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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12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12

 


          

         의암호반 북한강 자전거길,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전거길이라 생각된다

 


지금 이곳 남양주 호평동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오늘은 자전거 운동을 포기하고 산책만 하기로 했다. 목마른 대지 위에 내리는 비는 알고보면 엄청난 물을 갖다 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비가 적절히 내리고 기온도 20~30도 사이를 오르내린다면 그런 곳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다. 


한반도는 사계절이 있어 폭염의 여름과 혹한의 겨울이 봄과 가을과 더불어 공존하기에 열대 지방과 북극 지방을 골고루 경험하며 계절 변화에 따른 환경 변화에 대처하며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 사람의 성격이나 인성도 그에 따라 다양한 성격이 여러 형태로 형성되는 곳이기도 하다.


폭염만 게속되는 열대 지방은 동식물은 마음껏 자랄 수 있을 지 몰라도, 먹을 것이 풍족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게으르다. 극 지방은 혹한으로 동식물이 자라지 못한다. 그래서 극히 제한된 종류의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쏟으며 살고 있다. 그리고 혹한으로 사람들의 활동도 제한되어 게으르다.


그래서 우리 한반도는 그런 의미에서 너무나 살기 좋은 곳이며 그 증거로 고대 선사시대부터 이 땅에 만들어진 고인돌이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수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만주에서 고구려인들이 이주해왔고 그 중에는 비류와 온조를 비롯한 주몽의 가족들도 있었다. 가야의 시조 김수로는 역시 외지에서 온 사람으로 추정돠며 인도에서 온 여자를 왕후로 맞아들였고, 신라의 석탈해, 김알지를 비롯한 여러 지배층도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다. 


특히 신라 시조 김알지는 한무제가 흉노를 정벌할 때 위청, 곽거병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에 포로가 되어 끌려온 흉노족 왕자 김일제가 무제의 인정을 받아 관직에 투후에 오르까지 했는데, 그의 후손 중 왕망이란 사람이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새웠지만 15년 만에 망하면서 김알제 후손들 가문이 멸문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때 교역로를 따라 신라에 귀의한 사람들이 바로 김알지 가족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처럼 이 한반도는 주변에서 여러 이민족들이 찿아올 정도로 산과 평야가 적당하게 펼쳐저 있고 기온이 온화하고 강우량도 적절하며 사계절이 뚜렷하고 자연재해가 비교적 적은 너무나 살기 좋은 땅이한반도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금수강산에 살고 있는 우리에 비해 고대 로마 제국은 지중해 뿐 아니라 세계적인 강대국이 되어 지중해와 유럽, 발칸반도, 브리타니아, 스페인, 북아프리카,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시리아를 지배했으며 2천 년에 가까운 로마 제국 역사를 기록했다. 그때까지 미몽에 헤메고 있던 오늘날 프랑스 등 서유럽 지역의 갈리아 족과 독일 등 동유럽의 게르만 족을 로마화시켜 문명을 전수해주었고 그들이 건설한 로마 가도와 퇴역병들이 건설한 식민도시들이 오늘날 유럽의 도로와 도시가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들의 문명이 유럽과 미국 문명의 기초가 되었고 세계 문명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대 로마와는 달리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서 너무나 소극적인 사고와 태도로 일관해 왔다는 점이다. 그것이 평화를 사랑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지배층이 지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반도에 안주하였고 외부로 진취성을 발휘하지 않았고 모험심도 부족했다. 그래서 내부지향적인 민족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만주의 여러 소수 민족을 아울러 나라를 세우고 중원을 떨게 만들었던 고구려를 제외하고 어디에도 진취성을 보여준 나라는 없었다.


그래서 한반도의 지배층은 반도내에서 오로지 백성들의 피와 땀을 빨어먹으며 부귀영화를 천세만세 누리는 것이 조선 시대에는 유교 이상국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조그만한 권세가 주어지면 그것을 가지고 백성들의 억압하고 협박하고 구금하여 재산 등 가진 것을 빼앗고 탈취하여 자신의 치부와 출세를 지향했던 것이 한반도의 지배층이었다.


최근 뉴스를 보니 차량 급발진이나 제조 결함 사고에 대한 리콜은 국토부와 대학 교수들로 구성된 심사평가위인가 무언가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는데, 조사팀이 조사해서 올리는 심사건이 번번이 대기업 편을 들며 무시되었다는 점이다. 이들 심사위원들이 대기업의 로비를 받고 소비자의 요구를 부정하고 대기업 편이 되어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는 비리사슬이 존재하고 있다니 기기찰 노릇이다. 검찰의 조사가 이루어질 것인라니 두고 볼 일이다. 


지금은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겨우 100년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 해방 후 혼돈을 겪고 뒤이어 6.25 전쟁을 거치고 남북으로 분단된 채 오늘에 이르기까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남북이 국력을 낭비하며 대치해 오고 있다.


한반도의 봄은 언제 올 것인가?



*                                *                                   *                                   *                                 *



대대장 시절 이야기는 계속된다.


어느날 사단장이 급히 찿는다는 연락이 왔다. 사령부로 달려가 사단장실에 들어가니 안색이 썩 좋지 않으셨다. P대대장은 긴장하여 사단장 앞에 부동자세로 섰다. 사단장은 앉으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걱정스럽게 말했다.


"지금 문화공보부에서 땅굴 견학이 매일 계획되어 있는데, 사단 땅굴이 어제밤 비가 와서 토사로 매몰되었다"는 것이다. 


땅굴 깊이는 약 40~50미터 정도 깊이로 계단으로 내려가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비가 많이 내리자 산위의 토사가 흘러들어가 매워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공보부에서 국방부를 통해 사단장에게 빨리 복구하라고 성화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당시 땅굴 위에는 시추 시험을 위해 시추 장비가 올라가 부지를 밀고 탐지장비를 설치해 놓고 실험하고 있었다. 


사단장이 물었다.

"대대장, 몇 일이면 복구되겠나?" 

잠시 고민하던 P대대장은 

"사단장님, 3일만 주십시요. 반드시 복구하겠습니다."

사단장은 잠시 P대대장을 쳐다보더니,

"오~케이"


사단장실을 나와 바로 대대로 향했다. 1 중대장과 2중대장을 대대장실로 불렀다.

"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들어. 사단장님 지시로 비상상황이다. 어젯밤 비가 내려 땅굴이 매몰되었다. 상급부대에서 땅굴 방문계획이 중단되어 비상이 걸렸다. 밤낮으로 작업하여 3일내로 완전히 복구해야 한다. 사단장과 약속했다. 


그래서 지금 즉시 전중대원을 데리고 지금 당장 땅굴로 이동하는데, 준비물은 횃불, 폐유, 질통, 삽, 곡굉이, 목장갑, 경계용 실탄,  중대원 수용이 가능한 24인용 천막, 수용 불가시 개인천막 준비, 취사는 추진, 중대별로 3시간씩 교대로 임무수행, 작업은 2중대가 먼저 시작한다. 휴식간 병사들 취침 보장, 컵라면 등 간식을 충분히 준비할것. 지금 즉시 이동한다. 이상!"


대대장은 2개 중대를 바로 투입하여 교대로 땅굴 토사를 퍼서 질통에 담아 밖으로 퍼날랐다. 이튼날 아침 현장을 가니 밤샘 작업으로 병사들이 무척 지쳐가고 있었다. 간식도 충분히 주고 환자는 열외시켜 치료하도록 했다. 간부들도 중간에 같이 동참하도록 했다. 


오후에 대대장은 주임원사로 하여금 큰 통을 준비하여 막걸리를 여러 말 가져와서 부었다. 또 김치와 두부, 편육, 새우젓, 소금 등을 비치하고 한 질통씩 지고 올라오는 병사들에게 막걸리 한 사발씩 마시게 했다. 물론 대대장도 운전병과 같이 질통을 지고 한 번 내려가면서 올라오는 병사들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 그래 정말 수고한다." 병사들은 대대장이 질통을 메고 나타난 것이 놀라고 밖에 나가서 막걸리 한 사발에 기분이 업되고 사기가 돋아 그 후 피로도 잊고  다람쥐 챗바퀴 돌듯이 열심히 오르내렸다. 대대장도 한 질통 메고 올라왔다. 


그날 저녁에  진도는 절반을 넘어 50~60% 정도 진척되어 가고 있었다. 잘하면 내일 저녁에는 완료가 가능해 보였다. 그리고 대대장은 중대장들에게 이번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중대마다 20 ~ 30명 씩 포상휴가를 조치하겠다고 선포하도록 했다. 그래도 다행히 토사는 마사토와 작은 바위 덩어리가 대부분이었다. 병사들이 취하지 않도록 통제하되 막걸리와 안주는 계속 조달토록 했다.


3일째, 사단장과 약속한 날이다. 땅굴로 달려가니 병사들은 거의 초죽음이 되어 가고 있었다. 3중대를 투입할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다. 공을 빼앗는 결과이기 때문이었디. 병사들을 일일이 두드리며 격려하고 간식을 더 준비해 제공했다. 


해가 넘어가고 땅거미가 깔리는 저녁, 사단장님도 현장을 방문했다. " 그래 대대장 고생한다. 오늘 완료 가능한가?" " 네, 밤 늦게까지 하면 가능합니다."  사단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시 병사들을 격려하고 떠났다. 밤 늦게 성공적으로 토사를 모두 퍼냈다. 바로 사단에 완료 보고를 했다. 그때 사단장의 "대대장 수고했어!" 이 한마디로 모든 일이 끝나버렸다.

 

대대장은 중대원들을 격려하고 철수 준비를 하여 부대로 안전하게 복귀토록 중대장에게 지시하고 부대로 돌아왔다. 그 당시 힘든 땅굴 작업을 수행한 대대 병사들에게 진심으로 그 노고를 치하하고 감사를 하고 싶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당시 같이 근무했던 병사도 있을 것이다. 86 ~ 87년 사이 20대 초반이면 지금쯤 50대 초중반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