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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13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13

 


          의암호반 북한강 자전거길,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전거길이라 생각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삶의 방식은 부모, 지방, 환경, 전통, 풍습. 종교,시대적 배경 등에 의해서 결정되는 듯하다. 그래서 청소년의 미래도 이러한 여건에 따라 미래의 진로가 결정되기도 한다. 또 청소년의 미래의 진로 결정은 자의적인 결정도 많지만 부모 등 환경적,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역사적 인물이나 그 시대 자아실현을 이룬 인물을 본받아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경우도 많다. 각자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길을 어떻게 결정하게 되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시라.


군대가 선망의 대상이던 시절에는 우수한 많은 인재가 군을 지원하게 되고, 대기업이 선망이 될 때는 대기업으로 인재가 몰려든다. 만들어진 영웅 강재구, 이인호로 인해 많은 젊은이가 사관학교를 지원했고 월남전에서 이슬처럼 목숨을 바쳤다. 각종 인기 드라마나 영화로 인해 그 주인공의 삶을 뒤따라가는 젊은이도 많다. 요즘은 우리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언론인이나 방송사를 지원하는 젊은이가 많고, 돈을 많이 번다는 사실에 가수나 배우 등 연예인의 길을 가기 위해 연예기획사를 기웃거리는 젊은이들이 많다. 


그러나 어떠한 삶의 길도 누구에게나 만족은 주지 못할 것이다. 요즘은 취업도 힘들고 취업해도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이 대부분이며 알바로 생활비를 벌며 살아가는 사람도 많고 이제는 평생 직장은 찿아보기 힘들다. 또 직장 생활은 한계가 있고 노후를 보장하지 못한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이러한 직장 생활의 불안정성으로 안정된 직업을 선호하게 되면서 일반 공무원, 교사, 군인, 경찰, 소방 공무원 등 국가 공무원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있다. 또 공무원은 평생 직장으로 안정된 직장이며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정년까지 근무가 가능하며 퇴직 후 나중에는 연금을 받아 노후도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연금은 최소 20년 이상 근무하야 하고 비리나 부패에 연루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군인의 경우 연금을 받기 위해서는 계급 정년에 걸리지 않으려면 일정 계급까지 올라가야 하고, 넘쳐나는 교사는 정식 발령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군인은 진급에 목을 메야 하고 진급이 되지 않을 시 중도에 전역해야 하는 경우 20년이 되지 않으면 연금이 아닌 일시퇴직금을 받고 전역해야 한다. 중도에 나온 대부분의 군 전역자들은 사회 시스템에 어둡고 정보에 약해 사기를 당하거나 자영업을 섣불리 시작했다가 대부분 파산하는 경우도 많다. 또 근무간 열악한 오지 근무로 가족이 문화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생고생을 하면서 젊음을 다 보낸다. 또 못된 상관을 만나 항명하거나 각종 사고, 비리와 부패 등으로 불명예 전역을 하는 경우 연금 헤택이 제한된다. 


그리고 공무원은 정년퇴직까지 다람쥐 채바퀴 돌듯이 평범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굴곡진 삶은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변화무쌍한 삶을 살 수 있지만 한편 성공시 자아실현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공무원은 비리나 많은 상속이나 비리나 부패에 관여하여 축재를 하지 않는한 오로지 봉급으로만 평생을 살아야 하고 자아실현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용지식이 반드시 필요하고 누구나 그런 지식이 없다면 가난한 삶을 피할 수 없다. 그런 지식이 거의 전무한 부류의 사람들이 특히 군인, 교사, 일반 공무원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어린 시절부터 바른 삶만 강조했지 이런 경제적인 중요성은 가르치지 않는다. 


고대 로마인은 정치 무대에 나서기 전에는 반드시 군단 회계감사관을 거치는 것이 관례였다. 경제 지식이 없는 정치인은 국가 정책을 제대로 수립하기도 힘들고 재정을 바르게 운용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초대 아우구스투스 황제나  제2대 티베리우스 황제는 국가 재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제3대 황제 칼리굴라는 그동안 일구어 놓은 국가 재정을 각종 기행과 인기 정책을 펼치는 바람에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국가 재정을 파탄나게 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를 보다 못한 최측근 근위 대대장에 의해서 즉위 4년 만에 살해되고 말았다. 경재를 모르는 정치가 나라를 망치듯이, 경제를 모르는 개인이나 가장은 결국 파산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유대인은 어린 시절부터 경제적인 관념을 철저히 심어주며 조상의 위대한 역사라며 구약을 매일 암송하고 공부시킨다. 오늘날 유대인이 세게 경제를 주름잡으며 월 가에서 그림자 권력이 되어 미국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누구나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드물고 부부도 서로 만족하는 가정은 드물다. 젊은 시절 눈에 콩깍지가 씌인 상태에서 이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 콩깍지가 벗겨진 30대 이후가 된 다음에는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젊음을 즐기며 마음껏 향유하며 이성을 보아도 이런저런 계산을 하고 따지다 보면 결혼을 못하고 나이는 어느새 중년을 바라보게 된다. 요즘 독신으로 사는 중년들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백마 탄 왕자나 백설공주 같은 이성이 자신을 찿아주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꿈에 불과하다. 결혼은 해도 후회하지만 안 해도 후회한다고 하지 않는가. 인간의 내면은 처음 겉만 보고 절대로 알 수 없다. 아무리 미인이라도 가면을 쓰고 내숭을 떨며 아닌척 하지만 벗겨놓고 보면 경험치에 따라 색깔만 다르지 오십보 백보다. 주름지고 찌그러진 어머니의 얼굴이 그 딸의 미래라는 사실을 아는가. 재산을 보고 만난 사람은 반드시 불행의 길을 걷기 쉽다. 그래서 자란 환경과 인품, 성격,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셋방을 살아도 외제차를 굴려야하고 명품 옷과 구두, 가방, 시계를 차야 한다면 그것은 상대를 속이거나 체면치레를 하기 위한 행위에 불과하다. 


사람이 아무리 아는 것이 많다고 해도 태평양 바다에 떠 다니는 낙엽 조각에 불과한 것이 사람의 뇌에 비축된 지식이다. 그 지식도 시간이 지나갈수록 기억에서 사라진다. 사람의 눈은 감성적이지만 뇌는 이성적이다. 인간 세상 만사에 대해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데는 작은 머리로는 제한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은 우매할 수밖에 없다.


한 목사의 감언이설로 전재산을 헌납하고 멀리 피지 섬으로 낙원을 찿아간 사람들이 바로 그런 우매한 사람들이다. 그들처럼 지금도 자신의 처지를 바로 알지 못하고 허상을 쫒아 다니며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인 듯하다.


천국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집 땅콩이

 

대대장 시절 이야기는 계속된다.


좀 칭피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대대에 유일하게 8년차 후배 Y중위가 소대장을 끝내고 대대 행정장교를 하고 있었다. 눈빛이 좀 흐리멍텅한 장교였으나 육사 후배이고 아직 군생활이 미숙한 상태라 그냥 시키는 일만 잘 하도록 배려했다. 동작이나 행동이 빠릿빠릿 하지 못하고 굼뜬 편이었지만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편애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대대 주임원사가 들어오더니 행정장교 Y중위가 출근하지 않았다고 했다. 기거하는 비오큐에도 확인했는데 어제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혹시 무슨 사고?" 대대장은 불현듯 불안감이 느껴졌다. 전방은 탈영, 자살은 물론 월북 사고도 가끔 나는 곳이기 때문에 빨리 확인하고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문제가 위중할 경우 나중에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된다. 


그래도 후배니까 하고 믿는 구석도 있어서 주임원사에게 전간부를 동원하여 동송, 관인, 지포리, 운천까지 여관과 모텔, 술집을 모두 뒤지라고 했다. 그리고 대대 간부들을 풀었다. 오전 중에 찿지 못하면 사단에 보고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오전이 다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자 점차 걱정이 물려왔다. 


행정반 Y중위 책상과 노트, 비오큐에 Y중위 개인 사물까지 모두 뒤졌지만 특이한 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도 버티기로 하고 기다렸다. 그러다 오후 2시경 갑자기 Y중위가 대대에 나타난 것이다. 모습을 보니 늦잠을 잔 듯 부시시한 모습이었다. 반갑기도 하고 밉기도 하였지만 일단 감정을 억누르고 물었다.


"Y중위, 야, 어찌된거야?"하고 물었다. 그의 말인즉 어제 밤에 술을 먹고 관인에 있는 허름한 여인숙에서 잠을 자다가 늦게 일어나 이제 왔다고 했다. 정말 기가찼다. 아마 술을 먹고 외박을 하고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간부들이 흐름한 여인숙까지 뒤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대대장이 말했다.

"대대에 유일한 후배인 너가 대대장을 망신시킴은 물론 육사까지 나온 놈이 술을 먹고 늦잠을 자다가 이제 왔다고? 제 정신이냐? 아무리 술을 먹어도 아침  출근 시간에는 기어서라도 출근해야 될 것 아니냐! 그런 정신 상태로 앞으로 어떻게 군생활을 할 것이냐. 간부들 보기에 칭피하지 않으냐. 너는 일단 정신상태가 글러먹었다. 앞으로 내가 관찰할 것이니까 똑바로 잘 해! 나가 봐 ! "


그런데 나가는모습이 별로 반성하는 기미도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꼴통들이 입학한 기수라고 소문이 나더니만 진짜 꼴통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4년 동안 교육을 받고 임관한 후배니까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대대장은 기대와 달리 그 후에도 Y중위는 몇 차례 더 늦게 출근하여 야단을 맞았지만 변함이 없었다. 마치 중대장 시절 임하사 같은 놈을 만난 것이다. 그 중위는 하루빨리 전역하여 사회로 나가는 것이 군을 위해서나 본인을 위해서나 육사 명예를 위해서나 바람직한 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평정도 그런 방향으로 썼더니 사단 참모장께서 전화가 왔다. "Y중위 평정을 이렇게 쓰도 되는냐"고. 대대장은 그동안 있었던 사실을 모두 이야기 했다. 그랬더니 참모장도 수긍을 하고 "알았어"하고 끊었다. 


그 장교는 나중에 소령까지 진급하여 P대대장이 참모장을 하고 있던 강원도 현리 여단으로 왔다. P참모장은 앞서 근무하던 부대에 확인 전화를 해보았더니 진저리를 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전입 신고도 생략하고 또 같은 설교를 들었지만 대대로 내려간 그 장교는 근무 태도는 역시 꼴통은 변함없이 마찬가지였다. 


다음해 Y중위보다 2년 후배가 S소위가 소대장으로 왔다. 1년 동안은 그런대로 열심히 근무를 잘했다. 그런데 어느날 주임원사가 아침에 급히 들어오더니 S중위가 큰 사고를 냈다고 했다. 무슨사고냐고 물었더니 어제밤, 동송에서 술을 먹고 밤늦게 택시 주차장에 서 있는 택시를 훔쳐 몰고 북쪽 방향으로 가다가 민통선 검문소가 있는 제5검문소 바리케이트를 치고 북상하다가 논바닥에 쳐박혀 뒤따라온 택시 기사와 경찰에 붙잡혀 체포되어 지금 경찰서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연대 상황실에서 이미 아침에 사단에 보고했다고 했다. '아! 큰 일이다. 아끼던 후배가 이런 엄청난 사고를 치다니!' 하면서 대대장은 순간 사단까지 보고된  이 엄청난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먼저 사단 참모장에게 전화로 빨리 해결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사단장에게 보고되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참모장은 '알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주임원사에게 S중위 부모에게 빨리 연락하라고 지시했다. 헌병대로 이첩되면 월북 기도자, 택시 절도, 음주 운전 등으로 옭아매면 무조건 구속 후 어쩌면 징역을 살고 불명예 제대를 해야 할 판이었다. 후배의 인생을 망치게 나둘 수는 없었다. 오후에 아버지가 급히 달려왔다. 아버지는 택시 기사를 만나 피해난 일체를 모두를 보상해주고 경찰서에도 찿아가 사죄하고 신병을 인도했다. 그후 헌병대로 끌려 갔는지 아닌지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가물거려 생략한다. 


앞서 Y중위 기수부터 S중위 기수 전후로 신군부가 집권하던 시기 임관했던 기수들이다. 그래서 군출신에 대한 악감정으로 당시 육사 지원자가 대폭 감소하고, 고등학생 중에서도 질이 낮은 하층 그룹이 지원하던 시기였다. 이 어간에 육사 지원자가 미달되던 시기도 있었다. 질이 낮은 인간들이 4년 교육도 허탕, 임관 후 실무부대에 배치되면 이같이 어이없는 엄청난 사고를 쳤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그들 기수들도 이제는 이미 대부분 군을 떠났겠지만 군의 미래가 암담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인 수준이 그 정도였다는 말이다. 



철원은 평야 지대라 도로가 평탄하여 군용 차량도 과속하기 쉽고 넓은 평야 지대라 농번기에는 경운기 등 이동이 심하여 도로가 번잡하다. 그래서 교통 사고가 많다. 그래서 군용 과속 차량은 부대 번호를 보고 지나가던 인접  대대장들이 해당 부대장에게 통상 알려준다. 어느날 대대 차량이 과속으로 달리다가 모를 심어 놓은 논바닥에 날아가 빠지는 사고가 있었다. 수색대대장을 만났더니 그 말을 전해 주었다. 그러나 수송관은 대대장이 모를 것이라 생각하고 결산 때 사고에 대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날 수송관은 그 사고를 대대장이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대장이 알고 묻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날 수송관은 대대장에게 크게 혼났다. 본보기로 사고낸 운전병, 선탑자 모두 영창에 보냈다.


동송 사거리에는 사단 헌병대 검문소가 있다. 동송을 거쳐 전후방으로 들락거리는 대대가 전초대대, 수색대대, 대략 5 ~6개 보병 대대이니 병력 규모는 대대당 400명씩 잡아도 8개 대대 3200명이 넘는다. 


그런데 이 헌병 검문소에서 업무차 통과하는 군용 차량도 많고 휴가 가거나 오는 병사들이 많이 지나가는 전방의 길목이다. 그런데 검문소 헌병들이 지나가는 병사를 일일이 불러 군기점검을 한다. 경례 동작부터 휴가증 확인, 군화끈 맨 상태, 휴대품 내용물, 주머니 검사, 두발 등등 이런 검사에 한 두가지 걸리지 않는 병사가 없다. 헌병이 적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겁을 준다. 그러면 병사는 부대에 보고되면 군기교육대나 영창을 갈 공산이 크다. 그래서 병사들이 그런 불상사를 면하기 위해 헌병에게 돈을 주는 것이다. 엄청난 수입이 매일 발생했다. 이런 사실이 나중에 들통이 나서 사단 헌병대장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또 군내 각종 사건을 빙자한 헌병의 비리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아내가 직할대장 부인들이 요구하여 사단 모임에 간다며 차를 좀 내달라기에 처음에는 체면상 1호차를 내주었다. 그러다가 다음에 또 차량을 내달라기에 식당에서 운영하는 소형 부식차를 내주었다. 그후에는 직할대장 부인들이 아내에게 차량을 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21사단 중대장 시절 차가 없던 처지라 비포장 도로를 걸어가고 있는데, 찝차가 먼지를 날리며 손쌀같이 지나가는데, 뒤에 탄 여자 둘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지나갔다. 그후로 아내를 찝차에 태워 보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아내가 부대 차량을 내달라는 것을 거절했다.


아내가 직할대장 부인 2명을 처음 동송에서 만나 미장원에 갔다고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맥주를 시켜 마시면서 머리를 하고 그리고 레스토랑에 가서 비싼 음식을 시켜 먹고, 옷가게 가서 비싼 옷을 산다고 했다. 그 후 아내는 능력도 안되지만 어울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두 번다시 그녀들과 동행하지 않았다. 가난한 아내가 그런 사치스런 여자들과 같이 행동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남편이 다른 군인 가족을 만나 휩쓸려 같이 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한다는 점도 있었다. 


군인 가족들이 남편은 목숨을 걸고 지뢰밭을 휘저으며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아내는 사치를 하며 꼴사나운 태도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당시에는 많은 군인들이 수준 낮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다. 젊은 시절 전방에서 만난 유흥가 아가씨와 결혼하여 사는 간부들이 이외로 많았다. 그래서 군인 가족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당시 신참 소위가 오면 고참 선배들이 회식 후 신참 소위와 아가씨를 한방에 넣고 문을 잠그는 경우도 있었고, 막걸리 한 되만 먹으면 통상 아가씨는 공짜였다. 전방에는 부대 앞 구멍가게는 통상 아가씨가 몇 명씩 있었고 병사부터 간부까지 드나들었다. 


신참 소위가 전방에서 하숙집에 살았는데, 어느날 저녁 밥하는 아줌마가 술을 들고 들어와서 술을 먹이며 꼬드기는 바람에 그만 그 아줌마를 건드렸다. 이후 소위는 아줌마에게 매일 봉사를 하며 살아야 했고 갖은 공갈과 협박에 시달리며 봉급까지 갖다 바쳐야 했다. 그러다가 소위가 헤어질 욕심으로 아줌마 몰래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갔다. 그러자 기다리던 소위나 나타나지 않자 아줌마는 다음 날 아침에 부대를 찿아가 부대 정문 앞에서 지휘관 차가 나타나면 치마를 걷어올리고 도로에 드러누워 통곡하며 발버둥쳤다. 지휘관이 사실을 알아보니 소위를 찿아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출간 부대를 알려주었다. 그러면 그 아줌마는 부대를 찿아가서 소위를 만나게 해주지 않으면 부대 정문에서 똑 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면 부대장이 다시 만나게 해 주었는데, 그러기를 대위가 되어 10년이 넘도록 장가도 가지 못하고 같이 살았고 아줌마는 갖다주는 봉급으로 사치하고 낭비하며 살았다. 그래서 돈은 한 푼도 모으지 못한채 대위가 되었으나 소문이 파다하게 나자, 그런 문제를 알게 된 부대 지휘관이 군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라며 그 대위를 조기에 전역을 시킨 적도 있었다. 


대대 간부 식당 부식을 공급하는 가게가 동송 시내에 있었는데, 아내는 전혀 모르고 그 가게를 들런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가게 주인이 새로온 대대장 부인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고 부식을 덤으로 더 준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덤을 거절했다. 그러자 그 가게 주인이 한 말, "지난번 대대장 사모님은 부식을 공짜로 많이 가져갔는데, 참 이상하시네......" 나중에 아내가 남편 p대대장에게 전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