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중국의 역사 105 (동치제-광서제 시대;서태후,이홍장,양무/자강운동) 본문
중국의 역사 105 (동치제-광서제 시대 : 서태후,이홍장,양무운동,자강운동)
존속 기간 : 1616년 - 1912년 | |||||
| |||||
표어: (없음) | |||||
국가: 공금구 | |||||
![]() | |||||
수도 | 선양(1636~1644) 베이징(1644~1912) 39°55′N, 116°23′E | ||||
공용어 | 만주어, 중국어 | ||||
정부 형태 | 전제군주제 천명제 (1616 ~ 1626) 강희제 (1661 ~ 1722) 선통제 (1908 ~ 1912) | ||||
정부수립 • 성립 (후금) •국호 개칭 •중국 통일 •신해혁명 •해체 |
1616년 1636년 1644년 1911년 10월 10일 1912년 2월 12일 | ||||
면적 • 면적 • 내수면 비율 |
9,984,670 km² 2.8% | ||||
인구 • 1820년 어림 • 인구 밀도 |
383,100,000명 명/km² | ||||
통화 | 위안 (1889년부터) |
중국의 역사
| |||||||
---|---|---|---|---|---|---|---|
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신화·삼황오제 | |||||||
황하・장강 문명 | |||||||
하 기원전 2000?~기원전 1600? | |||||||
상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 |||||||
주 기원전 1122~기원전 256 | |||||||
서주 | |||||||
동주 | |||||||
춘추 시대 | |||||||
전국 시대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 221~기원전 206 | |||||||
한 기원전 206~서기 220 | |||||||
전한 | |||||||
신 8~23 | |||||||
후한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촉, 오 | |||||||
진 265~420 | |||||||
서진 | |||||||
동진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20~589 | |||||||
수 581~618 | |||||||
당 618~907 무주 690~705 | |||||||
오대십국 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
북송 | 서하 1038~1227 | ||||||
남송 | 금 1115~1234 |
||||||
원 1271~1368 | |||||||
명 1368~1644 | |||||||
청 1644~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1911~현재 | |||||||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
역대 황제
건주 여진(建州 女眞) 추장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재위기간 |
---|---|---|---|---|
- | 청 시조 (淸始祖) (청 태조 추숭) |
- | 애신각라포고리옹순 (愛新覺羅布庫里雍順) |
- |
- | 청 조조 (淸肇祖) (청 태조 추숭) |
원황제 (原皇帝) |
애신각라맹특목 (愛新覺羅孟特穆) |
1405년 ~ 1433년 |
- | - | 순황제 (順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충선 (愛新覺羅充善) |
1433년 ~ 1467년 |
- | - | 흥황제 (興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탈라 (愛新覺羅脫羅) |
1467년 ~ 1481년 |
- | - | 정황제 (正皇帝)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석보제편고 (愛新覺羅錫寶齊篇古) |
1481년 ~ 1522년 |
- | 청 흥조 (淸興祖) (청 태조 추숭) |
직황제 (直皇帝) |
애신각라복만 (愛新覺羅福滿) |
1522년 ~ 1542년 |
- | 청 경조 (淸景祖) (청 태조 추숭) |
익황제 (翼皇帝) |
애신각라각창안 (愛新覺羅覺昌安) |
1542년 ~ 1571년 |
- | 청 현조 (淸顯祖) (청 태조 추숭) |
선황제 (宣皇帝) |
애신각라탑극세 (愛新覺羅塔克世) |
1571년 ~ 1583년 |
제1대 | 청 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
1583년 ~ 1616년 |
후금(後金, 1616년 ~ 1636년)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1대 | 청 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
천명(天命) | 1616년 ~ 1626년 |
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
천총(天聰) | 1626년 ~ 1636년 |
청(淸, 1636년 ~ 1912년)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애신각라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
숭덕(崇德) | 1636년 ~ 1643년 |
- | 청 성종 (淸成宗) (청 세조 추숭) |
무덕수원광업정공 안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 安民立政誠敬義皇帝) |
애신각라다이곤 (愛新覺羅多爾袞) (도르곤) |
- | - |
제3대 | 청 세조 (淸世祖) |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 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 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
애신각라복림 (愛新覺羅福臨) |
순치(順治) | 1643년 ~ 1661년 |
제4대 | 청 성조 (淸聖祖) |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 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 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
애신각라현엽 (愛新覺羅玄燁) |
강희(康熙) | 1661년 ~ 1722년 |
제5대 | 청 세종 (淸世宗) |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 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 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
애신각라윤진 (愛新覺羅胤禛) |
옹정(雍正) | 1722년 ~ 1735년 |
제6대 | 청 고종 (淸高宗) |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 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 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
애신각라홍력 (愛新覺羅弘曆) |
건륭(乾隆) | 1735년 ~ 1795년 |
제7대 | 청 인종 (淸仁宗) |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 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 (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 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
애신각라옹염 (愛新覺羅顒琰) |
가경(嘉慶) | 1795년 ~ 1820년 |
제8대 | 청 선종 (淸宣宗) |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 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 (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 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
애신각라민녕 (愛新覺羅旻寧) |
도광(道光) | 1820년 ~ 1850년 |
제9대 | 청 문종 (淸文宗) |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 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 (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 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
애신각라혁저 (愛新覺羅奕詝) |
함풍(咸豊) | 1850년 ~ 1861년 |
제10대 | 청 목종 (淸穆宗) |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 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 (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 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
애신각라재순 (愛新覺羅載淳) |
동치(同治) | 1861년 ~ 1875년 |
제11대 | 청 덕종 (淸德宗) |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 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 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
애신각라재첨 (愛新覺羅載湉) |
광서(光緖) | 1875년 ~ 1908년 |
비정통 | - | 대아가 (大阿哥) (대황자<大皇子>) |
애신각라부준 (愛新覺羅溥儁) |
보경(保慶) | 1899년 |
제12대 | 청 공종 (淸恭宗) |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 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 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말대황제<末代皇帝>, 손황제<遜皇帝>) |
애신각라부의 (愛新覺羅溥儀) (푸이) |
선통(宣統) | 1908년 ~ 1912년 |
함풍제의 죽음과 동치제의 등극
공친왕 혁흔.문상.계량 등이 북경에서 천진 조약과 북경 조약을 체결한 후인 1861년 8월 열하로 피신햇던 함풍제가 죽엇다. 그전에 함풍제의 열하 몽진을 둘러싸고 조정에서는 찬반 양론이 맛섰다. 당시의 총비 자희(서태후)는 이같은 중대한 시기에 황제의 자리를 하루라도 비울 수가 없다는 이유로 몽진을 반대한반면 공친왕 혁흔은 피신을 권유하였다.
"신이 자금성에 남아 외국 사신과 담판을 책임지겠사오니 마음 편안히 몽진 길에 오르시옵소서."
사실 함풍제는 몽진 길에 오르기 전부터 여색을 너무 밝혀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함풍제는 열하의 이궁에 도착하자 곧바로 병상에 눞게 되었고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회복 가능성이 희박하였다. 함풍제의 병세가 악화되자 슬그머니 딴 마음을 품는 자가 있었다. '숙순'과 이친왕 '재원'이었다. 어느 날 숙순은 이친왕에게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폐하의 병세가 위독하여 회복할 가망이 없소.우리 두 사람을 섭정에 임명하는 조칙을 내리도록 아룁시다. 그런 후 서태후와 황자를 제거해 버리면 천하는 우리들의 것이 아니겠소?"
이친왕은 마음이 약하여 두려운 빛을 감추지 못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그런 일은 못하오. 황상이 붕어하면 황자가 그 뒤를 잇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오. 두 사람을 제거한다고 하지만 그 전에 우리들의 목이 달아날 것이오. 내 비밀을 지킬 터이니 당신 혼자서 추진하시오. 나는 못하겠소."
숙순이 말하였다.
"나 혼자서 하라니 그것은 말이 안 되오. 이 비밀은 이미 당신이 알고 잇으니 당신이 끝까지 거절한다면 나는 황상께 당신이 서태후와 황자를 해치려 한다고 아뢰겠소. 그리되면 당신의 목은 성치 못할것이오. 황상께서 나를 절대 신임하고 있으니 내 말을 믿을 것이 아니겠소?"
이친왕은 어쩔 수 없이 숙순과 함게 함풍제의 병상으로 가서 아뢰었다.
"소신들을 섭정에 임명해 주시옵소서." 라고 하였으나 함풍제는 승낙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이친왕은 단념하고 물러나려 하였으나 숙순은 다시 한 번 "우리들을 섭정에 임명해 주시옵소서."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함풍제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행동을 서태후의 심복 환관이 서태후에게 알렸다. 그러자 서태후는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즉시 환관을 불러 황제의 조서를 작성토록 하였는데 그 조서에는 "황자가 너무 어리므로 서태후와 동태후에게 섭정을 명하노라."고 쓰여 있었다.
이윽고 함풍제가 죽고 전국에 함풍제의 죽음이 발표되자 숙순과 이천왕이 서태후를 찿아가 말하였다.
"선제로부터 우리 두 사람에게 섭정을 임명한다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러자 서태후는 문제의 조서를 내보이며
"이 조서를 보시오.황자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황자가 너무 어리니 두 태후를 섭정으로 한다고 쓰여 있지 않소."
숙순은 눈을 크게 뜨고 조서를 살펴보다가 마지막에 가서 코웃음을 치며 말하였다.
"이 조서에는 황제의 옥쇄가 찍혀 있지 않습니다. 이 조서는 위조했음이 분명므로 무효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서태후는 내심 당황하면서도 태연한 태도를 지었다. "이 조서는 황제께서 직접 하명하여 작성된 것이니 그리들 알고 물러들 가시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항후궁을 나가자 서태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옥쇄를 먼저 차지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심복 환관을 불러 당장 옥쇄를 가져 오도록 하였다. 이때 숙순과 이친왕도 옥쇄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이미 함풍제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빈전으로 가고 있었다. 서태후의 심복 환관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 통로를 통해 함풍제 빈전에 먼저 도착하여 다른 환관은 망을 보게 하고 빈전으로 들어가 옥쇄를 손에 넣었다. 잠시후 숙순과 이친왕이 빈전에 도착하여 옥쇄를 찿았으나 함은 비어 있었다. 그들은 주변을 아무리 찿았으나 옥쇄의 행방은 보이지 않았다.
이 싸움은 결국 서태후의 승리로 돌아가 3세의 어린 황자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동치제이다. 두 동.서태후가 섭정의 자리에 오르고 사실상 실권을 장악하는 순간이었다.
두 태후가 섭정으로 실권을 장악하여 수렴 정치가 시작되자 공친왕은 '의정왕'의 칭호와 함께 군기 대신으로 군기처와 총리아문을 주재했으며 대학사 '계량'은 총리아문 대신과 군기대신을 겸임하였다.
이들은 아편 전쟁 이후 유럽 열강들과 싸움에서 패배와 태평천국을 비롯한 민중의 투쟁으로 혼란하였던 지배체제를 정비, 획립하는 작업을 서둘렀다. 이 시기를 '동치 중흥'(1862~1874)이라 하고 내세운 것은 '자강(自强)'이었다. 유럽 열강의 세력이 청국보다 우수한 것은 그들의 함선이 견고하고 중포의 성능이 뛰어나며 병력 또한 강성하였기 때문이므로 청국도 이러한 유럽의 기술을 도입하여 군수 산업을 강화시키자는 것이었다.
'자강'의 당초 목적은 유럽의 군사 기술의 도입과 군수 산업의 강화였으나, 그 후 국민 경제 발전에 관계된 민수 산업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패배하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른바 이를 가리켜 '양무운동'이다.
양무운동의 핵심 인물은 '증국번.이홍장.좌종당' 등이었다. 그런데 '증국번'은 동치 11년(1872년) 양강총독 재임 중에 죽고 실질적인 재상이라 할 수 있는 직레총독 '이홍장'이 오랫 동안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군림하였다. 이홍장이 증국번의 뒤를 이었다.
동치제-광서제 시대
동치제 | |
---|---|
![]() | |
![]() | |
재위 | 1861년 ~ 1875년 |
황후 | 효철의황후 |
부황 | 함풍제 |
모후 | 효흠현황후 |
이전 황제 | 함풍제 |
다음 황제 | 광서제 |
동치제(同治帝, 1856년 4월 27일 ~ 1875년 1월 12일)은 중국 청 왕조의 제10대 황제(재위 1861년 ~ 1875년)이다. 휘는 재순(載淳), 묘호는 목종(穆宗)이며, 동치는 연호이다.
재위 직전(즉, 부황(父皇)인 함풍제)에 발생한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청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사이에서 체결된 베이징 조약으로 인하여 청국의 대외 위신이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연해주와 사할린, 홍콩 등을 열강들에게서 탈취당하게 되었다.
즉위 후, 동태후(東太后)와 서태후(西太后)가 같이 섭정을 하면서, 이러한 분위기에 호응하여,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정신이 함양된 양무(洋務)운동이 시작되었다. 두 태후인 동태후와 서태후가 섭정하는 동시에 숙부인 공친왕마저 정치 일선에 나서서 정국에 혼란이 가중되었고, 정권을 계속 유지하는 생모 서태후와 친정을 하고 싶은 동치제 간의 알력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20세의 젊은 나이에 천연두로 사거하였다.
광서제
광서제 | |
---|---|
![]() | |
![]() | |
재위 | 1875년 ~ 1908년 |
황후 | 효정경황후 |
부친 | 순현친왕 |
모친 | 순현왕대복진 |
이전 황제 | 동치제 |
다음 황제 | 선통제 |
광서제(光緖帝, 1871년 8월 14일 ~ 1908년 11월 14일)는 중국 청 왕조의 제11대 황제이다. 묘호는 덕종(德宗)이다. 청나라 역사상 최초의 방계 혈통 출신 황제이다.
큰어머니이자 이모인 '서태후(西太后)'의 지원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에는 서태후가 섭정을 했으며 '양무(洋務)운동'으로 부분적이나마 중국의 근대화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1894-1895년의 청일전쟁이 청나라의 패배로 끝나 대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등 중국에서의 열강의 각축은 더욱 치열해졌다.
광서제는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 신진 엘리트들을 등용하여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한 '무술(戊戌)개혁'을 실행하여 완전 근대화를 꾀하였다. 당시 캉유웨이 등의 지식인들은 러시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영국, 일본과 협력할 것을 제안하는 한편, 신문에 개혁안을 싣는 등 개혁운동의 선두에 섰으나, 보수적인 '서태후, 이홍장(李鴻章),원세개' 등이 반격을 가하여 개혁에 가담한 지식인들이 망명을 하거나, 사형당하는 등, 개혁은 수포로 돌아가고 서태후의 섭정이 재개되었다.
1899년에 일어난 '의화단(義和團)'과 열강 8국의 연합군이 1900년 베이징에서 격돌하는 사이에 광서제는 서태후와 함께 시안으로 피난을 갔고 광서제의 애비(愛妃) 진비(珍妃)는 서태후의 명령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베이징 의정서'가 성립되어 광서제는 베이징으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실권이 없었다. 1908년 서태후와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독살 의혹이 있으며, 최근에는 법의학적으로 독살이라는 것을 증명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서태후
서태후 | |
출생 | 1835년 11월 29일(1835-11-29)![]() |
---|---|
사망 | 1908년 11월 15일 (72세)![]() |
사인 | 병사 |
국적 | ![]() |
직업 | 정치가 |
서태후(西太后, 1835년 11월 29일 ~ 1908년 11월 15일)는 청나라 말기의 권력자이자 동치제의 생모로 일명 자희태후(慈禧太后), 노불야(老佛爺)라고 지칭되며 성은 예흐나라(葉赫那拉, 엽혁나랍), 이름은 행정(杏貞) 혹은 행아(杏兒)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출신지가 안후이 성 우후설, 네이멍구 후허하오터설, 산시 성 창치설 등으로 되어있다. 시호는 효흠자희단우강이소예장성수공흠헌숭희배천흥성현황후(孝欽慈禧端佑康頤昭豫莊誠壽恭欽獻崇熙配天興聖顯皇后), 줄여서 효흠현황후(孝欽顯皇后)라고 부른다.
동치제의 생모이자 광서제의 큰어머니, 이모이다. 황제를 뛰어넘는 권력으로 중국대륙을 약 50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녀는 함풍제의 의귀비(懿貴妃)에 책봉되었고, 아들이 황위에 오르면서 서태후(西太后), 자희태후(慈禧太后) 등으로 불리었다. 동치제 즉위 후, 동태후(東太后)와 서태후(西太后)가 같이 섭정을 하면서, 이러한 분위기에 호응하여,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정신이 함양된 '양무(洋務)운동'이 시작되었다. 두 태후인 동태후와 서태후가 섭정하는 동시에 숙부인 공친왕마저 정치 일선에 나서서 정국에 혼란이 가중되었고, 정권을 계속 유지하는 생모 서태후와 친정을 하고 싶은 동치제 간의 알력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동치제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천연두로 사거하였다.
정책
서태후가 권력을 잡았을 때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책'등 개혁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양무운동(洋務運動)' 또는 '자강운동(自強運動)'은 19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서양의 과학, 기술을 도입하여 스스로 강성해지자는 '사회개혁 운동'을 말한다. 청나라는 아편전쟁 등 일련의 군사적 패배와 열강의 잇따른 개입과 간섭을 겪고 나서 이러한 개혁운동이 가속화 되었다. 양무(洋務)는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이다.
이홍장은 일본과 영국 등 밀려드는 외세에 대항하여 양무운동을 펼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양무운동은 청나라 본래의 정치체계는 유지한 채, 군사, 과학 등의 분야에서는 서구화를 추진하여 외세에 당당히 맞서려는 운동이었다.
양무운동은 청나라의 만주족 지배층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조정의 실권자인 서태후가 그를 후원하였으며, 이홍장 역시 한족이기는 하나, 청나라의 유지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양무운동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독일, 영국 등 외국에서 파견된 장교들이 이홍장의 북양군을 훈련시켰으며, 서양에서 들어온 무기와 기술을 이용하여 이홍장은 강력한 군사력을 자기의 손에 쥐게 된다.
이홍장의 북양군은 '북양함대'를 구성하고,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과 톈진 주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이홍장
이홍장은 본래 청나라 말기 나라의 혼란에 즈음하여 발생한 여러 한족계 민병단을 이끌고 있었다. 이홍장의 군대는 본래 '회군','상군'이라 이름지어졌는데, '태평천국의 난'에서 스승인 증국번과 함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여 조정에 등용되었다.
증국번은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일등 공로자였다. 태평천국의 수도 남경을 함락하였을 때 일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퍼졌다.
"증국번이 상군을 거느리고 북상하여 청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것이다."
이는 한족들의 소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소문이 돌자, 증국번은 현명한 판단을 하게 되는데 바로 자신이 거느리고 잇는 50만에 가까운 '상군'을 해체하는 것이엇다. 당시 북경 조정에서도 예의주시하였는데, 증국번이 거느린 상군이 비록 의용군이지만 50만 가까이 되고 정규군인 팔기군은 전투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의용군보다도 못한 실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증국번이 북벌을 감행한다면 또 한번 대란을 겪을 것은 뻔하였다. 청 조정에서도 증국번의 동향에 예의주시하고 있을 즈음 증국번은 그러한 야망을 포기하고 상군을 모두 해체하게 된다.
증국번은 상군을 해체하면서 우수한 간부들을 이홍장에게 양보하였다. 이홍장도 민간 의용군인 '회군'을 조직하여 반란군 진압에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상군에 비하면 규모나 병력면에서 미약하여 청 조정에서 의심할 대상은 되지 못했다.
증국번은 양강총독으로 유임할 것을 희망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의 권유에 할 수 없이 직례총독으로 승진하여 2년이 채 못되어 이홍장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다시 양강총독으로 재임하다가 타계함으로써 그 후 이홍장이 정계에 군림하게 되었다.
증국번 사후, 이홍장은 청나라의 한족계 대신이 되어,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른다. 북양대신은 본래 '남양대신'과 함께 청나라의 군권을 쥐고 있는 자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정 유일의 실력자의 위치이다. 이홍장이 북양대신이 된 것과 더불어 그의 회군은 '북양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홍장은 일본과 영국 등 밀려드는 외세에 대항하여 양무운동을 펼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양무운동은 청나라 본래의 정치체계는 유지한 채, 군사, 과학 등의 분야에서는 서구화를 추진하여 외세에 당당히 맞서려는 운동이었다.
양무운동은 청나라의 만주족 지배층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조정의 실권자인 서태후가 그를 후원하였으며, 이홍장 역시 한족이기는 하나, 청나라의 유지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양무운동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독일, 영국 등 외국에서 파견된 장교들이 이홍장의 북양군을 훈련시켰으며, 서양에서 들어온 무기와 기술을 이용하여 이홍장은 강력한 군사력을 자기의 손에 쥐게 된다.
이홍장의 북양군은 북양함대를 구성하고,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과 톈진 주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이홍장의 북양군이 '청일 전쟁'에서 대패한 후, 북양군은 몰락했으며, 이홍장 및 양무운동을 주장한 세력들의 발언권은 크게 쇠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나라의 광서제와 함께 청나라의 정치체제 자체를 개혁하려는 세력들이 '변법자강운동'을 펼친다. 그러나 그들은 실질적인 권력을 잡기 위하여 쿠테타를 시도하려다 서태후를 비롯한 청나라 보수 귀족들에게 쫓겨난 후, 이홍장은 다시 기용된다. 그러나 이미 70살이 넘은 이홍장은 예전처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대신이 아닌, 외교관 역할을 수행하며 일본과 서구 열강과의 평화를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1901년 사망한다.
이홍장의 유산은 회군과 북양군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장교들에게 계승되었다. 그들은 청나라의 멸망 이후 각종 군벌을 형성하였으며, 장개석에게 토벌되기 전까지 중국의 북방을 장악하였다. 이홍장의 후계자 중 가장 강력한 사람은 '원세개'로, 그는 '쑨원'과 함께 '신해 혁명'을 통해 청왕조를 멸망시키고 '중화민국'을 창설하였지만, 곧 쑨원을 배신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그는 병사한다.
----------------------------------------------------------------------------------------------------
청의 역사에서 서태후,이홍장,원세개를 빼 놓을 수 없다. 그들은 청나라 말기 격동의 시대에 열강들 중국 침탈의 틈바구니 속에서 1,2차 아편 전쟁을 겪었고 내부적으로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혼란을 겪으면서도 양무 운동을 추진하는 등 자강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청일 전쟁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증국번과 이홍장은 군벌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가유위.양계초 등 일부 개혁적인 인사들에 의해 변법 자강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이 없던 광서제의 조급한 개혁 추진으로 쿠테타까지 음모하는 등 새태후 제거를 시도하다가 사전 발각되어 전원 괴멸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이미 기울기 시작한 거함 청나라는 청일 전쟁에서 청의 거함 진원호가 수백발의 포탄을 맞고도 쉽게 침몰하지 않고 버티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였다. 이렇게 개혁적인 인사들에 의해 자강.자립의 기회를 가졌으나 보수적인고 수구적인 서태후와 보수파 귀족들에 의해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청이 재기하기에는 이미 내부적으로 너무나 깊이 병든 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