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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3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3

 


 

          의암호반 북한강 자전거길,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전거길이라 생각된다


인간의 마음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듯하다. 달면 삼키고 써면 뱉는 것처럼, 자신의 영달과 자손만대의 부귀영화를 위한 길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윗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고 뇌물을 바치고 아부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사람이 진실로 자신을 존경하고 따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에 반대급부를 주기 마련이다. 그래서 출세하는 사람 대부분은 이러한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반대로 고지식하고 상급자에게 바른말만 하고 아부 못하고 뇌물을 바치줄 모르는 사람은 어디서나 출세하기 힘들다. 이것은 고대나 현대나 마찬가지다. 전자는 유명한 고과대작이나 권력자가 많고 후자는 보통 사람이나 하층민, 의지대로 행동하는 애국 지사나 의사들이 많다. 


그래서 권력자나 고관대작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은 누구나 같은 심정이다. 권력이 주는 다양한 이점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은 피를 부르기 마련이다. 권력은 나누지 않고 독차지하는 것이 가장 인간들이 가장 바라는 심정이다. 그러려면 반드시 최고 권력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최고 권력자와 자신보다 윗 상급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고 비위를 맞추어야하기 때문에 자유롭지 않아 만족하지 못한다. 또 권력은 시기나 때를 잘못 만나거나 줄을 잘못서면 정적에게 피를 보게 되고 가문의 멸문은 물론 목숨까지 잃을 수가 있다. 동양에서는 3족이나 9족까지 멸문을 당했다. 


그러나 재물을 가진자는 권력에 못지 않게 이점도 많고 자신만의 영역 안에서 소욍국을 만들어 황제처럼 살 수 있으며 권력자들을 재물로 포섭하여 초법적 지위를 누리며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가면서 불법적인 재산 상속과 세습도 가능하다. 오늘날 종교인들이 종교 권력의 치부와 세습을 추구하는 모습, 또 요즘 우리 사회에 더러운 양심과 치부를 보이고 있는 많은 기업의 총수 및 일가 등 가진자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고대 로마 시대 최고의 권력과 부귀를 누리던 로마인들은 어떻게 2천 년 가까운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을까. 난 그 이유를 들자면 무엇보다도 로마인의 훌륭한 정치 시스템, 지도층의 자발적인 헌신, 법과 제도에 의한 철저한 통치, 변화에 신속히 적응하고 변화하는 임기응변 능력, 약속과 신뢰를 최우선시하는 사회 정신, 그리고 관용과 포용이라고 생각한다. 


로마인은 적을 끌어안고 동화시켜 로마화시키고 로마 시민권을 주어 제국 로마의 통치 영역을 확장하고 자신들의 문화와 문명을 전수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그리스인과 달리 귀천을 가리지 않고 능력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했으며 공화정이라는 거의 완벽한 정치 시스템을 만들어 강대국 카르타고와 3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래서 카르타고 식민지를 흡수했고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으며 지중해 최강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래서 로마는 많은 영토가 늘어나고 막대한 부가 흘러들어가자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경제적으로 많은 변화가 초래되는 데, 빈부차가 심화되고 농촌이 몰락하면서 실업자가 대량으로 늘어나는 등 사회적 불안 현상을 초래하게 된다. 또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구심점 역활을 하였던 원로원이 절대권력을 누리며 권력과 부를 독차지하게 된다. 이에 개혁을 추구하던 그라쿠스 형제가 살해되고 민중파를 대표하던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을 끝내고 원로원파의 폼페이우스와 패권을 겨루어 결국 ㅍ로살로스 회전에서 최후의 승리하게 되고 그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다가 갑자기 원로원파와 반감을 가진 부하 군단장 출신들에게 암살당하게 된다.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그 뒤를 이은 아우구투스가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화파를 필리피 회전에서 격파하고 승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경쟁자였던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로마에 반기를 들자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제거하고 로마 시민 제일인자가 되어 제정을 구축하게 된다.


카이사르에 이어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하였기에 로마는 그후 오현제 시대를 맞이하여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로마 제국에 비축된 국력이 정치적인 불안과 지도층의 타락, 그리고 야만족의 칩입 등으로 점차 그 국력이 소진되다가 로마 제국은 결국 동서로 분리된다. 그후 서로마가 먼저 멸망한 뒤에도 동로마는 이슬람족과 야만족의 침공을 견디내며 생명을 존속하다가 동로마가 마지막 망할 때 까지는 거의 2천 년에 가까운 역사를 이어간 것이다.


국가는 백성들의 피와 눈물을 먹고 자라고 성장하지만, 한국 사회의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삼성과 현대가 창업자의 피눈물 나는 노력도 있었지만 정권의 후관을 얻지 못했다면 오늘날 같은 대기업이 딜 수는 없다. 정권도 대기업과 야합하여 자신들 권력 유지에 이용했고 국민의 피와 눈물을 나누어 먹으면서 자란 것이다. 조잡한 제품이라도 국산품 애용하기, 국가 재정을 퍼부어 전국민들이 휴대폰을 무료로 개통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등 많은 혜택을 받았다. 그래서 오늘날 삼성전자가 있고 현대자동차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총수 일가들이 불법을 저질러도 법망을 피해가는 것은 그들의 뇌물을 먹은 정치권, 법조계, 언론계 등 사회 지도층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라나 기업이 망하는 것이 지도층과 총수의 부패로 내부적인 병리현상이 심화되다가 외적의 침입이나 다국적 기업의 공격이 병행되면 바로 망국으로 가는 것은 뻔한 이치다.


 

 



                                                 소양 제2교와 아파트 전경

 


폭염이 내리쬐던 지난 7월 말경 주말, 마지막 9차 장거리 주행을 떠나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나 단단히 준비했다. 자전거를 점검하고 복장과 앞뒤 안전등, 블랙박스, 얼음 음료수, 안전장구를 챙겨 5시 20분 경 집을 출발하여 호평역으로 갔다. 주말이지만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5시 47분 호평역에 도착한 춘천행 지하철을 탔다. 부지런한 자전거족 몇 명이 이미 타고 있었고 나는 한쪽에 자전거를 거치하고 주변 경치를 구경하며서 가다보니 40여 분만에 춘천역에 도착했다.


춘천은 내가 좋아하는 호반의 도시다. 사실 서울을 떠날 때 이사를 춘천으로 하려고 검토했지만 서울과 너무 멀다며 마누라가 반대해서 포기했던 적이 있다. 중동부 전선에서 후방으로 나오면 반드시 춘천을 거쳐서 지나간다. 업무차 방문도 많았고 친지도 살고 있고 지인들과 여러 차례 이곳으로  놀러오기도 했던 추억이 서린 도시다. 의암호나 춘천호 주변에 아담한 주택에서 노후를 보내는 꿈도 많이 생각했다.

 


 

 

누구나 혼자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보면 눈에 보이는 지역이나 사물마다 그 지역이나 사물과 연관된 지난 이야기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이 통상이다. 춘천 시내도 과거와 달리 많은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냥 풍광 사진만 보며 달리는 이야기만 하면 지루할 것 같아 가상된 스토리를 옮겨볼까 한다.

 

그래서 의암호 순환 자전거 도로를 달리면서 지난 시대를 거쳐간 한 육군 장교 P대위의 현역 시절의 추억 이야기 중 일부다.



지난 수십 년 전 현역 시절, 육사를 졸업한 P대위는 소대장 등 초임 장교 시절을 지내고 중위 말년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고급 군사교육 과정인 고등군사반에 입교했다. P대위는 6개월 간의 고등군사반을 1등으로 수료하고 양구 북방에 있는 전방 21사단으로 중대장 명령을 받았다. 명령을 받은 후 어느날 아침 일찍 신혼이라 단출한 이사짐을 미리 신청한 대한통운 차에 싣고 아내와 같이 출발, 이곳 춘천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양구로 가기 위해 오음리로 가는 길을 접어들었다. 오전 내내 고속도로를 달려온지라 대한통운 기사 아저씨도 무척 지치는 모양이었다. 


당시 오음리는 소양댐보다 높은 고지대에 위치한 곳으로 월남전 당시 파월부대가 이곳에서 훈련을 받던 곳이라고 했다. 오음리로 넘어가는 도로는 비포장 도로라 차량은 심하게 덜컹거렸다. 몇 개 되지도 않는 이사짐은 짐칸에서 춤을 추고 소양호를 따라 산을 타고 구불구불 만들어진 도로는 아무리 돌아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 건너편 눈앞에 보이는 도로가 30분 이상을 돌아야 겨우 도착하는 지독한 길이었다. 


거의 2시간 이상을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달려서 고개를 넘으니 저 멀리 양구 시내가 보였는데, 건물 중 흰색깔의 군인 아파트가 눈에 보였다. 아파트 건물을 보니 그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알고보니 양구에 위치한  2사단 군인 아파트였다.


양구에 도착했으나 관사가 준비된 것도 아니다. 기사 아저씨는 빨리 가야 한다고 해서 일단 장교 비오큐에 짐을 내렸다. 기사 아저씨를 전송하고 관사를 담당하는 사단 인사처에 전화를 걸었다. '어느 부대로 전입온 장교 누구인데 이사짐을 싣고 양구에 지금 도착했고 관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말을 듣던 장교는 P 대위의 명령지와 자력표를 찿아본 모양이었다. 자기는 몇 기 선배 누구라 했다. 얼굴을 대략 아는 2개 기수 선배였다. "충성! 선배님 반갑습니다!" P대위는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기뻐하며 선배께 인사를 했다. 선배는 지금 담당 장교가 없는데, 관사 빈곳에 아무데나 들어가라고 했다. 나는 반가워하며 인사를 건넸다.


P대위는 관사가 있다는 곳으로 올라가서 빈관사를 찿았다. 15평 규모 구형 관사가 몇 채 보였다. 사람이 살고 있는 뒷쪽에 빈관사가 한 곳이 있었는데, 주변에 풀이 무성하고 문짝은 물론 마루 바닥도 삐꺽거리고 화장실에는 인분이 가득했다. 대규모 수리를 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 가 없는 상태였다. 지금은 그럴 수 없지만 전입 대대의 지원을 받기로 했다. 그래서 대대에 전화를 해서 선배 전임 중대장에게 사정을 이야기 했다. 전후 사정을 듣고 난 선배 중대장은 내일 병력과 자재를 보내 수리를 해주겠다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인사를 하고 보니 어느듯 해는 늬엇늬엇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P대위는 일단 아내와 저녁을 먹고 짐은 그대로 둔채로 여관으로 가서 밤을 지셌다.


이튼날 아침 일찍 고맙게도 부대에서 병력과 자재를 실은 차가 도착했다. 잡초를 제거하고 화장실 인분을 퍼내고 마루와 문짝을 고치고 시멘트를 바르고 페인트칠을 했다. 마치 못난 얼굴에 분칠하듯이 대충 보수를 끝냈다. 무엌 아궁이는 나무를 떼는 재래식 아궁이였고, 안방 구둘장은 삐걱거리고 불을 피우면 연기가 장판 사이로 방안에 피어 올랐다. 이사짐을 옮기고 짐 정리를 대략 끝내고 짜장면을 시켜 점심을 먹인 후 병사들을 돌려보냈다. 


서울 토박이 출신 아내는 아궁이에 불을 피울 줄 몰라 농촌 출신 p대위가 먼저 시범을 보였다. 나중에 콧구명이 시커멓게 된 아내가 밥을 차리와서 같이 먹으면서 웃었다. 그래도 젊음의 열정이 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제 고난의 전방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통상 육사 출신들은 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임관을 하게 되면 대부분 천지를 모르고 날뛰며 모두가  자신만은 승승장구할 것이라는 환상에 빠진다. 모두가 맥아더 같은 4성 장군이 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그렇게 육사 교육은 거품과 환상을 머릿속에 쇠뇌시켜 배출하기에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신자처럼 되는 것이다. 이런 환상에 빠진 남편을 따라 이곳까지 온 것도 고마웠고 서로의 눈빛으로 가난하더라도 부디 행복하게만 살자고 다짐했던 아내였다.  



 




다음날 아침, 사단 사령부 출근 버스를 타고 사단 사령부에 도착했다. 인사처를 찿아가 전날 통화했던 선배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인사장교 인솔하에 사단장에게 전입 신고를 했다. 사령부에서 전입 신고를 마치고 나오자 마침 대대장을 만나게 되어 인사를 드렸다. 대대장은 P 대위가 전입오는 거을 알았는지 미소룰 지으며 반갑게 악수를 하고는 찝차를 타라고 했다. 찝차 뒷좌석에 올라 탔다. 찝차는 대대를 지나 전방으로 뽀오얀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렸다. 대대로 가지 않고 찝차는 펀치볼이 있는 방향으로 한참을 달려 대암산 쪽으로 올라갔는데 가파른 오르막길을  찝차는 거침없이 올랐다. 이동간 대대장은 시종일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뒤로 떨어질 것 같은 가파른 오르막 길을 찝차는 숨도 쉬지 않고 오르는 동안, P대위는 오금이 저리고 내려갈 때 과연 제대로 내려갈 수 있을 것인가를 의심했다. 


드디어 고지 정상 부근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대암산 거점 점령 담당 대대 지휘소가 있었는데, 전방이 잘 관측되는 곳이었다. GOP와 GP가 지척에 눈에 들어왔다. 능선을 타고 내려가는 길에는 전신주와 전선, 애자, 차량과 병사들, 담프차, 한전 전기공사 차량 등이 늘어져 열심히 전신주 심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공사 현황을 살펴보니 GOP 전체에 전기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는데, 한전 직원들까지 가세하여 전주를 나르고 심고 고압선을 설치하고 애자를 다는 등 모두가 개미처럼 움직였다. 당시 전 GOP 철책선에 전기를 넣는 데 지정된 날짜와 시간에 휴전선 전 GOP 사단이 동시에 불을 켠다고 했다. 당시 21사단 정면이 21킬로미터나 되어 GOP 전체 사단에서 가장 넓었다. 사단장은 만일 그날 사단 지역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불상사가 생긴다면 대대장을 보직 해임할 것이라고 공갈을 쳤다고 한다. 대대장은 전기공사에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었다. 


현장을 내려가서 공사 진행 상태를 살피면서 공사 담당 중.소대장들과 공사추진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 하고 현장을 둘러본 다음 대대장은 다시 찝차를 타고 출발했다. 내려가는 길이 더 아찔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몸을 뒤로 제끼며 버텼다. 그런 위험한 내리막 길에도 대대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앞만 바라보며 담담했다. 평지에 도착한 찝차는 왔던 길을 다시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려 대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