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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73 : 해방과 건국 33 (전두환, 노태우 정부와 북한의 변화 6)

 

 

한국의 역사 1,073 : 해방과 건국 33 (전두환, 노태우 정부와 북한의 변화 6)

 

 

 

 

전두환, 노태우 정부와 북한의 변화 6

 

 

5. 주요 사건 및 업적(계속)

 

 

 

남북고위급회담

 

남북 고위급회담은 1989년 2월 8일 시작된 여러 차례의 예비회담과 실무대표 접촉을 통해 1991년 12월까지 5차례의 본회담이 열렸다. 1990년 9월 4~7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1차 회담에서 남한은 남북한 양측이 상호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기본정신에 입각하여 상호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8개항의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기본합의서'안을 제시하였다. 또 예비회담에서 양측간에 합의된 의제에 따라 남북한간 교류협력의 실현과 정치적·군사적 대결상태 해소문제를 병행 토의한다는 입장에서 10개항의 '다각적인 교류협력 실시방안'과 8개항의 '정치적·군사적 신뢰 구축방안'을 제의하였다. 이와 함께 정치적·군사적 신뢰가 구축되고 상호불가침을 약속한 위에 남북한이 군비감축을 추진해나갈 5개항의 방안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측은 7·4남북공동성명의 '통일 3대원칙'의 재확인과 민족공동의 이익 우선, 그리고 회담 분위기를 흐리게 하거나 회담의 진전에 방해되는 일 금지 등의 회담에 임하는 기본입장을 밝혔다. 남북한간에 정치적·군사적 대결상태의 해소가 무엇보다도 앞서는 과제라고 전제하면서 6개항의 정치적 대결상태 해소방안과 9개항의 군사적 대결상태 해소방안을 각각 제시하였다. 제1차 회담은 남한측의 다각적인 교류와 정치적·군사적 문제해결의 병행안과 먼저 정치적·군사적 문제를 해결하고 그 기초하에서 다각적으로 교류하자는 북한측 주장이 맞서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상대측의 입장만을 확인하고 끝났다.

 

 

제1차 회담일로부터 40여 일만에 1990년 10월 16~19일 평양에서 다시 열린 제2차 회담은 제1차 회담에서 쌍방이 제의한 입장과 방안들을 합의서 형태로 만들자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이에 따라 남한측은 앞서 제시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합의서'안의 전문에 북한측이 주장한 '3개항의 회담원칙'을 수용한 수정안을 제시하였다. 반면에 북한은 '북남불가침에 관한 선언' 초안을 제시하면서 이를 즉석에서 채택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대해 남한은 북한이 제시한 '불가침선언'의 일부내용, 즉 무력불사용 및 상호간의 파괴전복행위금지, 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을 받아들여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공동선언'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북한측은 합의서 명칭을 '불가침 선언'으로 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결국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제2차 회담 역시 끝났다.

 

이어서 12월 11~14일 서울에서 열린 제3차 회담에서 남한측은 2차례의 고위급회담과 실무대표 접촉과정에서 북한측이 제기해온 여러 가지 주장들을 기초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기본 합의서' 수정안을 다시 제시하였다. 이 수정안은 불가침 문제에 대한 남한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합의서' 채택 후 '정치·군사분과위원회'에서 협의할 '남북불가침에 관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측은 제2차 회담에서 제시한 '불가침 선언'에다 남한측의 '화해와 협력에 관한 선언'안을 절충안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제3차 회담에서도 쌍방은 '기본합의서'의 채택과 '불가침 선언' 채택 중 어느 것을 선행시킬 것인가에 대해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제4차 회담은 1991년 10월 22~25일 평양에서 열렸다. 제4차 회담에서는 이전까지 어떤 합의점도 찾지 못한 데 반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라는 명칭으로 하는 단일문건에 합의하는 등 5개항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제4차 회담에서 합의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마련을 위해 제5차 회담이 1991년 12월 10~13일 서울에서 열렸다. 회담이 시작되기 전에는 북한의 '핵사찰문제'와 남한의 '비핵화'라는 걸림돌이 남아 있어 회담의 결과가 매우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러나 양측이 모두 한 걸음씩 양보하여 서문과 남북화해, 남북불가침, 남북교류·협력, 수정 및 발효 등의 4장 25조로 구성된 합의서에 양측 총리가 서명함으로써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합의서는 분단 46년 만에 남북한정부당국간에 이루어진 최초의 공식합의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는 달리 구체적인 실천방안 및 기구구성까지 명시되어 남북한관계의 정상화와 함께 앞으로 통일에 대비하는 획기적인 이정표의 마련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남북고위급회담은 그간의 남북한관계를 고려할 때 매우 획기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첫째, 분단 46년 만에 한반도문제가 비로소 남북한의 책임있는 당국자간에 공개적·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1970년대 이후 남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던 북한의 입장이 변화하고 있음을 시사해주었다. 셋째, 상호입장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남으로써 앞으로 남북한 관계개선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마련에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한반도 통일에 대해 국내외적으로 관심을 높여준 것을 들 수 있다.

 

 

 

3당 합당

 

3당 합당(三黨合黨)은 1990년 1월 22일,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이 제2야당 통일민주당(약칭 민주당),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약칭 공화당)과 합당해 통합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 것을 말한다. 3당 합당에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3당 야합이라고도 한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을 중심으로 3당 합당을 추진해 보수당(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배경

 제5공화국의 후신세력인 민주정의당 세력은 6월 항쟁이라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정권을 잡았으나, 계속되는 국민의 민주화요구와 군사정권 청산요구는 이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국민적 요구에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른바 '보수대연합'을 비밀리에 추진하여 1990년 내각제 개헌 밀약을 조건으로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3당 합당을 이끌어내 거대여당을 탄생시켰다. 3당합당의 여파로 노태우 대통령이 출범한지 2년 만에 80%에 육박하는 높은 수치의 지지율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각 당의 사정

 

 

민주정의당

민정당은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27명의 현역 국회의원을 지역구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강수를 두며 과반수 의석 확보에 전력투구했지만, 5공 청산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열망이 민정당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져 호남 지역의 전멸을 비롯해 125석(지역구 87석, 전국구 38석)에 그쳤고, 이 후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안 부결 및 국정감사 부활 등 야당에게 정국주도권을 빼앗기면서 고전하고 있었다.

 

이에 당시 민정당 총재였던 노태우 대통령은 제1 야당인 평민당과 합당하여 국회 과반수 의석도 확보하고, 호남 지역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던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우군으로 만듦으로써 호남 지역의 민심을 얻는 일석이조의 구상을 하였다. 이후 김원기 당시 평민당 원내총무를 통해 5.18 문제 해결에 대한 전권을 주겠다는 구실로 김대중 총재에게 은밀하게 합당을 제의했으나, 김대중 총재가 끝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통일민주당과 보수성향의 신민주공화당에 합당제의를 하게 되었다.

 

 

통일민주당

민주당은 13대 총선에서 득표율 2위(민주당 23.8%, 평민당 19.3%)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59석(지역구 46석, 전국구 13석)에 그쳐 원내 3당(평민당 70석)으로 밀려난다. 김영삼 총재는 평화민주당 (1987년) 김대중 총재에 대해 상당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던데다 현재의 구도대로 간다면 대통령이 되기 어려울것이라 판단, 민정당과 합당하여 여당의 지위를 얻고 자신의 조직을 총동원하여 차기 대권을 잡는다는 구상을 가졌다.

 

입장을 정한 김영삼 총재는 민정당과 비밀리에 합당협상을 펼쳤고, 또한 자신의 측근인 서석재1989년 동해시 보궐선거 당시 무소속 후보를 매수한 혐의로 찰에 구속되자 합당의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기택, 김정길, 장성화, 김상현, 박찬종, 홍사덕, 이철, 노무현 등 8인이 3당 합당을 거부하며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을 결성하였다.

 

 

신민주공화당

공화당은 13대 총선에서 35석(지역구 27석, 전국구 8석)을 얻으면서 교섭단체 확보에 성공했지만 표밭이라고 할 수 있는 충청도 지역에서는 27석 중 15석을 획득하는 데 그치는 부진을 보인다. 또한 군부출신의 보수 성향으로 야당임에도 불구하고 민정당에 동조했고, 2차례 보궐선거의 전패와 야당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옛 민주공화당 출신 당원들을 중심으로 김종필 총재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또한 김종필 본인도 이대로는 더 이상 대권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내각제 개헌에 대한 기대를 갖고 민정당, 민주당과의 합당에 나서게 된다.

 

 

 

결과

이로써 민주진영의 주요 인물인 김영삼, 김대중 후보 단일화론이 좌절되었다. 신생 민주자유당은 218석을 보유한 절대다수 정당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했으나,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는 계파 간의 갈등으로 인해 낙천한 인사들이 무소속으로 출마하거나 통일국민당 공천을 받으면서 299석 중 149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한다. 그러나 14대 대선 당시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영남민심이 결집되면서 노태우를 경계하며 당내세력을 포섭했던 당의 후보였던 김영삼이 당선되고 이후 야당의원들을 대거 영입하여 다시 국회과반수의 거대 여당이 되었다. 이후 김영삼의 당권이 더욱 커지고 내각제 합의각서 파문과 내각제합의 결렬로 15대 총선을 약 1년 정도 앞두고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을 독자적으로 창당하고 공화계 인사들이 그를 따라 떨어져 나가면서 3당합당 카르텔은 2당의 결집으로 축소되었다. 나아가 민주자유당이 1995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자 김영삼은 민정계를 축출, 통일민주당만의 형태로 축소되었다.

 

 

기타

1990년 3당 합당 당시, 내각제 개헌 밀약 각서가 공개되었다.

 

 

비판

민주진영에서는 "민주진영 분열과 불신을 초래시켰다"라고 비판한다. 진보진영에게는 "기회주의적 거대보수연합"이라 비판받는다. 또한 이것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겨 지역주의 정치와 보스정치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다. 군사정권과의 야합이라는 비판도 있다. 정당의 성립과 발전에 있어 국민적 의사를 무시한 채, 장기집권을 획책한 '정당쿠데타'라는 비판도 있다. 또한 "3당 합당으로 인하여 호남을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고립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가수 정태춘은 5집 수록곡 <아, 대한민국···>의 가사 중 "하루 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저 민주 인사와 함께"로 김영삼을 비판하였다.

 

 

 

6. 1980~90년대 북한의 변화

  

김정일의 후계체제를 공고화한 것이 1980년대 북한 정치의 특징이었다. 이를 위해서 김정일에 대한 개인숭배운동이 추진되었다. 먼저, 김일성에 비교할만한 뚜렸한 업적이 없는 그를 미화하기 위해서 그의 출생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987년부터 김정일은 백두산 밀영(비밀 아지트)에서 탄생했다고 선전하면서, 이른바 '구호나무학습'이라는 새로운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둘째로, 60년대 후반부터 그때까지 북한에서 쌓은 업적과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치켜세우고 있다.

 

한편, 김정일은 70년대와는 달리 공식적인 후계자로서 전체 북한 사회를 지도해야 되는 입장에서 국가기관에 대해 직접적인 지도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특히 199-년 5월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에서 확대 개편된 국방위원회의 제1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90년 12월에는 김일성이 맡고 있던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되었다. 이어서 1993년 4월 '군사주권의 최고지도기관'으로 격상된 국방위원회의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1994년 7월 김일성주석이 갑자기 사망하자 그 동안 준비해온 대로 자연스럽게 북한 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경제적으로 북한은 80년대 이후 전반적인 정체, 침체 심지어는 후퇴의 길을 걸었다. 이는 70년대까지 북한이 경제발전을 위한 기본지침으로 사용했던 속도전의 방식에 한계에 부딪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북한의 국제적 고립,  특히 1990년을 전후한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경제의 위기를 더욱 가중화시켰다.

 

북한은 이러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실용주의적 측면들을 보완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여전히 '1980년대 속도창조운동'을 내세웠으나, 다른 한편 부문간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서 경공업분야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동안 자력갱생의 기치 아래 비판적으로 보던 중국의 개방정책을 부분적으로 원용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추반 강성산을 정무원 총리로 기용하면서 1984년 9월 외국기업과의 합작관련 조항을 규정해 놓은 '합영법'을 제정했다. 나아가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1993년 10월에 합작법'을 제정하고 1994년 1월에는 외국인투자가 한층 유리하도록 합영법을 개정하는 한편, 나진. 선봉지구를 경제특구로 지정하면서 외국기업과의 함작과 자본도입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용주의 노선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지는 의문이다. 1980년대를 통하여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만성적인 에너지와 자재 부족, 소송상의 애로, 외채 누적, 설비 및 기술낙후  등 구조적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또한 북한 당국도 실패를 자인할 정도로 경제성장에 있어서는 목표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를 내고 있다. 한국은행의 추게에 따르면 1990년 이후 현재까지 계속해서 북한은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1995년과 1996년에 걸친 대대적인 수해로 인하여 식량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경제사정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상황에 대해 북한주민들은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최근 남한이나 제3국으로 탈출하는 북한동표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북한은 이를 단속하기 위하여 국경봉쇄는 물론 사회적으로 더욱 강압적인 조치를 취고 주민에 대한 이념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비밀리에 반입되는 중국, 한국, 일본 등 외국에 대한 정보와 문화가 비밀리에 북한 주민들에게 확산되고 있으며 핵개발 등 군사력 강화에 국력의 대부분을 투입하다보니 전반적인 상황을 호전시키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은 90년대 이후로 '주체사상'에서 한 결음 더 나아가 이른바 '조선민족제일주의'를 내걸고 있다. 이는 김일성을 수령으로 모시고 있는 조선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행복할 뿐 아니라, 민족통일을 지상과제로 하여 각계각층의 인민들이 모든 주민이 계급과 이념을 초월해서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성공단 등  남한 기업과의 경제협력도 이러한 이론에 입각하여 정당화되고 있다. 또한 역사해석에 있어서도 단군 이후로 단군릉 복원과 고조선 역사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역사연구는 과학성을 잃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성이 강하여 설득력이 부족하다. 북한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시대착오적인 민족지상주의 이념에 매달리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