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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15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15

 


          의암호반 북한강 자전거길,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전거길이라 생각된다



지난번 폭염이 몰아치던 삼복더위를 견디게 해준 것은 새벽 자전거 타기로 생동감을 보충하고 활력을 되찿음은 물론 콩나물 국밥으로 원기를 보충하고 더위를 식혀주는 콩국수를 먹으며 지냈다.


어린 시절에는 여름 더위에 지쳐지는 않은 것 같다. 논밭으로 일하러 나가신 어머니를 찿아 가서 인근에 있는 고목 나무 그늘 아래서 혼자 차놀이, 개미나 지렁이 거미 등 벌레 탐구, 떨어진 감이나 산딸기 채집, 개구리를 잡아서 갖고 놀기를 하며서 시간을 보냈고, 어떤 때는 친구네 참외밭 원두막에 올라 낮잠을 자거나 참외를 얻어먹는 재미로 더위를 보냈고, 친구들과 강에 가서 멱을 감고 물놀이를 하면서 보냈던 기억이 난다. 누나들과 토끼풀도 하러 다녔고 사과밭에 떨어진 사과를 사러 다니던 기억도 난다. 


당시에는 목욕탕도 갈 수 없었던 시절, 저녁이면 풀을 베어 모기불을 피워 놓고 가족이 평상 둘러앉아 어머님까서 손수 만드신 칼국수, 수제비, 호박범벅을 먹거나 간식으로 참외, 수박 등을 먹으며 밤을 보내던 기억이 난다. 또 밤이되면 동네 앞 금호강에 동네 사람들이 목욕하러 갔다. 여자들끼리는 같이 모여 물 속에 숨어서 목욕을 하다가 멀리서 지나가는 자동차 라이트 불빛이 비치면 개구리처럼 몸을 숨기곤 했다. 


개구쟁이 친구들 중 어떤 친구는 목욕하는 여자들 옷을 훔쳐 감추곤 하여 애를 먹이기도 했다. 낮에는 친구들과 산에 나무도 하러 다니고 소 먹일 풀도 베러 다녔다. 저녁이면 강에 나가 자갈밭에 자리를 펴고 옹기종기 누워 밤하늘 별빛을 바라보며 잠자기도 하고 수박, 참외 서리도 다니곤 했던 시절이 기억이 난다. 이제는 그런 동화같은 시절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며, 요즘 젊은이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자연친화적인 그 시절의 삶이 부럽기만 하다. 




                                       지난 여름을 이겨내게 해 준 콩국수

 


대대장 시절 이야기는 계속된다.


어느날 철원 여고 교장 선생께서 찿아왔다. 차를 마시며서 하는 말이 해당 고교가 하키 선수를 양성하는 학교라고 하면서 애로 사항이 있어 찿아왔다고 했다. 말씀하시라고 했더니, 학교 하키 골대 용접 작업이 필요해서 찿아왔다면서 친목도 도모하고 일면식겸 찿아왔다고 했다. 대대장은 즉시 장비관에게 지시하여 바로 용접공을 보내 골대를 말끔하게 수리해 주었다. 또 기타 용접이 필요한 것도 모두 용접해 주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그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년말이 가까워지자 교장 선생님께서 대대에 위문을 가도 좋으냐고 전화가 왔다. 그래서 좋다고 했더니 약속된 날 저녁에 병사들 식사 후 식당에 간이 무대를 만들고 전 대대 병력을 집합시켰다. 여고생들이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병사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교장 선생님 이하 몇 명의 선생님과 예쁜 여고생 20여 명이 위문품을 봉고차 3대에 가득 싣고 나타났다. 위문품을 담은 마대가 수 십개나 되었고 그 속에는 여고생들 위문 편지와 각종 선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위문품은 각 중대별로 분배하고 공연을 보았는데, 여고생들이 에어로빅 댄스를 시작으로 공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고전 무용도 하고 병사들과 합동으로 합창과 춤도 추면서 위문공연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병사들은 함성과 고함을 지르며 박수를 치고 괴성도 지르면서 정신이 없을 정도로 난리를 쳤다. 1시간 정도의 폭풍의 위문공연을 무사히 끝내고 서로 감사의 인사를 나누고 돌아갔다. 병사들은 중대별로 분배된 위문품에 놀라고 입이 벌어저 편지를 보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 편지를 보고 여고생에게 답장을 보낸 병사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 중에는 철원 여고 여고생과 나중에 결혼을 한 병사도 있다고 이야기 들었다.



지포리에 있는 군단 포병 대대장 중 동기생이 한 명 있었다. 군단 포병에서 제일 잘 나가는 대대장이었는데, 나중에 장군까지 진급한 동기생이다. 가끔 지포리에서 저녁 식사도 같이 하고 친목을 다졌다. 그러다가 어느날 방문했더니 자체 포상 공사를 하는 데 도자 장비가 필요하다고 지원을 요청했다. P대대장은 좋다고 하면서 도자를 제공하는 대신 병력과 맞바꾸자고 했다. 얼마면 되느나고 해서 약 20명 정도면 된다고 했다. P대대장은 임무수행하는데 항상 병력이 부족하여 제안한 것이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서로 합의를 하고 20명의 포병 병사들이 다음날 대대로 왔다. P대대장은 포병 병력을 우선적으로 대우하도록 지시하고 불침번도 면제하고 필요하면 대대에서 포상휴가도 보내주겠다고 했다. 점호는 자체적으로 실시하고 결과만 일직사관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화목하게 잘 지내도록 중대별로 나누어 분산 배치했고 같은 내무반에 소모품도 충분히 제공토록 했다. 잡다한 임무에 끌려다니면서 그래도 대대 병력과 다툼도 없었고 사고도 없이 무사히 임무수행을 잘하다가 장비가 철수하면서 돌려보냈다. 남의 자식 데리고 있다는 것이 보통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사고가 나면 대형 사고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P대대장에게는 마치 불귀신이 따라 다니는 듯, 대대장 나간 첯해 겨울에 북한 노동당사 건물에 가까운 곳에 주둔하고 있는 관우고지 보병 대대에서 불이나 A타입 막사 한 동이 불타버렸는데, 많은 보급품과 총기가 불타버렸다. 사단장은 현장에서 건물 복구는 공병, 보급품은 보급대장, 병기는 병기대장에게 임무를 주어 상부에 보고없이 즉각 복구토록 결정했다. 화재 원인은 대부분 전기 누전으로 결론이 났다. 


공병에서 매년 전기 안전 점검을 실시하지만, 보병 대대는 책임과 처벌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 거짓말로 원인을 감추기 때문이며 사단 헌병에서 화재 원인을 조사를 하지만 요즘처럼 과학 수사 능력이 없는지라 대부분 주먹구구식이다. 옛날에는 뻬차카 방식의 난방이 대부분이었으나 당시 군에는 경유로 난방하는 카브레타 난로가 보급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화재는 카브레타가 고장나서 순찰을 돌지 않거나 불침번이 조는 등 감시가 없는 경우 난로가 과열되어 화재가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음날부터 보병 대대 병력 전체가 불탄 막사에 개미처럼 달라붙어 불탄 자국을 긁어냈다. 인력의 힘이 그토록 무섭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반나절 만에 모두 걷어내고 청소까지 깨끗이 끝냈다. 공병에서는 철거 대상 건물에서 트라스를 철거하여 운반하여 올리고 합판과 스레트로 지붕을 덮고, 문틀과 문짝, 창문을 달고 유리를 끼우고 등기구를 설치하고 페인트 칠을 실시하여 3일 만에 완전히 복구했다. 보급 대장은 보급소에서 보급품을 실어 나르고 병기 대장은 부산까지 내려가서 병기창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M16 소총을 수십 정 구해왔다. 군대에서 안되는 것이 없을 정도라고 생각되었다. 원칙과 비원칙이 공존하는 것이 군대이기 때문이다.


다음해 겨울에는 지포리 보병 대대에서 또 불이나 행정반 막사가 불타버렸다. 다행히 행정반 건물이 불난 바람에 물자와 병기는 불타지 않았다. 그 때도 마찬가지로 상급 부대에 보고하지 않고 신속히 복구했다. 아마 알게 모르게 각 사단에서 매년 막사 한 동씩은 불탓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상급부대에 보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지 못할 것이다.



일요일이면 아내와 두 자녀를 데리고 사단 사령부에 있는 교회로 간다. 그리고 돌아오면 동송 시내에 나가서 애들은 운전병과 같이 돈까스를 먹고 아내와 P대대장은 다른 음식을 먹고 돌아오곤 했다. 


통상 예배가 끝나고 사단장과 목사, 참석한 간부들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한다. 사단장이 기독교면 기독교로 몰려들고 불교면 법당으로 몰려든다. 육본과 국방부 장군들이 가는 삼각지 근방 교회에는 주일이면 고급 장교들 부부가 그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서 구름처럼 몰려든다. 마찬가지로 사단도 그렇다. 차를 마시다가 눈을 마주치고 근황을 물으면 그것으로 목표는 달성되는 것이다. 그러다 목사가 사단장에게 건의한다. 사단 교회를 지은 지 얼마되지 않아 교회 올라오는 길에 자갈을 깔아놓았는데 사모님들 하이힐이 찟기고 흠집이 난다는 것이다. 사단장은 뒤를 돌라보며, 

"대대장, 검토해봐!"

"옛 알겠습니닷!"


콘크리트 포장을 하려면 시멘트와 바닥메쉬가 필요한데, 시멘트는 대대 관급 재고분을 사용하면 되지만 바닥메쉬는 돈을 주고 시중에서 구입해야 한다. 그러면서 며칠이 지나자 결재 중 사단장이 왜 교회 진입로 공사를 하지 않느냐며 짜증을 냈다. 그래서 사단장실을 나오자마자 당장 중대 병력을 투입하여 밤을 새워 콘크리트 포장을 했다. 


다음 번에는 목사가 교회 앞에 파고라를 설치해달라고 사단장에세 건의했다. 여름에 등나무 파고라 밑에서 시원하게 차를 마시면 좋겠단다. 이에 사단장은 또 대대장에게 지시했고 대대장은 서울로 간부를 보내 파고라 제작 기술을 배워 대대에서 파고라를 제작하여 설치했다. 대대장이 파고라를 제작하고 설치하는 데 들어간 비용과 지난번 포장 비용을 목사에게 청구했다. 그러나 목사는 모르겠다고 했디. 대대장은 화가났다. "목사님, 목사님은 그냥 말로만 하시네요. 병사들 땀과 노력, 그리고 현금이 들어간 비용을 모르시겠다구요?" 그러자, 목사왈, "대대장이 그 쯤은 해결하실 능력이 있으시잖아요.?" 목사란 사람이 하는 말이 기가찼다. 모두가 위선자요 사기꾼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대장은 문을 박차고 나왔고 그 후로는 아내와 애들만 교회에 데려다 주고 두 번 디시 교회에는 나가지 않고 전방으로 순찰을 나갔다.



어린시절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닌 적은 있었다. 교회는 중대장 시절에 21사단 백두산 교회를 지었고 준공 후 중대원과 같이 아무 의미없이 반강제적으로 세례도 받았던 적이 있다. 또 양구에서 살 때 힘든 삶과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었던 아내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마음의 위로를 받은 모양이었다. 그후부터 아내는 주일에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대대장 시절에는 주일에 가족을 데리고 사단 사령부 교회에 따라가곤 했다. 그러나 목사와 이 사건이 있은 후 부터는 교회를 따라가지 않았다. 


군에는 기독교, 불교, 천주교가 부대마다 교회. 절, 성당을 짓고 주일마다 병사들이 종교 활동을 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정신과 육체적으로 고단한 병사들에게 조금이라도 종교를 통해서 정신적.육체적  힐링을 도모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어떤 종교에 깊이 빠진 지휘관으로 바뀌면 꼭 부대의 종교시설을 새로 짓는 행위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외부에서 건축헌금을 기부받아 시작하지만 부대 물자는 물론 병사들 노력과 땀이 투자되는 경우가 많다. 


'갈등의 핵 유대인',  '이슬람,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책을 통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대해서 그 뿌리부터 알게 되었는데, 종교가 무엇인지, 각 종교가 태어난 배경은 무엇인지, 그 종교간에 왜 이토록 갈등의 골이 왜 깊은지, 그들 종교간에 차이점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종교는 그 종교를 창시한 인간을 신격화시키고 그가 한 말이라는 경전의 대부분이 후세 제자들에 의해서 첨삭가감되어 씌여지면서 그 지방의 전설, 풍습, 타민족 종교, 신화 등을 자신의 종교나 민족의 역사로 둔갑시키거나 탈바꿈시키거나 변질시켜 그들 종교 창시자와 조상의 역사를 가지고 경전을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유대교에서 분파한 예수의 그리스도교가 로마 황제의 공인 이후 급속히 성장하여 교황이 세계를 지배하던 중세가 지나고 종교 지도자들이 점차 부패해지자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 종교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교는 보수적인 천주교(구교)와 개혁적인  기독교(신교)로 분파되었고, 신이 아닌 인간 예수를 신격화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만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느슨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종교가 타어났는데, 바로 마호메트에 의해 탄생한 이슬람교다. 이슬람교는 아리비아 사막 해안가에서 무역으로 번창하던 한 도시에서 마호메트라는 사람에 의해 이슬람교가 창시되었다. 그후 이슬람교는 무력으로 기존의 지배 권력을 몰아내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슬람교를 내세우며 정치적.민족적 통일을 도모했다. 점차 힘이 강성해진 이슬람의 칼리프들은 동로마 제국과 패권을 겨루면서 성장했고 중근동 일대는 물론 북아프리카, 발칸, 스페인 반도까지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는 당연히 그리스도교와 영역을 두고 패권 경쟁이 벌어졌다. 오늘날 이슬람 영역이 바로 그들이 힘을 투사하여 확장한 지역이다.


이슬람은 같은 유일신을 그리스도교와 달리 호칭을  '알라'라고 부르면서 그리스도교보다 더 적극적인 종교활동을 강조했다. 이슬람교도는 하루 다섯 번씩 기도를 올려야 하고 형제 간에 도움과 배려를 강조한다. 이슬람교가 이슬람군의 세력을 타고 급속히 전파되기 시작하여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지방까지 지배하게 되자 유럽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에 의해  '성지탈환'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십자군 전쟁에 일어났으나 초기에 잠시 예루살렘을 포함 일부 지방을 점령하였을 뿐, 결국 이슬람 세력에 의해 물러나고 말았다. 이슬람 세력이 기독교 지역인 유럽을 스페인 반도를 통해 침투해 들어가자 유럽의 그리스도교 군대가 이슬람의 침공을 막아냈다. 만약 그때 막아내지 못했다면 아마 유럽 지역에서 기독교나 천주교는 사라지고 오늘날 유럽 지역은 대부분 이슬람화했을 것이다.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이다. 종교라는 교묘하게 위장한 믿음으로 백성과 권력에 기생하면서 백성들이 피와 땀을 빨아먹으며 성장한다. 그들 종교가 지배하는 종교적 세상을 만들어 왕 중의 왕인 교황이 지배자가 되어 세상을 지배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 교황이 세상을 지배했으나 인류 문명을 퇴보시켰을 뿐 역사 발전에도 퇴보를 가져왔다. 그리고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은 천국은 아니었다. 오늘날 종교 지도자 대부분은 교세를 통해 치부하고 세습하며 종교 권력을 항유하려 한다. 


따라서 종교가 주는 긍정적인 면도 많지만 반대로 부정적이 면이 더 많다고 본다. 오늘날 지구 분쟁의 대부분이 종교적 영역 싸움질이 대부분이다. 종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매우 독선적이며 이기적이고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종교를 몰아내고 파멸시키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인류 역사에서 종교간 분쟁이 고대부터 이어져왔다는 점에서 종교 간에 풀 수 없는 깊은 갈등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된다. 



종교 천국인 우리 나라에서 정치인이나 지도층, 각종 단체, 군의 지휘관 등은 종교에는 중립적인 사고를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계급과 권력을 가지고 자신의 종교에 대해 우선적으로 우대한다면 내부 분열을 물론 종교간 갈등을 초래하고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기 쉽고 합리적인 결심과 판단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종교는 권력과 부의 힘을 타고 교세를 확장하개 되어 있다. 종교도 선교라는 미명하에 영토 야욕이 치열하고 그래서 종교간 영역 싸움을 피할 수 없다. 영역이 바로 그 종교의 힘이요 교세이기 때문이다. 또 종교 본연의 의미와 태도에서 벗어나 종교를 빙자하여 자신의 치부와 종교 세습을 도모하는 사이비 종교인들이 위선과 가식으로 삶의 고통과 미몽에 찌든 사람을을 현혹시켜 정신과 재물을 약탈하여 가정과 삶을 망가뜨리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에서 종교간 피나는 영역 다툼은 지속되어 왔고 아직도 멈출줄 모르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앞으로도 그칠날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저 높은 하늘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네 마음 속에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