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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6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6

 


          

의암호반 북한강 자전거길,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전거길이라 생각된다

 

 

나는 후손들에게 정직하고 착하게만 살라고 말하지 않겠다. 로마인처럼 경제를 알고 돈이 무엇인지, 돈의 흐름을 알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라고 말하고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를 가르치고 무장시키는 것이 생존의 첩경임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착하게 바르게 시키는대로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돈에 대해서 가장 무지한 부류의 집단이 바로 군인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갖지 못한 자는 인간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하층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보다 재물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적이지 못하고 무지비하고 비인간적이며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또 권력자와 가진자가 야합하여 갑질과 위력 앞에 갖지 못한 대부분의 하층민은 평생 노예처럼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손주


그래서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을 단단히 무장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인간은 누구나 탐욕스럽고 이중적이며 자신의 부족한 점은 보이기 싫어하고 화장과 옷, 신발, 언변, 가식 등으로 가면을 쓰기 때문에 내면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겉만 보고 자신과 비교하여 가난한 자는 멸시하고 무언가 조금만 달라도 싫어하고 힘없는 자를 노에처럼 부리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나는 자본주의적 인간을 싫어한다. 만남도 거부하고 연락도 하지 않는다. 이름을 남기고 싶지도 않다. 위선과 가식 덩어리 인간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악산 입구



P대위의 15사단 근무 이야기가 이어진다.


P대위는 원주 군사령부에 들러 인사담당 장교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바로 15사단으로 가기 위해 원주를 출발했다. 춘천에 도착하여 다시 버스를 타고 화천을 거쳐 사창리를 지나 다목리에 도착했다. 다목리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삼거리에 있다는 대대를 찿아갔다. 


대대 입구 길목 양편에는 코스모스가 곱게 줄지어 피어 있었다. 대대 작전장교를 만나보나 1기수 선배였다. 생도 때 중대는 다르지만 1 ~2기수 선후배는 대충 얼굴은 알고 있다. 선배는 아는 얼굴이라 반색을 하며 반겼고 P대위도 안심이 되었다. 그 선배는 진급 예정자로 곧 육군대학 입교 에정이었다. 그런 오지에 올 후임자가 없어 애를 타우던 중에 P대위가 스스로 찿아온 것이다.


대대장에게 인사를 드렸다. 대대장은 9기 선배였다. 작전과장이 소개를 하자 대대장은 P대위를 보더니  

" 응, 그래 잘 왔구먼. 빨리 인계인수하도록 해! " 

이게 전부였다. 


대대장실을 나와 선배와 인계인수를 하면서 예하 연대와 직할대를 둘러보고 사단 지형도 살폈다. 


p대위는 아내에게 연락하여 이사 준비를 하라고 했다. 전임자의 이사 날짜를 고려하여 이사 날짜를 정하고 대한통운 차량을 신청했다. 작전과장 관사는 대대 입구 도로 옆 산 아래 새로지은 신축 관사인데 인사, 부대대장, 군수, 작전과장 네 가구가 한 곳에 살수 있도록 지은 연립관사였다. 관사 앞에는 다목리에서 흘러나오는 조그만한 개천이 흐르고 삼거리와 다목리를 연결하는 도로가 있었다. 


전임 선배 작전과장이 떠나고 작전과 선임하사를 양구로 아내와 같이 이사오도록 보냈다. 오후가 되자 개나리봇짐 같은 몇 개 되지도 않은 이사짐이 큰 대한통운 차량에 실려 아내와 어린 첯째, 선임하사가 덜컹거리는 차를 타고 도착했다. 아내는 새로 지은 새관사를 보고 좋아했다. 좁은 구형 관사에 살다가 이곳으로 오니 집도 넓고 공간이 넉넉해서 그런 모양이다. 이사짐을 내리고 대략 정리한 다음 본격적인 15사단 생활이 시작되었다.


비나 눈이 내리면 서울에서 다목리로 오는 버스가 수피령 고개를 넘지 못한다. 또 다목리에서 서울로 나가지도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도로가 너무 미끄러워 사고날 우려가 많기 때문이다. 15사단에는 고개가 많은데 땅속은 암반이 많고 겉은 진흙이라 차량 바퀴가 미끄러지면서 올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눈이나 비가 오면 차량 운행이 거의 불가한 실정이다.


대성산에서 뻗은 능선에 있는 말고개는 사단 주방어선인 FEBA 거점 선단으로 연대 OP가 있는 지역이다. 대성산 아래로 완만한 구릉지가 형성되어 철책선까지 넓은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임시 비행장을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길고 넓다. 이 평야는 좌측 3사단 지역인 육단리와 와수리 일대의 평야로 연결된다. 


철책선 지역은 좌로는 삼청봉, 우로는 적근산이 우뚝 서 있고 GOP를 따라 산지가 횡으로 연결되어 있다. 말고개에서 전방을 바라보면 좌로는 3사단이 보이고 우로는 7사단으로 넘어가는 길이 보인다. 또한 말고개는 방어에 최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전방이 넓은 평야 지대라 철책선이 보일 정도로  잘 관측되고 전방 출입의 가장 중요한 길목이기도 하다. 우측의 적근산은 GOP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고지대로 7사단과 인접해 있다. 


평야 지대에 소대 막사가 있는데 옛날에 공병 소대가 이곳에서 블럭을 찍던 장소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는 공막사였다. 그래서 삼청근로대가 입소하자 일부가 이곳에서 숙영하던 곳이다. 철조망으로 3중 울타리를 치고 조교들이 무자비하게 다루었다. 폭행은 물론 구타와 얼차려로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았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구금 생활을 했다.


적근산 정상에 진지 공사가 있어서 자재를 날라야 하는데 경사가 급하고 고지대라 차량이 오르내리기가 위험하기도 하고 운행이 어렵다. 옛날에는 산불이 나거나 차량이 굴러 흔적조차 찿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골재 등 공사 자재를 나르기 위해 연대에서 미군에 요청하여 시누크 헬기를 요청하여 헬기로 골재를 올리기로 했다. 


골재는 적근산 꼴짜기에 삼청근로대를 투입하여 돌을 망치로 적당한 크기로 깨서 자갈을 채집하여 이곳 소대 막사 앞 비행장으로 옮기면, 자갈이 담긴 포대를 큰 그물망에 담아 시누크에 메달면 헬기가 적근산으로 올리는 공사였다. 산 정상은 공간도 협소하고 바람이 세차고 방향도 종잡을 수가 없다. 시누크가 착륙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 공중에 10미터 정도 높이에서 떠있는 상태에서 골재를 실은 그물망을 내리면 병사들이 그물망 고리를 풀면 시누크가 다시 떠서 날아가는 방식의 운반 작업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시누크 헬기가 골재를 내리던 중 날개 하나가 정상 부근을 지나가던 고압선에 부딪히면서 날개가 뿌러졌고 헬기는 그대로 정상에 추락했다. 시누크에 탄 미군 조종사들은 무사했지만 앞에서 수기로 신호를 하던 병사가 부러져 날아온 날개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해버렸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후 한미 합동 사고 조사가 끝나고 시누크는 분해되어 가져갔다.



대대장은 2년 차로 매우 낙천적인 성향으로 사단장이 인정하는 우수한 대대장이라고 했다. 사단장 차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대대장 차가 항상 뒤를 따라 다니며 예하부대 지원할 사항이 있으면 즉각 조치하고 지원하는 등 인정받고 있는 대대장이었다. 사단 전체 회의 석상에서도사단장은 대대장을 거론하며 다른 대대장들이 본받아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대대장은 매일 저녁에는 헌병대장과 전방 모연대장 숙소에서 고스톱을 자주 쳤는데, 대대 일은 작전과장인 p대위에게 거의 일임하였다. 아침이 되면 출근하여 대충 업무를 보고받고 결재를 하고 바로 사단 사령부로 가서 참모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사단장에게 필요한 보고와 결재를 하고, 연대를 방문하여 연대장을 만나서 지원사항을 확인하고, 전방 GOP 철책선을 순찰하거나, GP에 들어가 문제점을 확인하는 등 주간에는 거의 대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연대장 숙소에서 한 번 전화로 p대위에게 업무를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다가 몇 개월이 지나자 사단장이 교체되었다. 신임 사단장에게 업무보고 하는 날, 문제가 발생했다. 사단장이 업무보고는 받지 않고 바로 야적창고에 가서 정리된 자재를 보고 대발노발하면서 "이따위 정리 상태가 뭐야?" 하면서 대대장 배를 지휘봉으로 쿡쿡 찔렀다. 사단장은 "내가 다시 확인할테니까 두부 짜른 듯이 정리해!"하고는 가버렸다. 


사단 최고의 대대장이 하루 아침에 가장 형편없는 대대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사단장이 초도 업무보고를 그렇게 별나게 하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아마 무슨 의도적인 행동으로 보였고 무슨 연유가 있음직한데 처음에는 그 이유를 대대장은 몰랐다. 창고 담장 참모인 군수괴장은 어찌 몸 둘 바를 모르고 대대장은 한숨을 푹 쉬었다.


대대장은 수불 행위를 중지하고 창고를 다시 정리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얼마 후 사단장은 전방을 가다가 불시에 또 야적창고를 기습했다. 대대장이 소식을 듣고 달려갔으나 이미 사태는 기운 상태였다. 자재가 두부 짜른 듯이 정리가 될수 없었다. 또다시 사단장은 대대장에게 빗발치는 비난과 함께 야단을 쳤다. 이에 대대장은 풀이 죽었고 어깨가 축 처졌다.




                                                 의암호 건너편 춘천 가는 길


 

15사단 전기는 사창리에서 사단 사령부를 거쳐 전방 지역으로 송전되고 있었는데, 전방에 운무가 끼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까치집이나 불량 애자가 터져 가끔 정전이 되곤했다. 그러면 사창리 분기점에서 고압선 스위치가 저절로 단락되면서 사창리 이북 지역은 모두 정전된다. 사단 사령부도 마찬가지다. 


회의 도중 정전이 되면 슬라이드가 꺼지고 비상발전기를 제대로 가동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러면 사단장이 대대장을 향해 야단을 치고 빨리 고치라고 호통을 친다. 그러면 대대장은 p대위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고치라 하고. p대위는 사창리 한전에 연락하여 다목리에서 스위치를 내리고 사창리에서 올린다. 그러면 사단 사령부만 전기가 일단 살아난다. 


그리고 전공들이 전방으로 가면서 구간을 나누어 스위치를 내리고 올리면서 하나하나 전주와 애자를 살피면서 전진한다. 고압 전기 스위치 연결시 불꽃이 튀는 모습만 보아도 어느 구간인지 전공들은 짐작을 할 정도였다. 대성산, 적근산, 심지어 GP까지 전진하다보면 까치집이나 겉으로 보기에 전혀 알 수 없는 실구멍이 난 불량 애자를 발견해야 한다. 전신주마다 오르기도 하고 눈으로 살피면서 찿아내야 한다. 전공들의 노고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곡절을 겪던 대대장이 결국 사단장의 노여움과 미움을 사서 사단장이 인사참모에게 대대장 보직해임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대대장에게도 전달되었다. 이처럼 지휘관에 따라 부하 장교를 최고로 만들거나 아니면 형편없는 바보로 만들거나 군대 인생을 끝장낼 수 있다는 점이 무서웠다.


대대장은 대대장 임기도 다되어 가는 때라 마음이 급했다. 전임 사단장이 최고라던 대대장인 하루 아침에 형편없는 대대장으로 하루아침에 낙인찍혀 보직해임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알고보니 사단 보안부대장이 신임 사단장에게 고자질한 모양인데, 아마 대대장이 보안부대장과는 불편한 관계였던 모양이었다. 보안부대장은 대대장이 매일 업무는 팽개치고 모연대장 숙소에서 저녁마다 고스톱을 친다고 고자질 한 것이다. 신임 호랑이 사단장은 대대장을 재물로 삼아 사단의 군기를 잡을 욕심이었다.


당시 국보위에 파견나가 있던 전임 사단장에게 대대장이 급하게 전화를 걸어 지금의 처지를 하소연을 했다. 한마디로 살려달라고. 그러자 국보위의 전임 사단장이 후임 사단장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잘 계시오. 나 000요. 그 대대장은 내가 인정하는 최고의 대대장이니 잘 돌봐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그러자 금방 꼬리를 내린 사단장은 인사참모에게 지시하여 대대장에게 빨리 이취임식을 하고 사단을 떠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대대장 이.취임식이 얼마 후에 열리고 대대장은 국방부로 떠나고 새로운 대대장이 왔다.



신임 대대장은 전임 대대장 1기수 후배로 다행히  p대위 선배였다. 신임 대대장은 매사에 철저하고 지독한 꼼꼼쟁이였다. 육본 설계실에 근무하던 장교로 위관 시절에는 경부고속도로 감독관으로 파견나가 너무나 꼼꼼하게 감독하는 바람에 공사 업자들이 진저리를 쳤다는 소문이 있었다. 모든 자재는 100% 검수가 원칙이었다. 목재 종류별 표준 시방서 대로 규격을 재고 자재 시험을 하고 아스팔트 포장을 곳곳에 구멍을 뚫어 시료를 채취하여 센티를 재고 불합격시에는 전구간을 재시공을 시켰다고 한다.


소문대로 대단한 자질을 발휘했다. 우선 대대에 납품되는 자재는 100% 대대장 자신이 직접 검수하겠다고 선언했다. 공문을 결재하면 첯 페이지 제목부터 끝까지 글자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읽고 또 읽어 본다. 또 첨부된 설계도를 펼치면 자로 일일이 재고 좀 틀린다고 육본 담당자에게 직접 전화로 지적하고, 모든 사단장 결재 대상 공문은 별도로 요약하여 사단장 보고용 8절지 종이로 미니챠트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당시는 이런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라 레로이 세트 장비로 차트 글씨를 만들어야 했다. 


p대위는 밤을 새우며 문관, 병사들과 같이 레로이로 챠트 작업을 해서 아침이 되면 오탈자도 고치기 전에 이른 아침에 출근한 대대장이 빨리 가져오라고 호통을 쳤다. 오전 내내 오탈자 수정이 반복되고 오전 늦게 사단 사령부로 간다. 사단 사령부에서 모든 참모들게게 일일이 협조 싸인을 다 받는다. 참모가 없으면 올때까지 또 받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기를 며칠을 보내고 사단장 결재는 대개 열흘 내지 보름 정도 걸렸다. 빨리 예하부대에 하달해야 한다고 해도 모두 싸인을 받아야 한다면서 막무가네였다. 지시는 지연되고 시기도 놓치고 업무 전척도가 답보 상태가 되기 일쑤였다. 


그러기를 6개월, 밤낮으로 미니챠드 만들기에 바쁘고 업무 추진은 잘 진행되지도 않는 상황에서 작전과에 숙식하며 라면만 먹으며 버티던 p대위가 어느날 결국 쓰러졌다. 의무실에 링겔을 맞고 겨우 회복을 했으나 대대자은 위로의 말은커녕 괴벽은 변함이 없었다. 참모들이 결재를 들어가면 재털이가 날아가고 결재판 던지기는 보통, 대대장실 출입문을 발로 차서 구멍을 내고 저녁마다 결산은 참모마다 일일이 업무를 점검하는 바람에 새벽 1,2시를 넘기기가 일쑤였다. 새벽에 퇴근한 대대장은 아침 일찍 다시 출근한다. 참모들도 미리 출근하여 대기한다. 대대장이 나가면 참모들이 슬금슬금 모여 족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모두 p대위보다 고참들이었다. 대대장이 들어오면 운전병이 멀리서 크락션을 울리는데 그러면 참모들이 재빨리 사무실로 뛰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