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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42 : 일제강점기 86 (일제 식민강압지배 36년사를 마치며......4)

 

 

 

한국의 역사 1,042 : 일제강점기 86 (일제 식민강압지배 36년사를 마치며......4)

 

           

 

 

일제 식민강압 36년사를 마치며......4

 

 

아래는 일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에 대한 글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

 

1. 머리말

 

 

역사를 지나간 과거의 기록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그러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은데, 이는 성장기에 입시위주의 교육을 받으며 역사에 대해 필요 없는 과목, 도움이 되지 않는 과목일 뿐이라 치부해버린데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우리나라의 양쪽에 위치한 중국과 일본의 경우,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파른 경제성장을 통해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자리를 위협하는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를 중국 지방정권의 한 역사로 편입하려는 왜곡된 행위를 보이고 있으며, 일본은 이보다 더 심한 행위를 일삼아오고 있는데, 이는 제국주의 시절 저지른 너무나 많은 과오를 뉘우치지 않고 덮어보려는 옹졸한 행위에 불과하다. 그 중에서도 일본은 과거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수많은 만행을 저지른 일제강점기를 미화하려는 시도를 그치지 않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植民地近代化論)’을 들 수 있다. 과거 소수의 일본 우익 세력들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에 불과했던 것이 시간이 흘러 양국에서 동조하는 수많은 젊은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으로 뉴라이트 계열의 서울대학교 이영훈 교수와 같은 지식인 뿐 아니라, 인터넷상에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는 네티즌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일본의 식민지배가 현재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한국 사회 근대화의 밑거름이 되어준 것이 사실인가? 물론 아직까지 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재조명해보고, 이 주장의 허구성을 여러 가지 자료를 들어 다각도로 반박하고자 한다.

 

 

. '식민지 근대화론'의 의미와 쟁점

 

1. 식민지 근대화론의 의미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본 제국 쇼와 천황의 한국 식민 지배에 의해 한국이 억압받고 수탈을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식민 지배가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고종의 무능과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척족에 의해 피폐해진 조선을 일본이 병합함으로써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에 의해 정체성론의 일환으로 주장되기도 했지만 한국에서는 1950~60년대에 일소되었다. 이 이론은 그 뒤 일본 우익 정치인들만 간헐적으로 주장하고 있었으나, 1980년대 이후 뉴라이트 계열의 안병직, 이영훈에 의해 부활되었다. 주로 일제의 한국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대의 식민지 근대화론은 개발 경제학에서 1960~1970년대의 생산요소, 1980년대의 내재적 기술 발전에 따른 경제 성장 모델이 한국에 들어맞지 않자 1990년대 들어서 결국 개발경제학자들이 제도로 이를 설명하려고 하였는데, 그에 따른 연구 결과 제도연구가 개발경제학의 대세가 되었고 1986North and Weingast 의 논문 이후로 경제사에도 제도연구가 도입되었다. 이에 따른 결과로 근대적 사유재산 제도, 회사법, 행정-사법 분리가 잘 갖추어져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으며, 이 제도들이 시기상 일제 강점기에 기원한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해서는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꾸준한 논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은 동시성을 가졌다는 주장도 있다. 1950년 대한민국 경제의 발전 경로가 지금보다 훨씬 다양하게 열려 있었을 뿐 아니라 60~70년대 고도성장을 이룬 기본 조건이 형성된 시기라는 주장도 나왔다.

 

이처럼 한국의 근대화라는 하나의 결과를 두고 그 원인을 식민지지배에서 찾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한국 경제의 성장 기원을 식민지 시대로 보고, 일본의 과거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근거가 되는 이론이라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 식민지 근대화론을 둘러싼 논쟁

 

식민지 근대화론을 둘러싼 논쟁은 역사학계의 오래된 화두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의해 한국의 근대화가 가능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그에 반박하는 학자들의 논리가 서로 오가며, 오랜 기간 설전을 벌여왔다. 이 오래된 논쟁은 1980년대 중반부터 최근 2012년 초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아직도 양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상황이다. 이처럼 양측의 주장이 완강한 만큼, 과거 논쟁부터 최근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대립되는 두 주장의 근거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논쟁으로 19961112일자 한겨레신문을 보면 서울대 안병직 교수는 지금까지 식민지시기 연구가 침략-저항이라는 시각에만 머물렀다며, 이제는 침략-개발이라는 측면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논쟁에 불을 붙였다. 더 나아가 그는 우리나라가 중진 자본주의 국가이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로서의 진입을 위해서는 침략-저항에만 국한해 있는 역사교과서도 침략-개발의 측면을 보강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며 논란을 가중시켰다. 당시 안병직 교수는 일제가 남긴 개발로 철도 등 사회간접자본, 조선인 자본가의 경영 노하우, 노동자의 숙련 등을 제시 했다. 또한 일제하 조선인 자본가들이 친일행위도 했지만, 이들이 자본주의화 과정에 일정한 기여를 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역사학계에서는 그의 이러한 주장이 일본의 경제학자 나카무라 데쓰의 중진자본주의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 주종환 동국대 명예교수는 식민지배가 개발의 측면을 동반한다는 것은 이미 마르크스가 1백여년 전에 했던 얘기로,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우리 학계가 식민지시기에 이뤄진 개발을 도외시 하고 있다는 안병직 교수의 주장은 허상을 쫓고 있다고 비판하며 맞섰다. 또한 주종환 교수는 일제가 조선을 개발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수탈을 위한 개발이었으며, 국권을 상실하지 않았더라면 막대한 양의 국부를 일제에 수탈당하지 않고도 개발을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점을 도외시하고 일제의 개발이 자본주의화의 동력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주종환 교수 이외에도 한국사를 전공한 한양대 정태헌 강사는 실증적인 방식으로 안병직 교수의 주장을 비판했다. 그는 식민지배 전 기간 동안 국내 GDP 550여억엔의 80%가 유출됐음을 근거로 들었고, 1930년대를 지나면서 화전민이 120만명, 도시빈민이 150만명에 달하는 등 일제에 의해 조선은 개발된 것이 아닌 수탈당한 것이라 주장했다. 또한 일제가 개발을 통해 남긴 사회간접자본들도 한국전쟁 때 상당부분 파손된 만큼 안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에 대해 비판했다.

 

위의 논쟁에서 알 수 있듯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일제 강점기시기의 높은 경제성장률이나 경제적 수치들을 근거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에 반하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근거들 자체가 허구이며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함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성에 대한 고찰

 

1. 근대화의 사전적 의미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성에 대해 알아보려면 우선 근대화(近代化)에 대하여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근대화라는 말은 널리 사용되고 있으나 개념 규정이나 내용에 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근대화라는 말은 경우에 따라서 서구화 · 공업화 · 민주화 · 합리화 · 도시화 등 다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개혁 또는 발전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처럼 근대화에 대한 정의 자체가 일치된 하나의 견해가 없기 때문에, 어느 부분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서, 같은 사회일지라도 근대화된 사회라 평가될 수도 있고, 아직 전근대적인 사회라 평가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화의 정의에 대한 일치된 견해는 아직 없다 할지라도 보편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모든 면에서 전반적으로 구조적 변화가 진행되어 후진적인 상태에서 보다 향상된 생활조건을 조성해 가는 과정을 근대화라고 함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근대화에 대한 정의를 위와 같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방면에서 보다 나아지는 것이라 정의하고자 한다.

 

 

2.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성

 

그렇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사회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방면에서 그 이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는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의 근거부분을 봤을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대표적으로 내세우는 근거들은 경제부분에만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대화라는 것이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제 한 부분의 발전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 생각하더라도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빈약한 근거에 기반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처럼 경제적 부분에서만큼은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라면 이 이론도 어느 정도의 설득력은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들도 실상을 살펴봤을 때, 객관성을 가지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영훈 교수는 1910년대 조선 경제의 급성장의 근거로 1차 세계대전의 호경기로 농업 생산이 급증했다는 것,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수리시설 확충과 활발한 개간·간척, 그리고 우량 품종과 화학비료의 보급 확대 등을 통해 생산량이 급증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인용하는 조선총독부의 농업 통계 자체가 부정확하고 불충분하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첫째, 조선총독부의 농업 통계는 농지 확대를 위한 간척의 경우 1916년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1921년 지도에 나타나 있는 해안선의 방조제, , 하천의 제방 등을 비교분석해 1910년대에 많은 농지들을 확보했다고 본다. 이를테면 4세기 이래 농업용수를 저수했다고 알려진 벽골제를 방조제로 보고 벽골제에서 해안선까지가 잔물의 피해를 보는 갯논이었는데, 일본이 해안선에 방조제를 많이 설치해 간척지를 확보했다는 식이다. 그러나 1916년 지도에서 방조제나 보, 하천의 제방 등을 표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고, 1921년에 나타난 방조제 등은 조선 때부터 쓰인 방조제 등을 보수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 시기 실질적인 농지 확대는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둘째로 1차 세계대전의 호황기로 말미암은 농업 생산의 급증도 허수라고 볼 수 있는데 일본은 1888년부터 1908년까지 산업혁명 과정을 거치면서 경제 규모가 약 2배 정도로 커진다. 소득 증가와 함께 쌀에 대한 수요도 1914년에는 연간 1인당 1석으로 확대됐고, 그 이후엔 1.1석으로 더 늘어났다. 그러나 도시화와 매점·매석 등으로 1918년 일본에서 쌀 소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1920년 조선에서 산미증산계획을 실시한다. 그러니까 쌀 생산을 급속히 증대할 만큼 쌀값이 충분히 상승하는 구조는 1920년대에나 가능했다는 것이고, ·일 쌀 시장이 완전히 통합된 뒤로는 쌀값 급등도 가능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일본의 쌀 창고로 전락한 조선의 사람들은 19100.7석의 쌀을 먹다가 쌀시장이 단일화된 1930년 중엽부터는 연간 0.4석의 소비밖에 못한 점을 볼 때, 이는 근대화의 근거가 아닌 수탈의 결과가 된다.

 

셋째로 우량 품종과 화학비료의 보급 파급력 또한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우량품종이란 곧 일본 품종을 뜻하는데, 1912년 보급률이 2.79%, 191412.24%를 기록했지만 50%를 넘어선 것은 1919년에 이르러서다. 더구나 우량 품종이라고 해봤자 조선 재래종과의 수확량 차이는 평균 21%에 불과했다. 이렇게 본다면 우량 품종 도입으로 인한 미곡 생산량 증가도 1919년 이후에나 가능했을 것으로 볼 수 있고 그 증가량 또한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라 볼 수 있다. 화학비료의 사용 장려도 1926년 이후로 추정되는 실정이다.

 

이러한 점들은 1917년까지 조선의 전체 생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조선 GDP의 빠른 성장은 농업 생산이 급증했다고 잘못 추계한 탓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농업 생산 급증이 허구에 불과하다면 식민지근대화론도 허구가 된다.

 

이외에도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참고하고 있는 조선총독부의 통계자료에서는 191423만 마리의 소가 191541만 마리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등, 부정확한 부분이 많다. 따라서 이런 부정확한 통계를 수정·보완해 당시 경제 상황이 좋아졌다고 주장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허구에 가까운 근거에 기반하고 있기에 설득력이 없다고 판단해 볼 수 있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식민지 근대화론은 첫째 신뢰할 수 없는 방식을 기반으로 농지 확대를 추산했다는 점, 둘째 농업생산량의 증가에 있어서 실질적인 증가는 없었다는 것을 간과했다는 점, 셋째 우량품종과 화학비료의 보급 파급력을 과대평가 했다는 점에서 당시 경제성장을 잘못 추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오류가 많고 의도적으로 왜곡된 조선총독부의 통계량을 기본으로 수정·보완하였다는 점 또한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점을 드러내준다.

 

본질적으로는 근대화라는 현상은 경제와 같이 하나의 일면만을 통해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말의 설득력 또한 잃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식민지 근대화론은 좁은 시각으로 근대화의 의미를 단정 짓고, 경제적인 부분의 단면만을, 왜곡된 자료와 한정된 자료만을 가지고 살펴보았기에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이론일 뿐, 다각도로 근대화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볼 때, 근거가 부족한 이론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한국의 눈부신 발전을 일본의 식민지배의 결과로 보고, 반인륜적인 행각을 일삼았던 과거의 잘못을 정당화하려는 일부 일본의 학자들은 객관적 안목으로 역사를 직시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이처럼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우리도 체계적인 역사교육을 통해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 역사적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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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내 생각은......

 

사실, 한국의 경제성장과 오늘의 풍요는 자본주의 맹아론이니, 식민지 근대화론이니 해방후 근대화론이니 등을 떠나 50년대 당시만 해도 농촌을 피폐하기 그지 없던 시절이었다. 자본주의와 근대화로 진전된 모습은 전혀 찿을 수 없는 원시시대를 방불케 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의 폐허위에서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은 황량한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 땅에는 근대화를 이룰 아무런 생산시설, 자본, 기술 등이 파괴되고 사라져버리고 남아 있지 않았다. 대도시나 공장은 폐허로 변했고 중소 도시나 읍 근방의 농촌 마을은 하루가 다르게 이농내지 유랑하는 사람들이 들락거렸고 농사짖는 일부 농부들은 대부분 토지가 없는 소작농에 불과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야 했고 춘궁기에는 나물, 소나무 껍질을 벗겨먹고 다행히 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잇었다면 다행이었던 시절이었다. 일제의 근대화 잔재는 커녕 해방후 몇 년동안 쌓아온 경제적 기반마저도 송두리채 한국전쟁으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산은 민둥산이요 풀한포기 제대로 자리 않던 산하였고 거지들이 아침, 점심, 저녁이면 수도 없이 구걸을 하려 다녔던 시절이었다. 사실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론이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잔영도 남지 않았고 휴지 하나 신발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초토화된 이 땅에서 경제발전을 이룩한 것은 제3공화국의 경제개발에 의해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결과로 오늘의 풍요가 가능하였기에 식민지 근대화론은 그 의미를 인정하기 힘들다고 생각된다.

 

 오늘의 풍요가 60~70년대를 살아온 어른들의 고통과 고난의 시대에 근대화의 역군으로 몸을 가리지 않고 헌신했기 때문이지 일제시대부터 이어져온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된다. 일제가 지배하던 한국, 대만과 동남아시아 나라들 중 대만과 한국이 유일하게 경제적 성공을 이루었고 다른 나라는 아직도 경제적 곤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풍요가 박정희의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이룩한 경제발전이 이룬 결과이지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에서 비롯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만약 그 당시 박정권이 강력한 경제발전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까지도 정치적 권력투쟁과 이념 싸움질만 벌이며 경제발전은 커녕 지금의 동남아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 등은 모두가 학문을 핑계대고 지껄이는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며 그것은 결국 학자들이라는 것들이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무언가 튀는 남다른 이론을 제시하려고 발버둥치고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키며 그를 위해 각종 허구 이론을 내세우며 유명세를 얻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식민지 근대화 이론은 부분적인 통계수치를 내밀며 민족주의 사학자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머리가 붉게 물든 사이비 학자들이 아닌가 생각되며 그 이론 자체가 내가 보기에는 별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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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저의 블로그를 자주 방문해 주시고 일제 식민강압사를 애독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더운 여름날 모기와 싸우며 올리기 시작한 일제 식민강압사를 해를 넘겨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3월에서야 마무리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알게 되었습니다.

 

울분과 통분을 참을 수 없고 망한 나라를 되찿기 위해서 만주 벌판에서 소리없이 죽어간 수많은 독립군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폭행과 고문으로 수많은 동포들이 감옥에서 옥사하였고 친일모리배들은 민족을 배신하고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일제에 순순히 순응하면서 탄압에 앞장섰던 민족배신자들입니다. 그들에 의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탄광으로 전쟁터로 끌려갔으며 그들은 조선민족에게 자진하여 징용과 징병에 앞장서도록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젊은이들이 만주, 중국, 동남아와 태평양의 이름모를 이국 전선과 섬, 탄광, 공장에서 소리없이 죽어 갔으며 사라졌습니다만, 지금 우리들 아무도 그들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이처럼 타국에 의해 망국의 결과 무수한 고난과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고 그 지나한 처절한 삶은 우리들에게는 아직도 그 아픈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나라가 망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역사는 준엄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대부분 그 나라와 사회가 더불어 같이 살지 못하고 가진자와 갖지 못한자가 극단적으로 분리되어 사회의 역동성이 사라질 때, 그리고 공정과 정의를 상실하고 일부 지도층에 의해 권력이 독식되고 탈법.불법이 난무하며 비리와 부패가 만연할 때 그 사회는 생명력을 상실하고 병든 맹수가 죽어가듯이 서서히 내부적으로 썩어가다가 내.외부의 강한 물리적 충격에 의해 한꺼번에 무너진다는 점입니다. 그 원초적인 바탕에는 부의 흐름이 순환되지 못하고 신분질서가 고착화되어 몸에 암덩어리가 커지면서 썩어가듯이 어느날 갑자기 쓰러지는 것처럼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부분 지도층 인간들의 끝없는 탐욕과 사회적인 역동성 상실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고려말이나 조선말의 상황이 비슷한 것이 우연이 아닌 것처럼 인간에게 생노병사가 있듯이 나라도 생로병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시대나 그러한 사이클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이 대동소이합니다.  그것이 인류가 지나온 역사의 흐름이기도 합니다. 영원한 나라도, 영원한 평화도, 영원한 전쟁도 인간의 탐욕으로 지속되지 못하며 정반합의 원리에 의해 생성과 융성, 그리고 타락과 멸망을 반복하는 듯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고난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현실을 꾸려나가야 할 지, 그리고 미래를 설계해 나가야 할 지를 곰곰히 생각나게 합니다.

 

잠시 휴식과 생각의 시간을 가진 다음 해방후부터 전개되는 해방의 혼란과 한국전쟁의 비극, 휴전과 전쟁복구, 자유당 장기집권과 부정선거, 4.19 민주혁명, 혁명정부의 혼란, 그리고 5.16 군사혁명후 추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강력한 군사정권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이루고 민주화를 이루고 오늘의 풍요를 이루기까지의 해방후 현대사를 시작하려 합니다. 현대사는 아직 경과된 시간이 그리 길지 않고 짧은 관계로 진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으며 또 저마다 사상과 이념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편향적인 내용이 될까봐  좀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가난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민주화를 이루고 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잘 잘못을 가려볼까 합니다. 그 가운데는 지도자라는 인간이 국가의 발전을 좀먹고 방해하며 자신의 영달만 꾀하려 했던 부류들도 적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풍요 뒷면에 찌들고 썩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이면도 살펴보고 그 문제점도 살펴볼까 합니다.

 

그래서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이 절대적인 역사발전의 주체이므로 그들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살펴보면서 특히 지도층의 도덕과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살펴보고 무엇이 진정한 국민을 위하고 나라의 부강과 부국을 위한 일이었는지를 평가해볼까 합니다.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부류를 위한 것인지, 자신이 태어난 지역민만을 위한 것인지, 자신의 사상과 이념에 빠져 나라를 거들 낸 것인지, 자신의 영달을 위한 것인지, 가진자와 권력층을 위한 것인지를 살펴보고 평가하려 합니다. 그런 가운데 다소 오해와 편견이 있더라도 이해해주시고 가급적 공정한 입장에서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따라 어느 길이 바른 길인지도 살펴볼까 합니다. 그래야 오늘의 현실을 평가하고 우리 후손들이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설계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기 때문입니다.

 

변함없는 격려와 애독을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2014년 3월초, 서초동 올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