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중국의 역사 109 (광서제 시대 : 변법 자강책) 본문
중국의 역사 109 ( 광서제 시대 : 변법 자강책)
존속 기간 : 1616년 - 191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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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없음) | |||||
국가: 공금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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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선양(1636~1644) 베이징(1644~1912) 39°55′N, 116°23′E | ||||
공용어 | 만주어, 중국어 | ||||
정부 형태 | 전제군주제 천명제 (1616 ~ 1626) 강희제 (1661 ~ 1722) 선통제 (1908 ~ 1912) | ||||
정부수립 • 성립 (후금) •국호 개칭 •중국 통일 •신해혁명 •해체 |
1616년 1636년 1644년 1911년 10월 10일 1912년 2월 12일 | ||||
면적 • 면적 • 내수면 비율 |
9,984,670 km² 2.8% | ||||
인구 • 1820년 어림 • 인구 밀도 |
383,100,000명 명/km² | ||||
통화 | 위안 (1889년부터) |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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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신화·삼황오제 | |||||||
황하・장강 문명 | |||||||
하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 |||||||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 |||||||
주 기원전 1122~기원전 256 | |||||||
서주 | |||||||
동주 | |||||||
춘추 시대 | |||||||
전국 시대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 221~기원전 206 | |||||||
한 기원전 206~서기 220 | |||||||
전한 | |||||||
신 8~23 | |||||||
후한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촉, 오 | |||||||
진 265~420 | |||||||
서진 | |||||||
동진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20~589 | |||||||
수 581~618 | |||||||
당 618~907 무주 690~705 | |||||||
오대십국 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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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 서하 1038~1227 | ||||||
남송 | 금 1115~1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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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1271~1368 | |||||||
명 1368~1644 | |||||||
청 1644~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1911~현재 | |||||||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
역대 황제
건주 여진(建州 女眞) 추장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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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 시조 (淸始祖) (청 태조 추숭) |
- | 애신각라포고리옹순 (愛新覺羅布庫里雍順) |
- |
- | 청 조조 (淸肇祖) (청 태조 추숭) |
원황제 (原皇帝) |
애신각라맹특목 (愛新覺羅孟特穆) |
1405년 ~ 1433년 |
- | - | 순황제 (順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충선 (愛新覺羅充善) |
1433년 ~ 1467년 |
- | - | 흥황제 (興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탈라 (愛新覺羅脫羅) |
1467년 ~ 1481년 |
- | - | 정황제 (正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석보제편고 (愛新覺羅錫寶齊篇古) |
1481년 ~ 1522년 |
- | 청 흥조 (淸興祖) (청 태조 추숭) |
직황제 (直皇帝) |
애신각라복만 (愛新覺羅福滿) |
1522년 ~ 1542년 |
- | 청 경조 (淸景祖) (청 태조 추숭) |
익황제 (翼皇帝) |
애신각라각창안 (愛新覺羅覺昌安) |
1542년 ~ 1571년 |
- | 청 현조 (淸顯祖) (청 태조 추숭) |
선황제 (宣皇帝) |
애신각라탑극세 (愛新覺羅塔克世) |
1571년 ~ 1583년 |
제1대 | 청 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
1583년 ~ 1616년 |
후금(後金, 1616년 ~ 1636년)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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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 청 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
천명(天命) | 1616년 ~ 1626년 |
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
천총(天聰) | 1626년 ~ 1636년 |
청(淸, 1636년 ~ 1912년)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
숭덕(崇德) | 1636년 ~ 1643년 |
- | 청 성종 (淸成宗) (청 세조 추숭) |
무덕수원광업정공 안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 安民立政誠敬義皇帝) |
애신각라다이곤 (愛新覺羅多爾袞) (도르곤) |
- | - |
제3대 | 청 세조 (淸世祖) |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 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 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
애신각라복림 (愛新覺羅福臨) |
순치(順治) | 1643년 ~ 1661년 |
제4대 | 청 성조 (淸聖祖) |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 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 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
애신각라현엽 (愛新覺羅玄燁) |
강희(康熙) | 1661년 ~ 1722년 |
제5대 | 청 세종 (淸世宗) |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 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 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
애신각라윤진 (愛新覺羅胤禛) |
옹정(雍正) | 1722년 ~ 1735년 |
제6대 | 청 고종 (淸高宗) |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 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 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
애신각라홍력 (愛新覺羅弘曆) |
건륭(乾隆) | 1735년 ~ 1795년 |
제7대 | 청 인종 (淸仁宗) |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 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 (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 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
애신각라옹염 (愛新覺羅顒琰) |
가경(嘉慶) | 1795년 ~ 1820년 |
제8대 | 청 선종 (淸宣宗) |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 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 (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 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
애신각라민녕 (愛新覺羅旻寧) |
도광(道光) | 1820년 ~ 1850년 |
제9대 | 청 문종 (淸文宗) |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 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 (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 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
애신각라혁저 (愛新覺羅奕詝) |
함풍(咸豊) | 1850년 ~ 1861년 |
제10대 | 청 목종 (淸穆宗) |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 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 (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 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
애신각라재순 (愛新覺羅載淳) |
동치(同治) | 1861년 ~ 1875년 |
제11대 | 청 덕종 (淸德宗) |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 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 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
애신각라재첨 (愛新覺羅載湉) |
광서(光緖) | 1875년 ~ 1908년 |
비정통 | - | 대아가 (大阿哥) (대황자<大皇子>) |
애신각라부준 (愛新覺羅溥儁) |
보경(保慶) | 1899년 |
제12대 | 청 공종 (淸恭宗) |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 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 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말대황제<末代皇帝>, 손황제<遜皇帝>) |
애신각라부의 (愛新覺羅溥儀) (푸이) |
선통(宣統) | 1908년 ~ 1912년 |
변법자강책
변법자강 운동(變法自彊 運動)은 캉유웨이가 추진한 정치 운동이었다.
1898년의 ‘변법자강책(變法自彊策)’이다. 광서제는 당시 서태후의 손아귀에 휘둘리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개혁 정치를 추구하기 위해 캉유웨이의 갖가지 정책을 지지하게 된다.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책에는 과거 제도 개혁, 조세 개혁, 탐관오리 혁파, 각종 경제 개혁 등이 담겨 있었고, 무술변법을 통해 이중 일부를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변법은 광서제의 미약한 권위에 의존했고, 결국 서태후 등 반개혁파에게 패배해 외국으로 망명을 가는 결과로 끝이 난다. 이로 인해 무술변법은 '100일 변법'이라고도 불린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의 패전으로 양무운동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양무운동의 실패요인으로는 관리의 기업 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전통적인 경젝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점등을 들을 수 있다. 특히, 개혁지향적인 관리들이 지방에 분산된 채 통일적인 계획 없이 사업을 추진했으므로 급변하는 정세변화에 효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점이 문제였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양무운동의 파탄이 드러나면서 그동안 서구의 정치제도 도입, 즉 제도적 개혁을 주장해 온 이른바 '변법론'이 대두되었다. 변법을 주장하는 하급관리 캉유웨이의 개혁 주장이 청나라 황제 광서제에게 알려지면서 황제의 주도로 1898년 4월 하순부터 약 100일에 걸쳐서 소위 '무술개혁'(무술변법이라고도 불린다.)이 시도되었다.
변법개혁을 주도한 캉유웨이는 본래 부강을 위해서는 서구식 입헌군주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나 우선 개혁을 추진할 새로운 기구마련부터 착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기구마련과 개혁지향적인 하급관리 임용, 상공업 진흥과 신식학교 개설등의 개혁구상조차 수구적인 관리와 서태후에게는 기득권을 위협하는 행위로 보였다. 특히 자신의 개혁이야말로 공자의 정신을 계승한것이라는 캉유웨이의 주장은 수구파의 공격을 불러왔다. 결국, 변법파가 영국, 일본과 연합하는 외교방침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가 광서제를 만나자, 서태후 측의 수구파들은 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연금하고 훈정(일종의 섭정 체제)을 재개함으로써 변법자강운동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외에,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변법자강운동시기, 변법파의 핵심인물이었던 캉유웨이(康有為)는 일본 전임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영국선교사 티모시 리처드(Timothy Richard)등의 유세에 넘어가 광서황제(光緒皇帝)에게 "중국, 미국, 영국, 일본의 4국합방(合邦)"을 건의하도록 양심수(楊深秀), 송백노(宋伯魯) 등 사람들에게 지시하였다. 중국의 군사와 정치 권력을 다른 사람한테 넘길뻔했던 위기의 상황이었다. 이때의 서태후(자희태후) 는 군기처(軍機處)에서 베껴온 사본을 통해 신정(新政)과 관련된 상주문의 내용을 파악하는 한편 어사(御史)양숭윤(楊崇伊)의 진언에 이토 히로부미의 중국방문이 정국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양심수, 송백노가 "합방"을 주장한 상주문의 내용을 서태후가 알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서태후는 "합방"의 음모를 알아낸 후 정변을 감행하여 "합방"계획을 무산시켜 중국을 분할과 병탄의 위기로부터 구해냈다.
추진 과정
아편 전쟁과 청일 전쟁에서의 패배로 크나큰 치욕을 맛본 청국 백성들은 총이나 군함 등의 무기가 서양보다 뒤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누적된 정치 부패에 그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하루속히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강력히 대두되었다. 그 운동의 지도자는 '강유위'였다.그는 광서 14년(1888년) 당시 황제 광서제에게 퇴패한 정치를 개혁하여 새로운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이른바 변법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강유위'는 광동성 남해현 출신으로 호는 '장소'이다. 그는 유럽의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여 사학.불교학.공양학 등을 배워 독자적인 유교학설을 펴기도 하였다.
강유위는 청일 전쟁이 끝난 후인 1895년 제자 '양계초'와 함께 과거를 보기 위하여 북경에 올라갔다가 천진 조약에서 채결한 요동.대만의 할양과 2억 냥의 배상금 지불 문제로 북경이 들끓고 있는 사실을 목격하고 분개한 나머지 "강화 조약의 거부, 천도 항전, 변법 의 실행"을 주장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작성하여 과거를 보기 위해 모인 선비들에게 서명하도록 설득하였다. 강유위의 설득은 선비들의 호응을 받기에 충분하여 1천여 명의 선비들이 서명하였다. 강유위는 '공거상소'를 올렸는데 당시 상소문을 황제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띤 도찰원에서 수리를 거부하였다. 이유는 과거를 보러온 선비들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 정치에 간섭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북경 조야에서는 강유위의 상소문이 '교육의 보급, 인재 등용, 부국강병의 도모' 등 극히 애국적이고 온당한 것이라 하여 크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알마 후 강유위는 진사시에 급제하여 공부의 관리에 등용됨으로써 정치적 의견을제시할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하였다.
그후 강유위는 여려 차례에 걸쳐 변법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고 광서 24년(1898년) 무술년에는 <일본변정고>라는 책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이때 광서제는 이미 성인이 되었으나 정치적 실권은 서태후가 장악하고 있었다. 광서제는 강유위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으며 변볍에 대해서도 매우 의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서태후가 지극히 보수적인 점과 정치에 간섭하는 점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서태후가 존재하는 한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청일 전쟁의 결과 이홍장이 실각하고 서태후는 이화원에 은거하여 광서제의 친정 체제가 형성되긴 하였으나 서태후는 한시도 경계의 눈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서태후는 정치적 실권을 잃으면 저신의 지위가 위태롭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유위는 만국의 좋은 법을 채용하여 변법유신을 해야 하다는 내용의 상소를 7번 이나 올렸고 강유위의 끈질긴 상소는 마침내 광서제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다. 그래서 광서제는 결국 서태후로부터 자립하여 변법을 단행할 결심을 하게 된다.
광서제는 4월 23일 국시를 정하는 조서를 발표하고 다음 24일 강유위를 입궐토록 하여 볍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를 대신을 보좌하는 총리아문 장경에 임명하였다. 당시 총리아문에는 이홍장을 비롯하여 10명 가까운 대신들이 있었으나 강유위의 지위는 이들 대신보다 훨씬 낮았으나 황제로부터 직접 변법의 명을 받았으므로 대권을 부여 받은 것은 틀림 없었다.
강유위 자신도 조서 한 가지만으로 정치 개혁이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개혁을 위한 지원 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공거상서' 때 서명했던 동지들을 중심으로 '보국회'라는 정치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그의 제자 양계초가 큰 활약을 하였다.
강유위는 잇따라 변법 추진에 필요한 건의를 하여 헙법.국회.철도.학교.군사 등 30년 전 일본의 제도를 본따 부국강병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들은 변법파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변법파들은 국정개혁도 추진하면서 광서제의 친정체제도 실현하려 하였다. 당시 광서제는 2품관 이상의 관리에 대한 임명권이 없었고 그 임명권은 서태후가 갖고 있었다. 그래서 실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은 2품 이상의 관리인데 광서제는 이들을 임명할 권한조차 없었던 것이었다.
광서제의 변법 조서가 발표된 후 호부상서 '옹동화'가 파면되었다. '옹동화'는 강유위를 광서제에게 추천한사람인데 서태후가 파면시켜 버린 것이다. 광서제는 서태후의 눈치를 보지 않고 변법을 추진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었다. 서태후가 비록 이화원에 은퇴해 있었지만 자금성 안에는 그의 손발 노릇을 하는 심복 환관들이 곳곳에 침투되어 있어 시시각각으로 모든 동향이 서태후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광서제는 변법의 시행을 서두르기 위해 변법에 소극적인 인물을 파면하고 변법파의 강경한 네 사람을 군기대신 장경에 임명하였다.
그들은 내각후보시독 '양예', 형부후보주사 '유광제', 내각후보중도 '임욱', 강소후보도 '담사동' 등이었다. 이 네 사람의 군기대신 장경 가운데 '양예'와 '유광제'는 호남 순무 '진보잠'이 추천한 사람으로 당시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호남에서만 변법 정치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만큼 호남 순무 '진보잠'은 변법의 열렬한 동조자였다.
변법파의 강경한 네 사람이 군기대신 장경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은 바로 서태후에게도 전해졌다. 조용히 기회를 노리고 있던 서태후는 비로소 변법파에게 일격을 가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상대방의 움직임을 탐지하는것은 피차가 마찬가지였다. 서태후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림 변법파는 초조하였고 위기감 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변법파는 기선을 잡기 위해서 쿠테타를 일으켜 서태후를 서산 이궁에 유폐시키고 광서제의 친정을 실현시킬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 충분한 준비와 동조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급하게 시도하다가 서태후의 역공을 당하여 실패하게 된다.
쿠테타를 일으키자면 무엇보다도 군대가 필요했다. 변법파들은 신식 군대인 육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공작에 착수하였다. 당시 신식 육군의 통솔자는 원세개로 이홍장의 자식과 같은 존재임을 변법파도 잘 알고 있었다. 이홍장이 청일 전쟁에서 패배하여 일시적으로 요직에서 물러나 있기는 하지만 서태후의 신임이 가장 두터운 사람이었다. 이 같은 관계를 비추어 볼 때 원세개의 신식 육군을 이용하려는 계획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변법파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양계초'의 <무술정변기>를 보면 서태후의 반 변법 실력 행동을 봉쇄하자면 이쪽에서 먼저 군사 쿠테타를 일으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제의한 것은 '강유위'였고, 그 방법으로써 원세개의 지원을 요청하자고 주장한 사람은 '담사동'이었다. '강유위'도 '담사동'의 제안에 찬성하였다. 원세개가 오랫동안 조선에 머물러 외국 사정에 밝고 또 신식 군대의 편제를 주장하였으므로 개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이라고 기대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원세개는 그들의 정치조직인 '경사강학회'에 5백 원을 기부한 일도 있었다.
'담사동'은 원세개를 쿠테타에 끌어들이기 위해 천진의 법화사로 원세개를 방문하였다. '담사동'이 방문하기 이틀 전 광서제는 원세개를 자금성으로 불러 시랑후보의 관직을 수여하였다. 원세개를 방문한 담사동은 원세개로 하여금 황제의 안위가 위험하다는 것과 개혁을 위해서는 서태후를 제거해야만 한다면서 원세개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만약 지원을 거절하는 경우에는 자신도 죽고 원세개도 죽을 수 밖에 없다고 강요하였다. 그의 가슴과 주머니에는 무언가 흉기를 숨겨온 것처럼 불럭한 모습이었다. 원세개는 분위기상 거절할 경우에는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고 일단 승낙하는 대답을 하였다.
담사동이 떠난 후 원세개는 이해득실을 계산한후 결국 담사동과의 약속을 저버리기로 결심하고 이 같은 사실을 즉시 직례총독 '영록'에게 밀고하였고 '영록'은 이화원의 서태후에게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 '영록'과 원세개는 비밀리에 북경으로 올라와 서태후에게 모든 것을 보고했다 이에 서태후는 이화원에서 자금성으로 복귀하여 광서제의 방을 수색하여 변법에 관한 서류 일체를 압수하고 다음 날 광서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고 저녁이 되자 서태후는 광서제를 불러 음독 자결을 명했다. 이에 군기대신 '왕문소'와 황족들이 간청하여 겨우 자결은 면하고 유폐 처분을 받았다.
9월 21일 서태후의 수렴 청정이 다시 시작되었고 변법 운동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변법 운동을 시작한 지 103일 만에 막을 내렸기 때문에 '백일유신'이라고도 부르고 '무술정변'이라고도 부른다.
서태후의 수렴 정치가 시작되자 다시 보수 정치로 돌아가 모든 것이 복구되었다. 황제는 유폐 처분으로 끝났지만 변법파의 간부들에게는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8일 담사동이 원세개를 만나기 위해 천진으로 떠난 후 강유위는 아무래도 원세개의 가담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9월 20일 새벽 남몰래 북경을 떠나 저녁 무렵에 '당고'에 도착, 초상국의 '신제호' 선박에 탑승하였다. 그러나 이 배가 21일 출발한다는 것을 알고 '중경호'로 갈아 탔다. 이 배는 이날 오전 10시에 출항하기로 되어 있었다. 북경의 강유위 숙소인 남해관을 급습한 군기대신 영록은 수색끝에 이미 강유위가 도망친 것을 확인하고 즉시 당고를 샅샅이 뒤졌으나 강유위의 소식은 오리무중이었다. 그 사이 출항한 배를 점검한 끝에 강유위가 이미 출항하였음을 확인하고 군함 '비응호'에 즉시 추격을 명하였으나 '비응호'는 석탄이 부족하여 도중에 돌아오고 말앗다. 영록은 즉기 '연대도'의 장관에게 전보를 쳐 강유위가 탄 중경호가 기항하면 체포하도록 하였으나 이미 중경호가 연대도를 떠난 이후였다. 중경호는 상해에 도착하였으나 상해의 영국 총영사가 강유위와 친교가 있는 영국인 '리처드'의 요청을 받아들여 '위해위'에 있던 영국 순양함 '보나벤처' 호를 불러 '오송' 항구 밖에서 강유위를 옮겨 태워 홍콩까지 호송하엿다. 이렇게 해서 강유위는 위기일발의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 후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양계초'는 일본 공사관으로 피난하여 일본 대리공사 '하야시'의 도움으로 '대고'에 정박 중인 일본 군함 '오지마'에 태워 그대로 일본으로 회항하였다.
'담사동'은 일단 일본 공사관으로 도망쳐 왔으나 망명을 위한게 아니고 이미 몸을 피한 '양계초'에게 자신의 시문과 가서(家書)를 먼저 피난하기 위함이었다. 양계초가 망명을 권유하였으나 '담사동'은 권유를 뿌리치고 돌아가서 체포되어 일주일 후인 9월 28일 북경의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양계초'에게 전한 그의 '절명서'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 피를 악물고 이 글을 써 우리 중화민국에 고한다. 다 함께 의롭게 일어나 국적을 섬멸하고 우리 성상을 보전하라."
당시 항간에는 변법파의 일부 인사들이 담사동을 대통령에 추대하여 공화국을 세우려 한단은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담사동이 이같은 소문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유서에 의해 그 같은 소문이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음이 밝혀진 셈이다. 친구와의 도리를 우주의 원리라고 항시 주장했던 '담사동'은 확실히 의협적인 일생을 끝까지 관철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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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어쩌면 청나라의 마지막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변법파는 뒷받침이 되는 힘을 갖지 못한체 조급하게 서두르다 서태후에게 역공을 당해 전멸했다.
변법파들은 변법 자강 개혁을 시도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서태후 일파를 제거하는 것이 가장 유일한 방법이었을까? 우리는 그들의 방법에 의문을 제기해 본다. 진정으로 청을 위하고 나라의 강건성세를 바랐다면 서태후는 무조건 반대했을까? 그들은 서태후를 설득할 방법은 찿지 못했을까? 광서제의 의지는 좋았으나 방법과 절차에서 서태후를 왜 설득시키지 못하였을까? 또 변법파를 등용함에 보수파를 파면시키는 것도 서태후의 감정을 상하게 하였을 것이며 사전 교감을 나누지는 못했을까? 단순히 무력으로 서태후 일파를 제거해야만 했을까? 결국은 원세개라는 인물은 이홍장의 아들과 같으며 서태후의 신뢰를 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병력 동원을 요청했다는 것은 어이없는 악수를 두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가 순순히 변법파를 지원할 것으로 생각한 것도 문제거니와 그가 지원하겠다는 확실한 보장을 받아내도 의심스러운 판에 그에게 무력을 동원하여 쿠테타를 시도하려 하였다는 점을 노출시킨 것은 결정적인 실수였으며 다른 병력 동원이나 우발 계획도 없이 충분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한 체 서두르다보니 실패하였다는 점이다.
개혁이란 본래 보수파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면 대부분 실패하기 마련이다. 강력한 지원 세력인 무력을 등에 업고 시행하지 못하는 개혁은 대부분 실패하였다. 광서제는 그들을 등용함에 점진적인 방법을 선택하지 못했고 조급하게 추진하려다 서태후의 선제 공격으로 실패하였다. 의지와 신념은 좋았으나 힘없는 황제를 믿고 개혁을 서둘렀다는 점에서 조선의 갑신정변과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
변법개혁의 실패는 청나라의 마지막 재기의 기회마져 늙은 여우 서태후에 의해 무참하게 사라지고 망국의 길로 빠져 들고 말았다. 여자들이 모두 지극한 모성애로 남자의 사랑을 받아 씨를 잉태하고 대를 이어감은 인류사를 이어 온 물줄기와 같을 것이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섹스는 가능하였고 미색을 타고난 여성들은 꿈을 이루는 것은 영웅이나 황제에게 운 좋게 선택되어 부귀영화도 누리며 살아 가는 것도 영광이거니와 서태후 같이 섭정으로 더 많은 권세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여성 정치가들이 벌이는 치세는 권력욕이 넘쳐나는 반면 결국은 무능과 탐욕에 빠져 나라의 기강을 무너지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으며 진취성이나 개혁성, 과단성을 찿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에 더하여 서태후는 청말 격동기에 망국의 길을 선두에서 이끌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고대 로마 시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이집트의 권력을 잡는데 두 영웅을 이용하였고 자신의 몸을 불태웠으며 그들의 씨도 잉태하였다. 그녀는 그 남자들을 이용하여 이집트 지배는 물론 로마의 실질적인 지배자까지 바라보았을 것이며 그녀가 잉태한 자식으로 시이저의 후계자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독재권력을 휘두르던 시이저는 결국 반대파에 의해 23군데나 칼에 찔려 원로원에서 피를 흘리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자 그녀는 재빨리 이집트로 돌아오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시이저의 부하이며 실력자로 동방을 지배하던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에 접근하여 시이저에 버금가는 애정으로 그를 사랑하면서 애기를 잉태하고 그를 부추겨 옥타비아누스와 대결을 벌이도록 충동질하게 된다. 그녀는 동방의 실질적인 지배자를 꿈꾸었고 그를 이용하려 하였던 것이다. 결국 눈이 멀어진 안토니우스는 동방 분리 정책을 추구하고 로마와는 결별을 선언하게 되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결전을 벌이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악티움 해전'이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군과 같이 연합 해군을 이끌고 악티움 해전을 벌인 결과 전투에 참가하였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피아 함상에서 참혹하게 벌어지는 잔혹한 전투 장면을 바라보다 더 이상 전투 의욕을 잃고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전장을 이탈하는 바람에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옥타비아누스 함대에게 대패를 당하게 된다. 그들은 이집트로 도망가서 안토니우스는 마지막 육상 전투를 시도하지만 옥타비아누스군에게 무너지자 자결을 시도한 안토니우스가 도망쳐와 클레오파트라 옆에서 숨을 거둔다.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죽음을 바라보며 애통해하지만, 다시 점령군으로 나타난 젊은 로마군 집정관 옥타비아누스에게 추파를 던지며 교태를 부리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쳐다보지도 않자 안토니우스를 묻게 해 달라는 그녀의 요구를 옥타비아누스는 들어주게 된다. 결국 그녀도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게 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녀는 세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여자였다. 클레오파트라라는 한 여자에 빠졌던 영웅들은 결국은 로마로부터 버림을 받게되고 멸망의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한 고조 유방의 황후 여태후가 벌인 처참하고 비정한 정치는 한나라 창업에 피를 같이 나눈 한신 등 공신들을 모두 도륙하였을 뿐 아니라 권력 유지를 위해 자신의 자식까지 독살시키거나 목졸라 죽이는 잔임함을 보여주었다. 전한의 전성기는 경제와 무제를 지외하고 그 이후에는 외척의 준동으로 나라는 어지러운 정치 속에 권력 쟁탈전이 계속되었고 결국은 외척인 왕망에 의해 망국의 길을 가고 말았다.
당의 측천무후는 섭정을 지속하기 위하여 어리고 무력한 황제를 옹립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였고 나중에는 나라 이름을 바꾸는 등 황제로써 새로운 나라의 창업까지도 꿈을 꾼 여인이었다. 다행히 그녀가 섭정한 때가 당의 중흥기였기에 망국까지는 가지 않았으나 그녀 이후 당나라는 무능과 부패로 외척과 환관 정치가 계속되면서 내부적으로 썩어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녀도 죽음을 앞 둔 때에는 자신의 묘비에는 아무런 글귀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니 후세의 평가가 두려웠던 모양이다.
청나라는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이 서태후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발전적으로 지속되었더라면 청의 지배체제가 그렇게 빨리 열강에게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 팔기군의 무력함은 이미 태평천국의 난에서 증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술적으로 화약 무기의 발달로 대규모 집단적인 철기군이나 기병 전술은 이미 시대에 뒤덜어진 군대가 되었던 것이다. 공성무기도 폭약으로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쉬웠으므로 성벽에 의지하여 지구전을 펴기에도 전술적으로 무용하였다. 대신 소규모지만 전술적으로 유리한 민간 의용대인 상군.회군 등 지방 세력을 강화하였기에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청국은 아편 전쟁을 통해 서구 열강들의 화력과 무기. 군함들이 사거리와 위력, 정확도 면에서 월등하여 당할 수가 없었고 청일 전쟁에서도 일본의 무기와 화력, 전술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에 양무운동이 일어나고 변법 자강운동이 일어났지만 청 조정의 보수 세력과 서태후는 스스로 거부하였고 변법을 시도하려던 광서제도 결국은 유폐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청나라는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 열강들의 연합 공격으로 실패하게되고 도망갔던 서태후가 돌아와 사망하자 청나라는 선통제에 들어 신해 혁명으로 급격하게 해체되고 멸망하는 비운의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