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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110 (광서제 시대 : 의화단의 난)

두바퀴인생 2010. 6. 6. 09:55

 

 

중국의 역사 110 (광서제 시대 : 의화단의 난) 

 

 

大清帝國
존속 기간 : 1616년 - 1912년
청나라의 국기 청나라의 국장
(국기) (국장)
표어: (없음)
국가: 공금구
청나라의 위치
수도 선양(1636~1644)
베이징(1644~1912)
39°55′N, 116°23′E
공용어 만주어, 중국어
정부 형태 전제군주제
천명제 (1616 ~ 1626)
강희제 (1661 ~ 1722)
선통제 (1908 ~ 1912)
정부수립
 • 성립 (후금)
•국호 개칭
•중국 통일
신해혁명
해체

1616년
1636년
1644년
1911년 10월 10일
1912년 2월 12일
면적
 • 면적
 • 내수면 비율
 
9,984,670 km²
2.8%
인구
 • 1820년 어림
 • 인구 밀도
 
383,100,000명
명/km²
통화 위안 (1889년부터)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v  d  e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122~기원전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20
  전한
  8~23
  후한

삼국 시대 220~280
  , ,
265~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서하
1038~1227
  남송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44~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역대 황제

 

건주 여진(建州 女眞) 추장

건주여진 추장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재위기간
- 청 시조
(淸始祖)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포고리옹순
(愛新覺羅布庫里雍順)
-
- 청 조조
(淸肇祖)
(청 태조 추숭)
원황제
(原皇帝)
애신각라맹특목
(愛新覺羅孟特穆)
1405년 ~ 1433년
- - 순황제
(順皇帝)
(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충선
(愛新覺羅充善)
1433년 ~ 1467년
- - 흥황제
(興皇帝)
(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탈라
(愛新覺羅脫羅)
1467년 ~ 1481년
- - 정황제
(正皇帝)
(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석보제편고
(愛新覺羅錫寶齊篇古)
1481년 ~ 1522년
- 청 흥조
(淸興祖)
(청 태조 추숭)
직황제
(直皇帝)
애신각라복만
(愛新覺羅福滿)
1522년 ~ 1542년
- 청 경조
(淸景祖)
(청 태조 추숭)
익황제
(翼皇帝)
애신각라각창안
(愛新覺羅覺昌安)
1542년 ~ 1571년
- 청 현조
(淸顯祖)
(청 태조 추숭)
선황제
(宣皇帝)
애신각라탑극세
(愛新覺羅塔克世)
1571년 ~ 1583년
제1대 청 태조
(淸太祖)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1583년 ~ 1616년

후금(後金, 1616년 ~ 1636년)

후금 대칸과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제1대 청 태조
(淸太祖)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천명(天命) 1616년 ~ 1626년
제2대 청 태종
(淸太宗)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천총(天聰) 1626년 ~ 1636년

청(淸, 1636년 ~ 1912년)

청나라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제2대 청 태종
(淸太宗)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숭덕(崇德) 1636년 ~ 1643년
- 청 성종
(淸成宗)
(청 세조 추숭)
무덕수원광업정공
안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
安民立政誠敬義皇帝)
애신각라다이곤
(愛新覺羅多爾袞)
(도르곤)
- -
제3대 청 세조
(淸世祖)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
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
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애신각라복림
(愛新覺羅福臨)
순치(順治) 1643년 ~ 1661년
제4대 청 성조
(淸聖祖)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
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
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애신각라현엽
(愛新覺羅玄燁)
강희(康熙) 1661년 ~ 1722년
제5대 청 세종
(淸世宗)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
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
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애신각라윤진
(愛新覺羅胤禛)
옹정(雍正) 1722년 ~ 1735년
제6대 청 고종
(淸高宗)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
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
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애신각라홍력
(愛新覺羅弘曆)
건륭(乾隆) 1735년 ~ 1795년
제7대 청 인종
(淸仁宗)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
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
(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
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애신각라옹염
(愛新覺羅顒琰)
가경(嘉慶) 1795년 ~ 1820년
제8대 청 선종
(淸宣宗)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
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
(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
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애신각라민녕
(愛新覺羅旻寧)
도광(道光) 1820년 ~ 1850년
제9대 청 문종
(淸文宗)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
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
(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
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애신각라혁저
(愛新覺羅奕詝)
함풍(咸豊) 1850년 ~ 1861년
제10대 청 목종
(淸穆宗)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
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
(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
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애신각라재순
(愛新覺羅載淳)
동치(同治) 1861년 ~ 1875년
제11대 청 덕종
(淸德宗)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
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
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애신각라재첨
(愛新覺羅載湉)
광서(光緖) 1875년 ~ 1908년
비정통 - 대아가
(大阿哥)
(대황자<大皇子>)
애신각라부준
(愛新覺羅溥儁)
보경(保慶) 1899년
제12대 청 공종
(淸恭宗)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
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
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말대황제<末代皇帝>,
손황제<遜皇帝>)
애신각라부의
(愛新覺羅溥儀)
(푸이)
선통(宣統) 1908년 ~ 1912년

 

 

의화단의 난

 

 청조(淸朝) 말기인 1900년 중국 화베이[華北] 일대에서 일어난 배외적(排外的) 농민투쟁을 말한다. 북청사변(北淸事變), 단비(團匪)의 난, 권비(拳匪)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 단체는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에 걸쳐 청에 대한 반란을 조장했던 대도회(大刀會)의 분파이다. 대도회는 청대 말기 장쑤 성[江蘇省], 허난 성[河南省], 안후이 성[安徽省], 산둥 성[山東省]의 4성의 경계지역에서 일어난 백련교 계통의 비밀결사이다. 특히 산둥성[山東省] 부근에는 청나라 중기부터 백련교(白蓮敎)의 한 분파인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비밀결사가 있어 한국의 태권도와 같은 권술(拳術)을 전수하고, 주문(呪文)을 외면 신통력이 생겨 칼이나 철포에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고 믿었다. 1894년의 청일전쟁 후 열강(列强)의 침략은 중국을 분할의 위기에 몰고, 또한 값싼 상품의 유입 등으로 농민의 경제생활은 파괴되었다.

 

원래는 반청 단체였는데 청나라 말기 서태후는 이들을 구슬려 외세에 대항하는 단체로 삼았으며, 반청(反淸)의 구호대신 "청조를 돕고 외국을 멸한다."(부청멸양, 扶淸滅洋)의 구호로 바꾸게 하였다. 1900년 서태후는 이들에게 열강 8국 (러시아, 일본,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과 대항하게 했다.

 

 

                      

 

 

  즉,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요동반도를 할양받자, 이곳으로 진출하려던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부추겨 일본으로 하여금 이 반도에서 철수하도록 강요하였다.(=삼국간섭) 이것이 성공하자 러시아는 재빨리 1897년에 여순항 으로 군대를 파견하였고, 결국 1898년 3월에 이 반도를 25년간 조차하 였다. 그럼으로써 러시아는 오랫동안 숙원이었던 유럽과 연결되는 부동항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일본은 비록 요동반도를 잃었지만, 시모노세끼 조약의 결과로 획득한 대만을 자국의 지배하에 둘 수 있었다. 독일은 1897년에 산동에서 자국의 선교사 두명이 중국인에게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교주만의 청도를 점령하였다. 이것은 종래 교안사건이 있 을 때마다 고전적으로 되풀이 되어온 방식이기도 하였다. 남부지방에 관심이 있던 프랑스는 1898년 4월에 인도차이나에 가까운 광주만을 점 령하였고, 홍콩 인근 지역의 영토를 확장하려고 노리던 영국도 이른바 신계지라 불리는 홍콩 인근의 중국 영토(975.1km2)를 유례없이 99년간 조차하므로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켰다. 미국도 필리핀(1898)과 괌 (1898)등을 쟁취한 뒤, 기존 열강에게 중국의 문호개방과 영토보전, 기회균등을 제의하는 것으로써, 뒤늦은 진출을 만회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기본적으로 반기독교적 민족운동이었던 의화단 운동은 독일의 산동침략과 그에 따른 철도 개설 및 이에 필요한 토지 매입, 분묘파괴, 민가 철거 등으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과 때마침 일어난 산 동지역의 자연재해와 기근이 겹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특권을 지닌 그리스도교의 포교는 중국인의 반감을 사 배외적인 기운이 높아갔다. 즉,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의 행동은 의화단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중국인들은 중국의 전통의례와 가족관계를 무시했다. 또한 선교사들은 지방 관리들로 하여금 그 지역에서 벌어지는 소송과 소유권 분쟁에서 주로 하층계급 출신인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의 편에 서도록 압력을 가했다. 결국 의화권은 그리스도교회를 불태우고 그 신도들을 살해하는 반(反)그리스도교 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파산한 많은 농민들과 함께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한편 열강의 침략은 지배층 안에도 수구파(守舊派)와 양무파(洋務派)라는 대립집단을 파생하게 하였다. 수구파는 종래의 지배자이던 서태후(西太后) 등의 만주인(滿洲人) 귀족층이 중심이고, 양무파는 열강에 의존해서 새로이 힘을 뻗어온 이홍장(李鴻章) 등 한인(漢人)의 고위 관료가 중심이었다. 수구파는 의화권을 탄압하기 어려운 것을 알고 역(逆)으로 이를 이용해서 열강이나 양무파에 대항하려 하여 의화권을 의화단으로 개칭, 이를 반합법화(半合法化)하였다. 의화권도 '청조(淸朝)를 받들고 외국을 멸망시킨다(扶淸滅洋)'는 기치를 내걸고 배외(排外)를 주요 투쟁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1899년 말에 양무파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산둥순무[山東巡務]에 취임하면서 의화단을 탄압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허베이성[河北省]에 유입하게 되었고 대운하(大運河)·경한철도(京漢鐵道) 연선(沿線) 일대에 퍼지게 되었다. 이들은 다시 순식간에 화베이[華北]의 모든 성(省), 동북지방·몽골·쓰촨[四川]으로 확산하여 외국인이나 교회를 습격하고 철도·전신을 파괴하고, 석유 램프·성냥 등 외국제품을 불태웠다. 청나라 조정의 태도는 시종 동요하였으나 수구파의 지도 아래 의화단 이용책을 취하여 1900년 6월 열강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1900년 의화단 주력부대는 직례(直隷) 의화단과 합류하여 2~6월 톈진[天津]을 점령했고, 직례에 있는 교회를 불지르고 외국의 중국 주재 기관을 파괴했다. 이에 대해 영국·프랑스·미국·독일의 4개국 공사는 청나라에 2개월 내에 의화단을 진압할 것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4개국이 직접 군대를 파견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베이징[北京]에까지 침입한 의화단은 관군(官軍)과 함께 열강의 공사관을 공격하고 베이징이나 톈진[天津]에서는 의화단원이 거리에 넘쳐 그 세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근교(近郊)의 농촌에서 베이징에 집결한 의화단원은 10대의 소년이 많았으며 빨강·노란색의 천을 몸에 감고 팔괘(八卦)로 대오(隊伍)를 나누었다. 이들에게는 전체적인 지도자는 없고 동리마다 권단(拳壇)을 설치, 이 단이 의화단의 한 단위였으며, 대사형(大師兄)이라고 불리던 지도자가 단의 책임자였고 10대의 소녀들도 홍등조(紅燈照)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영국·러시아·독일·프랑스·미국·이탈리아·오스트리아·일본 등 8개국은 연합군을 형성하고 대고포대(大沽砲臺)와 톈진에서 관군과 의화단을 격파, 8월에는 베이징에 입성하여 농성 55일에 접어든 여러 나라의 공사관원들을 구출하였다. 서태후와 광서제(光緖帝)는 시안[西安]에 피신하고 실각한 수구파에 대신해서 실권을 쥔 양무파는 연합군에 협력하여 의화단 잔당을 학살하였다. 1901년 베이징의정서[北京議定書:辛丑條約]가 성립되자 중국의 식민지화는 한층 깊어지고 이후 중국은 방대한 단비배상금(團匪賠償金)의 지불에 오랫동안 괴로움을 겪게 되었다.

 

  즉, 신축조약은 총 12조이고 부칙은 19항이며,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건을 일으킨 관리를 처벌하고 각국에게 사과한다. 백은(白銀) 4억 5,000만 냥을 1940년까지 39년간 연 이자율 4리로 원리 합계 9억 8,000만 냥을 배상한다. 이를 위해 해관세(海關稅)·상관세(常關稅)·염세(鹽稅) 등을 차압한다. 베이징 동쪽 교외에 있는 민간거주지를 외교관 지역으로 설정하고 각국에서 군대를 주둔시켜 관리한다. 다구[大沽]에서 베이징에 이르는 포대(砲臺)를 파괴하며, 베이징에서 산하이관[山海關] 사이의 철도 옆 주요지점 12곳에 각국의 군대를 주둔시킨다.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외무부로 고치고 6부(六部)보다 위에 두어 대외업무를 담당하게 한다. 중국인이 조약 체결국을 적대시하는 조직을 결성하거나 그 조직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하며, 이를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성(省)의 관리자는 관할지역에서 조약 체결국 국민이 상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하면 곧 이를 진압해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에는 그 관직을 박탈하고 다시는 임용하지 않는다.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 또는 의화단의 난

1899년 11월 2일부터 1901년 9월 7일까지 산둥지방, 화베이 지역에서 일어난 배외격 민중봉기다. 이들은 서양 문물,철도,기독교인등 무자비로 거부,폭파,살해했으며, '부청멸양'을 구호로 배외격을 전개해 나아갔다. 청조 역시 이를 뒤에서 지원하나 결국에는 8개국 연합군(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일본)이 강력진압했다. 이후 신축조약(베이징의정서)로 열강들의 이권침탈은 더욱더 심화된다.


 

의화단 운동
Boxer-tianjing-left.jpeg
톈진에서의 의화단 운동
날짜 1899년 11월 2일 - 1901년 9월 7일
장소 청나라
결과 신축조약 체결, 청조 몰락 가속화
교전국
일본의 국기 일본
러시아 제국의 국기 러시아
영국의 국기 영국
프랑스의 국기 프랑스
미국의 국기 미국
이탈리아의 국기 이탈리아
독일 제국의 국기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기 오스트리아-헝가리
Yihetuan flag.png 의화단
China Qing Dynasty Flag 1889.svg 청나라
지휘관
영국의 국기 에드워드 시모어 경
독일 제국의 국기 알프레트 폰 발더제
China Qing Dynasty Flag 1889.svg 서태후
China Qing Dynasty Flag 1889.svg 위안스카이
병력
팔국연군:

49,000명

의화단 및 관군:

의화단 50,000명 ~ 100,000명
관군 70,000명

피해 상황
팔국연군:
군인 2,500명
외국인 및 기독교를 믿는 중국인 신자 526명
의화군 및 관군:

대부분의 의화군과 20,000여명의 청나라군

 

청나라에서는 1858년 천진 조약에 의해 청국 국내에서의 기독교 포교를 인정하기는 하였으나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민중들은 기독교를 사교로 보는 경향이 많았다. 이처럼 기독교가 민중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된 몇 가지 이유를 들어보면, 첯째, 조상의 제사를 '우상숭배'라 하여 금하고 돌째, 부부유별의 전통 사회에서 남녀가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보는 것 등이 일반 대중들의 눈에 크게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당시 청나라청일전쟁 이후 일본에 패배하여 배상금을 3억 엔을 배상할 의무가 있었고 열강세력들의 이권침탈이 가중화되었으며 게다가 국내에서도 흉작과 또한 값싼 상품의 유입 등으로 농민의 경제생활은 파괴되었다. 특히 특권을 지닌 기독교인들의 포교는 중국인의 반감을 사 배외세적인 움직임이 높아만 갔다. 거기에 내부적으로는 '양무 운동'과 '변법자강 운동'등 개혁운동도 서태후 한 사람 때문에 실패하고 외세들의 침탈은 점점 더 심해져 가기만 했다.

 

특히 교회가 서구 열강의 약탈적인 무역과 양풍화, 이를 테면 '서세동점의 첨병 구실을 하고 있다는 데 민중들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청나라가 패전을 거듭할 때마다 치욕적인 조약이 체결되고, 그에 따른 배상금의 지불 문제로 중국 민중들의 생활이 위협받게 되자 그들은 기독교를 앞세운 열강의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민중들의 분노와 불만을 배경으로 튀어나온 것이 '의화단'이었다. 


산동 지방에서 원나라 때부터 맥을 이어오던 백련교 계통의 비밀 결사로 '대도회. 팔괘교.의화문.이괘교.여의교.산동 노단' 등 그 수를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밀 결사가 있었다. 산동 지방은 옛날부터 방술이 성했던 고장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온 '신병'이라 칭하며 '주문이나 권술등을 익히면 신통력이 생겨 칼이나 총등 어떠한 것에 맞아도 상처 입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들은 원래 '(反)반청 단체'였는데 청나라 말기 외세에 대항하는 단체로 삼았으며, 반청(反淸)의 구호대신 "청조를 돕고 외국을 멸한다."(부청멸양, 扶淸滅洋)의 구호로 외세배격에 나섰다. 이들은 외국인과 기독교인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같은 중국인일지라도 기독교를 믿는 자는 죽임을 당하는 등 반외세 감정은 극에 달해, 이에 가세하는 민중들이 늘어났고, 가는 곳마다 철도, 교회 등을 파괴하고 다녔다.

 

이러한 국내 정세는 외국인들의 실생활을 위협했으며 실제로 많은 외국인들이 청에서 나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청 조정은 의화단원들의 무자비한 습격이 격렬해지자  북경 조정에서는 '원세개'를 산동 순무로 임명하여 의화단의 난동을 진압토록 하였다.원세개는 그가 편성한 신식 육군을 이끌고 부임하여 의화단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1900년 봄 원세개에게 쫓긴 의화단의 주력은 직례(하북)에 들어가 이 지역의 의화단과 합류하여 2월 16일부터 6월에 걸쳐 천진을 점령하였고, 각지에서 교회와 열강의 중국 주재 기관을 파괴했다.

 

이 같은 사태에 직면한 북경의 영.불.미.독 네 나라 공사는 즉시 의화단의 난동을 진압할 것과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네 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할 수 밖에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하여 직례총독 '유록'은 의화단 진압군을 파견하였으나 '내수'에서 격파당하고 말았다. 정부군을 격파한 의화단은 철교.철도.전선 등 양과 관계가 있는 시설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었다.

 

서태후의 측근들은 의화단의 진격 상황을 지켜보고 이들의 힘을 배외 운동에 이용하려 하였다. 이것은 근시안적인 발상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보수파의 영수 '강의'가 직극적으로 의화단 포섭 공작을 폈다. 그는 서태후에게 의화단의 충용성과 신통한 주술 등을 극구 칭찬하면서 서태후의 마음을 움직였다.

 

1900년 의화단은 마침내 북경으로 들어왔다.산동성에서 처음 일어났을 때에는 폭도에 불과했던 그들이 이제는 '부청멸양'의 단체로 변신하여 북경 시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의화단은 강의를 통하여 청나라 조정에서 은이나 식량은 물론 지금까지 의화단을 탄압했던 관료와 군인들의 처벌까지도 요구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총리아문의 수석대신을 '경친왕'에서 '단군왕'으로 교체하는 등 서서히 배외적 성격이 강한 인물을 등용하였다. 경친왕은 외국인들로부터 평판이 좋았던 인물로 서태후와 그의 측근들이 배외 정책을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북경에 들어온 의화단은 20만 명에 이르러 그 세력이 당당하였다. 그런 위에 청나라 조정은 배외적 색채기 짙은 '동복상'의 정부군을 북경으로 끌여들여 의화단과 합류시켰다.

 

20만의 의화단과 '동복상'의 군대는 마침내 북경에서 외국인에 대한 무자비한 테러를 가하였다. 6월 11일에는 일본 공사관의 '스기야마' 서기관을 죽이고, 6월 20일에는 독일 공사가 공무를 띠고 총리아문으로 가던 도중 피살되었다. 북경의 거리는 바야흐로 폭동과 테러가 난무하는 수라장이 되었다. 양인 한 명을 죽이는 자는 은 50냥, 양녀를 죽인 자는 은 40냥, 아이를 죽인 자는 30냥의 현상금을 거는 등 청나라 조정은 이성을 잃고 있었다.

 

                 

 

청 조정은 이러한 사태를 보면서 들떠 있었다. 예부상서 '계수'는 '오대산 승려 '보제'가 대리고 있는 병력 10만을 불러 들이자'고 하였으며, 어사 '팽술'은 '총에 맞아도 상처를 입지 않는 의화단의 신통력을 칭찬하면서 외국 군대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사관이었던 '소영작'은 '하늘이 의화단의 손을 빌려 오랑캐를 멸망시키려 함이니 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의화단이 북경에 입성하여 서양인에 대한 무차별 테러를 감행하자 각국 공사들은 공사관을 보호하기 위해서 긴급조치를 취했다. 5월 31일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이탈리아.일본 (후에 독일.오스트리아 가담) 6개국은 모두 490명의 군대를 북경에 보내 공사관을 보호토록 했다. 그러나 천진-북경 간의 철도와 통신선이 의화단에 의해 파괴됨으로써 북경 주재 공사와 북경 진주군은 고립되었다.

 

이에 당사국들은 영국 극동 함대 사령관 '에드워드'를 총지휘관으로 2천 명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6월 10일 천진에서 북경을 향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이 부대 또한 의화단에 저지되어 북경에 입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는 사이 일본 서기관과 독일 공사가 피살되었던 것이다.

 

이에 연합군은 북경 점령을 목표로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하여 '대고'의 포대를 공격.점령하고 계속 북경을 향해 진격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6월 21일 각국에 대하여 선전포고하고 의화단에게 각국 공사관과 천진 조계를 공격토록 명하였다. 서태후는 강화와 전쟁을 놓고 무척 고심하다가 사기 충천한 의화단의 강력한 힘과 양광총독 '이홍장', 호광총독 '장지동', 양강총독 '유곤일', 군기대신 '강의' 등에게 기대를 걸고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의화단의 사건에 가장 기민하게 대응한 것이 일본이었다. 일본은 지리적으로 근거리이며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였는데, 영국은 처음에 부정적이었으나 사태가 긴박해지자 일본군의 파병을 요청하는 등 연합군의 총병력은 군함 47척에 병력 2만여 명에 달하였는데 일본군이 주력을 이루었다.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게 된 일본은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선전포고를 한 서태후는 각 성에 격문을 띄워 거국적으로 궐기할 것을 명하였으나, 서태후가 기대를 가졌던 '이홍장.장지동.유곤일' 등은 서로 연락을 취하여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내세웠고 서태후의 명령에 따를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원세개'도 이에 동조했다.

 

6월 21일 선전포고가 내려지자 의화단은 각국 공사관이 집결되어 잇는 '동교민항'을 포위하고 집중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동교민항은 현재 천안문 맞은편 동쪽에 있었다. 이곳에는 외국인 외에도 중국인 신자들이 살고 있었으며 소수의 수비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포위 공격은 6월 21일부터 8개국이 북경을 점령한 8월 14일까지 장장 55일간이나 계속되었다. 의화단의 병력은 20만 명이 넘었으나 통솔자가 없어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고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였다. 장친왕 '재훈'이 보군 총사령관이 되고 '강의'가 의화단을 통솔하였으나 2개월이 되도록 '동교민항'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8개국 연합군을 맞아 싸운 장수 직례총독 '섭사성', 총병 '마옥곤' 등 청일 전쟁에서 '회군'계 장군들이었으나 그들의 힘으로는 연합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

 

연합군은 '천진'을 점령하고 이어 '양촌'을 공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섭사성'은 전사하고 직례총독 '유록'은 부상을 입고 패주하다가 '채촌'에서 죽었다. 통주의 싸움에서는 산동 순무 '이병형'이 패전 끝에 자결하였다. 그는 독일 신부를 살해한 책임을 지고 해임된 바 있는 사람으로 스스로 의용병을 모집하여 연합군에 맞섰으나 패전하였다.

 

청 조정에서는 의화단을 이용하여 외세를 몰아내자는데 반대하다가 처형된 대신들도 있었는데, 병부상서 '서용의', 호부상서 '입산', 이부좌시랑 '허경징', 내각학사 '연원', 태상시경 '원창' 등 5명이나 되었다.

 

연합군의 상륙과 함께 북경 시내에서는 의화단에 의해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졌는데 기독교 신자를 색출하고 연합군과 내통한 자를 찿는다는 구실로 제멋대로 가택을 수색하였다. 양서나 외국과 관계 있는 물건이 나올 경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정적이나 개인적인 원한을 복수하는 경우도 많았다.

 

8월 17일 연합군이 북경에 입성하자 서태후는 광서제와 함께 자금성을 탈출하였다. 이때 서태후는 무술변법 쿠테타가 실패하자 광서제를 유폐하는 과정에서 광서제를 위하여 변명하던 후궁 '진비'는 서태후의 노여움을 사 감금되어 있다가 자금성을 탈출할 때 진비를 우물속에 쳐 넣어 죽였다. 일설에는 광서제에게 자금성을 떠나지 말고 남아서 강화에 대한 일을 처결하도록 권유했다가 서태후의 노여움을 사 죽었다고도 한다.

 

                                  

 

서태후는 자금성을 탈출할 때 머리를 한족의 모습으로 바꾸고 수수한 옷차림에 눈물을 흘리면서 걸어나와 서화문 밖에서 노새가 끄는 수레를 타고 북경성을 빠져나와 태원을 거쳐 서안으로 도망쳤다.

 

북경은 주인 없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북경성에 들어온 연합군은 아편 전쟁시 원명원 약탈로 대부호가 된 이야기를 듣고 약탈 행위는 그때의 악몽을 재현하는 모습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보물 찿기에 혈안이 되어 약탈과 폭행은 극에 달하였고 사방에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중에서 공사가 죽은 독일군의 약탈이 가장 심하였는데 당시 독일 황제는 야만국으로 취급하라는 훈령까지 내렸다고 한다.

 

의화단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일부는 북경 근교에서 저항하였으나 얼마 후 완전 진압됨으로써 남은 것은 사후 처리 문제였다. 강화의 시기에 대해서도 각국은 서로 의견이 달랐고 독일은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연기를 주장하였고 러시아는 조기 철군을 주장했다.

 

연합국측은 강화 시기에 대한 의견을 조정할 시간을 벌기 위해 우선 청국측에 의화단 사건의 책임자 처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청국측에서는 관련된 황족들의 감금, 배외파 대신들에 대해 강등.해임.유배 등에 처하겠다는 안을 제시했으나 연합국측은 처벌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결국 정친왕 '재훈'은 자결, 단군왕 '제의'는 유배형, 배외파 거두 '강의'는 서태후를 따라 서안으로 가다 병사했기 때문에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연합군에 가장 많은 타격을 주었던 '동복상'은 사형을 요구했으나 이홍장의 중재로 사형은 면제되었다. 당시 동복상은 대군을 거느리고 섬서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처형할 경우 군란을 우려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의화단을 이용하여 전쟁을 벌이는 것을 반대하다가 처형된 대신 5명에 대해서는 복권되었고 병사한 '강의'는 관직과 명예를 삭탈하는 처분이 내려졌다.

 

책임자 처벌이 어느정도 마무리 된 다음에 그해 12월 강화에 대한 안이 제시되었고, 연합국 사이에도 상호 이해 관계가 엇갈려 의견 조정에 시일이 걸려 다음해인 1901년 9월 7일 청국 대표 이홍장과 연합국 대표 사이에 이른바 '신축 조약' 12개조가 조인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배상금 총액 4억 5천만 냥 지불할 것.

2. 대고-북경사이의 포대를 철거할 것

3. 북경-산해관 사이의 요지에 외국 군대 주둔.

4. 천진 주위 50리 이내에 중국군대 주둔금지.

5. 북경에 공사권 구역 설정.

6. 공사권 지역에 외국군 주둔.   

 

5년 간격으로 당한 패전과 굴욕적인 조약 체결, 그리고 막대한 배상금 지불은 청나라의 국가 재정을 곤경에 빠뜨리고 국민 생활은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었다. 결국 의화단 사건은 어렵게 명맥을 이어오던 청나라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어 국가의 쇠망을 촉진시키고 외국 군대의 주둔을 허용함으로써 국토의 반식민지화를 가져온 셈이 되고 말았다.

  

이후 보수세력의 근대화 노력인 광서신정 등을 거쳐 10년 뒤 청나라는 신해혁명을 겪게 되고 1912년 2월 12일에 종말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