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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이 유라시아 대제국 건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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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이 유라시아 대제국 건설...

두바퀴인생 2007. 9. 28. 12:32

 

 

 

[기자칼럼] 광개토대왕이 유라시아 대제국 건설?

중앙일보 | 기사입력 2007-09-28 12:14 | 최종수정 2007-09-28 12:26 기사원문보기

[중앙일보 이여영]
 

인터넷에서 ‘○빠’는 특정한 인물이나 대상에 광적으로 빠진 팬임을 아는 이들에게조차 ‘광빠’는 낯선 말이다. ‘노빠’(노무현 대통령 지지자)나 ‘명빠’(이명박 후보 지지자) 등과 달리, 광빠는 살아 있는 인물이나 현존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광개토대왕의 광팬들이다. 인터넷에서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알리는 데 헌신적이다.

 

그런데 이들의 글이나 주장을 읽다보면, 이상한 대목이 눈에 띈다. 우리가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는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가장 결정인 차이가 광개토대왕이 확장했다는 영토다. 이들에 따르면, 대왕이 동으로는 알래스카와 맞닿은 캄차카 반도에서, 서로는 카스피해까지 정복했다. 북으로는 시베리아에서, 남으로는 양쯔강 이남까지 호령했다고 주장한다. 고구려의 영토를 한반도의 한강 이북부터 만주와 요동 지방으로 넓혔다는 정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기존 학계가 광빠들의 주장을 일소에 부친다면, 이들도 기존 학계의 주장을 한 마디로 치부해버린다. 일제의 잔재라는 것이다. 대신 이들은 논란이 이는 소설과 비서를 바이블로 여긴다. 소설은 정립이 쓴 대하 역사소설 ‘광개토대제’(전 10권·2002년)이다. 이 소설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상고사의 전설과 중국의 한족·이민족의 역사가 마구 뒤섞여 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민족의 역사라는 것이다. 또 광개토대왕은 ‘광개토칸’으로 유라시아에 왕국을 건설한 인물로 묘사돼 있다.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광개토대왕을 아십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후손들이 잘못 알고 있는 광개토대왕은 왕(王)이 아니라, 우리 민족사(民族史)에서 다시없을 영광과 태양의 대제국, 대황천자국(大皇天子國)을 건설하신 대황천자(하늘아래 최고의 황제)입니다." (광개토대제 제 10권 중에서)

 

또 다른 책이 바로 ‘한단고기’이다. 1979년 이유립이 공개한 이 책이 국내 역사학계에서 공인받지 못한 역사서다. 이씨는 이 책은 1911년에 계연수에 의해 저술된 비서(秘書)라고 주장해왔으나, 다양한 문제점이 지적돼 왔다. 그러나 이 책을 신봉하는 이들은 인터넷에서‘한민족참역사’를 비롯한 다양한 모임을 이끌며, 이 책의 주장을 활발하게 전파하고 있다. 이는 ‘광빠’라는 말만큼 ‘한빠’(한단고기 신봉자)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이들의 주장은 근거 유무나 신뢰성과는 무관하게, 일종의 종교적 신념화 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 때문에 일부 역사 관련 인터넷 사이트나 동호회에서는 이들의 참여를 원천 봉쇄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광개토대왕을 극단적으로 추앙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반도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개척한 그가 민족 자부심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외세에 핍박 받던 과거가 되살아나고, 국제 세계에서 여전히 초라한 현재가 부각될 때마다 이런 자부심은 더욱 커진다. 실제로 지난 7월 말 '월간중앙'은 창간 35주년 특집 기획으로, 대한민국 역사를 움직인 1백인의 인물을 조사했다. 그 결과 광개토대왕은 세종과 정약용을 누르고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또 광개토대왕은 5, 10 만원 신권 화폐의 인물 후보로 인터넷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문제는 민족의 영웅을 갈구할수록, 더 광개토대왕을 과장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우리 민족의 상고사에 대해서는 다양한 신화와 여러 설들이 존재할 뿐이다. 누구도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분야일수록 확고한 믿음의 토양이 되기 쉬운 법이다. 이런 이유로 광개토대왕에서 단군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사는 우리 민족의 판타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요즘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 문화방송(MBC)의 수목드라마 ‘태왕사신기’도 이런 연장선상에 있다. 이 드라마는 광개토대왕이 주역이지만, 그 이전의 주무대는 ‘쥬신’이다. 쥬신은 광빠와 한빠가 유라시아에 걸쳐 이룩했다는 대제국의 이름이다. 훗날 일제에 의해 고조선으로 축소·왜곡 됐다는 국호다. 더욱이 이 드라마는 단군 신화와 고구려 강서 고분 벽화를 모티브로 차용했다. 즉 환웅이 광개토대왕으로 현신하고, 이와 함께 벽화의 동물을 상징하는 네 수호신(사신)도 부활한다는 것이다.

 

물론 제작진은 이 드라마가 판타지 드라마임을 분명히 밝혔다.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드라마의 무대가 된 쥬신 역시 옛 고조선의 영토라고 제한적으로 해석했다. 그런데도 이 드라마에는 실제로 광개토대왕이 전쟁을 벌인 중국과 왜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중국과 일본 시장 진출을 노린 드라마 제작진이 역사를 두고 위험한 줄타기를 벌이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인기, 해외에서는 광개토대왕으로 출연하는 배용준의 인기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태왕사신기’의 김종학 총감독은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광개토대왕이 리더십 모델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한 마디로 사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헷갈리는 행보다.

 

과장되거나 희화화된 영웅은 소설이나 드라마, 게임의 주인공일 수는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민족의 영웅일 수는 없다. 대한민국 사람인 이상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는 광빠다. 광개토대왕을 그 어떤 역사적 인물보다도 존경하고 아낀다. 그래서 더욱 더 광개토대왕을 편협한 민족주의와 값싼 상업주의의 제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