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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5




두 바퀴에 인생을 싣고......5

 


          의암호반 북한강 자전거길,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전거길이라 생각된다

 

P대위가 누구인지는 상상에 맡긴다. 누구나 군생활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다. 남자라면 군대 이야기가 징거러울 것이다. 그러나 군에서 만난 전우가 평생을 가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믿을 수 없지만 전우는 믿을 수 있는데, 군생활을 통해 고난과 고통을 같이하고 생과 사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군부독재를 경험한 우리는 군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통치한다고 꼭 잘한다도 보장도 없고,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보다 더  발전했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사회적 역동성이 사라지고 혼란만 거듭하고 역사를 뒤로 돌려놓는 무능한 지도층이 권력을 장악한 기간만큼 나라 발전을 드디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군인의 삶은 처절하다, 젊은 청춘을 송두리채 다 바치고, 경제적 문화적 혜택을 거의 누리지도 못하며 깊은 오지 선골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년말, 축제, 국빈방문, 명절이면 항상 비상대기, 대통령이 회외 순방만 가도 비상대기, 일주일에 한 두번씩 일직을 서고 각종 훈련으로 집을 비우는 것은 다반사, 가족 친지의 길흉사 참석이나 가족 여행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 군생활이다. 수도가 없어 도랑물을 퍼다 먹고 폭우, 폭설이 내리면 꼼짝도 못하고 주부식 시장보는 것은 오지에서는 너무나 힘들다. 


모처럼 서울을 나오면 서울 구경은 거의 못하고 자란 촌티가 물씬나는 아이들이 수많은 높은 건물과 많은 차량을 보자 놀라 어쩔줄을 몰라하며 입을 벌리고 한참 쳐다보는 실정이다. 수도 없는 이사와 자식들 전학, 평생을 외로움과 두려움, 기다림으로 평생을 살아온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것이 군인이다.


그리고 모두가 장군이 되고 별을 다는 것은 아니다. 진급 경쟁에서 밀리면 언제든지 중간에 군을 나와야 한다. 30 ~ 40대의 어정쩡한 나이에 전역을 하며 대부분 처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치열한  민간 사회에서 살아남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퇴직금을 사기당하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부인과 비참한 삶을 견디다 못헤 이혼하고 아이들은 흩어지는 가정이 많다. 그래도 연금이라도 받으면 생활이 아닌 겨우 생존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생존도 불가하다.


풍요가 찿아오고 민주화가 되자 전방 소도시 주민들은 군대가 주둔하며 누리던 혜택을 잊고 이제는 좀 살만해지자 군대를 나가라고 하고, 대도시에도 군이 주둔하던 요지를 개발한다고 대부분 외곽으로 쫒겨나는 나라, 군에서 매입하여 군인가족이 일반 아파트에 입주하면 입주자들이 가격이 떨어진다며 나가라고 데모를 하고, 군복과 군인을 우습게 알고 깔보는 국민정서는 나라가 망할 징조가 아니고 무엇인가. 군도 예스맨들만 출세하고 비리와 부패가 끊이지 않고 무능한 지도자는 군의 사기를 저하기키는 것은 물론 적이 누구인지도 모를 형국이 되고 말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어 달리다보니 벌써 신매대교에 도착했다. 신매대교를 건너면 지난번에 되돌아갔던 북한강 자전거 도로 종점을 만나게 된다. 중간에 나무로 만들어진 멋들어진 자전거 도로가 의암호 물위로 만들어져 있다. 겉으로 보기는 좋은 데 너무 굴곡진 길이라 빨리 달리면 좀 위험하다. 급커브 길에는 여러 자전거 바퀴국이 선명하다. 급브레이크를 밟았다는 증거다.  



                                         호반 주변 자전거길 경치가 절경이다.

 


P대위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작전이 끝나고 집으로 온 P대위는 아내가 첯 애를 임신하고 산기가 다가오자 미리 서울이나 대구로 내려보내 출산하도록 했다. 출산 열흘 전 쯤에 P대위의 권유로 아내는 친정인 서울이 아니라 대구 P대위 집으로 내려가서 애기를 낳았는데 아내가 무척 마음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가난한 군인의 아내가 가진 돈이 없어 빈손을 갔는데, P대위 큰 누나가 무척 섭섭해하면서 마음에 상처를 준 모양이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서울 친정으로 보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사단 군종참모가 서울의 한 독지가로부터 사단 교회 건축헌금을 받았다면서 사단 교회를 짖는데 사단 지원 직할 독립 중대인 P대위 중대에 임무가 떨어졌다. 교회 부지는 죽곡리 입구 사단 사령부 앞 산 위에 짖기로 되었다. 불도져가 올라가 부지를 닦고 병사들이 기초를 파고 콘크리트를 치고 시간이 지나면서 기둥이 올라가고 블럭 벽체가 올라갔다. P대위는 수시로 교회 작업장을 방문하여 공사 진척 상황을 살폈다. 어느새 올라가기 시작한 종탑도 10미터 높이로 믹셔기로 콘크리트를 비벼 통에 담아 도르레로 올려서 부어넣으면 두드리고 쑤시고 하면서 다졌다. 병사들이 횟불을 켜고 밤을 새우면서 콘크리트를 치는 데, P대위가 현장을 방문하니 종탑 위에서 무슨 노래소리가 들렸다. P대위는 현장 소대장에게 물었다. "도대체 저 위에서 노래부르는 게 어떤 놈이야?" 그러자 소대장 왈, "대대장님이십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제서야 위를 쳐다보니 대대장이 10미터 높이의 가설재 위에서 녹청높여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교회 작업장에는 매일 오전 오후 시간 중간에 간식이 제공되었는데, 잔치국수였다. 교회를 짖는다고 사단 사령부 기독교 신자 군인 가족들이 매일 봉사를 했다. P대위는 잔치국수를 너무나 좋아했는데, 고향에서 자랄 때에는 배가 고픈 농촌이라 동네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면 잔치집에서 가서 잔치국수 3~4 그릇은 보통이었다. 그래서 P대위는 가끔 간식을 먹을 때 현장을 방문하여 잔치국수를 맛보기도 했다. 30명이 넘는 병사들의 간식을 오전 오후에 하루 두 번씩 제공한 가족들의 노고를 지금 생각하니 감동이다. 나중에 교회가 완성되자 준공식을 하는날, 사단 참모장 주관하에 사단의 전군종 목사들이 모여 P대위를 비롯한 전중대원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후로 P대위는 기독교를 비판하면서도 자신은 교화를 지어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며 자랑했다. 아마 지금도 백두산 부대 사령부 입구 산위에 우뚝 서 있을 '백두산 교회'를 이렇게 건축하게 되었다. 



 

 



대대체육대회가 P대위 중대에서 열렸다. 전방에 두 개 중대도 독립 중대라 병사들이 이동해와서 체육대회를 개최했다. 중대별로 자리를 잡고 열띤 응원과 함께 축구, 배구, 족구, 무장구보 등 경기가 열렸다. 각 중대가 치열한 경쟁을 치루면서 오전이 끝나고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어 나중에 마지막 점수 누계를 보니 P대위 중대가 축구만 이기면 종합 우승이 확실한 상황이었다. 대대 간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P대위는 선수들에게 "우리가 축구만 이기면 우리 중대가 종합 우승이 된다. 난 여러분만 믿겠디. 이기면 전원 포상휴가도 약속하겠다." P대위는 병사들의 눈빛이 순간 빛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결의에 찬 '화이팅'을 외치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막상막하의 경기가 진행되었고 후반전에 결국 1대 1이 되었고 경기가 거의 끝날 무렵 마지막 찬 골이 상대 중대 골망을 흔들었다. 순간, 연병장이 떠나갈듯이 함성이 울려퍼졌다. 그런데 상대 중대에서 심판에게 '옵사이드'라고 시비를 걸었다. 확실히 골은 들어갔고 옵사이드 상황은 애매했다. 이에 심판도 머뭇거리는 순간, P대위가 뛰어나가 강력하게 항의했다. "만약 골을 인정하지 않으면 경기를 보이콧 하고 철수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선수들을 모이게 했다. 그러자 심판이 대대장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더니 결국 골인이 인정되었다. 


그래서 이날 체육대회는  P대위 중대가 최종 우승을 차지했다. P대위 전중대원은 환호성을 지르며 승리를 기뻐하며 중대장을 행가래를 쳤다. 그날 저녁 중대 회식을 하면서 P대위는 전중대원과 뜨거운 전우애를 만끽했다. P대위는 마음속으로 '나는 너희들을 한 사람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명예로운 군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호반 옆 자전거 도로 전경


  

겨울 어느날 아침에 대대장이 중대를 갑자기 찿아왔다. 찝차를 타라고 했다. 찝차를 타니 양구로 내달려다가 어느 부대로 들어갔는데, 알고보니 사단 보안부대였다. 찝차에서 내리면서 보니 행정반 A타입 막사가 지난밤 화재로 블럭 벽체만 남기고 모두 타버린 모습이었다. 보안부대장과 대대장이 같이 사단장에게 보고하고 상부에 보고없이 신속히 복구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대대장은 P대위에게 "몇 일 만에 복구할 수 있겠나?" 라고 질문했다. P대위는 순간 "3일만 주십시요"라고 답변했다. 대대장은 지붕, 트라스 제작, 출창문틀과 문짝 등 자재는 대대에서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날부터 P대위는 전중대원을 투입하여 철야작업에 들어갔다. 불탄 자국을 모두 긁어내고 벽체와 바닥, 주변을 정리했다. 대대 영선반에서 트라스가 도착하고 합판과 스레트가 도착했다. 트라스를 설치하고 지붕 작업에 들어갔다. 출창문틀이 설치되고 페인트 작업에 시작될 쯤에 3일째가 되었다. 결국 저녁이 되자 모든 작업을 끝내고 철수할 수 있었다. 보안부대장은 그후 나를 알아보고 항상 반가워했다. P대위가 한미연합사에 근무할 때 그 사람은 보안부대를 쫒겨나서 연합사로 와 있었다.



파라호 북방 쌍무용리 지역으로 어느 추운 겨울날 혹한기 훈련을 나갔다.  땅을 파고 1주일 간 혹한기 훈련에 들어갔다. 수색, 정찰, 폭파, 지뢰 매설, 각종 화기 사격, 전술행동, 위장 등을 훈련했다. 하루는 M60 기관총 사격을 하는 데 예광탄이 날아가 산불이 나서 병사들이 달려가서 끄기도 하고,  3.5로켓포 사격 훈련을 하는 중 실사격을 하는데 사수가 발사 순간 총구를 올리는 바람에 실탄이 산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혹시나 민가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분대를 보내 살피도록 했는데 민가는 없고 깊은 산속이라 다행이었다. 민가로 날아갔다면 로켓포 폭발로 많은 사상자가 났을 것이기에 걱정했던 것이다.   



대대 회식을 하는 날이면 대대장은 간부들이 모두 참석한 것을 확인하고 콜라 한잔을 들고 건배하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 '잘 놀다 오라'고 하시면서 나가셨다. 대대장은 술도 담배도 전혀 하지 못하시는 분이셨는데, 계시와는 달리 대령을 달지 못하고 중령으로 전역 후, 한강에서 골재 사업에 손을 대다가 스트레스를 받아 후두암으로 90년도 초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대대장은 전역 후 군무원으로 특채되어 육본에 근무하면서 P대위를 주변 사람들에게 무척 자랑했고, 업무차 P대위가 육본을 방문하여 찿아가면 무척 반가워하였던 분이셨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서 그 분을 너무 빨리 데려가신 것 같아 지금까지도 그리움이 P대위의 가슴 속에는 가득하다.



                                                                 물에서 언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이듬해 대대장이 바뀌고 사단은 지휘검열을 앞두고 준비 중이었다.  P대위는 거부작전 훈련을 하기 위해 중대에서 전방 방산으로 넘어가는 백호터널 고개길을 넘어가다가 차량이 브레이크 고장으로 아래로 내려가다가 다행히 산비탈에 충돌하는 바람에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 연대 모래 운반 차량에 부상병을 싣고 사단 의무대로 갔는데, 몇 명은 후송병원으로 후송가고 P대위도 현리까지 후송갔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고 부상 병사들은 얼마 후 대부분 중대로 복귀하여 제대했다. 사고 원인은 브레이크 파열이지만 P대위가 병력 승차 지점을 지키지 않은 문제가 큰 잘못이었다. 


후송 복귀한 P대위는 사단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처벌을 받을 뻔 했으나 다행히 사단장의 배려로 무사히 처벌없이 끝나게 되었다. P대위는 만약 처벌 받는다면 전역을 하기로 결심했었다. 사단 의무대 병상에서 중대장 이.취임식을 하고 대대 행정장교가 하는 말이 P대위가 전출가는 것이 좋겠다고 신임 대대장의 의중을 전달해주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대대에는 2, 3사 출신 장교 고참들이 몇 명 있었는데, 내년에 진급에 해당하는 P대위가 대대에 잔류하면 자신들의 진급이 어려워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모두 P대위가 대대를 떠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P대위도 병사들 보기도 민망하고 사단에 남는 것도 죄송한 마음이라 군 인사 담당자에게 다른 곳으로 보내 달라고 말했다. 조금 있다가 그 인사 담당자가 전화가 왔는데, '15사단에 작전과장 자리가 곧 빈다'며 '그곳으로 갈 것이냐'고 물었다. 당시 P대위는 15사단이 어딘지를 몰랐다. 언제 부대를 골라 다닌 적이 없는 P대위는 '어디든지 명령만 내주면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15사단으로 금방 명령이 내려왔다. 

 

  

여기까지 춘천 의암호를 달리면서 생각났던 P대위의 21사단 중대장 시절의 추억의 이야기다. 어느듯 나는 멋진 나무다리를 지나 의암댐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자전거길 옆 차도로 가면 화천, 사창리로 가는 길인데, 15사단을 가려면 이 길로 갔면 되는 길이다. 다음은 15사단 이야기가 전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