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37 : 일제강점기 81(태평양 전쟁과 일제의 패망 7)

 

 

 

 

 

 

한국의 역사 1,037 : 일제강점기 81(태평양 전쟁과 일제의 패망 7)

 

           

 

 

 

마닐라 전투

마닐라 전투(1945년)
(태평양 전쟁의 일부)
마닐라 폭격 후 모습.
마닐라 폭격 후 모습.
날짜 1945년 2월 3일 - 3월 3일
장소 필리핀 전역
결과 연합군의 승리
교전국
미국 미국
필리핀 필리핀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지휘관
미국 미국
오스카 그리스우드
로버트 S. 브라이틀러
베른 D. 머지
조셉 M. 스윙
필리핀 필리핀
알프레도 M. 산토스
이와부치 산지 중장
병력
미국군 35,000명
필리핀군 3,000명
일본군 14,000명
피해 규모
6,756명 사상 12,000명 사상(그 외 필리핀인 100,000명 정도 사망)


1945년의 마닐라 전투는 미국, 필리핀 연합군과 일본 제국 간의 전투이다.

 

 

전투 계획

맥아더는 휘하부대 중 최정예인 6 군7 함대의 지원 하에 링가옌 만으로 상륙할 계획을 세웠고 예정일은 1945년 1월 9일이었다. 한편 14 방면군야마시다 도모유키 대장은 루존 섬 확보를 위한 결전이 불가능한다고 판단한 나머지 예하 병력을 3개 집단으로 나누어 최대한의 지구전을 실시하기로 결심했다. 쇼오부 집단은 카라발로 산악지대의 방어에 주력하고, 켐부 집단클라크 비행장 일대를 방어하며, 심부 집단은 남부 루존을 방어하기로 하였다. 일본군의 병력은 쇼오부 집단이 140,000명, 켐부 집단이 30,000명, 심부 집단이 80,000명 등 총 250,000명이었고, 150대의 항공기가 이를 지원하였다.

 

 

경과

1월 4일, 850척의 대함대는 레이테를 출발하였다. 항해 도중 가미카제의 공격을 받아 17척이 격침되었으나, 예정된 시간에 링가옌만을 엄습하였다. 이 작전은 거의 무저항 속에 이루어졌으며, 저녁까지 68,000명의 병력이 상륙하였다. 이후 1 군단이 카라발로 산악 방면을 견제하는 동안, 14 군단은 신속히 남진하여 1월말까지 클라크 비행장 일대를 장악하였다. 일본군은 해군 측의 주장에 따라 마닐라 방어를 결심하였고, 한 달간의 치열한 시가전끝에 미군은 마닐라를 점령하였다. 켐부 집단은 병력이 적었던 탓에 미국 14 군단의 맹공을 받아 쉽게 격파되었으나, 심부집단과 쇼오부집단은 끈질기게 버텼다. 그들의 전투 중에서 특히 발레테 고개살락삭 협로에서의 전투는 매우 치열하였다. 미군은 점차 일본군의 근거를 박탈해 나갔지만, 종전까지도 저항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7개월에 걸친 루존 지구전에서 미군은 38,000명이 피해를 입었으나, 일본군은 확인된 수만도 170,000명에 달했다.

 

 

 

 

일본 본토 공습

일본군에 대한 영국미국의 대규모 도시 폭격을 뜻한다. 이 전쟁은 독일 제국의 예처럼 일본을 주저앉히는데 제 몫을 다했다. 1942년 둘리틀 공습을 시작으로 1945년 8월 히로시마 원폭 투하까지 연합군은 일본 주요 도시를 폭격했다. 초기에는 진주만 공격에 대한 보복성이 짙었으나 후기에는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선을 보충하는 역할로 전환되었다. 대표적인 공습에는 둘리틀 공습, 도쿄 대공습, 고베 공습 등이 있다.

 

 

일본 본토 공습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의 일부)
Incendaries-b29.jpg
날짜 1942년 4월 1일- 1945년 8월 15일
장소 일본 본토, 주로 도쿄, 고베, 가와키 등 대도시
결과 일본 제국의 항복에 기여, 미국영국연합군의 승리
교전국
미국 미국

영국 영국

일본 일본 제국
지휘관
미국 제 5군

미국 제 7군
미국 제 11군
미국 제 20군
미국 제 3 함대
미국 제 5 함대
영국 영국 태평양 함대

  • 캐나다 캐나다 해군
  •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 뉴질랜드 뉴질랜드 해군
일본 서부 구역

일본 중부 구역
일본 북부 구역
일본 동부 구역
일본 일본 중앙 방위군
일본 항공 총군
일본 1 총군
일본 2 총군

피해 규모
미국 제 5군: 31대

미국 제 7군: 12대
미국 VII 항공사령부: 157대, 91명
미국 제 20군: 414대, 2600명 이상

일본 4200대,
241,000명-900,000명


 

배경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은 일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올랐다. 미국은 1942년 1월, 독일 제 3제국일본 제국, 그리고 이탈리에 선포하여 전쟁에 참전하였다. 당시 미국은 대서양 해전과 태평양 전쟁 둘 다에서 싸워야 했는데 태평양 전선에 집중하고 있던 미국은 대서양 해전에서 크게 패배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은 일본에게 크게 패함으로써 태평양의 제해권을 일본에게 넘겨준 상황에서 전세 역전을 꾀해야 했다. 1942년 2월 1942년 2월 24일, 일본 잠수함 2척이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타 바바라의 정유소 포격 이후 미국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도쿄 폭격을 계획함으로써 본격적인 일본 본토 대공습의 막이 올랐다. 1941년 6월 20일 설립된 미국 육군 항공대는 이러한 항공 시설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이들 휘하의 공군 부대는 진주만 공격에 대한 복수심을 바탕으로 꾸준히 연습해왔다.

 

 

 

폭격의 시작

둘리틀 공습

1942년 4월 18일, 미국 육군 항공대의 제임스 해롤드 둘리틀 중장이 이끄는 1개 부대가 일본 도쿄 공습을 위해 출병했다. 미국 공군은 도쿄, 가와사키, 요코스카, 고베, 나고야를 공습하여 가옥에 피해를 입혔으나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하였다. 이 전투에서 승무원 1명이 사망하고, 포로로 잡힌 8명 중 3명은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었으며, 2명이 실종되었다. 전투기는 대부분 중국 동부 지방에 상륙하였으나, 일부는 소비에트 연방블라디보스토크에 착륙하였다. 어쨌든 둘리틀 공습은 일본 본토 공습의 첫 막을 열었으며, 일본 군부에게 충격을 주었고, 간접적으로는 미드웨이 해전의 원인이 되었다.

 

 

쿠릴 열도 폭격

둘리틀 공습이 어느 정도 성공하였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둠에도 불구하고 연합군과 일본군의 세력은 엇비슷했다. 1942년 일본 제국은 이미 중국 본토의 주요 도시들과 동남아시아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타격을 입었지만 여전히 회복 가능성은 높았다. 미군은 일본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 위해 두 번째 일본 본토 공습을 감행했는데, 그 장소는 쿠릴 열도였다. 키스카 섬 전투와 알류산 열도 전역에서 미군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미군은 일본군을 공격할 기반을 구축하였다. 1943년 6월부터 1943년 11월까지 미군 편대는 쿠릴 열도를 공격했고, 이는 일본군이 홋카이도쿠릴 열도에 미군 대항 기지를 건설하게 했다.

 

 

 

맨해튼 작전

 

맨해튼 작전

(태평양 전쟁 중 일본 공습의 일부)

B-29 targets from China.jpg
날짜 1944년
장소 동아시아
결과 연합군 승리
교전국
미국 미국 일본 제국 일본 제국



1943년부터 미국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얻기 시작함으로써 중국 본토 및 기타 동아시아 지역에 공습을 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1943년 연합군은 일본 본토에 대한 전략적 폭격을 위해 엄청난 무게의 폭탄을 실을 수 있는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인도에서 대기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 청두와 더 깊은 중국의 본토를 공습하면서 연료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벵골 지방에 공군 기지를 설치했다. 1944년 6월부터 연합군은 일본의 도시들을 공습하면서 맨해튼 작전의 시작을 알렸고, 8월 24일에는 나가사키를 공습했다. 이후 연합군은 오무라에 10월 공습을 가했으나 실패했고, 마지막 공습은 1944년 11월부터 1945년 2월까지 싱가포르에서 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