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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14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14

 


          

        의암호반 북한강 자전거길,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전거길이라 생각된다

 


사람은 변화하지 못하면 스스로 몰락한다. 고지식한 고정관념에 빠진 사람은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다. 그래서 동물이나 식물이나 지구의 환경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면 멸종되어 왔다. 사람이나 국가나 민족도 변화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면 죽거나 아니면 노예로 전락하거나 했고 국가는 역사를 지속하지 못하고 강대국에 멸망당하고 흡수되었다. 민족도 마찬가지로 강한 민족에 흡수되어 언어도 전통도 문화도 사라져 버렸다. 


경험 많은 나이든 사람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마치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보수적인 사람처럼 개혁을 거부하듯이 변화를 싫어하는 것이다. 변화에는 새로운 사고와 도전이 필요하고 그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르 새로운 정보와 판단에 근거한다.


고대 지중해 일대 무역 최강국으로 성장한 카르타고는 신생 로마와 지중해 패권을 놓고 3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100년이 넘도록 로마와 벌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불리는데, 당시 에스파냐 총독이던 약관 29살의 한니발이 9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남프랑스를 지나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침공했다. 제1차 티치노 전투를 필두로 로마와 벌인 전투에서 한나발이 연전연승했다. 한니발의 주특기인 양익 기병을 이용한 포위전술에 로마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심지어 칸내 전투에서 로마군 7만여 명이 전멸당한 것이다. 


한니발은 포로로 잡은 로마군 중에서 로마 시민은 학살하고 동맹 도시 시민은 그대로 방면했다. 그는 로마연합 해체를 기대하고 있었다. 로마연합이라는 동맹만 해체되면 로마는 저절로 무너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후 16년 간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를 종황무진하면서 연전연승하면서 로마군을 괴롭혔고 정면 승부에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로마군은 지연전술로 대응했다. 다시말해 정면 승부를 회피하고 한니발 군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공격하면 후퇴하고 이동하면 뒤따라 다니는 전술이었다. 


당시 한니발은 카프카를 포위하였던 로마군을 공격하다가 잠시 약간의 기병을 데리고 수도 로마 성벽에도 나타났다. 수도 로마인들이 숨죽여 바라보는 가운데 백마를 탄 한니발은 유유히 성벽 주위를 돌다가 돌아갔다. 한니발의 부하들이 수도 로마를 치자며 공성전을 권유하였지만 거부했다. 자신이 없었는지 아니면 앞 뒤 앙면에서 적을 만나서 곤경에 처할 것을 우려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로마의 중추 신경에 모여 있는 수도 로마를 점령했다면 로마는 한니발에 항복했을 지 모른다. 그러나 한니발이 수도 로마를 공격하지 않은 것이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한니발은 돌아갔지만 수도 로마인들은 공포에 떨며 16년간 지내야 했다. 


그런데 스키피오라는 젊은 장수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본국을 침공하는 것이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쫒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원로원은 그에게 개인적이 자격으로 군대를 모집하고 카르타고를 침공하도록 허락했다. 그래서 시칠리아 섬에서 군대를 모집하고 훈련시키면서 스키피오는 한니발 전술을 연구한 끝에 지금까지 로마군 장수들이 사용하던 구태연한 전술과는 다른 새로운 전술을 개발했다. 즉 한니발의 양익 기병에 대한 대응책, 코끼리 부대의 공격에 대한 대응책, 전투 중 진형 변형과 교대, 부상자 후송 등에 대해서 철저한 준비와 훈련을 실시했다. 그리고 카르타고에 대한 상세한 정보 수집은 물론 인접 누미디아 동맹국과 연합도 성사시켰다.


드디어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스키피오의 4만 명의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압박했다. 그러자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에게 급히 전령을 보내  즉시 귀국하여 로마군과 대적하라고 지령을 내렸다. 그러자 한니발은 조국의 부름을 거부할 수 없어 5만 병력 중 정예병 1만 5천 명만 거느리고 배를 타고 이탈리아 반도를 떠났다. 


상황은 스키피오의 예상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동맹국 누미디아와 가까운 북쪽 국경 근방으로 이동하여 자마 평원에 진을 쳤다. 한니발은 급히 모집한 용병과 정예병을 포함 도합 5만 병력을 거느리고 스키피오를 추격했다. 자마 평원에 서로 대치한 가운데 중간 지점 언덕에서 두 영웅이 만났다.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였으나 합의점은 찿지 못했다. 따라서 두 영웅은 결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다음 날 결전을 벌이기로 했다. 


스키피오가 패전하면 4만 로마군이 전멸하눈 것으로 끝나지만 한니발이 패전하면 카르타고가 멸망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한니발은 이번 전투가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전투가 될 것임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다음 날 전투는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스키피오 로마군은 훈련한대로 부대 간격을 변화시켜 코끼리 부대를 통과시킨 다음 후방의 경보병이 각개격파하여 전멸시켰다. 중앙의 중보병끼리 대결하였으나 스키피오의 로마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부상자가 속출하고 진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부상자를 후송하고 후위의 고참병들이 교대하여 진형을 재구축한다. 그러는 사이 로마군 양익 기병도 스키피오가 예상한 대로 절대 우위의 전투력을 발휘하여 한니발의 기병을 밀고 들어가 흩어지는 적기병을 괴멸시켰다. 그리고 로마군 기병은 되돌아와 한니발 군의 측후방으로 밀려들어갔다. 그러자 한니발은 후방 200미터에 예비로 포진시켜두었던 자신의 정예병 1만 5천 명을 투입했다. 그러나 이미 전세를 기울기 시작했고 로마군의 무지비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결과는 한니발의 완벽한 패배였다. 


패전 후 한니발은 수 명의 기병을 대동하고 카르타고로  돌아갔다. 그리고  로마와 강화조약을 요청했다. 이로써 카르타고는 로마에 항복하고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그후 한니발이 카르타고 총리가 되어 전후 카르타고를 재건하려 했으나 반대 정적들의 무고로 로마 원로원에서 조사단이 파견되자 조국을 탈출하여 오리엔트로 망명했다. 그후 수십 년 후 카르타고인이 로마 지배에 항거하는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는 3년에 걸쳐 수도 카르타고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땅을 갈고 소금을 뿌렸다.


비록 한니발이 자마 평원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새로운 사고와 대응 전술로 대적한 스키피오의 로마군에게 패배하였지만, 그의 양익 기병을 이용한 양익 포위전술은 세계 전사에 길이 남아 있다. 


역사에는 영원한 승자가 없듯이 영원한 패자도 없다. 최고가 되었을 때 부지런히 자신을 갈고 닦지 않으면 반드시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 새로운 사고와 전술, 전략으로 승자가 되면서 자신은 패자가 되는 것이 인간 세상이다.  



우리도 변화하지 않으면 멸망의 길을 가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해방 후 미군정과 자유당 시대 국가 건설에 매진했고, 6.25 전쟁 후 장기집권을 획책하던 자유당 정권이 4.19 학생혁명으로 몰락 후 혼란스러운 국정이 지속되자, 5.16 군사 쿠테타가 일어났다. 


제3공화국은 개혁을 통해 경제건설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냈다. 제3공화국이 유신을 선포하고 장기집권을 추진하다가 박정희의 암살로 종지부를 찍고 전두환의 신군부가 들어섰다. 신군부는 하극상과 쿠테타로 권력을 잡았고 정통성과 명분에서 비난당하다가 폭압으로 광주 사태가 일어났다. 그를 이은 노태우 정권를 거쳐 문민정부와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이루어졌고 결국 문민정부를 통해 군사통치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를 이루어냈다. 


지금의 풍요는 경제건설로, 지금의 민주주의는 피빛으로 얼룩진 민주화 운동으로 일구어냈다. 보수든 진보든 우리가 살아갈 길은 적패청산과 대대적인 개혁이다. 그런 변화와 개혁을 일구어내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나락으로 떨어질 공산이 큰 현시점이다.

 









북한강 철교에서 다시 출발하여 금남리로 가기 위해 주행하는 모습.

끝단 쉼터로 내려가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대대장 시절 이야기는 계속된다.


사단 사령부 작전과에서 금학산 전차 기동로 작업 지시가 내려왔다. 중턱 고개길에서 하단부를 돌며 대대 근방까지 기동로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아군 전차가 철원 평야를 바로보며 적 전차를 저지하기 위해 기동로를 따라 기동하면서 적 전차를 격멸하는 것을 목표로 전차 진지와 기동로를 구축하는 작업이었다. 


예산도 없이 일단 장비와 폭파로 산허리를 돌며 기동로 작업을 3중대장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장비 작업과 폭파 작업이 병행되면서 기동로 개설 작업이 시작되었고 수 개월 만에 관통시켰다. 그런데 철원 지역에서 금학산은 글자 그대로 명산이다. 작업 중 산아래 마을 사람들이 여러가지 사유로 여럿 죽었다. 그런 명산을 허리를 잘랐으니 산신령이 노하여 액운을 내렸는지도 모른다.



대대는 상급 부대에서 각종 검열, 지도 방문, 감사, 조사 등으로 방문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방문자에게 줄 조그만한 선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주임원사의 조언을 듣고 철원 지역 야산에 많이 자라는 것으로 사슴이 먹고 자란다는 '삼지구엽초'를 여러 박스를 구하여 방문자에게 한 박스씩 선물토록 했다. 


유명한 삼지구엽초는 겨울철 사무실에서 큰 주전자에 넣고 끓이면 좋은 차가 된다. 그 차를 많이 마시면 수 백 마리 암사슴을 거느리고 사는 숫사슴 처럼 힘이 솟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른 선물보다 삼지구엽초 선물을 모두가 고마워했다.




                                               강촌 다리밑에서 바로본 의암댐 방향


사단 작전 참모는 선배, 군수 참모를 비롯한 다른 참모는 대부분 일반 출신 장교들이었다. 작전 참모는 생도 시절부터 똑똑하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1차 진급에서 떨어지고 다음 해에도 또 떨어졌다. 너무 똑똑해서 날이 넘었는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전임 사단장의 배려로 마지막 3차에 겨우 진급하여 나중에는 장군으로 진급하고 별 셋까지 달고 요직인 00사령관까지 역임했다. 전역 후 정당에 가입하여 전국구로 정치인이 되었지만 별 족적은 남기지 못했다. 


군수참모는 머리가 좋고 다혈질 성격으로 일반 출신 참모들 중에서 최고참이었다. P대대장은 군수참모를 형님처럼 깍듯이 모시며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했고 대대의 어려운 문제는 사단장 옆에서 잘 조언하여 유리하게 이해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품성이 바르지 못한 문제로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주동이 되어 예하 부대 지휘관을 골탕먹이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그래서 대대장은 군수 참모를 조심해서 대하면서 육사 보다 일반 출신에게 더 친절하게 대하곤 했다. 그러나 군수 참모는 대령을 달지 못하고 조기에 전역했다.




 


필승 OP는 철원 평야 지대에서 감제가 용이한 100미터 높이도 안되는 GOP 선상에 있는 유일한 고지다. 그 고지 주변에는 무명 묘지가 산재해 있었다. 어느 날 상급 부대에서 필승  OP에 전광판( 전기 투광등으로 글씨를 만들어 북한군에게 보이는 일종의 광고판)을 설치하도록 지시가 내려왔다. 크기는 가로가 50미터 높이가 15~20미터 정도는 되었다. 그것을 설치하기 위한 부지 작업을 위해 도자가 투입되어 산을 깍아내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부지가 거의 완성되어 갈 무렵 갑자기 사단에서 연락이 왔다. 필승 OP에 있는 한 무명 묘지 주인이 자기 조상 묘지가 없어졌다며 사단장에게 민원을 강력하게 제기한 모양이었다. 가족들이 몇 일내로 이곳으로 와서 현장을 확인한다고 했다. 아마 도자 작업을 하면서 무명 묘지를 여러 개 밀면서 없어진 모양이었다. 사단장은 짜증스럽게 왜 이런 민원이 발생하도록 하느냐고 나무랐다. 그러나 대대장이 사전 작업 전에 장비 감독관에게 분묘 흔적이 나타나면 출토물을 수거하여 따로 가묘를 만들어 놓도록 미리 지시해 놓았다고 말씀드리고 대대장 자신이 가족을 직접 만나 알아서 모두 처리하겠다고 보고했다. 


며칠 후 가족들이 대형 버스 한 대에 여러 명이 가득타고 무리지어 나타났다. 대대장이 전방 검문소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버스에 올라 우선 가족들에게 큰 절을 했다. "전광판 설치를 위해 부지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작업 간 무명 묘지를 밀었고 모두가 대대장 본인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무명 묘지는 모두 위치별로 출토물을 모아 다른 곳에 가묘를 만들어 놓았으니 일단 현장을 가서 보시고 여러분들께서 원하시는대로 모두 원상회복해드리겠다"며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잔뜩 흥분해 있던 가족들이 약간 조용해졌다. 그리고 대대장이 인술하여 현장으로 버스는 달려갔다. 


현장에 도착한 가족들은 지역을 둘러보고 새로 만들어 놓은 가묘를 살펴보았다. 통곡하고 울고 불고하면서 그들 조상에게 제를 올리고 빌었다. 그리고 대표와 같이 원상복구 문제를 협의했는데, 새로운 묘를 근방에 만드는데, 상석은 물론 둘레석까지 요구했다. 그렇게 하기로 합의하고 기간까지 정하고 새로운 위치도 깃발로 표시하여 정했다. 


가족이 돌아가고 대대장은 작전과장을 데리고 지포리 석재 공장에 가서 가족들이 요구한대로 거금을 들여 석재를 주문했다. 얼마 후 현장에는 그들이 참석하에 요구하는대로 새로운 묘지를 번듯하게 만들어 주었다. 무명 묘지가 일약 큰 묘지로 변모했던 것이다. 그들은 안양에 사는 의사 출신이 포함된 가족들이었다.


사실 우리 나라 묘지는 헬기를 타고 아래 산하를 바라보면 묘지로 인해 너무나 흉칙스럽다. 산마다 종기가 난 것처럼 흉물스럽게 묘지들이 산재되어 있다. 살아있을 때는 천시하고 죽은 뒤에 묘지를 거창하게 만든다고 효자가 돠는 것은 아니다. 이는 주로 졸부들이 하는 짓으로 풍수니 뭐니 하면서 온 산 곳곳에다가 거창한 묘지를 만드는 것은 이제 바뀌어야 할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국가에서 기존의 모든 개인 분묘를 일정한 공동 묘지로 이장시키거나 화장토록 법으로 규제하고 주인 없는 무명 묘지는 공고 후 모두 철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앞으로 분묘를 금지하고 화장이나 수목장 등으로 바꾸도록 법제화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