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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겨울 8 : 3.1 만세의거와 그 역사적 의의

 

 

 

 

강남의 겨울 8 : 3.1 만세의거와 그 역사적 의의

 

  

    

 

 

중국발 스모그가 서울 하늘을 뒤덮고 전국민과 국토가 고통을 받고 있다. 미세먼지 속에는 암을 유발하는 불순물이 다량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난 주에는 선별적으로 날씨를 보고 자전거 타기를 잠정 중단하였다. 이 문제는 국제적인 환경협약으로 같이 노력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문제가 될 것이다.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중국 대륙의 불량 미세먼지가 계속 발생할 것이며 우리들은 그 먼지를 마시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주에는 서울 송파구에서 세모녀가 삶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복지의 사각지대라며 세상이 떠들썩하다. 정부의 각종 복지지원을 받지 못하는 애매한 위치의 가정이 많다. 우리 주변에도 그러한 가정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중년을 넘긴 아주머니가 남편이 죽고 식당일을 힘들게 하면서 두 딸을 데리고 반 지하방에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 삶의 한계를 느껴 주인에게 70만원이 든 봉투와 죄송하다는 메모를 남기고 두 딸과 함께 번개탄을 피워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났다. 차라리 저승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양심적이고 성실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는 사회,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누구를 위해 살고 있는가?

 

 

 

 

   

                           

                                                                                       반포천 새벽 풍경

 

강릉에 사는 지인이 지난번 갑상선 수술 결과 때문에 지난 목요일 연대 세브란스에 온다고 연락이 와서 오랫만에 얼굴도 볼 겸 갔다. 연세 세브란스 병원은 옛날에 비해 엄청나게 건물이 많이 들어섰고 또 높이 올라가 있었다. 북적이는 사람들로 본관 로비는 시장통을 방불케 하였고 로비 한곳에서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뒷편 음식점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접수창구에는 기다리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연대 세브란스 병원은 한국에서 의술이 뛰어나다고 소문이 나면서 전국의 환자들이 모여들고 있는 곳이 바로 이 병원이다. 그래서 이 병원은 죽음을 두려워 하는 인간들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벌이는 싸투의 장소이기도 하다. 중병에 걸린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장기간 고통을 받게 되고 전재산을 다 털어 먹고 가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어느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일종의 복일 것이다.

 

초최한 얼굴의 지인을 만나 겸사 결과가 오후 3시경에 나온다고 하여 같이 밖으로 나와서 연세대 앞 차없는 거리 뒷골목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지인은 그동안 과다한 음주와 뜻대로 되지 않는 삶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결국 갑상선에 암이 발생하게 되었고 그것도 빨리 발견한 결과 수술로 제거했기에 다행이라며 위로했다. 지난번 폭설로 강릉을 포함한 동해안 일대는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면서 그동안 제설작업의 고초를 토로했다.

 

우리들이 어치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가겠지만 살면서 병원 신세를 진다는 것은 인생의 종말을 향애 서서히 다가가고 있는 모습같아 씁슬하다. 지인처럼 마음씨 착하고 성실하다고 꼭 인생의 성공과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이 마음먹은대로 되는 것이 없는 이유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결국 몹쓸 병에 걸리게 된다. 다행히 병에 걸리지 않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도 행복일 것이다. 나중에 확인 결과 상태가 검사결과가 좋다고 하니 다행이다. 부디 빠른 쾌유를 빕니다.

 

 

 

 

돌아오는 길에 같이 간 다른 지인이 선불요금제가 저렴한 것이 나왔다면서 바꾸라고 했다. 나는 원래 선불요금제를 사용하고 있는데 저렴하고 피싱방지와 소액결재가 되지 않은 장점이 있어서다. 그래서 봉천역에서 내려 사무실로 가니 낯익은 사람들도 만났다. 알뜰폰 요금제로 기본료가 월 3,000원이고 통화료는 사용하는대로 내고 데이타 요금은 100Mb에 4,500원이라 했다. 요금제를 변경하는 동안 낯익은 지인들과 같이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몇 시간을 보냈다. 잠시 밖으로 나와 옥상에서 서울 시내를 바로보니 자욱한 먼지가 희뿌였게 뒤덮고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는 똑똑한척 하지만 실상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거의 무지에 가깝다. 종교나 사상에 순수할수록 감언이설에 속기 쉽고 빠지기 쉽다.  정도가 과하면 광신도가 되고 군중심리에 의해 폭도로 변하기도 한다. 서로 속고 속이고 감언이설로 유혹하고 천국, 부자 등 엄청난 비젼으로 바람을 넣고 쇄뇌교육을 계속받다보면 결국 광신도가 되는 것이 자신의 머리속에 들은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쉽게 범죄에 빠지고 나쁜 길로 빠지는 것은 바로 정신과 육체가 성숙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가운데 스스로 전재산을 기부하거나 투자하여 올인한다고 평생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평생을 고통스럽게 하는 경우가 어디 한 둘인가? 저녁에는 같이 삽겹살로 소주도 한 잔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우리집 애견 엄마 알콩이와 아들 땅콩

 

 

우리집 일대가 재건축을 한다고 한다. 걱정이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말썽 많은 조합을 믿을 수 없고 또 분담금을 내고 평당 2,000만원 이상하는 아파트에 들어갈 엄두가 안난다. 결국 돈없는 서민들만 쫓아내는 결과를 초래하고 지자체는 도시 정비사업을 하는 결과를 가져오니 행정관청은 도시정비를 하게 되고 가진자들에게는 위치가 좋으니 좋은 투자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요즘 밤잠이 안오는데, 어디로 갈 것인가에 고민이다.

 

조그만한 집에 텃밭도 있고 가장 중요한 병원과 시장이 가깝고 교통도 편리하고 공기도 좋고 바다가 가깝거나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있거나 호수나 강이 있다면 좋을 텐데...... 농촌으로 귀촌하지니 주변 주민들과 융화문제도 있고 집을 비우면 도난도 걱정이고 과다한 난방비, 각종 벌레와 야생동물, 부족한 문화시설, 교통이 불편한 곳은 피하고 싶다. 또 산불, 홍수, 침수 등 재난의 우려가 없는 곳, 도시.지역개발로 쫓겨나는 일이 없어야 하는 데 그것도 걱정이다. 송전선, 공장지대와 떨어지고 주변 혐오시설(쓰레기 매립, 화장터, 위락시설, 납골당, 공동묘지)도 걱정이다. 또 축사, 도살장, 가스.정유.원전 등 위험시설로 부터도 떨어져야 하는데......능력상 어치피 지방으로 가야할 것 같은데 자식들과 얼마나 떨어지는 게 좋을지도 걱정이다. 혹시 부동산 하시는 분 중 이러한 제반 조건을 만족할 수 있는 중.소도시 아파트나 농촌주택이나 전원주택 등 매물이 있다면 추천해주시면 고맙겠다.

 

 

 

 

 

 

아래는 함석헌학회에서 쓴 '3.1 만세의거'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고찰한 글을 소개한다.

 

 

 

 

항일독립운동과 31운동


 

1. 머리말

한국의 근대 민족운동은
19세기에 들어서서 일어난 수많은 농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되었다
. 봉건적 수탈에 시달리면서 반봉건사회개혁 사상을 수용하며 점차 운동성을 확대해 갔던 한말 농민운동은 防穀令事件 같은 항일운동과 동학농민운동 및 의병운동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강력한 반외세(반침략)반제 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한국 근대민족운동에 대한 이같은 이해는 근대 한국 민족운동의 성격이 두 가지 모순을 극복하려는 데서 가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하나는 한국 내부의 봉건사회의 복잡한 모순을 의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모순 못지 않게 외세의 압제와 간섭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민족운동은 자기 사회의 대내외적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으로서 전개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 근대 민족운동의 두 가지 측면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대내적으로는 봉건사회를 개혁하려는 반봉건사회개혁운동을 들 수 있고, 대외적으로는 서세동점하던 외세의 침략에 맞서서 국권을 수호하려는 의병운동과 국권을 회복하려는 독립운동 등을 들 수 있다. 전자가 자기 사회를 개혁하는 데에 초점이 주어져 있다면 후자는 외세에 대응하려는 데에 초점이 주어져 있다. 이와 함께 애국계몽운동 같은 민족운동은 기본적으로는 사회개혁적인 성격의 대내적인 점이 강조되고 있지만,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점에서는 침략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대외적인 성격도 일부 갖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항일독립운동을 논할 때에 그 범위가 한말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범위를 한말에까지 확대하여 논하게 되면 어느 시점을 중심으로 반식민지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구국운동과 국권회복운동으로서의 독립운동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한말의 구국운동은 나라를 사랑하고 구하려는 의식면에서는 일치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나타내고 있었다. 쇠망해 가는 나라를 어떤 방식으로 구하는가에 따라 크게 의병운동 세력과 애국계몽운동 세력으로 나뉘게 된다. 의병운동 세력이 침략세력인 일제와 직접 맞서서 싸워 나라를 구하려고 한 데 비해서, 애국계몽운동 세력은 일제와 맞서서 싸우기보다는 일제의 침략을 극복할 수 있는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한말 일제에 항거하여 나라를 구하려는 구국운동의 유파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서는 그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독립운동의 여러 유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 언급하는 항일독립운동은 시기적으로는 한말의 구국운동에서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의 국권회복운동으로서의 독립운동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며, 형태면에서는 일제로부터 나라를 보위하고 해방, 독립시키려는 전반적인 운동을 항일독립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2. 민족해방운동과 독립운동

1910년 일제가 나라를 강점했을 때, 반만 년 역사를 가진 한 민족은 이런 현실을 수긍할 수 없었다. 일부 친일분자들이 일제에 협력한 경우도 있었지만, 민족 구성원 대부분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용납하지 않았다. 나아가 민족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확보하고,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되찾아 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당면과제로 여겼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독립운동이었다.

 

일제 하의 독립운동과 관련, 현재 우리 학계는 이 시기의 사회운동 일반을 특징짓는 개념이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기존의 역사학계에서는 이 시기의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운동을 독립운동 혹은 민족운동이라고 명명해 왔는데, 최근에는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용어가 함께 사용되는 추세에 있다. 이는 종래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운동을 주대상으로 했던 연구에서 그 연구의 영역을 좌파계열의 운동까지를 확대하면서 붙여진 명칭이라 할 것이다.

 

20세기 후반기에 들어가면서 시작된 한국독립운동사 연구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연구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운동 등 주로 민족주의계열의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독립운동사는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 양적, 질적인 면에서 연구 수준이 크게 비약하였고 연구 시각도 상당히 변화하였다. 특히 1980518민주화운동 이후 민족운동을 민중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는, 민족운동사 연구의 민중적 관점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또 세계사적으로도 냉전의 벽, 이데올로기의 벽이 무너지면서 기존의 냉전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 일제 하 사회주의운동까지도 독립운동의 범주 안에 포함시켜 보아야 한다는 시각이 학계에서 자리잡기 시작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일제하의 독립운동은 항일국권회복운동인 동시에 근대 민족국가 수립운동으로서 근대 민족국가가 갖고 있는 민주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성이 역사적 의미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3.1운동 이전에 더러 보였던 구왕조를 회복하려는 독립운동은 復辟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항일독립운동이라 하더라도 민주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 않음으로 근대 민족국가 수립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지 않다고 성격짓게 되었다. 따라서 그런 복벽운동은 항일독립운동의 범주에 속하긴 하지만 근대 민족국가 수립운동으로서의 독립운동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대 민족국가 수립운동과 역사적 궤를 같이 하지 않는 항일운동은 엄격한 의미의 독립운동이라 할 수 없으며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성격도 갖지 못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민족해방운동은 반식민지 해방운동, 식민지 해방운동, 사회주의 계급해방운동으로 나뉘어지는데 반식민지 해방운동은 제국주의 침략을 받거나 반식민지 상태에 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구국운동을 말한다. 식민지 해방운동은 한국의 의병전쟁이나 애국계몽운동과 같은 구국운동이 반식민지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하였을 때, 식민지 상태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독립운동을 일컫는다. 즉 독립운동은 식민지 해방운동이다. 피압박 대중의 사회경제적 억압으로부터의 전면적 탈피를 의미하는 계급해방운동은 독립운동과정에서 계급해방운동을 동시에 추진하여 독립운동 기간에는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독립한 후에 다시 계급해방운동을 전개하여 해방전선을 형성한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 민족해방운동이라 함은 이 세 가지 정의를 포괄함과 동시에 식민지 해방운동을 가장 근접한 의미로 설정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민족운동, 독립운동,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용어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으나,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독립운동이다. 운동 당사자들이 당시에 가장 많이 사용했던 용어도 독립운동이었고, 연구자들도 흔히 독립운동이라 명명하였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한 이후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일제에 저항한 항일운동에 대한 올바른 개념정립에 대한 논의는 한국 근대사의 중핵을 이루는 일제강점기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최근에 우리사회에는 일제강점이라는 용어가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것은 한말 일제에 의해 늑약된 제 조약들이 국제협약이라는 제반 조건에 비추어 볼 때 불법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그렇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한말의 제반 조약들이 합법적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해 왔고 아직도 그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주장과는 달리 을사조약을 비롯한 한말의 늑약된 제반 조약들은 국제간의 조약이 갖추어야 할 제반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불법적으로 이뤄졌다. 때문에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한 것은 일종의 强占’(강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용어는 20세기 초의 한일관계의 핵심을 이해하는 대단히 중요한 고리라고 할 것이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는 과정은 여기서 일일이 상론할 수 없다. 그들은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군대의 힘으로 한국을 제압한 후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 등을 강제하고, 그 후에도 계속 각종 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외교권행정권군사권사법권경찰권 등을 차례로 빼앗아 갔다. 그런 과정에서 그들은 한국인의 저항을 없애기 위해 군대를 해산하고 각종 결사와 언론기관 등을 차례로 해체시켰다.

 

일제가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는 위기의 상황에서 한국인의 구국운동 차원의 저항운동은 계속되었다. 을사조약 후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에서 시작된 언론의 저항운동이나,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력이 강화된 의병운동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의병운동은 일본군의 대토벌작전에 밀려 국내에서 차차 滿(한만), 露(한로)의 국경지대로 옮겨 계속되었다. 한말 柳麟錫(유인석)의 의병운동과 安重根(안중근)의 의병부대, 李範允(이범윤)洪範圖(홍범도)의 의병부대 등은 대표적인 의병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의병운동도 1915년을 전후하여 차차 힘을 잃게 되거나 장기적인 항일투쟁으로 투쟁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한편 일제의 직접적 식민지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국내독립운동은 비밀결사의 형태로 나타났다. 의병부대이긴 했지만 1912년에는 전라도에서 林炳瓚(임병찬)獨立義軍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1914년에는 大韓獨立義軍府(대한독립의군부)의 편제를 완비하게 되었다. 1913년에는 경북 豊基(풍기)에서 蔡基中(채기중)13명이 비밀결사 大韓光復團(대한광복단)을 조직하였는데, 그 뒤 1915년에는 朴尙鎭(박상진) 등이 가담하여 이를 光復會(광복회)로 개칭하였고 1916년에는 盧伯麟(로백린) 등이 가담하여 光復團(광복단)으로 발전, 그 이듬해에는 각지의 부호들에게 국권회복운동 자금을 요구하는 통고문을 보냈다가 발각된 광복단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와 함께 경북 達成(달성)에서는 徐相日(서상일) 등이 朝鮮國權回復團(조선국권회복단), 李用雨(이용우) 등이 朝鮮産織獎勵契(조선산식장려회) 등을 조직하였는데 이는 모두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 주목되는 것은 이들 독립운동이 복벽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점이다. 구왕조를 회복하겠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이념은 아직 기대할 수 없었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민주국가, 말하자면 근대적인 민족국가의 이상은 결국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통해서 비로소 나타나게 되었다.

 

일제 강점 후 해외의 독립운동도 활발했다. 미주에서는 1909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족한 국민회가 안창호를 중심으로 1912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한 때 재외 한국인을 대표하는 임시()정부 구실을 하는 한편 북미와 하와이원동지역에도 지부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역할 때문에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서기까지 해외한인을 대표하는 과도기적인 정부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대한인국민회의 결성과 확장에 이어 하와이에서는 朴容萬(박용만)1914년에 國民軍團(국민군단)을 조직했다.

 

한편 서간도 통화현에서는 耕學社(경학사)를 토대로 1912년에 扶民團(부민단)을 조직했는데 이를 계기로 그 전까지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세력들도 장기적인 전략 하에 독립운동의 기지를 이 지역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상해에서는 1917申圭植(신규식) 등이 朝鮮社會黨(조선사회당)을 결성하여 스톡홀름 만국사회당 대회에 독립요구서를 제출했다. 1918년에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공산당 한국지부가 창립되었는가 하면, 하바로프스크에서는 李東輝(이동휘)金立(김립) 등이 韓人社會黨(한인사회당)을 조직하기도 했다. 한인사회당은 그 뒤 1919년에는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와 高麗共産黨(고려공산당)이라 개칭했는데 이를 뒷날 상해파 공산당이라 한다. 청년 독립운동 단체들도 조직되었는데 블라디보스톡에서는 한인청년단이, 상해에서는 1918년 여운형 등에 의해 新韓靑年黨(신한청년당)이 조직되었다. 이렇게 해외의 독립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전후하여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31운동19193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과 태화관, 그리고 전국 9개 지역에서독립선언서를 선포하면서 시작하여, 그 뒤 1년여에 걸쳐 우리나라 안과 만주연해주 등 해외에까지 확산된 거족적인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총체적으로 일컫는다. 이 운동은 1910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후 강요된 포학한 무단식민통치로 실의와 좌절 속에 빠져 있던 한국민에게 민족 독립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일제는 한국강점 후 한국민을 두고 나라를 빼앗기고도 분통해 하지 않는 나약한 열등민족이라고 했는가 하면,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悅服(열복)한다고까지 세계에 선전하였다. 그러나 31운동은 우선 일본의 이러한 선전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민족의 저력을 확인하고 그것을 집약하여 한국 민족사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계기를 삼았다. 31운동을 계기로 한민족사에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첫째, 한성,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와 함께 상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그 해 411일 창건되어, 일제에 항거하여 민족독립을 추진할 수 있는 거족적인 구심점이 형성되었다.

 

둘째,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항일무장독립투쟁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31운동을 전후하여 북간도에서는 국민군회,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 대한의용군, 광복군 총영 등이 조직되어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1920년에는 홍범도 장군이 거느린 독립군 부대가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했고, 같은 해 청산리 전투에서는 김좌진 장군과 북로군정서군이 일본군을 크게 섬멸하는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셋째, 국내의 민족운동에도 큰 힘을 불어넣어 주었는데, 한국인의 고등교육을 위해 민립대학기성회가 조직되었는가 하면 물산장려운동과 근검절제운동 등의 실력양성운동을 일으켜 백성을 깨우치고 독립을 준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넷째, 31운동은 항일독립운동 못지 않게 민주민족운동사상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는데,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돋보인다. 그 하나는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정31운동이 추구한 국가적인 이상으로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손병희·이승훈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그 전까지는 독립운동을 해도 옛 왕조를 회복하겠다는 정도의 復辟運動차원에 머물렀으나, 31운동의 지도자들은 일본 재판장의 심문에서 분명하게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겠다고 소신을 밝혔던 것이다. 바로 이 이념이 상해임시정부의 헌법에 민주공화정으로 정착하였다. 또 한가지는 31운동 이전에는 민족운동사에 평민 지도자가 거의 없었는데, 31운동을 계기로 이 땅에서 양반출신 지도자 대신 평민출신 지도자가 민족운동을 이끌어 가게 되었다는 점이다.

 

31운동은 또한 국내의 이 같은 민족운동독립운동에 끼친 영향 못지 않게 세계사에 끼친 파장도 크다. 당시 세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베르사이유 체제가 출범하려 하였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전승국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질서를 재편성하려는 움직임으로 여기에는 패전국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민족자결권을 허락하는 듯했으나, 전승국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민족자결권을 암시하지 않아 계속 피압박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 때 한민족은 31운동을 통해 당시 전승국 대열에 끼어 있는 일제에 항거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 후의 전승국 중심의 침략강권 질서를 비판하였다. 이것은 바로 피압박민족의 입장에서는 세계 최초의 항거였다.

 

한국의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세계의 피압박 약소국가들은 그들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이 해 북경대학생들을 중심으로 54운동을 일으켰는데, 이 운동을 주도한 청년들은 조선을 본받자는 구호를 외쳤다. 인도에서는 마하트마 간디를 중심으로 비폭력무저항의 샤타 그라하운동을 일으켰는데 이는 영국에 대한 독립운동이었다. 필리핀베트남이집트 등지의 독립운동에도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31운동은 그 세계사적 의의도 높다고 할 것이다.

 

한편, <31독립선언서에는 민족의 자주자존을 강조함과 동시에 민족주의가 빠질 수 있는 오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대목이 보인다. 민족의 자주자존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하면 다른 민족에 대하여 배타적이기 쉬운데, 우리의 <독립선언서>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동양의 평화, 나아가서는 세계평화의 틀 속에서 강조하고 있다. 또 우리의 적대국이었던 일본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共存互惠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당시 피압박 상태에 있던 우리 민족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31운동은 민족운동이면서 인류의 양심의 회복, 인류의 共同善을 추구한 운동이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民主의 개념이 확연하게 드러난 민족해방운동이면서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동양평화 세계평회를 모색하려는 운동이었다. 따라서 3.1운동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민족을 핍박한 일제에 항거하는 해방의 의지가 분명하면서, 폐쇄적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인류의 보편적 진리에 접근하려는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세계화의 선구적 사상을 실천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4. 3.1운동 이후에 전개된 한국독립운동

191931운동이 발발하면서 독립운동은 크게 변화발전하였다. 31운동이 비록 소기의 목적을 제대로 이루지는 못했지만, 한국 독립운동사상에 남긴 가장 큰 성과는 바로 임시정부를 창건한 것이었다. 31운동 후 국내외에서 적어도 8개 정도의 임시정부가 실제 혹은 傳單上(전단상)으로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중 가장 뚜렷한 것은 1919년에 선포된 露領(노령)大韓國民議會(대한민국의회, 3. 17 ;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총리 이승만)와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4. 11 ; 국무총리 이승만), 그리고 인천 만국공원에서 국민대회 이름으로 그 조직이 선포된 漢城臨時政府(한성임시정부, 4. 23 ;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총재 이동휘) 등이었다. 상해 임시정부는 이 세 곳의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일원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9월에 이르러 상해임시정부는 임시정부개편안과 헌법개정안을 확정하여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로 하는 통합정부를 출범시켰다. 이로써 노령한성상해에서 설립된 임시정부는 형식상으로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잇는 통합정부로 재출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대통령 이승만은 위임통치안 요청설로 상해(1920.121921.5)에 왔다가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도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갔다. 거기에다 임정은 출발부터 지방색을 둘러싼 파벌의식과 갈등으로 독립운동을 지휘할 수 있는 중심 기구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노령파를 대표하는 이동휘와 미주파를 대표하는 안창호가 탈퇴하자 임시정부의 결속력은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임정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결속력을 잃게 되자 대안으로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파벌싸움 등의 구태를 일신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출발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국민대표회의는 문치파와 무단파, 서북지역과 기호지역, 노령만주 지역과 상해 임정 세력의 연계를 원활하게 하는 한편 1920년에 만주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무장항일운동 등을 더욱 조직화하기 위해 독립운동 기관들의 대표들을 회집시킨 연합체였다. 논의과정에서 생산적인 것들이 없지 않았지만,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에서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지고, 창조파가 기존의 임정을 두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려 하자, 임정 내무총장 金九는 임시정부 내무령을 발동, 해산시키고 말았다. 그 뒤 1920년대 중반부터 독립운동 세력들을 대동단결시키기 위한 민족유일당 운동이 일어났다. 중국의 관내와 만주, 그리고 국내에서도 통일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국내에서 신간회를 조직한 것 외에 해외에서는 볼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이같은 독립운동 세력의 합작통일운동은 해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31년 일제가 918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침략을 전개하자, 그 동안 독립운동선상에서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임정은 반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임정의 위임을 받은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통해 특무공작을 기도하였다. 19321월의 이봉창 의사의 일본 천황 폭살기도와 같은 해 429일의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는 바로 이러한 특무공작의 일환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 밖에도 李德柱(이덕주)兪鎭軾(유진식)의 조선총독 기습공격작전이나, 崔興植(최흥식)柳相根(유상근)의 관동군사령관관동청장관만철총재 기습공격작전도 임정을 배후세력으로 한 한인애국단의 특공작전이었다.

 

임정이 독립운동의 지휘부로서의 역할을 그나마 회복하게 되는 것은 1940년대에 들어서서다. 윤봉길 의거 이후 9개소 이상을 거쳐 重京(중경)에 정착한 임정은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했고, 1941년에는 삼균주의에 기초한 大韓民國建國綱領(대한민국건국강령)을 발표했는데 이는 수정자본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의 논리에 의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 무렵 金元鳳(김원봉)이 이끄는 좌파계열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의 일지대로서 합류했고(1942), 조선민족혁명당도 임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편 광복군은 중국군미국 OSS와 연합작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인도버마 전선에서는 영국군과 함께 연합군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또 주석 김구가 이끄는 임정은 이 무렵에 이르러, 1942년에 金枓奉 등에 의해 결성된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 1944년에 여운형에 의해 결성된 조선건국동맹 및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무장활동을 전개했던 한인부대와 통일전선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임정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국의 이념을 헌법 속에 구현했던 기관으로서, 27년간 연면하는 동안 초기에 파벌과 분열로 취약해졌던 한국 독립운동상의 지도력을 상당 부분 회복, 강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일제의 강점에 조직적으로 저항하던 의병세력은 1915년을 전후한 시기에 거의 투쟁력을 상실하게 되거나 그 투쟁방향을 선회하게 되어 무장투쟁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독립운동이 다양화하면서 무장투쟁과 의열투쟁이 조직화되고 강화되었다. 19194월에는 이범윤이 중심이 되어 西路軍政署(서로군정서)를 조직하는가 하면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게 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홍범도 휘하의 大韓獨立軍(대한독립군)이 갑산혜산진 등지의 일본군 병영을 습격하였고 그 이듬해(1920) 6월에는 왕청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1개 대대병력을 격파하는 봉오동전투의 승리를 가져오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2010월에는 김좌진이범석 등의 北路軍政署(북록군정서) 부대가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에서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한 청산리대첩이 있었고 11월에는 서일을 총재로 하고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을 부총재로, 김규식을 총사령, 이청천을 여단장으로 하는 大韓獨立軍團(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봉오동 및 청산리 싸움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만주지역의 조선족을 살해하는 庚申慘變(경신정변)을 일으켰다.

이에 앞서 191911월에는 金元鳳(김원봉)이 길림성에서 일제의 관공리와 관공서에 대한 암살파괴를 목적으로 한 義烈團(의열단)을 조직하였는데 본격적인 활동은 1923년부터 시작된다. 1923년 의열단은 자신들의 행동강령을 명시하기 위해 申采浩가 기초한 <조선혁명선언>을 공포하는가 하면, 金相玉 (김상옥)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투탄하고 일경들과 총격전을 벌였으며, 金始顯(김시현)黃鈺(황현)金在震(김재진)權東山(권동산) 등이 상해에서 폭탄을 가지고 안동신의주를 거쳐 국내에 잠입했으나 김재진의 밀고로 체포되는 黃鈺警部事件(황옥경부사건)’, 그리고 片康烈(편강렬) 의사의 장춘봉천 교전사건을 거쳐 羅錫疇 (나석주)의사의 殖産銀行東拓 (식민은행동척)투탄사건 등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의열단의 활약이었다. 항일무장투쟁은 뒷날 조선의용군과 광복군으로 재편되어 중국 관내에서의 무쟁투쟁으로 연결되지만, 초기에는 주로 동북삼성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서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한국인들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억압하면서 무장독립운동 세력을 소탕하려고 했다. 무장독립부대는 때로는 부대를 이끌고 중국 관내로 이동하기도 하고 만주에 남은 부대는 중국인과 합작하여 항일빨치산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따라서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만주 안에서는 물론 한반도에 대한 무장침공투쟁은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런 시기에 19375, 갑산군 혜산진 보천보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제 경찰에 타격을 준 동북항일연군 소속 김일성의 보천보전투와 1940년의 홍기하전투는 아마도 뒷날 김일성신화를 가능하게 했던 요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항일독립운동의 장르에는 이 밖에도 많다. 정치단체의 조직과 외교활동, 무실역행운동을 포함한 문화운동과 실력양성운동, 청년학생운동, 노동운동농민운동 등이 있고 지역별로는 국내는 물론 국외의 만주노령 방면, 임정중국 방면, 미주 방면, 일본 방면 등 여러 분야가 있다.

 

 

5. 맺음말

항일독립운동은 시간적으로는 한말일제강점기에 국한되고 있지만, 지역적으로는 한반도를 비롯하여 세계의 각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우선 의병만 하더라도 한반도 안에서만 전개된 것이 아니다. 김구도 참여한 1895년의 강계의병은 만주 삼도구에서 전개되었고 이범윤안중근의 경우는 연해주에서 전개되었으며, 유인석은 서간도 관전현에서 활동하였다. 한말 안창호의 공립협회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되었고, 박용만의 한인소년병학교는 네브라스카 등지에서 활동했다. 항일무장투쟁이 주로 한반도연해주만주중국관내 등지에서 전개되었다면, 워싱턴과 뉴욕파리헤이그스톡홀름하와이 등지에서는 외교적인 항일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방략면에 있어서도 항일독립운동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의 독립이라는 최상의 목표를 두고 그 실천방법을 다양화했다. 앞서 언급한 여러 방법 외에도 어떤 이들은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것으로 참여했고 한글이나 국사 등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창달하는 것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한 학자들도 있었다. 일제가 민족문화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하고 있을 때 민족문화의 수호는 무엇보다 중요한 민족독립운동의 방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는 종교와 신앙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런 경우 그 목표를 항일독립운동에 두지 않았다 하더라도 신앙의 지조를 굳게 지키며 훼절하지 않는 것 자체가 결과적으로 항일투쟁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주어진 신사참배상요에 대해 반대투쟁을 전개한 것은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기독교적 신념에 입각해서 전개했다 하더라도 민족사적 의미로는 항일독립운동의 차원에서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신앙적 의도와는 달리 신사참배강요라는 민족말살정책에 반대하여 투쟁했기 때문이다.

 

끝으로 항일독립운동의 민족사적 의미를 간단하게 언급함으로써 기조발제를 끝내고자 한다. 항일독립운동은 무엇보다 일제에 대한 저항을 통해서 한민족의 자아를 좀 더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항일독립운동은 한민족의 주체적인 자아를 형성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 이전에는 한민족이 근대적인 자아를 把持하는 것이 엄밀하지 못했다. 이민족의 지배하에서 고통받아 신음하는 경험을 통해 거기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쟁취하지 않으면 안되는 주체적인 자아-민족공동체를 재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31운동을 비롯한 항일독립운동을 통하여 한민족이 추구하는 근대적인 국가상이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3.1운동을 통해 표명되었던 民主의 국가상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을 통해 民主共和國으로 이념상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항일국권회복운동 이전에 가졌던, 그리고 일제강점 초기에 국권회복운동을 하면서도 분명하게 하지 못했던 국가상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항일독립운동을 통해 국가건립의 목표가 근대적으로 되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한 민족이 다시 세우려는 국가의 상에 대해 일대 발상의 전환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국가를 재건한다는 것이 종래와 같은 조선왕조혹은 대한제국을 회복한다는 의미의 復辟이 아니었다. 항일독립운동 특히 31운동을 계기로 이제는 우리가 세우려는 나라가 백성이 주인이 되는 民主共和政이라는 것이다. 31운동 지도자들의 사상에서 그 점이 뚜렷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독립운동을 통해서 민중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民主共和國 건설이 점차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항일독립운동은 단순히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독립운동의 차원이 아니라 근대 시민사회를 건설하려는 근대국가 건설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던 것이다. 해방 후 남북이 그 명칭은 다르지만, 다 같이 민주공화국 혹은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항일독립운동이 남긴 중요한 결실이었다고 확신한다.(이 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함석헌학회 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