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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38 : 일제강점기 82(태평양 전쟁과 일제의 패망 8)

 

 

한국의 역사 1,038 : 일제강점기 82(태평양 전쟁과 일제의 패망 8)

 

           

 

 

 

 

이오지마 전투

이오지마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의 일부)
Stars and Stripes on Mount Suribachi (Iwo Jima).jpg
날짜 1945년 2월 19일 ~ 1945년 3월 26일
장소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이오 섬

(지금의 일본 일본국 도쿄 도 오가사와라 촌 이오 섬)

결과 미국의 승리, 미 공군의 일본 본토 공습기지 확보.
교전국
미국 미국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지휘관
홀랜드 스미스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
체스터 니미츠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니시 다케이치
병력
110,000명 21,000명
피해 규모
전사 - 6,821명
부상 - 19,189명
실종 - 494명
전사 - 20,703명
포로 - 216명


이오 섬 전투 또는 이오지마 전투(영어: Battle of Iwo Jima, 일본어: 硫黄島 (いおうじま) (たたか)い, 1945년 2월 16일~1945년 3월 26일)는 태평양 전쟁 말기, 오가사와라 제도이오 섬에서 벌어진 미군일본군 간의 전투를 말한다. 미군의 작전명은 디태치먼트 작전(Operation Detachment)이었다.

 

개요

태평양 전쟁이 말기로 치닫던 1945년 2월 19일, 미군 해병대가 이오지마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3월 17일에 미군은 섬을 장악했으며, 거의 모든 일본군 부대가 전멸했다. 3월 21일일본 제국 대본영은 3월 17일에 이오지마 섬에 있던 일본군이 '옥쇄'(玉砕)했다고 발표했다. 3월 26일,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대장 이하 남은 300명의 일본군이 마지막 돌격을 했으나 전멸했다. 이것으로 인해 조직적인 전투는 종결되었다.

 

2만 933명의 일본군 수비 병력 중, 2만 129명이 전사했다. 피해율은 96%였다.

 

한편, 미군은 전사자가 6821명, 부상자가 2만 1865명으로 집계되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과 미군은 수백 개의 섬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미군의 손해가 일본군의 피해를 넘어선 전투이다(단, 미군의 전사자와 부상자의 합계). 다만 피해율은 약 40%이다.

 

 

배경

이오 섬도쿄 남쪽의 1,080킬로미터에, 북쪽 1,130킬로미터에 위치하고 있다. 가잔 열도에 속하는 화산섬으로, 섬의 표면이 대부분 유황의 축적물로 뒤덮여 있어 '이오 섬'(硫黄島 이오지마[*], 유황 섬)으로 불렸다. 토양은 화산재라 보수성이 없었고, 식수나 용수는 짠 우물물이나 빗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 전쟁 전에는 유황의 채굴이나 사탕수수 재배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민이 1,000명 정도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군1941년 개전 당시, 해군 전투대 약 1,200명과 육군 병력 3,700명 내지 3,800명을 인근 지치지마 섬에 배지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가 이오지마를 관할하고 있었다. 개전 후에 남방 전선과 일본 본토를 묶는 항공 수송의 중계지점으로서 이오지마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해군이 이오지마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당시 항공병 1,500명과 항공기 20기를 배치하고 있었다.

 

 

 이오지마의 성조기

 

 

1944년 2월, 미군은 마셜 제도를 점령하면서 추크 제도(Chuuk Islands)에 대규모 공습을 실시했다. 이에 대항해 일본 대본영은 캐롤라인 제도마리아나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를 묶는 방어선을 '절대 국방권'으로 지정해 사수를 결정한다. 방위선 수비 병력으로서 오바타 히데요시(小畑英良)가 지휘하는 제31군이 편성되었다. 그 밑에 오가사와라 지구 집단 사령관에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이 취임했다. 이오지마에는 3월부터 시작해 4월까지 증원부대가 도착해 총병력은 5,000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1944년 여름,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를 공격해 점령했으며, 마리아나 제도의 비행장을 거점으로 같은해 11월부터는 B-29 폭격기를 이용해 일본 본토 각지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리아나 제도에서 일본 본토까지는 거리가 상당했으며 일본군이 마리아나 제도에서 일본 본토로 이어지는 중간 지점에 있는 이오 섬에서 미군 폭격기 무리의 이동을 미리 예측하고 저지했기 때문에, B-29 폭격기들과는 달리 먼 거리를 비행하지 못하는 호위 전투기들이 곧바로 비행장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일이 잦았다. 결국 호위 전투기들을 잃은 B-29 폭격기들이 일본군의 요격을 받는 일이 잦았다. 반대로, 일본군은 이오 섬을 근거지로 하여 가까운 마리아나 제도로 내려가 미군의 비행장을 자주 공격했다. 이 결과, 일본군은 12월에만 11기의 B-29를 파괴했다.

 

따라서 미군 태평양 통합작전본주는 이오 섬을 점령하고, 일본군의 항공기지를 파괴한 뒤 미군의 전진 항공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이오 섬 공격을 결정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히로시마 나가사키 핵 폭격
(태평양 전쟁, 일본 본토 공습의 일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버섯 구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버섯 구름
장소 히로시마, 나가사키
결과 일본 제국의 항복에 기여
교전국
영국 영국

미국 미국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지휘관
미국 해리 S. 트루먼

미국 폴 티베츠

일본 제국 하타 슌로쿠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버섯 구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ㅡ原子爆彈投下, 영어: 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는 제2차 세계대전이 다 끝나갈 무렵 1945년 미국일본 히로시마 시나가사키 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선행으로, 당시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 시에 30개의 원자 폭탄을 떨어뜨렸고 8월 9일 나가사키 시에 열 번째 폭탄을 떨어뜨렸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라고도 한다.

 

원자폭탄 두 개를 떨어트리기 전까지 6개월간 미국은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도시 67개에 전락상 집중하여 폭격하였다. 영국, 중화민국과 함께 미국은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하라고 강요하였으나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6일 월요일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가 명령하여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가 히로시마에, 3일 후 8월 9일 "팻 맨"(Fat man)이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이 원자폭탄 두 개는 인류사 최초로 전쟁에서 일반 시민 학살에 쓰인 원자폭탄이었다. 원자폭탄 투하가 결정된 히로시마는 당시 일본군 제2사령부이면서 통신 센터이자 병참 기지였으므로, 일본의 군사상으로 중요한 근거지였다.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고 초기 2개월에서 4개월 동안, 히로시마에서는 90,000명에서 166,000명,나가사키에서는 60,000명에서 80,000명 정도가 사망했으며, 그중 각 도시 사망자 절반은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당일에 집계되었다. 히로시마 의료기관은 원폭투하 탓으로 60%가 섬광화상으로, 30%가 건물 잔해물로, 10%가 기타 원인으로 죽었다고 한 이 보고가 있은 후 다음 달에 더 많이 죽었는데 이는 원폭투하 탓에 후폭풍과 피폭과 기타 질병 합병증과 부상 탓에 발생했다. 미국에선 이 사건이 최단기에 가장 많은 시민을 죽였다고 평가하였고 15%에서 20%가 피폭으로, 20%에서 30%가 섬광화상으로, 50%에서 60%가 질병과 부상으로 죽었다고 보고했다. 사망자들 중 대부분은 보통 시민들이었다.

 

나가사키 원폭투하 6일 후 8월 15일 일본 제국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으며, 9월 2일 항복 문서에 사인하면서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알렸다. 한편 독일은 이미 5월 7일 유럽에서 항복을 선언했다. 이 원폭투하로 인해 전후 일본은 "핵무기를 만들지 않으며, 갖지 않으며, 들여오지 않겠다"는 비핵 3원칙을 수용했다. 이 원자폭탄 투하 사건은 윤리적 문제와 "당시 미국이 정말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주제로 아직까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계획

 

히로시마 시와 나가사키 시를 대상으로 한 원자폭탄 투하의 역사는 미국의 핵 개발 계획인 맨해튼 계획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과 영국, 캐나다는 비밀리에 초크 강 연구소에서 공동으로 튜브 알로이스 프로젝트를 연구하여, 첫 원자폭탄을 설계·제조하였는데, 이를 맨해튼 계획이라고 한다. 과학적 연구는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맡았으며, 미 육군 공병사령부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이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를 맡았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일명 "리틀 보이"(Little Boy)라고 불리는 포신형 원자폭탄은 테네시 주 오크리지에 있는, 우라늄 235를 천연 우라늄으로부터 분리해내는 거대한 시설에서 분리된 우라늄 235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원자폭탄의 첫 실험은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주 앨라모고도에서 이루어졌다. 내폭형에 해당하는 테스트에 사용한 원자폭탄인 트리니티(Trinity)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인 "팻 맨"(Fat Man)은 플루토늄 239로 만들어졌으며, 그 합성 요소는 워싱턴 주 핸포드핵융합로들에서 만들어졌다. 이 실험이 실시된 지 10일이 지난 7월 26일미국중국, 소련연합국 정부 대표는 민주주의 국가로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목표 도시 설정

 

 

 

원자 폭탄의 투하가 진행된 경로. 고쿠라 지역에서의 투하는 기상 악화로 인해 실패했다.

 

 

원폭 투하의 대상이 된 일본의 도시는 여러 곳이 있었으나 니가타교토,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의 다섯 도시로 좁혀졌다. 그러나 니가타는 외부의 표적과 더 떨어져 있어서 제외되었다. 1945년 5월 10~11일 동안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주축으로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의 원자 폭탄 투하 목표 도시 설정 위원회는 교토,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 무기 공장을 가능 목표 도시로 설정했는데, 그 기준은 이러하였다.

  • 목표 도시는 지름 3마일 이상일 것이며 큰 도시이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시인지
  • 목표 도시에 원폭 투하를 할 시, 효과적인 손해를 입을 수 있는지

원폭 투하의 대상이 된 교토,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의 특징은 모두 "일본제국의 기초가 된 도시"였다는 점이었다. 교토는 일본 천황의 조상, 히로시마는 조슈 번 번주였던 모리 가문 조상이 살던 땅이며 고쿠라는 조슈 번이 삼은 도시권에 포함된 규슈와 인접한 도시, 나가사키 시메이지 유신의 배후였던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의 본거지였다. 또한 히로시마 시청일 전쟁에서 대본영이 위치한 도시이다. 고쿠라는 간몬 해협에 직면한 평원의 도시이고 청일 전쟁의 전후 처리 조약이 체결된 도시이며 시모노세키와 국영 제1호 제철소가 세워진 야하타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도시였다.

 

위의 도시들은 대부분 야간의 기습 폭격 대상에서 제외된 도시들이었고 미국 공군은 이 도시들이 치명적인 무기들을 생산할 수 있는 도시로 지정했다. 히로시마는 "도시에 있는 산업지대 한 가운데에 있는 중요 군사 거점이자 병사들의 승선 지점. 레이더 표적에 용이하며 폭격할 시 도시에 크게 손해를 입힐 수 있는 곳. 주변에 언덕이 있어 폭격 효과를 크게 상승시켜줄 가능성이 있음. 호수가 있어 화재를 일으키기엔 적합한 표적은 아님."이라고 설명됐다.

 

원자 폭탄 투하의 궁극적 목적은 일본이 포츠담 선언에 따른 무조건 항복을 하게 시키기 위해서였다. 최종 목표 도시를 선정할 때 당시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목표 도시를 설정할 때 가장 중요시한 것은 이 폭격으로 인해 일본 제국이 얼마나 큰 정신적 충격을 얻을 지였고 또한 국제적으로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지였습니다. 교토는 일본 제국의 군수 사업에 있어서 중요한 요충지이자 일본인들에게는 정신적 고향과도 같은 곳이기에 목표 도시로 설정하기엔 적합한 도시였다. 도쿄 역시 일본 천황의 궁이 있다는 점에서 다른 그 어떠한 도시보다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지만 교토처럼 전략적 요충지는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에드윈 라이샤워가 미국 군정보부 일본 전문가로 복무하면서 교토 원폭 투하를 반대했다는 일설이 떠돌았으나 라이샤워는 자서전에서 그것을 극구 부인하였다.

"(중략)...교토 원폭투하를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람은 당시 육군 장관에 재임하던 헨리 스팀슨이었다. 스팀슨은 신혼여행을 교토에서 보냈던 것으로 알려져있었다."

일설에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교토를 제외했다고 하나 후에 공개된 미군 사료에 의하면 문화재 보호를 위해 폭격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제 1순위 목표 도시 선정 시 교토가 빠진 이유는 전후 소비에트 연방과의 대립을 예상한 미국은 자칫 교토에 원폭을 투하하면 일본이 소비에트 연방측으로 돌아설 가능성을 염려한 정치적 판단이었다. 히로시마를 폭격한 후 트루먼은 일본이 항복을 하지 않을 시 원자 폭탄 투하는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고 당시 일본 제국 안에서는 본토 결전 주장과 항복이라는 대립이 맞서는 사이 결국 두 번째 원자 폭탄의 투하가 결정됐다. 투하할 도시는 고쿠라로 선정됐지만 폭격을 시행하던 당시 고쿠라는 구름에 가려 시야가 확보되지 못했으며 연료마저 부족하여 오키나와로 가는 길목에 있던 목표도시인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했다.

 

 

 

히로시마

 전쟁 중 히로시마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를 투하한 에놀라 게이와 승무원들.

 

 

 

원자 폭탄 리틀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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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히로시마는 산업도시였으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많은 병영이 설치돼있었으며 일본 제국 육군 5사단 사령부와 일본 영토 남쪽 전체 방어를 지휘하는 육군참모 하타 순로쿠의 제 2 육군 사령부가 있었다. 히로시마는 작은 규모였지만 병참기지였으며 통신 센터, 물류창고, 부대 집결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 도시는 2차 대전 당시 미군의 폭격을 당하지 않는 몇 안 되는 도시들 중 하나였고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곧 원자폭탄 투하 시 폭발 규모를 측정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히로시마 중심부에는 몇몇 강화 콘크리트 빌딩과 가벼운 구조물들이 있었으며 중심부 바로 바깥에는 가옥을 비롯하여 그 사이사이에 나무로 만들어진 작업장이 밀집해있었다. 교외에는 큰 산업단지가 부분적으로 있었으며, 이 산업단지 안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들 역시 목조건물들이었다. 전체적으로 화재에 크게 약한 도시였던 것이었다.

 

전쟁 초기 히로시마의 인구는 381,000명으로 최대인구를 달성했지만 원폭 투하 후 일본 정부가 시행한 체계적 이주 정책에 의해 꾸준히 감소했다. 원폭 투하 당시 인구는 대략 340,000명에서 350,000명을 웃돈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공식 문서가 소멸했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는 알기 어렵다.

 

 

투하

 

 

 

에놀라 게이에서 촬영한 "리틀 보이"가 일으키는 버섯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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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는 원자 폭탄이 투하될 제 1순위 목표 도시였으며 임무 수행 중 변수가 생길 시 이를 대체할 목표 도시는 고쿠라나가사키였다. 8월 9일에 투하된 이유는 그 전에는 기상 문제 때문에 시야가 확보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393사단 폭격 비행중대에 속했던 B-29 에놀라 게이는 일본 본토 영토에서 비행시간으로 6시간 떨어진 서태평양 티니언 섬 북쪽에 있던 비행장에서 이륙하여 히로시마로 향하였으며, 제 509 혼성부대 폴 티베츠 대령이 폭격기를 조종하고 지휘했다. 에놀라 게이는 두 기의 다른 B-29 폭격기와 함께 일본 본토로 향했는데, 그 두 기 중 한 기는 찰스 W. 스위니 소령이 지휘하는 그레이트 아티스트로 원폭투하 후 결과 측정을 담당했으며, 나머지 한 기는 조지 마쿼트 대위가 지휘하는 폭격기로 처음에는 기체명이 정해지지 않았으나 후에 네세서리 이블이란 이름으로 정해졌다.

 

티니언 섬에서 이륙한 후 각 폭격기는 산개비행을 하다가 이오 섬 고도 2,440 미터에서 재 집합한 후 일본 본토로 향했다. B-29 에놀라 게이는 목표도시 히로시마에서 고도 9,855 미터 상공에서 시야를 확보했다. 본토로 향하는 동안 해군 대령 윌리엄 파슨스가 이륙 시 끼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분리해뒀던 원폭 리틀 보이를 장착했고, 보조를 담당하던 모리스 젭슨 소위가 히로시마에 도착하기 30분 전에 안전 장치를 분리했다.

 

 

 

 

원자 폭탄으로 인해 피부가 타버린 희생자.

 

 

원폭 투하가 있기 한 시간 전, 일본 제국 조기 경보 레이더는 본토 남쪽 부근에서 일부 미국 비행편대가 오고 있는 걸 발견했다. 히로시마를 포함에 많은 도시에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공습경보가 울렸다. 오전 8시 무렵, 히로시마 레이더 관측소 측에선 본토로 향해오는 비행기 기체의 숫자가 몇 안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공습경보를 해제했다. 연료와 기체를 아끼기 위해 비행편대가 지나가게끔 방치했다는 것이다. 기존 라디오 방송에서는 실제로 B-29 폭격기들이 포착될 시 방공호로 대피하라는 내용을 방송했다. 하지만 이미 아침 7시 31분에 기상 관측 비행기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고도 9,800 미터 상공에서 히로시마의 기상 상태가 양호하다는 내용을 담은 전언을 모스 부호로 보낸 상태였다. 아침 8시 9분 폴 티베츠 대령은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했다.

 

60 킬로그램의 우라늄 235가 담긴 포신형 핵분열 무기 리틀 보이히로시마 현지 시각 08시 15분에 투하됐다. 리틀 보이는 고도 9,470 미터 상공에서 43초 동안 떨어져 도시 위 580미터 상공에서 폭파됐다. B-29 에놀라 게이는 후폭풍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 도시에서 벗어나 11.5 마일(약 18.5 킬로미터)을 비행했다.

 

리틀 보이는 옆바람 때문에 본래 조준했던 아이오이 다리에서 240 미터 벗어난 시마 외과 병원에 투하됐다. 리틀보이는 TNT 13킬로톤에 상응하는 폭발을 일으켰으며, 반경 1.6 킬로미터 이내의 모든 것을 파괴했으며 11 제곱킬로미터에 해당하는 화재를 일으켰다. 미국은 도시의 12 제곱 킬로미터가 파괴된 것으로 측정했으며, 일본은 히로시마의 69%의 건물들이 파괴됐으며 그것을 제외한 31%의 건물들 중 6~7%가 손상을 입었다고 보고했다.

 

히로시마의 인구 중 70,000명에서 80,000 명, 약 30%가 원폭 투하 당시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으며 70,000여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도시의 90%의 의사들과 93%의 간호사가 사망하거나 다쳤다. 이들은 도시에서 가장 큰 피해를 받은 시내에 있었다.

 

 

투하 후 상황

도쿄 NHK히로시마 NHK의 방송이 갑작스럽게 중지하게 되자, 다른 전화선을 이용해 방송 연결을 다시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약 20분 후 도쿄 철도 전신 센터는 히로시마 북쪽으로 향해있는 전신이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았다. 히로시마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일부 철도역들에서 비공식적으로 엄청난 폭탄 투하가 있었다는 보고했으며, 이 보고는 일본 제국 군 참모 본부에 전해졌다.

 

일본 제국 참모 본부는 반복적으로 히로시마 군지휘부에 연락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답변이 오지 않았으며 이것은 곧 지휘부에 혼란을 일으켰다. 당시 일본 제국은 3기의 비행기가 그렇게 큰 폭발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참모본부는 히로시마에 즉시 비행기를 보내 피해를 조사하고 도쿄에 보고할 것을 명령했다. 지휘부는 큰일은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으며 그러한 폭탄투하는 없다며 그저 소문일 뿐이라고 단정 지었다.

 

비행기는 히로시마 남서쪽으로 향했다. 3시간 여 동안 비행을 한 끝에 비행기 조종사와 함께 파견된 참모 장교는 히로시마에서 약 1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원폭으로 인해 생긴 거대한 연기구름을 목격했다. 비행기는 곧 도시에 다다랐으며 히로시마에 있던 모든 것이 불타고 연기에 뒤덮여있는 광경을 목격하며 히로시마 상공을 비행했다. 참모 장교는 이 사실을 도쿄에 보고한 후 즉시 피해를 측정했다.

 

1945년 8월 8일 미국은 도쿄 라디오에서 히로시마 폭격을 알리는 내용을 담은 보고를 받았다. 당시 라디오 내용은 이러했다. “사람, 동물, 모든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말 그대로 죽음 속에 그슬렸습니다."

 

 

사망자

 

 

 

극심한 화상을 입은 희생자.

 

 

미국 에너지부의 기록에 따르면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즉사한 사망자가 대략 70,000명이라고 돼있다. 의료 물자 부족 때문에 화상과 피폭 및 관련 질병을 입은 환자들은 더욱 더 부상이 심해져 1945년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인해 생긴 총 사망자는 90,000명에서 166,000명이었다. 일부는 1950년까지 피폭으로 인한 과 같은 장기질환 등 때문에 사망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약 200,000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1950년부터 1990년까지 일본에서 암과 백혈병으로 죽은 사람들 중 9%가 히로시마 원폭 당시 피폭을 맞은 사람들이라고 발표했다.

 

 

원폭 유적과 생존자

 

 

 

소축척으로 재현한 나카지마 구역의 그라운드 제로의 모습.

 

 

일본은 지진이 잦은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일부 강화 콘크리트 건물들은 굉장히 견고한데, 히로시마에도 이런 건물들이 있었으며 이 건물들 중 일부는 원폭에도 붕괴되지 않았다. 생존자 노무라 에이조(野村 英三)는 그라운드 제로에서 170미터 떨어진 강화 콘크리트 건물(전후엔 레스트 하우스로 바뀜) 지하에 대피해있어 살아남은 것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또한 그라운드 제로에서 300미터 떨어진 히로시마 은행에 있던 타카쿠라 아키코(高蔵 信子)도 대표적인 생존자 중 한 명이다. 원폭 투하가 이루어진 후 폭발은 샛길보다는 큰 길을 향해 퍼져나갔으며 이것은 히로시마 산업 전시관이 폭발에서 붕괴되지 않게 해주었다. 히로시마 산업 전시관은 그라운드 제로에서 15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후에 이 건물은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으로 명명됐으며 1996년 미국중화인민공화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됐다. 또한 히로시마 원폭 투하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졌다.

 

 

 

나가사키

 

전쟁 중 나가사키

나가사키 시일본 본토 남쪽에 있는 가장 큰 항구 도시 중 하나였으며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대규모 산업 지대를 포함하고 있었고 군수품, 선박, 무기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도시였기에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도시였다.

 

히로시마의 모습과는 달리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가사키 대부분의 건물들은 나무로 지어진 전통 일본식 집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많았다. 수많은 공장과 사무실들 또한 폭발과 화재에 약한 재료나 나무로 지어졌었다. 또한 나가사키는 계획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민들 중 대부분이 산업 지대 공장에 굉장히 근접한 곳에서 살고 있었다.

 

나가사키는 원폭 투하가 있기 전에 한 번도 대규모의 공습을 겪지 않은 도시였지만 1945년 8월 1일 수많은 재래식 고성능 폭탄들이 도시 투하됐다. 이로 인해 도시 남서쪽에 있는 조선소와 부두가 피해를 일부 입었으며, 미츠비시 중공업 공장과 군수공장이 타격을 받았으며 6발의 폭탄이 나가사키 의과 대학과 병원에 떨어졌으며 그 중 세 발이 직접타격을 받았다. 피해는 비교적 적은 편이었으나 나가사키 시와 아이들을 둔 주민들에게는 큰 염려를 불러일으켰으며 곧 나가사키 주민들은 안전을 위해 도시에서 벗어나 시골지역으로 이주했다. 따라서 원폭투하가 이루어졌을 당시 도시의 인구는 줄어들고 있었다.

 

나가사키 북쪽에는 영국 연방 포로 수용소가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석탄 광산에서 노동했으며 원폭투하를 목격했다.

 

 

투하

1945년 8월 9일 아침 미국 찰스 393사단 비행 중대 찰스 스위니 소령이 지휘하는 B-29 벅스카가 두 번째 원자폭탄 팻 맨을 싣고 주요 목표 도시 고쿠라로 향했다. 임무 계획은 히로시마 임무와 거의 동일했다. 두 기의 B-29가 팻 맨을 실은 비행기를 뒤따라가면서 기상 관측 및 사진 촬영과 원폭 투하 결과 측정을 맡았다. 찰스 스위니 소령은 비행기에 이미 팻 맨을 장착한 상태였지만 전기 안전 플러그는 해제하지 않은 상태였다.

 

기상 관측을 담당하는 비행기가 고쿠라, 나가사키 모두 시야확보를 찰스 스위니 소령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벅스카가 일본 해안에 있는 재 집합 장소에 도착할 무렵 그 뒤를 따르던 세 번째 B-29 빅 스팅크를 조종하던 제임스 I. 홉킨슨 중령이 재 집합에 실패했다. 벅스카와 다른 B-29는 빅 스팅크 없이 40여분 동안 상공을 활주했지만 원폭 투하 계획에서 30분이나 지연됐기 때문에 찰스 스위니 소령은 홉킨슨 중령 없이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30분 후 B-29는 고쿠라에 다다랐으나 이미 구름이 도시 70%를 가려버려 육안으로 폭격을 하지 못하게 됐다. 도시 상공을 3회 배회한 찰스 스위니 소령은 이륙 전 예비 탱크의 연료 공급 펌프를 수리 받지 못해 연료가 부족하게 된 상태가 되어 대체 목표 도시인 나가사키로 향했다. 나가사키에 대한 시야가 확보되지 못할 시 벅스카는 오키나와에서 원폭을 옮겨 필요한 경우 바다에 버려야할 상황이었다. 당시 핵폭탄 발사 준비원이었던 미 해군 중령 프레드릭 에쉬워스는 나가사키의 시야가 확보되지 못 할 시, 레이더를 이용해 원폭 투하를 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현지 시각 07시 50분 경, 나가사키에 공습경보가 울렸으며 08시 30분에 경보가 완전 해제됐다. 10시 53분, 두 대의 B-29가 포착되자 일본군은 정찰 비행기로 확정하고 아무런 경보를 울리지 않았다.

 

몇분 후 11시 00분, B-29 그레이트 아티스트를 조종하던 프레드릭 C. 벅 대위는 세 개의 기기들을 낙하했는데, 이 기기들 안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세 명의 과학자들과 함께 원자 폭탄을 연구한 도쿄 대학 사가네 료키치 교수에게 담긴 편지가 담겨있었다. 이 편지의 내용은 사가네 료키치 교수가 대중들에게 원자폭탄의 위험성을 알리라는 것이었다. 이 편지는 일본군 장교들이 앞서 찾아내었고, 한 달이 지나서야 사가네 교수에게 전해졌다. 1949년 이 편지에 관련된 인물인 루이스 알바레즈는 사가네 교수를 만나 사인했다.

 

11시 01분, 나가사키에서의 마지막 1분에 벅스카의 폭격수였던 커미트 비핸 대위가 타격지점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약 6.4 킬로글램의 플루토늄 239가 담긴 팻 맨이 나가사키 산업 지대에 투하됐다. 팻 맨은 43초 후 나가사키 남쪽에 있는 미쓰비시 중공업 공장, 군수공장과 북쪽에 있는 미쓰비시-우라카미 어뢰제작공장 사이에 정확히 투하돼 도시 위 상공 439 미터에서 폭발했다. 본래 타격지점에서 북서쪽으로 거의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폭발된 것이다. 폭발은 우라카미 계곡에서 한정된 채 일어나 나가사키의 주요 부분은 언덕으로 인해 보호를 받았다. 팻 맨은 TNT 21 킬로톤에 상응하는 폭발을 일으켰으며, 진주만에 91타입 어뢰를 공급하던 미츠부시-우라카미 어뢰 제작공장이 파괴됐다. 폭발반경은 약 1-2 킬로미터로 측정됐고 후에 화재가 북쪽에서 남쪽까지 3킬로미터 퍼졌다. 폭발지점에는 순식간에 섭씨 3,900도의 열이 달아올랐으며 후폭풍의 바람 속도는 1005km/h로 측정됐다.

 

 

사망자

이 원폭 투하로 인해 40,000명에서 75,000명에 이르는 사람이 즉사했으며, 1945년 말까지 총 80,0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측정됐다. 또한 최소 8명에서 최대 13명의 전쟁 포로가 원폭 투하에 사망된 것으로 확인됐으며, 그 명단은 이러하다.

  • 영국 연방 시민 한 명
  • 네덜란드 전쟁 포로 일곱 명(이 중 두 명의 이름은 알려졌다)
  • 전하는 바에 의하면 최소 두 명의 국적불명 전쟁포로가 피폭을 입어 전후 으로 사망

 

원폭 유적과 생존자

알려지지 않은 숫자지만 히로시마 원폭 생존자들 중 일부가 두 번째 원폭이 투하되기 전 나가사키로 이주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나가사키 원폭 투하 당시 나바호족 출신 미국인 전쟁포로 조 키에유미아(Joe Kieyoomia)가 후폭풍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1963년 고쿠라 시와 다른 시를 통합시켜 발족된 기타큐슈 시에는 나가사키의 종과 평화 기원비가 있다.

 

 

추가 원폭 투하 여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후 미국은 그 해 8월 셋째 주에 한 기, 9월과 10월에 각각 세 기를 추가로 투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맨해튼 프로젝트 총 책임자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이 8월 10일 미군 참모총장 조지 마셜에게 ‘다음 투하는 8월 17일 혹은 18일 뒤에 날씨조건이 만족 되는대로 이루어져야한다’라는 제안을 했다. 조지 마셜은 이 제안에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았지만 동시에 ‘대통령의 허락이 있을 때까진 그 시기에 투하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답변을 보냈다. 또한 다운폴 작전 계획 수립이 시작되기 전 이미 미국 육군성에서는 일본이 항복을 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어떤 식으로 본토공습을 시행할지 의논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곧 추가 원폭 투하 여부 의논은 종식됐다.

 

 

일본의 항복

미 전시 내각은 8월 9일까지 일본에게 네 가지 조건을 수용하여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8월 8일 소련얄타 협정에 근거를 두고 소-일 불가침 조약을 파기,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히로히토기도 고이치에게 “소련이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했으니 즉시 상황을 수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도 1945년 9월에 일본을 공격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다.

 

기도 고이치는 즉시 제국 회의를 열어 외무 대신 도고 시게노리에게 연합군의 항복 요청을 기존의 네 가지 조건에서 한 가지 조건으로 축소시켜 수락하라고 이야기했으며 동시에 “천황의 지위에 흠이 갈 수 있는 요구에는 타협하지 말 것”이라고 전했다. 8월 12일 히로히토가 황가에 항복의사를 밝혔으며 연합군 측에서 천황제를 방치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이틀 후 14일 히로히토는 연합군 측에 항복을 선언하는 내용을 일본 전역에 방송했다.

 

이에 다음날 군부 측에서는 항복 선언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으나 곧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이후 4만여 명의 미군이 히로시마를 점령했고, 2만 7천명이 나가사키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 바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제 2차 세계대전에 정식으로 참전하지 못하고 결국엔 비공식 참전국이 되었다. 또 9월에 연합국(영국 영국, 미국 미국, 중화민국 중화민국, 소련 소련)이 일본을 분할 점령할 목적이 있었는데 이 역시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다음은 히로히토의 방송 중 원자폭탄에 관한 부분이다.

"(중략)…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인한 폭탄으로 죄없는 백성들을 끊임없이 죽이니, 그 참혹함은 참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리하여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는 일은,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불러올 뿐만 아니라, 인류의 문명 또한 부수어버릴 것이다. 이리 되면 짐은 어찌 수많은 백성들을 지키고, 황실과 조상의 신령께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이것이, 짐이 제국 정부에게 하여금 공동 선언에 응하도록 명한 연유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끝까지 동아시아의 해방을 위해 노력한 모든 맹우 (盟友; 벗)들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이후 1944년의 사이판 상륙, 이오지마 점령(1945년 2월~3월) 등으로 태평양에 항공 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B-29 등의 고고도 폭격기를 동원한 일본 내 대도시에 대한 전략 폭격을 개시하게 되고 급기야 1945년 8월 6일 및 8월 9일에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기에 이른다. 한편 8월 9일에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만주를 거쳐 조선의 북부까지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으며 또 9월에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일본을 분할통치 하기로 결정했다.

 

전쟁 말기 일본이 일정 수준의 전력을 보유한 상태에서 항복 했기에 일본에 대한 단죄가 약해진 것이다.1945년 8월말 미주리 전함이 도쿄만 진입시에도 연합군 사령부에서 카미카제 공격을 우려할 정도였고 실제 8월 24일에도 크릴열도에 상륙한 소련군일본제국군이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 천황은 더 이상의 전쟁 지속은 전 국토의 황폐화는 물론이며,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울수 있다고 판단, 전쟁을 종결하기로 마음먹는다. 1945년 8월 14일에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 의사를 전달한 뒤, 이튿날인 8월 15일에 항복을 선언하여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ABCD 포위망

ABCD 포위망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을 포위했던 나라들을 일컫는 말로써 미국(American), 영국(British), 중국(Chinese), 네덜란드(Dutch)의 앞글자를 따서 ABCD 포위망이라고 부른다.

 

  

 

 

 

일제의 항복

 

일본의 항복(일본어: 日本 (ほん)降伏 (こうふく), 영어: Surrender of Japan)은 일본 제국1945년 8월 14일에 연합국에 통보하였고, 8월 15일 낮 12시에 쇼와 천황이 항복 선언을 한 것을 말한다. 9월 2일에는 일본의 도쿄요코하마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USS 미주리 (BB-63) 선상에서 일본 대표가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였다.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USS 미주리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개요

1945년 5월 8일나치 독일 항복에 이어 1945년 9월 2일일본제국의 항복 (포츠담 선언 서명)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종결되었다. 20세기의 세계사 세계 대전 시대의 종결과 냉전 시대의 시작을 선포하는 큰 전환이 된 사건이기도하다.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한 점령 통치의 시작이며, 1868년 1월 3일 메이지 유신("왕정 복고의 큰 호령")에 의하여 성립된 일본 제국은 성립으로부터 77년 후에 붕괴했다. 일본 천황을 기축으로하는 "일본제국"(日本帝國)에서, 일본국 헌법미일 안보 조약을 기축으로하는 "일본국"(日本國)으로 바뀌었다. 일본의 역사1603년 도쿠가와 막부 성립과 1868년 메이지 유신과 나란히 큰 전환점의 하나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1945년 8월 10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소식을 전해 들은 파리 시민
 

 

1945년 8월 14일,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전해 들은 뉴욕 시민

 

 

1945년 7월 26일, 미국, 영국, 중화민국, 정부 수뇌들이 모여 일본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정치가들은 포츠담 선언을 묵살했다. 그 결과 일본 제국의 단말마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각각 투하된 2발의 원자폭탄이다. 이 원자폭탄 이외에, 8월 9일에는 소련군이 일본 제국이 세운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침공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1945년 9월에 정식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여 일본을 공격할 거라고 예정되어 있으나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실패하였으며 연합국(미국, 영국, 소련, 중화민국) 측에서는 9월에 일본을 독일처럼 분할 점령하려고 했으나 이 역시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무산되어 결국 미국이 단독 점령을 하였다.

 

그 2발의 원자폭탄은 일본 제국군이 점령한 동북 아시아와 동남 아시아에서 독립 운동을 야기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의 뚜껑을 끈 사건이 8월 13일 발발한, 호치민베트남 8월 혁명이었다. 이 후 8월 14일 쇼와 천황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 하였다.

 

 

포츠담 선언 체결

그리고 항복 선언 3일 뒤인 8월 17일에는 일본 군정하에 있었던 인도네시아에서 독립 선언이 나왔다. 그리고 8월 18일에는 괴뢰 국가인 만주국이 결국 무너졌다.

 

그리고 포츠담 선언1945년 9월 2일 체결 즉시 발효되었다. 포츠담 선언 조인식에서는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이 9월 2일을 '대일 승전 기념일(VJ 일)'라고 한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이 포츠담 선언 체결 일, 호치민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고, 바오다이가 이끄는 베트남 제국은 붕괴했다.

 

 

구 일본제국의 영토

 

항복 소식을 듣고 할복을 기도한 일본 병사.

 

 

일본 제국이 주권을 박탈당하자 식민지는 승전국인 미국, 중화민국에 각각 넘어갔다.

  • 한반도미국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어 각각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했다.
  • 일본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하여 일본 식민지가 되었으나 항복하는 바람에 다시 프랑스로 넘어갔다(1945년에 북베트남은 독립운동으로 남베트남은 1954년에 프랑스미국으로 넘겨주는 덕에 독립을 하였다).
  • 타이완중화민국에 반환되었다.
  • 나머지 일본의 도서 지역은 미국이 주도하는 GHQ의 점령하에 들어갔다.
  • 괴뢰 국가였던 만주국은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