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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4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4

 


          의암호반 북한강 자전거길,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전거길이라 생각된다

 

 P대위의 전방 이야기는 계속된다. 


양구 관사에 입주한 P대위 아내는 갖은 고생을 했다. 수도가 없어서 물을 떠날라야 했고 땔감도 시장에서 사오고 주부식을 조달하는 등 외롭고 힘든 전방 생활에 젖어들고 있었다. 동기생이 주변에는 없었고 사단 사령부 관사에 한 동기생이 살았다. P대위와는 다른 중대 출신으로 별로 인연이 없는 동기생인데 전방에서 만난 유일한 동기생이라 그 동기생 부인과 아내는 금방 친해졌다. 


그후 어디를 가거나 소식을 전하면서 친하게 지냈고 그 동기생은 별 셋을 달았지만 지금도 그 가족과 얼마전까지도 연락을 주고 받았으나 태극기 집회에 관여한 예비역 장성 가족이라 사고가 달라져 있었다. 탄핵 반대 문자를 보내고 선동과 홍보하는 글을 자주 보냈는데, P대위가 아내에게 아무런 의견을 보내지 말고 연락도 말도록해서 전혀 반응이 없자 지금은 연락이 없다고 한다. 


가끔 휴일날에 같이 버스를 타고 그쪽 관사로 가서 두 가족이 만나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첯애를 갖게 되자 서로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아내는 외로움과 힘든 전방 생활을 이겨내려고 혼자서 양구에 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교회를 나가고 있다. 


관사 주변에는 사단 사령부 참모부 장교가 몇 명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영관급 장교로 고참이었고 P대위와 아내가 제일 나이가 어렸다. 아내는 그들 부인들로부터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임신한 군인 마누라가 소양호에서 배를 타고 춘천으로 나가다가 배에서 진통을 느끼다가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했다. 전부 P대위보다 고참 장교의 마누라들이 위세도 대단하여 아내가 힘들었다고 했다. 물론 아내가 고분고분하게 대하였고 잘난척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깔보며 경계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친언니처럼 아껴주는 가족도 있었지만, 대부분 일반 출신 장교들이라 육사 출신에 대한 보이지않는 시기심과 경계심이 작용했던 모양이다.


                                                소양 제2교 입구, 봉화산도 보인다.

 


P대위는 중대장 보직 시점이 맞지 않아 우선 대대 정보장교에 보직되어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그해 겨울, 일직을 섰는데, 아침에 수송부에서 "펑" 소리가 크게 났다. 아차 싶어 무슨 사고가 난 것으로 판단하고 달려갔다. 병사들이 넘어져 있고 피도 흘리는 병사도 있었다. 부상 병사들을 의무대로 후송하고 대대장 및 사단 상항실에 1차 보고하고 자세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보니 수송부 정비고에서 드람통 난로가 폭발한 것이었다. 아침에 신병이 폐유 드람통 난로에 불을 지피다가 몇 번 실패하는 바람에 드람통 내의 폐유가 기화된 상태에서 다시 불씨를 넣다가 폭발한 것이다. 당시 드람통 난로 주위에는 고참병들이 여럿 불을 쬐려다가 폭발하는 바람에 몇 명이 다쳐 후송을 갔다. 다행히 죽은 병사는 없었고 정비고 지붕이 둥그랗게 뚫혀 날아갔다.


대대장이 출근하자 일직사령 P대위는 사고보고를 했다. 그러자 대대장님은 "죽은 병사는 없지?" 하면서 알았다고 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대대장은 자신이 근무하는 동안 한 명의 병사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놀라운 신앙의 강력한 힘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대대장은 온화한 얼굴과 성품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대대장을 나오기 전에 자신은 하느님에게 일종의 계시를 받았다고 했다. 

 


 바람에 찰랑거리는 물 소리를 들으며 나무 그늘이 늘어진 멋들어진 길도 200 ~ 300미터 정도면 끝난다. 오는 길 주변에는 캠핑장도 만들어져 있고 고무보트를 타고 고기를 잡는 사람도 있다. 멋진 찿집도 있고 음식점도 있다. 이 길을 지나다니면서 이 근방에 호젓한 단독주택을 짓고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가을날이면 이곳에는 물안개가 유명하다. 이번 가을에는 자주 이곳을 찿을 예정이다.

 


P대위는 정보장교 6개월 만에 중대장에 보직되었다. 사단을 직접 지원하는 중대인데, 독립중대였다. 대대장은 문제 사병은 모두 P대위 중대로 보냈다. 


그 중에는 임모라는 신참 하사 한 사람이 왔는데, 가끔 저녁만 되면 울타리를 빠져나가 술이 만취되어 밤늦게 들어오면 내무반을 돌아다니며 병사들 머리통을 발로 차며 돌아다니곤 했다. 그래서 병장급 병사들과 내무반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등 문제가 많았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P대위는 밤에 늦게까지 기다리다가 술취해 들어와 싸움을 벌어져 소동이 난 현장을 확인하고 일직 사관에게 지시하여 술취한 임하사를 부대 울타리에 있는 큰 나무에 묶어 두었다. 그리고 P대위는 밤늦게 퇴근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면서 보니 임하사가 나무에 그대로 묶여 있었다. 인사계(행정보급관)에게 지시하여 임하사를 풀어주고 중대장실로 오도록 했다. 아마 인사계가  사전에 교육을 시켰는지 임하사는 중대장실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무릎을 끊고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며 잘못을 빌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P대위는 일어나 앉게 하고 차를 대접하며 좋은 말로 타일렀다. 임하사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P대위와 약속했다. 


임하사는 평소에는 그렇게 얌전하고 성실한 하사였지만 술만 먹으면 그런 꼴통이 되는 사람이었다. 일종의 주벽이었다. 임하사는 그런 일로 고참 병장들에게 집단구타도 많이 당했지만 그래도 습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후 어디를 가던지 임하사는 울타리를 벗어나 술이 만취되어 부대로 복귀하여 소란을 피우곤했다. 나무에 묶기도 여러 번 했지만 변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되겠다싶어 무슨 조취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일어났던 경과를 대대장에게 사실대로 보고했더니 대대장은 "우리 대대에서 P대위만큼 병사를 잘 관리하고 돌보는 중대장이 없다. 그러니 중대장이 잘 타이르고 교육시켜 사람 만들어 보라"고 했다. 기가찿지만 대대장의 그런 인정과 격려, 그리고 지시를 거부할 수도 없어 P대위는 골치를 썩이면서도 인내하며 임하사를 끌고 나가야 했다. 그것은 군대 상관에 대한 충성이 곧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P대위의 열정과 뜨거운 마음이 변함없었기 때문이다.


중간에는 경치를 구경할 수 있도록 공간도 만들어 놓았다. 사진 찍기도 좋다. 이 길을 만들 때 지자체에서 무척 신경을 쓴 모습이다. 그런데 급커브가 몇 군데 있어 위험해 보인다. 자전거 바퀴 자국이 여러 개가 보였다. 이런 곳에서도 과속하는 젊은 친구가 많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또 한 명은 탈영 전과자로 집행유예 기간 중인 사고 병사가 우리 중대로 전입왔다. 게급은 상병인데 상담한 결과 집안도 좋고 아버지가 에비역 대령이었다. 얼마남지 않은 군대 기간 열심히 잘해서 무사히 제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어느날은 사단에 검열차 온 육본의 중령 검열관도 찿아와서 그 병사를 격려했다. 아마 아버지가 시킨 모양이다. P대위는 그 병사를 교회에 다니는 성실한 고참병을 후견인으로 붙여 특별관리를 하면서 근무에 최선을 다하도록 했다. 그런데 제대를 거의 앞둔 시기에 그 병사가 그동안 잘 참고 견디어내다가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다. 취침 후 밤늦게 몰래 중대 울타리를 빠져 나가 민가 가게에 들어가 혼자 술을 먹었던 모양이다. 


가게 주인의 남편은 오토바이를 타고 지방을 다니면서 장사를 다니는데, 그날은 아주머니가 혼자 가게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술이 만취하자 돈을 지불하고 병사가 밖으로 나와서 가는 척 하다가 방문 창문 밑에 숨어 있다가 아주머니가 가게문을 닫고 들어가자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창문을 타고 들어가려다가 아주머니가 놀라 깨어나서 방안에 있던 소주병으로 마구 때리는 바람에 도망을 쳐 왔는데, 그만 윗옷을 버려두고 도망을 쳐왔다. 


다음날 아침, 부대 마크와 계급, 이름이 붙어 있는 윗옷을 들고 그녀의 남편이 부대를 찿아왔다. 한마디로 부녀자 겁탈 미수였다! 위병소에서 난리를 치는 남편을 직접 상대하기보다 우선 인사계를 보내 전후 사정을 이야기 듣고 모종의 조치를 취할테니 기다리라고 하면서 달랬다. 그 남편은 지금 놀란 아내가 몸져 누워있고 아내는 물론 자신도 장사도 못하고 피해가 많다면서 손해배상을 요구했고 그렇지 않으면 헌병대에 고발하겠다고 했다. 


P대위는 난감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무시히 제대할 수 있었는데, 헌병대에 끌러가면 그 병사는 집행유예 기간이라 군 생활을 두 배로 더 해야할 지 모른다. 처리 방안을 고민하다가 인사계를 불렀다. 그 병사의 아버지가 예비역 대령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집안이 그래도 괜찮은 집안인데 말썽을 피운 병사다. 빨리 그 병사 아버지에게 연락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그래서 그 병사 아버지가 바로 달려왔고 가게 주인과 잘 해결하고 그 병사는 무사히 제대한 적이 있었다.


 

                     의암호 중간에 섬이 있는데 갈대숲과 수목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다음해 늦가을, 사단 지역에 무장공비가 침투했다. 철책을 몰래 뚫고 넘어온 무장공비 3명이 아군 장교 복장을 하고 대암산을 타고 내려오다가 휴가갔다가 귀대하던 일단의 병사들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러자 무장공비들은 병사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지나갔는데, 아무래도 복장과 신발,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얼굴과 말씨 언행 등이 이상하다고 느낀 병사가 다시 되돌아서서 물어보다가 자신들의 정체가 틀킨 것으로 착각한 무장공비들이 소총을 난사하고 도주한 사건이 벌어졌다. 몇 명의 병사들이 어이없는 죽음과 부상을 당했다. 무장공비는 달아나면서 사격했는데 그 정확도가 매우 뛰어났다. 


신고를 접한 사단은 물론 인접 사단까지 비상이 걸렸고, 군단, 군사령부 등 상급부대도 모두 비상이 걸렸다. 후방 11사단 연대 병력이 투입되는 등 봉쇄작전과 추격 작전이 병행되었다. 


P대위 중대도 모든 행동을 중단하고 대대 지시에 의거 중대원을 무장시켰다. 실탄을 개인에게 분배하여 탄창에 꼽고, 수류탄을 개봉 및 사용법을 월남전 참전 경험이 있는 부대대장이 중대에 와서 병사들에게 교육했다. 부대대장은 수류탄 박스를 개봉하고 꺼내서 직접 자신의 가슴에 다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수류탄은  간부들만 달고 병사들은 박스에 보관하여 이동토록 했다. 비상식량도 지급했다. 기관총도 점검하고 사수와 부사수를 교육시켰다. 


중대는 대대 지시에 따라 차량으로 이동하여 지정된 야간 봉쇄선을 점령하고 병력을 배치하고 진지 구축 요령, 사격 방향 지정 및 설치, 전방 감시요령, 인접 진지와 신호 방법, 암구호 등을 교육하고 일체 움직이지 않도록 했다. 사단에서 무선 침묵을 지시했고 일체의 무선이 금지되었다. 이제서야 적이 아군 무선을 감청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늦가을 저녁은 쌀쌀했다. 특히 전방 지역은 더 춥다. 안개가 자욱히 깔리고 적막이 감도는 하천 제방 언덕에 참호를 파고 판초 우의를 덮고 바닥에는 짚을 깔고 탄창과 수류탄을 비치하고 전방을 주시하며 무전병과 밤을 지샜다. 아마 병사들은 총만 거치해놓고 대부분 잠들었을 것이다. 순찰도 불가하고 이동도 불가하니 확인할 방법이 없다. 18시 이후 야간에 움직이는 물체는 무조건 사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튼날 광치고개 일대 광치령 일대에서 교전이 벌어져 무장공비 한 명이 사살되었고 두 명은 도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중대는 다른 지역 봉쇄선에 다시 이동하여 투입되어 밤을 새우기를 며칠, 적은 아군의 봉쇄선을 유유히 뚫고 사단 후방 지역을 마음대로 휘저었다. 알고보니 적은 아군의 무전을 도청하여 무장공비들에게 역지령을 내렸고 무장공비들은 취약 지역을 골라 지나갔다. 


또 작전이 며칠 계속되자 봉쇄선을 점령한 부대의 병사들이 지치고 무전도 침묵, 순찰도 금지하자 모두 진지에서 잠들어 버린 것이다. 교대 병력 없이 전병력을 일거에 모두 봉쇄선에 투입하다보니 발생한 작전실패였다. 수색대대에서 직할대 지휘관들이 소집되어 작전회의와 토론이 벌어졌다. 교대 병력 없이 전병력 동시 투입 문제, 병사들이 잠드는 문제, 병력 배치 요령 등에 대한 문제가 토론되었지만 결론적으로 대책이라는 것이 기가찬 결론이 나왔다. 봉쇄선 병사들을 촘촘히 배치하여 잠들더라도 공비들이 병사들 머리를 밟고 지나가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별궁리를 다해보았지만 공비들은 흔적을 남기며 점차 북한강을 따라 철책선 쪽 북방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거의 작전이 열흘 정도 지난 어느날 새벽 대전차 수류탄으로 철책을 뚫고 유유히 월북하고 말았다. 아군의 완벽한 작전 실패였지만 한 명 사살한 것으로 대침투작전은 대충 마무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