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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역사에게 길을 묻는다 1




역사에게 길을 묻는다 1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를 마치며.....1



로마 창업에서 카이사르까지

로물루스가 창업한 고대 로마는 왕정과 공화정을 거치면서 세계 정치사에서 보기드문 정치제도를 구축하고 그리스 문화를 융합하여 로마인의 특유의 독특한 문화를 창달했다.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고 왕에게 조언 역활을 하던 원로원은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으로 바뀐 뒤에도 국가 주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열띤 토론을 거쳐 의사를 결정하는 귀족 집합체였다. 또 로마인은 사회 규범과 제도를 모두  철저히 법에 따라 집행하는 체제를 만들고 한번 제정한 법도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순응하여 시기 적절하게 법제도를 개선시키고 모든 행동지침은 법률에 따라 아루어지는 사회였다.


메시나 해협 건너편 이탈리아 반도와 인접한 시실리아 섬의 패권을 두고 당시 지중해 최강자였던 카르타고와 1, 2, 3차에 걸쳐 150년이 넘는 3차례의 포에니 전쟁에서 결국 승리함으로써 명실공히 지중해 세계의 최강자로 우뚝서게 된다. 이 승리의 주역은 무엇보다도 귀족과 원로원이었고 국가 위기시 사회 지도층이 앞장서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회였기 때문이었다. 2차 한니발 전쟁 당시에는 알프스를 넘어온 한니발에게 연전연패를 당하였는데, 양익 기병을 이용한 다양한 전술로 대응하는 한니발의 양익 포위전술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특히 칸내 회전에서는 7만 명이 넘는 로마군이 한니발에게 전멸당하는 비극까지 초래하면서 한니발에게 정면전을 피하고 지구전으로 버티는 등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백마를 타고 소수의 기병만 거느리고 단신으로 수도 로마 성벽 밖에 나타나 한니발을 보고 수도 시민들은 간담이 서늘해졌고 만약 한니발이 공성전을 벌인다면 로마가 멸망당할 위기까지 처하기도 했다.


16년간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무진하며 로마군을 괴롭히던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쫒아내는 방법은 카르타고 본국을 침공하는 것"이라며 주장하는 젊은 장수 스키피오의 제안을 원로원이 받아들이되 개인적인 임무로 승인한다. 시칠리아 섬에서 3년간 철저한 준비를 마친 스키피오 장군이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본국을 침공하자 이에 놀란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에게 급히 귀국토록 전령을 보낸다. 이에 본국 카르타고의 지령을 받고 한니발이 급거 귀국함으로써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게 되었다. 그후 한니발의 5만 군대와 스키피오의 4만 군대가 북아프리카 자마 평원에서 각자 국가의 명운을 건 한판의 승부을 벌이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 전사상 유명한 '자마 회전'이다. 이 회전에서 젊은 로마 장수 스키피오는 다른 로마군 장수와 달리 한니발의 전술에 융통성 있는 변화무쌍한 대응전술로 한니발을 패전시킴으로써 이 전쟁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카르타고와 벌인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자 로마는 엄청난 영토가 확장되고 노예와 부가 늘어남에 따라 로마 사회는 급속하게 변화하게 되는 데 바로 넘쳐나는 풍요와 부가 가져오는 부작용이었다. 카르타고와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의 승리와 강대국으로 우뚝서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한 것이 로마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인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이었다.


법의 민족 로마인은 고대 어떠한 나라보다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훌륭한 정치 체제인 공화정 정치 체제를 만들어 강대국으로 올라섰지만, 그 중심 역활에 서 있던 원로원에 점차 과다한 권력이 부여되고 그것이 나중에는 기존의 공화정 정치 체제를 고수하는 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권력기관이 되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원로원을 포함한 귀족 등 로마 사회의 상층부 사람들이 과다한 부를 독식하면서 로마 사회는 급격한 양극화 현상이 생기게 되고 계급간의 격차와 빈민층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면서 사회적 불안 요인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결국 로마 군대의 질까지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로마군은 가는 곳마다 연전연패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앞장섰던 그라쿠스 형제들이 기득권을 지키려는 원로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고 로마 사회는 혼란을 거듭헤게 되는 데, 이때 등장한 마리우스에 의해 군제개혁이 이루어지고 실업자가 정리되면서 사회가 안정된다. 그러나 8차례가 넘도록 집정관에 당선되면서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는 위업을 세웠으나 정치적 감각이 거의 없던 마리우스의 과욕으로 부하 장수였던 술라와 권력다툼이 전개된다. 결국 술라의 내전 승리로 민중파인 마리우스파는 숙청을 당하게 되고 술라에 의해 로마 공화정은 더욱 강화된다.


카이사르는 광대한 영토와 부, 그리고 많은 속주를 통치하게 된 로마가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으로는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고 판단하고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행사하며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고 로마 제국의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고 보수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채 부의 독식과 권력의 부패에 빠진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체제는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체제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치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민중파적인 사고를 가졌던 10대의 젊은 카이사르는 이때 다행히 술라의 숙청을 피해 국외로 탈출하여 목숨을 구하게 되고 장기간 로도스 섬 등지에서 그리스 문명과 역사, 많은 책을 탐독하면서 학문을 배우게 된다.


세월이 흘러 기원전 78년 술라가 죽었다. 술라의 부하 장수였던 폼페이우스가 등장하고 기원전 73년에는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일어난다. 기원전 71년에 반란이 크라수스에 의해 진압되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에 취임한다. 당시 카이사르는 귀국하여 늦은 나이에 겨우 회계감사관에 취임하게 된다.


기원전 67년 폼페이우스가 지중해 해적을 소탕하여 지중해 일대 '팍스 로마나'를 확립하고, 기원전 63년에는 폼페이우스가 오리엔트를 평정하고 지중해 전역이 로마의 패권 아래 들어오게 된다.  같은해 카이사르는 최고제사장에 취임하게 되고 키케로가 집정관에 취임한다. 기원전 61년에 카이사르는 에스파냐 총독으로 부임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집정관에 출마하여 폼페에우스, 크라수스와 같이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한다.


기원전 59년에는 집정관에 취임하여 '율리우스 농지법'을 민회에서 가결하여 원로원에 타격을 가한다. 같은해 북이탈리아.남프랑스.일리리아 속주 총독으로 나간다. 기원전 58년에는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라비에누스를 부사령관에 임명하고 갈리아 전쟁을 시작한다. 브장송에서 갈리아 전쟁 1년을 보내고, 오를레앙 월동 숙영지에서 2년차를 보내면서 갈리아 부족을 차례로 복속시키면서 로마화도 병행하여 추진한다. 삼두정치에 대한 원로원의 반격이 있자, 갈리아 전쟁 3년차에는 카이사르.폼페이우스.크라수스가 북이탈리아 소도시 루카에서 만나 원로원에 대한 대책과 장차 계획을 협의한다.


갈리아 전쟁 4년차에는 아미앵에서 겨울철 숙영지를 설치하고 제1차 브리타니아 원정을 실시한다. 루카 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 취임하고 크라수스는 임지인 시리아로 떠난다.


갈리아 전쟁 5년차인 기원전 54년에는 아미앵에서 월동하면서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을 실시한다. 측근인 발부스와 오피우스를 통해 포로 로마노 광장을 확장한다.  그러나 수도 로마는 원로원파와 삼두정치파 사이에 대립으로 혼란에 빠진다. 


갈리아 전쟁 6년차인 기원전 53년에는 독일 서부와 디종 및 상스 부근에 월동 숙영지를 설치한다. 같은해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개시한다. 그러나 원정에 실패하고 크라수는 전사한다.


갈리아 전쟁 7년차, 갈리아 아르베르니 족장인 베르킨게토릭스가 로마에 반기를 들고 갈리아 부족을 결집하여 대규모 반란이 일어난다. 카이사르는 반란군과 전투를 전개하면서 추격하다가 전사상 유명한 알렉시아에서 앞뒤 양쪽에 적을 두고 공방전을 벌이는데, 이 전투에서 악전고투 끝에 대승하면서 항복한 베르킨게토릭스를 포로로 잡아 로마로 압송한다. 특히 알렉시아 공방전은 갈리아 전쟁의 전환점으로 갈리아족이 로마에 완전히 굴종하는 계기가 된다.


이처럼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을 수행하면서 영토 확장은 물론 갈리아의 로마화를 추진하는 한편 자신의 군사적인 힘을 기르면서 수도 로마와 원로원의 정치적인 동향 파악은 물론 갈리아 전쟁기를 수시로 로마로 보내 로마 시민 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로마 사회는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환호하며 젊은층은 카이사르가 지휘하는 갈리아 군단에 참전하여 복무하는 것이 유행처럼 퍼졌다. 특히 카이사르가 알렉시아 공방전에서 대승하자 로마는 시민들의 환호로 들끌었다.


갈리아 전쟁 8년차인 기원전 51년에는 갈리아 지역의 로마화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이듬해 북이탈리아 속주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카이시르 군단 해체 명령을 둘러싸고 호민관 쿠리오를 앞세워 원로원에 대항하는 한편 신임 호민관 안토니우스를 통해 원로원과 정치투쟁을 벌인다.


기원전 49년 1월 7일,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권고'를 결의하고 군단을 해체하고 단신으로 로마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폼페이우스를 필두로 하는 원로원파는 공화정 폐지를 주장하며 갈리아 정복 7년동안 강력한 군사력을 양성하여 물리적인 힘까지 가진 카이사르를 조기에 제거하지 않으면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체제 수호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카이사르를 수도 로마로 불러 재판에 회부하여 제거할 요량으로 '원로원 최후 통첩'을 발령하여 단신으로 수도 로마로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만약 카이사르가 단신으로 로마로 들어갈 경우 바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고심끝에 카이사르는 무의미하게 힘도 쓰지 못하고 그냥 죽는 것보다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원로원파와 내전을 벌이기로 결심한다.. 


1월 12일 카이사르는 1개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먼저 건너 리미니로 들어간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반역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군단에게 본국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호민관 안토니우스와 카시우스가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개시된다. 카이사르의 기습적인 루비콘 강 도하에 이어 수도 로마로 진군 소식이 전해지자, 수도 로마는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카이사르의 반격에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한 폼페이우스는 1월 17일 급히 로마를 탈출하는데 키케로에 이어 집정관 마르켈루스와 렌툴루스, 공화파의 원로원 의원 대부분도 탈출한다.


갈리아 전쟁 동안 카이사르의 충실한 부사령관이었던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카푸아에서 폼페이우스 진영에 합류한다. 2월 25일 폼페이우스는 브린디시까지 후퇴한 후 3월 17일 그리스로 탈출한다. 카이사르는 수도 로마로 진군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이탈리아 반도 동쪽 아드리아 해를 따라 내려가면서 먼저 폼페이우스 근거지를 격파하고 내전을 조기에 종결시키기 위해 브린디시까지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지만, 폼페이우스의 그리스 탈출을 막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사실상 이탈리아 반도를 재패한 카이사르는 3월 19일 수도 로마로 진군하면서 정치적 적이지만 거목인 카케로를 찿아가 회담하고, 그해 늦게 12월 2일 수도 로마에 들어간다. 카이사르는 독재관에 임명되고 반술라파의 자손에 대한 공직추방령을 해제하고 각 속주 총독에 카이사르파를 임명한다. 새 화폐 발행을 비롯하여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이듬해 기원전 48년도 집정관에 선출된다. 그리고 12월 13일 폼페이우스를 추격하기 위해 로마를 떠나 그리스로 향한다.  


그리스로 건너간 카이사르는 후속 부대인 안토니우스 군대가 폼페이우스파 해군의 저지와 악천후로 아드리아 해를 건너지 못하고 시간을 지체하다가 예상보다 늦게 겨우 그리스 해변에 도착한다. 그동안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포위하고 진지전을 전개하면서 공방전을 벌이다가 폼페이우스를 근거지에서 끌어내어 평원에서 결전을 치루기로 결심한다. 절대적인 기병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갈리아 전쟁터에서 숙련된 고참병을 별도로 선발하여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는데 기병을 무력화 시키는 기막힌 전술이었다. 카이사르는 그리스 내륙으로 이동하여 폼페이우스를 유인해낸 다음 결전의 장소로 파로살로스 평원을 선택한다.


파로살로스 평원에서 폼페이우스와 결전을 치루는데, 카이사르는 고참병들로 하여금 기병에 대항하여 창을 들고 버티고 경보병과 기병이 포위하여 공격하는 새로운 전술로 대기병 전력으로 운용하여 절대 우위의 폼페이우스군의 기병 전력을 무력화시키고 결전에 승리한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하는 한편 안토니우스를 부독재관에 임명하여 내치를 맡기고 이집트로 건너간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달아나지만 이집트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 백인대장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집트에 상륙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여 유족에게 보낸다. 이어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왕에 임명하고 그녀와 밀월을 즐긴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다음 카이사르는 소아시아로 이동하여 카파도니아 지방의 젤라에서 파르나케스를 격파하고, 기원전 47년 9월에 수도 로마로 돌아와 5년 임기의 독재관에 임명된다. 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패배한 폼페이우스파 장병들을 포용하고 관용을 베풀어 각자의 의사 결정에 따라 선택의 자유를 준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다시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폼페이우스파 잔당 세력과 '탑수스 회전'을 벌인다. 이 회전에서 승리하자 잔당을 이끌던 스키피오와 아프라니우스가 살해되고 북아프리카 총독 카토가 자결한다. 7월에 로마로 귀환하여 5차례 개선식을 거행한다. 태양력을 채택하고 국립 조폐소를 설립한다.


기원전 45년, 에스파냐 속주에서 폼페이우스 아들을 포함한 잔당들이 다시 봉기하자 에스파냐로 떠나 3월 17일 '문다 회전'에서 승리하여 잔당을 격파한다. 


카이사르는 대부분의 폼페이우스파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용서해주었고 공직도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으로 로마 제국의 최고권력자가 되어 전반적인 정치.사회를 개혁하기 시작한다. 기존의 법규와 제도를 개선하고 필요한 새로운 법률을 제정했다. 불합리한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개선하고 제정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기원전 44년 3월 15일, 그의 이러한 개혁은 브루투스 등 기존의 공화파와 내전에서 폼페이우스파 패장으로 용서받은 장수, 그리고 카이사르 밑에서 군단장을 지낸 사람들 중 일부 승진과 대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야합하여 카이사르를 제거하기로 맹약하고 아침에 원로원으로 츨근하던 카이사르를 원로원 회의장에서 23군데나 찔러 무참히 살해한다.




카이사르의 살해로 권력에 공백이 생긴 상태에서 수도 로마는 대혼란에 빠진다. 다음날 카이사르 유언장이 공개되는데 유언장에는 카이사르 조카로 당시 18세의 옥타비아누스가 제1상속인.양자.성명 계승자로 지명되어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후계자로 지명되는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외의 어린 인물이 지명되자 분노를 느끼고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3월 17일 안토니우스가 소집한 원로원 회의에서 암살자들에 대한 형사 책임은 추궁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요직 인사를 비롯한 카이사르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기로 결정한다.  3월 18일 카이사르 유해가 화장되고 암살자들을 규탄하는 민중들의 분노가 고조된다.


그러나 병사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에게 물려들고 안토니우스는 배심감을 느끼고 독자적인 세력 구축에 몰두한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멸시와 박대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가 붙여준 아그리파라는 군사적 천재와 같이 안토니우스와 세력 규합 경쟁을 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