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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34 : 일제강점기 79 (태평양 전쟁과 일제의 패망 5)

 

 

 

 

한국의 역사 1,034 : 일제강점기 79 (태평양 전쟁과 일제의 패망 5)

 

           

 

 

 

필리핀 전역

 

필리핀 전역
(태평양 전쟁의 일부)
Douglas MacArthur lands Leyte1.jpg
날짜 1941년 12월 8일~1943년
장소 필리핀, 필리핀 해
결과 미국의 승리
교전국
미국 미국

영국 영국
필리핀 필리핀

일본 일본 제국
지휘관
미국 더글라스 맥아더

미국 조나단 M.웨인라이트

 필리핀 마누엘 L. 케손
필리핀 빈센테 림
필리핀 알프레도 M.산토스

일본 제국 혼마 마사하루



 

 

필리핀 전역의 상태

필리핀은 대소 7,100개의 섬이 남북으로 1,100마일, 동서로 700마일 넓이에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는 도서국(島嶼國)이며,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결과 미국식민지가 된 후 미국의 극동근거지가 되어왔다. 그러나 미국은 필리핀을 통치함에 있어 가능한 한 많은 자치를 허용하였고, 추후 독립시키기로 결정한 바가 있다.

 

그래서 신생 필리핀의 군사력 건설을 위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1935년부터 군사고문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1937년 미 육군에서 퇴역하였으나, 일본과 미국간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어가고, 장차 일본군의 침공이 미군 수뇌부에서 예상되자, 1941년 초에 현역으로 재소집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필리핀 방위군을 미군으로 편입시켜, 그 해 6월 26일에는 맥아더 휘하에 미극동지상군(USAFF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the Far Easts)을 창설하였다.

 

당시 필리핀의 총병력은 약 13만이었으며, 그 중 미군은 13,500명이었다. 항공기는 277대가 있었으나 전투 가능한 것은 142대에 불과했고, 해군 역시 보잘 것 없었다. 미국 본토로부터는 새로 2만여명의 병력과 50만 톤의 보급품이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일본군의 침공이 먼저 개시되었다.

 

 

무지개 계획 (Plan Rainbow)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일본군의 침공이 개시된 직후 신속히 무지개 계획이라는 이름의 방어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그 방어 계획은 아래와 같다.

 

 

무지개 계획의 중심 내용

  1.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가능한 한 장기간 루존 섬을 방어한다.
  2. 루존 섬의 방어선이 돌파당할 경우, 바탄(Battan) 반도로 철수하여 마닐라만을 결사 확보함으로써 증원군 상륙의 발판을 마련한다.
  3. 4~6개월 간 지연전으로 양상을 이끌어내고, 증원군이 상륙하면 반격을 취한다.


맥아더는 위 방어계획대로 1941년 1월부터 마닐라만 입구에 4개 도서를 요새화 시켰으나, 이 작전 개념은 해군에 의하여 보급이 계속 유지된다는 전제 하에 수립된 것이었다. 필리핀은 지하자원이 풍부하긴 하나 국내에 중공업이나 군수공업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유류도 전적으로 미국 본토로부터의 보급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휘하병력을 북부 루존부대(Wainwright)와 남부 루존부대(Parker), 그리고 맥아더 자신이 직접 장악하는 미 극동군예비대로 편성하여 방어에 임하였다.


한편 필리핀에 침공한 일본군은 흠마(本間) 중장이 지휘하는 제14군 예하 2개 사단과 1개 여단이었으며, 제3함대 및 제2함대의 일부, 그리고 대만에 기지를 둔 제5항공집단(항공기 500여대)이 지원하였다. 일본군의 공격 계획은 다음과 같이 4개 단계로 되어 있었다.

 

 

 

일본군의 필리핀 점령 계획

  1. 미 극동군을 고립시킨다.
  2. 미 극동공군을 격파하고 제공권을 장악한다.
  3. 필리핀을 고립화시키기 위하여 웨이크 및 괌 섬 점령으로 하와이와의 연결을 끊고, 민다나오(Mindanao) 섬의 다바오(Davao)를 점령하여 남부병참선도 차단한다.
  4. 루존 섬의 남, 북단에 조공부대를 상륙시켜 미군주력을 유인하고, 주공은 동서해안에 상륙하여 마닐라를 협공 점령한다.
  5. 잔여지역을 점령하고 지상군을 소탕한다.

 

 

일본군의 침공 개시

일본군은 12월 8일, 진주만 및 말라야 공격과 동일한 날에 침공을 개시하였다. 일본군 항공기들은 루존 섬의 비행장과 중요기지에 조직적인 폭격을 가하여, 항공기를 분산시킬 비행장과 조기경보망 및 대공포가 부족한 미 항공력에 대손실을 입혔다. 12월 10일에는 북부 루존의 아파리(Apari)와 비간(Vigan)에 조공부대가 상륙하여 비행장 건설에 착수하였으며, 12일에는 남부 루존의 레가스피(Legaspi)에 역시 조공부대가 상륙하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조공에 기만당하지 않고, 장차 예상되는 주공에 대비하였다. 12월 18일부터 일본군은 당초 계획대로 공군을 이용하여 루존 기지에서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따라 제공권을 확고히 하게 되었고, 12월 23일 새벽 서해안의 링가옌(Lingayen)만에, 24일에는 동해안의 라몬(Lamon)만에 각각 주공부대가 상륙하였다. 이 두 주공부대는 상륙하자마자 맹렬히 마닐라를 향한 진격에 들어갔다.


맥아더는 1번째 계획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신속히 2번째 계획인 바탄으로의 철수를 시작했다. 공군력과 기동력이 부족한 현 상황에서 일본군과의 정면 대결은 무모한 짓이었기에, 맥아더는 산악과 밀림으로 뒤덮인 바탄의 천연 지형을 이용하여 지연전을 전개함으로써 마닐라만을 결사 확보하여 증원군을 상륙시킬 수 있도록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남부 루존부대의 바탄 철수를 위해서는, 북부 루존부대의 성공적인 지연작전이 있어야 했고, 북부 루존부대에 의한 팜팡가 강의 교량 확보 여부가 곧 성공의 열쇠였다. 이리하여 북부 루존부대는 D-1선으로부터 D-5선에 이르는 5개의 저지선에서 단계적으로 지연전을 펴기 시작했고, 그 동안에 남부 루존부대는 결사적인 강행군을 실시하여, 마침내 1942년 1월 2일 무사히 강을 건너 바탄으로 철수했다. 일본군은 같은 날 마닐라에 무혈 입성하였다.

 

미군은 바탄 반도 내에 주 진지를 나티브 산 일대에, 예비진지를 사마트 산 일대에 구축하였고, 일본군의 후방 침투에 대비하여 해안방어진지도 준비하였다. 일본군은 미군의 바탄 철수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고, 마닐라를 점령함으로써 필리핀 전역이 종료되리라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홈마 군의 주력인 제4사단을 마닐라 점령 직후 자바 방면으로 이동시켰다. 따라서, 일본군은 제16사단 일부와 제65독립혼성여단만으로 바탄의 미군을 격파하여야 했다.


한편 바탄 반도 내의 미-필리핀군은 15,000명의 미군을 포함하여 약 80,000명 정도가 있었으나, 식량과 의약품이 매우 부족하였고, 사기 역시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완전히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군은 1월 9일부터 주 진지에 대하여 공세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군의 저항은 일본군의 예상 외로 완강하여, 일본군은 1월 21일에야 겨우 서부 해안 쪽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은 질서정연하게 후퇴하여, 26일까지 예비진지로 안전하게 철수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주진지는 돌파하였으나, 현존 병력만으로 바탄의 미군을 섬멸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낀 홈마 장군은 장기간의 포위로써 미군을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본영에서는 국내여론과 전쟁전반에 걸친 계획상의 차질을 염려하여, 홈마 장군에게 조기 점령을 계속해서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정글을 통한 침투와 해안을 통한 우회를 수차례 시도하였으나, 일본군은 번번히 퇴패하고 말았다.

 

 

바탄 방어선의 붕괴

그러나 미-필리핀군의 사정은 계속해서 악화되어, 정량의 1/2였던 배식은 1/3으로 줄었고, 나중엔 말과 나귀까지 잡아먹을 정도가 되었다. 대부분의 장병들은 영양실조와 신경쇠약에 허덕였고,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며 전우를 죽이거나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맥아더 장군은 서남태평양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3월 11일 호주로 탈출하였으며, 북부 루존부대의 지휘관 웨인라이트 중장이 그 뒤를 이었다.

 

일본군의 병력은 갈수록 증강되어, 보병 3만 명, 포 200여 문, 전차 50여 대, 항공기 100대를 바탄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3월 31일, 일본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4월 3일 조직적인 포격과 돌파에 의해 미군진지의 우(右)중앙부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4월 9일에는 마침내 반도 내의 미-필리핀군 약 54,000명이 투항하였다. 그러나 북부 루존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웨인라이트 중장은 코레기도르로 철수하여 한 달을 더 버틴 끝에, 5월 6일 일본군의 코레기도르 상륙으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필리핀을 수중에 넣게 되었고, 차기작전을 위한 전진기지를 획득하였으나, 필리핀 전역에서 입은 인적 및 물적, 시간적 손실은 뉴기니아와 솔로몬 방면에 대한 일본의 침공 계획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결과적으로, 미군은 필리핀을 상실한 대가로 5개월이라는 시간을 얻었으며, 이 시간적 여유는 반격준비에 필요한 키포인트 였다는 것이, 전후에 밝혀지게 되었다.

 

 

 

시간순서별 요약

  • 1941년 1월 -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마닐라만 입구 4개 도서 요새화
  • 1941년 12월 8일 - 일본군, 필리핀 침공 시작, 루존 섬의 비행장 및 중요기지에 폭격, 대손실을 입힘.
  • 1941년 12월 10일 - 북부 루존의 아파리와 비간에 일본군 조공부대 상륙
  • 1941년 12월 18일 - 일본군, 공군을 이용한 작전 개시
  • 1941년 12월 23일 - 새벽 서해안의 링가옌만에 일본군 주공부대 상륙
  • 1941년 12월 24일 - 새벽 동해안의 라몬만에 일본군 주공부대 상륙
  • 1942년 1월 2일 - 남부 루존부대, 북부 루존부대가 지연전을 펼칠 동안 결사적 행군, 팜팡가 강을 건너 바탄으로의 철수 성공
    • 일본군, 마닐라 무혈 입성
  • 1942년 1월 9일 - 일본군, 바탄에 철수한 미-필리핀군의 주 진지에 대한 공세 시작
  • 1942년 1월 21일 - 일본군, 서부 해안쪽으로의 미-필리핀군 저지선 돌파 성공
  • 1942년 3월 11일 -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서남태평양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 호주로 탈출
  • 1942년 3월 31일 - 일본군, 조직적인 포격과 돌파를 통한 총공세 시작
  • 1942년 4월 3일 - 일본군의 조직적인 총공세로 인한 미-필리핀군의 우(右)중앙부, 붕괴되기 시작
  • 1942년 4월 9일 - 미-필리핀군 약 54,000명 투항
  • 1942년 5월 6일 - 일본군, 코레기도르로 탈출한 북부 루존부대의 사령관 웨인라이트 중장을 포로로 생포.

 

 

버마 전역

 

버마 전역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의 일부)
버마를 침공한 일본 육군 제15군의 모습.
버마를 침공한 일본 육군 제15군의 모습.
날짜 1942년 1월 ~ 1945년 7월
장소 버마 전역
결과 연합군의 결정적 승리
교전국
연합군

미국 미국
중화민국 중화민국

추축군
Merchant flag of Japan (1870).svg 일본 제국
Flag of Thailand.svg 타이
Flag of the State of Burma (1943-45).svg 버마 방위군
지휘관

Flag of the United Kingdom.svg 아키발드 퍼시발 웨블
Flag of the United States.svg 토마스 허튼

Flag of the United Kingdom.svg 클레어 첸노트
Flag of the United Kingdom.svg 홀랜드 알렉산더
Flag of the United States.svg 조지프 스틸웰
Flag of the Republic of China.svg 라탁영

Merchant flag of Japan (1870).svg 쇼지로 아이다
Flag of Thailand.svg 쁠랙 피분송크람
Flag of the State of Burma (1943-45).svg 아웅산
병력
영연방군 2개 사단
중화민국 제5군
중화민국 제6군
제15군
피해 규모
약 14,000명 약 2,140명


 

침공 배경

 

일본군이 버마를 공략하게 된 배경은, 그 수도인 양곤을 탈취하고, 연합군의 대중국 보급로인 버마 통로를 차단하며, 끝까지 모든 여건이 순조롭게 진척된다면 영국령 인도 제국으로의 침공도 염두에 두기 위해서였다.

 

 

일본의 사전 계획 수립

일본은 버마를 침공하기 위하여 먼저 당시 타이의 총리였던 쁠랙 피분송크람에게 아래와 같은 조건을 요구하였는데, 쁠랙 피분송크람은 이를 수락하였다.

  1. 일본군의 무상 주둔
  2. 버마를 향한 무상 통행

또한 쁠랙 피분송크람은 위 조건을 수락하면서 동시에, 일본과 아래와 같은 협상을 맺기에 이른다.

  • Flag of Thailand.svg 타이: 태국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받는다.
  • Merchant flag of Japan (1870).svg 일본 제국: 위 조건을 담보로 공수동맹을 체결하고, 연합국을 상대로 선전포고 한다.

 

 

전투 개시

 

위와 같은 협상으로 안전하게 후방을 확보하고 타이추축국으로 끌어들인 일본 제국은, 쇼지로 아이다 휘하의 일본 육군 제15군을 동원하여 1942년 1월 16일 타이 쪽으로부터의 침공을 개시했다. 토마스 J. 허튼 중장이 지휘하는 영연방군 2개 사단은 말라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을 과소평가하였기 때문에, 별다른 방어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군의 전술적 능력이나 기동성은 영연방군을 훨씬 능가하였고, 따라서 영연방군은 쉽게 격파당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3월 7일 수도 양곤이 함락되었고, 이어서 만달레이가 함락되었으며, 4월 29일에는 랭군-만달레이-라쉬오-곤명-중경을 잇는 대중국 보급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전투 기간 중 장제스의 참모장으로 활동해 왔던 미국 육군요세프 W. 스틸웰 소장은 중화민국 제5군과 제6군을 이끌고 치열하게 전투에 임하였으나, 역시 인도 방면의 임팔로 패주하였다. 스틸웰 소장은 당시 정글을 뚫고 도망 나온 상황을 가리켜 "지옥에서의 탈출" 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임팔 전투

1944년 3월 15일부터 7월 1일까지 버마(지금의 미얀마)와 인도 국경 지대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대표적인 팀킬 작전으로 무타구치 렌야 장군의 활약상으로 유명하다.

보급을 적에게 탈취한 것으로 채우려고만 하면 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작전이라 그런지 심지어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도 '보급을 경시한 엉터리 작전', '무모한 작전의 대명사로 인용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에서 붙인 작전명은 우호작전(ウ号作戦)이고 Battle of Imphal의 번역상 임팔 전투로 기재하는게 정상이지만 한국에서는 임팔 작전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다. 간혹 임펄 작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배경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5/Kohima.jpg

 

임팔은 인도 북동부 아삼 지방에 위치한 곳으로 연합군이 중국으로 보내는 보급로의 시작이라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그렇기에 일본은 이곳을 공략하면 중국 국민당군을 압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인도까지 진격해서 영국군을 쫒아내는데 성공하면 인도는 독립과 동시에 추축국에 참전하게된다,

 

1942년 8월 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된 시점부터 이미 임팔 공략에 대한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방위체계가 부실한 데다 현지 사령관들이 반대하여 일단 공략 작전은 중지되었다. 근데 작전 구상 자체를 중지한 것이 아니라 작전 연구는 계속하게 했다. 여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되었다.

일단 일본군이 버마 지역 방위부터 굳히기로 하고 그 준비를 하는 동안 연합군이 버마 북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의 윙게이트 장군(Orde Charles Wingate, 1903–1944)이 이끄는 공수부대가 버마 서북부에서 게릴라 작전을 시작하고 연합군 정찰 부대가 나타났다. 일본군은 이것이 대대적인 공세의 시작이라 여기고 재편성을 시작했다. 버마 방면 사령관에는 가와베 중장이, 그 휘하에 제15군과 제55사단, 그리고 직할 부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제15군 사령관에 문제의 무타구치 렌야가 임명되었다.

일본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무타구치가 15군 사령관으로 임명될 당시 대규모 인사 이동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15군 내 무타구치 외에 현지 사정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무타구치의 독단적인 전횡이 가능했다고 한다.

 

어이없게도 이 사람은 사단장일 때 당시 다른 사람이 아삼 지역 진공 작전을 계획하자 무모해 보인다고 반대했었다. 그런데 자기가 지역 사령관이 되자 임팔 작전을 적극적으로 밀어 붙이면서 "아삼이나 벵골에서 장렬히 죽고 싶다"라고 노래를 했다고.

 

무타구치 렌야중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그것도 월권행위로 당긴 것으로 이미 악명이 높았다. 당장 제15군의 상급부대는 버마 방면군. 버마 방면군 사령관은 가와베 마사카즈 대장으로 무타구치가 독단으로 노구교 사건을 일으켰을 때에도 직속 상관이었다. 하도 제멋대로였지만 무타구치의 입지가 워낙에 탄탄해서 지지했다고 할 정도였다 한다. 그 내막은 자신이 속한 계파가 정치적으로 대패하면서 노구교 사건 당시 중국으로 부임한 시점에서 이미 좌천당한 신세였다. 노구교 사건을 일으킨 이유는 이 일을 계기로 좌천당한 자기 신세를 만회해보려는 심산으로 공격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 결론은 역시 일본군의 전매특허인 파벌주의로 이 '실책'을 만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이미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버마 북부에 영국 게릴라 부대가 출몰하자 이를 역전의 기회로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당연히 이 게릴라들은 걸어서 온 것이 아닌, 비행기로 공수된 것이지만, 무타구치는 임팔 작전을 강행한다.

그리고 이 작전에 대한 반대의견이 나오자 자신의 작전에 칭기즈 칸이 했던 '약탈 보급'의 방식을 취할 것이라 하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현대전에서 항공기의 중요성을 망각했다는 것은 둘째로 치고라도 정작 영국군은 포위된 진지에 계속 항공 보급으로 각종 물자를 쏟아부었다. 게다가 당장 이 작전의 원인이 된 영국 게릴라들도 당연히 공수된 부대다.
  • "15군 사령부 작전회의에서 "보급이 원활하지 못할 것"이라고 진지하게 염려하는 의견을 제시한 15군 보급참모 우스이에게 농담이랍시고 한 소리다. 무다구치가 적인 영국군을 얼마나 터무니없이 얕보고 방심하고 있었는지 더 설명이 그러나 이보다도 더 심한 명언이 있었으니, 일선 부대에서 보급품이 모자란다고 하소연하자,

  •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
    이 말의 경우 "일본인은 주로 채식을 하기 때문에 식량이 떨어지면 초근목피로 어느정도 버틸 수 있다" 또는 "일본군은 원래 초식동물인 고로 주위를 둘러보면 풀이 이토록 많으니 먹을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임팔 작전은 버마에서 아라칸 산맥을 직접 넘어서 인도의 북부인 아삼을 기습해 직접 압박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작전 입안과 강행 자체가 자신의 체면 때문이었다고 주위에서 증언했다. 게다가 무타구치가 제시한 작전 기한은 15일이었다.

 

작전 계획 승인

하지만 희대의 막장인 일본군이라 하더라도 무다구치 렌야 수준으로 눈뜬 장님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15군 참모장으로 임명된 오바타 노부요시 소장은 1만 5천톤에 달하는 물자를 어떻게 보급할 것인가란 문제를 현지 조사를 통해서 진격로를 면밀하게 검토한 뒤에 "자동차도 모자란 판국에 비만 오면 못 쓰게 되는 도로, 다리도 없는 친드윗 강, 험준한 산이 가로막고 있는데 보급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불가능하다"고 상신했다. 하지만 무타구치 장군은 약한 소리라면서 무시하고 오바타 소장을 부임 한 달 만에 해임시켜 버렸다.

33사단장 야나기타 겐죠 중장과 31사단장 사토 고토쿠 중장까지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무시당했고 오바타 소장의 면직으로 반대여론은 사그라들었다.

이 작전을 검토하기 위해서 랭군에 모여든 상급부대 참모들도 
후방부터의 보급이 곤란하지 않도록 3개 사단의 배치를 재고해야 한다.
―버마 방면군, 나카 에이타로 참모장.

보급 계획을 도외시한 이 작전구상은 실패할 위험성이 높다.
―남방군, 이나다 마사즈미 참모장

"엉망진창인 작전구상이다."
―대본영, 사나다 죠이치로 작전과장.

이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한 게 이때는 바야흐로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고 미군의 전면 공세가 시작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안 그래도 모자란 전력을 분산시키겠다는 이 발상에 참모진들이 미친 짓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수상 도조 히데키의 입맛에는 딱 맞는 계획이었다. 대본영은 8월에 준비명령을 내렸고 계속 반대하던 이나다 참모장은 10월에 갑자기 해직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무타구치 중장은 작전 구상을 두고 열린 회의에서 남방군의 아야베 키즈쥬 총참모장한테 이렇게 말했다.

군문에 몸을 담은 지 어언 30년. 이렇게까지 필승의 신념이 떠오른 적은 없었소. 영국군은 약하오. 반드시 퇴각할 거요. 보급에 대한 우려는 착각이라 할 수 있소."
 
이 말을 들은 나카 참모장이 "이 작전 구상은 너무나 위험부담이 크다고 생각되오. 재고의 여지는 없는가?"라고 물었지만 "당신은 실전 경험이 없어서 지레 겁을 먹는 모양이지만 이렇게까지 준비를 철저하게 한 싸움은 일찍이 없었소이다. 천장절까지는 임팔도, 코히마도 반드시 점령해 보이겠소."라고 자신했다. 그 말까지 들은 나카 참모장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때 남방군의 보급을 담당하던 이마오카 유타카 참모가 다시 제동을 걸었다. "말씀하신 대로만 진행된다면야 어떻게든 될 것 같소. 하지만 사단이 적에게 발목을 잡힌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오." 그러자 이번에는 작전담당인 키노시타가 얼굴까지 빨개지면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소!"라면서 나섰고 결국 모두가 "아, 그렇습니까" 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결국 아야베 총참모장은 이 계획의 인가를 상급부대에 요청하는데 노구교 사건 때도 무타구치의 직속 상관이었던 버마 방면군의 카와베 마사카즈 사령관은 아래와 같은 헛소리를 하면서 통과시켰다.

"예전부터 무타구치 군이 공들여 계획한 작전이다. 꼭 인가해주고 싶다."

카와베가 작전계획에 인가를 해준 것은 무타구치가 "각하와 저에게는 이 전쟁의 근원이 된 지나사변을 일으켰다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작전을 성공시켜 국가에 면목이 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라고 그를 설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와베는 노구교 사건 이래로 무타구치와 줄곧 절친한 사이였기에, 방면군 고급참모 가타쿠라 다다시 소장의 진술에 따르면 "우리 군사령관은 개인감정에 치우치는 바람에 무타구치의 행동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남방군 테라우치 히사이치 사령관도 반쯤은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는지 지휘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를 하면서 통과시켰다.

"이 작전을 성공시켜서 교착 상태의 전국을 타개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작전같지도 않은 물건이 각종 결재단계를 통과하자 대본영의 사나다 참모장이 마지막으로 제동을 걸었다.

"비행기도 자동차도 없는 상황에서는 절대 반대다."
"작전 수행을 위해서는 도로건설을 위한 1년의 기간이 필요하고 이것이 불가능하면 해로수송을 위한 해군의 협조라도 있어야 한다."

당시 육군과 해군간 사이가 어떠했는지 고려하면 이러한 진언은 받아들여지긴 커녕, 찍혀서 모가지 당할 걸 걱정해야할 판이었다. 그런데 삼간사우로 악명 높았던 이 양반조차 자기 모가지 걸고 반대한 점에서 무능한 높으신 분이 보기에도 이 작전이 얼마나 대책없고 막장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삼대오물로 유명한 참모총장 스기야마 원수가 오로지 파벌만 생각하고 최종승인을 해버렸다.

"테라우치 씨 부탁이니 통과시켜주게."

그리고 천황 히로히토는 그렇게 올라간 보고서를 읽은 뒤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탄식하였다.

"이런 게 정말로 가능하긴 한 건가?"

히로히토, 즉 쇼와 덴노는 사실 어린 시절 학습원에 입학했을 때부터 군사 교육을 받았다. 심지어 참호전을 이해하고자 교사들이 궁궐 내에 기관총을 비치한 참호를 파려고 했을 정도. 학자 수준은 아니지만 고등과학교육은 물론 제왕학과 더불어 군사 교육까지 받은 터라 군문에 무지렁뱅이는 아니었다. 일시적으로 군사 교육 받은 사람이 장군들보다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다.

 

인도 찬드라 보세와 일본 도조 히데키

임팔 작전은 이런 군사적인 면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면도 있었다.

자칭 자유인도 임시정부 수상 찬드라 보세도조 히데키에게 약속을 한 것이 있었다.

"일본군이 인도를 공격하면 자신은 인도인을 선동해 영국군을 몰아내고 친일 인도 정부를 세우겠다"

이렇게 보면 찬드라 보세가 영악한 친일주의자로 보이지만 찬드라는 친독에 가깝고 인도의 지배자 영국에 맞서고자 추축국을 선택한 것이다. 연합군을 택했으면 처음부터 독립의 독 자도 못꺼냈을 것이고, 인도가 독립한 데에는 간디의 비폭력저항보다 찬드라 보세가 주도한 무력 저항이, 특히 찬드라가 이끈 군대가 영국을 공격하려 한 것이 더 결정적인 요소라고 보는 설도 있는 있는 만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편이 좋겠다. 사실 아일랜드도 영국에게서 독립하기 위해 나치와 손을 잡은 경력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북아일랜드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의용군 형식으로 독일에 지원한 '블루셔츠'라는 아일랜드인들이 있다.

도조 히데키도 당시에 다른 전장의 전황이 악화되어 정권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찬드라 보세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나머지 정권 유지를 위해 작전을 인가했다는 증언도 남아있다. 그때 찬드라 보세가 부릴 수 있는 '인도 국민군' 병사는 43,000명.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작전

그러나 대본영은 이 작전의 결행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제15군에게 명령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훈령을 내린 뒤 회의만 거듭했다.

시간이 흘러 9월 중순, 현지군에서는 준비 명령에 따라 사단별 담당 구역을 설정하고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세웠다. 동부 정면에 제18사단을 배치하여 연합군 진출을 방어토록 하고 제33, 제15, 제31 등 3개 사단으로 임팔을 침공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곧 일본군 특유의 보급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원래 15군은 병참부대 증강안도 함께 대본영에 제출했었다. 처음 계획안에서는 트럭을 보유한 자동차 중대 160개, 말들을 이용하는 치중병 중대 60개, 그리고 5개 공병 연대였으나 버마 방면군을 통과하면서 90개, 40개, 3개로 줄었고 다시 남방군을 거치면서는 26개, 14개, 2개로 더더욱 줄더니 드디어(?) 대본영에 제출될 때는 18개, 12개, 0개가 되었는데 그 이유가 "임팔만 먹으면 다 해결됨!"

제15사단 주력은 선박이 부족하여 중국 난징에 남아있던 병력 수송이 늦어졌다. 사단 병력은 육로를 개척하며 버마로 향하는 가운데 야마우치 사단장과 참모장만 버마에 도착했다. 문제는 이 사단은 전투 경험이 없는 부대였으나 이 작전의 주력부대가 되어야만 했다.

 

목욕탕 결재

이 와중에 현지군은 작전을 빨리 결정해 달라며 남방총군 작전부장인 아야베 소장을 도쿄로 보내 작전 실행을 촉구하기로 하였다. 끈질긴 설득에 대본영이 넘어가 작전 결정을 하고 12월 31일에 육군본부 군사과장 니시우라 대좌가 도조 히데키에게 결재를 받으러 갔는데 마침 도조는 목욕 중이었다.

그때 도조가 물은 것이 유명한 6개 조항이다.

1. 보급 문제는 해결 가능한가?
2. 현실성 있는 작전이냐?
3. 증원 병력이 더 필요할 일이 생기겠느냐?
4. 버마 방어에 공백이 생기겠느냐?
5. 상대의 공중-지상 입체 공격을 막을 수 있느냐?
6. 해상으로 연합군이 밀려왔을 때 막을 수 있냐?

모두 기본적으로 전략과 전술을 익혔다면 당연하게도 나오는 질문이었으나, 니시우라 대좌는 우물쭈물대면서 도조의 질문에 명쾌한 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꼴을 본 도조는 이런 것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서 무슨 결재를 요구하냐면서 버럭 호통을 쳤고, 그제서야 니시우라 대좌는 발등에 불이 떨어져 여기저기 연락을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연락을 넣고 나서야 "확인해보니 질문하신 것 모두 문제 없답니다"라 답했다. 도조는 그 모습을 보고 한심해 하면서도 될 대로 되라라는 식으로 사인을 해줬다.

야마호카 소히치의 소설 태평양 전쟁에서 지적하듯이 도조가 물은 건 상급자로서는 당연한 사항이었다. 문제는 저런 사항은 도조가 물어보는 게 아니고 무타구치 본인이 사전에 준비해서 도조에게 보고를 올리고 도조가 승인하는 것이 순서에 맞다. 즉, 저런 준비도 없이 기안을 올린 무타구치나 이걸 알고서도 사인해준 도조나 똑같은 놈들이다.

연합군의 반격 준비

물론 연합군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서부의 정면에는 길포드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 보병 3개 사단과 기갑 1개 사단, 윙게이트 공수부대 6개 여단이 배치되었고 북부에는 스틸웰 장군의 미, 중군 2개 사단 반, 동부에는 위립황 장군의 중국군 14개 사단이 배치되어 3방면으로 포위 태세를 갖추는가 하면 유력한 공군 부대도 공격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특히 중경으로 보낼 군수물자 수송로인 레도 공로(Ledo Road)를 건설하고자 알래스카 공로 2,500㎞를 8개월 만에 완성한 알로 스미스 공병대가 파견되었다. 이 레도 공로는 인도의 레도에서 중국 운남성 쿤밍(곤명)에 이르는 1,079㎞의 군용 도로로서 동북 인도의 유전지대에서 생산된 연료를 운반하기 위한 것이다. 비행기로도 충분히 수송이 가능했지만 비행기로 수송되는 연료=비행기 사용 연료였기에 연료 소비를 줄이기 위해 도로를 뚫은 것.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a/a0/Ledo_Burma_Roads_Assam-Burma-China.gif?width=600 

                                                          레도공로

 

레도 공로를 상징하는 유명한 '21 커브'. 정말 크고 아름다운 도로다(정확히는 레도 공로에 연결되어 있는 중국쪽 도로의 사진이라고 함). 저 사진을 보고 "왜 길을 구불구불하게 내요? 그냥 일직선으로 내지"라는 말이 많으나 저 도로는 산비탈에 낸 것이다. 당연히 일직선으로 내면 차량은 커녕 사람도 지나가기 힘든 지독한 내리막길이 되거나 지독한 오르막길이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연합군은 레도 공로를 '도쿄로 가는 길'이라 불렀으며 이 도로가 일본군 점령지를 가로질렀기 때문에 '싸우면서 건설하고 건설하면서 싸우는' 작전을 펼쳐야했다.

또한 스틸웰 장군은 태평양 방면의 해상공세에 호응하여 반격 작전을 개시하기 위해 중국군 90개 사단을 미국식 장비로 개편하는 작업도 추진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임팔 작전을 준비하면서 그 결행을 망설이고 있던 43년 9월말, 연합군의 선봉부대는 어느새 후콩 계곡의 북쪽에 나타나 계곡 일대를 정찰 중이던 일본군 1개 중대와 마주쳤다.

 

후콩 전투(Myitkyina battle)

후콩 계곡(Hukawng Valley)은 인도 국경을 따라 펼쳐진 동서 30~70km에 남북으로 200km나 뻗은 대정글지대로 우기에는 수많은 하천으로 급류가 흘러 도처가 늪과 연못으로 변해버리는 곳이다. 협곡은 온갖 부패물에서 나오는 독기와 코브라를 비롯한 독사, 도마뱀, 독거미, 전갈, 거머리들이 들끓으며 주변의 산지에는 표범이나 호랑이가 득실거렸다. 원주민들도 '맹수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1943년 10월 30일, 일본군이 계곡에서 마주친 것은 중국군 제38사단의 정찰부대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무타구치는 즉시 제18사단 예하 제56연대를 급파하여 중국군 제38사단을 포위하려 했다. 1개 사단 병력을 1개 연대병력으로 포위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군이 지금까지 만난 중국군과는 전혀 달랐다. 무장도 아주 잘 돼있었고 특히 왕성한 전투 의지는 일본군을 매우 놀라게 했다. 일본군 제56연대는 밀림의 중국군을 포위하여 압박해 들어갔으나 중국군은 전차와 중화기로 원통 진지(Admin Box)를 구축하여 공중 보급을 받으면서 방어하고 있었다. 이 원형 진지는 영국이 고안해낸 전법으로서 종래와 같이 방어진의 일각에 구멍을 뚫고 돌입하여 분단한다는 전법은 먹히질 않았다. 특유의 반자이 어택을 감행해 보았지만, 결과는 뻔했다.

결국 후퇴를 하게 된 일본군은 역시나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당시 중국 중앙일보의 종군기자로서 이 전투에 참가했던 장인중(張仁仲)은 당시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다.

"마인칸 교외에서 연합군에 투항해온 일본군의 영양실조는 놀라울 정도로 심했다. 개중에는 문자 그대로 굶어 죽기 직전인 자도 있었다. 먹을 것을 던져주니 몹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그것을 받아 먹었는데 10일이고 1개월이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은 나무 뿌리나 벌레를 잡아 먹으며 연명했다고 한다."

결국 제18사단은 작전이 종료될 때까지 현 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메릴의 약탈자들(Merrill's Marauders)

2월 19일, 프랭크 메릴 준장이 지휘하는 미군 혼성연대 2,900명이 전선에 도착했다. 이 메릴 부대는 영국군 윙게이트 병단에 자극을 받아 미국이 편성한 부대로 게릴라 훈련부대와 과달카날, 뉴기니의 실전부대와 미 본토에서의 지원병으로 편성된 특수부대였다. 카빈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바주카 등으로 무장한 이 부대는 버마 당나귀 700필에 군수물자를 싣고 현지에 도착했다.

스틸웰 장군은 그들을 반기며 자기 휘하의 부대와 합류시켜 마인칸 공격을 명했고 일본군 제18사단이 3월 5일을 기해 마인칸에서 철수하였으나 메릴 부대가 퇴각로를 차단하여 일본군은 340명의 환자를 등에 업고 정글 속을 굶주림과 말라리아에 시달리며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이 메릴의 약탈자의 전훈을 살려 유명한 그린베레가 탄생하게 되었다.

 

우호작전(ウ号作戦)

조공 : 하호작전(ハ号作戦)
일종의 조공으로 버마 남부에서 1944년 2월에 행해진 작전은 하호작전(ハ号作戦)이라 한다. 이것도 역시나 보급 부족으로 실패했다. 게다가 애초에 해당 방면은 한쪽이 바다고, 다른 한쪽이 험준한 지형인지라 방어하는 쪽이 100% 유리한 곳이었으므로 결국 조공의 의미도 없었다.

그런데 하호 작전을 앞두고 신통하게도 94식 산포가 영국군의 허리케인 전투기를 격추하는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 하호 작전 준비를 위해 여념이 없는 55 산포 연대의 진지를 향해 방심한 채 일직선으로 달려들던 허리케인의 총격에 1개 소대가 영거리 사격으로 대응하여 박살을 내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즉각 버마 방면군에 보고되었으며 지휘부는 임기응변의 훌륭한 사례로 전군에 하달하고 적 항공기 내습시에는 가능한 모든 화기를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도록 지시했다. 물론 그 이후에 명령대로 공습시 모든 화기를 쏟아부은 부대는 모두 전멸했다. 차라리 그냥 참호에 처박히는 편이 나았다고 한다.

 

우호 작전 개시

윙게이트 병단의 공격으로 일본군 후방이 어지러운 가운데 우호작전(ウ号作戦)은 개시되었다. 아무튼 무타구치는 이런 구상을 하달했다.

1. 제31사단은 남쪽에서 재빨리 국경을 돌파하여 북진, 연합군을 견제하면서 임팔로 향한다.
2. 그동안 제15사단과 제33사단은 기습적으로 친드윈강을 도하, 국경으로 향한다.
3. 견제당하고 있는 연합군의 허를 찔러 제15사단은 직선으로 임팔 동북부에 진출, 연합군을 포위한다.
4. 제31사단은 북진하여 코히마를 점령, 북쪽에서 임팔로 향하는 연합군 증원부대를 저지한다.
5. 코히마의 저지 작전에 성공하면 제 31사단의 일부를 임팔의 주전장으로 돌린다.
6. 이 공략 작전은 20일 이내에 끝내기로 하고 전체의 작전 개시일은 3월 15일로 하되 그중 제33사단의 행동 개시일은 3월 8일로 한다.

이 임팔 작전의 기한은 병사 개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식량에 맞춰서 작전 기한을 정한 것이다. 당시 지고 가야만 했던 무게만 40kg. 보급된 양은 소총탄 240발, 수류탄 6발, 그리고 20일 간의 식량, 조미료 등이었다. 현대전 들어와서 병참이 작전의 중요 요소이고 그래서 작전에 종속적인 수준이 아니라 작전의 한계나 성패를 좌우하는 수준이다. 고로 보급 한계에 맞추어서 작전을 계획한 것 자체는 개념상 맞는 것이고 위에서 보다시피 일본군도 보급의 중요성을 알고 제대로 된 보급 계획을 초안에 실었고 군수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한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작전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수준으로 병참을 준비한 것도 아니고 보급 수준에 맞춰서 작전을 짠 것도 아니라 작전을 짜놓고 거기에서 보급에 맞춰서 실행하라고 하니 제대로 될 턱이 없다.

당연히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친드윈 강을 건너면서 각 사단은 사단이 데리고 있던 동물의 약 1/3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아라칸 산맥(버마와 인도 국경에 있는 산맥으로 산맥 서쪽에 임팔이 있다.)으로 접어들자 병들어 죽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고 포격에 놀라 도망가고 하면서 동물의 손실 수는 계속 늘어났다. 결국 제31사단의 경우 친드윈 강 도하 이전에는 125마리의 를 가지고 있었지만 21일 후 코히마에 도착했을 때는 불과 5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 그 동물들이 죽는 바람에 도착한 개인 탄약의 양은 계획의 절반 뿐이었다.

이 임팔 작전에 참가한 3개 사단 중 가장 약체로 평가되는 것은 제15사단이었다. 타이에서 도로건설 작업을 하다가 미얀마까지 자력행군해온 데다가 중화기를 비롯한 각종 화기도 부실하여 야포라곤 31식 산포 18문을 보유하고 있는게 전부였다. 게다가 사단 전체가 작전에 투입된 것이 아니어서 임팔 작전에 나선 사단장이 자기 사단의 병력을 전부 장악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작전 개시 직전에 사단의 중추인 작전주임참모와 보병단장이 서로 보직을 맞바꾸는 괴상한 인사이동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무타구치의 질타와 독촉에 못 이겨 무리한 돌진을 강행, 3월 28일 임팔의 북면에 가까스로 도달했다. 이것은 코히마와 임팔 사이를 차단하는 것이며 연합군 보급에 큰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영국군의 낚시질과 일본군의 오판

영국 제14군 사령관 윌리엄 슬림 중장은 즉시 대비책을 마련했다. 슬림 중장은 우선 아캡 방면에 있는 제15인도군단 중에서 제5인도, 제7인도사단을 빼내어 임팔과 데마풀에 파견하는 동시에 제33인도군단에서도 제2사단과 제50인도전차여단을 증파하는가 하면 제14군의 예비대 인도전차사단도 이 지역에 투입했다. 그리고 현지의 제4군단에게도 임팔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제4군단 예하의 제17인도사단은 이미 일본군에게 퇴로가 끊겼고 제23인도사단도 우크룰 남쪽에서 포위당하고 말았다. 이어 제23인도사단은 암호문서 등을 소각한 뒤 그 일부가 탈출에 성공했으나 일본군 제33사단의 사사하라 연대와 대치중인 제17인도사단은 좀처럼 퇴로를 발견할 수 없었다. 제17인도사단은 개전 초부터 일본군 제33사단과 맞서 싸워왔으며 지난 2년 동안에는 무려 30회 이상이나 교전한 경험 많은 베테랑 부대였기에 인도 주둔 영국군 총사령관 해군 원수 루이스 필립 마운트배튼 경도 부대의 탈출을 독려하려고 했다.

이때 제4군단장 스컨즈 중장은 이 사단의 철수를 위해 기발한 구상을 하였다. 제23인도사단 중 1개 연대만을 철수시킨 후 나머지 병력으로 제17인도사단의 구원 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3월 14일, 제23인도사단의 철수연대가 위치하고 있던 곳은 토이톰 고지의 어느 산허리였다. 연대는 지금 수많은 트럭과 전차를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임팔로의 철수였다. 바로 그 철수 행렬이 산허리를 거의 통과하고 있을 때 일본군 정찰부대가 그것을 발견했다. 정찰부대는 이 사실을 곧 연대 본부에 보고했고 연대장 사쿠마 대좌는 제33사단장 야나다 중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영인군이 총퇴각했다"라고.

그 말에 사단 사령부는 전선 근처까지 이동했고 철수했다던 제17인도사단은 철수는 커녕 압도적인 포화를 퍼붓고 있었다. 수많은 전차가 전차포로 일본군의 최일선 진지를 쑥밭으로 만드는가 하면 날아드는 보고라는 "영인군의 증원부대가 계속해서 전선에 도착하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러던 3월 23일 밤, 야나다 중장은 사사하라 연대로부터 문제의 전보를 받았다.

"본 연대는 암호서류를 소각하고 군기를 파기한 후 전원 옥쇄의 각오로 분투하고 있음."

이 전보를 보고 야나다 사단장은 "연대 전멸이구나!"라고 생각해 철수를 명령했지만 사실은 "죽을 때까지 싸워보겠음"이라는 의미였고 그 결과로 영국군은 무사히 철수했다.

 

반성 전보

인도군의 철수를 알게 된 무타구치는 길길이 날뛰었고 27일에는 야나다 중장에게 나중에 반성전보라고 불리게 될 전보까지 받게 되었다.

"본 사단은 군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함. 그러나 다른 사단 방면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근본대책을 강구해주시기 바람."

①본 사단 방면의 정보는 거의 대부분이 비보이며 금후의 작전은 극히 곤란할 것이 예상됨. 따라서 20일만에 임팔을 공략한다는 것은 절망적 상태임. 우기의 도래와 보급의 곤란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임.

②아군의 편성과 장비는 극히 열세에 있고 적군과 비교한 종합적 전력이 불충분하므로 헛되이 인명을 소모할 뿐이라고 판단됨. 이제 임팔 공략은 불가능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고 있으며 설령 그 공략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금후의 방어는 어려울 것임.

③미토키나 방면에 적의 공정부대가 투하된 것은 거의 진공 상태에 이르고 있는 미얀마 본토를 위태롭게 할 것임.

"이건 미친 짓이야. 당장 중단해야 해"라는 의견인데 당연히 이 의견을 무시한 무타구치는 자신의 감정이 그대로 실린 명령문을 보냈다. 이 전문을 받은 야나다 중장도 감정적으로 거부의 답문을 보냈다. 야나다의 답문을 받은 무타구치는 분노하여 다시 전진을 명했다. 야나다도 지지 않고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답문을 보냈다. 작전 이전부터 무타구치는 자기 의견을 따르지 않는 사단장들을 무시했고 심지어 도상훈련 때는 사단장 없이 참모들로만 훈련을 했다!

결국 명령을 받은 대로 전진을 계속했다만 그는 부대를 3대로 나누어 선대가 먼저 목적지를 정찰하고 중대가 따라가고 후대는 선대와 중대가 떠난 뒤 얼마동안 남아서 후방을 살피는 안전 위주의 전진이었고 결국 4월 22일, 무타구치는 격노하여 직접 제33사단을 찾아 사령부에 뛰어들어 참모들의 눈 앞에서 일반 사병을 대하는 식의 거친 말투로 야나다 중장을 몰아붙였다!

결국 화가 난 무타구치는 야나다 중장을 해임시키고 그 후임으로 자신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인물인 다나카 중장을 제33사단장으로 앉히기로 결정했고 이런 사태가 전개되자 버마 방면군 사령관 가와베 중장은 난처해했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사단장을 교체하는 이런 일이 있어도 되는가? 하지만 전선 사령관인 무타구치의 의견을 중시하기로 하고 5월 15일자로 야나다 중장을 해임하고 다나카 중장을 그 후임에 임명했다. 그리고 제15사단 야마우치 사단장 역시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시바다 중장을 임명했다. 야마우치 중장이 해임된 이유는 그가 앓고 있는 폐병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무타구치의 작전에 은근히 반대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비센푸르(Bishenpur) 전투

가까스로 33사단은 임팔평야의 입구까지 도달했지만 비센푸르 요새에 부딪친 제33사단은 우선 남아있는 소형 전차를 앞세워 요새를 돌파하고자 했으나 영국군의 포화 앞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자 신임 다나카 중장은 남아있는 화력을 모두 집중하여 요새를 격파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제33사단의 포병 화력은 불과 150㎜ 유탄포와 100㎜ 캐논포 몇 문이 고작이었고 그것도 영국군의 포화 앞에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심지어 반자이 어택으로 이불에 수류탄 여러개를 싸서 전차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공격을 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고 마침내 비센푸르 요새의 언덕을 일본군의 시체로 메워 그것을 엄폐물로 삼아 진지를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러일전쟁 당시의 노기 마레스케의 전법, 즉 203고지의 재현이 시작됐던 것이다. 결사대가 모집되어 자살 돌격을 감행했지만 비센푸르의 방어선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6월로 접어들자 포탄이 바닥나고 병사들은 굶주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동안 영국군의 병력은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보급물자를 실은 수송기가 영국군 진지의 상공에 대편대를 이루어 왕래하는 모습이 일본군의 눈에도 띄었다.

결국 다나카 중장은 SOS를 쳤지만 대본영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전투기 24대를 미얀마 전선에 파견할 것임. 단, 10일간만 사용 후 즉시 원대로 복귀시키도록 할 것."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에서 전투기 24대란 적이 오지도 않는 후방에서나 경비로 쓸 수준이지 일선에서는 제대로 된 전력도 되지 않는 한줌의 병력에 불과하다. 이런 수준의 지원을 지원이랍시고 시간제한까지 주면서 준다는 것 자체가 대규모 작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공군의 지원을 배제하고 싸워왔다는 소리다. 당시 이미 연합군의 비행기는 3,000기가 넘어가고 있었다.

 

코히마 점령과 테니스 코트의 전투

그런 와중에 임팔 작전의 최우익을 담당한 제31사단의 임무는 2가지였다. 코히마의 점령과 임팔로의 증원군 저지이다. 이 코히마는 인도 아삼주의 수도 디마푸르과 친스키아 방면에서 오는 도로가 합쳐져 임팔로 향하는 요지이다. 따라서 코히마를 점령하는 것은 임팔로의 길을 차단하는 것이다.

사토 고토쿠 중장이 이끄는 제31사단이 친드윈 강을 건넌 것은 3월 15일이었다. 여기에서 좌익 돌진대인 제31보병단장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소장이 지휘하는 제58연대로 구성된 '미야자키 지대'가 4천명의 병력으로 코히마를 향해 본대와 나뉘어 돌진했다. 미야자키 부대가 아라칸 산맥으로 접어들었을 때 미야자키 소장은 병사들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기상천외한 발상을 해냈으니 그것이 바로 염불이었다. 인도로 가는 원정길이니 염불을 외며 산을 올라가라 그의 명령에 일본군은 염불을 외며 아라칸 산맥을 넘었다.

미야자키 부대가 코히마 외곽에 도달한 것은 4월 5일이었다. 여기서 휴식한 미야자키 부대는 6일 새벽 4시 반에 코히마를 기습하였고 코히마를 지키던 영국군은 자신들의 계산보다 2주일이나 빨리 일본군이 나타난 것에 당황하여 코히마에서 부근 고지로 철수했다. 이때 미야자키 연대장은 부하들의 총을 몽땅 버리게 한 다음 노획한 영국군 무기를 장비시켰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아주 현명한 조치였다.

그 와중에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테니스장 양 끝에 서로 참호를 파고 서로 총격전을 벌이고 수류탄 던지기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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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코트의 전투(위키피디아)가 벌어진 곳.

이 회전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전투가 중요한 이유는 안습했던 임팔 전투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제대로 싸웠다고 할 만한 전투를 했기 때문이다. 즉 이 외에 전투는 전부 일방적인 학살이나 자멸이었다는 것.

결국 압도적인 영국군의 화력에 부대는 밀려버렸고 공방전 10일만에 일본군은 절반으로 줄었고 식량도 다 떨어졌다. 일본군은 이제 영국군의 수송기가 뿌리는 보급 낙하산이 자기네들 쪽으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보급이 사실상 사라진 일본군은 이것을 '처칠 급여'라고 불렀을 정도다. 결국 굶주림과 백병전으로 미야자키 부대는 전멸해버린 중대가 3개나 있었다. 미야자키 부대의 병력은 5월이 되자 원래의 1/4로 감소한 형편이었고 사토 사단장은 미야자키 부대의 자살 돌격을 금지하면서 방어 태세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대재앙

공격 중단

전선 보급로는 완전히 막혀버렸고 제5비행사단장 다조에 중장에게는 사토 중장으로부터 애처로운 전보가 날아들고 있었다. 이어서 제15사단장 시바다 중장의 전보도 날아들었다.

"이제 본 사단은 호우와 진흙탕 속에서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전투력을 상실하고 있음. 제1선 부대로 하여금 이런 지경에 빠지게 한 것은 실로 제15군과 무타구치의 무능이 그 원인임."

4월 28일, 무타구치는 랑군에서 파견된 방면군 군수참모 우시로 소좌 앞에서 마침내 이 작전의 불가능함을 시인하게 된다. 그리고 우기가 닥쳐왔고 제15군 예하 병력에게는 단 1발의 총탄도, 1톨의 쌀도 보급해줄 수 없게 되었다.

4월 30일, 우시로 소좌는 랑군으로 돌아가자마자 대본영에서 전선 시찰을 위해 파견된 스기다 참모에게 임팔전선의 상황을 보고했다. 그리고 임팔전선이 가망없음을 보고한 후 5월 말까지 작전을 계속한 후 그 뒤에도 전황에 변화가 없을 때는 작전을 중지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스기다는 가와베 등 방면군 사령부의 막료들이 말한 임팔전선의 승리 가능성과는 반대되는 의견인지라 우시로에게 자세한 현지 상황을 듣고 나서야 그의 말을 믿게 되었고 이러한 것을 대본영에 보고했다.

그러나 이 보고를 듣고 나서 현지로 파견된 방면군의 주임참모와 남방총군의 작전주임참모는 '작전 수행 가능'이란 대답만을 들었을 뿐이다. 즉, 무타구치는 속으로는 임팔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지만 상급부대 앞에서 허세를 부렸던 것이다.

 

연합군 반격

일본군이 이런 곤란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스틸웰 장군이 지휘하는 중국군 제38사단과 제20사단은 천천히 카마인에서 모가운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선발대인 제5307연대는 5월 17일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미티나 비행장을 탈환했다. 이와중에 윙게이트 장군이 비행기 사고로 전사했지만 윙게이트 병단은 전의를 잃지 않았고 제14여단을 증원하여 육상으로 남하하는 제16여단과 호응하여 철로 폭파와 함께 핀봉 부근의 일본군 군수품 창고를 불살랐다. 일본군의 혼란을 확인한 마운트배튼 제독은 5월 11일, 제14군 사령관 슬림 중장에게 일본군 제15군에 대한 총공격을 명했다.

이때 일본군들은 이런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1절: 낮에는 비행기 밤에는 박격포, 비처럼 쏟아지는 포탄 아래로
오늘도 나가는가 육탄공격대, 나라 위한 일이지만 아아 코히마

2절: 비 내리는 아라칸을 한정도 없이, 어깨에 들것 메고 방황하지만
주린 창자 메워줄 보급은 없어, 오늘도 끼니 찾아 이동이라네

(후렴구) 이거 정말 고생이에요.


일본 본토의 도조는 5월 17일, 덴노에게 작전 진행은 순조로우므로, 불굴의 정신을 다하여 건투에 임하겠나이다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미 4월 말에서 5월 중순에 걸쳐 남방전선을 시찰하고 돌아온 하타 히코사부로 참모장이 "임팔 작전의 미래는 극히 곤란해 보인다."는 시찰 보고를 올렸었지만, 도조는 이 보고를 듣자마자 "나약한 생각"이라며 버럭 화를 냈다. 일본 본토에 화려하게 전해졌던 작전 초기의 성과는 전황의 악화로 정권이 오늘 내일하던 도조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고, 임팔 작전의 성공 여부에 도조의 정치 생명이 달려 있었으므로 하타가 시사한 작전중지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31사단장, 항명 선언

뼈만 남은 부하들이 굶어 죽어가면서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는 노래를 부르는 참상을 본 31사단장 사토 고토쿠 중장은 결국 폭발, 제15군에 식량 보급을 요청하는 전보를 치고 곧이어 이번 작전의 잘못을 낱낱이 열거하고 즉시 작전 중지를 요구하는 전보를 쳤다. 이 전문에는 사토의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러나 제15군의 답신에는 보급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없이 단지 공격을 계속하라는 명령만 있을 뿐이었다.

보급을 이유로 철수를 요청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음. 무슨 일이 있어도 현 위치를 사수할 것. 임팔 점령 후, 본 군은 반드시 귀 사단이 코히마를 점령한 노고를 보상해줄 것임.

이에 사토 중장은 이런 전문을 보냈다.

공격 계속 명령 접수했음. 그러나 명령만으로 병력이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귀하의 사고방식이야말로 이 작전을 실패로 이끌어 가는 중대요인이 되고 있음. 눈앞의 본 사단 1만 장병은 아사 직전 상태에 놓여있음. 탄약은 고갈되어 맨손의 병력으로 화해버렸음.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것은 모두가 귀 제15군에게 그 책임이 있음. 귀군은 이상 사실을 판단, 반성하여 본 작전을 즉시 중지함으로써 폐하의 적자들을 개죽음으로 이끄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과감한 조치를 강구하기 바람.

이렇게 전문이 계속 오가자 15군 참모들이 5월 28일 사토 중장을 달래기 위해 찾아왔지만 오히려 "너희들은 무슨 낯짝으로 여기 왔느냐! 우리들의 적은 영국군이 아니야. 바로 너희들 제15군이란 말이다!" 라고 길길이 날뛰면서 규탄하는 바람에 찍소리도 못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결국 사토 사단장은 독단적으로 철수하기로 마음먹고는 참모진과 부하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질러버린다.

지금 우리 사단의 위에는 3개의 머저리 집단이 있다. 제15군과 미얀마 방면군과 남방총군이다. 이런 머저리들 믿고 기다리다간 우리 사단이 전멸하고 말 것이다. 이에 본 사단의 퇴각을 본관 책임하에 독단 결행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5월 31일 밤, 영국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고 코히마를 지키고 있던 마지막 부대가 최후를 알리는 고별 무전을 보내오자 사토는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먼저 부상병 1,500명의 후송을 명한 뒤 좌익부대장이었던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소장에게 병력 600명을 맡겨 후퇴 엄호를 명한 다음 6월 3일 사단내 각급 간부를 소집하여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때 미야자키 소장은 전혀 일본군스럽지 않은 작전을 통해 31사단을 무사히 탈출시켰고 엄호부대도 탈출에 성공했다.

그렇게 제31사단의 독단 퇴각이 시작되었다. 제31보병사단의 중앙돌파부대인 제138연대장인 토리카이 츠네오 대좌는 코히마 방면에서 철수할 당시 피로로 인해 무거운 소총을 버리는 병사 뿐만 아니라 군복 단추까지 뜯어 무게를 줄이려던 병사들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그나마 31사단의 후퇴가 다른 사단에 비해서 순탄했던 것은 31사단이 전진할 때 주민들을 약탈하지 않고 교섭을 통해 정당한 방법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물자를 입수한 덕이었다. 그때문에 31사단이 패퇴할 때도 원주민들은 그들을 가엾게 여겨 약간의 식량을 제공해주거나 휴식처도 내주었지만 다른 사단들은 진군 과정에서 원주민 마을을 약탈하여 식량을 획득했기 때문에 철수 과정에서 도움을 받기는 커녕 그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으며, 원주민들은 연합군에게 정보를 넘겨주기도 했고 밤에는 횃불로 연합군의 전투기를 유도해주기도 했다.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퇴각이었던 것이다.

 

항명의 충격

31사단 병사들에겐 사토의 퇴각이 희소식이었지만 무타구치에겐 날벼락이었다. 6월 6일, 버마 사령관 가와베가 무타구치를 찾아왔지만 둘 다 아무 말도 못했고 달라진 것도 없었다. 그 이유가 참 어처구니 없었다.

가와베 - 무타구치 중장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무타구치 - 나는 가와베 장군의 참된 심중은 작전 지속에 대한 나의 생각을 떠보기 위한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그것을 장군에게 실토할 수 없었다. 나는 다만 먼지투성이인 내 풍모를 보고 장군이 알아차려 주기만을 바랐다.

가와베 - 나는 랑군으로 돌아왔다. 내 눈에는 귀기 어린 빗속에서 일선을 지키고 있는 장병들, 특히 파렐 전선에서 악수를 나눈 인도 국민군 장병들의 모습이 역력히 떠올랐다. 만일 냉정하게 이 전황을 판단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이미 이때 작전 중지를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전에는 나의 생각 이외에보다 더 큰 성격이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으로 최후까지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무타구치 - 저는 작전이 실패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상부에 보고를 할 수 없었기에 작전을 그대로 진행하면서 명령이 하달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전후 미군의 심문을 받으면서 진술한 내용).

가와베 - 이 작전은 내 시야를 벗어나 뭔가 커다란 의미대한독립가 있다. 이 작전에는 일본과 인도 양국의 운명이 걸려 있다. 찬드라 보스와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시가 시급한 상황에서 서로 연인도 아닌 사람들이 누가 곤란한 말을 먼저 꺼낼 것인가를 두고 서로 미루기만 했다. 그리고 사토 중장은 후퇴지에도 식량과 탄약이 없자 격노하며 계속 후퇴했고 무타구치는 사토 중장이 자신을 만나러오자 자결해버리라며 단도를 남겨두고 정작 자신은 숨어버리는 추태를 보였으니, 사토 중장은 "무타구치를 이 칼로 죽여버리겠다"며 그 칼을 갖고 가버렸다.

결국 6월 20일, 무다구치는 사토를 해임해버렸지만 사토 중장은 이미 각오하고 있던 일이고 군사 재판이 열린다면 그때 제15군과 무타구치의 잘못을 낱낱이 규탄할 작정이었다. 근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정작 정신병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입을 막기 위해 연금당하는 것이었다.

사토 고토쿠는 1959년에 죽을 때까지 '독단으로 철수한 불명예스러운 군인'이자 '임팔 작전 패배의 원인'이라며 높으신 분들로부터 비난받았지만 31사단의 부하들은 그가 자신들을 살렸다며 감사의 뜻으로 추모비를 바쳤다. 그리고 현재 그 항명 행위는 비난받을 짓이 아닌 부하들을 살린 행동으로 평가받는다. 군대의 항명 행위가 범죄가 아닌 정당한 행동으로 평가받았다.

 

작전 중지와 백골가도

5월 말. 임팔 북부를 공략하던 일본군 제15사단도 병사들이 인근 마을을 약탈(할 수 있던 일본군 부대는 차라리 운이 좋았을 정도)하거나 보급품을 자체 조달하기 위해서 진지를 내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리고 6월 22일 33인도군단이 포위망을 뚫고 임팔의 제4군단과 상봉함으로서 일본군의 우호작전은 사실상 끝이 났다.

일본군(정확히는 무타구치 중장)은 이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일본군 제33사단에 보충병 1개 연대를 보강시켜 인도군 제17사단 지역을 돌파하려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일본군 제15사단과 야마모토 부대도 더 이상 공격을 펼칠 능력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6월 말, 마침내 무타구치는 작전 중지를 결정하고 그 뜻을 방면군에 올렸다. 그러나 방면군은 "이런 소극적인 의견을 접할 줄은 몰랐다."면서 오히려 제 15군에 계속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 이유가 정말 가관인데, 무타구치가 절망과 죄책감에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한 가와베 방면군 사령관이 일부러 공격 명령을 내려 무타구치의 기분을 맞춰 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타구치가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부대가 움직이지도 않는 사태에 직면한 상황에서 작전 중지 외에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없었다. 방면군은 마닐라에 주둔하고 있던 남방군에 고급참모를 파견하여 작전 중지의 의향을 전달했다. 7월 2일, 마침내 남방군은 임팔 작전의 중지를 방면군에 명령하게 된다. 결국 작전 개시 4개월이 지난 7월 3일 우호 작전을 중지하고 투입했던 부대를 모두 철수시켰다. 가와베에 따르면 작전 중지를 생각하기 시작한 지 무려 2개월이 지난 후였다고 한다. 가져갈 수 없는 무기와 장비는 모두 내버려졌으며 심지어는 움직일 수 없는 중상자와 병자도 버리고 철수했다.

퇴각에 임한 병사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며 육상과 공중에서 영국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보급이 끊긴 지 오래되어 병약해진 탓에 말라리아와 장염에 걸린 환자들이 차례차례 일행에서 낙오당했다.

영국군의 기동병력이 추격하자 퇴각로는 점점 더 많은 무수한 전사자와 아사자, 병사자의 시체와 백골들이 쌓여갔는데 열대 우림의 습하고 더운 기후 때문에 시체는 3일만 방치해도 피부가 다 썩어서 탈골됐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영국군은 전염병의 창궐을 우려하여 추격을 멈추었고 생사를 불문하고 석유를 끼얹어 길가에 널부러져 있던 일본군들을 소각 처리했다.

비바람에 씻겨 하얀 뼈가 드러난 동료들의 시체들을 보고는 병사들은 '백골가도(白骨街道)' 또는 '야스쿠니 가도(靖國街道)'라고 불렀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전사자 위패는 모두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졌으니까 죽어서 야스쿠니로 가는 길이라는 이름으로 붙였기 때문이다.

 

 

작전 결과

 

일본군은 전사자 32,000명, 병사 및 아사자 40,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이는 각 사단마다 90%에 가까운 손실로
전멸이나 다름없는 대패였다. 반면 연합군의 피해는 사상자 17,500명에 불과했다.

작전 책임자인 무타구치는 15군 총철수 이전에 퇴각로 '시찰'을 명목으로 먼저 도망간 사실이 드러났지만 겨우 예비역에 편입되는 경미한 징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육군 예과 사관학교 교장으로 승진했다. 이런 일련의 사태만 봐도 구 일본군이라는 게 얼마나 제정신이 아닌 집단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토의 철수에 대해 군법회의가 열렸지만 임팔 작전 실패의 요인이 그의 철수 때문이라 취급하고는 그 책임 추궁을 미루었다. 이는 제15군, 버마방면군 등 상부조직과 군 장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결과적으로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 간 임팔 작전의 실패 책임과 소재를 육군 상부가 스스로 감추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자신도 병을 얻어 후송된 야마노우치 마사후미 사단장은 임종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공격할 탄환도 없고 지금은 호우와 진흙 속에서 병과 기아에 전투력을 상실했다. 제1선부대가 처한 이런 현실은 군과 무타구치의 무능탓이다."

임팔 작전의 실패로 인해 호각지세였던 일본군의 버마-벵갈 전선은 붕괴해 1945년 3월에는 아웅 산 장군이 이끄는 버마국방군이 일본군을 몰아내는 결과를 초래해 일본은 버마를 잃는 결과를 맞이했다.

 

무타구치 렌야의 각종 일화

  • 임팔 전선의 전황이 악화되던 당시 자신은 전선 지휘부 옆에다 기생집을 차려놓고 무조건 오후 5시 땡~ 하면 업무마치고 기생집에 들어가서 마시며 노느라 나오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황이 한참 악화되자 전선 지휘도 제대로 안하는 주제에 사령부 옆에다가 제단을 쌓아두고 신불에게 이기게 해달라고 비느라 그나마 주간에 하던 업무 처리조차 전부 뒤로 밀어버렸다.
  • 휘하 병사들은 그에게 "적보다 무서운 바보 대장" 혹은 "귀축 무타구치"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각하가 좋아하시는 건 첫째가 훈장, 둘째가 메마, 셋째가 기자"라는 노랠 만들어 불렀다.
  • 임팔 작전으로 9만 2천명의 병사를 전투도 제대로 하지 않고 1만 3천명으로 줄여버린 팀킬에 성공한 무타구치 렌야는 "아놔 책임감 느낀다. 콱 자결해 버릴까?"라는 상투적 발언을 내뱉었다. 그러나 수석부관이 ...
    "옛부터 나 죽어 죽어 하는 사람치고 진짜 죽고 싶어서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령관님이 저한테 할복하겠다고 말씀하셨으니 저는 부관의 책임으로 일단 '형식적'으로라도 말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령관으로서 정말 책임을 느끼신다면 그냥 닥치고 배를 가르십시오. 아무도 안 말립니다. 신경쓰지 마시고 배를 가르십시오. 이 작전의 실패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라며 권총을 내밀자 무타구치는 그를 노려보고는 살아갈 의지를 곧추세웠다.
  • 게다가 겨우 살아돌아온 생존자들이 간신히 안전지대에 들어오자 장교 전원을 집결시켜 1시간 넘게 훈시를 하는 바람에 영양실조 상태에 있던 장교들이 쓰러져 기절하거나 심지어 사망한 사례조차 있었다. 아무리 영양실조 상태였다지만 일반 병사도 아니고 그래도 사정이 좀 나았을 장교들이.... 그리고 이때 한 연설에서...
    "사토 그 놈은 무기가 없어서, 총알이 없어서, 쌀이 없어서 도망쳐왔다. 이게 말이 되는가. 총이 없으면 대검이 있다. 대검이 없다면 이빨이 있다. 야마토 정신을 잊었는가.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라는 말이 나온다.
  • 15사단장도 31사단장과 비슷하게 작전 취소를 건의했다고 경질되었는데 새로 임명된 15사단장이 장교들의 군도를 검사하니 전부 녹이 슬어있다고 화를 냈다. 하지만 장교들이 살고 있던 곳은 항상 물이 차있는 참호였으니 녹이 안 슬래야 안 슬 수가 없었다. 보급품이 부족해 비가림도 못했다. 녹이 스는 건 둘째치고 그 물바다 위에서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참...
  • 전쟁 이후 영국이 그래도 임팔을 친 건 연합군의 의표를 찌른 좋은 발상이었으며 임팔 전선이 유지되었으면 연합군으로는 매우 고전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물론 당시 일본군이 임팔을 점령할 능력도 전선을 유지할 능력도 없었다는 것을 빼면"이라고 말하며 조롱했다.
  • 임팔 전선에 투입된 부대 중에는 남방 전선(남태평양 지역)에서 이동된 부대도 있었는데 그 중에는 과달카날 전투에서 굶어 죽을 뻔한 부대도 있었다. 과달카날과 임팔에서 모두 살아남는데 성공한 운좋은 병사는 "과달카날보다 더 끔찍하다!"라는 말까지 남겼다.
  • 무타구치는 죽을 때까지 임팔 작전이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교훈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즉 1944년의 임팔 작전이 없었다면 동남아 전선의 붕괴는 더 빨랐고 더 파멸적이었다는 말씀. 그러나 1945년의 영인군의 버마 진공은 원래 계획에 없었다. 즉, 다시 말해 임팔에서 일본군이 말아먹은 몇 개의 정예사단 때문에 급하게 진공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러한 약체 일본군의 저항과 우기에 대한 우려로 버마 진공 역시 간신히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오히려 임팔 전투 때문에 동남아 전선의 붕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확하다.
  • 전쟁이 끝난 뒤에 임팔 전투의 일본군 전몰자 유족들이 위령제를 지낼 때 그 자리에 나타나서 <임팔 전선의 패배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부하들이 잘못 싸운 것>이라는 유인물을 나눠주려다가 물세례를 받았고 이후로 이 전선에 참여한 부하였던 사토 고토쿠미야자키 시게사부로 같은 옛 부하가 죽었을 때도 장례식에 출몰하여 똑같은 짓을 저지르다가 유족들에게 욕설과 같이 멱살을 잡히고 바깥으로 내쫓겼던 적도 있었다. 심지어는 죽기 전 마지막 남긴 말도 "내가 잘못한 게 아냐. 부하들이 잘못한거야!(私は悪くない、部下が悪い!)"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으며 이후 자기 장례식에서조차 유족들에게 '임팔 전선의 패배는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다른 놈들이 못나서 실패한…'이라는 유인물을 돌리게 했다고 한다.

 

 

결과

 

일본군은 영연방군 2개 사단과 중화민국 제5,6군을 앞세워 방어하던 연합군을 뛰어난 전술과 기동성으로 압도하여 패퇴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은 때마침 우기가 닥쳐오고, 타 전선보다 많은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작전을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5월 20일경 버마의 대부분을 장악하는 것으로써 초기 전투를 끝냈는데, 이 동안 연합군은 무려 약 900마일이나 되는 장거리 철수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보급로가 끊긴 중국은 이로부터 버마의 정글 속에서 결사 항전의 의지로 일본군에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추축군으로써 전투에 참가한 버마 방위군 역시 영국보다 더 강압적이고 잔혹한 일본의 통치에 못이겨 아웅산을 중심으로 하는 반일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결국 1944년 3월부터 같은해 7월에 걸쳐 인도로 들어가는 임팔에서 영국군과 일본군이 전투를 벌였으나(임팔 작전) 무다구치 렌야 중장의 부족한 리더십, 차단된 보급로, 정글의 더위 등을 뚫지 못한 일본군이 패퇴하였고 급속도로 일본군의 사기는 저항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