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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33 : 일제강점기 78 (태평양 전쟁과 일제의 패망 4)

 

 

 

 

한국의 역사 1,033 : 일제강점기 78 (태평양 전쟁과 일제의 패망 4)

 

           

 

 

 

과달카날 전역

 

과달카날 전투( - 戰鬪, 영어: the Battle of Guadalcanal)이라고도 알려진 과달카날 전역( - 戰役, 영어: Guadalcanal Campaign)은 1942년 8월 7일부터 1943년 2월 9일까지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선에서 일어났던 전투이다. 이 회전은 육해공 모두에서 일본군과 연합군이 싸웠으며 태평양 전쟁의 결정적인 회전이었다. 전투는 남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 섬 근처에서 벌어졌으며 일본 제국에 대한 연합군의 첫 번째 공세였다.

 

1942년 8월 7일 연합군은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사이의 보급선을 괴롭히려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주로 미군으로 구성된 부대로 남 솔로몬 제도에 위치한 과달카날, 투라기, 플로리다 섬에 초기 상륙을 실시했다. 또한 연합군은 과달카날과 투라기를 라바울과 뉴 브리튼에 위치한 일본군 주요 진지를 고립시키기 위한 회전을 지원하는 섬으로 쓰고자 했다. 초기 연합군 상륙은 일본군 방어자를 수로 압도했으며 뒤에 핸더슨 비행장이라 이름지어지는 비행장과 투라기와 플로리다를 함께 확보했다. 이 비행장은 일본에 의해 과달카날에서 건설중이었다.

 

연합군의 공세에 놀란 일본군은 8월부터 11월 사이에 투라기와 과달카날의 핸더슨 비행장을 탈환하기 위한 몇 번의 시도를 행했다. 이 시도들은 3번의 주요 지상교전과 5번의 해전, 거의 매일 계속되는 항공전을 포함한 몇 번의 주요 교전들을 불러왔으며, 1942년 11월 초에 과달카날과 핸더슨 비행장을 탈환하려는 일본군의 시도가 실패한 과달카날 해전으로 매듭지어졌다. 1942년 12월에 일본군은 과달카날을 탈환하려는 더 이상의 시도를 포기하였고, 1943년 2월에 섬을 연합군의 수중에 남겨놓고 잔여 병력을 성공적으로 철수시켰다.

 

과달카날 회전은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군에 대한 연합군의 첫 번째 전략적 제병 승리로 두드러진다. 이런 이유로 과달카날 해전은 종종 전쟁의 전환점으로 일컬어진다. 이 회전은 연합군이 방어적 작전에서 전략적 공세로 전환하는 동시에 일본군은 전략적 방어에 치중하게 만들었다.

 

 

 

 

과달카날 전역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의 일부)
과달카날 회전 동안 미국 해병대가 들판에서 휴식을 취하고있다.
과달카날 회전 동안 미국 해병대가 들판에서 휴식을 취하고있다.
날짜 1942년 8월 7일 ~ 1943년 2월 9일
장소 솔로몬 제도과달카날 섬
결과 연합군의 전략적 승리
교전국
미국 미국
영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뉴질랜드
통가 통가
솔로몬 제도 솔로몬 제도
피지 피지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지휘관
로버트 고믈리
윌리엄 홀시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알렉산더 패치
리치먼드 K. 터너
야마모토 이소로쿠
쓰카하라 니시조
구사카 준이치
이마무라 히토시
히야쿠데 다루키치
고토 아리토모
이치키 기요나오
병력
60,000여 명 (지상군) 36,000여 명 (지상군)
피해 규모
1,768명 사망(지상 전투)
4,911명 사망(해전)
420명 사망(항공기 조종사)
포로 4명
함선 29척이 침몰
항공기 615대가 파괴됨
4,600명 사망(지상 전투)
3,543명 사망(해전)
1,200명 사망(항공기 조종사)
포로 1,000명
함선 38척 침몰
항공기 683대가 파괴됨
지도
1942년 8월 7일, 연합군 상륙 부대의 투라기, 과달카날에 대한 행로.
1942년 8월 7일, 연합군 상륙 부대의 투라기, 과달카날에 대한 행로.

 

 

 

배경

1941년 12월 7일에 일본군은 진주만하와이 주의 미국 태평양함대를 공습했다. 공습으로 많은 미국 전함들이 손상을 입었고 미국은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이 전쟁을 시작하면서 일본 지휘관들은 미국 함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선 천연자원을 풍부하게 확보할 필요가 있으며 그들의 광범위한 제국을 지키기위한 전략적 요충지를 얻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일본군은 필리핀, 타이, 말레이 반도, 싱가포르, 웨이크 섬, 뉴브리튼 섬, ,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들의 방어 한계를 확장하기위해 일본군이 남태평양과 중앙태평양에서 했던 2가지 시도는 1942년 5월의 산호해 해전과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좌절되었다. 이 두 번의 전략적 승리는 연합군이 태평양의 어딘가에 일본군에 대한 공세를 시작할 기회를 주었다. 연합군은 솔로몬 제도 중에서도 특히 남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투라기,플로리다를 골랐다.

 

 

 

1942년 8월의 태평양. 과달카날은 지도 우측 하단에 위치하고 있다.

 

연합군 전략가들은 일본 해군투라기를 1942년 5월에 차지하고 그 근처에서 해상기 기지를 짓는 것을 알았다. 1942년 6월초에는 일본 해군이 과달카날의 룽가 포인트 주위에서 거대한 비행장 건설을 시작했다는 의혹이 생겼다. 1942년 8월에 일본군은 투라기와 근처 제도에 900명의 병사들과 대다수가 한국인 징용 노무자들인 2,800여 명의 노동자들을 과달카날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 기지들이 완성될 경우, 일본의 주요 기지가 위치한 라바울을 방어할 수 있음은 물론 연합군의 보급선과 연락망을 괴롭힐 수 있으며 피지, 뉴 칼렌도니아, 사모아로 공격이 가능한 장소가 될 것이었다.

 

남솔로몬 제도를 공격하자는 연합군 주장은 미국 함대 최고사령관인 어니스트 킹 제독이 처음 고안했다. 그는 일본군이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의 보급선을 괴롭히는 기지로 사용하는 것을 방해하면서 라바울의 일본군의 주요기지를 고립시키고, 연합군의 뉴지니아 전역을 지원하면서 결과적으로 미국이 필리핀을 재탈환할 길을 만들기로했다. 미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로버트 L. 고믈리 중장과 함께 남태평양 전역을 만들고 연합군 공세를 솔로몬 제도로 향하게 했다.

 

 

 

 

1942년 6월 일본군에 의해 건설중인 룽가포인트의 비행장.

 

 

공세 준비단계에서 1942년 5월에 미군 해병대의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소장은 그의 미국 1 해병사단을 미국에서 뉴질랜드로 이동시킬것을 명령했다. 다른 연합군의 육군,해군,공군은 피지, 사모아와 뉴 칼레도니아에 기지를 세우기 위해 보내졌다. 뉴칼레도니아의 에스피리투 산토가 워치타워 작전이라 명명된 앞으로의 공세를 지휘할 사령부로 선택되었고, 공격 시작일은 1942년 8월 7일로 결정되었다. 처음에 연합군 공세는 투라기와 산타 크루즈 제도에만 한정되었다. 하지만 연합군 정찰대가 과달카날에 건설중인 일본군 공항을 발견한 뒤에 그 공항을 탈취하는 것이 계획에 추가되고 산타 크루즈 작전은 탈락되었다.

 

연합군의 워치타워 작전의 원정군은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양국의 선박을 합해 75대의 군함과 수송선들로 1942년 6월 26일 피지에서 결성되었다. 그리고 6월 31일 과달카날로 떠나기 전에 한 번의 상륙 예행 연습을 가졌다.

 

 

상륙

나쁜 기후 덕분에 연합군 원정대8월 7일 일본군에게 발각되지 않은 채 과달카날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상륙선들은 2개의 집단으로 나누어져서 한 집단은 과달카날에 상륙했고, 다른 집단은 투라기 플로리다와 근처의 섬들에 상륙했다. 연합군 함선들은 해변에 포격을 가했고, 미국 항공모함의 항공기들은 목표 섬들의 일본군 진영을 공격해 투라기 근처의 진지에 있던 일본군 수상기 15척을 파괴했다. 투라기와 근처의 가까운 가부투와 타남보고 섬에 3,000여 명의 미국 해병대가 8월 7일에 상륙했다. 3개의 섬에 있던 기지의 886명의 일본 해군 요원들은 해병대의 공격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약간의 어려움만을 겪은 채, 미국 해병대는 투라기는 8월 8일에, 과부투와 타남보고는 8월 9일에 점령했다. 해병대가 122명 죽은 반면 일본군 방어자들은 대부분이 사망했다.

 

 

 

 

미국 해병들이 1942년 8월 7일 아침에 해변에 상륙하고 있다.

 

 

투라기, 과부투, 타남보고와 달리 과달카날에 대한 상륙은 적의 저항을 받았다. 8월 7일 9시 10일에 밴더그리프트 장군과 11,000여 명의 미국 해병대들이 콜리와 룽가 포인트에 상륙했다. 룽가 포인트로 진격하는 도중 그들은 무성한 열대우림 외에는 저항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룽가 포인트까지 100여 야드를 남겨놓고 밤에 진격을 멈추었다. 다음 날, 다시 작은 저항을 물리치면서 해병대들은 룽가강으로 진격했고 8월 8일 16시에 비행장을 확보했다. 일본 해군 건설자들은 식량, 보급품, 건설 장비와 차량들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비행장에서 도망쳤다. 8월 7일과 8월 8일 사이의 상륙작전동안 라바울에 배치되어 있는 일본군 항공기가 연합군 상륙부대를 몇 차례 공격했고, 미국 상륙선 조지 F.엘리옷(이틀 후에 결국 가라앉았다.)호가 불붙고 미국 구축함 자비스호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이틀 간의 공습에서 미군이 전투와 사고 로 항공모함의 전투기 14대를 포함해 19대의 항공기를 잃은 반면 일본군은 36대를 잃었다.

 

 

 

 

일본군 "배티" 폭격기들이 8월 8일 연합군의 배들을 공격하고 있다.

 

 

이런 충돌들 후에, 플래쳐는 그의 항공모함의 전투기 전력의 손실과 그의 함선의 연료, 더 많은 일본군 공습을 우려했다. 플래쳐는 더 이상의 손실을 피하기 위해 그의 항공모함 기동함대를 8월 8일에 솔로몬 제도에서 철수시켰다. 항공모함의 제공 방어 상실로 인해 터너는 상륙부대에 필요한 중화기와 보급품들의 절반 이하 밖에 해안에 하적하지 못 했음에도 불구하고 과달카날에서 그의 함선들을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터너는 과달카날과 투라기에 8월 8일 밤을 통해 최대한 많은 보급품들을 하적하고 8월 9일에 그의 선단과 함께 떠나고자 했다.

 

그날 밤, 수송선들이 하적을 하고 있을 때, 수송선들을 호위하던 연합군 함선 2개 그룹은 일본 해군 중장 구니치 미카와가 이끄는 7척의 순양함과 1척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진 부대에 역습을 당했다. 일본군의 이 일방적인 승리로 3척의 미국 순양함과 1척의 오스트레일리아 순양함이 가라앉았고, 다른 한 척의 미국 순양함과 2척의 구축함이 손상을 입었다. 연합군에겐 다행이게도, 플래쳐가 미국 항공모함들과 함께 철수한 것을 몰랐던 미카와는 무방비 상태의 연합군 수송선을 공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라바울과 카비엥의 모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미카와는 그가 남쪽 솔로몬 지역에 머무를 경우 낮시간 동안 미국 항공모함들이 공습할 것을 염려하였다. 이 패배 이후로, 터너는 해병들을 해안에 남겨둔 채 많은 중화기들과 식료품, 그리고 수송선에 아직 탑승하고 있는 병력들을 가지고 8월 9일 저녁에 철수했다.

 

 

 

 

 

말레이.싱가폴 전투

 

말레이 전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1년 12월 8일부터 다음해 2월 15일까지 영국군일본군이 말레이 반도를 놓고 벌인 전투.

 

일본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일대를 장악하여 연합군의 동남아 지역에서의 세력 약화와 동남아 공략의 발판 및 싱가포르 등 영국이 오랜 세월 구축한 각종 시설을 포함한 강력한 해군기지를 얻으려 했고, 영국은 당연히 그러한 일본군의 공격을 수비하는 처지였다. 

 

우선 태국과 협의 및 강요하여 일본측으로 끌어들인 후 미리 공격의 발판을 마련한 다음,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이끄는 일본군은 제로센을 이용해 말레이 지역의 비행장들을 공격해 영국 공군을 무력화시킨다.


이에 영국군은 급히 최신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즈를 주축으로 함대를 꾸려 지원에 나서지만 이미 개전 초의 기습으로 인해 손상된 공군 전력으로는 아군 전투기로 공중엄호를 할 수 없었으므로 말레이 해전에서 두 영국 함정은 일본 뇌격기들의 무차별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침몰하고 만다. 이것은 전함이 함대결전 없이 항공기의 공격만으로 격침된 초유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연합군 측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일본군은 이 전과를 바탕으로 한 영국동양함대궤멸이라는 군가까지 만들어가며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일본군은 말레이 반도에 별 다른 방해 없이 상륙하는 데 성공하지만 일본군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했다. 그 이유는 일본군의 총병력이 겨우 3만인 데 비해 영국군은 그보다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으며, 진격로는 정글을 통과하는 길 3가닥, 게다가 정글에 총 3개 라인의 진지를 구축한 뒤였고, 더군다나 싱가포르까지 거리는 800km가 넘을 뿐 아니라 보급은 일본군이 더더욱 나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군은 이미 제공권을 상실한 상태인데다가, 정글에서는 전차는 소용없다고 생각해서 말레이 반도에 전차가 한 대도 배치되지 않았던 반면 일본군은 경량 치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과부제조기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형편없는 전차이지만, 연합군측은 그 과부제조기조차 없었는데다가 치하의 좁은 전폭과 가벼운 차체로 인해 정글 작전에서 대활약을 했다. 특히 진격로상의 대부분의 교량이 20톤 이상의 차량은 통과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영국군이 전차가 소용없는 지역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치하는 15.8톤이었으므로 현지의 빈약한 교량과 밀림의 험로 등을 통과하는데 강력한 이점으로 발휘되었고, 여기에 치하의 유일한 장점인 순간가속능력 등도 보탬이 되어 보병 위주의 영국군를 상대로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게다가 현지의 영국군은 기존의 숙련된 병력은 얼마 안 되는 숫자에도 불구하고 정예병은 더 긴급한 유럽전선으로 파병된 지 오래였다. 그래도 말레이 반도에 남아 있던 영국인 연대들의 일부 대대들이 남아 있었고, 이들은 이후의 전투에서 능력껏 싸웠다.

 

문제는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해 파견된 인도인 부대였다. 일단 제3인도군단 예하 제11인도사단과 제9인도사단 및 4개 보병여단이 있었는데, 그나마도 3개 보병여단은 1월 중순 이후에나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일본군 지휘관 야마시타 토모유키는 아시아인들로 구성된 부대들 중에서 일본군을 이길 수 있는 부대는 없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오스트레일리아군조차도 별 걱정거리가 되지 않았고, 일본군이 골치를 썩힌 부대는 오직 영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이런 인도인 부대를 주축으로 해서 여기에 제8오스트레일리아 사단이 주축이 된 오스트레일리아인 부대 및 현지 원주민까지 동원해서 급히 징집된 병력이 주력이었는데, 이들은 실전경험이 없는데다가 훈련도 부족한 상태여서 습기 많고 벌레가 들끓는 정글의 방어선을 지켜야 하는 사태가 되자 곧바로 사기가 떨어지면서 일본군의 포위섬멸작전에 쉽게 와해되어 갔다. 게다가 인도인들은 뭐하러 이런 곳까지 와서 영국놈들 입맛대로 싸워야 하냐는 인식이 가득한 상태였다.

여기다가 방어전력의 핵심으로 파견된 영국인 편성의 제18사단은 1월 25일에나 싱가포르에 도착했고, 여전히 전차는 보유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싱가포르의 해군기지를 유지하던 해군병력들은 육군에게 알리지도 않고 영국군 사단을 수송한 선박편을 타고 철수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싱가포르 전투 당시 치하가 활약한 것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중 가장 대표적이면서 전형적인 사례가 말레이 반도 북단의 지트라에서 벌어진 전투로 97식 전차보다 더 약체이던 95식 전차를 소대 규모로 지원받은 600명 규모인 일본군 혼성부대의 우회공격에 방어하던 제11인도사단의 병력은 말 그대로 단 하루도 못 버티고 도망만 쳤다. 정예부대인 구르카 대대까지 도망쳤는데, 행군 도중에 삼림에서 갑자기 전차가 튀어나오면서 사격을 해댔으니 도망 외에는 달리 방법도 없었다. 그나마 구르카 대대는 나중에 다시 모여서 전투에 들어가기라도 했는데 기타 인도인 부대들은 훈련 부족으로 인해 한번 무너지면 그대로 패주하면서 재규합이 되지 않았다.

다만 영국 입장에서는 대전 말기까지 아시아 전선은 구식무기의 처분장에 가깝게 인식했기에 무기의 질도 매우 형편없었다. 하지만 이미 구식병기화된 마틸다 전차도 투입되자마자 이동벙커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강인한 능력을 발휘했으니, 소수라도 전차가 있었다면, 하다못해 치하의 장갑을 관통할만한 보병화기만 있었더라도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하지만 만일 공격받는게 일본군이었다면 그런게 없었어도 화염병을 던져대면서 결사항전 했을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식민지군의 감투정신이 부족했다는점은 어쩔수 없는 듯하다.

참고로 일본측 기록에 나오는 싱가포르 전투 당시의 연합군 전차는 브렌건 캐리어 등의 무한궤도가 달린 운반차량이 있었지만 당연히 이런 차량으로는 치하를 격파할 수 없었다.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은륜부대라고 불리는 자전거 부대까지 편성해서 쾌속 전진을 하고 영국군이 다리를 끊는 걸 저지하면서 공병들을 기둥으로 한 인간 다리까지 세우면서까지 빠른 진격으로 일본판 전격전을 하여 영국군이 전열을 정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진격했다. 결국 말레이 반도는 빠른 시간 내에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결국 영국군은 수많은 물자와 병력을 잃고 싱가포르로 퇴각했다. 이때 얼마나 많은 물자를 상실했는지 말레이 반도 전격전 당시에 일본기가 영국제 연료를 비행기에 넣고, 영국제 항공폭탄을 달고 영국군에게 폭격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싱가포르 함락 

 

영국군은 싱가포르 방어에 들어가지만 기존의 방어물과 중포대는 남쪽 먼 바다에서 공격하는 적을 막는 용도로 건설된 것이라서 말레이 반도쪽의 육지에서 공격하는 적에 대항하기에는 위치도 안 좋을 뿐 아니라, 심지어 중포탄도 적 군함을 격침시킬 목적의
철갑탄이 대부분이라 좁은 해협을 건너오는 일본군 보병에게는 별 피해를 줄 수 없는 물건이었다.

 

결국 싱가포르 섬 북쪽에 임시진지를 가설하고 섬 전체의 해안선을 경계하느라 병력의 분산이 심해졌다. 일본군은 상대적으로 도하거리가 짧고 포병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조호르 해협의 맹그로브 지대에 상륙했으며 영국군과의 격전 끝에 승리한다.

이후 영국군은 싱가포르섬의 수원지를 빼앗기는 등의 악재가 겹쳐서 완전히 와해되어버렸고 아서 퍼시발 장군 등 영국군 지도부는 결국 일본군에 항복, 개전 60여 일 만에 9만에 가까운 영국군이 포로가 되어버린다. 항복 회담장에서 퍼시발 장군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야마시타 토모유키 장군이 일갈한 "예스카, 노카?(예스냐, 노냐?)"라는 말은 한동안 일본에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나중에 퍼시발 장군은 일종의 보복행위로서 미주리호의 일본 항복 조인식에 참관 명목으로 나온다. 바탄의 조나단 웨인라이트 중장과 함께 지속적으로 영미 잡지에서 다루어졌었지만 의외로 졸장으로 이름이 남았다. 실제로 전시 중 중립국을 통해서 출간된 일본 포로수용소 선전잡지에서 웨인라이트와 즐겁게 낚시하면서 즐기는 퍼시벌의 사진이 공개되며 여러모로 패장으로 알려졌다.

단, 웨인라이트는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가 대통령 직접 명령에 의해 탈출한 후 사방 천지에 적뿐이며 고립되고 부서져가는 코레이도르 요새에서 물자부족에 시달리며 지친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한동안 저항을 더 지속, 미국내에서의 평가가 크게 나빠질 일이 없었다. 이에 비하면 어찌 되었든 현지 일본군보다 더 많은 병력과 물자, 해군지원까지 받던 퍼시발 장군이 더 안 좋게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웨인라이트가 전후 대장으로 진급하여 대통령에게 명예 훈장을 직접 수여받고 제4군 사령관으로 영전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퍼시발에게 주어진 전력의 상태라는 것은 숫자는 많아도 훈련과 사기가 부족한 인도인-호주인 부대를 주력으로 삼아 작전기간 막바지까지 싸워야 했고, 지상군을 지원해야 할 공군력은 일찌감치 사라진 상태여서 싱가포르 방어에도 힘에 겨웠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싱가포르 공략을 위해 일본 육, 해군이 동원한 항공기는 작전기만 617기고 예비기도 182기였지만, 영국 공군은 싱가폴과 말레이에 고작 246기만 전개시키고 있었고 그 주력도 F2A 버팔로같이 제로센에게 대적하기 힘든 구식 비행기였다.

 

설상가상으로 해군 전력조차 작전 초반에 사라지면서 나중에는 싱가포르에 주둔한 해군은 육군에게 알리지 않고 해군기지를 포기하고 대부분의 기지병력을 먼저 철수시켰다.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당장 영국 육군이 반도를 방어하는 가장 큰 전략적 목적이 오직 싱가포르 북안의 세레타에 건설된 거대한 해군기지를 지키는 것이었고, 이를 일본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려면 싱가포르 섬만 방어해서는 안되고 말레이 반도를 방어하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군에게 해군이 해군기지를 방폐하고 철수한다는 사실을 통보하지 않고 그 파괴조차 육군에게 떠넘긴 것은 분명 잘못된 행위였다.

오히려 일본 해군은 말레이 해협 북단에서도 주정을 이용한 소규모 상륙전을 반복해가며 반도에서의 일본 육군 작전을 지원했고, 심지어는 페낭 섬까지 함락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걸 막아야 하는 영국 해군은 그냥 가만히 보기만 했다. 영국군의 막대한 물자 보급 물품 중에서도 1차대전 이래 지상전에서 가장 중요한 물품으로 인정된 전차는 단 1대도 없었다. 거기다가 퍼시발 자신은 작전기간 내내 말레이 육군의 사령관으로 지휘했고 말레이와 싱가포르 전체의 영국 육, 해, 공군을 지휘하는 권한은 전혀 없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설령 퍼시발이 아니라 몽고메리가 말레이군 사령관이었더라도 말레이와 싱가포르를 방어해낼 수는 없다는 것이 전사가들이 내리는 결론이다.

그러나 퍼시발은 1930년대에 말레이 식민지 육군의 참모장으로 근무하면서 올바른 전략적 판단에 의거한 제대로 된 방어계획안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말레이 육군 사령관으로서의 자신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진행되는 사태에게 질질 끌려다녔다. 특히 계속 후퇴만 요구하는 제3인도군단장인 루이스를 휘어잡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 결과 영국군은 반도에서 지리멸렬한 전투만 하다가 결국 싱가포르까지 점령당하고 말았다. 퍼시벌의 졸렬한 지휘는 그가 처한 상황을 동정하는 전사가들조차 당연하게 인정하고 있고, 이것만으로도 퍼시벌에 대한 비판의 여지는 넘쳐난다.

 

이 패배로 영국은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및 그 주변의 식민지를 상실하였으며 수상 윈스턴 처칠은 영국 역사상 가장 참담한 패배라고까지 표현했다.

이 전투로 싱가포르를 얻은 일본은 쇼난(昭南)이라는 새 이름을 붙인다.

 

그렇지만 일본군은 이 전투 때문에 영국군 = 약체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고, 그 선입견 때문에 생긴 작전이 바로 희대의 병크, 임팔 작전이었다.

 

그리고 당시 야마시타의 참모로는 엄청난 뻘짓으로 인해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의 칭호를 획득(?)한 자칭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가 있었는데, 마사노부에게 너무 시달린 야마시타는 그를 필리핀으로 보내버린다.  게다가 말레이와 필리핀 및 인도네시아에서 작전하면서 노획한 거대한 물자들로 인해 일본군은 이후의 공세조차 보급은 현지조달을 위주로 세우게 되었는데, 과달카날, 솔로몬이나 뉴기니는 유럽인에 의한 식민화 이전부터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문명화된 물자가 풍부한 이들 지역보다 훨씬 궁벽한 지역이었기 때문이 이곳에서 싸운 일본군은 기아에 시달리게 된다.

 

여담으로, 이때 싱가포르에서 노획한 온갖 사치품과 군수물자로 일본군은 본국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영양상태가 좋아지고 장비도 충실해졌다. 대표적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은 위스키를 마실 수 있었다. 또한 중국 전선에서는 차가 없어서 사단장 이하는 모두 말을 타고 다니는 경우가 흔했는데도 싱가포르에서는 위관급 장교도 노획한 고급 승용차를 배차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싱가포르 지역은 영국이 탈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미 잘 알려진 것과 같이 독일과의 싸움에 우선 집중해야 했던 영국의 처지로는 태평양이나 인도양에서 본격적으로 전력을 집중하는 시기는 1945년 초에나 가능했고, 따라서 싱가포르의 탈환은 1945년 가을에나 실행하기로 결정되었다.

 

결과적으로 싱가포르는 연합군의 반격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쪽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군들은 재수 없게 격전지로 증원간 병력이나 일부 수상함을 제외하고는 말 그대로 놀고 먹다가 전쟁이 끝나서 상대적으로 편하게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병력이 격전지로 차출되었고 1945년에 들어서 연이은 폭격에 전후에는 말레이 진격전이나 싱가포르 점령시 벌인 잔학행위에 대한 전범재판으로 인해서 그렇게 편한 말로는 겪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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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전역 상세 설명 참고로 싣는다.

 

 

 

 

과달카날 전역

1. 미해병대의 상륙




보통 '과달카날 전투'(Guadalcanal Campaign)라고 하면 1942년 8월 7일 미해병대가 과달카날 섬에 상륙한 날로부터 1943년 2월 9일 이 섬의 일본지상군이 모두 철수하여 이 섬에서의 조직적 저항을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의 6개월간 이 섬과 그 부근 해상에서 벌어진 미일 양국간의 무력충돌을 말한다.

이 과달카날 전투는 크게 육상전투와 해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육상전투는 이찌기 지대의 자살적 공격을 필두로 3차에 걸친 일본군의 공세와 이를 좌절시킨 미군의 반격으로 이루어져 있고, 해전은 이러한 지상군의 작전을 지원하고 서로 상대방의 병력증원과 보급을 차단하려는 목적에서 사보 섬 해전을 필두로 이 섬의 부근 해상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벌어졌으며 미국 측에서는 이 기간 동안에 일어난 양국간의 해상무력충돌 중 7개의 중요한 전투에 '해전'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둘째로 미군의 육상에서의 승리는 육전 그자체보다는 해전에서의 승리와 그로 인한 제공권 장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며, 게다가 육상전 그 자체로도 아기자기한 각종 전술 전략이 등장하기 모다는 일본군 전통의 무식한 착검-만세 돌격의 지루한 반복과 그에 대한 미해병대의 저글링떼 캐찹튀기기식의 압도적 화력하의 견고한 방어전 형세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문화적인 우리 직원분들이 읽기엔 식상할점이 적지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과달카날은 남태평양의 솔로몬 군도에 속한 한 섬이다. 과달카날섬은 솔로몬 제도 중 유일하게 비행장 건설이 가능한 평지를 가지고 있었다. 호주정부는 이 섬의 대안에 있는 툴라기 섬을 비롯한 이 지역 일대에 감시원을 배치해두고 있었고, 이들의 보고에 의해 1942년 5월 일본군이 툴라기 섬에 상륙한 사실을 알았고 한 달 후인 6월에는 이들 중의 일부가 툴라기 섬에서 남쪽으로 24km떨어진 과달카날 섬으로 옮겨가서 그 곳에서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과달카날 섬은 갑자기 연합군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일본군이 이 섬에 비행장을 설치하고 4000KM의 가공할 행동반경을 가진 어뢰탑재가능 96식 육상공격기로 주변 해역을 위협하게 되면 미국에서 호주로 통하는 보급선이 직접 위험에 처할수 있다는 점에 연합군의 관심이 집중된것이다. 정찰을 통해 비행장의 완성 시점이 1942년 8월 초순이라는 것을 알아낸 연합군은 비행장이 완성되기 전에 이 섬에 상륙한 다음 이 일대의 일본군을 소탕하여 호주와 미국 사이의 보급선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나아가 이 섬을 일본군에 대한 반격의 초석으로 삼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미 해병대가 과달카날에 상륙하기에 장애가 되는 점은 양륙 스페이스의 부족이었다. 당시 과달카날 상륙부대는 뉴질랜드의 웰링턴 항에서 출격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 항구는 동시에 미국에서 건너오는 상륙부대의 병력 양륙지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병력들을 싣고 온 수송선들은 식량, 연료, 무기, 탄약같은 보급품도 동시에 싣고 왔기 때문에 이것들도 모두 웰링턴 항에 양륙해야 했다. 그리하여 웰링턴 항은 수많은 병력과 보급품이 한꺼번에 몰려서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과달카날에 건설 중인 일본군의 비행장이 완성되기 전에 상륙을 실시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결국 미 해병대를 지휘하는 밴디그래프트 소장은 촉박한 작전시간표에 맞추기 위하여 전투에 필수적인 보급품만 과달카날로 향하는 수송선에 싣도록 명령하고 그 양조차도 원래 계획된 90일분이 아닌 60일분만 싣도록 명령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6,000명의 병력을 가진 해병 제 1사단과 그 보급품을 실은 수송선 35척과 순양함 8척, 구축함 12척으로 이루어진 상륙부대(Richmond Kelly Turner소장 지휘)는 항공모함 3척, 전함 1척,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3척 및 구축함 12척으로 이루어진 Frank Jack Fletcher 중장 지휘하의 호위부대의 엄호를 받으며 뉴칼레도니아의 누메아에 일단 집결하였다가 8월 7일 새벽, 과달카날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상륙부대는 둘로 갈라져서 본대 11,000명은 길이 145km, 폭 45km의 과달카날 섬에 상륙했고 지대 5,000명은 그 곳에서 24km가량 북쪽에 있던 툴라기 섬, 가부투 섬, 타남보고 섬에 대하여 상륙을 실시했다.

이러한 미군의 상륙은 완전한 기습을 달성한 것으로 일본군은 툴라기 섬에 접근한 미군함정을 보고서야 미군이 공격해왔다는 것을 깨닫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렇게 완전히 기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툴라기, 가부투, 타남보고의 세 섬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미군에 전사 및 행방불명 144명이라는 피해를 입히고 자신들은 수비대 800명 중 700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 세 섬에 비하면 과달카날 섬에 대한 상륙은 순조로왔다. 미해병대 11,000명은 일본군이 비행장을 건설 중이던 룽가 곶의 동쪽에 있는 완만한 모래언덕에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상륙했다. 이 상륙 작전에서 유일한 피해는 해안의 농원에서 야자열매를 깨려다 손도끼에 손을 다친 해병대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초의 제1파가 상륙한지 2시간도 지나지 않아 일본기의 공습을 알리는 경보가 들어왔다. 경보를 보낸 사람은 폴 메이슨이라는 호주군 출신 정보원으로 이 사람은 과달카날 섬에서 서쪽으로 560km거리에 있던 부갠빌 섬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이 경보는 상륙부대를 엄호하던 미기동부대에 일본군의 공습에 대비할 귀중한 1시간을 벌어 주게 된다.


즉각 항모 와스프, 새러토가, 그리고 엔터프라이즈에서 날아오른 와일드캣 전투기들이 함대의 상공에 대기했고 양륙작업은 중단되었으며 수송선들은 닻을 올리고 회피기동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곧이어 과달카날 섬에서 서북쪽으로 1000km떨어진 라바울의 일본군 비행장을 출발한 27대의 쌍발 미쯔비시 '베티' 육상공격기(영국의 동양함대를 격침시킨 바로 그놈들입니다.)가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습해 왔다. 이 때 미군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이 공격기들이 육지공격용 폭탄을 탑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이 공격기들은 뉴기니섬 남동해안의 밀른 만에 있는 연합군 비행장을 폭격하기 위하여 준비하던 중 갑자기 과달카날 섬의 미군상륙부대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게되어 미처 폭탄을 어뢰로 바꿀 틈도 없이 바로 과달카날 섬을 향하여 출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공습에 대한 준비를 갖추고 급격히 회피기동 중인 함정들을 급강하 폭격도 아닌 수평폭격으로 명중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미 요격태세를 갖추고 있던 미국의 와일드캣 전투기들의 방해와 지상 및 해상에서 쏘아대는 치열한 대공포화 속에서는 더욱 힘든 일이었다.


결국 일본군은 이 폭격에서 미군의 구축함과 수송선 각 1척씩을 격침하는데 그친 반면 자신들은 공격기와 호위 전투기를 합쳐서 총 41대의 희생을 치루고 만다. 다만 이 때 상실된 항공기는 대부분 미군의 와일드캣이나 대공포화에 당한 것이 아니라 공습을 마치고 라바울로 귀환하던 도중 연료가 떨어져서 상실된 것이라고 한다. 즉 라바울과 과달카날 간의 1000km라는 거리는 당시 그 지역의 일본군 항공기의 능력으로 폭격작전을 수행하기에는 다소 먼 거리였다는 뜻이 된다.

아무튼 이렇게 일본군의 공습을 가벼운 피해로 무사히 넘긴 미상륙부대는 늦어진 병력과 자재의 양륙을 즉시 재개했다.


다음날 아침 미해병대는 야자농원을 뚫고 서진하여 두세 번의 작은 충돌 끝에 완성 직전에 있던 룽가곶의 일본군 비행장을 점령한다. 당시 800m길이인 활주로의 공사진척상황은 불과 며칠 내로 비행기의 이착륙이 가능할 정도였고, 다른 시설들은 거의 대부분 완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미해병대는 활주로와 기타 부대시설말고도 일본군으로부터 100대 이상의 트럭과 9대의 포장용 롤러, 대량의 휘발유, 석유, 등유, 시멘트, 많은 기계류와 훌륭한 외과수술용 장비(당시 미군 것보다 더 우수했다고 합니다.)뿐만 아니라 수백 상자의 고기, 생선, 과일통조림, 그리고 수 톤에 달하는 쌀 등을 노획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환영받은 노획물은 일본군의 제빙(製氷)기계였는데 해병대는 이 제빙기계가 설치된 오두막에 '도죠 제빙공장(도죠히데키 당시 일본수상을 빗대어 지은 것 같음)', '새 경영진에 의함'이라는 야단스러운 간판을 내걸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이 날은 과달카날의 미해병대에게는 참으로 좋은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미해병대가 손쉬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던 바로 그 날 저녁, 앞으로 상당기간 미해병대의 처지를 괴롭게 만들고 심지어는 생명선을 위협할 전투가 과달카날 섬의 북쪽에 있는 조그만 사보 섬의 앞바다에서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바로 미해군 사상 최악의 참패라고 일컬어지는 사보 섬 해전의 막이 오른 것이다

 

 

2. 사보 섬 해전


미군이 과달카날에 거의 무혈상륙하여 첫 승의 기쁨을 누리고 있을때 일본해군 제8함대 사령관이었던 미까와 구니찌 중장은 즉각 과달카날의 미국함대에 대하여 수상함대를 이용하여 야습을 가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즉시 캐비엥에 머물러 있던 중순양함들을 라바울로 소집하여 중순양함 5척(죠까이, 아오바, 카고, 기누가사, 후루다까), 경순양함 2척(덴류, 유바리), 그리고 구축함 1척(야나기) 등 총 8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편성하여 라바울의 기지를 출항했다. 그 때 시간이 8월 7일 오후 4시 30분, 미군이 과달카날에 상륙을 개시한 지 불과 8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전후 미국으로부터 얻은 '일본해군에서 가장 대담한 전술가'라는 표현에 걸맞는 신속하고 과감한 행동이었다.)


미까와 제독의 작전 계획은 한밤중에 룽가 곶과 툴라기 섬을 경계 중인 미국함대에게 돌입하여 자신의 함대가 가진 강력한 8인치 포와 어뢰를 사용하여 기습적인 공격을 가하고 아울러 그 곳에 있는 수송선단을 소탕한 후 30노트에 이르는 함대속력을 이용하여 날이 밝기 전에 전장을 이탈한다는 것이었다.

라바울을 떠난 미까와 제독의 일본 제8함대는 그 날 오후 10시경 미잠수함 S-38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충돌은 없었다. 다음날인 8일 새벽 2시경 남동쪽으로 변침한 미까와 함대는 부갠빌 섬과 초이셀 섬 사이를 빠져나와 과달카날을 향해 직행한다.


도중에 오전 10시 26분과 11시에 연합군의 정찰기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한 번은 변침하여 북상하는 침로를 취함으로써 정찰기 조종사의 눈을 속이는 데 성공했고 한 번은 함대의 대공화력을 집결하여 쫓아버리고 만다.

 
이 때 두 번째로 미까와 함대를 발견했던 정찰기는 맥아더 휘하의 호주군 소속이었는데 이 정찰기의 조종사는 일본함대의 행동을 즉각 보고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구역을 모두 정찰한 후 기지에 귀환해서야 호주의 맥아더 사령부에 전문으로 보고했다. 그리하여 이 정찰보고가 진주만을 경유하여 현지 지휘권을 쥐고 있던 터너 소장에게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서 항공정찰이 불가능한 상황이 된다. 더군다나 이 정찰기의 조종사는 일본함대의 함종을 오인하고 있었다. 따라서 터너 제독은 서북쪽에서 접근 중인 미까와 제독의 함대를 실제보다 훨씬 약체라고 착각하고 있었고, 일본군이 그런 약체 함대를 가지고 상대적으로 훨씬 우세한 전력을 가진 자신의 휘하 함대를 공격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8일 오후, 그동안 과달카날 상륙부대를 엄호하고 있던 플레처 중장의 항모기동부대가 철수해 버렸다. 당시 플레처 부대의 철수는 과달카날 섬이 일본군 육상기의 행동반경 내에 있기 때문에 항모의 안전을 염려해서 철수했다는 설과 항모들에 대한 급유를 위해서라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아무래도 전자가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여진다.


한편 미까와 제독은 8일 오전 5척의 중순양함으로부터 각각 수상기 1 대씩을 사출하여 룽가 곶과 툴라기 부근을 정찰한 결과 미국의 항공모함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미까와 제독은 일몰 직전 함대진형을 일직선으로 갖춘 다음 전속력으로 접근해갔다.


중순양함 아오바에서 사출한 정찰기가 미함대의 배치상황을 타전해 온지 얼마 안 되어 선두에서 항진하던 기함 죠까이의 왼쪽으로 사보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당시 아오바에서 사출한 이 정찰기는 오후 11시경 연합군 함대에 의해 발견된다. 그런데 당시 이 정찰기는 등화를 다 켜고 비행했기 때문에 이 정찰기를 본 연합군 장병들은 아군의 항모에서 발진한 비행기로 착각했다고 한다. 그것은 곧 당시 미군의 항공모함이 이미 이 해역을 떠났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장병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연합군의 정보전달 체계에도 심각한 장애가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 바로 그 때 죠까이의 야간 견시(見視)가 함의 좌현 30도 전방 8000미터 지점에서 접근 중인 미구축함 랄프 탈봇(Ralph Talbot)을 발견하였고, 이어서 함의 우현 쪽으로 구축함 블루(Blue)를 발견하게 된다.

미까와 제독은 함대 속도를 22노트로 감속하고는 모든 포화를 접근 중인 랄프 탈봇에게 겨냥한 채 전진을 계속했다. 숨막히는 수 분이 지난 후, 랄프 탈봇이 반대로 변침하여 북쪽으로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미까와 함대는 북쪽의 랄프 탈봇과 남쪽의 블루 사이를 빠져 나온 것이다.

경계망을 뚫고 들어온 일본함대는 9일 새벽 1시, 중순양함 아오바에서 다시 정찰기를 사출했는데 이 정찰기는 곧 중순양함 2척, 구축함 1척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의 남부부대가 접근중임을 알려 온다.

미까와 제독은 즉각 30노트로 증속하면서 '전군돌진'의 명령을 내렸다. 이 때 함대의 맨 뒤를 따르던 구축함 유나기가 뒤로 빠지면서 후방을 경계하고 나머지 7척의 순양함은 남부부대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해 간다.

어둠을 뚫고 오른쪽으로 멀리 연합군 순양함들을 발견한 죠까이가 그의 첫 공격으로 4발의 어뢰를 발사한 시각은 9일 새벽 1시 37분, 바로 사보 섬 해전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마침 아오바에서 사출한 정찰기가 떨어뜨린 조명탄이 연합군 순양함의 상공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남부부대의 선두에서 항진 중이던 미구축함 패터슨이 그때서야 일본함대의 존재를 알아채고 보이스 라디오를 사용하여 경계경보를 발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게다가 이 경보는 북부부대의 함정에게는 전달되지 못한다.

1시 43분, 남부부대의 호주의 중순양함 캔버라에 일본이 자랑하는 24인치 어뢰가 명중됨과 동시에 맹포화가 퍼부어졌으며 이어서 뒤따르던 미순양함 시카고에도 집중사격이 가해져 순식간에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단 6분간의 전투로 연합군의 남부부대를 격파한 미까와 함대는 툴라기 해상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북부부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북동쪽으로 변침했다.

당시 중순양함 3척(Vincennes, Quincy, Astoria)과 구축함 2척으로 이루어진 북부부대는 남부부대가 공격을 받은 지점에서 약 11km정도 북동쪽으로 떨어진 해상에서 10노트의 경계속도로 순항하며 남동침로에서 막 북서침로로 변침한 상황이었다.


북부부대의 장병들은 방금 야음을 스친 포화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지만 바로 자신들의 코 앞에 적의 강력한 수상함대가 출현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중순양함의 8인치 주포들은 거의 무방비의 상태로 잠자고 있는 중이었다. 남부부대에 대한 공격이 끝난 지 불과 5분 후, 미까와 함대는 북부부대를 향하여 다시 일제히 포격을 가했다.

중순양함 죠까이, 아오바,기누가사,카고의 4척으로 이루어진 미까와 함대의 본대는 불과 10000미터 이내의 근거리에서 죠까이의 탐조등에 비친 연합군 중순양함에 대하여 일방적인 집중포격을 가했다.


첫 표적으로 제일 후미에 있던 아스토리아를 공격하여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게 했고, 곧이어 중앙에 위치하고 있던 퀸시에게도 포탄을 날렸다. 이 때 미까와 함대(본대)와 퀸시와의 거리는 불과 4000미터, 하지만 퀸시는 이런 근거리에서 미까와 함대의 일제 포격을 받아 함체 후부가 격파된 상황에서도 미까와 함대를 향하여 전속력으로 돌진하면서 유일하게 남은 전방 포탑으로 치열하게 응사했다. 퀸시가 발사한 포탄 중 한 발은 미까와 함대의 선두에 있던 죠까이의 1번 포탑을 명중시켜 파괴했고, 또 한 발은 사령부작전실을 관통하여 수십명의 전사자를 내게 했다. 하지만 퀸시는 그가 기도했던 충돌을 끝내 달성하지 못한 채 미까와 함대의 전방 2000미터 지점에서 일본순양함 4척의 집중포격을 뒤집어쓰고 벌집처럼 되어 곧 침몰해 버리고 만다.

구축함 헬름과 윌슨을 양옆에 세우고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던 빈센스의 운명도 별 다르지 않았다. 패터슨으로부터 경보를 받은 빈센스가 증속하자마자 탐조등의 불빛과 함께 미까와 함대의 제 1탄이 빈센스 전방 500미터 거리에 떨어졌다. 빈센스는 사력을 다하여 응사하였으나 일방적인 화력의 열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포탄을 얻어맏고 전투불능상태에 빠졌으며, 곧 침몰하게 된다.

새벽 2시 15분, 구조작업에 여념이 없는 헬름과 윌슨을 뒤로하고 미까와 함대는 북방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한편 북부부대에 대한 공격이 일본군의 일방적 승리로 마무리되어 갈 때쯤 미까와 제독의 기함인 죠까이 함상에서는 이대로 전장을 이탈하느냐. 아니면 룽가와 툴라기 두 곳에서 하역작업 중인 미해병 수송선에 대하여 2차 공격을 감행하느냐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는데 미까와 제독은 전자를 택하여 '전군철수'의 명령을 내리게 된다.

미국의 항공모함이 이미 이 해역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미까와 제독으로서는 날이 밝기 전에 미함재기의 행동반경을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미까와 제독이 이때 과감히 수송선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수송선과 보급물자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면 미해병대의 과달카날 작전은 초장부터 삐끗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하역작업은 약 1/3정도 이뤄지고 있었고 병력도 약 1500명 가량이 그 때까지도 상륙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공엄호를 잃은 데 이어 해상경계부대마저 간밤의 사보 섬 해전에서 거의 전멸하다시피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버린 미해병 수송선단은 9일 하루종일 하역작업을 최대한 초스피드로 실시하여 절반정도의 보급품을 양륙한 뒤 9일 오후 나머지 절반의 보급품은 미처 내리지 못한채 과달카날 해역을 벗어나 뉴칼레도니아의 누메아로 철수하게 된다. 비록 전부를 양륙하는데는 실패했지만 그 보급품들이 모두 일본함대의 공격을 면할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바로 1주일 후인 8월15일경부터 누메아로부터 나머지 보급품들을 다시 양륙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보급품들이 전부 미해병대들에게 공급이 됨으로 인해, 이후 펼쳐질 일본군의 헨드슨 공항에 대한 반복적이고도 파상적인 공격을 미해병대들이 끝까지 막아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의 결과야 어떻든 사보해 해전만을 놓고 볼 때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한 일본군의 압승이었다.(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신속정확한 정찰보고의 부재와 미함정들의 경계불량으로 인한 미군의 패배였지만). 일본함대는 불과 40분 남짓 지속된 전투에서 연합군의 중순양함 캔베라, 아스토리아, 퀸시, 빈센즈 4척을 격침시켰고, 중순양함 시카고를 중파했으며, 구축함 랄프 탈봇과 패터슨을 대파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연합군의 인명피해는 전사 1,023명, 부상 709명에 달했다.


여기에 비하여 일본군의 피해는 중순양함 죠까이와 아오바가 약간의 피해를 입은데 불과했고 인명피해도 전사 35명, 부상 51명으로 연합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다.

사보 섬 해전의 결과 미해병대는 보급품도 부족하고 항공엄호도 없는 채로 과달카날 섬에 고립되고 말았고, 반면에 일본군은 여유있게 매일 정오 경이면 과달카날 섬을 폭격할 수 있었으며(이 시간을 미해병대들은 자조적인 어조로 '도죠 타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거의 매일 일본군의 순양함이나 구축함이 벌건 대낮에 한 척씩 나타나 해병대의 교두보를 포격하고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미군은 일본의 도죠타임 공습과 함포사격의 위협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기존의 일본군이 버리고 간 장비들을 이용하여 결국은 짧은 시간에 비행장 활주로를 완성시키고야 마는데 이 비행장으로 곧이어 돈트리스 급강하 폭격기등 미군기들이 속속 착륙하게 됨에 따라 일본군에게 열세에 있던 제공권을 다시 회복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 된다.

 

일본본토의 대본영은 과달카날섬이 미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즉각적인 탈환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그당시 본토의 대본영은 미군이 총반격을 해오리라는 시점을 1943년 정도로 늦게 예상하고 있었던 탓으로, 과달카날섬에 대한 미군의 공격을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는 정찰임무 정도의 성격으로 과소평가 해버리는 실수를 한다(실제로는 중화기를 보유한 미해병 1사단의 19000명에 달하는 대병력이 상륙했다.) 그 결과 과달카날 탈환계획에 불과 2000명의 제국육군이면 충분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이찌키' 대좌가 이끄는 이찌키 지대 2000명으로 하여금 강력한 화력을 배경으로 한 19000여명의 준비된 미해병대에 대해 공격하도록 명한 것이다.

 

 

3. 동부솔로몬해전



이찌기 부대 상륙

미해병대의 피나는 노력으로 핸더슨 비행장의 활주로가 완성된 뒤 돈트리스 급강하 폭격기로 구성된 '커크터스 항공대'로 불린 해병대 항공대가 비행장에 착륙후 활동을 시작하자 과달카날의 미해병대는 일단 위기에서 벗어나 한숨 돌리게 된다.

한편 미해병대의 과달카날 점령을 보고받은 일본 대본영의 육군본부는 1942년 8월 13일, 즉각 이 섬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육군 제 28연대장인 이찌기 기요노 대좌에게 내린다. 당시 제28연대의 병력은 약 3,000명으로서 당시 과달카날의 미해병대의 규모를 2,000명 정도로 과소 추산하고 있던 일본측은 이 정도의 병력이면 과달카날에서 미해병대를 몰아내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2000명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소규모 병력이 아니라 10배나 되는 19000의 병력과 대전차포등 중화기로 무장한 '준비된' 미해병 1사단이었다.

이찌기 대좌는 선발대 900명과 함께 트럭 섬을 출발한 구축함에 타고 8월 18일 밤, 미해병대의 교두보로부터 30km쯤 동쪽에 떨어진 타이부 곶에 상륙한다. 이 선발대는 원래는 상륙후 미군의 상황을 파악하는 등 정찰의 임무를 수행한후 28연대 본대와 합류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찌기 대좌는 이 시점에서 제28연대 본대와의 합류를 기다리지 않고 선발대 900명만으로 미해병대에 공격을 가하기로 결심한다. 이 결단이 단순히 공명심에 의한 객기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당시가 미군을 공격하기에 최적의 시기였다고 판단해서 그런지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그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21일 새벽 3시경, 에드윈 A. 폴로크 중령이 지휘하는 미해병 제1사단 제1연대 제2대대가 지키고 있던 일루 강 하구의 미군 방어선에 이찌기 부대의 공격이 드디어 시작된다. 보급 부족으로 몇 문 안되는 화포로 포격을 가하는 가운데 선두에 선 200명의 돌격대가 대검을 장착후 소총을 꼬나쥐고 좁은 일루 강의 모래톱을 건너 돌격해 왔다. 곧이어 조명탄으로 일본군의 돌격을 확인한 미 해병대의 화력이 불을 뿜는다.

 
당시 미해병대는 산탄을 장전한 37mm대전차포의 수평직사로 돌격해오는 일본군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강을 건너온 일본군의 돌격속도는 '준비된' 철조망에 걸려서 주춤거렸고, 그럴 때면 여지없이 해병대의 '준비된' 기관총이 불을 뿜어서 일본군들을 시체더미로 만들어 버린다. 수십개나 되는 마린벙크 방어선에 저글링 대여섯마리가 달려가다 찍 소리도 못낸채 캐찹이 되는 장면을 상상하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에도 불구하고 용감한 일본군들은 철조망이 쳐져 있지 않은 곳을 통하여 해병대의 진지까지 도달하여 몇 군데인가의 진지를 제압하긴 했으나 폴로크 중령이 투입한 증원소대에 의해 다시 쫓겨난다. 하지만 일본군은 포기하지 않고 밤새도록 공격을 속행했고 거기에 맞선 해병대도 밤새도록 일본군을 사살하며 결코 물러나지 않고 버텨냈다.


 

날이 밝자 밴디그래프트 소장은 1개 별동 대대로 하여금 일루 강의 상류를 건너 이찌기 부대의 후방에서 기습하도록 명령했다. 그와 동시에 제2대대의 전면 방어선에는 M3 스튜어트 경전차를 투입했다. 전차의 투입과 더불어 이찌기 부대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살아남은 병력들은 일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스튜어트 경전차는 퇴각하는 일본군의 등뒤에다 기관총을 난사하며 가차없이 추격하여 일본군이라면 죽은 자건 산 자건 관계없이 그의 캐터필러로 사정없이 깔아뭉갰고 얼마전 활주로에 도착한 해병대의 항공기들도 추격에 가세하여 퇴각하는 일본군에게 기총소사와 폭격을 가했다.

이찌기 대좌는 약간의 잔존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퇴각하다가 자신들이 상륙한 지점에 이르자 군기를 불사르고 자결했다. 이로써 이찌기 부대에 의한 일본군의 1차 공세는 완전 실패했다.


이 전투로 인해 상륙한 900명의 이찌기 선발대중 지휘관인 이찌기 대좌를 포함한 약 800명의 일본군이 전사했으며 그 결과 미일양군이 정면으로 격돌했던 일루 강 하구는 꽉 들어찬 일본군의 시체로 인해서 강이 막힐 지경이었다고 한다.

한편 이찌기 부대가 합류하기로 한 제28연대의 본대는 아직 상륙하지도 못한 상태로 이찌끼 부대의 전멸소식을 듣게 되고 복수의 칼을 갈게 되지만, 그러나 사실상 제28연대의 본대는 아예 상륙하지 못한게 될 운명이었다. 바로 미 기동부대와 헨더슨 비행장의 커크터스 항공대가 합작으로 일본군 제28연대의 상륙기도를 좌절시켜 버린 것이다.


제28연대 본대의 상륙을 막기 위해 미국 기동함대가 투입되고 또 상륙작전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의 기동함대가 맞딱뜨리게 되는게 이 상황에서 미일간의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에 이은 해전사상 세 번째의 항공모함부대간의 대결이 벌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동부솔로몬 해전이다.

 

동부솔로몬의 기동함대간 대결

이찌기 부대의 공격이 어이없는 부대 전멸의 참패로 끝난 뒤, 트럭 섬과 라바울의 일본군 사령부는 '과'호 작전을 기획하였는데 그 내용은 과달카날 섬에 대하여 제2차 공격을 실시함과 동시에 그것을 저지하러 나올 미기동부대와 함대해공결전을 벌이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다나까 라이조 소장이 지휘하는 과달카날 공격부대는 중순양함 4척이 호위하는 수송선단에 제28연대의 잔존병력 2,000명을 포함한 6,000명의 병력을 싣고 라바울에서 과달카날 섬을 향하여 출항시키는 한편 이 공격부대를 지원하고 아울러 이 공격부대를 요격하러 나올 미기동부대를 제압하기 위하여 8월 중순경에 새로 편성한 항공모함 중심의 제3함대를 나구모 중장의 지휘 하에 트럭 섬에서 남하시켜 미항모기동부대와 해전사상 세 번째의 함대항공전을 벌이려고 작정한다.

한편 일본군의 무전을 주의깊게 감청하고 있던 미태평양사령부는 8월 중순경부터 라바울 북쪽 1,100km의 거리에 있던 트럭 섬에 대규모의 일본군 항모기동부대가 집결중인 사실을 알아냈고 이 부대가 곧 남하할 것으로 판단,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과달카날 섬의 동남부에서 활동 중이던 플레처 중장 지휘하의 미항모기동부대를 과달카날 섬의 북동쪽으로 북상시키기 시작했다. 당시 이 기동부대는 항공모함 새러토가, 엔터프라이즈, 와스프의 3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미일 양군의 결전이 이루어지기 전날인 8월 23일 오후에 와스프가 급유를 위하여 남하함으로써 실제 전투는 새러토가와 엔터프라이즈, 이 두 척의 항모만으로 일본함대에 맞서게 된다.

와스프가 남쪽으로 가버림으로써 2척의 항모만으로 일본군과 싸우게 된 미기동부대의 전력은 이 지역 기동부대 전체의 지휘권을 쥔(사실상 당시 미태평양 함대가 가진 전 세력이었다) 플레처 제독이 직접 지휘하고 있던 제61기동부대의 항공모함 새러토가를 중심으로 중순양함 2척, 구축함 5척과, 킨케이드 제독 지휘 하의 제16기동부대의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중심으로 전함 노스캐롤라이나,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6척이 전부(합계 항공모함 2척, 전함 1척, 중순양함 3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1척)로 두 항모가 가진 함재기는 모두 176대였다.

한편 트럭 섬에서 남하중이던 일본 제3함대의 전력은 항공모함 쇼가꾸, 즈이가꾸, 경항모 류죠를 비롯하여 전함 2척, 중순양함 9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7척, 수상기 모함 1척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미군보다 훨씬 우세했다(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항모 4척이 모두 격침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정도의 강력한 항모전단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동안 얼마나 일본이 해군력 육성에 광적으로 힘을 쏟았는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라바울을 출발한 다나까 라이조의 과달카날 공격부대는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1척, 경비정 4척, 수송선 3척, 그리고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본제3함대는 나구모 제독이 지휘하는 주력부대와 하라 제독 지휘하의 견제부대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주력부대는 다시 세 개의 함대로 나뉘어져 정규항공모함인 쇼가꾸와 즈이가꾸,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진 공격함대(나구모), 전함 2척, 중순양함 3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3척으로 이루어진 전위함대(아베), 그리고 수상기모함 1척,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6척으로 이루어진 지원함대(곤도)로 편성되어 있었다. 하라 제독 지휘하의 견제부대는 경항모 류죠를 중심으로 중순양함 도네, 구축함 2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 나구모의 일본의 제3함대와 다나카의 과달카날 공격부대(28연대 본대병력 포함)가 각각 트럭 섬과 라바울의 기지를 떠나 과달카날 부근 해역에 도착한 날은 1942년 8월 23일이었다.


바로 그날 오전 9시 50분, 다나까 제독 휘하의 과달카날 공격부대가 과달카날 섬 북방 약 380km해상에서 불행히도 미군에게 발각되고 만다. 하지만 다나까 제독은 곧 침로를 변침하여 북상함으로써 득달같이 현장에 달려온 새러토가의 함재기들을 무사히 따돌릴 수 있었다.


플레처 제독은 일본함대에 관하여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아직 일본군의 항모기동부대가 실제보다 더 북쪽에 있다고 믿고 23일 오후, 항공모함 와스프를 급유를 위하여 남하시킨다.

드디어 결전의 날인 24일,
오전 9시 5분에 미군의 수상정찰기가 말라이타 섬 북방 350km해상에서 경항모 류죠, 중순양함 도네, 그리고 2척의 구축함으로 이루어진 일본군의 견제부대를 발견했다(당시 일본의 견제부대와 미항모기동부대와의 거리는 약 480km). 적항모 발견의 보고를 받은 플레처 제독은 와스프가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적의 항모가 출현하자 적잖이 당황했으나 물러서지 않고 휘하에 있는 두 척의 항모만으로 전투를 치르기로 결심한다.

한편 경항모 류죠에서는 미함대를 정찰하는데 실패, 예정에 따라 오전 11시에 자신이 보유한 함재기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전투기 15대, 폭격기 6대를 발진시켜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하기로 결정한다.


 

좀 더 정확한 정보를 기다리고 있던 플레처 제독이 바로 이순간 결단을 내려 공격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오후 12시 29분, 항모 엔터프라이즈에서 급강하폭격기 23대와 호위전투기들로 편성된 제1차 공격대가 견제부대를 향하여 발진했고, 오후 1시 45분에는 항모 새러토가에서 급강하폭격기 30대와 뇌격기 8대 및 호위전투기들로 편성된 제2차 공격대가 다시 견제부대를 향하여 발진했다. 바로 이 때 견제부대의 320km북방에서 강력한 일본군의 주력 항모기동부대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은 플레처 제독은 즉각 제2차 공격대에게는 목표를 바꿔 북쪽의 일본군 항모기동부대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곧이어 미군 제1차 공격대가 일본함대의 견제부대의 상공에 도착, 휘하 항공기의 절반 이상을 이미 헨더슨 비행장 폭격에 내보낸 후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 있던 경항모 류죠를 난타했고 이 때 심하게 얻어맞은 류죠는 오후 8시경 침몰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북쪽으로 일본군 항모기동부대를 찾아 떠났던 새러토가의 제2차 공격대는 대부분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다만 2대의 급강하폭격기가 항공모함 쇼가꾸에 접근하여 폭탄을 투하, 약간의 피해를 입혔을 뿐이었다.

 

견제부대로부터 교전소식을 들은 나구모 제독은 즉각 수상정찰기를 띄워 오후 2시 5분, 남동쪽으로 290km떨어진 해상에서 행동 중이던 미항모기동부대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투기 12대, 급강하폭격기 9대, 뇌격기 6대로 이루어진 제1차 공격대를 오후 3시 7분에 출격시켰고, 한 시간 후에는 같은 숫자로 이루어진 제2차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플레처 제독은 새러토가와 엔터프라이즈를 약 16km의 거리를 유지하게끔 분리시키고 각각 대공원형진을 형성한 다음, 53대에 달하는 전투기를 함대상공에 대기시킨다. 또한 2척의 항공모함에 남아있던 급강하폭격기와 뇌격기를 전부 발진시켜 일본함대공격에 나서게 했다. 이 전술은 미드웨이 해전의 전훈에 입각한 것으로 적기의 내습에 대비 항모상에서 공격받을수 있는 항공기들을 최대한 띄워 보내 방어와 공격에 최대한 이점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곧이어 오후 4시경,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가 140km거리에서 일본군의 제1차 공격대를 포착했다. 오후 4시 40분, 꼬리를 물고 덤벼드는 미전투기들을 뿌리치고 또한 함대에서 쏘아올리는 치열한 대공포화를 뚫고서 엔터프라이즈에 접근한 일본군의 급강하 폭격기에서 투하한 폭탄 1발이 엔터프라이즈의 후방 함체에 명중했다. 이어서 두 발의 폭탄이 더 명중한다.

 

이 폭탄들은 엔터프라이즈의 엘리베이터를 파괴하고, 격실들을 무너뜨렸으며, 함체 옆면에 구멍을 내었고 화재를 일으켰다. 엔터프라이즈는 일시적으로 작전능력을 잃고 함내는 일대혼란에 빠진다(이 때의 피폭으로 74명이 전사했다). 하지만 미해군의 함정 손상관리 및 응급처치능력은 정말 경이적인 것이었다.


엔터프라이즈의 손상관리반은 화재는 점점 번져가고 키마저 작동하지 않으며 함체는 점점 기울어지고 있던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손상관리,현장보수 및 소방활동을 펴서 결국엔 화재를 잡고 피폭 1시간 후에는 시속 24노트의 속력으로 함재기의 이착함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후 엔터프라이즈는 일본 항모기동부대를 공격하러 갔다가 목표물을 찾지 못하고 돌아온 자신의 함재기들을 헨더슨 비행장으로 날려보낸 후 곧 전장을 이탈했다.


그런데 엔터프라이즈가 한참 사경을 헤매던 그 시각, 사실은 일본군의 제2차 공격대가 시시각각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공격대는 침로를 40도 가량 잘못 잡아서 사경을 헤매고 있던 엔터프라이즈를 발견하지 못한 채 귀함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 2차 공격대가 심하게 손상을 입은 엔터프라이즈를 제대로 발견했다면 아마도 미해군의 상징이었던 엔터프라이즈호는 존재 하지 않게 되었을런지도 모른다. 어쩄든 엔터프라이즈로서는, 그리고 미군 측으로서는 엄청난 행운을 얻은것이었다.

 

한편 미항모기동부대를 떠난 공격대도 일본 항모기동부대를 찾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새러토가를 떠난 급강하폭격기 2대와 뇌격기 5대는 곤도 제독의 지원부대를 발견하곤 그 중에서 수상기 모함 지또세에게 달려들어서는 폭탄 2발을 명중시켜서 전투불능으로 만들어 버렸다.


날이 어두워지자 양함대간의 항공전은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곤도 제독은 일본함대의 우세한 수상함 세력을 이용하여 주포를 이용한 야전을 감행할 결심을 한다. 그리하여 아베 제독 휘하의 전위부대를 자신의 지원부대에 합류시킨 다음 전속력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한편 플레처 제독은 구축함 한 척만을 남겨 비행사의 해상구조임무를 수행토록 하고는 남하하여 전장을 이탈했다. 곤도 제독은 전속력으로 남하하였으나 미함대와 접촉을 이루지 못하자, 25일 0시를 기하여 변침, 북상하여 나구모 제독의 공격부대와 함께 트럭 섬으로 귀항하게 된다.

한편 다나까 제독의 과달카날 공격부대는 미일 항모기동부대간의 전투와는 상관없이 곧장 과달카날 섬을 향하여 남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25일 아침이 되자 헨더슨 비행장으로부터 미군기들이 날아와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시점에서 이 다나카의 공격부대를 지원하기로 되어 있었던 나구모의 3함대 기동부대는 전술한 바와같이 이미 북쪽으로 철수해버린 상황으로 다나카의 공격부대는 전혀 항공지원을 받지 못한채 미해병대 소속 항공기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여기에는 해병대 소속의 비행기말고도 전날 엔터프라이즈에 착륙하지 못하고 과달카날 비행장으로 날아온 함재기들도 가세해 공격해온다.
이 공격대는 항공엄호가 전혀 없는상황에서 다나까 제독의 기함인 경순양함 진쑤를 중파하고 수송선 긴류마루를 순식간에 격침했다.


다나까 제독은 할 수 없이 사령관기를 구축함 가게로에 옮겨 달았는데 불과 몇 분 후 이번에는 에스피리투산토에서 출격한 미육군항공대 소속의 B-17폭격기들이 폭탄을 퍼부어 구축함 무쓰기를 격침해 버렸다(B-17폭격기는 중형의 육상용 고공폭격기로서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알려졌듯이 함선같은 해상위의 움직이는 목표들을 폭격하기엔 적당치 않는 기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크지도 않았던 구축함 무쓰가 B-17기의 폭탄에 맞아 격침되었다는 것은 일본해군으로서는 정말 억세게 재수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나까 제독은 아직도 과달카날 섬까지는 180km가 더 남아있고 아군의 공중엄호가 전혀 없는 현재 상황에서 더 이상의 전진은 무리라고 판단, 변침하여 라바울로 돌아가 버렸다. 이로써 동부솔로몬 해전이 끝이 난다.

이 해전에서 미국 측은 항모 엔터프라이즈가 대파되고, 항공기 25대를 잃는 피해를 입었는데 비해, 일본측은 경항모 류죠를 위시하여 구축함 1척(무쓰기), 수송선 1척(긴류마루)이 격침당했고, 수상기 모함 지또세가 대파, 경순양함 진쑤가 중파되었으며 항공기 상실이 75대에 달했다. 또한 일본측으로서는 과달카날 섬에 대한 공격작전이 좌절되고 말았다. 따라서 전투의 피해 상황면에서는 비슷할런지는 모르겠지만 전투의 목적달성의 측면에서 비교하자면 명백한 미군의 승리였다.

여기서 한가지 집고 넘어갈 것은 다나까 소장이 이끌던 과달카날 공격부대가 입은 손실의 대부분이 24일 오후, 나구모 중장이 이끌던 일본 제3기동함대가 갑자기 트럭 섬으로 철수한 결과로 생겼다는 것인데, 당시 일본의 정규항공모함 2척은 멀쩡했고 미국 측은 엔터프라이즈가 대파되어 전장을 이탈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나구모 제독이 트럭 섬으로 주력부대를 철수시켜버려 결국 다음날인 25일, 과달카날 공격부대가 항공엄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헨더슨 비행장을 출격한 미군기의 공습에 무방비로 노출되도록 방치한 것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우유부단한 판단으로 우수한 항공기와 조종사들과 4척의 정예항모들을 잃어버린 실수에 이은 나구모 제독의 또 하나의 판단미스로 보는 시각이 戰史家들 사이의 중론이다.

이 전투는 미군으로 하여금 핸더슨 비행장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도록 하였고 일본측으로 하여금은 헨더슨 비행장을 반드시 탈환해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했는데 그런 미해병대의 인식과 일본군의 의지가 곧 충돌하면서 헨더슨 비행장에서 대규모의 육전이 벌어지게 된다. 바로 이것이 그 유명한 '피의 능선의 전투'(The battle of Bloody ridge")이다.

 

 

 
 
4.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



이찌키부대의 참패와 동부솔로몬 해전에서의 패전후 일본군 대본영은 핸더슨 비행장탈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곧바로 가와구찌 기요다께 소장이 지휘하던 제35여단에게 과달카날을 재차 탈환할 임무를 준다.


 

가와구치 키요다케 소장. 그는 일본육군 최고의 엘리트출신으로 유능한 인물이었으며 곧있을 피의능선전투에 참가한후부터 과달카날 전투가 끝날때까지 미해병대에게 가장 위협을 준 뛰어난 전술가였다. 그러나 그의 유능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상사의 신임을 얻지 못한 탓에 제대로 지휘권을 가지지 못해 결국 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운명이기도 했다.

여단장 가와구찌 키요다케 장군이 인솔하는 4,200명의 제35여단 본대는 8대의 구축함을 사용하여 과달카날로 이동하고 오까 아끼노스께 대좌가 인솔하는 1개 연대 2.000명으로 편성된 지대는 31척의 목제발동선에 나누어타고 과달카날 섬을 향하여 출발했다. 여기서 하나 집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동부솔로몬해전에서 수송선 한척을 상실한 다나까 제독이 카와구찌 부대에 수송선을 제공하기를 거부하여 4200명이나 되는 병력을 한 척당 수용인원이 불과 200명정도에 불과한 구축함에다 모조리 꽉꽉 채워서 적지로 출발시켰다는 것이다. 그것도 제대로 공중엄호도 받지 않은채.


덕분에 4200명의 카와구찌 여단의 병사들은 과달카날섬에 도착할떄까지 1주일간의 항해동안 제대로 눕지도 못할 만큼 좁은 공간 탓에 충분한 수면을 취할수가 없었다.

어쨌던 카와구치가 이끄는 35여단 본대는 밤에만 항해하고 낮에는 섬의 그늘에 숨어있는 방식으로 남하하여, 핸드선섬의 커스터드 비행대의 공격을 거의 받지 않은채 한 척의 피해도 없이 9월 1일 동쪽 타이부 곶에 상륙했다. 그러나 4200명이나 되는 병력에 비해 화력이 매우 부족했는데 예를 들어 화포라고는 94식 75mm산포 8문이 전부였다. 게다가 구축함에 통조림 고기 채우듯 병력만 꽉꽉 채워 오는 바람에 보급물자들을 제대로 실어 오지 못하여, 탄환이나 포탄까지 부족한 상황이었다.

오까 대좌가 인솔한 지대의 경우는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목적지로의 항해도중 2차례에 걸친 커크터스 비행대의 공습으로 참담한 피해를 입어 31척의 목조 발동선 중 26척이 침몰하고 겨우 5척만이 예정보다 훨씬 늦은 9월 5일 저녁, 미해병대 교두보의 서쪽인 에스퍼란스 곶에 상륙했다. 처음에 출발할 때의 병력이 2,000명이었으나 상륙한 병력은 겨우 400명, 그러니까 1,600명의 병력이 항해도중 미군의 공격을 받고 바다 밑에 수장된 것이다. 그나마 무사히 상륙한 400명의 병력중에서도 70여명정도가 부상을 입은 상황이었으므로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겨우 300여명. 그야말로 비참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여기에 맞서는 미해병대는 이미 준비된 방어전이었다. 19,000명의 휴식을 충분히 취한 병력에, M2A1 105mm곡사포를 포함하여 70문 이상의 화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스튜어트 경전차도 가지고 있었다. 또 일본군보다 보급상황이 훨씬 좋았기 때문에 포탄이나 탄환이 충분했다. 뿐만아니라 배후의 헨더슨 비행장에는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대파된 엔터프라이즈와 8월 31일 일본잠수함의 어뢰를 맞은 새러토가에서 날아온 항공기, 그리고 소수의 육군기까지 가세하여 총 52기의 항공기가 있었다.

이렇게 준비된 미해병의 강력한 방어진을 향해서, 지칠대로 지치고 보급도 제대로 안된 경무장의 소규모 일본군 병력들이 전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술에 능했던 가와구찌 장군은 미해병대가 동쪽에 주방어선을 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이 예상치 못한 남쪽으로부터 기습하기 위하여 정글을 뚫고 남서쪽으로 진군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미해병대는 이미 가와구찌 부대가 타이부 곶에 상륙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밴디그래프 미해병대 소장은 그 곳으로 'Red Mike'라는 별명을 가진 Austin Edson중령의 제1해병침투대대를 파견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는 한편, 파견된 에드슨 중령의 방어 부대는 더나아가서 공격적인 자세를 취해, 가와구찌 장군의 본대가 떠난 뒤 아직 남아있던 소수의 일본군 잔여부대를 공격하여 그들을 섬멸하고 가와구찌 부대의 주력이 남쪽으로 갔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 곳에서 보관 중이던 일본군의 식량을 몽땅 뺏어오고 말았다. 이 때 미군에게 식량을 뺏겨버린 가와구찌 부대는 미해병대에 대한 공격이 실패한 뒤 이후 극심한 식량부족 사태를 겪게 된다.

에드슨 중령의 보고를 들은 밴디그래프트 장군은 일본군의 주공이 남쪽으로부터 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엔더슨 중령의 지휘하에 제1낙하산 대대를 헨더슨 비행장에서 1km쯤 남쪽에 있는 T자형의 능선에 배치하게 되는데 바로 이 능선이 가와구찌 부대의 주력과 미해병대의 엔더슨부대간의 12일 밤부터 14일 새벽까지의 이틀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피투성이 능선'(Bloody Ridge)이다. 그리고 이 능선에서 벌어진 가와구찌 부대와 미해병대와의 전투를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라고 부른다.

1942년 9월 12일 저녁 9시, 드디어 94식 75mm 산포가 발사하는 5발의 포격을 신호로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바다에 떠있던 일본군 순양함이 사출한 수상기가 헨더슨 비행장의 상공에 조명탄을 투하했다. 어둠을 밝히는 조명탄의 불빛 아래에서 일본군은 일제히 돌격을 시작한다. 가장 동쪽에서 공격을 감행한 35여단 소속 미즈노 대대는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미해병대의 집중포격에 풍지박산이 나면서 2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고는 공격이 좌절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불과 400명 정도가 겨우 상륙해서 거의 전투력을 상실한 오카 연대는 공격다운 공격도 못해보고 미해병대의 방어진에의해 격퇴되어린다.

따라서 역시 전투의 중심이 된 것은 카와구치가 이끌던 일본군 주력부대의 돌격선상에 있던 피투성이 능선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서쪽에서 공격했던 고꾸쇼오 대대는 군도를 치켜든채 돌격하는 고꾸쇼오소좌 를 선두로 1개중대가 피투성이 능선의 좌측으로 우회하여 그 중 1개분대가 전진배치되어 있던 M2A1 105mm곡사포 진지에까지 도달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비행장 활주로에서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제5연대 2대대의 역습을 받아 다시 남쪽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때 선두에서 군도를 들고 돌격하던 고꾸쇼오 소좌는 미군포진지의 포신에 걸터앉은채 그대로 전사했다. 한편 동쪽의 다무라 대대도 역시 일부가 피투성이 능선을 우회하여 헨더슨 비행장의 창고 몇 개를 점령하였으나 역시 무시무시한 화력을 앞세운 제 5연대 2대대의 역습으로 대대장 다무라 소좌가 행방불명 된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곤 다시 남쪽으로 쫓겨나고 만다(이때 다무라 소좌는 놀랍게도 활주로 부근에서 사흘간이나 숨어 지내다가 탈출하여 본대와 합류하였다고 한다). 

한편 와타나베 대대의 전 병력과 다무라, 고꾸쇼오 대대의 대부분의 병력과 맞선 에드슨 중령 휘하의 제1침투대대와 제1낙하산 대대는 최선을 다하여 싸워서 날이 밝을 때까지 일본군 주공의 엄청난 압력을 견뎌내면서 일부 진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진지를 고수하게된다. 그 날 하루밤 피투성이 능선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은 거의 600명..... 엄청난 병력손실이었다.


에드슨 중령은 13일 새벽 2시 30분경, 방어선이 최대의 위험에 빠졌을 때에도 증원군이 필요하느냐고 묻는 밴디그래프트 장군에게 증원군 없이도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다고 확답함으로써 예비대였던 제 5연대 2대대가 활주로 부근에서 그대로 머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도록 했고, 그 결과 제 5연대 2대대는 피투성이 능선을 우회하여 M2A1 105mm포진지에 돌입해 온 고꾸쇼오 대대와 활주로 부근까지 육박해 온 다무라 대대의 일부 병력을 제때에 격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날이 밝자 헨더슨 기지의 항공기들이 날아올라 피투성이 능선 일부분에 머물던 일본군을 맹폭하여 밤사이 일부 점령했던 진지에서 그들을 마저 몰아내 버렸다. 따라서 에드슨 중령 휘하의 2개 대대는 어제밤의 전투에서 일부 상실했던 진지들을 쉽사리 다시 되찾게 되고 반면 죽을힘을 다해 점령한 일부 고지를 공습으로 한순간에 빼앗겨버린 일본군은 사기가 땅에떨어졌다.


하지만 13일 오후, 에드슨 중령은 현재의 방어선을 그대로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 수백미터 후퇴하여 방어전면이 약간 축소된 새로운 방어선을 편성하기로 결정한다. 이 때 에드슨 휘하의 2개 대대에 수개 중대의 증원병력이 추가된다.


또한 이날 제 11연대 5대대 소속의 M2A1 105mm곡사포 12문이 활주로 남쪽에 방열함으로써 피투성이 능선을 더 정확하게 화력지원할 수 있는 '준비된' 태세를 갖추었다. 이 12문의 105mm포들은 13일 저녁에 재개된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에서 아군의 방어선에서 바로 200m떨어진 지점까지 정확하게 포격, 일본군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입히게 된다.(본인 역시 포병출신이지만 아군의 바로뒤 후방에서 아군 최선두의 200M 전방에다 정확히 포격을 가한다는 것은 고도의 정밀도를 필요로 하면서 동시에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작전이다.)

 

13일 저녁의 전투에서 이 105mm포들은 1,992발의 포탄을 발사하여 전사 및 부상 약 1,200명이라는 막대한 인명손실을 일본군에게 입혔다고 한다(반면에 일본군이 보유한 8문의 94식 75mm 산포가 발사한 포탄 수는 이 3일간의 전투기간을 다 합쳐도 1,000발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하니.... 이미 화력에 승부가 결정난 셈이다).

 
또한 미군의 포진지에서 쏘아댄 일제사격(일명 'T-O-T'라고 부르는 사격으로 전포대의 포들이 동시에 포탄을 발사하는 것)이 가와구찌 장군의 지휘소를 명중시킴으로써 하마터면 가와구찌 장군이 전사할 뻔했다고 한다.

13일 저녁, 이렇게 전력이 강화된 에드슨 휘하의 2개 대대에 대하여 가와구찌 부대는 남아있던 모든 공격력을 집중하여 최후의 공격을 감행하기로 한다. 조명탄의 발사로 돌격신호가 내려지자, 군도를 손에든 각 장교들을 선두로 그때까지 살아남아있던 잔존병사들은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다시 피의 능선을 향해 돌격했다. 대신 이번엔 이전처럼 맹목적인 돌격이 아니라 카와구치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각 지형의 엄폐물을 이용한 효과적인 돌격작전을 실행했다. 에드슨 부대는 또다시 최선을 다하여 맞섰으나 새로운 방식의 돌격작전으로 집요하게 공격해 오는 일본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바로 이 순간이 6개월동안의 과달카날의 수많은 전투에서 미군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었다. 

전술한 105mm곡사포의 절대적 지원을 등에 업은 에드슨 부대의 방어선은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비록 후퇴하긴 했으나 여전히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쌍방간의 치열한 전투가 밤새 벌어지고 마침내 아침이 밝아오자 헨더슨 비행장의 항공기들이 떼를 지어 이륙하여 또다시 피투성이 능선에 기어올라와서 기진맥진해있던 일본군들에게 폭탄과 기관총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너무나 큰 인명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드디어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고 피투성이 능선으로부터 다시 후퇴하고 말았다. 이로써 3일간 계속된 '피투성이 능선의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전투에서 가와구찌 소장의 제 35여단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일본군의 전사자는 장교 18명, 하사관 605명을 포함하여 거의 2,700여명에 달했는데, 12일 저녁, 공격개시 때만 해도 4,500명에 달하던 병력이 불과 이틀후 1,8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하니 얼마나 일본군의 피해가 많았는지 짐작이 간다. 게다가 그나마 살아남은 병력도 식량이 고갈된 상황에서 풀뿌리를 캐고 벌레를 잡아먹으면서 연명해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대부분의 병력이 말라리아에 걸려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한 상황이었다. 반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군의 인명손실은 고작 전사 31명, 부상자 103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한가지 에피소드.
마지막 13일의 전투, 최후의 돌격작전때 가와구찌 부대에서 고꾸쇼우부대와 다무라 부대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던 와타나베 대대가 공격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인데, 전날의 공격에서 미군의 무서운 집중포화 맛을 본 대대장 와타나베 소좌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통신을 끊고 부관과 함께 정글속에 숨어 버린것이다.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선임 중대장이 대대장을 대리하여 대대를 이끌고 공격에 참가해야 하나 그런 시원찮은 대대장 밑에는 역시 그런 시원찮은 중대장들만 모이는 법인지 아무도 대대를 이끌고 공격에 참가하지 않았고, 결국 와타나베 대대는 공격에 불참하고 말았다. 그런데 만약 전술했던 마지막 전투에서 고꾸쇼우부대와 다무라 부대가 비행장 활주로까지 진출해서 미군과 공방을 벌이고 있을때 와타나베 대대가 함께 진격했더라면...그리하여 또 운이 좋아서 해병대 사령부를 점령하고 미해병 사령관을 생포하기라도 했다면...아마도 이 과달카날섬은 다시 일본군의 수중으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과달카날섬을 일본군이 탈환하게 되었다면 분명 대규모의 정예 육군병력을 다시 배치해 섬에다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했을 것이고 비행장 활주로에서 이륙한 일본의 장거리 폭격기들은 미해군의 보급선을 계속 괴롭혀 전쟁도 더욱 장기간 오래 끌게 되었을지도.모른다. 그러나 어쩄든 와타나베 소좌는 그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임무를 저버렸고 승리의 여신은 미군의 편을 들어주었다.

한편 일본본토의 대본영은 이 피의능선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과달카날에 있는 미해병대의 병력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게 되는데, 이러한 대병력을 가진 미해병대를 과달카날 섬에서 몰아내려면 상당한 규모의 공격군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를 관장하던 제17군사령관 햐꾸다께 하루요시 중장의 직접 지휘 하에 2만의 병력과 80문의 각종 화포를 갖춘 육군의 정예사단 2개(제2사단과 제38사단)를 투입하여 과달카날 섬을 완전 장악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많은 병력, 장비 및 보급품을 어떻게 라바울에서 과달카날 섬까지 무사히 운반하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일본군은 구축함들을 이용하여 라바울에서 섬과 섬들사이의 해역을 따라 남하하면서 낮에는 섬의 그늘에 숨어있다가 밤에만 항진하여 저녁 때쯤에 과달카날 섬에 도착, 철야로 병력이나 장비, 보급품등을 양륙하고 난뒤에는 동이 트기 전에 재빨리 내빼는 방법을 선택한다. 이것을 미군들은 '도꾜 익스프레스(Tokyo Express)'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미군측도 역시 과달카날 섬에 대한 보급과 병력증강을 서두르고 있었는데 9월 26일부터 진주만을 떠나 남부태평양지역을 시찰하기 시작한 니미츠 제독은 10월 1일 뉴칼레도니아의 방어를 맡고 있던 부대 중 하나인 육군 아메리칼 사단(Americal Division)소속의 제164연대를 항공모함 호넷과 전함 워싱턴의 호위 하에 과달카날로 증파하도록 한 것이다.


이리 하여 이미 증원되어있던 해병 제7연대와 해병 제11연대에 이어 2,500명의 병력을 가진 육군 제164연대가 섬에 도착함으로써 과달카날의 미군 숫자는 거의 20000명을 훨씬 넘는 숫자를 헤아리게 된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미육군 제164연대를 수송하는 수송선단보다 한발 앞서 과달카날 해역에 나아가 일본군의 도꾜 익스프레스를 저지하고 수송선단의 안전을 확보하는 임무가 Norman Scott소장의 제64기동부대에게 떨어지게 되는데, 이 스코트 제독의 함대가 마침 헨더슨 비행장을 야간에 포격하기 위해 남하중이던 고또 아리또모 소장 지휘의 일본함대와 10월 11일 밤에 조우하여 해전이 벌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에스퍼란스곶 해전'이다

 

 

 

                                                       

                                                        5. 에스퍼란스곶 해전


스코트 제독의 제64기동부대가 일본군의 도꾜 익스프레스를 저지하고 육군 제164연대를 수송중인 선단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과달카날 서방해상에서 경계 임무에 임하고 있을 때 일본해군 아리토모 고또 제독의 함대가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할 임무를 띠고 북쪽에서부터 슬롯을 따라 남하하고 있었다.

당시 美제64기동부대의 전력은 기함인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 솔트레이크시티, 경순양함 보이스(Boise), 헬레나, 및 구축함 파렌홀트(Farenholt), 던칸(Duncan), 레이비(Raby), 뷰캐넌(Buchanan) 및 맥컬러(McCulloch)의 총 9척으로 편성되어 있은 반면. 이에 맞서는 고또 제독의 일본함대는 중순양함 아오바, 후루다까, 기누가사, 구축함 하쓰유키 및 후부끼의 총 5척으로 이루어져 있어 미군보다 열세였다. 게다가 미군은 경순양함 헬레나와 스코트 제독의 기함인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에 레이더까지 장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우세한 세력의 제64기동부대가 1942년 10월 11일 밤 사보 섬과 에스퍼란스 곶 사이를 경계하며 구축함 던칸과 파렌홀트를 선두로 중순양함, 경순양함, 다시 구축함의 순서로 늘어선 단종진을 유지한 채 북동쪽으로 항진 중이었다. 당시로서는 최신형 레이더를 새로 장비한 경순양함 헬레나가 서북쪽에서 접근 중인 고또 제독의 함대를 발견한 시각은 11일 밤 11시 25분, 거리는 약 27km정도 떨어져 있을때였다. 이 소식은 즉시 기함인 샌프란시스코로 보내졌는데 사령관 스코트 제독은 자신이 타고있는 기함 샌프란시스코에 장비된 저성능의 레이더가 일본함대를 발견할 때까지 휘하 함대에게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으려 했다. 게다가 샌프란시스코의 고물 레이더가 여전히 일본함대를 발견하지 못하자 7분 뒤인 11시 32분, 전함대에게 좌회전하여 180도로 변침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이 명령 때문에 선두에서 항진하던 구축함 2척(던칸과 파렌홀트)는 양 함대의 주력함들이 서로 8인치와 6인치 주포를 사정없이 쏘아대는 전장의 한가운데 끼어버렸고 한편 진형의 뒤쪽에서 항진하고 있던 구축함 2척( 뷰캐넌, 맥컬러)은 함대주력에서 멀어져버려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다. 아무튼 180도 변침을 실시한 후 얼마 뒤 샌프란시스코의 저성능 레이더에도 9km까지 접근한 고또 제독의 함대가 잡혔고 11시 46분, 이미 선두함이 해상전투에서는 엄청나게 가까운 거리라고 하는 5km까지 접근하고 있던 일본함대에 대하여 발포명령이 내려졌다. 즉시 중순양함의 8인치 주포들과 경순양함들의 6인치 주포들, 그리고 5인치 부포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당시 미함대는 일본함대가 형성하고 있던 단종진의 진행방향을 측면으로 가로막고 옆으로 정렬한, 일명 'T'자형 대형을 취하고 있었는데 함대포격전으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공격위치를 점하고 있었다.(T자형 대형 : 한줄로 줄지어 오는 상대방의 진행방향을 측면 횡대로 막는 대형을 말하는데 각각의 함선들이 가지고 있는 함포를 최대한 사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전 함대의 함선이 상대함대에 대해 최대의 화력을 집중시킬수 있는 대형으로 쉽게 생각하면 나란히 줄지어 달려오는 저글링들을 횡대로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는 마린부대가 달려오는 족족 횡사시키는 모습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되리라 믿는다.)

한편 선두에 양쪽으로 우현쪽에 후부끼, 좌현쪽으로 하쓰유끼의 양 구축함을 앞세우고 고또 제독의 기함인 중순양함 아오바, 후루다까, 기누가사의 순서대로 단종진을 형성하고 항진하던 고또 제독의 함대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근거리에서 미함대의 일제사격을 받고는 기함인 아오바가 초탄에 대파되고 만다.

이 때 사령관 아리토모 고또 제독이 중상을 입게 되는데 그때까지도 그는 미함선이 아닌 아군의 함선이 실수로 자신의 배를 포격한 줄로 생각하고 '빠카야로우(바보녀석)'를 계속 외치다 곧 사망했다고 한다. 고또제독의 사망과 더불어 지휘권은 곧 2번함 후루다까의 함장에게 옮겨가게 되는데 그것을 잘도 알았다는 듯이 미함대의 일제포격이 아오바에 이어서 2번함 후루다까에게 옮겨왔다. 그때까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던 일본함대는 만일 그대로 미함대의 포격이 지속되었다면 함대전멸을 피하기 힘든 운명이었다.

그런데 1분동안 신나게 일본함대를 두들기고 있던 미함대는, 갑자기 함대의 선두에서 항진하고있던 구축함 2척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 자신들이 포격하고 있는 상대가 혹시 아군의 구축함일지도 모른다는 스코트 제독의 판단에 따라 잠시 포격을 멈추게 된다. 이 포격을 멈춘 적막의 시간이 약4분.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져있던 일본함대에게는 그야말로 생명줄 같은 시간이었다.


스코트 제독은 함대 내의 각 함정에게 자신의 위치와 상황을 보고하게 한 후 자신들이 포격한 함정이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하고 4분 후, 다시 포격을 명한다.

하지만 그 결정적인 4분간의 공백기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일본함대의 새로운 지휘관인 후루타카의 함장은 곧 기민하게 함대변침을 실시하여 반대방향으로 내빼기 시작한다. 비록 기습을 당하기는 했으나 야간전투경험이 풍부했던 일본함대는 곧 미함대가 자신들에게 대하여 'T'자형 대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고 이 상황에서 정면승부를 거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깨닫고는 즉시 180도 변침하여 오던 길을 되돌아 북서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도주하면서 자신들을 포격하고 있는 미함대에 대하여 치열하게 응사까지 하기 시작했다.


이 때 일본함대에게 접근하여 어뢰공격을 가하려던 미 구축함 던칸이 일본함대의 집중적인 포격을 받아 침몰했다. 또 다른 구축함인 파렌홀트도 역시 피해를 입었다. 또한 경순양함 보이스의 경우는 전방 1번과 2번 포탑이 일본군이 발사한 수발의 8인치 포탄에 명중하여 포탑 내의 인원이 전원 몰사했다. 천만다행으로 피탄 당시 보이스의 포탑 내에는 포탄과 장약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더큰 피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다량의 포탄이나 장약이 유폭되었다면 진주만 기습 때 탄약고 폭발로 순식간에 침몰한 아리조나같은 운명에 쳐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력에서도 우세하고 유리한 위치에 자리잡았으며 무엇보다도 기습적인 첫 공격을 가했던 미국함대는 시종 전투의 주도권을 잃지 않고 일본함대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미함대가 기다리고 있던 우측으로 변침했던 중순양함 후루다까와 구축함 후부끼가 격침되었고 아오바는 첫 일제사격에서 대파된 채로 필사적으로 도주중이었으며 미함대와 반대쪽이었던 좌측으로 변침했던 중순양함 기누가사와 구축함 하쓰유키도 피해를 입었다.

12일 오전 0시 28분, 필사적으로 도주하는 일본함대를 서북쪽으로 침로를 바꾸어가며 30여분간 추격하던 스코트 제독은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변침, 전장을 이탈하게 된다. 이로써 '에스퍼란스곶의 해전'은 끝이 난다.

일본함대는 이 전투에서 중순양함 후루다까와 구축함 후부끼가 격침되었고 사보해전에서 맹활약했던 중순양함 아오바가 대파되어 사령관 고또 제독이 전사했으며 중순양함 기누가사와 구축함 하쓰유키가 소파되었다.


그러나 미함대는 구축함 던컨이 침몰하고 경순양함 보이스가 대파, 구축함 파렌홀트가 소파되는 정도의 피해에 그쳐, 양함대의 전과를 놓고 볼 때 분명한 미함대의 승리였다. 다만 스코트 제독이 조금만 기민한 판단력을 발휘해 최초 4분간의 포격공백없이 계속 일본함대를 몰아붙였더라면 아마도 일본함대를 전멸시킬수도 있었던 아쉬운 한판이었다.

어쩄든 TOKYO EXPRESS 작전을 둘러싼 양함대의 짧은 해전은 이로서 끝이 났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더 큰 전투의 서전에 불과했다. TOKYO EXPRESS 작전을 해상엄호하는 동시 육상에서의 일본군 3차 공격을 지원하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미항모부대를 견제 하기 위해 나구모 중장과 곤도제독이 이끄는 거대한 연합함대가 조금씩 조금씩 남하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와 동시에 미국측에서도 니미츠 총사령관에게 막 임명장을 받은 헬시제독이 이끄는 미 제16,17기동함대가 새로이 수리를 마친 엔터프라이즈호를 합류시킨후 과달카날섬을 향해 서서히 항진중이었다. 이 양측의 함대는 그야말로 당시 미국 일본 양국이 태평양에서 기동시킬수 있는 최고의 주력함대들이었다. 바로 이 양측의 거대한 항모함대가 솔로몬 제도의 산타크루즈 해안에서 정면으로 서로 맞부딪혀 일대 항공해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산타크루즈 해전(산호해 해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