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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풍요와 종말의 계절, 늦가을 2




풍요와 종말의 계절, 늦가을 2






누구나 자신의 지난 찬란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흐뭇한 마음에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듯이 사람도 20~30대에는 아름다운 자신만의 꽃을 피우고 각자의 생각과 선택에 따라 인생의 길을 간다. 행복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불행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인이나 현대인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처럼  낙엽이 되어 땅바닥에 떨어저 흙으로 돌아간다. 바둥바둥 모은 수많은 재산도, 한 미모하던 얼굴도 주름이 파이고 노인이 된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주인공도 노인이 되어 죽음을 기다린다. 낙엽이 땅바닥에 떨어진거나 마찬가지다.








조용한 늦가을 밤, 인류에게 찬란했던 고대 로마의 역사를 대략 살펴본다.


우리의 역사에 비해 고대 로마는 사계절 내내 꽃을 피운 보기드문 천년꽃이었 는지도 모른다. 국가의 역사가 오래갔다는 것은 그만큼 그 국가의 정치 시스템이나 사회 시스템이 변화에 신속하게 적응했고 합리적이고 지혜로웠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찌하여 로마인들은 그토록 지혜로웠는지 의문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교훈을 준 것은 그리스인이었는 지도 모른다. 뛰어난 문명을 이루었던 그리스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도시국가들끼리 패권경쟁에 열중하다가 페르시아의 침공을 받고 점차 무너져갔고 민주적인 선거를 치루었지만 도시국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모습에서 통일을 이루어 국력을 결집시키기 위히서는 합리적이고 법치주의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1인 독재의 폐해를 실감하고 2인의 집정관을 1년간 교대로 통치하도록 했으며, 국정을 보좌하던 원로원의 기능을 확대하고, 평민들의 요구를 정치체제에 통합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그리고 군대도 전술을 개선하여 중보병 위주의 군대로 편성했고 주변 그리스인 도시국가를 제압하여 로마 연맹을 구축해 나갔다. 무엇보다 합리적인 사고가 뛰어났는데, 포용관 관용 정신, 그리고 피지배민족을 동화시키고 흡수하는 시스템이 뛰어났다.



            



고대 로마는 그리스 문명을 흡수하면서 장점만을 살려 자신들만의 문명를 창조해나갔다. 그리스인은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국가적 통합을 이루지 못했고, 개별 도시국가로 발전했다. 그러나 고대 로마는 이러한 그리스의 정치체제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자신들에게 맞는 정치체제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공화정 정치체제가 당시 지중해 일대는 물론 지구상에는 보기 드문 정치체제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고대 로마는 이러한 민주적인 정부 형태인 공화정이라는 정치 시스템을 만들어 주변 민족을 아우르고 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 주변에 산재한 그리스 도시들을 동맹도시로 포용하여 로마연맹이라는 힘의 결집체를 만들어나갔다. 



               



그러다가 원래 무역업으로 번창하여 지중해 세계에서 최강국이 된 강대국 카르타고와 신생 로마의 세력 사이에는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세력의 충돌 지점은 바로 시칠리아 섬이었다. 


시칠리아 섬 동단 끝에서  이탈리아 반도와 해협을 두고 가장 가까이 인접한 도시 국가인 메시나가 카르타고의 지원을 받는 도시 국가 시라쿠사가 카르타고의 사주는 받고 메시나를 공격하려 하자 메시나가 로마에 긴급 지원 요청을 하게 된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치열한 논쟁 끝에 메시나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시작이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신생 로마는 카르타고와 오랜 세월 동안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로마는 많은 인명과 물자를 손실당하는 악전고투 끝에 승리하여 카르타고와 강화를 맺고 시칠리아 섬을 양도 받게 된다. 







카르타고의 패전에 대한 분노와 책임감을 감추지 못하던 카르타고 장수 하밀카르는 아홉살짜리 자신의 아들을 신앞에 '로마 타도'를 맹세케 한다. 이 어린 아이가 자라서 나중에 로마를 침공하게 되는 데, 바로 전사에 길이 남아 있는 한니발 장군인데 그에 의해서 일어난 전쟁이 바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이다. 이 전쟁은 '한니발 전쟁'으로도 불리는데, 아버지와 삼촌을 뒤이어 에스파냐 식민지 총독이 된 한니발이 다년 간 준비한 9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침공하게 된다. 



                



그가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침공로를 선택한 이유는 이렇다.


당시 로마 해군이 지중해 일대를 장악하고 있어 바다로 갈 수 없었고, 오로지 알프스를  넘어 침공하는 길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9만 명의 대군 중 절반은 잃을 각오를 하였고 정예군 5만 명 정도가 운용하기에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모두가 용병이었기 때문에 급료를 지불해야 했고 식량과 급료는 현지 조달과 전리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기병은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기병과 갈리아족 기병을 주축으로 알렉산드로스 장군의 전술을 연구하여 다양한 포위전술을 주로 구사하는 전법을 주특기로 삼았다.

  

그는 .남프랑스를 경유하는 길을 가다 론 강을 건너면서 많은 코끼리와 병력을 잃었고, 알프스를 넘어면서도 눈길과 빙판길을 오르내리면서 많은 코끼리와 병력, 장비 중 거의 태반을 잃었다. 모진 추위와 혹한을 견디며 목숨을 건 사투 끝에 북이탈리아에 도착했서 보름간 정비를 하며 주변 갈리아족을 제압하고 병력을 보충했다. 적정을 수집차 정찰을 나갔다가 로마군을 조우하여 전투가 벌어졌는데, 바로 제1차 티치노 전투다. 한니발은 이 전투를 시작으로 장장 16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무진하면서 로마군을 가는 곳마다 격파했다. 그 중애서 세계 전사에 길이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저 유명한 '칸네 회전'이다. 이 회전에서 한니발은 양익포위 전술로 로마군 7만 명이 거의 전멸시켰다. 그러자 로마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후 로마군은 정면전투를 피하고 지연전술을 펴면서 지구전으로 버텼다. 로마 연맹의 많은 도시들이 로마군에 병력과 물자를 지속적으로 제공했다. 한니발이 아무리 로마군을 격멸시켜도 샘솟는 샘물처럼 로마군은 다시 되살아났던 것이다.



              

 


한니발은 카푸아 공방전을 펴는 동안 공성전을 생각하면서 수십 기의 기병을 데리고 수도 로마를  찿아갔다. 수도 로마 성벽 앞에 한니발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수도 로마는 초비상이 걸렸다, 예비로 남아 있던 로마군이 전투준비를 서두르고 시민들은 성벽으로 달려갔다. 한니발이 백마를 타고 천천히 성벽을 둘러보는 동안 로마 시민들은 숨을 죽이고 오금을 주리며 성벽에 숨어서 적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로마는 멸망당하는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후 한니발은 수도 로마 공성전을 포기하고 로마연맹 해체에만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치명적인 전략적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이처럼 로마는 멸망당할 뻔한 풍전등화의 위기도 겪게 되지만 원로원을 중심으로 귀족과 평민들이 똘똘뭉쳐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수십 명의 집정관, 수백 명의 원로원 의원들이 전장터로 자진하여 달려나갔고 그들은 앞장서서 희생당하였다. 


               


그러다가 로마의 젊은 장수 중 스키피오란 자가 나타나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낼 방안이 있다면서 원로원에 나타났다.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본국을 침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로원은 스키피오에게 개인 자격으로 군대를 모집하고 편성하여 ㅊㅁ공하도록 하락해주었다. 스키피오는 시칠리아 섬에서 군대를 모집하고 훈련하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한니발에 대한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응전술을 연구했다. 3년을 준비한 끝에 스키피오는 함대를 이끌고 북아프리카로 침공했다. 


로마군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본국을 침공하자 카르타고는 급히 한니발로 하여금 귀국하여 대응토록 했다. 본국의 급보를 받은 한니발은 정예병 1만 5천 명만 거느리고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카르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급히 용병을 모집하여 5만 명의 대군을 편성한 한니발은 스키피오의 로마군을 추격하여 자마평원에서 마주했다. 한니발이 먼저 화담을 제안했다. 한니발의 패전은 카르타고의 멸망이지만 로마군의 패전은 로마군 일부의 손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두 장수의 회담이 있었지만 성과없이 끝나고 다음날 회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한니발의 마지막 패전으로 나타났다. 결국 카르타고는 로마와 강화를 맺었고 한니발이 정권을 잡고 재기를 도모했으나 실패하고 오리엔트 지방으로 망명을 떠나 그곳에서 재기를 도모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로마군의 추격을 받자 쓸쓸히 독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한다. 



              



결국 로마는 카르타고와 15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제2차 한니발 전쟁을 포함 모두 3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이라는 오랜 패권 전쟁에서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로마 병사의 수많은 전사자와 여러 명의 집정관을 포함한 원로원 의원 등 사회 지도층의 희생, 그리고 귀족과 평민이 똘똘뭉쳐 위기를 극복하면서 악전고투 끝에 카르타고를 굴복시키고 결국 승리하게 된다. 


이때 로마는 카르타고와 벌인 포에니 전쟁을 통해 군사력의 획기적인 발전은 물론 전략, 전술을 발전시키고 일반 시민과 지도층인 귀족이 함께 똘똘뭉쳐 갖은 어려움과 풍전등화의 국가적 위기를 이겨내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그래서 로마는 카르타고가 지배하던 많은 식민지를 양도받음으로써 엄청나게 확장된 영토와 늘어나는 많은 부로 인해가 세계적인 최강대국이 되었으며 넘쳐나는 풍요와 부는 로마 사회를 변화시켜 나갔다. 따라서 전승의 구심점이었던 원로원의 권력은 점차 비대해졌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그러나 로마는 사회적으로는 빈부차가 극심해지고 값싼 밀의 대량 수입과 대규모 농장이 등장하면서 자작농이 몰락하였고 실업자가 양산되는 등 여러가지 사회 문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또 징집 대상이 하층민으로 내려감에 따라 로마군의 자질도 급락하게 되어 각종 전투에서 연전연패하게 된다. 이에 마리우스에 의한 과감한 군제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실업자 문제를 해소시키고 로마군의 자질도 향상시키게 된다. 이러한 업적으로 시민들의 지지를 받던 마리우스가 오랜 기간 동안 권력을 잡고 개혁을 주도해나갔으나 마리우스의 정치적 감각이 무딘 탓에 실정에 이르고  쓸데없는 공명심이 빠져 술라와 반목하면서 치열한 권력투쟁이 전개된다. 그래서 보수파(원로원파)와 개혁파(민중파)가 오랜 기간 피나는 권력투쟁이 전개되었고 마리우스와 술라 이후 폼페이우스가 실질적인 로마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러자 이에 반발하는 민중의 세력이 늘어나면서 기존 정체를 고수하려는 원로원파와 원로원의 권력을 제한하고 변화된 제국에 맞는 정치체제를 개혁시키려는 민중파의 두 세력으로 나뉘어지면서 마리우스와 술라 사이에 패권을 둘러싼 내전, 제1차 삼두정치,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대결로 이어지는 내전 등 정치적 불안이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불안 가운데 8년 동안 갈리아 전역을 정복하고 군사적인 위업을 달성함은 물론 카이사르의 강력한 군사력에 두려움을 느낀 원로원파는 카이사르를 제거하기 위해 정치적 혐의를 씌워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단신으로 수도 로마로 복귀토록 하는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하게 된다. 수도 로마에 단신으로 간다면 결국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처형되어 목숨을 잃을 것이 뻔한 사실을 알고 카이사르는 고민에 빠진다. 그러다 결국 결단을 내린 카이사르는 갈리아 군단 장병들에게 일장 연설을 한 다음 결국 군단을 이끌고 국경선인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향하게 된다. 바로 반란인데 오늘날로 치면 쿠테타였다.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원로원파는 카이사르의 갑작스런 공세에 놀라 수도 로마를 비우고 그리스로 도망친다. 폼페이우스를 추격한 카이사르는 그리스 페로살로스 평원에서 폼페이우스와 벌인 최후의 결전에서 승리하게 되고, 폼페이우스가 이집트에서 살해되자 삼두정치는 막을 내리고 카이사르 시대가 전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