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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겨울 11 : 미국의 한반도 배신의 역사 1

 

 

강남의 겨울 11 : 미국의 한반도 배신의 역사 1

 

 

 

 

2월도 벌써 반을 지나고 이번주에는 설을 맞이하지만 별로 설을 맞이하는 기분은 나지 않는다. 재래시장이 약간 봄비고 백화점이 북적인다지만 대부분의 서민들은 설이 별로 달갑지 않다. 왜 그럴까? 나만 그런가?  조상숭배, 효에 대한 개념이 점차 흐려지다보니 고향을 찿는 의미도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또 모두가 살기 힘들고 어렵다보니 가족이 같이 만나는 것도 별로 달갑지 않고 독신, 이혼, 미혼, 미취업, 미혼모, 가정붕괴, 사고, 장애, 질병 등으로 우환과 걱정이 있는 가정이 많아 가족들이 같이 만나는 것도 별로 달갑지도 않고 여의치도 않다. 그래도 명절이라는 이유로 고향을 찿아야 하고 마을 사람들과 부모님께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고 또 어쩔 수 없이 체면치례라도 해야 할 사람들은 바리바리 선물을 사들고 고향을 찿아가는 데 금년 또한 귀향 인파가 고속도로에는 넘칠 것이다.

 

우리의 전통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윤리.도덕이 붕괴되어 가고 핵가족 시대가 허물어져 가고 그것도 분열된 가정이 되어 각자 흩어져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가족이 같이 찿아갈 고향이라도 있는 사람은 그래도 다행이겠으나 각종 사정으로 그것도 아닌 사람도 부지기수 일 것이다. 또 명절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각종 사고도 무수히 발생할 것이다. 가족들이 만나 서로 안부를 확인하고 즐겁고 보람찬 명절을 보내면 다행이지만 많은 가정에서 서로 감정이 상하고 불쾌한 언쟁을 벌이거나 재산 문제로 다툼까지 벌이고 음주운전 등으로 명절이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도 많다. 

 

사람이란 서로 만나면 남보다 더 잘 나 보이고 싶어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서로 경쟁적으로 자기 자랑을 하다보면 형편이 못한 사람은 은근히 속이 상하고 피곤이 중첩될 것이다. 서로가 긴장되고 피로가 중첩된 가운데 조그만한 말 한 마디에 분노가 치솟고 무시하는 말 한 마디에 설움이 북받치는 것이 가까운 가족 간에 벌어지는 비교 차별 언행이다. 그래서 명절을 따뜻하게 보내는 일은 남이 뭐라고 하던 나 스스로 분노 억제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일차적이다. 경우에 어긋나는 말을 삼가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예를 다하며 공손하며 메너를 지키고 욕심과 분노, 자만심을 버리고 절제하는 언행과 자세로 같이 화합하고 서열을 따지지 말고 굿은 일과 힘든 일은 내가 먼저 감수한다는 태도로 행동한다면 무엇이 문제일 것인가? 고관대작, 출세, 명품, 보석, 일류, 큰집, 좋은 차, 자존심이 무엇이며 금은보화와 부귀영화가 무엇인가? 세월이 지나면 모두가 부질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탐욕을 부리던 하잘 것 없는 것들에 불과하고 눈에 보이는 스크린 영상 같은 허상에 불과한 것들이다.

  

안개낀 영종대교를 달리다가 기록적인 106중 충돌사고가 났다. 또 애꿋은 귀한 생명들이 속절없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바다 위에 설치한 다리에 예산 문제로 속도감지기도 없고 안개 경고등도 부족하고 사전 경고설비도 미비하고 기상 돌변시 경찰의 통제도 없었다. 긴 다리를 건설하는 데 급급하여 이러한 기후와 풍속 등을 고려한 충분한 안전시설 설치를 소홀리한 설계와 관리주체에 문제가 있다. 이 다리는 민자 시설로 한 해 1,000억 가까운 보조금을 지불한다고 하니 시설은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운전자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아무런 경고도 없이 속도도 제한 않고 그냥 달리니 대형사고가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엉금엉금 기어가도 시원찮을 판에 블랙박스를 보면 죽음을 불사하고 모두가 달리고 있었다. 안개가 지척을 분간하기 힘든 상태에서 달리는 사람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경우에는 안개가 걷힐 때까지 안전한 장소에서 기다리다가 가는 것이 최선일 것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안개가 자욱한 길을 죽을 줄도 모르고 달리는 모습은 어쩌면 우리들이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국제정세에는 둔감한채 살기 좀 나아졌다고 비싼 외제차를 타고 해외 여행을 위해 인천공황으로 달려가다 불행한 사고를 당하는 것처럼  우리들은 안개낀 앞날의 미래를 알 수가 없다.

 

 

 

 

 

한반도, 과연 미래가 있는가?

반토막 난 한반도 남쪽에 배수진을 친 우리는 사면초가나 마찬가지다. 한반도는 주변 강대국의 먹잇감이 되어 서로 침을 흘리며 자국의 국익에 따라 한반도 정책을 달리해 왔다. 명, 청, 일본, 미국, 소련 등 힘이 강한 강대국이 항상 한반도를 지배하였고 그 와중에 우리 민족은 이놈 저놈에게 가랑이 벌리는 창녀처럼 만신창이가 되었다. 조선 500년 동안 양반사대부에게 수탈당하고 일제에 강탈당하고 지금은 미국에 국부가 유출되는 종속국이 되어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반도 북쪽에는 세계사에 보기 드문 호전적인 김씨 세습 공산 왕조 국가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데 안간힘을 쏟고 있고 주민들은 억압과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줄줄이 탈북을 시도하고 있다. 모두가 강대국의 이해관계로 빚어진 불행한 우리들의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제3공화국의 기적적인 경제부흥으로 가난과 굶주림을 겨우 면하고 지금은 살기가 좀 나아졌지만 정치는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고 이념과 사상은 우익과 좌익으로 갈라져 국론을 분열시키고 갈등국면을 조장하고 있다. 경제는 잠시 부풀어 오른 물거품에 불과하여 국제정세에 따라 언제 공황상태로 한꺼번에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취약한 구조이다.

 

우리는 신라 장보고처럼, 고대 카르타고처럼, 유럽의 네들란드처럼 해양으로 진출할 때 엄청난 국부를 창출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반도내에서 서로 치고 받거나 북방 대륙으로 진출을 여러차례 시도했지만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 백제 이외에는 성공하지 못했고 우리의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현재는 무역강국으로 동북아의 물류 중심지로 거듭나야 하지만 후진적인 정치로 인해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남북관계와 대일갈등, 중미 사이에서 우리의 외교.국방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천민자본주의가 사회정신을 병들게 만들었고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돈이면 다 된다는 가진자들의 천국같은 나라가 바로 이 나라다. 이런 타락한 시대를 개혁하고 민족정신을 올바르게 일깨워주고 새로운  비젼있는 새시대정신을 대변할 수 있는 지식인은 사라졌고 계층을 불구하고 모두가 출세와 재물, 성적인 쾌락에만 탐닉하고 있다. 안보.국방은 국익을 다 퍼주더라도 신형 장비와 구식 장비, 도태 예정 장비 등을 구입해주어야 하고 미사일 족쇄, 원전 재처리 물질 통제, 불평등 협정, 시장 개방 등 미국에 종속되어 찟어진 핵우산에 의지하여 국방을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군은 개혁은 커녕 장군에서 말단까지 폭행, 성추행, 자살, 정제되지 못한 언행과 태도로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고 방사청의 무기개발 및 도입에 엄청난 비리가 고구마 줄기처럼 밝혀지고 있는 등 각종 비리와 부패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화는 잠시 한류의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날고 있는 듯하지만 탐욕과 자만에 빠져 있다가 언제 추락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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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반도 배신의 역사

 

반미도 아니요 친미도 아닌 민족의 역사적인 관점에서 미국의 한반도 배반의 역사를 살펴본다. 아래 이야기는 김성웅씨가 쓴 '대한민국 이야기'란 책에서 요약한 내용이다. 그 책을 보면 대한제국 이후부터 우리는 미국을 짝사랑 해왔고 미국은 배신의 역사를 되풀이 해왔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부터 '민족자결주의', '얄타회담', '도쿄 전범 재판', '미소공위 신탁통치안', '애치슨 라인 선언', '한국전쟁', '반공포로 석방', '센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밴 플리트 보고서' 등에서 그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가쓰라-태프트 밀

먼저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는 약소국 필리핀과 조선을 희생양으로 삼아 서로 삼키기로 약속한 주역인 루즈벨트 미 대통령은 포츠머스 러일 평화조약 채결 중재의 공으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루즈벨트는 메이지 유신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일본에 대해서 매료되어 큰 호감을 가졌고 반면 조선에 대해서는 경멸이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를 저지하려면 일본이 한반도를 차지해야 한다'고 하면서 일본의 조선 침략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882년에 맺은 '한미통상수호조약'은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는데, 순진하게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믿고 대한제국 고종의 특사로 활동한 이승만은 미국의 냉대와 무관심으로 전혀 결실을 거둘 수 없었다.  

 

당시 가쓰라-테프트 조약에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극동의 평화유지를 위하여 일본의 조선 독점 점령을 미국이 인정하는 댓가로 일본도 미국의 필리핀 단독 점령을 돕는다.  또 러일전쟁 후 루즈벨트는 "동아시아에서의 전쟁은 모두 조선의 존재 때문에 생겼으니 일본이 독점 관리하는 것이 항구적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다"고 했다. "이웃을 침략하는 제국주의가 나쁜 것이 아니라 먹잇감이 된 약한 나라 때문에 주변국의 분쟁을 유발하여 평화를 깨뜨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의 종주국 위치를 확고히 하는 것이 동양평화의 핵심이다"라고 했다. "일본은 더욱 분발하여 조선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기 바라며 조선이 미국에 주기로 한 이권을 존중해 달라"라고 하면서, "한국뿐 아니라 널리 극동 전 지역에서 일본이 지도적 역활을 맡는 것을 인정한다"며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논리에 따른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결론적으로 이 밀약은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의 씨앗을 뿌린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전쟁의 씨앗을 뿌린 사람에게 노벨 평화상이 주어졌고 세계를 상대로 철저히 기만.평화 사기극을 진행한 미국의 위선이 가증스러울 뿐이다. 물론 당시 노벨상 위원회는 이러한 밀약 사실을 전혀 몰랐다. 미국은 필리핀 점령 과정에 수십만 명의 민간인 살해는 물론 선교사를 앞세워 화와이를 강탈했고 한미수호조약을 배신하면서 일본의 대한민국 침탈을 묵인하고 적극 지원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백인 우월주의자였으며 세계 평화를 가장한 위선적인 전쟁광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으로 우리 민족은 오늘까지도 비극의 역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월슨의 '민족자결주의'

민족자결주의는 "모든 민족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며 1918년 1월 8일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14개항은 당시 진행되고 있던 독일과 러시아 간의 단독 강화를 견제하는 데 1차적인 목표를 두었다. 그러나 독-러 강화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1차 목표는 실패하였지만 그 주장은 세계적으로 환영을 받아 국제연맹 그리고 국제연합 설립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1차대전 전승국 식민지는 모두 제외되었고 패전국 식민지만 해당됨에 따라 일본은 전승국으로 일본의 식민지 조선은 해당되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의 꿈같은 선포에 식민지로 수탈당하던 많은 국민들은 생명을 걸고 비폭력 평화 만세 운동을 벌였으나 모두 총칼로 진압되어 죽어간다는 사실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어도 미국 정부는 모른 체하였다. 당시 3.1만세운동으로 희생된 수는 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조선 총인구의 6.3% 106만 참가, 7,509명 학살, 15,961명 부상, 46,948명 구금, 47개 교회 소각, 2개 학교 소각의 결과를 초래했다.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양심있는 미국 신문들은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일본을 규탄하였고 미국 의회에서도 문제가 제기되어 3년간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미 상원에서는 '한국민의 정부 수립을 위한 큰 뜻에 동감한다'는 결의안도 통과되었다. 또 1905년 한일합방 조약을 정당화한 과오 등 '미국 외교상 중대한 과오를 저지른 데 대한 반성의 기회를 갖자'는 제안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공식 태도는 언제나 냉담하였고 이에 임시정부와 애국지사, 한국민은 크게 실망하였다. 그러자 미국 언론은 일본의 야만적인 행동을 계속 지지 묵인하는 미국 정부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어 한국에 대한 동정적인 기사가 크게 증가하였다. 그래서 1944년에 가서야 미국 정부는 광복군의 훈련을 도우며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2차 대전 당시 임시정부는 연합군에 참가 신청을 여러 차례 했으나 미국의 일관된 한국 배제 정책으로 말미암아 계속된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전승국이 되지 못했다.

 

 

얄타회담

1945년 2월, 소련 크림 반도의 휴양도시 얄타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거두가 모여 전후 처리를 논의 하기 위해 모였다. 그리고 유럽에서 희생이 가장 많았던 소련에 대한 위로와 극동전선 참여 및 러일전쟁 때 일본에게 빼앗긴 영토회복을 약속했다.또 패전이 임박한 일본 분활과 일본의 식민지 한국 처리 방안을 결정하였으며, 연쇄 전범국가 독일의 전쟁 재발방지를 위해 독일 영토에 대한 분할 통치를 결정했다. 또 다른 전범 국가인 일본의 영토 분할에 대해서는 미국의 전쟁 기여도를 내세워 일본의 전 영토를 미국이 독점 지배할 것과 일본 본토 분할 대신 소련을 위해서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을 대신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미국의 결정은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이며 세계 평화를 가장한 최악의 날강도 짓을 서슴치 않고 저질렀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세계 평화를 내세우며 보편적 정의는 철저 무시하고 오로지 자국의 계획된 국익을 위해 동아시아에서 2,300만 명이나 죽음으로 몰고 갔던 전범국 일본의 영토는 보존하고 오히려 일본에게 철저히 착취당하던 한국에게 일본이 저지른 학살전쟁의 죗값을 치르게 한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대한반도관이었으며 이기적인 평화 해법이었다.

 

한반도 분단의 비극은 일본을 독점 지배하려는 미국의 정의롭지 못한 범죄적 결정의 씨앗 때문이다. 이렇듯 영토 분할 결정을 먼저하고 이어지는 도쿄 전범 재판도 미국식 평화 해법으로 편파적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이 미국 정치가들의 일관된 사고방식이다.

 

 

도쿄 전범 재판

도쿄 전범 재판은 인류 역사가 기록된 이래 최악의 위선이며 이는 역사가 정의의 편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도쿄 전범 재판이 정도를 벗어난 부분은 조선인 판사나 검사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며,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수십만 명의 남녀가 일본 전쟁에서 짐승처럼 학대 받았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도쿄 재판은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모순된 판결이었다. 1946년 5월부터 시작된 도쿄 전범 재판에서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 하기 위해 전쟁 주범인 히로히토 천황과 천황제도 보존을 목표로 온갖 억지 논리를 동원하여 본래 목표한 결정대로 신속히 결정지었다. 미국의 의도대로 일본은 영토 분할 없이 미국 단독 점령지로 집행했고 극동 군사 재판도 미국 주도하에 일방적 진행을 강행했다.

 

천황은 죄가 없으며 천황 대신 도조 히데키에게 죄를 몰아서 처형했고, 호주 출신 검사 앨런 맨스필드는 끝까지 천황의 소추를 강력히 주장했지만 미국의 적극적인 방해로 부결되었다. 외무대신으로 임시 총리를 맡아 태평양 전쟁을 끝까지 반대하다 정계를 은퇴한 히로타 고키를 처형했고, 생체실험을 자행하며 인간을 마루타로 삼아 악행을 저질렀던 731부대 관계자에게 전원 면책을 선고했으며, 전쟁에 적극 참여한 기업인을 전원 기소 보류했고, 난징 대학살 주범자는 천황 친척이라 기소 보류했을 뿐 아니라, 위안부 관련 책임자 전원 기소 보류했다. 그래서 1948년 12월 A급 전범 28명 중 7명만 사형 집행, 스가모 형무소 A급 전범 용의자 17명을 포함 나머지 용의자도 전원 석방했다. 군사재판 대상 5,700명 중 B급, C급 전범으로 기소된 사람 중 연합군 포로 감시원으로 강제 동원되었던 조선인 148명을 포함 총 984명이 처형되었다.

 

석방된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는 나중에 수상이 되었고, 나머지 A급 전범 대부분 정부 요직에 재등용되었으며 일부는 기업에 중용되면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세계 평화를 위한다는 미국의 위선적 정의 실현과 일본의 경제부흥을 크게 도운 댓가로 맥아더는 일본 최고 훈장을 두 차레나 받았다. 이러한 결과 도덕적 뷸륜과 양심이 상실된 일본 극우가 잉태되었으며 지금은 다시 자위대의 해외 파병 시도는 물론 평화헌법 마저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진주만 기습으로 죽은 미군 3천 명에 대해서는 영원히 기억하며 추모해도 훈춘사건으로 죽은 조선인 3만여 명, 3.1 만세운동 당시 죽은 수만 명, 국내 민족주의자 및 독립운동자에 대한 무차별 고문과 살해된 사람은 헤아리기도 힘들지만 기억하지도 못한다. 또 관동대지진 당시 유언비어로 죽은 조선인 6천여 명, 난징대학살로 죽은 중국인 30여만 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죄도 묻지 않는 세계적인 위선 국가가 되었다. 이런 나라에 의지하겠다고 바지가랑이 잡고 매달려야 하는 우리들의 신세는 앞으로 국제정세에 따라 또 어떻게 내동댕이쳐질지 모른다는 점이다.

 

 

한반도 신탁통치안

한반도 신탁통치안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구상했던 안이었다. 얄타회담 당시 미국은 소련과 비밀회담에서 소련의 대일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소련에게 유리한 여러가지 제안을 했다. 만저 외몽골 현상 유지, 사할린, 쿠릴 열도 소련 귀속, 대련항 국제화와 소련 우선권 승인, 여순항 소련 군항 승인, 남만주 철도, 동차이나 철도 중.소 연합운영, 장제스 정부 유일 승인, 한국 신탁통치안(일본 분할 대신 한국 분할 신탁 통치 필요 제기) 제기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하고 한반도는 광복을 맞이하였다. 35년간의 일본 지배는 끝이 난 것이다. 하지만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정부의 수립은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 미군과 소련군이 신탁통치를 염두에 두고 한반도에 군정을 실시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독립 정부를 수립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을 기다려야만 하였다. 이 기간에 좌익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지원으로 공산주의자들이 행정의 주도권을 잡았다. 남한에서도 좌익들이 선수를 쳤다. 여운형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봉대하는 대신 좌익들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미군이 진주하기 하루 전날인 9월 6일에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을 선포하였다. 이 인공은 실제로는 박헌영 파의 조선공산당이 장악한 조직이며 그 뜻은 임정 대신에 인공이 정부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좌익들이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것이었다.

인공이 주석으로 추대한 이승만은 이같은 책략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승만은 임정을 봉대하고 임정을 좌우익을 통합하는 한민족의 구심 세력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조직한 것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였다. 하지만 이후의 과정에서 인공을 비롯한 좌익은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이승만은 신탁통치 문제가 대두되자 김구의 임정 세력까지 아울러서 1946년 2월 8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였다. 2년 후 대한민국 건국의 주도세력이 된 이 조직은 인공 세력을 "반민족적"으로 규정하고 성명서를 통하여 "조국이 없이는 계급도 사상도 행복도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하였다. 계급투쟁 대신 민족의 단결을 호소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국민국가의 가치가 아닌가?

찬탁과 반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본질을 꿰뚫고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국가를 건설하려 노력하였다. 미국이 원하는 바도 역시 그러하였다. 하지만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조직되던 같은 날에 북한은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한반도 분단을 촉진하였다. 이 조직은 '토지개혁' 등 사실상의 정부 역할을 해나갔던 것이다.

이승만은 소련이 선전술의 도구로만 활용하는 미소공동위원회를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정읍 발언을 통하여 남한에서의 단정 수립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리고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외교활동을 통하여 신탁통치의 부당함을 알렸다.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제 모양을 갖춘 국가로 새로 태어난 날이다. ⓒ 국가기록원

 

 


결국 미국도 소련과의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련에 있어서 민주주의란 공산주의 내지 인민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며 소련이 원하는 것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남한에 인민공화국을 세우겠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기로 한다. 유엔은 남북한의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은 북한에서의 총선거를 거부하였다. 이와 함께 남한에서의 총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제주의 남로당원 김달삼은 제주도에서 4.3일 무장봉기를 일으켜 경찰지서 12곳을 습격하였다. 제주에서의 선거는 그리하여 1년이나 지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도의 남로당 주도 무장 세력을 진압하기 위하여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14연대에 제주도 출동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김지회 중위, 지창수 상사 등 군대 내의 남로당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순천지역을 점령하고 인민공화국을 주창하였다. 그러다 진압군에 밀린 반란군은 지리산 등으로 들어가 빨치산으로 계속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하였다. 북한 역시 수천 명의 빨치산을 남파하여 무장력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6.25가 일어나자 빨치산들은 북한군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히자 남겨진 빨치산은 1960년대 초까지 반대한민국 활동을 하였다.

북한과 남로당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건국되었다. 5.10 총선을 거쳐서 구성된 제헌국회 198명의 의원은 5월 31일 첫 회의를 열었다. 제헌국회가 개회하는 이날 오전에 이승만은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오후에는 역사적인 식사를 하였다. 임정에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이승만 국회의장은 앞으로 구성될 정부가 1919년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이며 이는 "29년만에 민국의 부활"이고 동시에 "완전한 한국전체를 대표한 중앙정부"라고 공포하였다. 그리고 이 제헌국회는 7월 17일 헌법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헌법에 따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8월 15일 출범하게 된 것이다.

 

 결국 신탁통치안은 소련의 야욕과 미국의 야욕이 서로 상충하는 한반도를 서로 독차지할 욕심으로 미.소공위를 수차례 열었으나 실패하고 말았고 한국정부와 국민들이 좌우로 갈라져 신탁 찬성과 반대로 여론이 들끓고 있던 중 38도선이 차단되고 북조선에서 소련의 지원하에 김일성 정권 수립이 가속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여 유엔 감시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려 했으나 소련과 김일성의 반대로 남한에서만 단독정부가 수립되게 되었고 이어서 북한 김일성도 바로 북한 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이는 나중에 김일성에 의한 한국전쟁(6.25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김일성은 한반도통일전쟁 즉 공산적화통일이라는 미명하에 소련으로부터는 막대한 신형 무기와 장비, 중공으로부터는 팔로군 조선인 부대,  독립군 출신 등 10여만 명를 인수하게 되었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를 거의 완료하였다. 중공과 소련은 미국의 한반도 지배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영향력하에 한반도 지배를 당연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