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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겨울 12 : 미국의 한반도 배신의 역사 2

 

 

강남의 겨울 12 : 미국의 한반도 배신의 역사 2

 

 

 

                                                                               봄을 기다리는 겨울 나목

 

긴 설연휴가 끝났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고향을 찿아가 그리운 가족, 친지들과 같이 기쁨과 즐거움, 고마움과 감사함, 혈육의 깊은 정을 확인하고 가족 사랑의 소중함을 절감한 기간이 되었으리라 믿으며 이러한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것은 서로간의 기의 흐름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삶에 보람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된다. 고향가는 길은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고향 가까이 다가갈수록 산천이 눈에 익고 주변 공기가 훈훈해지는 느낌은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니니라 생각된다. 그만큼 인간의 감각은 고향에 대한 짙은 향기를 간직하고 있는지 모른다.

 

차창에 비치는 고향 마을이 정겹게 다가오고 강에서 멱감고 뒷 동산에 올라 뛰놀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나고 그때 같이 놀던 친구들은 어디서 잘 살고는 있는지 그립기만 하다. 풋사랑을 품었던 철없던 그 시절, 그때 그 처녀는 누구한테 시집가서 잘 살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잘 살고 있다면 다행이겠으나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면 마음이 아플 것이다. 그 곱던 얼굴은 이미 주름이 깊게 패였을 것이고 삶에 찌들어 이제는 중년 아줌마로 늙어가고 을 모습을 보느니 차라리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다.

 

이제 또 생존경쟁의 치열한 삶터로 나가야 한다. 인간의 미래는 불확실의 연속이다. 사람팔자 알 수 없다듯이 내일 당장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다. 설 연휴동안 불행하게도 각종 교통사고로 숨진 사람도 많고 일가족이 자살한 처참한 뉴스도 보았다. 천민자본주이 사회에서 돈에 울고 웃으며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사회다. 돈이 인간성을 말살하고 신처럼 우뚝섰고 모두가 돈에 노예가 되고 말았다. 권력과 부로 인한 인류 사회의 귀족과 노예의 신분구분은 인류 역사가 진행되는 한 결코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자유, 평화, 평등, 정의는 인류가 지향하는 이상사회일 뿐 결코 달성될 수 없는 목표이기도 하다. 조선을 창업한 정도전의 민본사상도, 신권우위론도 모두가 백성을 하늘로 받드는 나라가 아니라 오로지 500년 동안 양반사대부를 위한 나라였을 뿐이다. 결국은 나라까지 망해먹지 않았는가? 그래서 왜놈에게 모든 것을 피빨리고 지금은 반토막난 몸으로 반신불구가 되어 강대국 미국에 의지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약소국은 항상 강대국에 매달려야 하고 강대국의 국익에 따라 이리저라 팽개쳐진 것이 우리 역사다.

 

우리는 우리의 처절한 지난 5천년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고는 있는가? 지금 분단의 고통을, 이산가족의 한을, 국군 포로의 비참한 삶을, 조국을 위해 초개같이 목숨을 던진 수많은 국군 병사와 학도병들, 적과 아군 구분없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을 우리 민족끼리 저질렀던 것을 기억하는가? 수만 명이 얼어죽고 굶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건을 기억이나 하는가? 만주 벌판을 말 달리던 독립군들의 피나는 투혼을 기억이나 하는가?  수백만 고려인들이 시베리아 벌판으로 내쫓겨 황무지에 팽개쳐진 고통의 긴 세월을 아는가? 왜 우리는 강대국이 되지 못하고 이처럼 처절한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 해야 하는가? 우리는 과연 그러한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고 지금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가 변하지 않는한 그러한 오욕의 역사는 또다시 되풀이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미국의 한반도 배신의 역사 2 (계속)

 

에치슨 라인

에치슨 서언1950년 1월 12일에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딘 에치슨이 선언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이다. 에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소련중국의 영토적 야욕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했다. 여기서 그는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에치슨 라인'으로 결정한다고 발표한다.

 
에치슨 자신은 이 선에 대해서 아주 가볍게 여겼으며, 나중에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회고록에서조차 자신의 연설 장소나 제목을 혼동할 정도였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후 많은 비난을 받았다. 반면에 북한, 소련, 중공에게는 한반도 지배 기회를 가지게 만든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에치슨 선언 이전부터 북한 김일성은 이미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에치슨 선언으로 남침전쟁이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 꼴이 되고 말았다.

 

흔히 이 선언을 통해 한국, 대만, 인도차이나 반도가 에치슨 라인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논리라면 미국은 대만을 버린 셈이 된다. 그러면 에치슨은 왜 이런 방위선을 발표하게 된 것일까? 과연 에치슨 발언으로 소련과 북한이 한국전쟁을 일으킨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일까? 

 

 

  


에치슨 라인의 개략적인 모습. 다만 쿠릴 열도는 포함되지 않는다.


사실인즉 에치슨 라인의 진정한 목적은 국제분쟁 발생시 미 육군이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한 것이었다. 2차대전 직후 미국 정부는 당분간 세계 평화가 지속 될 것으로 판단하고 급속히 군비를 축소하는 바람에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이르러서는 미군군기나 장비 상태가 엉망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절대적인 방위선으로 책정한 것이 에치슨 라인이었고, 에치슨 라인 밖의 지역은 공군력으로 지원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당시에 항공모함도 필요 없다고 간주하고 핵무기와 거대 폭격기만으로도 충분히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군부 역시도 비슷한 안건을 주장한 바 있지만 에치슨 라인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 그러므로 에치슨 라인 선언의 진정한 의미는 라인 밖의 비(非)공산국가가 공산군의 침공을 받았을 경우, 해당 국가가 적국의 공격을 막아내며 버티는 동안 미국은 유엔을 통해 해당 국가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지, 결코 공산군의 침공에 저항하는 라인 밖의 비공산국가를 가만히 내버려두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리고 에치슨이 연설한 시점에서 미국 국무부가 가진 한국 관련 현안은 미국 의회에서 계류 중인 '한국원조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급선무었다.
당시 미국 의회는 극도로 예산감축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듣도 보도 못한 신생국을 위한 직접적인 군대 파견과 같이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정책 실시를 기피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표된 에치슨 선언이 내포하는 의미란, 신생
대한민국은 미국이 약간의 원조금만 주면 자기 스스로 국가를 방어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미국 의회에 보내는 것이었으며, 결국 한국원조법안은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에치슨은 이걸 자랑스러워했다. 한국 정부 역시 이승만 대통령이 감사전문을 보내고 외무장관이 환영을 표하는 담화를 발표하는등 실제로 한국측에서는 한국방위를 책임진다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일반에서는 "그때 막
한반도의 무력통일을 기도하고 있던 김일성이오시프 스탈린이 이 선언을 접하고는 한국을 공격해도 미국의 무력개입이 없을 것이라 여기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즉 에치슨 라인을 이용해 스탈린과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일으켰다."는 인식이 파다하지만, 한국측과 소련측 자료를 연구한 결과 사실상 남침에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게 학계의 정설이다. 이미 남침에 대해선 에치슨 선언이 있기 전부터 논의가 오가고 있었으며 오히려 김일성은 오히려 미국의 북침을 걱정하며 신중하던 스탈린을 재촉했으며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정보를 과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미국의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낼수 있다고 과장했던 게 결정적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미군이 곧바로 파병되었다는 점에서 에치슨 라인 선언이 공산권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떡밥이었다고 남침유도설을 주장하는 일부 사학자들이 있으나 이미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쯤 쓰여졌다가 몇 년 전 공개된 미국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한반도를 "전략적 가치가 없는 곳"으로 보고 하루빨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기로 이미 합의해놓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군을 무장시킬 무기를 지원해 달라고 졸라댔을 때도 한국이 그 무기 가지고 북한을 침공할까 봐 두려워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은 매번 북진통일을 외쳐 댔는데, 아시아보다는 유럽에 더 신경을 쓰고 싶었던 미국 정부는 혹시나 일어날 말썽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덤으로 당시 한국은 빨치산 토벌과 38선 상에서의 국지전에서 북한을 상대로 불리하지 않은 전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침을 유도했다면 정작 남침을 유도한 미군은 왜 박살이 날까?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급한 나머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주일미군의 일부 부대인 일명 '스미스 부대'를 먼저 파병했는데, 그 부대는 일본에서 제대로 된 군사훈련도 받지 않고 아무 걱정 없이 너무 편하게 지낸데다가, 국공내전일본군과의 치열한 게릴라전까지 치른 전투의 베테랑이었던 조선인민군 우습게 보다가 초기에 미군은 대부분 패전했다. 첫타자인 스미스 부대는 그렇다 쳐도 그 다음에 도착한 미 제 24사단은 대전전투에서 역시 붕괴되고 말았고 사단장 딘 소장까지 포로가 되었을 정도였다. 만약 미국의 음모론 운운하는 일부의 말이 사실이라면 미군은 왜 한국전쟁 초반에 이리 허술하게 대처했을까?

 

결과적으로 딘 에치슨은 방위선 하나 잘못 긋는 바람에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에게는 물론 미국내 보수파들에게도 비난을 맏고 있다. 실제로도 1950년 말에는 의회결의 형식으로 국무장관직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위기를 겪었고, 사망할 때까지 보수파들에게 자신의 연설을 변호해야만 했다.

 

에치슨 자신이 변호사로서 성공적인 업적을 남겼고 정치가로서도 평판이 좋았다는 점에서 에치슨 선언은 아시아 정세에 어두운 유능한 정치가가 당장 눈앞에 닥친 국내정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설프게 분쟁이 발생할 것이 예상되는 지역에서 발을 뺄 수도 있다는 암시를 했다가 진짜 전쟁에 말려든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게다가 에치슨은 미국 국내만 아는 정치가가 아니라 유럽 방면에 대해서도 넓은 지식과 훌륭한 인식을 가진 정치가라 더욱 비극적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제정치 전반에 무감각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 당장 마셜플랜이나
서유럽의 재건, 소련 블록의 확대 방지나 나토의 창설 등 트루먼 행정부의 외교정책의 주요 업적은 사실 에치슨의 머리에서 나왔던 것이다. 오히려 서유럽에서 그는 서유럽의 구원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것이 큰 화근이 되었고, 이렇게 유럽에만 관심이 있고 아시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미국의 외교정책은 이후 냉전/탈냉전 시기 내내 지속되어 왔다. 중국이 2010년 G2가 되어 정말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성장했다. 2011년에나 이르러서야 오바마 행정부가 "아시아에 무게중심을 두겠다(Asia's Pivot)"고 선언하면서 정책의 변화를 시사할 정도이니 앞으로 미국의 아시아 정책의 혼조 속에 한반도가 또 다시 비극의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을까 걱정 스럽기만 하다.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인민군은 서옹진반도에서 동주문진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했다. 트루먼대통령의 긴급명령을 받은 일본점령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대만·필리핀·인도차이나 등의 방위에 대비하는 조치를 취했다. 27일에는 유엔총회에서 북한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유엔군 파견과 42개국의 지원을 결정했다. 때마침 소련대표는 유엔 상임이사국으로 중공이 들어와야 한다고 총회에 계속 불참하고 있었다. 그래서 거부권은 행사되지 못했다. 29일 맥아더 장군은 수원비행장에 내렸다. 맥아더는 군용 지프차를 타고 선글라스와 파이프를 물고 한강으로 향했다.

 

패잔병과 피난민이 남하하는 모습을 보며 한강전선을 시찰했다. 맥아더 장군은 그해 1월 26일 70회 생일을 맞이한 노병이었다. 애치슨 미국무장관이 기자회견을 통해 아시아의 방위선에 38선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발표를 한 것은 그보다 2주 전이었다. 이 발언으로 한국전쟁은 미국의 유도전이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 뒤의 자료에서 미국은 49년 중국을 통일한 모택동 정부와의 외교관계를 위해 방위선을 남하시켰다는 점이 해명되기도 한 것이다.

 

어쨌든 이 발언으로 오판한 스탈린과 김일성의 합작품이 6·25침략이었다. 이 논쟁은 스탈린이 몸통이고 김일성이 깃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맥아더는 7월 31일 대만을 방문한다.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의 대만중립화정책을 변경시켜 장개석 군대의 유엔군 합류와 본토공격 등을 구상한다. 그러나 트루먼은 특사로 해리먼을 보내 맥아더의 구상을 중지시킨다. 맥아더는 이를 개탄한다.

 

한국전쟁시 맥아더 장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유엔군이 마지막 사투를 벌이는 순간에 이미 전쟁 초기부터 구상하였던 인천 상륙 작전을 미 합참의 극렬한 반대에고 불구하고  그들을 설득하여 실시한 결과 작전은 성공하여 한국 전쟁의 전환점을 만든 사람이다. 미 합참은 최대 9미터가 넘는 인천의 조수 간만의 차, 좁은 수로, 수많은 수중 장애물, 상륙지역의 협소, 적의 저항 등으로 인해 상륙이 불가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참모들로 하여금 사전 충분한 정보를 판단케 하였는데, 조류와 지형, 날씨, 시기를 고려하여 가능성을 판단토록 했다. 그리고 인천상륙의 가장 결정적인 점은 수도 서울을 점령함으로써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낙동강 전선에 주력하고 있는 대부분의 인민군의 주력을 한꺼번에 섬멸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북한 수뇌부를 포함 대부분 미군의 최고 군사전문가들 조차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던 인천상륙작전을 실행하여 그는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결단은 정확했고 미래를 보는 예측력이 매우 뛰어났던 장군이었다. 남들은 물론 참모들 중에서도 불가능하다고 극구 반대하는 상황에서 그는 가능성을 찿았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의 영웅! 그의 인기는 트루만을 능가하는 상태였고 트루만은 그것이 매우 불편편하였던 것이다. 웨이크 섬에서 대통령 트루만을 만난 맥아더는 먼저 자신이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트루만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는 최종적인  한국 전쟁의 목표는 적의 격멸은 물론 북한의 지휘부를 소멸시키는 것이며 한반도 통일이라고 했다. 공산군이 더 힘이 커지기 전에 중공을 견제하기 위해서 만주 폭격을 주장했고 필요시 핵폭탄까지 고려했다.

 

 

그러나 트루만은 3차 세계대전을 염려하여 맥아더의 건의를 거부했다. 그리고 트루만은 두 사람의 견해차가 큰 것을 알고 돌아와서 고심끝에 그를 유엔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하기로 마음 먹었다. 한 약소국의 생존을 무시하고 오로지 세계평화라는 허울을 앞세운 우둔한 정치 지도자와 가장 군인다운 군인이었던 전쟁 영웅과의 차이점이다. 그것은 고대 사치와 항략에 빠져 무능하던 지중해 강대국 카르타고 조정과 포에니 전쟁의 영웅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과 같은 경우일 것이다.

 

그는 9월 12일 사세보 기지에서 맥킨리호를 타고 인천으로 와 상륙작전을 지휘했다. 9월 29일 맥아더는 탈환한 서울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남한의 행정권을 이양한다. 10월 2일 한국군과 유엔군은 드디어 38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개시했다. 우리 국민은 궐기대회를 열어 북진을 결의한다. 맥아더는 이에 힘을 얻었다.

 

사실 당시 서울을 수복하고 38선 돌파하여 북진하는 문제를 맥아더 장군은 고민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개입문제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중공군이 그리 쉽게 미군을 상대로 전쟁에 개입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의 패전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모택동이 일본 제국주의를 괴멸시킨 미국을 상대로 감히 전쟁을 벌일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강력하게 북진을 주장했다. 맥아더 장군의 생각은 만일에는 중국과 전쟁도 감수해야 하고 그리고  어쩌면 같은 공산국가인 소련과도 동시전쟁을 감수해야 한다. 만약 그럴경우 핵무기 사용 문제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 문제는 자신이 결정할 수는 없는 문제로 생각하고 트루만 대통령과 태평양상의 한 섬에서 만나 상의하게 된다.

 

 트루만 대통령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중국과 전쟁을 두려워 했다. 그리고 소련과 동시전쟁은 더더욱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세계 3차대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소련.중국 등 전 공산권이 대동단결하고  미국을 위시한 전 민주주의 국가들이 또다시 세계 3차대전의 불구덩이에 뛰어 들어야 한다? 아니지... 미국과도 멀리 떨어진 아시아의 조그만한 반도 한국, 그기에다 미개한 반쪽나라 신생국 한국을 위해서 미국이 중국과  전쟁을 치루기에는 명분이 약했고 실익도 별로 였다. 그리고 세계 3차대전을 치루게 될 지 모르는 대 재앙을 초래할 빌미를 미국이 제공한다는 자체가  현재의 미국 대통령인 자신이 책임지기에는 역사의 지탄을 받기는 싫었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이 원하는대로 만주를 폭격하고 중공군의 전쟁개입을 차단하고 중국이 별다른 항의나 반격없이 그리고 소련의 전쟁개입도, 공산권의 대동단결과 대미국 전쟁불사도 없이 한반도를 미군과 연합군이 무력으로 통일시킨다면 맥아더의 인기와 갈채는 대통령인 자신과 비교가 되지 않게 될 것이다. 본래대로 한반도는 북한의 침략만 물리치고 38도선에서 현상유지가 더이상 아무런 손실없이 일본을 지키는 완충지대로 한국의 역활만 생각하면 되며 그것이 정치적으로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도 가장 바람직 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전쟁영웅의 칭호를 받고 있던 맥아더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과를 최대한 확대하고 싶었고 내친김에 완전한 승리를 원했다. 군인은 군사적인 안목으로 전략을 구상한다. 미국의 전술핵무기를 사용하거나 공군으로 하여금  만주지역을 폭격할 수 있도록 승인을 요구했다. 그래서 한국민에게 강대국에 의해서 반쪽이 된 반쪽나라가 아닌 북쪽의 공산세력을 완전히 제거시키고 완전한 한나라로 만들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한국민을 위해서도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며 공산진영의 교두보를 허용할 수는 없었다. 중국이나 소련이 함부로 쉽게 미국과 대항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위력을 알고 있을 것이며 유사시에는 원폭사용도 불사한다. 완전한 승리! 그것만이 전쟁을 지휘하는 군사지도자가 바라는 최종목표이다. 그에게 어정쩡한 휴전이란 있을 수 없다. 자신은 휴전을 생각하지도 않고 있으며 한번 시작한 전쟁은 적 군사력의 완벽한 괴멸과 지휘부의 완전한 소탕이다. 그래야만 두번 다시 이 민족에 불행을 막을 수 있으며 민주주의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10월 15일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은 웨이크섬에서 회담을 갖는다. 대통령과 군 사령관이 첫 대면 하는 자리라 더욱이 대통령이 비행기로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맥아더는 해외파견 14년간의 군 생활이었기 때문에 1945년 4월에 취임한 대통령과 상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이란 나라의 모습이다.

 

이 회담에서 맥아더는 자신의 명성으로 대통령이 불안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트루만을 안심시키기 위해 차기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젠하워는 바보라고 말했다. 맥아더는 다시 만주폭격을 요구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3차대전의 위험성을 들며 반대한다. 맥아더는 공산권의 타파는 아직 군사력이 약한 현시점이 적격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뜻은 관철되지 않았다. 미국 내에서도 맥아더를 전쟁광으로 비판하는 소리도 나왔다. 마침내 12월 중공군이 유엔군 후방에 나타났고 그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인해전술로 달려들었고 야음을 이용하여 은밀히 후방을 차단하면서 유엔군을 포위하는 전술로 막대한 피해를 내자 유엔군은 북진을 포기하고 포위된 병력과 장비를 놔둔채 후퇴를 시작했다.

 

 

모택동은 스탈린이나 김일성의 간청도 있었겠지만 맥아더의 주장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에 밀린 유엔군은 서울까지 다시 빼앗기고 평택-오산 선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1951년 다시 서울을 재탈환했으나 4월 12일 트루만 대통령은 태평양 외딴 섬에서 맥아더 장군과 만나 서로의 생각과 견해를 나눈 결과 엄청난 차이가 있슴을 확인하게 되고 그를 결국 극동군 사령관직에서 해임시켜야 하겠다는 결심하게 된다.

 

 

맥아더는 트루먼에 의해 사령관직에서 해임됐다. 트루만은 맥아더가 만주를 폭격할까봐 불안했을 것이다. 동경에서 맥아더가 떠나는 날 새벽 200만 일본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환송했다. 일본의 오늘은 실로 맥아더의 큰 도움으로 천왕제를 유지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전범도 사면되었으며 전후 일본의 재기에 그의 공이 엄청난 것이 감사하고 있었으며 한국전쟁으로 다시 활기를 띠게 된 군수산업으로 일본 경제는 재기할 수 있었기에 더더욱 고마운 은혜에 감사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경제대국이며 선진국인 일본은 바로 맥아더의 은덕 때문에 성공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미국인들의 환영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4월 19일 맥아더는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했다. 대통령에 의해 해임된 군 사령관이 미국 국회에서 퇴임연설을 한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참모습인 모양이다. 그는 외쳤다. “공산주의 위협은 세계적인 것, 아시아 유화정책으로는 유럽에서도 반공이 안된다. 대만도 다시 중국 본토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고 연설을 마쳤다. 그는 실로 52년간의 군인생활을 마친 것이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은 그의 말이 아니고 미국 군가의 후렴이다. 우리 군가 ‘전우의 시체를 넘어…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와 엄청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1962년 맥아더는 미육군사관학교를 방문, 사열을 받고 연설하고 훈장을 받았다. 그의 생애는 이렇게 마쳤다. 그는 이승에서 6·25 60주년을 기념하며 미의회가 천안함 침몰사건과 관련해 북한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의결한 것을 하늘에서 지켜보았을 것이고, 우리 국회의 천안함 대북결의안 채택은 불투명한 채 참전국과 참천용사들에 대한 감사결의안만을 의결하는 모습에 그의 심경도 불편하리라.

 

 

얼마전 조갑제씨가 쓴 글에서 맥아더와 트루만에 대해서 밝힌 내용이 있었다. 그의 글에 의하면 실제로 한국을 구한 사람은 맥아더가 아니라 트루만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맥아더에 대해서 영웅적인 면모만 일고 있으나 실제는 트루만이 한국 전쟁에 빠른 결심으로 미군 투입을 승인했고 유엔의 참전 결의를 얻어냇다. 그러나 당시 맥아더는 도쿄의 안락한 시무실에서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 군정장관 하지 중장이 보고하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 일임하고 북한군의 침략 보고를 접하고도 별로 위급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한참 후배인 미군의 합참의장 등 군 수뇌부도 맥아더의 요구나 요청에는 항변 한 번 못하고 상급 지시를 내릴 때도 결례가 되지 않도록 무척 신경 썼다고 한다. 맥아더는 트루만의 귀국 지시에 불응하고 합참의 지시도 묵살하기도 하였다. 인천상륙작전도 그의 고집으로 결정되었고 당시 대부분의 군수뇌부에서는 반대하였다고 한다. 다행히 상륙작전이 성공하였고 전세를 뒤집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자 그의 영웅적인 면모는 더욱 미 국민들에게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트루만이 맥아더는 극동지역 황제로 군림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언론을 잘 이용하였고 홍보나 선전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중공군의 개입 정보를 수없이 보고받았지만 개의치 않고 북진을 명령했다. 그러다가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실제보다 10분지 1 수준 정도로 예상했다고 하며 그 규모가 엄청난 것을 알고사는 유엔군을 전선에서 이탈하여 한강 이남까지 지리한 철수를 명령했다. 맥아더는 유엔군이 계속 밀린다면 유사시 한반도에서 유엔군을 철수할 생각을 했고 트루만은 싸움에서 질 때까지는 철수는 안된다고 했다. 그는 유명한 미 의회 연설이 끝나고 청문회에서 그의 그동안의 거짓말과 오류가 낱낱이 밝혀지자 미국민들은 그를 떠났다고 했다.

 

 

결국 한국전쟁을 통해 통일의 유일한 기회를 얻었으나 한반도는 또 이렇게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미국의 정책에 따라 현지 사령관을 해임하면서까지 한반도 현상유지를 고수했다. 전쟁 영웅 맥아더는 자신의 군사적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한반도 통일을 구상했으나 미국 정부의 거부로 만주 폭격이 좌절되었고 전술핵무기 사용도 불허되면서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을 막아내지 못하게 되었고 대신 막대한 피해를 입고 다시 후퇴를 거듭하여 현 전선에서 휴전이 성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맥아더의 영웅 심리는 한반도 통일을 눈 앞에 두었으나 맥아더의 완벽한 승리에 은근히 시기심을 냈던 트루만의 반대로 군사적 패배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군의 퇴패가 트루만에게는 기쁨이었고 그것은 맥아더를 깍아내리는데 크게 일조하였던 것이다. 역사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전쟁의 장수는 군사적 완벽한 승리를 눈앞에 두고도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요구하는 정치인의 견해와 달랐던 점에서 한국통일은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3차 세계대전을 두려워한 트루만과 미국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로 한국전쟁은 쌍방간의 막대한 피해를 내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 왔으며 종전도 평화회담도 아닌 휴전회담을 맺고 현전선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냉전시대의 대리전의 성격을 띤 한국전쟁은 미국과 유엔군의 처참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전쟁 수행에 대한 우유부단함과 현상유지라는 어처구니 없는 정치적 결정으로 한반도 통일을 목전에 두고 그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되었으니 이 어찌통탄할 일이 아닌가! 유엔군, 국군, 북한군, 중공군, 민간인 등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고 한 나라 전체 반도가 초토화되었지만 미국의 국익이라는 정치적 결정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개인의 시기심까지 작용한 정치적 결정에 약소국 국민인 우리의 불행은 다시 반복되고 말았던 것이다. 

 

 


 

 

반공 포로 석방

미국은 한국 정부와 국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트루만의 의도대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 휴전협상에 나섰다. 세계 최강 미국과 소련, 중공 그리고 유엔군의 비전투 지원국을 포함하여 30개국이 참여한 전쟁터에서 세계 최빈 신생국 대통령 이승만은 비록 전시 작전통제권은 넘겨주었지만 전쟁 주권국으로서 당당하게 큰 존재감을 발휘하였다.

 

휴전협정 책임자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는 이승만의 일방적 반공 포로 석방 감행에 분노했지만 퇴역 후 이승만을 존경한다고 했다. "혈맹 미국보다 민족을 더 사랑한 사람, 미국 지식인들보다 미국 역사를 더 잘 알아서 명분을 적절히 구사해서 실리를 얻어내는 데 놀라운 재능이 있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 가장 큰 난제가 포로송환이었다. 양측이 포로를 서로 내어주면 쉬운데 공산군 추산 포로 수와 유엔군이 추산한 포로 수에 큰 차이가 났다. 북한군이 억류한 유엔군 포로는 유엔군 추산 국군은 8만여 명, 미군포함 유엔군은 11,500명인데 반해 공산군 측으로부터 넘겨받은 국군 및 유엔군 포로 수는 전체가 불과 11,500명이었다. 당시 유엔군 측에서 공산군에 넘김 포로 수는 13만 2,474명이었다.

 

10배가 넘는 양측의 차이에 1:1 교환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느냐는 질문에 공산측은 "포로들이 공산군으로 자진 전향해서 인민군에 편입했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하였다. 한마디로 포로를 순겨두고 임의대로 처리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런 문제로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 것을 원치 이놓았기 때문에 공산측 요구대로 그대로 인정하고 진행하였다. 미송환 국군 포로와 그 자녀들은 지금도 북한에서 최하층민이 되어 지금도 모진 학대와 냉대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자는 소수의 공산당이지 북한 주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포로로 잡힌 반공 포로를 석방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포로들이 공산권으로 돌아가면 숙청당하는데 특히 반공 의사를 밝힌 포로들이 북으로 돌아가면 끔찍한 일을 당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2차대전 후 소련으로 돌아온 자국의 포로 소련군을 모조리 숙청했다.

 

미국은 이승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을 반대하던 소련의 스탈린이 죽자 1953년 6월 8일 한국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공산권 의견이 많이 반영된 가운데 유엔 포로교환 협정에 합의하였다.

 

이승만은 유엔 참전국의 이러한 결정에 "전혀 무의미하다"라고 한마디로 잘라서 말했다. 그리고 주권국가 대통령으로서 당당하게 선포했다. " 유엔군 모두 철수해도 좋습니다. 우리 운명은 우리가 결정하겠습니다. 도와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도움을 요청한 우리가 잘못입니다. 미안합니다. 현제 이런 상황에서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협조를 약속해 줄 수 없습니다." 

 

아이젠하워에게 협조해 주지 못하겠다는 이승만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휴전하려는 미국의 의중을 알고 휴전 전에 분단국가의 생존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확실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미국으로부터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확보한 후 행동을 개시하기로 했다. 미국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이승만은 선언이나 약속보다 구속력이 강한 조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1949년 5월 중순, 주한 미군 철수시 나토 수준의 조약 체결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우호통상조약 이상의 것은 안 된다' 며 거절했다. 당시 미국은 자원도 없고 가난하고 매력 없는 한국 때문에 자칫 발생할지도 모르는 3차 세계대전이란 새로운 전쟁에 휘말리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이 목표를 관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반도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미국의 조바심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거족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1953년 4월 11일부터 부상병 포로교환 협정이 체결되어 4월 20~26일에 포로교환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편, 대한민국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 입장을 지지하는 의안을 가결하고 이에 힘을 얻은 이승만은 휴전 저지 및 적극 활용 외교작전에 돌입했다. 그는 미국 대통령에게 "중공군이 압록강 남쪽에 주둔한 채 휴전된다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되찿아 독자적인 작전을 단행하겠다."라는 서한을 보냈다.

 

이에 놀란 아이젠하워는 "유엔과 미국이 한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계속 노력하겠으니 휴전에 협조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아 한국 정부는 휴전조약 체결 전에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소련 침략 시 미국의 즉각 참여와 지원, 한국군 증강 선결을 요구했다. 미국은 휴전 체결 전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어려우니 현재 휴전안대로 실행하고 휴전 체결 후 요구사항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배신했던 사건을 비판하면서 미 대통령을 자극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가쓰라-테프트 밀약, 전범국 일본 분할 대신 한반도을 분단시켜 38도선 이북을 소련에게 넘긴 일, 에치슨 선언으로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시켜 공산권이 남침 기회를 제공했던 점 등을 들면서 미국을 비판했다.

 

휴전회담 진행 중 중공군의 대공세가 6월 한 달 내내 계속되어 전사자 4.861명, 부상 16,000명, 실종 2,300명에 달했다. 희생자 대부분이 한국군이었다. 그래도 이승만은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안전장치를 해놓지 않으면 앞으로 수백만 명 이상의 희생이 또 생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한국 국회는 통일없는 휴전은 반대한다며 149 :1로 가결하는 등 반대를 주장했으나 미국과 유엔은 일방적으로 휴전을 급속히 진행하였다. 휴전의 최대 걸림돌인 포로교환 협정마저 6월 8일 서명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휴전선 확정 뿐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반공 포로 석방을 단독 감행하기로 했다.

 

당시 포로 언전문제로 친공 포로는 거제도에 그대로 수용하고 있었고, 반공 포로는 부산, 마산, 광주, 논산, 대구, 영천, 포항 , 부평 등 7개 지역에 분산 수용하고 잇었다. 포로 경비는 대부분 한국군이 맡고 있었다.

 

원용던 헌병 총사령관을 불러 1853년 6월 11일 반공 포로 석방을 전국 동시에 결행할 것을 지시했으나 준비 부족으로 한 주 연기했다.

 

포로수용소를 함께 지키던 유엔군을 1953년 6월 18일 0시를 기해 각 지역에서 동시에 유엔 감시원을 제압하고 전기를 끊고 철조망을 뚫어 포로들의 탈출을 지원하였다. 관공서와 민간인은 탈출한 포로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주어 보호하고 숨겨주라고 했다.

 

이승만이 감행한 이 거사로 무려 26,424명이 자유를 찿았는데 이중 탈출 과정에서 61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부상당했다. 탈출하지 못한 반공 포로는 8,293명이었다.

 

허를 찔린 미국은 크게 격분했다. 유엔군 사령부는 한국 정부 최고 위치에서 비밀리에 계획된 행동이라고 비난의 성명을 발표했다.

 

판문점에서 휴전협정 마무리 세부 조정 작업이 즉각 중단되었고, 양측 고위 연락 장교 회의에서 미국의 윌이엄. 헤리슨이 반공 포로 탈출 사실을 공산 측에 정식 통고하였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다고 설명했지만 공산측 대표들은 회담장을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세계는 큰 충격에 빠졌고 휴전에 집착하던 참전국들은 오래 공들인 휴전이 결렬될까봐 걱정하며 비난하였으나 예상했던 공산권 반발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 도처에서 반공 포로 석방은 강대국 지도자들도 하지 못한 영웅적인 결단이라는 찬양이 이어져 국제적으로 이 대통령의 명성이 자자했다.

 

미국과 한국을 왕래하며 의견을 조율하던 로버트슨은 이승만의 애국심과 열정에 크게 감화되어 미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 대통령은 국민 전체를 분발시켜 공산주의와 싸우도록 만들었습니다. 미국을 포함한 세계 어느 나라 지도자들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정신과 의지는 보존해야 하며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자입를 제공한 그의 군대는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크고 강력한 군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힘이 절대 필요합니다."

 

미국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은 할 수 없이 휴전 성사 마무리에 이승만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게 되었고 이승만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 한미공동방위조약 체결 

2. 국군사단 20개 증강

3. 전후 경제원조 약속과 경제 복구비 2억 달러 즉각 지불

 

이것은 작전권까지 내어준 불리한 상태에서  강대국들과 당당히 맞선 주권 행사였다. 만약 이 대통령이 반공 포로 석방이라는극약처방을 내리지 않았다면 과연 미국이 지금 우리를 어떻게 대하고 있을 것이며 우리의 처지가 어떻게 되었을 것인지 의문이다. 

 

국군 포로는 국가를 위해 병역의 의무를 다하다가 포로가 되었고 남한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국군 포로는 현재까지 북한 지역에 잔류하고 있는 수는 대략 5~7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지금까지도 그들의 송환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여 왔고 그들은 북한에서 가장 낮은 하층민이 되어 천시받으며 반세기를 살았고 지금은 대부분 노령이 되어 이 세상을 하직할 날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포로 송환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는 남한 정부를 얼마나 원망하며 귀향을 손꼽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었을까? 이미 고인이 된 국군 포로들의 혼이 한맺힌 눈물을 흘리며 대한민국의 밤하늘 위를 빙빙 돌아다니는 듯하다.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951년 체결한 센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전승국 연합 48개국이 전후 일본 처리를 상의하고 항구적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협약한 조약이다. 그러나 미국은 정치적 의도를 갖고 최대 피해국인 남한, 북한, 대만, 중국을 초청하지 않고 진행시켰다.

 

조약 진행 중 미 국무성은 일본의 끈질긴 로비에 여러 차례 독도를 일본에 넘기려 시도하다가 그때마다 다른 연합국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 당시 한국은 6.25 전시상황이라 경황이 없었다.

 

조약 초안

1. 1~5차 연합국 기본 초안에 독도는 한국 영토 명시

2. 6차 초안, 미 국무성 초안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명기하여 발표

 

그러자 영국을 포함한 연합국은 미 구무성 6차 초안을 반대하고 7차 초안에 한국의 섬 4천 개를 대표하여 울릉도, 독도, 제주도는 한국 영토임을 명시하여 발표하였다.

 

그러나 미 국무성은 또다시 8차, 9차 초안에 독도를 억지로 일본에 편입시켜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영국을 포함한 연합국은 미국의 8차, 9차 초안을 반대하고 10차, 11차 초안에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발표한다. 12차 초안엔 미 국무성이 또다시 독도를 일본 영토로 명기하지만 미국 외 다른 연합국이 모두 반발하여 13차 초안에는 한국 영토임을 명기하게 된다.

 

이것으로 미국의 속셈이 또다시 좌절되자 미국은 영국과 7차에 걸쳐 영미회담을 하며 독도의 일본 편입 억지 주장을 거듭하다가 계속 실패하자 "일본은 한국 독립을 승은하는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한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라는 내용으로 독도를 명기하지 않은채 생략하고 영미 합동 초안을 최종 승인하여 센프란시스코 조약 체결을 발표하였다.

 

일본과 오늘날의 독도 분쟁의 원인은 이미 센프란시스코 강화회담에서부터 미국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대부분 연합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약 초안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만드려는 속셈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의 미국에 대한 전방위 로비가 결국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독도를 명확하게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조약 초안에서 빼 버림으로써 분쟁의 씨앗을 만든 셈이다.

 

 

 

 

 

벤플리트 보고서

이 보고서는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관련하여 주한 미 사령관을 지냈던 제임스 밴 플리트가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사로 재직 시 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을 방문한 뒤 작성한 것으로 30년간 특급 기밀로 분류된 문서였다가 2006년 한국 언론에 비로소 그 내용의 일부가 보도되었다.

 

내용은 6.25전쟁 이후 한국군의 전투력 증강에 대한 미국의 거센 반대 내용과 어업문제 및 이승만 라인을 둘러싼 한.일 간의 정치, 경제적 갈등 그리고 독도 문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와 입장을 밝혔다.

 

" 미국 정부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현재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한국 정부가 독도 문제로 일본과 논쟁을 벌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미국은 독도 문제에 관한 미국의 이런 입장을 밝히지 않고 다만 비밀리에 한국 정부에 통보할 뿐이다. 이승만 정부와 일본 정부의 독도에 관한 영토 분쟁은 국제사법재판소에 당연히 제소되리라 보며 재소 시 미국은 일본 입장을 지지할 것이다."

 

미국은 센프란시스코 강화회담시 한국을 초청 명단에서 빼고 미국 위주로 추진했던 센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도를 일본에 넘기려는 사항이 연합국 측의 거센 반발로 계속 실패하자 조약 최종안에서 의도적으로 독도 조항을 삭제하여 분쟁의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조약에 서명하고도 조약을 인정하지 않는 별도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대국답지 못한 비열한 꼼수를 계속 부렸다.

 

센프란시스코 조약은 2차대전 이후 국가 간의 영토 범위 확정과 관련 규정을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국제 질서에서 구속력을 지속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 일본은 조약에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명문 규정이 없다는 근거하에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국립 문서 기록국에서 유일하게 작성한 지도가 나왔는데 일본 영토에서 독도가 분명히 배제되어 잇었다. 이 지도는 조약 당시 미국 측 전권 대사였던 존 포스터 덜러스의 대일평화조약 문서철에 완벽하게 남아 잇다.

 

일본은 이렇게 독도 조항이 빠진 것을 이유로 독도를 자국 영토로 우기고 일본 국민을 선동하면서 한반도 및 동아시아 대륙 재침략을 준비하고 있다. 이런 분쟁의 씨앗은 미국의 정의롭지 못한 편파 결정 시도로 생겨났던 것이다.

 

미국식 정의란 정의롭지 못해도 자국의 국익에만 기여하면 되므로 최대 피해국인 약소국 한국이 안중에 있을 리 만무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꾸어도 전혀 상관없다. 왜냐하면 인류 보편적 양심으로 처리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미국의 이러한 배신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한반도 남쪽이 자국의 국익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되는 날, 그날 이후부터는 또다시 배반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가서야 과거 월남처럼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우리집 마누라가 구청도서관에서 소설책을 자주 빌려오는데, 최근 빌려온 책 중에서 김진명씨가 쓴 '나비야 청산가자'라는 책 1, 2권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보면 미국의 한반도 배반의 역사 내용이 나오는데, 중국과 미국이 북한의 김씨 세습독재정권의 폭정을 종식시키고 핵무장을 해제하는 방법으로 미국이 중국을 이용하여 북한을 무혈강점하는 밀약을 맺는데, 한반도 목에 해당하는 평양과 원산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중국이 차지하여 자국의 영토에 편입하고 남쪽은 한국을 포함 미국이 차지하여 지배하는 밀약이다, 즉 제2의 카스라-테프트 조약을 밀약하는 가상 이야기다. 물론 허구지만 앞으로 사태 변화에 따라 중국과 미국의 국익이 일치만한다면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북한 정권은 사라지겠지만 한반도 통일은 커녕 두 강대국의 먹잇감으로 또다시 분단되어 속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몰론 소설이라 하구지만 사실 그렇게 진행된다고 해도 휴전회담처럼 우리는 반대할 것이고 배제될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주도하지 못하고 지금처럼 미국의 속국으로 전락해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당할 것이다. 정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몸서리치는 가상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또다시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할 지 모른다.

 

미국은 고대 로마처럼 천년 강대국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하고 있다. 로마는 동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거의 2천년 가까이 존속했던 대제국이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정의를 신조로 신용, 정직, 관용과 포용정책을 추구하여 세계제국을 건설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문명과 문화가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이 추구하는 정의는 자국 이익에 부합될때만 정의로 해석하고 약소국이나 적국에 대해서 입장과 처지를 무시하고 보편적 양심이 없는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또 로마제국과는 반대로 관용과 포용심은 전혀 없는 이기적이며 정의롭지 못한 꼼수로 세계질서를 지배하려 하고 있다. 견제가 없는 독재정권이 부패하듯이 미국 일국의 세계 지배체제는 지양되어야 하고 배신의 역사에서 보듯이 우리는 미국 일변도의 정치.외교.국방을 지양하고 자주국방을 이룩하여 우리 스스로 지혜로운 선택으로 남북이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는 길이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우리를 지키며 위대한 역사를 펼쳐나가는 완전한 독립국이 되어야 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