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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역사에게 길을 묻는다 2




역사에게 길을 묻는다 2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를 마치며.....2



아우구스투스에서 티베리우스까지

기원전 43년, 8월 우여곡절 끝에 옥타비아누스가 집정관에 선출되고 카이사르 양자 입적을 공인받고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된다. 1월 볼로냐에서 안토니우스.레피두스.옥타비아누스의 제2차 삼두정치가 성립된다. 27일 열린 민회가 5년 기한으로 이를 승인하고 원로원 주도의 과두정 체제는 소멸된다. 동년 11월 28일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살생부가 발표되고 숙청의 태풍이 몰아친다. 12월 7일에는 키케로가 살해된다.


기원전 42년, 원로원에서 카이사르의 신격화를 결의하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그리스로 출동하여 필리피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연합군을 격파하자 공화파 두 장수는 자결한다. 내전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 옥타비이누스와 안토니우스는 협상에 의해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 본국을 포함한 제국의 서부를, 안토니우스는 시리아를 포함한 제국의 동부를 나누어 통치하기로 한다. 오리엔트 지방은 높은 경제적인 부를 가진 지역으로 누구나 선호하는 지역이지만 이러한 동부에 비해 에스파냐, 갈리아 지방을 포함한 서부는 경제력이 약하고 발전도가 낮고 생산력도 낮은 지역으로 동부와 비교할 수 없는 상태지만, 본국 이탈리아를 포함하고 있다는 보이지 않는 엄청난 잇점을 안토니우스는 모르고 있었다.   



동방으로 떠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초대를 받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여 클레오파트라를 만난다. 이내 그녀와 사랑에 빠진 안토니우스는 주지육림에 빠진 상태로 세월을 보낸다. 그사이 옥타비아누스는 외교 담당으로 마이케나스를 기용하고 아그리파와 함께 일리리아 재패에 전념한다.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하는 등 로마인의 분노를 자아낼 뿐 아니라, 로마 통치 속주 대부분을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양도하자, 본국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해지게 된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과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로마를 배신한 안토니우스를 타도하기 위해 동방으로 출정한다. 육지전과 해전 중 기원전 31년 9월, 먼저 해전이 그리스 악티움 해변에서 벌어지게 되는데, 옥타비아누스는 군사적 재능이 부족한 관계로 모든 군사 업무는 아그리파에 의해서 수행되고 있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악티움 만 좁은 수로에서부터 시작하여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숫적으로 열세한 옥타비아누스군은 좁은 수로에서 밀집해 있는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격파하기 시작하자 도중에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해군이 갑자기 남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치열한 전투 장면을 보다 못한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이집트 해군을 이끌고 전장을 이탈해버린 것이다.


결국 이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고 패배한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달아난다. 기원전 30년 7월 31일 안토니우스를 이집트까지 추격한 옥타비아누스는 8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한다. 이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자결하고 카이사리온이 살해된다. 이로써 이집트의 프롤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하게 된다.


기원전 29년 8월, 옥타비아누스는 수도 로마에서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하고 시민들은 열광한다. 기원전 28년 1천 명이 넘던 원로원 수를 600명으로 줄인다. 기원전 27년 1월 13일에는 공화정으로 복귀를 선언하자 16일에는 원로원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부여하기로 결의한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6년부터 3년 반동안 이베리아 반도 완전 재패를 이루고 서부 재편성을 끝내고 로마로 귀국한다.  아우구스투스에게 '호민관 특권'이 부여되고 화폐 개혁에 착수한다.


기원전 18년 아우구스투스는 '간통 및 혼외정사에 관한 율리우스 법' 및 '정식 혼인에 관한 율리우스 법'을 제정한다. 기원전 12년에는 군사적 천재이며 평생 동지였던 친구이며 위대한 장군인 아그리파가 사망하고 기원전 9년에는 엘베 강과 도나우 강을 연한 방위선을 결정한다.


기원전 8년에는 외교를 담당하던 마이케나스가 사망하고 기원전 4년에는 친로마파였던 유대왕 헤롯이 사망한다. 기원전 2년에는 친딸 율리아를 '간통죄'로 종신 유배형에 처하고 다음해에는 원로원이 아우구스투스에게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수여한다. 


서기 4년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아들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결정하고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로 게르마니쿠스를 지명한다. 서기 13년 티베리우스에게 '최고사령관'을 수여하고 그후 게르마니아 전선은 게르마니쿠스가 담당한다. 서기 14년에는 공동통치자 티베리우스와 공동으로 국세조사를 실시하고 아우구스투스는 <업적록>을 마무리 한다. 나폴리에 머물고 있던 황제는 동년 8월19일에 조용히 영면한다.




동년 9월 17일에 티베리우스가 로메 제국의 제2대 황제로 즉위한다. 그해 북아프리카에서 타쿠팔리나스가 이끄는 반로마 봉기가 일어나고 판노니아에서는 로마 군단이 반란을 일으킨다. 티베리우스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아들 드루수스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한다. 또 저지 게르마니아의 로마 군단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게르마니쿠스가 갈리아에서 급히 이동하여 유혈 숙청 끝에 반란을 진압한다.


서기 16년에는 게르마니쿠스가 게르마니아로 쳐들어 간다. 서기 17년 5월 26일 게르마니쿠스가 개선식을 거행하고 다음 임지가 오리엔트로 결정된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이후 28년에 걸친 게르마니아 전쟁을 사실상 마무리 하고 엘베 강에서 라인 강으로 방위선을 후퇴한다. 게르마니아 재패는 제국에 부담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소아시아 서남부에 대지진이 일어나 재해대책을 지원하고 복구한다. 티베리우스의 요구로 원로원은 오리엔트로 떠나는 게르마니쿠스에게 '최고통수권'을 부여한다. 같은해 가을에 게르마니쿠스는 가족을 동반하고 오리엔트로 떠난다.


서기 18년 게르마니쿠스는 그리스를 거쳐 아르메니아 왕국의 대관식을 주관하고 난 다음 이듬해까지 황제의 허락도 없이 이집트를 여행하고 돌아온다. 그러나 얼마 후 이름모를 병에 걸려 고열을 앓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게르마니쿠스와 아내 아그리피나는 시리아 총독 피소가 티베리우스의 사주를 받고 독약을 먹인 것으로 생각하고 분개한다. 유골을 안고 귀국한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티베리우스는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만한 언행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가들의 판단으로는 게르마니쿠스가 열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다. 


서기 20년에는 결국 피소가 재판에 회부되어 재판 중 스스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서기 21년에는 북아프리카 타쿠팔리나스가 다시 봉기하여 기세를 더하였고 갈리아 동부에서 고금리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나지만 라인 강 방위 로마 군단이 즉시 출동하여 진압한다.


서기 22년 티베리우스는 아들 드루수스에게 '호민관 특권'을 부여해달라고 원로원에 요청하여 동의를 받는다. 그러나 다음 해 드루루스가 갑자기 급사한다. 아마 황제는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황제는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의 군단을 정비하고 방위선을 확정한다. 군단병의 결원을 보충하고 보조병의 정원을 정한다.


몇 년 후인 서기 27년,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 은둔한다.


서기 29년, 티베리우스의 생모이자 아우구스투스의 미망인인인 리비아가 사망한다. 게르마니쿠스 사망 이후 아그피나는 티베리우스에대한 반감을 품고 반티베리우스파를 결성하고 사사건건 티베리우스에게 반발한다. 아들 드루수스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아그리피나가 관여했을 것이라고 믿은 티베리우스는 그동안 생모 리비아의 중재로 참아왔지만, 언젠가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근위대장 세야누스를 통해 증거를 수집한 후 아그리피나를 재판에 회부하여 아그리피나와 맏아들 네로 카이사르의 유죄가 확정되어 각각 벤토테네 섬과 폰차 섬에 유배시킨다.


서기 31년, 아그리피나 소탕자건의 핵심인물인 근위대장 세야누스와 티베리우스가 공동 집정관에 취임한다. 세야누스는 근위대를 지휘하는 막강한 군사력과 황제를 능가하는 권세를 휘두르게 되자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공동 집정관에 오른 세야누스는 다음 황제 자리는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게 되고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가 방심한 틈을 타서 새로운 근위대장을 임명하여 근위대를 장악하게 만들고 새로운 근위대장은 세여누스를 찿아가 자신이 새로운 근위대장에 임명되었다고 하면서 "내일 원로원에서 티베리우스 황제가 후계자에 대한 중요한 발표가 있을 것"이라면서 세여누스를 안심하게 만든다.


다음날 아침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 서한을 보낸다. 티베리우스는 그 서한을 통해 세야누스를 국가반역죄로 고발하고 원로원은 바로 사형 판결을 내리고 그날 세야누스의 사형을 집행한다. 한마디로 치밀하고 조직적이며 신속하게 처리하는 티베리우스의 완벽함은 놀라울 따름이다.


유배되어 있던 아그리파나가 벤토테네 섬에서 사망하고, 서기 31년에는 둘째아들 드루수스 카이사르도 사망한다. 본국 이탈리아와 속주 간에 금리 차이로 공동화 현상이 발생하고, 속주에서 고리대금업을 하던 원로원 의원이 고발되는 것을 시발로 로마에 금융위기가 찿아온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공공 자금 투입 등 신속한 대책 강구로 금융위기를 진정시킨다.


서기 37년 3월 16일, 나폴리 만의 서쪽 끝에 있는 미세노 곳 별장에서 조용히 영면한다. 향년 77세.


동년 3월 18일, 게르마니쿠스 셋째아들 칼리굴라가 제3대 로마 제국 황제에 취임한다.




이상이 로마가 창업된 이후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까지의 대략이다.


다음은 이러한 제국을 물려받은 티베리우스의 치세에 대해서 평가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