못한 백성들은 고향을 떠나 유랑객이 되어 이 장터 저 장터를 돌아다니다가 거지가 되고 도적이 되고 산적이 되었다.
그러면 반드시 혹세무민 하는 자가 나타나게 되어 있는바, '메시아가 나타났다,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 부처님의 환생이다, 천국같은 나라를 건설하자, 외세를 몰아내고 민족이 궐기하자, 나는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 성불이다, 난 하느님의 아들이며 예수의 형제이다, 지구가 곧 멸망한다, 대홍수.지진이 나고 점염병이 창궐한다, 망한 나라 왕조를 부흥하자, 민족이여 궐기하라, 다같이 공평하게 토지를 분배받고 평등한 나라를 건설하자, 가진자를 죽이고 부패한 정부를 토벌하자, 탐관오리와 부패한 정치인을 몰아내자, 부패한 정치인과 기업인을 쳐부수자, 자유를 수호하고 공산당을 쳐부수자, 노동자.농민이 정권을 잡는 새 나라를 건설하자, 정부군이 임신부의 태아를 꺼내 죽였다, 부패 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정권을 수립하자, 나의 기도를 받으면 만병이 치유된다, 지금 목숨을 버리면 너는 반드시 천국을 간다, 하느님,예수,알라, 석가모니로부터 계시를 받았다, 나와 동침하면 하느님의 기를 받을 수 있다, 영생은 생명이니 전재산을 바쳐라, 기도하면 낫는다 기도하라 그래도 낫지 않으면 너의 신앙심이 약하느니라 등등 별의 별 감언이설과 선전선동으로 우매한 민중을 충동하여 무리를 만들고 반정을 도모하고 기존 권력에 저항하며 권력쟁취를 위해 나서지만 그들이 성공한 이후에는 또다시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 하게 된다. 그러면서 역사는 발전하여 왔고 수많은 나라들이 부침하여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민중들이 피를 흘렸고 목숨을 버렸다. 이렇게 민중들은 그들에 이용당하였고 나중에는 버림받았다. 용감했던 사람은 죽었고 비굴했던 사람들은 살아 남아 남은 여생을 호의호식하며 잘 살았다. 죽은 용사들의 후손들은 가난을 면치 못했고 노숙자가 되었고 교육도 받지 못해 등신이 되었다.
지금 우리 주변에 가장이, 아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건만 소외받고 멸시당하며 가난하게 살고 있는 후손들이 어디 한 둘인가! 전쟁 포로나 납치된 사람들, 그리고 수많은 호국 영령들이 이 산하에 무수히 묻혀 있건만, 이 땅의 정권들은 송환이나 유골 찿기를 거부했고 잊어 먹은지 50년이 지난 지금에야 곳곳을 파헤치고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조국이 알아주지도 않고 찿지를 않으니 누가 목숨을 바칠 것인가? 그들의 가족과 자녀들에게 평생을 잘 살도록 얼마나 배려정책을 세웠던가? 현충일이면 기념사를 읽고 현충탑을 참배하는게 모두가 아니다.
중국의 전한 시대 한무제처럼 전쟁 고아들을 대려다가 '우림군'을 만들어 황궁 근위대로 운용하거니, 황제가 직접 운영하는 특별군을 편성하여 평생을 보장해 주었다. 흉노족과 벌인 50년 가까이 수많은 토벌 전쟁에서 팔과 다리를 잃은 상이병사들을 집단촌에 수용하여 집과 농토를 주어 평생을 잘 살도록 해 주었다. 그들의 자녀들은 나라에서 특별우대하여 원하는 직업을 주선해 주었고 다른 사람들보다 우대해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나라를 위해 묵숨을 버려도 쥐꼬리만한 보훈연금을 주는 것으로 끝이다. 그들의 가족들이 평생을 눈물과 고통으로 살아가지만 나라가 몰라주니 누가 나라를 위해 묵숨을 바칠 것인가? 무공훈장을 받으면 무어할 것인가? 엿장수도 가져가지 않는 무공훈장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자신의 가족들과 자녀들이 국가로부터 평생을 보장받는다면 누가 죽음을 두려워 할 것인가? 이런 보훈 정책으로 이런 대접으로 애국은 헛물이요 애족은 빈말이라...대통령이 보훈 정책에 대하여 이야기했지만 두고볼 일이다.
'한국 전쟁'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기술해 본다.
한국전쟁은 민족간에 벌어진
냉전시대 강대국의 대리전쟁이다.
1. 조선의 망국
조선은 개국 후 강력한 카리스마의 태종, 유능한 세종, 왕권을 찬탈한 세조 등의 유능한 왕들과 개국공신들과 그 후손들로 구성된 훈구파 세력과 더불어 왕조의 안정과 융성을 200년 가까이 유지하여 왔다. 그러는 동안 훈구 세력들은 부패하기 시작하였고 성종대에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정치.사회의 새로운 질서를 강조하는 사림 세력을 등장시켜자 훈구파와의 갈등은 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 등 네 차례에 걸친 사화로 신진 사림 세력은 타격을 받고 정국혼란은 계속되었으며 신분.군역.공납제도는 격심한 문란을 초래함은 물론 민생은 토탄에 빠지고 장부상의 군대만 남는 형상이 되었다. 조선이 논쟁과 당쟁에 국력을 낭비하고 목민을 빙자한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등 극도로 병약해진 상태에서 임진년 이후 7년간 왜란으로 전국토가 왜눔의 말발굽에 초토화 되었으며 그 피멍이 채 가시기도 전에 중원 대륙을 통일하기 위해 배후를 안정시키고자 만주의 야만족인 청나라가 정묘년에 조선을 침공하였으나 청군과 같이 동행한 강홍립 장군이 중재하여 군신의 조약을 맺고 물러넜으나 병자년에 다시 침공하였으니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0일간 항쟁하였으나 강.온건파간의 대립으로 갈등을 겪다가 결국 항복키로 결정하고 지금의 송파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의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수많은 백성들과 삼학사가 줄줄이 줄에 묶여 포로로 끌려가 비참한 생을 마감하였고 불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오랜 볼모 생횔에서 돌아오자 권력욕에 눈이 먼 아비 인조에 의해 세자비.세손들까지 독살되어 죽고 인조를 뒤이어 봉림대군이 등극하매 효종이더라. 효종은 재임 10년동안 관무재,진영장 제도를 설치하고 군대양성에 힘을 강화하는 등 북벌계획을 수립하여 진행하였으나 송시열 등 사림들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효종은 김자점과 인조의 후궁 조씨가 역모를 꾀하는 등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으며 재임 10년째 머리에 난 종기로 침을 맞다가 승하함으로 북벌계획을 채 시행도 하기전에 절명하는 비운을 겪으면서 북벌계획은 무위로 끝난다.
계속된 이씨왕조는 사색당파와 권력 투쟁의 암울한 시대를 보내면서 각지에서는 반정/반역이 빈발하였고 왕권유지와 권력 쟁탈,궁중 암투에 부국강병은 커녕 왕조의 핏줄잇기에 급급하던차, 후사가 없자 유일한 왕족이던 흥선대군 이하응의 아들 고종이 조대비에 의하여 이씨 왕조의 몰락을 재촉하는 임금으로 등극하니 고종이더라. 흥선은 고종의 나이가 어린 관계로 섭정을 하게 되는바, 강경책으로 일관타가 대원군과 며느리인 명성왕후 간에 끝없는 권력에 대한 주도권 갈등이 계속되던 중 서로 일.중.러시아 등 외세를 끌여들인 결과 일제는 조선을 삼키기 위해 청,러시아와 일전을 벌이게 된다.
일제는 청.일전쟁, 노.일전쟁의 결과 전승국이 되어 단독으로 조선을 차지하는 우선권이 주어졌다. 일제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고종은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하나 조선은 결국 친일 5적에 의해 일제에 합방당하는 비운의 종말을 고하게 된다.
여기에서 함석헌옹이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마지막 부분을 소개한다.
----------------------------------------------------------------------------------------------------
지친 민족
이때 역사의 요청은 한마디로 깨는 데 있었다. 민족으로 깨고, 세계에 깨고, 시대에 깨야 한다. 역사는 무서운 속도로 급선회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대국 중국.왜눔이 문제가 아니라 영국.미국.독일.불란서.러시아.화란 등 얼굴이 다르고 말과 글이 다른 그리고 색깔도 다른 수많은 외국들이 들어 닥치고, 전에 보지도 못하던 총.육혈포.자명종.천리경.인쇄기 등이 들어오니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지 그 누구하나 그들의 문명을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강변한 사람은 없었다.
일이 급해졌다. 이제까지 바다 가운데서 노략질이나 하던 왜구의 나라 일본이 '명치유신'을 하여 봉건시대의 막부를 집어치우고, 근대식의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천황이라 하고, 나라를 열어 세계 모든 열강과 교통을 하면서 우리더러 나라를 열라고 트집을 해온다. 일찌기 이런 세상은 보지를 못하였다. 우리나라 유신들이 보기에는 '사서삼경'에서도 못보던 것이요, '팔만대장경'에서도 못 보던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김씨고 이씨고 양반이라 자랑하고 있을 수도 없고, 양반이요 상눔이요를 가릴 수도 없다. 노론이요 소론이요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토록 조상 대대로 섬겨오던 대국 중국이 코쟁이 양눔들에게 꼼짝을 못하고 청국군대가 서양군대에 대패를 하고, 그래서 항구를 조차하고, 땅을 빼았기고 ,배상을 물지않나? 이런 경우는 절대로 본적이 없는 조선은 천지가 개벽하고 모든 사상과 사고가 혼돈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이때 유신들이 하는 일이란 제것 챙기고 나라 망하기 전에 더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자손대에 물려주는 일만 생각하고 백성들 쥐어 짤 궁리만 하고 있었으니 가련한 것은 우리 조선의 선량한 민중들 뿐이라! 이때에 살려거든 우리도 한 민족으로 깨어 말을 같이하고 힘을 모아 낡은 생각을 버리고 나날이 발달해 가는 새 지식.새 기술을 배워 여러 나라와 어깨를 겨루고 나갈 결심을 했어야 할 것이었지만 그러지를 못하였다.
그것을 하자는 실학이었는데 실학파가 그것을 못하고 낡은 책장만 뒤집다 말았지 민심을 뒤집지 못하였다. 그래서 천주교였는데 천주교는 천당.지옥만 찿다가 말았다. 그후 '홍경래'가 나타나 한번 역사를 뒤집어 보려 하였지만 비만 들다가 조선의 더러운 찌꺼기를 쓸지도 못하고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고, 개신교도 바람을 불러 일으켰으나 민중의 힘으로는 중과부적이라 그만 지쳐 수구려들고 말았다.
역사에는 그래도 행운.시운이라는게 있는 법이라, 일본이 '페리 제독'의 강권에 못이겨 나라를 열게 된 것은 참 운이 좋다 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으나 종내 그저 지나가고 말았다. '하멜' 일행이 십수 년을 제주에 있었건만 서양 소개를 못하였고, '병인양요'에 불란서가 물러간 것은 저희 나라 일 때문이건만 이쪽에서는 우리 세력이 세서 됐거니 생각하여 점점 더 문을 닫게 되었고, 대동강에 '셔먼 호'가 들어온즉 때아닌 홍수에 속아 불타 실패하게 되고, 일이 모두 이런 식이어서 기회는 다시오지 못하였다. 우리에게도 '페리' 같은 강한 함대가 몰려와서 조선 양반눔들 간담을 쓸어내려 왜 강제로라도 열게 하지 못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마지막 막
그때 우리나라 꼴은 무엇보다 전주 이씨 집안에 잘 나타나 있다. 하필이면 대원군이요, 민비인가? 이것이 다 마지막 망국극을 하기 위해 준비된 마지막을 선택된 배우들이었다. 당파 싸움을 하다 하다, 외척이 전권 세도를 하다 하다, 끝마무름이 그 궁중의 싸움이었다. 흥선은 영악한 왕족이었다. 안동 김씨 세도천하가 계속되는 동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미친척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철종이 후사가 없으니 시간을 기다린 것이다. 다 계산된 임금 만들기를 예견하고 죽임을 피하면서 때를 기다린 사람이었다. 거지처럼,권력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미친척 숨죽이고 있다가 철종이 후사가 없이 갑자기 죽자 왕족의 혈육으로 임금이 된 자신의 아들 열두 살짜리가 고종으로 등극하고, 그리고 섭정을 보게 된 그 아버지 흥선군은 영화를 누리자는 생각이었지, 그 운명이 그 아이의 손에 잡혀 있던 연줄처럼 끓어져 나갈 것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어린 임금의 왕후를 구하는데 고르고 골라 외척들이 말썽이 없을 만한 민씨집 딸을 대려올 때, 그것이 다음날 자기와 세력을 겨루다 집안 망치고 나라를 망칠 싸움의 적수인 민비가 될 줄은 천만 뜻밖이었을 것이다.
![]() |
'마지막황실 대한제국과 덕수궁' 사진전 |
정국은 혼란을 거듭하는 가운데, 위로는 임금과 왕후를 포함하여 모든 당상관들은 매관매직에 정신이 없고, 평양감사 자리는 민씨네 집안이 독식하고, 지방의 모든 관리는 부패와 무능이, 매관매직으로 본전 뽑기에 백성 수탈이 판을 치고 백성들은 굶고 지치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유랑민이 되어 도적떼가 되거나 낭인신세가 되어 이 장터, 저 장터를 돌아다니며 시장터 국밥이나 한 그릇 얻어먹는 거지신세가 된지 이미 오래고, 지방곳곳의 향교는 유신들이 진을 치고 백성들을 대려다가 곤장을 치고 관리를 협박하고 향교에 몰려 앉아 양반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수구파요 개화파요, 친일이요 친청이요, 친로요 친미요 하는 파들을 갈라 배치되어 서로 싸우고 물고 뜯고 하고 있는 모습은 그 모양이 늙은 창녀촌 갈보와 같다 아니 할 수 있으랴!
![]() |
전주박물관, 흥선대원군 특별전 |
제가 스스로 제 운명을 개척하고 사람 노릇을 하자는 생각은 없고 오늘 이눔에게, 내일은 저눔에게 빌붙어 가랑이 벌리고 그때 그때 구차한 안락을 탐하고 돈푼께나 받고 군것질 하고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이눔에게도 사랑을 잃고 저눔에게도 미움을 사 몹쓸 병이 들어 자식 하나 없이 단칸방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늙은 창녀처럼 한 몸이 망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부 먼저 깬 사람들이 갑신정변.갑오경장 하는 운동이 없지는 않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싸움의 결과 대원군은 중국에 붙들려 가고, 민비는 일본눔들 손에 죽고, 임금은 자리에서 쫓겨나고 아들이 대신 들어섰다가 그나마도 오래 못가고 1910년 8월 28일에 한일합방이 되어 나라가 아주 망해 버렸다.
이 민족의 부끄럼이 이제는 끝에 간 것이다. 고구려 때에는 욕을 먹었는지 모르고, 신라때는 매 맞았는지 모르고, 고려 때에는 넘어졌는지 모르나, 이번에는 아주 거꾸로 쳐박혀 버렸다. 고구려에는 발해가 있고, 신라에는 마의태자.궁예가 있고, 고려에는 최도통.정포은이 있었으나 이조에는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들 뿐이었다. '이준'이 헤이그에서 붉은 피를 뿌리고, '민충정'이 서울에서 푸른 대를 올렸으나, 그것으로 가리기에는 그 허물이 너무나 컸다.
신라가 당나라에 수구렸다 하나 그래도 반도의 땅을 찿는데 힘을 쏟았고, 고려가 몽고에 굴복하였으나 나라는 지켰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라가 아주 없어지고 남의 한 개 식민지가 되어버렸으니, 5천년 역사에 먼저간 조상들이 바라볼 때 얼마나 한심한 모습이었을까! 수많은 영웅과 충절을 지키던 선조들이 지하에서 땅을치고 통곡을 하였을 것이다. 이순신의 7년 전공 23전 23승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항몽.항청을 통해 수많은 애국 충신들은 무어라 통곡하였을까? 5천년 역사에 나라 팔아먹는 일, 이런 일은 없었다.
![]() |
그런데 하필이면 일본이냐? 일본은 우리민족이 고대로 부터 바다를 건너가 구주지방에 정착한 민족의 물결이었다. 그들의 신화가 말해주고 석기시대의 유물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들에게 한자와 유교.불교를 전해주었고 대륙의 모든 문물이 우리들이 전해 주었고 그래서 임나도 나온 말이요 왜구도 그래서 긴 세월을 두고 그렇게도 반도 해안을 들락거리며 약탈과 행패를 일삼아온 집나간 자식같은 말성꾸러기 일본이었다.
우리가 고구려 이래 전래된 용맹한 기상과 상무정신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힘과 제도를 정비한 힘찬 주권을 가지고 만주를 뒷마당 근거지로 북만주와 한반도를 호령하고 일본 열도를 앞 방파제로 삼아 대국경영을 펼칠 수가 있었다면 역사는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친일.친로.친청 하며 몇십 년을 국제 매음을 하다가 우리가 길러내고 업신 여기던 섬나라 일본한테 나라를 몽땅 빼았겼으니, 이것은 마치 행랑체 머슴한테 그집 주인 아내 주부가 정조를 주고 집문서 내주면서 서방눔은 독살하고 그 머슴눔의 바지가랑이 밑에서 힘찬 밤일 즐기기를 좋아하는 창녀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다.
그래서 세계 1차 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많은 민족이 해방되었으나 우리는 빠졌다. 3.1운동의 물결이 일었으나 그것으로는 부족이었다. 세계 2차 대전을 통해 민족의 의식은 실날같이 꺼져가는 촟불같은 신세로 빠져 들고 있었다. 수많은 청년과 처자들이 전선으로 끌러가서 천황눔의 총알받이가 되고, 정선대가 되어 이팔청춘 다 썩히어 썩은 몸이 되었고, 온 반도는 먹는것 입는 것 지하지원 할 것 없이 모두가 수탈의 극을 달했다. 몽고도,중국도, 만주족도 그토록 이 땅에서 고혈을 빨아가지는 않았다. 씨를 말리고 이름을 바꾸고 모든 것을 일본눔들 제도로 바꾸려고 하였다. 36년간의 길고긴 암흑의 시대.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마지막 남은 피 한방울까지 흡혈귀처럼 빨려지게 만들었다. 이제는 빨릴 피마져도 남은게 없는 앙상한 여윈 몰골로 휘청이는 민족, 그것이 피맛이냐 ? 물맛이냐? 고통이 온 반도에 뼈저리도록 사무치게 휘몰아 쳤고, 민족은 짐을 싸서 만주로 간도로 사할린으로 고향을 떠났다.
![]() |
창덕궁 마지막 단풍 |
이것으로 우리 고난의 역사 대충 보기는 끝났다. 돌아보면, 아, 아, 삼국시대 이래 그 걸어온 길이 얼마나 잔혹했나? 눈물과 피로 걸었다기보다 기었고, 기었다기보다 굴러왔고 발길에 채어왔다. 그리고 5백 년 수난도 오히려 부족하여 돌아오던 회복의 기운도 사라지고 다시 더 심한 연옥의 바닥으로 거꾸러져 내려가는 뒷모양을 보며, 아니다, 우리 자신이 그것임을 의식하면서, 그러나 그보다도 날이 장차 오면 이것이 다 뜻이 있는 한 구절이 될 줄 믿으면서 이 글을 마친다.
-함석헌 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2. 일제 강점
일제 강점하 36년간 조선은 삼천리 금수강산이 난도질 당하고 산마다 쇠못이요, 젊은 처녀들은 전쟁터로 끌려가고, 숫가락.젓자락.오강단지까지 공출당하는 수탈의 세월을 당하였다. 철도.광산개발 미명하에 수목은 모조리 절단되어 목재로, 전국의 평야에서 생산되던 쌀은 모조리 공출되어 인천,군산,목포,부산,원산 등지에서 일본으로 실려갔다. 수많은 왕릉이 도굴되고 값진 문화재는 몰래 밀반출 시킴은 물론 조선반도의 모든 물자를 모조리 가져갔던 일제였다. 약삭빠른 조선눔을 일본 순사의 앞잡이로 고용하여 권문세가, 사대부 집안, 대부호를 수탈하고 국내 잠입한 독립투사를 체포.처형하는데 앞장섰다. 친일 인사들이 일본 헌병과 경찰에 아부하여 부자들의 농지를 약탈하고 문서를 없애는 등 수많은 범행을 저질렀다. 이에 백성들은 도저히 살 수 없는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간도로 시베리아로 떠났다.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이름도 모르는 곳으로 수 많은 고려인들이 끌려가서 황무지에 내버려지고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동사하거나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으며 그래도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고 고향을 그리워 하면서 언젠가는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두만강 푸른물에 노젖는 뱃사공...'라는 노래를 불렀다.
3. 해방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민족의 염원이던 독립은 되었으나 38도선을 기준 남북으로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하여 진주한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 반도는 절단되고 북에는 김일성, 남에는 이승만이 각각 괴뢰정권을 수립하여 자신들이 조선반도의 대표주자들이라고 나섰다. 김구선생을 비롯한 상해임시정부 요원들은 이승만과 미군에 의하여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며 주도권은 미국에서 활약하던 이승만에게 넘어가고 이승만은 정권창출과 군대양성을 위하여 일제하 친일 인사들은 물론 국방경비대를 급편하면서 일본군 출신 친일파들을 대거 기용하게 된다. 해방 후 5년 동안 남한은 피나는 권력투쟁의 암울한 기간동안 김구 등 수많은 인사들이 저격,살해되고 이승만 정권이 자리메김이 점점 가시화 되자, 연일 '북진통일' 외치는 이승만에게 미군은 한국 군대의 편성과 무장에 소극적인 반면, 북의 김일성은 소련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중국 팔로군 출신들을 대거 기용하여 북한군을 편성하고 소련제 T-34 최신예 탱크 등으로 무장된 북한군을 38도 선 전역에 배치하고 '남조선 해방'이라는 미명하에 1950년 6월25일 새벽 남침을 개시하게 된다.
4. 전쟁 발발과 북괴군의 전략
당시 북한군의 전략은 개성-문산축선,동두천-의정부 축선,철원-포천 축선,화천-춘천 축선,동해안 축선 등 5개의 주공격로로 선정하고 개성-문산축선은 한국군을 고착.견제하면서 동두천-의정부 축선, 철원-포천 축선의 주력으로 하여금 한수이북에서 한국군을 1차적으로 이중포위.격멸하고, 화천-춘천 축선의 주력으로 하여금 화천-춘천-지평리-수원.오산 방향으로 진출하여 한강이남에서 2차 포위망을 구성하여 한국군의 주력을 조기에 섬멸하고, 3단계로 태백산맥을 통하여 침투한 침투부대와 해상침투부대 등과 협공하여 남한 전지역을 가장 빠른 시간내에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남한에는 남로당 잔당들과 좌경화 인사들이 군대와 정계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으며 여순 반란, 제주 4.3폭동, 대구,서울 등지에서 좌경화 폭동이 빈발하였으며 북한군이 남한에 진주하면 남한 전역에서 동조세력이 총 궐기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5. 한국군의 초기 대응
한국군 총참모장 채병덕 장군은 일제치하 병참장교로 근무했던 사람으로 전략.전술은 물론 기동전을 전개하는 북한군의 공격에 축차적인 병력을 투입하는 우를 범하면서 개성-문산 축선, 동두천-의정부 축선, 철원-포천 축선은 적 전차의 공격에 계속 후퇴하면서 한국군은 소총과 수류탄으로 적 탱크와 맞서는 방법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국군의 방어계획도 구체적으로 수립된 상태도 아니였으며 후방에서 올라오는 부대를 순차적으로 전선에 투입시키에 바빴고, 적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적의 의도도 몰랐고 병력규모나 포위전술도 몰랐다. 한국군에게는 전차는 한대도 없었으며 제대로 된 대전차 무기도 없었다. 오로지 소총과 수류탄,화염병이 전부였다. 전선에 투입된 수많은 젊은 병사들이 처음보는 괴물같은 적 전차 앞에서 낙엽처럼 쓰러졌고 적 전차는 파죽지세로 미아리 고개를 넘어오고 있었고 서울 함락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한국군 선무대는 서울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서울 시민들에게 집에서 나오지 말도록 방송하면서 아군이 적을 물리치고 북진을 하고 있다는 등 거짖말로 시민들을 안정시키려 하고 있었다. 서부 전선은 무너지고 있었지만 중부 전선인 화천-춘천 축선은 아군 6사단이 춘천 남쪽 고개에서 선방하고 있었다. 그러자 적은 수원 이남에 목표를 둔 2중포위 시도가 지연되자 해당 군단장을 교체하는 등 춘천지역 전선을 독려하였지만 아군 6사단은 효과적인 방어전투로 적의 기도를 분쇄하면서 전선조정을 위해서 남쪽으로 서서히 후퇴하였다. 한편 동해안 축선은 태백준령으로 침투한 침투부대와 해상침투부대가 7번 국도를 차단하자 전선은 남으로 계속 밀리고 있었다.
6. 서울 점령
미아리 고개를 넘은 적 전차 수대가 서울시내로 진입하자 수도 서울은 공황 상태가 되어 수많은 서울 시민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기 위해 한강대교 일대로 몰려 들었다. 당시 한강대교 폭파 임무를 맡은 아군 공병 장교는 시민들이 계속 한강대교를 건너오는 상황이었고 시민들에 섞여 침투한 적 침투부대에 의해 폭약과 도화선이 해체되거나 절단되는 문제를 우려하여 상부의 폭파지시를 받으려고 시도하였으나 상부 지휘관들과 무선교신은 물론 연락이 되지 않자 책임 장교인 엄홍섭 중위는 아군의 주력부대가 미쳐 빠져나오기도 전에 한강대교는 다리위 시민들과 같이 천지를 진동하는 엄청난 폭음을 내며 폭파되었다. 전후 한강대교 조기폭파 문제로 공병감이 총살형에 처해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된다. 수많은 시민과 아군 주력부대는 지리멸렬 상태로 모든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맨몸으로 한강을 헤엄쳐 건너고 있었다.
7.맥아더 장군 전선시찰
당시 일본에서 급거 날아와 노량진 한강 제방에서 북쪽을 바라보던 '맥아더 장군'은 적의 주력을 1차적으로 저지하기 위해서는 미군 투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한국군 전투력은 주력이 이미 섬멸된 상태로 적의 공격을 저지하기에 역부족이라고 판단하고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급거 편성토록 지시하고 적의 주력을 서서히 저지하면서 미군을 투입하여 최후에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상했다. 적을 남한지역 깊숙히 끌여들인 후에 원산이나 진남포, 인천지역에 주특기인 상륙작전을 구상했다. 만약 맥아더의 의도대로 적의 주력이 낙동강 전선에 집중한다면 상륙작전의 승패가 관건이 되었다. 일본 사령부로 돌아간 맥아더는 극비로 참모들에게 3개지역에 대한 상륙작전 가능성과 목표달성 가능성을 검토토록 지시했다.
8. 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투입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의해 배와 철로를 이용하여 오산 북쪽지역 '죽미령' 언덕에 급거 투입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B,C중대를 근간으로 증강된 대대규모로 북한군과 처음 조우하는 최초의 미군부대가 되었다. 오산 북방 1번국도가 지나는 언덕에 B중대는 90,117고지에, C중대는 92고지 일대, 한국군 17연대 선발대 중 일부 부대는 우측 88고지에 포진하고 적 전차와 선두부대를 격파하기 위해 105밀리 5번포를 고개 정상 부근에 추진배치하여 대전차 고폭탄 6발을 준비했으며 7,62밀리 무반동총, 기관총을 배치하는 등 급편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피난민들이 국도를 따라 줄줄이 남하를 하고 있었으며 멀리서 포성이 들리고 적 전차의 굉음소리가 점점 가까워 지고 있었다. 종전 후 일본에 잔류한 미군은 종전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고참들은 대부분 전역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신참들로만 구성되어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경험도 없는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스미스 중령'은 처음 전선에 투입된 병사들을 일일이 돌아 다니면서 격려하고 주사격 방향과 화집점 등을 알려주면서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진포를 제외한 나머지 5문의 105밀리 포병부대는 죽미령 고개 후방 수청리에 포진하였으며 탄약은 1200발 이었다.
9. 북한군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교전
북한군 제4사단 107전차연대의 선두전차 8대가 1.8키로 전방에 나타났다.105밀리 포가 대전차고폭탄을 장전하고 대기했다. 전차가 굉음을 울리면서 1번 국도 전방에 모습을 나타냈다. 한대..두대...세대..적 전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사격을 중지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전차뒤에는 후속 전차들이 줄을 지어 달려오고 있었다.맨 앞 적 전차가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대전차포 사수에게 사격신호를 보냈다. 꽝! 대전차포 발사..꽈꽝! 포탄이 폭발하면서 전 전차는 시커먼 연기에 휩싸였다. 잠시후 연기가 사라지자 전차의 모습이 보였다. 꿈틀하는 적 전차.. 적 전차는 다시 아무일 없다는 듯이 미군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 T-34전차는 2차대전 말기 소련군이 개발한 전차로 최신예 전차였다. 미군의 대 전차포탄은 적 전차의 장갑판을 뚫지 못했다. 이 모습을 본 미군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전차를 잡을 수 있는 대전차포가 적 전차를 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 진지의 미군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위치를 확인한 적 전차에서 기관총과 전차포가 불을 뿜었다. 진지 사방에 포탄이 작열하고 총알이 날아 들었다. 미군 대전차포가 제2탄을 발사했다. 꽝! 전차에서 화염이 번쩍 일었다. 꽈-꽝! 화염이 일고 잠시후 전차가 멈추었다. '스미스 중령'은 적 전차 괘도가 끊어진 사실을 확인하고 계속 사격을 명령했다. 적 전차에서 전차포가 발사되고 북한군의 총탄도 날아 들었다. 괘도가 끊어진 전차는 도로옆으로 비켜나고 후방 전차들이 계속 밀려 들었다. 총 36대의 적 전차중 4대가 파손되고 뒤따르던 전차들이 미군 진지를 지나 계속 남으로 내려갔다. 포병진지는 적 전차에 대하여 직접 조준사격을 실시했다. 전선이 돌파되고 부상병이 속출하자 스미스 중령은 적에게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전부대원에게 오산으로 철수를 명령했다. 미군은 오산 '죽미령'고개 전투에서 처음 북한군과 의 전투에서 12시간 지연시키는 역활만 하였으며 150여명이나 전사상 당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10. 미 제24사단 전선 투입
이어서 미 24사단이 열차로 대전에 도착했다. 사단장 '딘' 장군은 공주-대전-추풍령 을 잇는 금강을 1차 방어선으로 구상하고 2개 연대를 전방에 배치하고 예비로 금산지역에 1개연대를 배치했다. 당시 북한군은 미군배치 사실을 알고 피난민을 가장한 침투부대를 적 후방으로 침투시켜 통신선을 절단하고 후방지휘부를 습격하거나 병참부대를 공격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야음을 틈타거나 피난민속에 섞여 들어온 북한 침투부대로 인하여 미군은 지휘통신이 두절되는 초유의 사태를 당면하게 되자 각 부대는 적에게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각개약진으로 후방으로 허락없이 철수하자 '딘' 장군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적의 포탄과 총알이 사방에서 날아드는 등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각 연대는 연락이 두절되고 예하부대를 찿기에 바빠서 이리 저리 방황하다가 부상병들을 찝차에 13명이나 싣고 남으로 이동 중 침투한 적의 매복공격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지형도 잘 모르는 체 부관과 수 주일 산중을 헤메다가 어느 민가에 숨어 들었다. 마을이 적에게 점령되자 그동안 '딘 장군'을 돌보아 주던 집주인의 신고로 '딘 장군'은 미군 장성으로는 처음 적의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
11. 낙동강 방어
적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전선은 점점 남으로 밀려나고 있었고 연합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다. 북쪽 낙동강 전선은 한국군 제1,6,8,9,3사단이 다부동-팔공산-영천-포항을 연결한 전선에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으며 다부동 전투, 영천 회전, 포항 형산강전투에서 적의 공격 예봉을 꺽으면서 전선을 버티고 있었고, 대전지역에서 미 24사단이 무너지자 미군은 낙동강 중부-남부전선에 미25사단, 미기병7사단, 해병여단, 영국.터키.호주의 참전국 부대 등이 마산-창녕-진주-합천- 추풍령-구미-왜관 전선에 투입되었다. 적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낙동강 전선의 공방은 뺏고 빼았기는 전투가 계속 전개되고 있었다. 연합군은 미 제8군사령관 '워커'장군의 강력한 지휘아래 내선작전의 잇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방어선을 지탱하고 있었다. 왜관일대 적 밀집지역에 대한 공중 융단폭격이 실시되었고 미공군의 지상전 지원은 방어선 지탱에 큰 힘이 되었다. 제공권은 미공군이 적을 제압하고 있었다.
12. 인천상륙
맥아더는 미합참과 해군의 반대에 논리적이며 자신감 있게 설득하여 인천으로 상륙작전 지역을 결정하고 미 해병 1사단 등 상륙부대를 부산에서 승선시키는 한편 상륙 함대를 집결시키고 있었다. 양동작전으로 원산만 일대 기만기동, 장사일대 양동상륙이 실시되는 한편 상륙 본대는 서해안을 돌아 인천으로 이동하여 월미도를 향하여 함포가 불을 뿜어면서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불루비치와 래드비치에 상륙을 시작한 연합군은 인천시내를 소탕하고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김포공항을 점령하고 일부 부대는 수원비행장을 점령하기 위하여 남으로 공격하였다. 행주대교 일대에서 도하한 연합군은 서을 서쪽을 향하여 공격하였고 서울 남부,동부 방향 등 세 방향으로 서울을 압박하였다.
13. 북진
북한군 지휘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인천이나 군산, 진남포, 원산을 상륙 가능지역으로 판단하고 있었으나 상륙 부대가 교두보를 확보하기 전에 반격 부대를 투입하는대 위치선정이 너무 멀었다. 인천에 상륙한 연합군 상륙 부대는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하자 북한군 지휘부는 가용 병력을 서울 서쪽과 남쪽 방향으로 투입하여 초인적인 저항을 시도하고 있었다.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소식이 북한군 전선에 전파되었고 낙동강 전선의 적은 보급로와 퇴로가 차단될 것이 예상되자 전선 지휘체계가 일시에 마비되면서 각부대는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태백산맥 등 산간 도로를 따라 소부대 단위로 북상 도주가 시작되었고 일부 부대는 지리산 등 산간지역으로 숨어들어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였다. 아군은 낙동강을 넘어 북으로 추격전이 부대별로 경쟁적으로 실시되었다.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고 맥아더는 38선 돌파문제를 고심하다가 트루만 대통령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만국경으로 전 연합군에게 북진을 명령했다. 연합군은 평양을 단숨에 점령하고 계속 북진하여 선봉부대인 한국군 6사단이 압록강변 초산에 도달하게 되고 미해병 제1사단은 흥남-원산일대에 상륙하여 장진호를 향하여 깊숙히 진격하고 있었다.
한편 미 본토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 소식이 전해지자 워싱톤은 몰론 전국이 2차대전 후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마치 고대 로마시대 제2차 포에니전쟁시 약관의 20대의 로마장수 '스키피오'장군의 로마 원정군이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을 북아프리카 지역 '자마회전'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전 로마시민이 미치도록 열광하듯이...
그러나 '설치관계'의 한반도의 맹주 중공군이 만주지역에 집결되고 있었고 야음을 틈타서 북한지역으로 20만명 이상이 잠입하고 있었다. 미공군은 항공정찰로 만주 지역에 집결하는 중공군의 모습이 확인 되었지만 야음을 틈타서 북한지역으로 잠입하고 있는 중공군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14. 중공군 개입
연합군의 파죽지세 공격이 중지되고 위력수색만 실시토록 전군에 하달되어 공격을 멈추고 중공군을 찿는데 정보력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연합군 후방에 나타난 중공군은 연합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시작하였다. 청천강 일대에 나타난 중공군이 포위전술로 연합군의 후방차단이 시도되자 미군과 연합군은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신속하게 철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장비와 무기는 물론 병력도 심대한 손실을 입고 후퇴하기에 바빴다. 한편 장진호 가까이 '고토리'까지 진격한 미해병 제1사단은 추위와 싸우며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죽음의 계곡을 수없이 지나면서 많은 장비와 병력 손실을 입고 천신만고 끝에 흥남에 도착하여 피난민과 같이 철수하게 된다. 중공군의 공세로 전선은 38도선 까지 남으로 계속 밀리고 있었다. 그러던중 '맥아더 장군'이 극동군 사령관직에서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고 후임 '릿지웨이 장군'이 부임하였다. 전선은 서울이 다시 중공군에게 피탈되고 다시 수복하는 등 38선 일대에서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현리전투, 지평리전투, 백마고지 전투, 다솔산 전투, 저격능선 전투 등 철의 삼각지에서는 뺐고 빼았기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한편 휴전이 제안되어 판문점에서 지리한 휴전회담이 진행되다가 3여 년 간 진행되던 한국전쟁은 종국을 맞이하게 된다.
15. 맥아더와 트루만 갈등
당시 서울을 수복하고 38선 돌파하여 북진하는 문제를 맥아더 장군은 고민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개입문제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강력하게 북진을 주장했다. 맥아더 장군의 생각은 만일에는 중국과 전쟁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같은 공산국가인 소련과도 동시전쟁을 감수해야 한다. 이 문제는 자신이 결정할 수는 없는 문제로 생각하고 트루만 대통령과 태평양상의 한 섬에서 만나 상의하게 된다.
트루만 대통령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중국과 전쟁을 두려워 했다. 그리고 소련과 동시 전쟁은 더더욱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세계 3차대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소련.중국 등 전 공산권이 대동단결하고 미국을 위시한 전 민주주의 국가들이 또다시 세계 3차대전의 불구덩이에 뛰어 들어야 한다? 아니지... 미국과도 멀리 떨어진 아시아의 조그만한 반도 한국, 그기에다 미개한 반쪽나라 신생국 한국을 위해서 미국이 중국과 전쟁을 치루기에는 명분이 약했고 실익도 별로였다. 그리고 세계 3차대전을 치루게 될 지 모르는 대 재앙을 초래할 빌미를 미국이 제공한다는 자체가 현재의 미국 대통령인 자신이 책임져야하고 역사의 지탄을 받기는 싫었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이 원하는대로 만주를 폭격하고 중공군의 전쟁개입을 차단하고 중국이 별다른 항의나 반격없이 그리고 소련의 전쟁개입도, 공산권의 대동단결과 대미국 전쟁불사도 없이 한반도를 미군과 연합군이 무력으로 통일시킨다면 맥아더의 인기와 갈채는 대통령인 자신과 비교가 되지 않게 될 것이다. 본래대로 한반도는 북한의 침략만 물리치고 38도선에서 현상유지가 더이상 아무런 손실없이 일본을 지키는 완충지대로 한국의 역활만 생각하면 되며 그것이 정치적으로 바람직 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임진왜란시 무능하고 질투심 많은 조선의 선조가 이순신의 승리 소식에 불안감을 느끼고 간신들의 모함에 동조하여 이순신을 해임하여 백의종군시킨 것이나 진배없는 트루만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미 전쟁영웅의 칭호를 받고 있던 맥아더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과를 최대한 확대하고 싶었고 내친김에 완전한 승리를 원했다. 군인은 정치적인 안목이 아닌 군사적인 안목으로 전략을 구상한다. 미국의 전술핵무기를 사용하거나 공군으로 하여금 만주지역을 폭격할 수 있도록 승인을 요구했다. 그래서 한국민에게 강대국에 의해서 반쪽이 된 반쪽나라가 아닌 북쪽의 공산세력을 완전히 제거시키고 완전한 한나라로 만들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한국민을 위해서도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며 공산진영의 교두보를 허용할 수는 없었다. 중국이나 소련이 함부로 쉽게 미국과 대항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위력을 알고 있을 것이며 유사시에는 원폭사용도 불사한다. 완전한 승리! 그것만이 전쟁을 지휘하는 군사지도자가 바라는 최종목표이다. 어정쩡한 휴전이란 있을 수 없다. 자신은 휴전을 생각하지도 않고 있으며 한번 시작한 전쟁은 적 군사력의 완벽한 괴멸과 지휘부의 완전한 소탕이다. 그래야만 두번 다시 이민족에 불행을 막을 수 있으며 민주주의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트루만 대통령은 태평양 외딴섬에서 맥아더 장군과 만나 서로의 생각과 견해를 나눈 결과 엄청난 차이가 있슴을 확인하게 되고 극동군 사령관직에서 해임시켜야 하겠다는 결심하게 된다.
--------------------------------------------------------------------------------------------
General Douglas MacArthur's
"Old soldiers never die" Speech
(April 19,1951)
맥아더 장군 국회에서의 마지막 연설
대통령 각하, 의장님, 그리고 고명하신 의원 여러분
저는 깊은 겸양과 자부심을 가지고-즉 저보다 먼저
이 자리에 섰던 위대한 미국 역사의 건설자들의 궤적을
따르고자 하는 겸양과,
이 입법부의 토론장(국회의사당)이 지금까지 고안된
가장 순순한 형태로 인간의 자유를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이 연단에 섰습니다.
여기에 전 인류의 희망과 열망과 신념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저는 어떤 당파적인 명분을 옹호하고자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중략)
저는 저물어 가는 인생의 황혼기에 어떤 적의나 비통함에서가 아니라
단지 마음에 품은 한 가지 목적 곧 내 조국을 섬기고자 하는 의도에서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대통령께서 대한민국에 대한 지원에 개입하려는 결정을 하기에 앞서
저와 상의하지는 않으셨지만, 그 결정은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건대
올바른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그 결정은 우리가 침략자를 격퇴시키고
그들의 군사력을 격감시킴으로써 올바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우리의 승리는 완벽했으며 우리의 목적은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때 중공군이 수적으로 우세한 지상군을 동원하여
개입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전쟁과 전혀 새로운 상황을 야기시켰습니다.
이 상황은 우리 군이 북한 침략자들에 맞서 배치되었을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상황은 외교 분야에서 군사 전략의 현실적 조정을 허용하도록
새로운 결정을 요구했습니다.
이 결정들은 조속히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제 정신으로는 우리 지상군을 중국 대륙에 보내는 것을
찬성하지 않을 것이고, 이런 일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치적 목적이 처음의 적을 물리쳤듯이
이 새로운 적도 물리치는 것이었다면 이 새로운 상황은
전략을 과감하게 수정할 것을 긴급하게 요구했습니다.
한국의 비극은 군사적인 행동이 그 영토 한계 안으로만 제한되어 있어
우리가 구해 내려는 그 나라가 전면적인 해상 폭격과
공습의 파괴적인 영향으로 고통을 받게 되어 있고
반면에 적의 은신처는 그런 공격과 참화로부터 전적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고조되고 있습니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 중 한국만이 지금까지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모든 것을 건 유일한 나라였습니다.
한국인의 훌륭한 용기와 불굴의 정신은 필설로는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노예가 되는니 차라리 죽음을 무릅쓰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했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Don't scuttle the Pacific." "태평양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저는 한국에서 싸우고 있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막 떠나 왔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온갖 시련을 감당했으며
저는 그들이 모든 면에서 참 훌륭하다고
기탄 없이 여러분께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보호하고 이 야만적인 전쟁을 최소한의 시간 손실과
인명피해만으로 명예롭게 끝내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늘어가는 유혈사태는 저에게 더없이 깊은 고통과
불안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용맹스런 병사들은 제 생각과 기도 속에
항상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저는 52년간의 군복무를 끝마치려 하고 있습니다.
세기가 바뀌기 직전에 제가 군에 입대했을 때,
그것은 소년시절의 제 모든 희망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제가 웨스트포인트의 평원에서 선서한 이래 세상은 여러번 바뀌었고,
희망과 꿈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만 저는 아직도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라고
자신 있게 선포했던
그 당시 병영 최고의 애창곡들 가운데 한 곡의 후렴구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노래의 노병처럼,
저는 이제 군인으로서의 이력을 마감하고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던 한사람의 노병으로서
다만 사라져 갑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사라져가는 노병 맥아더장군
(연설 후 국회를 떠나면서)
-----------------------------------------------------------------------------------------
이는 군사적 안목과 정치적 안목을 이야기한 것이다.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판단을 당연시 생각할 수 있으나 트루만 대통령의 정치적 안목과 판단은 인류의 또다른 큰 불행을 자초하지는 말자는 안목이다. 물론 트루만의 안목과 생각대로 결과적으로는 한반도가 원래대로 반쪽씩 현상유지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민족의 불행은 우리들의 몫이 되었다.
이 대목에서 고대 로마시대 '포에니 전쟁'을 떠 올리게 한다.
이탈리아 반도 끝 메시나 해협 건너 시칠리아섬에 그리스 도시국가 '메시나'가 이웃 도시인 '시라쿠스'가 당시 해양 강대국인 '카르타고'를 등에 업고 '메시나'를 공격하게 된다. 이에 '메시나'는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는데 로마 원로원은 갑론을박 끝에 이탈리아 반도의 위협을 방치할 수 없는 관계로 당시 신생국이던 로마는 힘은 부족하지만 '메시나'를 지원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포에니 전쟁'은 제1차 시칠리아 쟁탈전, 제2차 한니발 전쟁, 제3차 카르타고 멸망까지 장장 100여년 동안 로마제국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겪는 등 엄청난 희생을 치루면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면서 약 2000년 동안 지중해 일대와 에스파냐, 프랑스.독일.영국, 동유럽,그리스 및 소아시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일대를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자리메김하는 결과가 되었다.
16. 미국의 대 한반도관
한반도의 반쪽 한국은 미국이 그들의 국익과 관련하여 필요성이 없으지면 언제라도 포기할 수 있는 나라이며 미국과 수 만 키로 떨어진 태평양 서쪽 끝 아시아 대륙의 조그만 나라에 불과하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의회의 승인과 대통령의 선전포고가 아닌 유엔을 통한 경찰군으로 연합군을 구성하여 참전하였다. 미국은 자신들의 국익과 비교하여 한반도가 리스크가 크다고 판단하는 날에는 언제라도 포기할 것이다. 이스라엘 6일전쟁은 미국에서 매년 대대적인 행사를 하면서도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미국의 공식문서에도 한국전쟁이 아닌 한국분쟁으로 표기하고 있다.
17. 중.소의 대 한반도관
반면 중국이나 소련은 한반도 전체가 강대국인 미국의 지배를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 일 것이다.이는 고대 로마의 입장과 똑 같다. 북한이 구원을 요청하면 '설치관계'(입술과 잇발관계),'항미원조'(抗美援朝) 를 외치면서 한반도에 대한 역사적인 종주국을 자부하며 군림하여 왔으며 한반도의 외세 침입을 절대로 방치할 수 없는 입장이며 역사적으로도 그랬다.
미국은 서쪽 하늘에 걸쳐진 태양이나 중국은 떠오르는 태양이다. 거대한 인구와 넓은 땅은 앞으로 아시아 맹주로 자리메김 할 것이며 기술전쟁,무역전쟁으로 언젠가는 미국과 중국은 주도권 쟁탈을 위해서는 반드시 한 번은 혈전을 치를지도 모른다. 우리가 고래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될 것인지 아니면 고래싸움을 말리는 중재자가 될 것인가는 우리들의 미래에 달렸다.
18. 약소국의 운명
인류의 역사는 침략과 약탈의 역사이다.
남미의 마야.잉카문명을 꽃피우며 살았던 민족은 스페인의 침공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로마 제국과 패권을 다투던 카르타고는 나라도 민족도 사라졌다. 세계 최대 강대국인 몽골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족은 황무지에서 지금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최강의 팔기군으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대륙에 웅대한 청나라를 건설했던 여진족은 지금 나라도 민족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미 고인이된 사람들이지만 강대국의 몇 몇 인물들에 의해서 한나라의 운명이 좌지우지 되었다는 것은 강대국이 아닌 약소국이기 때문이며 힘이 없슴이며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강산 곳곳에, 먼 월남 땅에 고 민태식 일병처럼 한 시대를 잘 못 만나서 전장터의 이슬로 사라져간 수 많은 젊은 영혼들이 흩어져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잘못하면 후손들이 이처럼 젊음을 꽃피워 보지도 못하고 서로 총으로 칼로 죽이고 죽으며 피를 흘리고 고통으로 신음하고 가난과 멸시를 받으며 사람대접도 못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후진국 약소국가의 운명이다.
강대국인 선진국을 보라! 그들은 후진국의 피와 땀을 이용하여 국익을 챙기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여 놀면서도 돈을 벌고 시간적 경제적 자유를 구가하고 있으며 연일 파티며 연회를 즐기면서 먹고 마시며 향락을 즐기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지 않는가? 해변가에 넓고 좋은 궁궐같은 저택에서 자가용 747 비행기가 집 앞에 주기하며 보란듯이 세계를 날아 다니면서 대접받고 존경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흠모하고 존경하지 않는가! 그들의 말 한마디에 한 나라가 벌벌떨고 정권이 휘청거리며 경제가 마비되지 않는가!
19. 우리들의 각오와 다짐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가? 접적 지역 해상에서 경계하던 천안함이 순식간에 두 동강나서 침몰하면서 46명의 고귀한 생명이 전사하는 비극을 당하였다. 갑작스런 침몰 원인을 몰라 의문과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어뢰 파편을 다행히 찿아 냈다. 적이 몰래 침투하여 어뢰를 발사하고 도망을 갔다. 그러나 수많은 레이다,함정,위성이 있었지만 누구 한 사람도 그 것을 사전에 발견하지도 못햇다. 지난 수십 년 간 우리 안보의 현실을 그대로 나타낸 사건이었다.
세계 각국에 북한의 소행이라고 광고를 한다고 특별한 대북제제가 나올 것은 없다. 우리 민족의 비극일 뿐이다. 유엔 안보리에서 제소해봤자 중국.러시아가 쉽게 동조할리도 없다. 러시아도 검사관들이 다녀 갔지만 북한의 소행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고 발표했다.중국에 애걸복걸한다고 중국이 북한을 발로 차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우리가 중국을 포용하지 못하면 대북정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중외교의 최종 목표는 북한의 문호를 완전 개방하여 김정일 체제의 자연스런 붕괴를 유도한는 것이며 중국이 우리와 상호불가침 조약과 상호군사지원조약을 맺는 길이다.
한국이 싫어서 떠난 사람들, 군대를 가지 않으려고 갖가지 방법을 구사하는 지도층과 부모들, 민중과 개혁이라는 편협한 사고로 권력에 눈이 멀어 국방을 도외시 하는 정치인, 군부대가 들어오지 못하게 연일 데모하는 지역 주민, 부정.부패한 공무원, 스폰서 검사,불로소득을 챙기려는 노동조합, 비리공화국/부패공화국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군을 우습게 보는 국민들의 풍조가 사라지지 않는 한 안보는 하물어 질 수 밖에 없다.
현실에만 안주하면서 세월을 노래하고 추억에 빠져 옛 사랑만 그리워 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신의 후손들이 정말 행복하게 잘 살기를 원한다면 지금부터 생각을 바꾸라! 가난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은가? 당신의 후손이 전장터로 끌려가서 이름모를 산하에서 뼈쪼각이 썩도록 방치할 것인가? 시대의 흐름과 미래를 보고 생각을 바꾸고 언행도 바꾸라.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세상을 준비하라.
![]() |
- 서울에서,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