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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39 : 일제강점기 83 (일제 식민강압지배 36년사를 마치며......1)

 

 

 

 

한국의 역사 1,039 : 일제강점기 83 (일제 식민강압 36년사를 마치며......1)

 

           

 

 

일제 식민강압지배 36년사를 마치며......1

 

 

감정과 이성적인 역사 이해와 인식의 차이

 

지난해부터 시작한 일제 강압식민지사 기술을 거의 반년 동안 진행하면서 나 스스로도 많은 것을 배우고 알게 되었다. 거의 무지에 가까웠던 일제시대의 식민사를 블로그에 올리면서 왜 우리는 이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를 가슴 깊이 느끼게 되었고 두번 다시는 이런 안타까운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처절한 심경으로 현실을 돌이보게 된다. 그러나 일제 강압식민지사는 친일과 독립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역사를 재단하여 왔고 아직도 그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일제 식민지사를 우리들 입장에서 오로지 부정적인 면만 부각하여 온 것도 사실이고 그것이 친일이 아니라는 증표로 인식하여 온 것도 사실이다.

 

일부 임시정부 요인,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독립군 활약, 청산리.봉오동 전투만 역사에 부각되고 나머지 노동자.농민, 국내 독립운동가 등 민중들의 처절한 항일은 저평가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사실 임시정부나 독립군의 항일투쟁은 일제의 군군주의 무력 앞에 조그만한 걱정거리에 불과했다. 또 조선이 힘없이 일제에 합병당한 시대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부족했고 우리 스스로의 부족했던 정치.사회.경제적인 모순과 문제점도 소홀히 다루고 있다.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일제의 합방문서에 임금의 도장을 대신 갖다 찍을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세심하게 살피고 반성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망국의 원흉으로 친일파들만 매도하기에 급급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일제가 조선을 침탈하고 식민지를 경략하면서 어떠한 악랄한 방법으로 한민족을 통치하였는지 그리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단편적인 이야기만 듣고 알고 있을 뿐이다. 일제 병탄사를 우리들에게 주지하지 못하도록 역사 교과서를 편성하고 주도한 교육계의 자식인들이 친일파가 많이 남아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친일파 숙청에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일제의 강압통치가 계속되고 민주사변, 중국침략,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막강한 군사력으로 동남아, 태평양까지 석권하자 조선의 독립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조선이 영원히 일제의 속국이나 합방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고 그러한 가운데 그들만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스스로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친일활동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느 시대나 조국을 배신하고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부류는 있기 마련, 고려 시대 거란족 앞잡이, 몽고지배시 몽고를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린 권문세족들, 명나라 앞잡이, 청나라 앞잡이도 그랬고 일제시대 친일파는 물론 한국전쟁시 인민군 앞잡이, 중공군 앞잡이가 그랬고 오늘날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불순 세력도 마찬가지다.

 

또 일제의 강압통치에 반발하여 3.1 만세의거와 6.10 광주학생만세의거가 일어났지만 일제의 무차별적인 진압으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고 많은 인사들이 해외로 망명하는 사태를 야기하였다. 일제는 만주침략을 위한 철도부설을 위해 청나라에게 간도 지방을 넘겨주었고 백두산 정계비는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또 일제는 우리말을 말살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였고 창씨개명까지 강압적으로 전개하였다. 경제.문화.사회적으로는 합방을 꾀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차별정책을 추구하였다.

 

또 조선을 포함 한국의 역사 전체를 변조하기 위해서 각종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였는데, 각종 역사적인 유물 및 왕릉 도굴, 유물 흔적 제거 및 변조, 한일관계 고문서 전량 회수 및 파기내지 은익, 광개토대왕비 반출 시도 및 비문 내용 조작, 한사군 위치 변조, 평양성 위치 변조,  고대사인 고조선 역사 및 고구려 역사 변조 및 축소, 발해 역사 변조 등 한민족의 역사를 변조, 축소하여 한민족의 위대성을 축소, 비하한 식민사관을 철저히 주입한 역사책을 만들었고 그러한 인식을 가진 역사학자를 양성했으며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교육시켰다. 이병도를 비롯한 식민사관에 빠진 많은 역사학자를 양성하여 한국의 역사학계 후학들을 양성하였고 현재까지도 우리 역사학계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현실이다.

 

강대국의 힘에 의해 갑작스런 해방이 찿아왔고 일제 무장해제를 빌미로 남북에 들어온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 반도는 두 동강 나버렸고 각각 두 개의 정권이 들어서자 북의 김일성은 통일전쟁이라는 명분으로 남침을 감행하였다. 그래서 결국 강대국의 대리전쟁을 치른 한국전쟁은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초토화를 만들어 이 땅을 다시 풀뿌리 하나 제대로 자리지도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3년간의 지리한 전쟁 끝에 평화회담도 아닌 휴전이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쟁이 중단된 상태로 이념과 사상이 다른 두 정권이 남북에 대치하면서 총뿌리를 서로 겨누고 극한적인 대립을 해온지 벌써 반세기가 흘렀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도 아닌데 나라가 두 동강 났지만 전쟁 발발의 원흉인 일제는 폐허위에서 한국전쟁이라는 특수를 맞아 급속한 경제적인 재기를 다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오늘의 경제대국으로 선진국의 지위를 번듯이 누리고 있지 않는가? 이게 무슨 얄굿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조선의 망국에서 비롯된 우리 민족의 뼈아픈 고난의 역사를 지금도 우리는 극복하지 못하고 남북이 분단된채 반세기 동안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실정이다. 임시정부와 독립군들이 해외와 만주에서 독립운도을 전개하였고 국내진공을 계획하고 일부 독립군들이 소규모로 국내진공 작전을 전개했지만 일제에 다소 부담만 주었을 뿐, 만주 군벌과 야합한 일제는 독립군 근거지를 거의 소탕하는 등 러일.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거대한 병영국가를 이루며 군국주의로 치딛고 있던 일제를 조선에서 힘으로 밀어내기에는 너무나 무모한 이상에 불과했다.

 

또 3.1운동, 6.10 광주학생사건으로 명명되는 명칭도 잘못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제 병탄 36년사를 단편적인 내용에 불과한 내용만 가르칠뿐 제대로 학교에서도 가르치치 않고 있다. 해방 후 자유당 정권은 정권창출과 공산당 척결에 치중한 나머지 친일파를 그대로 다시 등용하였고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근본적인 역사의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다시 친일파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고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수많은 인사들이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들의 협박과 흔적지우기로 말미암아 아직도 후손들이 어둠속에서 살아가야 했고 친일파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현실이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통치하면서 철저한 수탈로 일관하였고 그들이 건설한 도로와 철도, 공업지대는 만주와 중국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조선을 이용하였을 뿐이라는 감정적인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인적.물적 수탈은 물론 민족의 역사와 정신까지 말살하려고 발악을 하였던 일제는 조선인을 노예로 부려먹고 모든 물자를 수탈해가는 전형적인 식민지배 형식을 취하였다는 점도 같다. 그러나 이런 감정적인 일제시대를 일부는 이성적인 판단으로 일제의 조선 근대화에 기여한 점도 인정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론을 제기하는 부류도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 일부 지식인은 일제 식민지배 기간 중 토지조사사업, 일본자본 유입, 공업지대 건설, 철도부설 등에 대하여 이분법적으로 감정에 지우쳐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일제 강압식민사를 재해석하여 조선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점도 이해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는바, 이에 대한 국수주이 지식인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일제 강압식민사에 대하여 국수적인 입장에서 강력하게 주장하는 감정파의 글과 일제 강압식민사를 재해석하여야 한다는 양쪽의 글, 그리고 중립적인 의견을 개진한 글 등을 같이 살펴보기로 한다. 

 

 

일제 강압식민지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최근 일본의 우경화에 따른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 교과서 역사왜곡, 위안부 문제, 징용배상 문제, 독도문제 등으로 인해 한일간에 첨예화되면서  경색국면을 피하기 힘들게 되었다. 아베 총리의 행보는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 등 이웃나라들의 반감을 부채질 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일본 측의 역사왜곡이 노골화되면 한국 사회 안에서 식민지 경험에 대한 다층적 이해와 재해석을 모색하기 보다는 친일-반일의 이분법적 대립구조만이 부각되는 이치이다. 보수 우파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 이른바 ‘일본군 군대위안부’에 가해진 명백한 인권유린이나 제국주의적 침략 과정에서 야기된 독도 침탈을 부정하는 전도된 주장은 인간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현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인식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사회로 반사되어 방어적이고 이항대립적인 역사인식을 강화시킨다. 이러한 구도가 재생산되는 한 평화 공존하는 미래지향의 한일관계를 만들자는 희망은 말의 성찬에 그치지 않을 수 없다. 이래서는 우리 안의 역사책임을 돌아볼 여지를 만들기도 어렵다. 역사왜곡에 맞선 단합된 투쟁이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

 

합방에 동의하거나 심지어 앞서서 선동한 사람들, 현실의 힘에 짓눌려 소극적으로 체제에 순응했던 사람들, 체제의 모순 속에 삶을 유린당했던 사람들, 일제에 대항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투쟁한 사람들에게 식민지 경험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해방 이후의 역사적 파고 속에서 그 차이는 명징한 질문과 성찰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은폐되었고, 일제강점기의 역사는 몇몇 친일파와 헌신적인 독립운동가의 역사로 채워졌다.

 

일제강점기는 사회의 여러 분야에 근대적 제도가 도입되고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했던 시기였다. 비록 그것이 한국인의 삶을 개선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해도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회 구조와 개인 일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의도되지 않은 파생효과를 관찰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해석하는 것도 역사인식의 중요한 영역이다. 그러나 친일-반일의 이분법을 강요하는 도구적 역사관은 우리의 삶에 포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다층적 식민지경험의 이해를 허용하지 않는다. 인적·제도적으로 현재에 미치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막강한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기존의 빈약한 역사인식은 현재의 우리 자신에 대한 빈곤한 이해로 이어진다. 원론적으로 일제의 침략이 잘못된 것이라 해도 식민지 지배는 긍정적 결과를 낳았다는 식의 ‘식민지 근대화론’ 역시 그러한 빈곤성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것은 어떠한 현실을 만들고 싶은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적어도 과거의 잘못과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된 책임자를 규명하여 처벌하거나 비판하는 동시에, 그것을 묵인했던 구조와 사람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해방 이후 66년이 흐른 지금 중요한 것은 누구의 조상이 친일을 했는지 안했는지가 아니라 그 조상의 행위에 대해 현재의 후손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이며, 나아가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경험이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냉정한 인식일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최소한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파편화시켜 정쟁의 도구로 갖다 쓰는 몰역사적 행태를 단호히 거부해야 하며,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역사서술을 재단하려는 시도를 준엄하게 비판해야 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진실한 자기 성찰과 반성 없이는 역사로부터 어떤 것도 배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