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역사에게 길을 묻는다 3




역사에게 길을 묻는다 3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를 마치며.....3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에 대하여

군사적 천재이며 정치적 천재였던 카이사르, 군사적인면에서 문외한이지만 정치적인 면에서는 누구보다도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면서도 매사에 철저하고 치밀했던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이 모두 절명해버리는 바람에 아우구스투스는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지 못한 티베리우스가 황제로 등극했으니 당연히 정통성 시비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비정통성 황제라는 취약점을 안고 로마 제국을 통치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엄연한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였고 로마 제국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한편 그는 군사. 정치적인 면에서 카이사르의 군사적 재능과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재능을 반반씩 갖추었던 뛰어난 인물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후계를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으로 선택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후손들이 어린 나이에 연이어 사망하는 바람에 핏줄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모습을 지켜본 티베리우스는 겉으로는 주어진 제국 방위 임무에 성심을 다해서 임했고 마음 속으로는 꺼림직한 섭섭함이 녹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자신이 황제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포기하고 오로지 군사적 임무 수행에 전념했으며 그래서 군사적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게르마니아 전선의 전략적인 문제를 놓고 아우구스투스와 대립하게 된다. 엘베 강까지 정복하여 하루빨리 로마화를 추진하여 제국의 영역에 포함하려는 아우구수투스는 서두를 수밖에 없었고, 그런 아우구스투스의 독촉에 티베리우스가 반기를 든 것으로 보인다. 점령 지역이 미쳐 안정적인 로마화가 진척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군대가 엘베 강까지 진격한다면 후방의 안전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견 대립으로 티베리우스는 모든 직책을 버리고 로도스 섬으로 은퇴해버린다. 그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바루스 총독의 3개 군단이 게르마니아 숲에서 개르만족에세 전멸당하는 비극을 겪게 된다.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난 뒤 황제로 즉위한 티베리우스는 엘베 강 방위선을 후퇴하여 라인 강으로 방위선을 확정한다. 


카이사르는 짧은 기간에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체제를 무너뜨리고 과감한 개혁으로 제정 로마를 설계하고 기획했던 위대한 인물이지만, 그 설계와 기획안을 철저하게 숙지하고 위선과 기만으로 원로원을 안심시키며 야금야금 제정으로 가는 길을 구축해갔던 아우구스투스, 이런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의도를 명철하게 이해하고 새로운 제도, 새로운 정치,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지 않고 앞의 두 사람을 계승하여 '팍스 로마나' 실현을 완벽하게 추구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은 티베리우스 황제가 있었기에 장구한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로마 제정을 설계하고 기초한 카이사르와 그 설계를 기초로 완벽한 제도와 체제를 갖추게 만든 아우구스투스 황제 못지 않게 티베리우스 황제는 앞의 두 사람 못지 않게 로마 제정을 탄탄하게 만든 것은 그의 냉철한 사고와 신념이었다. 속세의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탄탄한 제국을 반석위해 올려놓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쯤에는 아무른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국정을 수행하면서 오로지 제국의 안정에 전념했고 불필요한 낭비와 사치를 줄이고 기존의 정책과 법규에 따라 앞의 두 사람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로마 제국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철저하게 수행한 인물이었다고 본다. 



통상 대부분의 나라들이 건국 초기 창업자와 수성자, 그리고 용성기를 만든 지도자들이 나타나면서 장기간 역사를 영속할 수 있었다. 만약 로마도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승 이어 티베리우스 같은 황제가 앞의 두 사람이 설계한대로 만들어 놓은 제국을 어떠한 비난과 야유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제국을 단단히 다지고 빛나게 만드는데 열중하지 않았다면 로마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나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를 아주 높게 평가하고 싶다.

그는 새로운 정치도, 새로운 제도도, 새로운 사고도, 새로운 정복도 시도하지 않고 기존에 훌륭하게 설계된 대로 만들기 시작한 로마 제국이 '팍스 로마나'를 실현하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치세를 유지했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역사가 몸젠이 평가한 것처럼 '로마가 가졌던 여러 훌륭한 황제 중에 한사람'임에는 틀립없다고 생각된다. 로마의 역사를 배우면서 나 스스로도 너무나 많은 역사적 사실을 배우며 즐거움능 느끼고 있고 고대 로마가 이토록 선진화된 문명을 이루었다는 데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창업 초기에 유능한 지도자가 나타나 나라를 반석위에 올려놓을 경우 그 나라는 긴 역사를 이어갔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대부분 조기에 멸망하고 말았다. 중국의 역사에서 전한 무제가 그랬고, 당나라 이세민이 그랬고, 명나라, 청나라가 초기에 유능한 지도자가 나타났기에 그래도 어느정도 긴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백제의 근초고왕, 신라의 김춘추, 고려의 광종, 조선의 태종이 그랬다.


그런면에서 로마 제국의 티베리우스 황제는 로마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황제로 인정된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라는 로마 제국의 두 영웅에 가려 고독과 싸우며 정통성 시비에 시달리고 부패하고 무능한 원로원과 사회 지도층, 공익보다 사익을 앞세우는 인간들의 추악한 모습에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동생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 전선에서 낙마하여 깊은 상처로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게르마니아 전선의 전략 문제로 의견이 부딪히자 로도스 섬으로 은퇴하여 학문에 심취하면서 올림픽 전차 경주에 나가서 우승을 하는 등 체력이나 정신력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건장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연이은 아우구스투스의 어린 혈족들이 방탕과 문란한 사생활로 세인들의 비난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혈통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냐는 의문도 가졌을 것이다. 결국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두 아들을 유배보내고 감금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혈통을 이어잗지 못한 자의 질투심이라고 세인들이 생각하는 것도 괴로웠을 것이다. 또한 게르마니쿠스의 사망에 의심을 받고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으로 티베리우스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아그리피나에게도 연민의 정을 느꼈을 지 모른다. 결국 그녀를 파멸시켰지만, 어쩌면 그에게 마지막 희망이었던 친아들 드루루스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다고 판단하고 고심끝에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그녀를 제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황실의 종양을 제거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카프리 섬에 은거하면서 제국의 모든 정보를 보고 받으며 지시를 내리는 통치로 매일 파발마들이 불철주야로 제국 구석구석을 향해 로마 가도를 달렸을 것이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정보망은 오늘날 유무선 통신보다도 더 빨랐을 정도였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바다를 건너고 알프스 산맥을 넘고 강을 건너고 사막을 밤낮주야로 달리던 파말마 병사들의 수고는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몽고의 징기스칸이 구축한 파발마 체제와 비슷한 기능을 발휘했다고 생각된다.


티메리우스 시대를 마치면서 티베리우스 황제에 대한 몇가지 배울점을 나름대로 열거해본다.


먼저, 그는 물론이고 로마는 내부적인 내치보다 외치에 우선을 두었다고 생각된다. 카르타고와 벌인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 오리엔트 정벌, 이집트 정복, 갈리아 정복, 브리타니아 정복, 게르마니아 정복 시도 등 로마는 대외 진출을 통해 부를 창출하고 노예를 획득하였으며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여 식량 생산량을 증대시켰다. 속주의 로마화를 통해 안정화시키고 로마 가도를 통해 원활한 물류 흐름을 만들어 경제적인 발전을 도모했으며, 이로인한 안정된 세수 정책을 통해 속주에서 많은 재원을 거두어들임으로써 국가 재정의 안정적인 운용이 가능했다.


둘째, 로마 제국의 방위선을 확정했다. 그는 북방 방위선을 라인 강과 도나우 강으로 확정하고 오리엔트는 유프라테스 강을 연해 파르티아와 국경선을 확정했으며 아르메니아를 파르티아를 견재하는 로마 동맹국으로 활용했다. 황제 속주에만 군단을 배치하여 운용하면서 보조부대를 활용하여 군단을 지원하도록 했다. 반란도 조기에 진압하고 적정 규모의 군단을 배치하여 유기적으로 운영되도록 정비했다.


셋째, 안정적인 재정 확보와 유지보수에 전념했다. 안정된 세수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고 새로운 시설이나 건축물을 거의 시공하지 않았다.

 

넷째, 황제가 후원하는 검투사 시합을 거부하고 화려함이나 체면치례를 배척했다.


다섯째,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정책과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 운영하면서 새로운 정치를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섯째,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유능한 인재는 장기간 그 공직을 수행토록 했다. 사람의 마음 속을 읽고 내면을 바라보는 깊은 안목을 가진 사람으로 인재의 용인술에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 예로 아그리피나파를 제거하는 데 이용된 세야누스 근위대장이 대표적이다.


일곱째, 각종 위기와 재난에 대한 신속한 대처 능력이다. 반란이나 붕괴 사고, 금융 대란, 지진/홍수 등이 발생했을 때 신속한 보고체제를 통해 누구보다도 빨리 보고 받고 대책 강구도 신속했다. 급하면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우선 지원하고 붕괴 사고시에는 가까운 민간 가정을 활용하고 전국의 의사를 동원하여 지원토록 조치했다.


여덜째, 정통성 시비에 평생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으며 사익만 추구하는 무능한 원로원을 질타했다. 말년에 은둔한 카프리 섬에서 엄청난 고독스런 삶을 살면서 자신이 죽은 후 로마 제국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격화도 거부했고 어떠한 존칭도 거부했다. 또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처럼 자신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역사를 인식하고 영웅이나 유명인이 아닌 오로지 로마 제국의 영속을 위해 자신의 신념과 의지, 주관이 뚜렸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로마 제국을 영속시키는데 반석을 만든 이런 완벽한 지도자를 갖지 못하는 우리들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