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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9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9

 


          

의암호반 북한강 자전거길,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전거길이라 생각된다

 

어느듯 나는 의암댐을 지나 강촌에 도달했다. 강촌은 서울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던 곳이다. 휴일이면 강촌역에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렇지만 경춘선은 항상 만원이었다. 이 다리를 건너 국도에도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서던 기억도 난다. 

 

옛날에는 소양댐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교량이 바로 소양교였는데 2차선 교량이었다. 군대 입대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소양교 다리를 건넜고, 전방으로 가는 대부분의 차량이 소양교를 통과했다. 소양댐에 가려도 소양교를 지나가야 했고, 2군단 사령부나 양구, 화천, 춘천댐, 화천댐, 사창리를 가려도 소양교 다리를 지나야 했다. 전방의 군인 가족은 물론 춘천으로 오는 모든 사람이 소양교 다리를 건너야 했다.


의암호 중간에 중도라는 섬이 있는데, 한창 개발중이다. 아마 춘천시에서는 중도에 대규모 위락단지를 조성할 계획인 모양이다. 


춘천은 막국수, 닭갈비가 유명하고 한방 삼계탕도 유명하다. 춘천은 서울 사람들이 주말이면 자주오는 곳으로 서울 바람이 강한 도시다. 생활수준이나 사고방식이나 서울 사람과 비슷한데, 춘천 사람은 서울로, 서울 사람은 춘천으로 와서 즐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음식점, 술집, 찿집은 물론 도심과 호수 주변 한적한 곳에는 모텔도 많다.

 

의암호 일대는 물론 소양댐 가는 길, 춘천댐 가는 길 주변에는 음식점도 많고 찿집도 많은데 특히 춘천댐 아래는 매운탕집이 많다. 그래서 휴일이면 많은 사람들이 찿아간다. 또 외지인들이 뿌리는 돈에 맛들이면 개인이나 가정은 대부분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P소령의 대대장 시절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미연합사에서 3년이란 세월이 꿈같이 흘렀다. 아이들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대방동 아파트가 서울 생활의 삶의 보금자리가 되어 세상을 보는 눈을 뜨이게 해주었다. 대방동 아파트에는 동기생도 여럿 같이 살았고 P소령 아파트 통로는 모두가 고참 영관 장교들이었다.


그 당시 아파트에는 반상회가 있었는데, 통로별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집집마다 살림살이 경쟁이 벌어지고 접대하는 수준이 점차 높아져갔다. 같은 계급이면 고참이나 신참이나 비슷하게 사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했다. 그래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군인아파트는 출신별, 기수별, 병과별 모두가 혼재되어 모여 살기 때문에 서로 모든 면에서 비교 대상이 되었고, 무시당하거나 험담을 하거나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서 부부 싸움, 자녀 탈선, 금전 거래, 불륜, 가정 파탄 등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또 이웃에게 같은 동기생이란 이유로 오해를 받는 경우도 많고 억울한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도 많다. 부인들의 인격, 품성, 출신 지방, 학력이나 배움의 정도가 극과 극인 경우도 많고, 남편 계급만 믿고 후배들에게 경우없이 굴며 설쳐대는 부인들은 차마 눈 떠고 보기 민망할 정도인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앞으로는 다른 곳에 가더라도 가급적 군인들이 모여 사는 곳을 피하고 싶었다.


한미연합사 근무 3년이 되자 육대 정규 과정을 뽑았는데, P소령은 전방 보병 사단만 돌아다녔기 때문에 평정도 불리했고 경력도 타 동기생에 비해서 밀렸다. 그래서 정규 과정에서 탈락되고 참모과정을 가기로 결정되었다. 그것으로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령 1차 진급자도 정규 과정에서 나올 것이고 장군도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다. 이미 동기생끼리 1차 경쟁에서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육사 출신은 동기생과 처음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회복이 매우 어렵고 당시 권력층의 힘센 후원자가 없으면 대부분 불가능하다.


참모과정 교육 중 중령 진급이 발표되었다. 중령까지는 어디서나 열심히 하면 진급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동기생 중에는 중령도 선발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은 자존심에 너무나 큰 상처를 입고 대부분 조기에 전역을 하여 군무원이 되거나 호주, 미국, 캐나다 등 해외로 이민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마음 속에 조국에 대한 애정이 분노와 배신감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중령은 진급했지만 정규과정 탈락으로 이제는 장군은 고사하고 대령이라도 달아야 하는 절박한 처지가 되었다. 중령을 달아도 대령을 못다는 사람은 더 많이 나오는 것이 군의 계급구조다. 그래서 대략 20~30% 정도는 대령을 못 달고 도중 탈락한다. 아마 지금은 진급 비율이 더 떨어진다고 알고 있다.


이런 이유로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21사단 중대장 시절에도 시행되던 유신 사무관에 지원을 했다. 어차피 장군이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 사무관으로 나가 일반 공무원으로 전향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발에 탈락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정치권이나 권력층, 그리고 최소한 2성 장군 이상 육본에 입김이 작용한 동기생은 대부분 선발되고 그냥 기다리던 사람은 대부분 탈락했다. 당시 동기생 중 지원자가 거의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당시 군에서 장래 촉망되던 우수한 동기생들도 많이 나갔다. 그것은 누구나 장군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진급이 부담되고 전후방을 다니면서 열악한 군생활을 피하고 안정된 정부 부처 공직생활이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후 그들은 행정고시 패스 사무관들과 기존 공무원들 사이에서 피나는 경쟁을 하면서 공무원 세계에 안착하려 노력했고,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목민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도 많았지만, 기존 공무원 빰치는 수준의 비리에 연루되거나 무책임과 무능력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망친 사람도 있다. 그들은 지금은 대부분 공직사회에서 은퇴했지만, 군인 전역자보다 낳은 삶을 살고 있는데, 서울에서 큰 집에 호사를 누리며 노후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진해 육대에서 참모과정 6개월을 마치고 용인 제3군 사령부 작전과로 배치받았다. 당시 군에서는 작전계획 5027에 대한 전술토의가 주기적으로 열려 작전과에서는 밤을 새워 지도를 준비하였는데, 적과 아군 진지가 표시된 대형 지도에 작전계획을 표시하고 부대를 표시하고 집결지, 공격로, 역습로 등 토의용 지도를 만드는 데 밤을 지새웠다. 


당시 하나회 출신 작전처장에게 과장이 매일 구박을 당하곤 했다. 갖가지 트집을 잡아 궁박을 주고 밤 늦게까지 퇴근도 않고 고통을 주었다. 또 전화벨이 한 두 번 올리면 전화를 받아야 하고 만약 받지 못하면 과장이 불려가 혼이 났다. 그래서 전화기 옆에는 항상 누군가 대기해야 할 정도였다. 악몽같은 작전과에서 10개월 정도 근무하다가 드디어 6사단 대대장으로 명령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