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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겨울 7 : 흐린 겨울 하늘을 보며......

 

 

 

강남의 겨울 7 : 흐린 겨울 하늘을 보며......

 

                                                                                   반포 종합운동장 전경

 

 

지난주 수요일은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였다. 그래서 요즘 날씨는 많이 풀린 상태라 그리 춥지가 않아서 새벽 자전거 타기에 적당하다. 물론 손은 시리지만 손난로를 장감 속에 넣고 나가면 별로 추운 줄은 모른다. 지난번 단종 되기전에 산 효도라디오가 자전거 타기에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2200곡이 저장된 SD카드를 꼽으면 밧테리 용량이 가능한 2시간 가까이 계속해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미자 노래부터 이승철 노래까지 다양한 가수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신나게 들으며 달린다. 자전거 경적을 올리지 않아도 될 정도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면서 속으로는 미친놈이라고 할 모르지만 나는 매냥 즐겁기만하다.

 

음악을 들으며 가려면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뒷길을 주로 다닌다. 이면도로는 조용하고 인적도 드물고 차량도 잘 다니지 않는다. 대신 신문배달 오토바이, 폐지좁는 노인, 청소차량, 보행자 등에 대해서 주의해야 한다. 이제는 새벽이 나의 삶 일부분이 되고 말았다.

 

새벽길 신호등이 있는 건널목은 특히 조심하지 않으면 사고가 날 확율이 높다. 신호가 바뀌어도 반드시 좌우를 잘 살피고 건너야 한다. 신호가 이미 바뀐 건널목은 뒤늦게 무리하게 건너려고 달리면 안된다. 새벽길은 사람이 적기 때문에 택시나 차량들이 사람이 다니지 않는 줄 알고 붉은 신호로 바뀌어도 그냥 지나가기 때문이다. 나를 알려주는 각종 경광등을 켜고 달리는데 자전거 바퀴와 자전거 앞쪽은 물론 헬멧 앞, 뒤, 그리고 무릎에까지 각종 조명을 달고 다닌다.

 

남부터미널-강남역-논현역-신사역-고속터미널 근방에 다다르면 쉼터에서 보온통에서 뜨거운 녹차를 마신다. 희뿌옇게 동쪽 하늘에서 먼동이 서서히 트기 시작한다. 오늘 하루도 아침 태양을 바라 볼 수 있고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생동감 넘치는 고속터미널 근방 분주한 아침 출근 차량들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영겁의 세월이 하루에서 시작 하듯이 모세가 죽었다는 전설의 시내산이 오늘날 탐욕의 산이 되듯이 불교의 삼추산이 평지가 될 때까지 옷자락을 스치는 기간이 영겁이라 했다. 우매한 민중들이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듯이 영겁의 영생을 기대하지 말고 오늘 하루하루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진정한 삶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재벌 총수 탐욕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지혜로운 이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 않으며, 청렴한 사람은 가져선 안 될 것을 탐하지 않는다(智者不爲非其事 廉者不求非其有)”라고 한 바는 교훈적이다.

‘논어’에 소개된 공자의 말은 부귀공명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기준을 제시했다. “제대로 차리지 못한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며, 팔을 굽혀 베개 삼아도 즐거움이 그 속에 있으니, 옳지 않은 방법으로 부자로 살고 귀한 자리를 차지함은 뜬구름 같은 것이다(飯疏事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사리가 이러함에도 일부 재벌 총수들의 탐욕은 끝 간 데가 없어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다. 회사 돈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하고 사적으로 유용한 혐의로 법의 심판을 받는 사례가 적잖다. 그런데도 법원은 이들의 공소사실 대부분을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경제 건설에 이바지했다거나 건강이 나쁘다는 등의 이유로 ‘3·5법칙’을 적용해 실형을 면해주고 있다.

‘채근담’은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반성하라며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악은 음지를 꺼리고 선은 양지를 꺼린다. 그러므로 드러난 악은 재앙이 적고 숨은 악은 재앙이 깊으며, 드러난 선은 공이 적고 숨은 선은 공이 크다(惡忌陰 善忌陽 故惡之顯者禍淺 而隱者禍深 善之顯者功小 而隱者功大).”

재벌 총수들에 대한 ‘무전유죄 유전무죄’ ‘솜방망이 처벌’ 논란이 끝이지 않는 이유이다. 법원이 재벌 비리가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하도록 엄정한 심판자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사회적 함의에 부응해야 하는 이유이다. 물론 재벌 기업들은 준법경영, 윤리경영, 투명경영의 원칙 아래 거듭나야 한다. 비자금 조성과 편법 상속 등 불법·탈법행위의 잘못된 관행의 고리를 끊으려면 무엇보다 기업과 기업인들의 대오각성이 절실하다.

 

역사학자 한명기 명지대 교수 출판문화상

지난 6일 저녁 서울 도심의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54회 한국출판문화상 시상식에서 조선 중기 정쟁 연구에 관심이 많은 한명기 교수가 <역사평설 병자호란>이라는 책으로 출판문화상을 수상한 뒤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날이 추운 겨울이 되면 청나라로 끌려가던 조선인들이 떠오릅니다. 얼마나 추웠을까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라며 병자호란 당시 조선인들의 참상을 이야기했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청이 조선을 침공한 것으로 시작했다. 조선 왕실은 청과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남한산성으로 피신했고, 47일 동안 버티다가 이듬해 1월 말 성문을 열고 나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며 군신의 의를 맺어야 했다. 이때 조선 임금 인조는 머리를 숙이는 굴욕을 경험했지만 그 추운 날 낯설고 험한 땅으로 끌려간 백성들은 그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한 교수는 "청의 수도 심양까지 800~900㎞를 끌려가면서 얼어 죽고, 맞아 죽고, 굶어 죽었다"는 표현으로 조선인들의 고초를 설명했다.

한 교수는 병자호란은 인조와 신하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확언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부터 침공의 조짐이 있었는데도 권력층이 막연한 낙관과 근거 없는 자신감에 사로 잡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교수는 권력층은 언제나 전략적으로 사고해야 하며 지금도 병자호란 당시와 마찬가지로 국제질서가 급변하는 시기라고 강조했다.

그의 수상 소감은 병자호란을 예로 들며 권력층의 자세를 지적한 것이지만, 조금 넓히면 역사의 사건을 거울 삼아 비슷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제 그런 주문을 한국의 정치.경제.사회 그리고 국민들에게 던지고 있는 것같다.

 

 

일제 병탄사에 대한 인식

요즘 블로그에 일제치하 역사를 기술하고 있지만 내용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듯하다. 그만큼 우리들이 일제시대를 역사를 도외시하여 왔고 알려고 하지 않는 탓일 것이다. 학창 시절에도 일제 식민지사를 제대로 배운적이 없는 듯하다.  또 우리는 일제 식민지사를 알려고 하지도 않고 기억을 다시 떠 올리려고도 하지 않는 나쁜 습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의 치욕적인 역사를 제대로 알고 기억해야 할 필요성 있다.  일제가 어떻게 조선을 병탄하고 수탈하였는지를 상세하게 후손들에게 가르치는 역사교육이 필요하다. 그래야 미래를 설계하면서 다시는 그러한 오류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남북분단이라는 격변기 속에서 자유당 정권이 정치적 안정을 위해 남한 내부에 준동하던 공산당 제거에 주력한 나머지 친일파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고, 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3년간 전국토가 초토화되었고 사회질서가 붕괴되어 전후 복구에 민생안정에 주력하다보니 친일파를 확실히 제거하는 역사적 과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제라도 일제 식민지사를 제대로 가르치고 친일파들의 친일행적과 그 결과, 영향력, 그에 따른 우리 민족이 당한 불행을 낱낱이 기술해야 할 것이며 여러 독립운동에 대한 깊이 있는 내용이 교과서에 기술되어야 하고 후손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거나 가려진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을 찿아내어 정부 차원에서 보훈을 확대해 주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내용도 우리 후손들에게도 가르쳐야 할 것이다.

 

또 나라가 국난에 처하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행위는 자자손손 부귀와 영화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점과 실제 보훈도 그렇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주먹구구식이나 사탕발림식의 보훈정책도 개선해야 할 것이며 유골발굴, 역사자료 발굴, 친일파에 대한 정책 재정립,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보훈 확대, 교과서 수정 및 교육 등을 시행하여야 할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골은 아직도 찿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제 식민지사는 안중근 의거, 항일의병, 독립군 독립운동과 청산리.봉오동 전투, 상해 임시정부, 3.1운동, 6.10 학생운동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명칭도 3.1운동이 왜 운동으로 표현하는 지, 6.10 만세사건도 왜 사건으로 표현하도록 했는지가 궁금하며 아직도 이런 명칭에 대해서 아무런 수정 제의도 없이 역사학자나 역사계에서 꺼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들이 친일에 대한 별다른 감정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마 이런 명칭은 해방 후 우리 역사서를 만들 때 친일성향의 역사학자들이 명칭을 일제 지배동안 우리 민족의 항일의거를 반일운동 정도로 폄하하여 그렇게 명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러한 명칭에 대해서 깊이 있는 검토를 해 본 사람이 드물고 이의를 제기한 역사학자도 찿기 힘들다. 그래서 교과서 수정은 물론 권위 있는 역사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정확한 의미의 명칭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운동이나 사건이란 의미의 용어는 사용하기에 부적합하고 3.1운동은 3.1만세항일의거, 6.10 학생운동은 6.10 학생만세항일의거 등으로 명칭을 수정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반포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 폭설에 견디낼 것인지.......

 

 

소치 동계올림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소치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국민들은 밤잠을 설치며 응원을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들에게 회한을 남겨주고 있다. 500미터에서 금메달을 2연패한 빙속 여제 이상화를 비롯한 쇼트 트렉의 어린 여자팀의 쾌거에 비해 남자팀의 저조한 결과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고,심판진의 편파적인 판정으로 나타난 김연아의 은메달은 국제적인 언론기관을 포함하여 전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그녀는 마지막 무대였지만 분위기상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 했다. 이미 그녀는 어느정도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인터뷰 내내 그녀는 결코 분노하거나 막말을 하지 않고 초연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 그만큼 성숙된 마음의 자세를 보여준 것일게다. 또 쇼트 트랙 주인공들인 어린 우리나라 여자 선수들이 모두 하나같이 착하고 예쁘고 아릅답게 보이는 것은 비록 내 눈에 보이는 허상일지 몰라도 한국 여성의 우수한 DNA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7년간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이룬 최고의 자리에서 박수를 받으며 대미를 장식한 김연아, 그녀의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모습은 두 번 다시 이루기 어려운 피겨계의 영원한 여왕으로 우리들 마음속에 남게 될 것이다.

 

메달을 땄건 따지 못했건 상을 받았건 받지 못했건 자신이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일에 한눈팔지 않고 매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다. 1992년부터 국가대표로 뛴 이규혁은 36세인 지금까지 6번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끝내 메달은 따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 경기를 펼치고 "올림픽은 핑계였을 뿐 스케이트가 계속 타고 싶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메달을 떠나 스케이트를 통해 삶을 배웠고, 그래서 행복했다"고도 했다.

어떤 분야든 저마다 자기 일을 충실히 하고 마음껏 기량을 발휘하게 해주는 것이 좋은 사회다.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의 금메달에 착잡해하면서 훌륭한 선수를 내몬 것을 욕하거나 안현수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왜 조국을 떠났는지 생각해보면 그의 선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나라 선수가 우리나라에 귀화해 메달을 따주는 건 좋고 우리나라 선수가 다른 나라에 메달을 바치는 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이다. 금메달리스트 이상화는 동메달에도 기뻐하는 외국 선수를 보며 "우리나라 선수라면 그러지 못했을 거다. 그게 참 부럽고 슬펐다."고 말했다.

많은 환호와 눈물, 극적 드라마를 만들어 낸 소치 올림픽이 저물어가고 있다. 올림픽은 지는 법, 구경하는 법, 어울리는 법을 가르쳐주는 삶의 무대다. 이제 4년 후 2018 평창 올림픽을 소치보다 더 멋지게 치러내야 한다. 소치의 심판 판정이 문제라면 우리는 그런 일이 없게 하면 된다. 러시아를 거꾸로 읽어 '아, 시러'라고 하거나 소치는 '올림픽의 수치'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런 식이라면 평창은 평화를 창조해내는 무대가 되게 해야 한다.

피겨 경기가 끝나면 선수는 '키스 앤 크라잉 존'에 앉아 채점결과를 기다린다. 피겨선수가 아니라도 사람은 누구나 그 긴장되고 설레는 공간에서 남들의 평가를 기다리는 경험을 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사실 핑계였을 뿐 나는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 사람들은 많을수록 좋다. 이규혁 김연아 이상화, 이 훌륭하고 성실한 선수들의 말에서 한국인들과 한국사회가 점점 더 성숙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남자팀의 저조한 결과에 비해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의 역투와 금메달은 한국 남자팀에는 신선한 지극이 될 것이다. 국가보다 자신의 꿈을 위해 러시아를 선택한 젊은이들의 결단은 그동안 여저가지 부패와 비리 등으로 불협화음을 자아내며 재능있는 선수들이 자리메김하지 못하고 꿈을 접어야 하는 우리나라 체육계와 정부에 많은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듯하다. 빙상연맹의 홈페이지에는 비난이 폭주하며 홈페이지가 마비될 정도로 국민들의 공분이 치솟고 있다. 안현수의 러시아행이 자의던 타의던 결과적으로 저런 우수한 인재를 포용하지 못한 이 나라와 빙상계의 큰 손실이다.

 

문제는 앞으로 4년 후 우리나라에서 벌어질 평창동계올림픽 준비와 선수양성에서 과연 우리나라가 이러한 여러 문제를 극복하고 빙상강국의 모습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인지가 의문이다. 그동안 모든 여건이 열악한 현실에서도 빙상강국으로 우뚝서게 했던 관계자들의 노고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메달을 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결과에 따라 노후까지 충분히 보장받는 전폭적인 지원시스템이 절실하다.

 

선수양성과 선발 시스템으 물론 금메달 외에는 외면하고 또 메달을 딴 선수에게 연금 몇푼 주고 군대 면제해주는 것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러시아가 안현수 선수에게 제안한 것처럼 충분한 보상과 직업까지 보장하는 것처럼 마음놓고 여유로운 환경에서 후진양성에 전력할 수 있는 제도적 지원 시스템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들이 다시 박수받을 수 있도록 관계기관은 심기일전하지 않으면 국민들의 외면으로 평창에서 또다시 참담한 결과를 다시 초래할지도 모른다. 2012년 히딩크 감독이 한국 축구를 4강까지 가는 위업을 이룬게 어떻게 해서 그러한 위업을 이루게 된 것인지를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소치 동계올림픽의 결과 는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는 것같다. 

 

 

세속의 탐욕을 벗어나지 못하는 종교지도자들

지난 토요일 아침 서초역을 지나오는 데 사랑의 교회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쏱아져 나왔다. 서초역 일대가 사람과 차량들로 엄청 북적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교통 문제를 예견하고 대형 교회 건물을 지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새벽긹도 마찬가지지만 교회 근방은 도로옆이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자전거 전용도로는 물론 인도까지 점거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주변 주택가 골목 거주자 주차 자리도 빈 데는 마음대로 주차해 놓고 교회로 들어가 버린다.

 

한국은 다종교 집합체 국가이다.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고 누구나 어떤 종교라도 믿을 자유가 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 쫓겨나고 버림받았던 종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활개를 치면서 세력을 확산하고 있다. 국민 누구나 내는 세금을 그들은 면제받고 있고 그것으로 치부를 일삼고 있다. 또 신도들을 감언이설로 현혹시켜 신도들이 낸 헌금으로 점차 도심 속으로 들어와서 웅장하고 거대한 성전을 짓고 교세를 확장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또 자유민주주의사회의 선거라는 유권자 집단인 신도집단을 앞세워 권력층을 위협하며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서 정치권을 농락함은 물론 타종교를 박멸시키기 위해 갖가지 치졸한 방법으로 치열한 세력투쟁을 벌이고 있다. 한편 그들 종교의 각종 비리와 부패, 성추행, 살인, 감금, 재물갈취, 교조적인 교주 신격화 등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사나 방송사에 대해서 집단으로 몰려가 난동을 부리는 일이 허다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에 영향을 주는 유권자 수인 신도들을 내세우며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회정의를 빙자하여 사회혼란을 부추기고 있으며 내부적으로는 부패하여 각종 헌금을 강요하면서 재산증식을 이루고 그 재산의 소유권을 두고 교회내에서 서로 재산다툼으로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이다.

 

또 자신의 종교집단을 세습화하고 소왕국을 건설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사이비종교와 지도자들이 난무하고 있다. 아프카니스탄, 이집트 등지의 이슬람권역까지 들어가서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려는 무모한 행동은 물론 성지순례를 빙자하여 위험지역도 서슴치 않고 정부의 경고와 제지에도 불구하고 집단으로 몰려가는 현실이다. 이번 이집트 시나이 반도 테러 사건도 바로 이러한 현상에서 비롯되었다. 자신들의 역사나 전통, 조상 숭배는 제껴놓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나라 종교의 성경에 나오는 성지순례를 평생의 숙원으로 생각하는 우매한 민중들이 많은 것이 바로 다종교 사회인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시간의 눈쌀을 찌프리게 한 여의도 순복음 교회 목사와 장로들 간에 세간에 벌어진 여러 사건 중 한 사건의 주인공인 소설 ‘빠리의 나비부인’의 저자 정귀선(68)씨가 국민일보 기자에게 인터뷰를 한 모양이다. 목사와 순복음 교회 나팔수인 국민일보는 정귀선씨의 말을 빌어 허구를 사실인 것처럼 언론에 유포한 여의도순복음교회 일부 장로 등을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정씨는 지난 14일 서울북부지검에서 고소인 조사를 받은 뒤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허위사실을 유포해 나와 조용기 원로목사, 교회의 명예를 훼손한 이들은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씨는 “목숨을 걸고 명예를 찾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씨는 장로들의 주장에 의하면 조용기 목사와 불륜 관계에 빠진 당사자로 알려져 있다. 책 내용이 허구라고 주장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당사자의 입장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 문제거니와 순복음 교회 돈이 상당수 정씨에게 건네졌다고 한다. 종교단체를 사유화하려는 조목사 가족들의 행실에서 불거진 지도자와 장로들 간에 벌어진 종교계의 재산 싸움의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이미 한국의 여러 종교 단체가 신앙을 빙자하여 재물을 치부하고 세습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소왕국 집단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얼마전에는 방배동 약국의 약사가 암으로 죽은 남편의 시신을 7년동안 방부처리하여 집에 보관해오다 적발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여자 약사는 남편의 부활을 기다렸다면서 헛된 신암심에 빠진 전형적인 인간의 우매하고 나약한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약사라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아무리 배우고 똑똑해도 결국 인간은 정신적으로 나약한 한 동물에 불과한 모양이다. 사이비 종교집단에 빠지는 광신도는 인간사회의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ㅇ은 마약이나 도박과 같이 중독성이 강한 것이며 쇄뇌되면 광신도로 변하고 천국을  상품으로 내세우며 벌이는 다단계 사업이나 마찬가지다.

 

 

인재와 자연재해의 결정판, 경주 참화

경주 마우나 오션 리조트 체육관 붕괴 사건은 참담하기 그지없는 인재와 자연재해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그렇게 굳은 날씨에 그곳까지 가야했는지, 대학은 재정지우너을 하지 못했다고 하고, 안전관리도 소홀했고, 지도교수도 현장에 없었고, 폭설에 대한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못한 대학 당국의 무한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물론 리조트 관리 회사도 책임이 있지만 채 꽃도 피워보지도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젊은이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어려운 세상에 19년 동안 애지중지 키워 온 자식을 저헐게 허망하게 보낸 부모들의 심정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또 이번 사고로 신입생들이 사고를 당하자 부산외대 입학 후보 예비 1번인 학생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니 정신이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니다.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고스톱판 처럼 말이다......

 

 

소비자는 봉, 국민들은 마루타

해외직접 구매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국산품의 국내 판매가가 외국 현지보다 너무 비싼 것이 소비자들이 해외직접 구매를 부추기고 있다고 한다. 국내 소비자는 봉이요 국민들은 마루타에 불과하다. 국산차 연비 문제도 미국에서는 보상해 주기로 했다지만 국내에서는 전혀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생각도 않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법이 그만큼 다른 나라에 비해 무르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탈법이 반복되는 것은 처벌이 단호하지 못하고 미온적이기 때문이다.  또 누차 문제제기가 되어 온  급발진 사고도 소비자 문제이고 제조사는 책임이 없다는 식이다. 급발진이 제작상의 문제이지 어찌 소비자의 운전 문제인가? 세상이 웃을 짓거리를 버젓이 자행하면서도 일점의 양심도 부끄러운줄 모르는 국민들을 우론하는 기업들이다.

 

통신사도 마찬가지고 정유사도 마찬가지다. 90년대 정부 지원하에 국민들에게 휴대폰을 모두 지급해준 결과 열심히 사용하면서 주머니를 털어 기기를 수시로 바꾸면서 휴대폰 제조사와 통신사를 키워준 국민들이다. 그래서 삼성전자와 통신 3사가 국민들의 주머니를 담보로 엄청난 고속 성장을 했다. 몇 개월에 하나씩 나오는 신기종을 열심히 구매해 주었고 국민들을 휴대폰 없이는 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동안 습관이 된 엄청난 통신비가 가계를 주름지게 하고 있지만 정부는 시늉만 할 뿐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MVNO 사업을 확대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고 있는 이유는 국민보다 재벌이나 사심이 앞사기 때문일 것이다. 제4,5 이동통신사를 하루빨리 만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존 통신사들의 로비에 부패한 정치권에서 시간만 끌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국민들의 주머니는 칼든 강도에게 돈을 빼앗기듯 수입의 상당부분을 계속 털리고 있는 현실이다. 

 

또 휘발류를 포함한 연료비도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증거는 정유사들이 매년 수조원씩 순이익을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유류가격 인하를 압박하면 수입 원유가나 정부 세금을 핑계대며 엄살을 부리다가, 수입 원유가가 내려도 휴발유가는 널 뛰기만 시늉만 할 뿐 합리적으로 내릴 줄을 모른다. 이러한 통신사와 정유사들이 국민들의 주머니를 털며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지만 정부는 세금에만 신경쓰며 시늉만 하고 모른척 하고 있다.

 

또 한국전력은 그동안 전기료를 연속 올리면서 엉터리 누진제를 만들어 전기사용료가 눈폭탄이 되어 일반 가정의 소비자를 두둘기고 있고 도시가스비도 좁은 집인데도 엄청나게 나온다. 통상 겨울철이면 월 10~15만원 이상이다. 아마 큰 집이면 20~30만원은 나올 것이다.

 

또 새학기를 맞아 학생들 교복, 문구는 물론 가방, 신발 등 수십 만원을 들여야 구입이 가능하다. 또 일반 생필품,수입농산물, 한양재, 병원비, 약품, 식음료, 과자 등 모두 마찬가지다. 소비자를 봉으로 알고 폭리와 비양심적인 판매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려시대에 버금가는 실상이며 조선시대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결국 고려시대 이인임 같이 자신의 부귀영화만 생각하는 무능하고 탐욕스런 권력층, 즉 그런 지도층과 정치권이 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한 대부분의 국민들인 소비자는 봉이며 마루타인 현실이다.

 

 

 

                                                                                       겨울 새벽 하늘, 나목, 고층 아파트

 

아래는 읽을 만한 사설 몇가지를 인용했다.

 

젊은 지도자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26세에 에스파냐 총독이 됐다. 기원전 3세기의 카르타고는 지중해 최강국이었다. 그러나 1차 포에니전쟁 후 로마군에게 아버지를 잃은 한니발의 야망은 로마 타도였다. 절치부심하던 그는 마침내 9만 명의 코끼리 부대와 대군을 이끌고 혹한의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를 대부분 점령했다. 29세 때였다. 그후 본국의 아무런 지원없이 16년 동안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무진하면서 로마군을 괴멸시켰다. 특히 유명한 칸네회전에서는 양익포위로 로마군 7만 명을 전멸시켰다.

이보다 약 100년 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스무 살에 왕좌를 물려받은 그는 22세 때 풍부한 병참 지원 속에서 10여년간의 중동, 이집트, 인도까지 정복전쟁을 펼치다 33세에 세상을 떴다. 

처칠 전 영국 총리는 26세에 하원의원, 32세에 통상장관이 됐으며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31세에 보훈 담당 장관이 됐다. 로랑 파비우스는 38세에 프랑스 총리가 됐다. 두바이 국가지도자 셰이크 모하메드는 불과 22세에 국방장관을 맡았다. ‘창조적 파괴’의 경제학자 슘페터가 36세에 오스트리아 재무장관이 된 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기록이 많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6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고 김상현 전 의원은 28세에 금배지를 달았다. 조선왕조 최연소 기록으로는 19세에 이조참의(차관보)가 된 민영익을 꼽을 수 있다. 세조의 총애를 받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이준은 28세에 영의정까지 올라 명성을 떨쳤다. 최연소 공조판서(26세)와 병조판서(27세)를 지낸 남이, 29세에 호조판서가 된 조영하, 31세에 대제학까지 오른 이덕형도 젊은 리더의 전형이었다.

엊그제 이탈리아에서는 39세의 최연소 총리가 탄생했다. 1922년 39세로 취임한 무솔리니보다 생일이 두 달 빠른 렌치가 주인공이다. 그는 고향 피렌체 시장만 지냈을 뿐 중앙정치 경험도 없다. 부패정치에 신물이 난 국민에게는 바로 그 점이 더없이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북한이 김정은도 나이 30세 정도에 불과하다. 북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불장난도 서슴치 않을 나이다. 특히 독재정권은 통상 군부를 등에 업고 버티는 경우가 많다. 무력은 반드시 무력으로 망하는 법, 고려 무신정권이 그랬고 프랑스 나폴레옹이 그랬으며 히틀러가 그랬다. 일본의 도오죠 내각도 마찬가지다.

 

젊은 김정은, 그는 누구인가?

김정은은 1983년 또는 1984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방위원장 겸 수반 김정일과 무용수 출신 두 번째 부인인 고영희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친형 김정철이 있고 여동생으로 1987년에 태어난 김여정이 있다. 그밖에 이복 누나 김혜경, 이복 형 김정남, 이복 누이 김설송, 김춘송이 있다.

 

출생연도와 출생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출생연도에 대해서 당초 우상화 차원에서 김일성 (1912년생), 김정일 (1942년생)의 출생연도와 끝자리를 맞춰 1982년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후지모토 겐지는 1983년생이라고 밝힌 바 있으며, 통일부와 국가정보원에서는 김정은의 유학시절 여권 등을 근거로 1984년생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출생지에 대해선 평안북도 창성군이라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강원도 원산시에 위치한 김정일의 별장 602호 초대소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김정은의 어린 시절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프랑스를 거쳐 16세 때 스위스로 유학하여 김나지움(Gymnasium,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한다. 스위스 베른의 공립 중학교에 유학, 유학 당시에는 '박운(박은)'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학교 기록 등에 따르면 베른 공립 중학교 인근의 한 초등학교에서 독일어 보충학습을 받은 뒤 1998년 8월에 7학년(한국의 중학교 1학년 해당)으로 편입되었다. 그는 9학년이던 2000년말 학교를 그만뒀다. 당시 담임이었던 시모네 쿤은 마이니치(每日; 매일)신문에 “그가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와서 ‘내일 귀국한다’고 말한 뒤,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귀국 뒤, 2000년대 중반부터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아버지 김정일 및 조선노동당과 주변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아버지인 김정일의 권유로 조선 인민군에서 하전사로 입대하였으며 하전사로서 1년 6개월동안 군복무를 한 이후 하전사에서 곧바로 중장으로 진급했다.

 

김정일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한 시점은 2009년으로, 대북 소식지가 이를 최초로 보도한 바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사실 파악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확인을 거부했으며, 장성민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와 같은 국내 대북 전문가와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도 김정은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등을 들며 후계자 지명설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바 있다.

 

그러나 머지 않아 김정일이 자신의 후계자로 김정은을 지명한 것을 중국에 알리는 등 후계자 지명이 구체화 됨에 따라 후계자 지명은 기정 사실화 되었으며, 김정일 유고시 김정은의 군부 장악 가능성에 대한 예측 보도가 뒤를 잇기 시작했다.

 

2010년 9월 27일 조선인민군 대장 임명, 28일 3차 노동당대표회의에서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 및 당중앙위원 임명 절차를 거치며 김정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통수권 후계자로 공식 확정되었다.그동안 유년기, 청소년기의 사진으로만 알려져왔던 김정은의 얼굴은 후계자로 확정된 9월 28일 노동당대표회의 기념사진을 통해 언론에 공개된다. 10월 6일엔 김정은이 후계자로 지명된 것을 경축하는 행사를 벌인다.

 

김정은의 3대 세습체제 구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외에 불만을 가중시켰다. 북한 내부에선 3대 세습에 대한 반발 조짐이 일면서 김씨 부자를 비방하는 전단이 돌거나 폭약이 밀반입 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일본의 친북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내부 조직원들도 세습에 대해 반발을 보인다.

 

2011년 12월 17일, 아버지 김정일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김정은이 후계자로서의 업무를 맡게 되었고, 12월 29일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어 핵무기 통제권을 장악했다.

 

2012년 4월 11일, 김정은은 4차 노동당대표회의에서 노동당 1비서로 추대되었고, 이틀 후인 13일에 열린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선 국방위원회 1위원장에 추대되어 김정일의 직책을 모두 세습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2012년 7월 18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당 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화국 원수 칭호를 수여받아 명실상부 최고 권력자로 부상하였다.

 

그가 북한의 독재정권 실권자로 젊은 나이에 무슨 짓을 저지를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가 스위스에서 비록 짧은 유학교육을 받은 사람이지만 서구 문명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북한의 정권유지를 위해 어떻게 개혁개방을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기반은 할아버지, 아버지의 유훈이 의해 유지되는 기반이 약한 모래성과 같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현실이기에 그는 중국이나 서구처럼 개혁개방을 통한 국부증대를 꾀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친족 장성택을 그렇게 제거한 모습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군부는 그동안 장성택의 행보에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그가 개방쪽으로 선화하면 북한 정권은 언제 무너질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그래서 김정은은 힘을 가진 북한 군부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북한 군부의 충동질에 의해 장성택을 제거하는 데 동의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그가 군부에 힘을 실어주는 한 군부는 통상 성향이 강경파로  자신들의 입지를 유지하고 정권의 생존을 위해서는 내부적인 불만과 문제를 잠재우기 위해서도 핵무기 개발과 무력 사용으로 대남 도발을 획책할 것이 당연히 에상된다. 그들의 목표는 남조선 민족해방이기 때문에 젊은 김정은이 언제 어떻게 불장난을 저지를 지가 걱정이다.   

 

 

 

박정희와 김일성의 백년전쟁

박정희와 김일성은 우리 현대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박정희는 18년, 김일성은 49년간 집권했다. 같은 민족인 남북한은 두 사람의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다른 나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김일성은 1912년, 박정희는 1917년생이다. 김일성이 태어난 지 100년을 눈앞에 둔 2011년 12월 아들 김정일이 절대 권력의 삶을 마감하고 손자 김정은이 3대 세습을 시작했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 이듬해인 2018년 2월에는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퇴임한다. 북한은 왕조적 권력승계, 남한은 국민의 직접선거이긴 하지만 우연 치고 묘한 우연이다. 박정희와 김일성의 유산은 현재진행형이다.

정치적 출발은 김일성이 훨씬 유리했다. 항일투쟁 경력을 지닌 그는 1945년 스탈린의 힘을 업고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에 최고 권력자가 됐다. 1961년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일본군 초급장교 전력(前歷) 때문에 명분에서 밀렸다. 1960년대 초는 경제력도 북한이 남한을 압도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관(棺) 뚜껑을 덮은 뒤’ 남긴 국가 지도자로서의 성적표와 평가는 대역전이었다. 아프리카 수단과 가나 수준의 최빈국이었던 한국은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경제기적을 일궈냈다. 자유와 인권의 제약이란 코스트는 치렀지만 산업화의 성공에 따른 중산층의 성장을 토대로 박정희 사후(死後) 8년 만인 1987년 민주화도 달성했다. 반면 김일성 왕조의 북한은 생존조차 버거운 죽음의 땅으로 추락했다.

요즘 국제사회에서 김일성 일족의 통치를 긍정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북한의 요덕수용소는 나치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능가하는 극심한 인권탄압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3대 수령’이 저지른 반(反)인도적 범죄를 규탄했다. 수많은 주민이 굶어 죽고, 얼어 죽고, 폭압정치로 죽는데도 김일성 왕족들은 초호화판 생활을 즐기며 수십억 달러의 비자금을 해외로 빼돌렸다.

미국 하버드대 명예교수 에즈라 보걸은 “박정희는 국가를 위해 몸을 던진 리더였으며 그때 기회를 놓쳤다면 한국의 산업화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중국전문가 윌리엄 오버홀트도 “한국의 오늘은 박정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면서 덩샤오핑이 추진한 중국의 근대화 전략은 ‘박정희 모델’을 모방했다고 단언한다. 두 사람은 과거 박정희를 비판했던 학자들이다. 박정희 시대를 체험한 한국인 중에도 젊은 시절 그를 미워했다가 공과(功過) 평가의 중심을 크게 옮긴 사람이 많다.

박정희가 아니라도 한국 경제가 지금처럼 발전했다는 일각의 주장은 국내외 세상 흐름을 너무 모르는 유치한 인식이라고 보지만 그것까지는 생각의 자유라고 치자. 하지만 박정희에게는 온갖 저주와 악담을 퍼부으면서 경제 복지 자유 인권 언론 등 모든 측면에서 퇴출 0순위인 김일성 왕조의 폭정에 침묵하거나 한술 더 떠 비호하는 일부 세력의 위험한 행태만은 용납하기 어렵다. 법원이 내란음모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내린 이석기류(類)의 집단이 대표적이다.

박정희와 김일성의 ‘백년전쟁’도 막바지에 가까워진 느낌이다. 우리 사회가 집단 자멸의 길만 택하지 않는다면 승부는 사실상 판가름 났다. ‘박정희의 나라’가 남긴 긍정적 유산을 이어받고 취약점을 보완한 뒤 ‘김일성의 나라’에서 지옥을 경험한 북한 동포와 힘을 합쳐 통일한국의 대장정을 시작하는 그날은 언제쯤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