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8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8

 


          의암호반 북한강 자전거길,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전거길이라 생각된다

 

 

15사단 스토리는 계속 이어진다. 


며칠이 지나자 명령이 내려왔다. 명령지를 본 대대장은 깜짝 놀라며 안된다면서 명령을 취소하라고 했다. 자기와 같이 더 있다가 대대장 끝나고 가라고 했다. 사실 사단이나 연대에서조차 대대장을 손가락질하면서 비웃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융통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대 참모가 찿아와서 도움을 요청하면 정식 공문을 가져오라고 하면서 일절 도움을 주지 않았다. 사단 참모들도 외골수 대대장을 비난했다. 알고보니 이런 모든 이야기가 평소 대대참모들에게 욕설과 구박, 결재판 날리기, 발차기를 그치지 않았던 대대장에 대한 불만을 대대 참모들이 나가서 토로한 것이 모두 소문으로 퍼진 것이었다.


대대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p소령은 서울 용산에 있는 한미연합사를 방문했다, 모실 부장을 면담했는데, 소대장 시절 모시던 단장이었다. 그 사람은 전두환 대통령 동기생이었는데, 6인방 중 한사람이었다. 하나회를 비롯하여 5공 공신들이 너도나도 별 넷을 달고 천지를 모르고 호사를 부릴 때, 부장은 출신 지방이 다르다는 이유로 별 하나를 달고 연합사에 근무했다. 나중에 결국 오랜 기다림 끝에 별 두 개를 달고 주미무관으로 파견되었다가 그후에는 전역하고 외국 대사까지 지냈다. 당시 그 사람의 위세는 대단했다. 한국군 장군들은 물론 미군조차도 대통령과 동기생이란 것을 알고 눈치가 있어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부장은 p소령을 보더니 반가워했다. 인사를 드리고 보좌관 사무실로 나와서 전임 보좌관과 인계인수하고 있는데, 사단 인사참모한테서 연락이 왔다, 명령지를 본 사단장이 '사단 영관 장교를 사단장 허락없이 누가 함부로 명령을 내도록 했느냐'며 육본 담당자와 p소령 등 관련자를 조사하고 주도자는 처벌을 하라고 엄명했다고 했다. 


p소령은 대대장의 농간으로 생각하고 "제가 사단으로 가서 처벌받겠습니다." 라고 인사참모에게 말하고 사단을 좀 다녀와야겠다고 부장과 보좌관에게 말씀드리고 다시 15 사단으로 갔다. 대대장을 만났더니 P소령을 보고 웃으면서 조롱했다. "그봐, 내가 가지말라고 했잖아."하면서 너 꼴 잘됐다는 식으로 바라보았다. 다음날 다시 사단 인사참모 전화가 왔다. P소령은 사실대로 모두 이야기했고 육본 담당자는 아무런 책임이 없고 처벌받는다면 P소령이 자신이 받겠다고 했다. 인사참모가 그대로 사단장에게 보고했던 모양이다. 다음날 인사참모가 다시 전화가 왔다. 사단장께서 "이미 명령난 것이니 그대로 하라"고 지시했다고 연락이 왔다. 


나중에 사실을 알고보니 사단장이 비서실장에게 p소령에 대해서 자세히 물었던 모양이다. 이에 그 동기생 비서실장은 사단장에게 "그 P소령은 동기생 중에서 가장 신망받고 의리가 있으며 희생정신이 강하고 정의감이 넘치는 자신도 무척 좋아하는 동기생'이라고 사단장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했던 모양이다. 그랬더니 사단장은 빙그래 웃으면서 인사참모를 불러 그렇게 지시했다고 했다.



 

 


p소령은 이런 모든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고 양식을 먹으며 근무한다는 한미연합사로 다시 떠났고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서울로 나왔지만 p소령은 은행 입출금도 할 줄 몰랐고 삼각지 육군 본부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처형이 골라준 보광동에서 전세로 살다가 반 년 후 대방동 군인아파트가 완공되자 그곳에 입주하여 안정적인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전방에서는 돈이 필요없던 p 소령이 당장 경제적인 여러움을 겪기 시작했다. 서울은 사람이 움직이면 돈이 필요했다. 차비, 점심값, 친목, 접대 등 모든 게 돈이 들지 않는 날이 없었다. 당시 P소령이 아내에게 받던 하루 용돈이 1만 원이었다. 그것도 한 달이면 25만 원의 거금이다. 아내가 쪼개고 쪼갠 가운데 제공했던 용돈이지만 용돈은 사용하기 나름이다. 출근은 연합사, 국방부 버스를 타든지 육본 버스를 타던지 하며 되었지만, 퇴근시에는 시간이 맞지 않아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야하고 점심값, 담배까지 피우는 입장에서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점심 시간에는 스넥바에서 핫도그로 떼우기도 하고 삼각지 대구탕 집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누군가 만나면 사정은 달라진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만나는 것도 불편했다. 중대장 시절 같이 근무한 한 하사관이 찿아왔을 때는 대구탕 집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값도 싸고 푸짐했고 소주도 한잔 가능했다. 그런데 그 후 점차 사람을 만날까봐 삼각지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주머니 사정이 빈약하니 누군가 만나 맥주라도 한잔 하자고 하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제적 문제를 인식했지만, 여유 돈을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두 아기를 키우면서 서울 생활을 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대구 집에라도 가는 달이면 여차없이 마이너스가 되었다. 그러니 부동산 투자는 꿈도 꾸지 못했고 봉급은 사용하기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다.


겨울, 국방부에 근무하시는 전임 대대장도 자주 찿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15사단 소식이 전해져왔다. 대대에서 큰 불이 나서 병사가 한 명이 죽고 창고 물자와 내무반 총기 등이 모두 불탔다고 했다. 이유인즉, 일직 사관들이 일직 사령실에 모여 순찰도 마다하고 고스톱을 친 모양인데, 그 사이 의무실에 고참병이 술을 반입하여 먹고 자다가 난로가 과열되어 불이 천정으로 옮겨 붙었고 졸던 병사가 질식사했다는 것이다. 불은 막사 전체로 번졌고 물자와 총기가 모두 불타버렸다는 것이다. 지난번 대대장이 육대생들이 방문했을 때 대대 앞 냇가에서 개고기를 먹었다는 시실이 떠올랐다. 안타까운 마음에 씁쓸한 생각이 가득했다.


그런데 전임 대대장이 국방부 00계장인데, 당시 그 자리는 무조건 진급하는 자리였다. 00계장으로 갈 때도 국보위에 있던 전임 사단장의 입김 작용이 컸고 또 당시에는 합참의장을 하고 있었으니 진급은 따다 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느날 새벽에 국방부에 불이 나서 9층 합참이 모두 불타버렸다. 공군 장군 운전병이 퇴근이 늦자 보좌관 실에서 라면을 끓인다고 커피 보트에 물을 넣어 전기를 커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공군 장군이 갑자기 나가자며 문을 나섰다. 그러자 운전병은 커피 보트를 잊어버리고 황급히 나가서 장군을 집으로 모셔다주고 자신은 국방부 수송부로 바로 들어가 잠을 자버린 것이다. 


새벽에 과열된 커피보트가 천정으로 불이 옮겨붙어 합판으로 칸막이를 만든 합참 사무실 전체로 옮겨붙어 타버린 것이다. 작전 계획 등 비문은 물론 합참의 모든 서류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사고자는 아니지만 전임 대대장은 관리책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전임 대대장은 바로 신속히 합참 사무실을 복구했다. 그러나 그 꼬리표는 보이지 않게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 해 진급 발표에서 꼭 진급한다던 전임 대대장이 비선되고 말았다. 통곡하며 울어도 소용이 없었다. 너무 기대했기 때문에 슬픔도 컸다. 그 후 시간이 지난 다음 전임 대대장을 찿아뵈었다. 그러나 대대장은 전혀 사기를 잃지 않고 '다음해는 반드시 진급될 것'이라고 P소령에게도 당당하게 장담했다. 그러나 다음해 진급자 명단에 대대장 이름은 역시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된다는 자리에 보직되었지만 두 번이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전임 대대장은 중령으로 전역하시고 지금도 잘 지내고 계실 것이다.


결국 후임 대대장도 대대 화재 사건으로 보직해임되어 육본으로 왔으나 이미 자신의 군생활이 끝난 것을 알고 부패한 상급자와 충돌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다가 P소령이 있는 연합사로 전입와서 같이 근무하게 되었지만 얼마되지 않아 전역했다. 전역 후 영창악기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홧병이 생겨 얼마가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어쩌면 인간 세계의 부도덕성과 맹렬하개 싸우다가 자신의 삶을 짧고 굵게 살다 간 한 정의로운 군인의 일생이었다고 생각된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 싶다.   


15사단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다음은 6사단 대대장 시절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