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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72 : 해방과 건국 32 (전두환, 노태우 정부와 북한의 변화 5)

 

 

한국의 역사 1,072 : 해방과 건국 32 (전두환, 노태우 정부와 북한의 변화 5)

 

 

 

전두환, 노태우 정부와 북한의 변화 5

 

 

5. 주요 사건, 업적

 

6월 민주항쟁

 

6월 항쟁(六月抗爭)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6월 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으로 불린다.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護憲) 조치(후임 대통령 역시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의 헌법으로 선출하겠다는 것으로, 개헌 요구를 전면 부정한 특별선언)와, 경찰에 의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 노태우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이후 1987년 12월 16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 운동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항쟁 이전

 

신군부 쿠데타 전후

1979년 10·26 사건으로 17년간 독재정치를 펼치던 박정희가 사망하고, 새로 취임한 대통령 최규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 기쁨도 잠시, 전두환 등을 비롯한 신군부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 내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전두환은 최규하를 로봇처럼 조종했고,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집권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에 광주 시민들이 민주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곧바로 시위 규모는 커졌고, 시위 참가자들도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이후 최규하를 축출하였다. 이후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1]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였다. 취조실에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11시 45분 경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의사가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다.

 

 

박종철 추모 시위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

하지만,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1987년 4월 13일, 그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2]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임기와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본인의 이 결단은 오늘의 망국을 타계하고 국가 목표를 수행하는 데 현실적으로 최선의 길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서 국민 여러분께서 전폭적인 도움과 신뢰를 보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자 합니다. 2가지의 국가 대사를 완성한 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개헌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좋은 방안이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제 우리의 정치도 나라와 사회 성장발전에 부응하는 선진 정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에서 본인은 남은 기간 동안 민주발전의 기반을 더욱 넓히고 사회 안정과 국민 화합을 다지기 위한 조치들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본인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지방자치제를 강제적으로 실시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 문제가 조속히 매듭지어져서 본인의 임기 내에 지방 자치가 시작된다면 민주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튼튼한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우리의 정치도 시대의 변천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꾸준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인물에게 발전하는 나라의 장래를 의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전환기의 정치를 이끌어나갈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 신진들을 광범위하게 포용하고 육성하는 정당의 노력은 매우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 전두환, 1987년 4월 13일"

 

이후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차질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호헌 조치에 대한 반발

하지만, 이는 '호헌 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 기대는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군사정권의 억압속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는 분위기가 높아졌지만, 신한민주당이민우 총재, 이철승 등은 당시 정부의 내각제 개헌에 대해 지지의사를 밝혔다. 이에 반발한 김영삼, 김대중 등은 70여명의 의원들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 창당을 추진하였다.

이에 전두환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1987년 4월 20일부터 4월 24일까지, 통일민주당의 20여개 지구당에 폭력배들이 난입하여 기물을 부수고 당원들을 폭행하는등 난동을 부렸으며, 이로 인해서 창당대회는 인근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약식으로 치러졌다. 통일민주당 측은 처음부터 이것은 정부가 개입한 비열한 정치공작이라 규탄하고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였으나, 수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시위 직전

1987년 5월 17일, 노동자였던 황보영국은 부산상고(현 개성고) 앞에서 '독재타도' 등을 외치며 분신했으며, 일주일 뒤 사망하였다. 이튿날인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광주항쟁 7주년 미사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되었음을 폭로하였다.이에 제5공화국 정권을 비판하던 국민들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옳지 못함에 크게 분노하였고,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자주 일어났다. 이후 5월 23일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였다(그날은 노태우가 민정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날이기도 하다).

 

전두환은 후계자로 국무총리 노신영을 지명했으나, 5월 26일 고문치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노신영 국무총리를 경질하였다. 이후 이한기를 신임 총리로 교체하였다. 이튿날 전국의 재야지도자 2200여 명이 함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였고, 한국 기독교 장로회 향린교회에서 발기인 대회 를 열었고, "호헌 조치 철회 및 직선제개헌 공동쟁취 선언"을 발표하였다.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인 이한열이 학교 앞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부상(7월 5일 사망)을 입었다.

 

 

시위의 진행

 

6월 10일

1987년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민주정의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개회가 열렸고, 노태우는 이 대회에서 민정당의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그러나 같은 날 전국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주최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오후 6시를 기해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민중항쟁의 뜻으로 차를 세워서 경적을 울려줄것 또는 흰 손수건을 흔들어 달라고 지침을 내리어 택시운전수들의 경적소리와 시내버스에서 흰 손수건을 흔드는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여고생들은 민중항쟁 참여자에게 마실 도시락을 가져다 주는 등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을 하여 서울도심에서 민중항쟁이 진행될 수 있었고, 특히 명동성당 농성 당시 성당 옆 계성여고 등에서 도시락과 물 등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농성이 진행될 수 있었다. 당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는 감사성찬례(성공회 미사)때 피아노를 연주할 전례 봉사자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관계자가 경찰의 감시를 피해 교회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월 11일

재야와 시민단체의 시위가 터지자, 치안당국은 전날 있었던 야권의 집회는 '폭력성을 드러낸 법질서 유린행위'였다고 지적하였고, '앞으로도 법질서 파괴 행위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치안본부장이었던 권복경은 야권의 집회와 관련한 발표를 통해서 주최 측이 비폭력집회를 열겠다고 공언하고도 전국에 걸쳐 폭력적 난동사태를 유발한 것은 법질서 유린행위였다고 지적했다.

 

이 날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대학생 등 600여 명이 경찰과 대치하며 1주일 째 시위를 계속했고, 남대문시장 등 명동 외곽 지대에서조차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6월 12일

6월 10일 대회 끝에 명동성당에 들어간 시위농성자들은 사흘 째 시위농성을 벌였고, 서울 도심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터졌다. 그러자 당국은 명동성당 시위 사건에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방침을 세우는 한편 사태 해결을 위해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명동성당을 점거한 뒤 시위를 벌여온 농성자들은 당초 600여 명에서 350여 명으로 숫자가 줄어들었으나, 경찰의 해산 종용에도 불구하고 계속 농성을 벌였다. 시위 농성자들은 11일과는 달리 바리케이트를 철거하고 극렬한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성당을 점거한 채 농성을 풀지 않고 계속 경찰과 대치하였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시위의 규모는 커졌다. 오후 1시 쯤에는 코스모스 백화점 앞에서, 오후 5시 무렵부터는 각 대학에서 시내로 나간 학생들이 명동을 중심으로 롯데 쇼핑 앞과 중앙극장 앞, 삼일 고가도로, 을지로, 광교 사거리, 시청 주변 등에서 기습 시위와 해산을 거듭했다.

 

 

6월 13일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부와 여당은 당정회의를 잇달아 열어서 6.10 대회 이후에 계속되고 있는 시위사태에 대처방안을 논의하였으며, 사회혼란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히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명동성당은 별다른 충돌 없이 결혼식과 미사가 예정대로 열리는 등 평화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팽팽한 긴장은 계속되었다.성당을 점거하고 있는 350여 명의 시위 농성자들은 오늘 오전 9시와 11시 50분 두 차례에 걸쳐 경찰저지선 50m앞까지 진출해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농성자들이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고, 경찰도 최루탄을 쏘지 않아 서로가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평화적인 모습이 계속되었으나 점거학생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연행, 구속된 사람들이 전원 석방될 때까지 농성을 계속하겠다고 밝혔고, 오후 2시부터는 서울지역 200여 명의 사제 신부들이 이번 사태와 관련해 대책회의를 열고 학생들을 지지하고 보호하겠다는 전날의 성명을 재확인했다.

 

6월 14일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은 오전 한때 성당 입구 밖으로 나와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으나 10시 20분 이후부터는 문화관 대강당에서 시국 토론회를 가졌으며 신도들은 오전 7시 미사를 비롯해서 예정된 휴일 미사에 참가했다.오전, 오후 미사가 끝난 뒤에 성당 광장에서 한때 연좌시위가 있었으나 충돌없이 곧 해산했다.

 

그 날 오후 명동성당 주변에 모여든 서울시내 대학생 2000여 명은 상업은행 본점, 롯데쇼핑, 사보이 호텔, 중앙극장 그리고 퍼시픽 호텔 앞 등 명동 일대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경찰은 최루탄 발사를 자제했으며, 시위대 역시 돌과 화염병을 던지지 않아 이전과 같은 격렬한 시위 양상은 없었다. 김병도 명동성당 주임신부는 성명을 낸 뒤,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노력에 성원을 보내지만 교회가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모든 부분에서 학생들과 뜻을 같이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직장과 학교 그리고 가정으로 돌아가 달라'라고 권고했다.

 

6월 15일

명동성당을 점거하고 있던 농성자들은 사제단의 뜻을 받아들여 해산했다.그들은 오후 1시 30분 농성을 해산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고, 오후 2시 성당 입구에서 해산식을 가졌다.

 

그러나 서울을 비롯한 지방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되었고, 특히 서울의 경우 명동을 비롯한 시내 일부 대학에서 명동사태를 지지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됐고 부산, 대전, 대구 등 일부 지방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6월 16일

명동성당 점거 농성에 이어 시위가 계속 되어 경남 진주에서는 파출소 4개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치안본부에 따르면 당일 전국 57개 대학에서 4만여 명이 교내 시위를 벌였는데 주로 부산과 진주 대구 지방에서 과격한 시위가 있었던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리고 10일 당시 구속되었던 사람들을 석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위가 계속되자 서울교육대학교에 대해 무기한 휴업령을 내렸다.

 

6월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고 3,467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6만 명의 경찰 병력이 배치 되었지만, 6·10민주항쟁의 3배가 넘는 시민들이 국민평화대행진에 참여하여 시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나 회사원들, 넥타이 부대들의 시위 참여로 6월 항쟁은 학생 항쟁에서 시민 항쟁으로 변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6월 29일

민정당 대선 후보였던 노태우는 전두환에게 직선제 개헌안을 수용할 것을 건의하여 승락을 받아냈다. 이후 노태우는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사면, 감형 등을 비롯 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해온 헌법 개헌 등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대폭 수용하고 직선제 형태의 대통령 선거를 골자로 하는 내용의 8개항의 시국수습방안(6·29 선언)을 발표한다. 이것으로 제5공화국의 정치적 위기는 극복된다. 1987년 7월 전두환은 노태우의 6·29 선언을 전격 수용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여, 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1988년 2월 평화적인 정부이양을 실행하도록 한다.

2. 직선제 개헌이라는 제도의 변경뿐만 아니라 이의 민주적 실천을 위하여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어 국민의 올바른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하여야 한다.

3. 정치권은 물론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반목과 대결이 과감히 제거가 되어 국민적 화해와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4. 인간의 존엄성은 더욱 존중되어야 하며, 국민 개개인의 기본적 인권은 최대한 신장되어야 한다.

5. 언론자유의 창달을 위해서 관련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6. 사회 각 부분의 자치와 자율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7. 정당의 건전한 활동이 보장되는 가운데 대화와 타협의 정치풍토가 조속히 마련되어야 한다.

8. 밝고 맑은 사회건설을 위하여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이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와 재야 단체는 즉각적인 개헌작업착수와 전원석방 및 수배해제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항쟁 이후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수습 선언 이후 직선제 개헌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제6공화국 새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거쳐 1987년 10월,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16년 만에 대통령선거가 직접선거로 치러졌지만, 정통 민주세력이자 당시 야당의 중심축이었던 김대중 당시 통일민주당 고문과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가 대통령후보 출마를 놓고 공식 선거전을 앞둔 1987년 10월에 분열을 일으키면서 독자 출마를 강행하게 되었다.

 

결국 6월 항쟁의 중심 역할을 했던 민주세력의 통합이 불발되었고,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하지만 부정 선거 의혹이 존재한다).

 

 

항쟁의 의의

1. 6월 항쟁은 군사적 독재 정치가 종식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 형식적으로는 노태우 정권의 출범으로 귀결돼 군사주의가 완전히 종언을 고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 6월 항쟁은 각계각층의 민주적인 시민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 6월 항쟁은 노동자, 학생, 시민, 빈민, 농민 등이 사회 전반에 걸쳐 전 지역적으로 전개한 투쟁이었고 항쟁의 전 과정은 바로 이렇게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각성하고 조직적 힘을 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노조를 통해 조직화되어 나타난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향후 노동자의 사회적 위상을 급격하게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사회적으로 주목할 만한 현상이 되었다.

 

 

기타

6월 항쟁이 일어난 6월 10일일제 강점기1926년,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純宗)의 장례 때 독립운동세력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기도 하다. 2007년 한국일보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중 10명 중 6명은 6월 항쟁을 잘 모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 6월 항쟁이 진행되던 6월 19일 오전 10시 30분 전두환은 군 투입 준비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같은 날 오후 4시 30분 비상조치 계획과 군 출동 지시는 유보됐다.

 

 

 

88서울올림픽

 

1988년 하계 올림픽(영어: 1988 Summer Olympics, Games of the XXIV Olympiad)은 1988년 9월 17일-10월 2일의 16일 동안 대한민국서울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이다. 12년 만에 IOC 회원국중 대부분인 160개국이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었다.

 

코리아나가 부른 '손에 손잡고'가 공식 주제곡이었으며, 한국어 버전과 영어 버전이 있다. 현재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했던 나라들의 기들은 올림픽공원에 게양·보관되어 있다.

 

 

유치과정
  • 1979년 9월 3일 - 국민체육진흥심의회에서 제24회 올림픽의 서울 유치계획을 의결.
  • 1979년 9월 21일 - 박정희 대통령이 계획을 재가함.
  • 1979년 10월 8일 - 세종문화회관에서 내외신 기자회견. 제24회 올림픽의 서울 유치계획 정식발표.
  • 1980년 12월 4일 - IOC, 대한민국(한국) 서울, 일본 나고야가 후보도시임을 발표.
  • 1981년 9월 30일 - 서독 바덴바덴에서 79명의 IOC위원 투표. 서울 52, 나고야 27. 개최지 서울로 확정.

 

 

개최지 투표 과정

 

개최지 투표결과

후보 도시 NOC 투표
서울 대한민국 대한민국 52
나고야 일본 일본 27

 

선수를 파견하지 않고 임원단을 파견한 브루나이를 포함하여 160개 국가가 참가하였다. (브루나이는 경기에는 참가하지 않고 임원단이 개막식과 폐막식에 참가하였다.)

 

 

참가국 에피소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놓고 아프리카 국가들이, 모스크바 올림픽LA 올림픽에서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놓고 각각 서방 진영과 공산 진영이 불참하면서 반쪽짜리 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한민국모스크바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미국소련의 냉전 구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개최된다는 점에서 공산 진영의 참가 문제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은 당시 공산 국가들과 외교 관계조차 수립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북한은 이들 공산 국가들의 참가를 막기 위한 활동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공산 국가 중에서는 중국1984년 7월, 동독1985년 3월에 참가를 선언한 상황이었다.

 

우선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당시 소련과 별도로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공산국가였고, 이미 1984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는 등 올림픽 보이콧에 비판적인 입장이었고 한편으로는 1990년 아시안 게임 유치 문제 등을 의식해 서울올림픽 참가를 발표했다. 동독의 경우 LA 올림픽 보이콧에 대한 자국 스포츠계 인사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서 2회 연속으로 올림픽을 보이콧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련과 협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서울올림픽 참가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참가 여부를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다른 동유럽 공산국가나 그 외의 친소(親蘇) 공산국가의 참가 역시 불투명했기 때문에, 김운용 IOC 위원을 비롯한 여러 관계자들은 소련의 스포츠계 인사들을 설득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련의 참가 선언을 이끌어 냈고 헝가리, 폴란드 등의 동유럽권 공산 국가들도 참가하였다. 그 외의 몽골·라오스·베트남 등의 아시아 공산 국가와 친북한 성향의 아프리카 국가들도 참가하면서 12년 만에 동서 양 진영 대부분 국가가 참가하면서 참가국 수는 사상 최대인 160개국에 이르렀다. 반쪽 대회로 전락한 지난 2개 대회를 극복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과 일부 국가들이 참가하지 않아 IOC 전 회원국 참가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북한에 대해서 끝까지 문호를 개방했고 참가를 유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북한은 참가를 거절하였다. 이에 쿠바, 마다가스카르, 세이셸 등의 일부 공산 국가가 동참하면서 보이콧했다. 고립 성향의 공산국가 알바니아 역시 불참하면서 알바니아는 4회 연속으로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에티오피아, 니카라과, 캄보디아대한민국의 수교국이었으나 당시 혼란한 현지 사정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다. 결국 당시 IOC 회원국 중 7개 국가가 불참하였다. 한편 남아프리카 공화국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IOC에서 축출된 상태였으므로 올림픽 참가가 금지되어 있었으며 나미비아는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배하에 있어 IOC에 가입하지 못해 참가하지 못했다. 또, 독립국인데도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코모로, 미크로네시아 연방, 마셜 제도, 나우루, 키리바시, 투발루, 세인트키츠 네비스, 도미니카, 세인트루시아는 당시 IOC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참가하지 못했다.

 

대회 마스코트

 

 

 

마스코트 호돌이

 

대회 휘장은 삼태극 문양이었고, 대회 마스코트는 상모를 쓴 아기 호랑이를 형상화한 '호돌이(HODORI)'였다.[4]

 

 

경기 종목

 

정식 종목

  • 육상
  • 수영
    • 수영 경기
    • 다이빙 경기
    •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 수구
  • 축구
  • 테니스
  • 조정
  • 하키
  • 복싱
  • 배구
  • 체조
    • 체조
    • 리듬체조
  • 레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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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도 (여성 유도는 시범경기)
  • 사격
    • 소총 사격
    • 클레이 사격
  • 근대5종
  • 카누
  • 양궁

 

 

시범 종목

  • 야구 (시범경기)
  • 태권도 (시범경기)
  • 배드민턴 (시범경기)
  • 볼링 (전시경기)
  • 휠체어 레이싱 (시범경기)

 

 

메달 집계

1988년 하계 올림픽 메달 집계 Olympic rings with white rims.svg
순위 국가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합계
1 소련 소련 55 31 46 132
2 독일 민주 공화국 동독 37 35 30 102
3 미국 미국 36 31 27 94
4 대한민국 대한민국 12 10 11 33
5 서독 서독 11 14 15 40
6 헝가리 헝가리 11 6 6 23
7 불가리아 불가리아 10 12 13 35
8 루마니아 루마니아 7 11 6 24
9 프랑스 프랑스 6 4 6 16
10 이탈리아 이탈리아 6 4 4 14

 

 

대회 이모저모

 

 

개막식 당시 성화 점화 모습

 

 

 

 

폐막식 때 있었던 불꽃놀이
  • 남자 100m 달리기에서 캐나다벤 존슨은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1위를 했으나, 도핑 테스트 결과 금지 약물인 순발력 강화제 단백동화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것으로 밝혀져 실격처리 당하고 금메달을 박탈당하였다. 대신 2위로 들어온 미국칼 루이스가 이 종목 금메달리스트가 되어 지난 대회에 이어 이 종목에서 처음으로 2연패를 달성하게 되었다.
  • 미국의 매트 비온디가 수영에서 금메달 5개를 따냈다.
  • 오스트레일리아덩컨 암스트롱이 자유영 200m에서 비온디를 물리치고 우승했다.
  • 미국의 그레그 루가니스는 남자 다이빙 경기에서 뒤로 2회전 돌기를 하다가 스프링보드에 머리를 부딪혀 피를 흘리는 사고를 당하고도 전 대회에 이어 남자 다이빙의 2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는 투혼을 발휘하여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훗날 루가니스는 자신이 AIDS에 걸렸음을 고백하여, 에이즈 보균자의 피가 수영장 같은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AIDS를 전염시키는지에 대한 논란이 생겼다.
  • 동독크리스틴 오토는 여자 수영에서 6개의 금메달을 획득하여 한 대회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을 딴 여자선수가 되었다.
  • 서독슈테피 그라프는 여자 테니스에서 단식 금메달을 획득하여, 남녀 통틀어 최초로 4대 메이저 대회와 올림픽 단식 등 5개 대회를 모두 우승하는 골든 슬램을 달성하였다. 특히 슈테피 그라프의 골든 슬램은 1988년 한 해에 달성되었는데 2012년 현재까지도 한 해에 골든 슬램을 완성한 선수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여러 해에 걸쳐 골든 슬램을 이룬 선수를 포함하면 남자 2명, 여자 1명이 더 있다).
  • 탁구가 처음으로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었고, 테니스는 1924년 대회 이후 64년 만에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었다.
  • 태권도가 처음으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다.
  • 동독크리스티나 루딩-로텐부르거는 지난 1988년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데 이어, 그 해 하계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을 따 동하계 올림픽에서 모두 메달을 딴 최초의 여자 선수가 되었다.
  • 수리남안토니 네스티는 수영 남자 100m 접영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는 흑인 수영선수 최초로 획득한 올림픽 금메달이었으며, 수리남의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획득한 금메달이었다.
  • 체조에서 소련의 블라디미르 아르테모프는 금메달 4개를 획득하였으며, 루마니아의 다니엘라 실리바스는 금메달 3개를 획득하였다.
  • 개막식 행사에서 윤태웅이라는 이름의 어린 소년이 홀로 굴렁쇠를 굴리며 주 경기장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약 2분 동안 경기장에는 이명 소리만이 들리는 가운데 경기장 한가운데 도착한 소년이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었던 이 퍼포먼스는, 전쟁 이미지가 강했던 한국에 평화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동서양의 화합과 평화를 소망하는 의미에서 기획된 퍼포먼스였다. 이 굴렁쇠 퍼포먼스는 88서울올림픽을 주관하던 이어령 교수가 낸 아이디어이다.
  • 대한민국 정부는 개막일인 1988년 9월 17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였다.
  • 소련동독서독, 북예멘남예멘은 각각 소비에트 연방독일민주공화국독일연방공화국, 예멘아랍공화국예멘민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마지막 올림픽으로 기록되었다. 이 국가들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전에 모두 사라졌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은 독립국가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하였다가 애틀랜타 올림픽부터 각자 참가하게 되었으며 동독서독, 북예멘남예멘은 1990년 동서 및 남북 통일화로 독일연방공화국예멘공화국이라는 단일 국호아래 통일 국가 자격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 한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가장 잘 상징하는 행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 그 동안 대한민국과 교류가 없던 공산 국가와의 관계가 이 대회로 인해 급속도로 개선되었다. 특히 동유럽 공산 국가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악의적인 선전에 의해 대한민국을 자국보다 더 열악한 최빈국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 대회를 통해 대한민국의 발전된 모습을 직접 보면서 충격을 받았고, 이후 헝가리폴란드 등의 여러 나라가 대한민국과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 영국 등의 나라에서는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는 값비싼 말을 한국에 출전시켰다가 전염병에라도 감염될 경우 본국으로 가져갈 수 없는 문제가 있어 한국에서 개최되는 올림픽 종목 중 마사경기를 할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어 한국의 수의사와 검역관들을 해외에 파견연수를 실시하였다. 과천에 있는 한국마사회로 하여금 새로운 올림픽 경주마 경기장을 마련하는 한편, '말수입 위생 조건'을 농림수산부에서 고시하여 완벽한 말 수입시의 위생과 검역조건을 갖추게 된 것은 대한민국의 가축방역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