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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로마의 역사 176 : 고대 로마 172 (카이사르 시대 108)

 

 

로마의 역사 176 : 고대 로마 172 (카이사르 시대 108)

 

 

 

 

카이사르  시대 108 (기원전 100년~기원전 44년)

 

 

중년 시절(기원전 60년~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 40세~50세)

 

 

루비콘 강 앞에서

 

<로마인 이야기> 제3권 <승자의 혼미>에 등장한 주인공들 가운데 하나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제4권, 제5권의 주인공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38세의 나이 차이는 있지만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첯째, 두 사람은 코르넬리우스와 율리우스라는 로마 최고의 명문 귀족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때까지 로마 역사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은 술라와 카이사르라는 방계 가문 출신이라는 점.

 

둘째, 그리스인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할 만큼 경제적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지는 못했지만, 당대 최고의 지성을 가진 최고의 교양인이었다는 점.

 

셋째, 키가 크고 마른 체격에 품위있는 행동거지로, 언제 어디서나 눈에 뛰는 군계일학이었다는 점.

 

넷째, 둘 다 조숙한 천재 타입이 아니라, 40대에 들어선 뒤에야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 대기만성형의 인물이었다는 점.

 

다섯째, 돈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지만, 개인 재산을 모으는 데에는 거의 무관심했다는 점.

 

여섯째, 둘 다 목적을 확실히 하는 성격이고, 그 때문에 부하 병사들한테 존경을 받았다는 점.

 

일곱째, 원로원이 더 이상 통치력이 없다는 사실을 뀌뚫어본 것도 두 사람이 공통점이지만, 술라는 원로원 개혁으로 통치력을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카이사르는 그 정도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점에서 개혁적인 정도의 차이다.

 

여덟째, 둘 다 종래의 사고방식에 얽메이지 않고 행동이 지극히 대담했다는 점이서는 비슷하지만, 술라에게는 불안이나 망설임을 찿아볼 수 없는 반면, 카이사르는 그렇지 않았다.

 

 

브린디시에 상륙한 뒤에도 군단을 해산하지 않은 술라의 가슴 속에는 국법을 어기고 그대로 곧장 로마로 쳐들어가는 데 대한 의심이나 망설임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로마 국가를 위하여 그리스, 소아시아에서 세운 엄청난 업적이 모두 무시되고 마리우스를 몰아낸 다음 정복 전쟁터에 나와 있는 동안 달아났던 마리우스가 천 여 명의 군사를 대동하고 귀국하여 술라파를 철저하게 숙청하였기 때문에 가슴에 맺힌 한이 엄청났다. 그래서 술라는 전쟁터에서 졸지에 반역자로 몰리게 되었고 소아시아 정복 전쟁에서 갖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성공적으로 소아시아 정복 전쟁을 끝낸 뒤에 그리스에 머물면서 정국의 동향을 살피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브린디시에 상륙하여 귀국하자, 폼페이우스 등 술라를 지지하는 군사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이에 술라는 가차없이 수도 로마로 진격하였으나 브린디시에서 수도 로마까지 가는 데 무려 2년이라는 세월을 소비하면서 앞을 가로막는 정부군을 격파하고 수도 로마에 입성하여 술라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술라에 비하여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국법을 어기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보다, 국법을 어기면서 까지 루비콘 강을 건넜을 때 일어날 결과나 여파를 생각하여 망설인 것이다.  

 

결행하면 내전이 일어날 것은 뻔한 일이고, 카이사르는 그 내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술라는 같은 로마인끼리 싸우는 것도 전혀 문제 삼지 않았지만, 카이사르는 청소년 시절의 체험 때문에 그런 일에 무신경할 수가 없엇다.

 

그의 고모부인 마리우스의 명령으로 꼬박 닷새 동안 현직 접정관을 포함한 읜로원 의원 50명, 기사계급에 속하는 경제인 1천 명이 살해된 것은 카이사르가 열세 살 되던 해였다. 이때 피살된 사람들 중에는 카이사르의 아저씨뻘이 되는 사람도 둘 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고모부가 숙부를 죽인 셈이다. 살해된 이들의 잘린 목은 포로 로마노 광장 언덕 위에 올려놓을 수 없을 정도였다. 소년 카이사르가 사는 수부라에서 포로 로마노까지는 5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였다.

 

그리고 민중파에 대한 보목을 게획한 술라는 브린디시에 상륙한 지 2년 만에 내전에 승리한 뒤, 드디어 민중파 소탕 작전에 나섰다. 술라가 직접 작성한 살생부에는 80명의 원로원 의원과 1천 600명의 기사계급을 포함하여 무려 4천 700명의 이름이 올려져 있었다. 이들 대다수가 재판도 받지 못하고 살해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자들도 재산 몰수를 면치 못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자손에 이르기까지 공직에서 추방당했다. 살해된 자들의 목이 포로 로마노 광장 연단에 넘쳐 흘렀던 것도 5년 전과 마찬가지였다. 당시 18세였던 카이사르는 그것을 보았다. 그 자신도 살생부에 이름이 올라 희생자가 될 뻔 했지만, 술라 측근들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나 4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전의 진정한 비극은 내전에 희생된 사망자 수가 아니라, 내전에 희생됨으로써 생겨나는 앙심과 원한과 증오가 오랫동안 이어져, 그 꼬리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은 데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공동체에 얼마나 큰 불이익이 되는지, 따라서 그런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되도록 피해야 할 필요성이 얼마나 큰지는 '카틸리나 역모사건' 당시 37세였던 카이사르가 행한 연설에 잘 나타나 있다.

 

게다가 내전은 부모와 자식, 형제, 친구 사이를 갈라 놓는다.카이사르는 명쾌한 태도와 솔직한 표현력, 그리고 갈리아에서 거둔 화려한 공적으로 수도 로마의 젊은이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원로원 의원인 아버지의 만류도 뿌리치고 카이사르한테 달려가고 싶다고 공언하는 로마 유력자의 자제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원로원파, 즉 카이사르의 반대파 주요 인물들이 거의 다 이들의 반항에 부딪치고 말았다. 15세 밖에 안 된 키케로의 아들과 조카도 열렬한 카이사르파가 되었다. 집안 소동으로 그치는 동안은 희극이지만,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는 순간, 그것은 당장 비극으로 바뀔 터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평생 동안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게 사는 것을 지향한 사나이기도 하다. 그의 신념은 로마 국가체제의 개조이고, 로마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으면, 즉 '원로원 최종 권고'에 굴복하여 군단을 내놓는다면 내전은 피할 수 있겠지만, 새로운 질서 수립은 꿈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는 지금까지 50년을 살아온 보람이 없다. 보람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게다가 명예는 이미 더럽혀 졌다. 갈리아 전쟁 따위는 아예 없었던 것처럼, '원로원 최종 권고'에 복종하지 않으면 역적으로 규정하겠다는 원로원의 선언으로 그의 명예는 이미 충분히 더럽혀져 있엇다.

 

이 무렵, 카이사르는 눈만 감으면 루비콘 강이 떠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날을 보내고 있던 카이사르에게 또 한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부장 라비에누스의 거취가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