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면산의 겨울 9 : 미래 한국의 선택- 중국에 굴종, 북에 의한 적화통일, 한.일/한.러군사동맹의 기로
우리들의 미래가 봄은 아니다
입춘이 지난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강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새벽 운동이 만만치 않다. 새벽에 교대 근방 모텔촌을 지나 먹자골목을 지나면 길바닥에는 각종 전단지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종종 걸음으로 새벽길을 걷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참 힘들어 보인다. 새벽 출근 아줌마, 폐지줍는 노인들, 술취한 아저씨와 젊은 사람, 짧은 치마, 짙은 화장에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아가씨, 신문배달하는 사람, 새벽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 새벽 파출부로 출근하는 아줌마들, 일터로 인력 수송차량을 타고 가는 아저씨들, 청소차량 환경미화원이나 길거리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 아저씨를 만날 때마다 고달픈 세벽을 시작하는 그 분들에게 위로를 보내고 싶다.
양재역 방향의 버스나 사당역 방향의 버스는 대부분 사람들이 만원인데, 모두가 새벽 인력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이다.그런 사람들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늘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일자리가 부족하고 생활수준이 떨어져 간다는 이야기다. 사당역 근방 서초카페골목에는 작년보다 토요일 벼륙시장에서 장사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삶이 점점 더 팍팍해지는 것을 체험적으로 느끼게 된다.
새벽을 여는 피곤한 서민들
국민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데 정치권은 금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모두 선거 삼매경에 빠진 상태이다. 여야 할 것 없이 재원이 불투명한 각종 선심성 복지정책을 마구잡이로 쏟아내고 있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론을 들먹이며 국민들의 표를 의식하여 대기업을 때려잡을 정책을 마구 쏟아내고 있다. 대기업 자녀들의 명품가게 진출, 빵집 등 주요 업종 독점, 중소기업 여러 업종 침범, 동네 골목상권 침범, 젊은층 취업확대 대책 미흡, 자녀들에 대한 불법적인 재산상속, 대기업 총수들의 각종 불법행위, 문어발식 기업확장, 정유사, 보험사, 금융권, 통신사 등 매년 엄살을 부리면서 천문학적 이익을 독식하는 등 심화되는 양극화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며 대기업을 옥죄려고 하고 있다.
삼성 애니콜 서비스 센타의 휴대폰 부속값, 비싼 게 문제이고 소비자가 봉이다.
그들이 오늘이 있기까지 국민들의 소비와 희생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비사회적 기업이다.
물론 세계 경제 10위 권으로 나라 경제를 이끌어 온 우리나라 대기업이 창업주나 기업주가 잘나서 성공한 것도 인정되나 대부분 정부의 지원과 국민들의 희생위에서 오늘날의 그들이 탄생하였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비사회적 기업으로 세습화하고 탐욕에만 빠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권력과 재물이 한통속이듯이 정치권과 대기업이 한 통속이 되어 각종 비리와 부패를 저질러온 그들이기에 지금까지 정권이 바뀔때마다 수많은 재벌개혁론이 등장하였지만 어느 정권도 과감한 재벌 개혁을 이룬 정권은 없다. 모두가 동색이라 단지 재벌개혁론은 선거 공약일 뿐 거액의 정치헌금 등 재벌의 거센 비밀 공작에 모두가 나가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골목길 상권을 위협하던 대기업 대형 마트가 영업을 제한을 받을 모양이다. 그러나 영업을 제한한다고 재래상권이 살아나는 게 아닐 것이다. 근본적으로 재래시장이나 골목길 상권이 경쟁력을 갖추도록 가격, 품질, 서비스면에서 경쟁력을 키우도록 정부가 정책적인 배려를 해야 할 것이다. 허영심이 많은 가난하고 없는 사람들이 백화점을 더 찿듯이 대형 마트에서 시장을 보려는 심리는 제품의 가격과 품질도 차이가 있지만 부자들과 같이 시장을 본다는 동류의식의 즐거움이 우리들 마음 속에는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야권을 포함하여 한미 FTA 철폐론이 거세게 대두되고 있는 모양이다. 강대국과 맺은 국제협약을 마음대로 파기한다고? 웃기는 이야기다. 돈 좀 벌고 먹고 살기 좀 편해졌다고 졸부들이 설치는 꼴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미국이 콧방귀를 뀌고 있을 것이다. 미국이 미군철수 한마디만 내뱉으면 사시나무 떨듯이 벌벌 떨 눔들이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배가 불러 비만을 걱정하며 다이어트를 고민하며 살고 있는 나라, 무역 좀 늘어나서 경제력이 세계 10위 권이라고 펑펑 써대는 나라, 언로가 좀 틔었다고 잘낫다고 생각하는 눔들이 마구 반정부 언행을 일삼는 나라, 사회 각 분야가 비리와 부패로 썩지 않은 곳이 없는 나라, 청소년들의 꿈이 옛날에는 광대였던 연예인이고 더럽고 힘든 일은 하기 싫어 부모밑에서 놀고 먹으며 사는 실업자가 천지인 나라, 게임.경마.경정.경륜.빠징코에 빠져 세월과 재산을 탕진하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나라, 이혼을 무슨 스팩처럼 생각하는 나라, 중.고교생, 대학생, 주부 할 것 없이 매춘과 원조교재로생계를 유지하고 사치를 해야 하는 나라, 개천에서 용나기는 틀린 나라, 국민 세금으로 유흥가에서 탕진하고 흥청망청 사용하는 공무원이 부지기수인 나라, 복지자금을 곳감 빼먹듯이 하는 나라, 얼굴을 고치지 않으면 대접받지 못하는 나라, 헛껍데기만 멀쩡하고 속은 텅텅 빈 골빈 사람들이 넘쳐나는 나라, 대통령과 정부를 욕하는 게 인기가 치솟는 나라, 돈 없으면 감옥가고 돈 있으면 면죄부를 받는 나라, 도덕과 윤리가 바닥을 치고 사기와 거짓이 판을 치는 나라, 온갖 비리와 부패로 잡혀가도 떳떳하게 고개 처들고 검찰이 밝혀줄 것이라는 나라, 나라 돈은 쌈지 돈 먼저 보는 놈이 임자인 나라, 나이를 불문하고 눈에 보이는 여자라면 모두 교미의 대상으로만 보이는 성폭행, 성추행이 넘쳐나는 나라,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어렵고 고교 이하는 천민으로 취급받는 나라, 현대판 음서제로 지도층 자녀들은 공기업이나 정부부서에 몰래 취업시켜 주는 나라, 공정한 경쟁이 사라지고 편법으로만 가능한 나라, 내일 망해도 오늘 당장은 즐기고 보자는 나라, 교사가 학생들에게 빰맞고 추행당해도 속수무책인 나라, 대통령, 대기업 회장 , 연예인 등 지위, 나이를 불문하고 자살이 인기를 끌고 있는 나라,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가족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나라, 마녀 사냥과 댓글로 상대를 죽이는 나라, 이름 좀 났다고 거드럼 피우며 사회지도층 행세를 하며 SNS로 팔로우들을 선동하는 나라, 국민과 소비자가 봉인 나라 ......
강남 고속터미널 전경
한국의 미래......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국가 전략 문제의 태두(泰斗) 브레진스키가 그의 저서 '미국, 글로벌 파워에서 위기'에서 가까운 미래에 중국과 인도가 부상하고 미국이 쇠퇴하면서 '지정학적 위험'에 빠질 대표적인 나라로 한국을 꼽았다. 그가 최신 저서에서 세계 패권 국가의 질서 변화에 따른 영향을 가장 먼저, 그리고 직접적으로 받을 나라로 한국보다 앞서 든 나라는 구(舊) 소련에 속해 있던 인구 460만명의 소국(小國) 조지아와 대만뿐이다.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쇠퇴는 한국이 고통스러운 선택에 직면하도록 할 것"이라면서 한국 앞에 놓인 길로 '중국의 지역적 패권을 받아들여 중국에 더 기대는 방안'과 '역사적 반감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관계를 더 강화하는 방안'을 거론했다. 그는 그러나 "미국의 강력한 지원이 없을 경우 일본이 중국에 맞설 수 있는가는 회의적"이라면서 "한국과 일본 등은 미국의 쇠퇴로 미국이 제공해온 핵우산(雨傘)에 대한 신뢰 위기가 닥쳐올 경우 (미국이 아닌) 새로운 핵우산을 찾거나 스스로 핵무장을 해야 할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국이 한반도 통일 문제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면서 "이 경우 한국은 '중국이 지원하는 통일'과 '한·미 동맹 축소'를 주고받기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의 브레진스키가 한국에 대해 미래를 점치고 우려를 표현한 것은 일종의 압력일 수도 있으나 현실적인 우리들의 미래가 선택의 기로를 강요받을 것은 뻔할 것이다. 그 시기는 앞으로 5~10년 후, 길어야 15년이내 동북아시아는 격변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것은 미국이 경제.군사력에서 중국에 추월당하고 중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우뚝 서는 그 시기가 될 것이며 미국이 아시아에서 핵우산을 철수하고 발을 빼려는 시기가 될 것이다.
할머니와 손주, 어린 손주의 미래가 암담하다
우리는 그때가서 통일이 되던 안되던 중국에 비굴하지만 예속화내지 지방정권화로 굴종할 것인지, 아니면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에 의한 적화통일에 나라가 망할 것인지, 아니면 미국이 철수한 공백을 한.일군사동맹이나, 아니면 러시아와 한.러군사동맹을 맺어 중국에 대항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시기가 올 것이다. 물론 우리도 핵무기 개발과 무장은 필수적이며 일본도 핵무장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핵무기 대량공격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이다.
앞으로 이러한 난국에 처할 우리나라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은 정권쟁탈에만 눈이 멀어 이러한 문제를 걱정하고 대비하고자하는 일면은 어느 구석에도 찿아볼 수가 없다. 잔략가도 없고 지식인도 없고 이러한 국가 생존 미래전략을 연구하고 조언하는 브레인도 없다. 모두가 권력과 재물에 눈이 멀어 비리와 부패만 만연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의 한반도 전쟁 시나리오
아래는 오래 전 이야기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와 평화연구소(USIP)는 최근 작성한 보고서(제목: 다루기 힘든 이웃 감시하기)에서 한반도 유사사태 발생시 중국은 인민해방군을 북한에 투입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중국은 지난 1961년 7월11일 김일성과 체결한 ‘조중우호조약’에 따라 제3국의 침략 등으로 북한에 전쟁 상태가 발생할 경우 자동적으로 군사력을 개입할 수 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중국의 ‘군사과학원’이 작성한 전쟁시나리오에는 인민해방군이 한반도 유사사태 발생시 전혀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중국의 대한반도 군사전략이 바뀐 이유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하에서 남한이 북한을 정치적 실체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time.com
문제의 보고서는 보니 글레이저와 스콧 스나이더, 존 S. 박 등 미국 전문가 3명이 지난해 6월 중국을 방문해 중공의 북한 및 군사전문가들과의 토론을 거쳐 작성한 것이다.
이들은 보고서를 통해 “중국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인민해방군을 투입할 것”이라며 “중국은 UN의 공식 승인을 받아 UN과 긴밀히 협력하는 것을 강력히 선호 한다”고 언급했다. 이들 전문가는 “그러나 북한 내부질서가 빠른 속도로 악화되는 데도 국제사회가 재빨리 대응하지 못한다면 중국은 일방적으로 선제 행동에 나설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지난 1961년 7월11일 북한과 체결한 ‘조중우호조약’에 따라 제3국의 침략 등으로 북한에 전쟁 상태가 발생할 경우 자동적으로 군사력을 개입할 수 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중국의 싱크탱크인 ‘군사과학원’이 작성한 전쟁시나리오에는 인민해방군이 한반도 유사사태 발생시 전혀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중국의 대한반도 군사전략이 불(不)개입전략에서 적극적인 개입전략으로 전환된 이유에 대해 대북전문가인 홍관희 안보전략연구소장은 “한국이 그동안 김대중·노무현 정부 하에서 북한을 정치적 실체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한국은 한반도 전역에 대한 영토적 관할권과 주권의 불가침성을 대내외에 다시 한 번 명확히 천명해야 한다”면서 “설사 현 시점에서 어떠한 남북관계 고리가 없더라도 우리는 북한에 대한 ‘외세(外勢) 개입 불가’의 원칙과 북한 지역에 대한 ‘대한민국의 확고하고도 고유한 주권적 권리’를 주장할 근거가 있다. 이는 우리가 하기 나름”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익명을 요구한 모 대북 군사전문가는 12일 <프리존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조중우호조약’을 언급하며 “중국은 한국전 발발 시 자동 개입, 군사력을 지원할 것으로 예상 된다”면서 “중국은 이미 심양군구에 5개 집단군(44만 명)과 제남군구에 25만여 명의 인민해방군 등을 배치해 놓은 상태”라고 언급했다.
그는 이어 “한반도 유사사태 발생시 중국이 북한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상태”라며 “이명박 정부는 김정일의 유고 등 갑작스런 상황에 대비,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 하에 한미연합군 주도의 새로운 ‘대북작전계획’을 짜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아래는 지난 1996년 1월 중국의 군사과학원이 작성한 82페이지 분량의 ‘제2차 한반도 전쟁 시나리오’(원제 : 미국의 군사전략과 가상 제2차 조선전쟁)를 요약한 것이다.
▲PHASE 1: 미국과 북한 양국간의 핵 교섭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양국은 외교 관계 수립을 위해 숨 가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로써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되는 듯 하더니, 미 정보기관은 북한 내에서 3기의 노동 미사일 발사기지가 존재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런데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한미연합 군사훈련 때문이다.
▲PHASE 2: 원산 부근 공해 상에서 미국의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호가 북한 인민군 어뢰정과 조우해 이를 격침시키고 만다. 북한 측은 판문점에서 미국에 대해 사건의 재발 방지와 함께 배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양측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계속 난항을 거듭한다. 이에 한국과 중국 북한은 고도의 경계태세에 돌입한다.
▲PHASE 3:전쟁을 일으킨 쪽은 북한인데, 인민군 부대가 해상경계선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한국 영해인 백령도를 침공해 이 섬을 점령해 버린다. 북한 측은 ‘어뢰정 사건에 대한 응분의 조치’라고 성명을 발표한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정전협정 위반’이라며 격렬하게 반발한다. 그리고 국제연합이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면 단독으로라도 싸우겠다고 밝힌다.
▲PHASE 4:남북한 간의 대립이 심상치 앉자 미국의 움직임도 바빠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미국은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을 결단한다. 이에 대해 미 국무장관은 ‘군사제재는 중국과 북한의 조중우호조약을 자극하게 되며 이 때문에 미국은 중국과 정면 대립하게 되어 결국 12억의 중국 시장을 잃게 된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결심을 뒤집지는 못한다.
▲PHASE 5:미국은 북한에 대해 즉각 백령도에서 철수할 것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요구하는 핵 시설물에 대한 사찰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모든 정치범의 즉각 석방 등을 요구한다. 또한 이 같은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군사행동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는 최후통첩을 한다. 그러나 북한 측은 이것을 ‘내정간섭’이라고 거부해 교섭은 완전 결렬된다.
▲PHASE 6:한미연합군은 잠수함에서 북한 핵 시설물을 겨냥,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을 일제히 발사한다.
▲PHASE 7:북한 측도 즉각 ‘전쟁은 시작됐다 모든 필요한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 뒤, 해안선에 배치된 특수전 부대를 속속 고속정으로 남하시키기 시작한다. 이와 때를 같이해 내륙지역의 특수전부대가 땅굴(지하터널)을 이용해 한국에 진군한다.
▲PHASE 8:이들 특수전 부대는 한국의 군사시설, 항만시설, 비행장, 핵발전소 등을 신속히 무력화시킨다. 이와 함께 북한군은 휴전선 부근의 비무장 지대에 맹렬한 포격을 가한다. 이 때만 해도 아직 화학무기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PHASE 9:드디어 북한 인민군이 휴전선을 돌파, 세 개의 축선에 따라 일제히 남하를 개시한다.
▲PHASE 10:미 대통령은 ‘작전계획(작계) 5027’(OPLAN 5027)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단을 내린다.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55만 명(최대 69만 명)의 병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PHASE 11: 같은 시기 김정일은 전 북한 인민을 향해 “남조선 해방 사업이 이미 시작됐다”고 말하면서 총궐기를 지시한다.
▲PHASE 12:북한 인민군은 원주-강릉 전선에서 한미연합군으로부터 남진을 저지당한다. 서울도 포격을 받아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아직 함락 되지는 않았다.
▲PHASE 13: 미 태평양사령부(PACOM)는 북한 지역에 대한 총공격을 단행한다. 이에 한미연합군은 순식간에 휴전선을 회복한다. 이 무렵 미 해병대 상륙부대는 북한 지역에 상륙해 원산과 곡산을 점령한다.
▲PHASE 14:한편,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한미연합군은 북상을 개시해 영변을 수비하고 있던 인민군과 격전을 벌이며 영변의 핵시설을 포함한 대부분의 북핵 시설을 파괴시킨다.
▲PHASE 15:한미연합군은 정주-함흥라인(맥아더 라인)에서 북진을 멈추고 북한과의 정전 협의에 들어간다.
프리존뉴스 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
원폭 전쟁이 일어난다면......
절대로 그래서도 안되고 또 그럴리는 없지마는, 만약에 우리 한반도에 원폭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전멸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피나도록 이룩한 경제성장도, 서울과 수도권의 고층 아파트와 고급 빌리도, 한강변 고급주택도, 인구1000만 이상이 몰려있고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대부분인 국부의 70% 이상이 몰려 있는 수도권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2차대전시 일본에 떨어진 원폭은 초기 형태로 비행기로 실어다가 목표 현장 상공에서 투하하는 방식의 원시직인 방식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성능이 훨씬 뛰어난 원폭을 대륙간 미사일 탄두에 부착하여 공격하는 방식이다. 그것도 히로시마나 나카사키에 떨어진 원폭보다 수십, 수백배의 위력을 가진 핵무기들이다, 그리고 한 개의 미사일에 수 개의 목표를 동시에 공격이 가능한 다탄두 분리방식으로 만든 다탄두 미사일, 원폭보다 더 무서운 수소폭탄, 중성자탄, 화학무기 등이 즐비하다.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인 미국, 중국, 러시아는 이미 핵보유국이며 북한도 이미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이나 우리는 비핵국이다. 핵무기 확산 방지 차원에서 만든 세계기구는 비핵국들이 원자무기를 개발하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울타리에 갇혀 대부분의 나라들이 핵무기 개발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여러 나러의 무질서한 핵무장은 나라 간에 핵전쟁을 유발할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일본이나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던지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은 보유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강대국들의 압력으로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자체 미사일 발사체 개발도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통제를 하고 있다. 나로호 우주 발사를 위한 발사체를 러시아에서 들여오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몰래 핵무기를 개발하려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미국은 언제라도 미군을 당장 한반도에서 철수하겠다며 협박할 것이며 실제로 박정희 정권 시절 카트 대통령이 그랬다. 실제 미군을 철수시켰다. 그 바람에 박정희 정권은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했던 역사적 사실이 있다.
현재 핵무기를 강대국들만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갑과 을의 종속관계는 쉽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란과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차단하기 위해 미국이 그토록 애를 쓰는 것은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바람직한 일이나 비균형적인 힘의 논리 앞에 굴종할 나라가 어디 있을 것인가.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상호 개발한 후에는 국경분쟁이 잦아들었다. 이스라엘은 사활을 걸고 핵무기를 개발하였다. 그래서 중동은 조용해졌다. 핵무기를 보유한다는 것은 상호보복으로 상호공멸의 위험성으로 인해 섣불리 상대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핵무기는 보유하는 자체만으로 핵전쟁의 억제효과가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군사전략가들이나 정치인들은 지금까지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함부로 핵무기 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지를 못하고 있다. 아프칸, 이라크 전에서 미군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만약 사용했다면 세계인들의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핵무기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고 재래식 탄약과 미사일, 무기를 소비해야 자국의 군수공장이 돌아가고 새로운 무기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세계 각지의 분쟁은 군수공장들이 살아 있는 한 분쟁은 없이지지는 않을 전망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생존의 길을 가려면 핵무기는 우리들이 보유하지 않으면 우리들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역사는 항상 힘이 지배하여 왔고 평화를 외치던 민족은 명분은 그럴듯 하였으나 결국에는 힘 앞에 굴복하고 역사에서 사라지거나 노예처럼 살아야 했다. 우리는 언제까지 미국의 핵우산을 믿고 그들의 바지가랑이를 잡고 있을 것인가를 다음 정권은 답변해야 할 것이다.
핵무기 투하 사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ㅡ原子 爆彈 投下, 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1945년 미국이 일본제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건으로, 당시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 원자 폭탄을 투하했으며,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폭탄을 투하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핵폭격이라고도 한다.
두 원자폭탄을 떨어트리기 전까지 6개월 동안 미국은 일본의 67개의 도시에 집중 전략 폭격을 가했다. 영국, 중화민국과 함께 미국은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 제국에 대하여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으나 일제는 이를 무시했다. 1945년 8월 6일 월요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명령에 의해 원자 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가 히로시마에, 3일 후 8월 9일 "팻 맨"(Fat man)이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이 두 원자 폭탄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전쟁에 쓰인 원자 폭탄들이었다.[3] 원자 폭탄의 투하가 결정된 히로시마는 당시 일본 제국의 군사상으로 매우 중요한 근거지였는데, 그 이유는 히로시마가 일본군의 제2사령부였으며, 동시에 통신 센터이자 병참 기지였기 때문이다.
원폭이 투하된 후 2개월에서 4개월 동안, 히로시마에서는 90,000명에서 166,000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나가사키에선 60,000명에서 80,000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집계됐으며[5] 그 중 각 도시 사망자의 절반은 원폭투하 당일에 집계된 것이다. 히로시마 의료기관은 원폭투하로 인해 60%가 섬광화상으로, 30%가 건물 잔해물로, 10%가 그 외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가 있은 후 다음 달에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원폭투하로 인한 후폭풍과 피폭과 그 외 다른 질병 합병증과 부상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었다. 미국에선 이 사건이 최단기간에 수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킨 것으로 평가했으며, 15~20%가 피폭으로, 20~30%가 섬광화상으로, 50~60%가 질병과 부상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사망자들 중 대부분은 보통 시민들이었다.
나가사키 원폭투하 6일 후 8월 15일 일본 제국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으며, 9월 2일 항복 문서에 사인하면서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알렸다. 한편 독일은 이미 5월 7일 유럽에서 항복을 선언했다. 이 원폭투하로 인해 전후 일본은 "핵무기를 만들지 않으며, 갖지 않으며, 들여오지 않겠다"는 비핵 3원칙을 수용했다. 이 원자폭탄 투하 사건은 윤리적 문제와 "당시 미국이 정말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주제로 아직까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계획
히로시마 시와 나가사키 시를 대상으로 한 원자폭탄 투하의 역사는 미국의 핵 개발 계획인 맨해튼 계획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과 영국, 캐나다는 비밀리에 초크 강 연구소에서 공동으로 튜브 알로이스 프로젝트를 연구하여, 첫 원자폭탄을 설계·제조하였는데, 이를 맨해튼 계획이라고 한다. 과학적 연구는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맡았으며, 미 육군 공병사령부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이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를 맡았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일명 "리틀 보이"(Little Boy)라고 불리는 포신형 원자폭탄은 테네시 주 오크리지에 있는, 우라늄 235를 천연 우라늄으로부터 분리해내는 거대한 시설에서 분리된 우라늄 235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원자폭탄의 첫 실험은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주 앨라모고도에서 이루어졌다. 내폭형에 해당하는 테스트에 사용한 원자폭탄인 트리니티(Trinity)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인 "팻 맨"(Fat Man)은 플루토늄 239로 만들어졌으며, 그 합성 요소는 워싱턴 주 핸포드의 핵융합로들에서 만들어졌다. 이 실험이 실시된 지 10일이 지난 7월 26일에 미국과 중국, 소련 등 연합국 정부 대표는 민주주의 국가로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목표 도시 설정
원폭 투하의 대상이 된 일본의 도시는 여러 곳이 있었으나 니가타와 교토,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의 다섯 도시로 좁혀졌다. 그러나 니가타는 외부의 표적과 더 떨어져 있어서 제외되었다. 1945년 5월 10~11일 동안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주축으로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의 원자 폭탄 투하 목표 도시 설정 위원회는 교토, 히로시마, 요코하마, 고쿠라 무기 공장을 가능 목표 도시로 설정했는데, 그 기준은 이러하였다.
- 목표도시는 지름 3마일 이상일 것이며 큰 도시이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시인지
- 목표도시에 원폭투하를 할 시, 효과적인 손해를 입을 수 있는지
원폭 투하의 대상이 된 교토,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의 특징은 모두 "일본제국의 기초가 된 도시"였다는 점이었다. 교토는 일본 천황의 조상, 히로시마는 조슈 번 번주였던 모리 가문 조상이 살던 땅이며 고쿠라는 조슈 번이 삼은 도시권에 포함된 규슈와 인접한 도시, 나가사키 시는 메이지 유신의 배후였던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의 본거지였다. 또한 히로시마 시는 청일 전쟁에서 대본영이 위치한 도시이다. 고쿠라는 간몬 해협에 직면한 평원의 도시이고 청일 전쟁의 전후 처리 조약이 체결된 도시이며 시모노세키와 국영 제1호 제철소가 세워진 야하타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도시였다.
위의 도시들은 대부분 야간의 기습 폭격 대상에서 제외된 도시들이었고 미국 공군은 이 도시들이 치명적인 무기들을 생산할 수 있는 도시로 지정했다. 히로시마는 "도시에 있는 산업지대 한 가운데에 있는 중요 군사 거점이자 병사들의 승선 지점. 레이더 표적에 용이하며 폭격할 시 도시에 크게 손해를 입힐 수 있는 곳. 주변에 언덕이 있어 폭격 효과를 크게 상승시켜줄 가능성이 있음. 호수가 있어 화재를 일으키기엔 적합한 표적은 아님."이라고 설명됐다. 원자 폭탄 투하의 궁극적 목적은 일본이 포츠담 선언에 따른 무조건 항복을 하게 시키기 위해서였다. 최종 목표 도시를 선정할 때 당시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목표도시를 설정할 때 가장 중요시한 것은 이 폭격으로 인해 일제가 얼마나 큰 정신적 충격을 얻을 지였고 또한 국제적으로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지였습니다. 교토는 일제 군수 사업에 있어 중요한 요충지이자 일본인들에게는 정신적 고향과도 같은 곳이기에 목표도시로 설정하기엔 적합한 도시입니다. 도쿄 역시 일본 천황의 궁이 있다는 점에서 다른 그 어떠한 도시보다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지만 교토처럼 전략적 요충지는 아닙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에드윈 라이샤워가 미국 군정보부 일본 전문가로 복무하면서 교토 원폭 투하를 반대했다는 일설이 떠돌았으나 라이샤워는 자서전에서 그것을 극구 부인하였다.
"(중략)...교토 원폭투하를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람은 당시 육군 장관에 재임하던 헨리 스팀슨이었다. 스팀슨은 신혼여행을 교토에서 보냈던 것으로 알려져있었다."
일설에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교토를 제외했다고 하나 후에 공개된 미군 사료에 의하면 문화재 보호를 위해 폭격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제 1순위 목표 도시 선정 시 교토가 빠진 이유는 전후 소비에트 연방과의 대립을 예상한 미국은 자칫 교토에 원폭을 투하하면 일본이 소비에트 연방측으로 돌아설 가능성을 염려한 정치적 판단이었다. 히로시마를 폭격한 후 트루먼은 일본이 항복을 하지 않을 시 원자 폭탄 투하는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고 당시 일본 제국 안에서는 본토 결전 주장과 항복이라는 대립이 맞서는 사이 결국 두 번째 원자 폭탄의 투하가 결정됐다. 투하할 도시는 고쿠라로 선정됐지만 폭격을 시행하던 당시 고쿠라는 구름에 가려 시야가 확보되지 못했으며 연료마저 부족하여 오키나와로 가는 길목에 있던 목표도시인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했다.
히로시마
당시 히로시마는 산업도시였으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많은 병영이 설치돼있었으며 일제 육군 5사단 사령부와 일본 영토 남쪽 전체 방어를 지휘하는 육군참모 하타 순로쿠의 제 2 육군 사령부가 있었다. 히로시마는 작은 규모였지만 병참기지였으며 통신 센터, 물류창고, 부대 집결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 도시는 2차 대전 당시 미군의 폭격을 당하지 않는 몇 안 되는 도시들 중 하나였고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곧 원자폭탄 투하 시 폭발 규모를 측정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히로시마 중심부에는 몇몇 강화 콘크리트 빌딩과 가벼운 구조물들이 있었으며 중심부 바로 바깥에는 가옥을 비롯하여 그 사이사이에 나무로 만들어진 작업장이 밀집해있었다. 교외에는 큰 산업단지가 부분적으로 있었으며, 이 산업단지 안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들 역시 목조건물들이었다. 전체적으로 화재에 크게 약한 도시였던 것이었다.
전쟁 초기 히로시마의 인구는 381,000명으로 최대인구를 달성했지만 원폭 투하 후 일본 정부가 시행한 체계적 이주 정책에 의해 꾸준히 감소했다. 원폭 투하 당시 인구는 대략 340,000명에서 350,000명을 웃돈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공식 문서가 소멸했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는 알기 어렵다.
투하
히로시마는 원자 폭탄이 투하될 제 1순위 목표 도시였으며 임무 수행 중 변수가 생길 시 이를 대체할 목표 도시는 고쿠라와 나가사키였다. 8월 9일에 투하된 이유는 그 전에는 기상 문제 때문에 시야가 확보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393사단 폭격 비행중대에 속했던 B-29 에놀라 게이는 일본 본토 영토에서 비행시간으로 6시간 떨어진 서태평양 티니언 섬 북쪽에 있던 비행장에서 이륙하여 히로시마로 향하였으며, 제 509 혼성부대 폴 티베츠 대령이 폭격기를 조종하고 지휘했다. 에놀라 게이는 두 기의 다른 B-29 폭격기와 함께 일본 본토로 향했는데, 그 두 기 중 한 기는 찰스 W. 스위니 소령이 지휘하는 그레이트 아티스트로 원폭투하 후 결과 측정을 담당했으며, 나머지 한 기는 조지 마쿼트 대위가 지휘하는 폭격기로 처음에는 기체명이 정해지지 않았으나 후에 네세서리 이블이란 이름으로 정해졌다.
티니언 섬에서 이륙한 후 각 폭격기는 산개비행을 하다가 이오 섬 고도 2,440 미터에서 재 집합한 후 일본 본토로 향했다. B-29 에놀라 게이는 목표도시 히로시마에서 고도 9,855 미터 상공에서 시야를 확보했다. 본토로 향하는 동안 해군 대령 윌리엄 파슨스가 이륙 시 끼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분리해뒀던 원폭 리틀 보이를 장착했고, 보조를 담당하던 모리스 젭슨 소위가 히로시마에 도착하기 30분 전에 안전 장치를 분리했다.
원폭 투하가 있기 한 시간 전, 일제 조기 경보 레이더는 본토 남쪽 부근에서 일부 미국 비행편대가 오고 있는 걸 발견했다. 히로시마를 포함에 많은 도시에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공습경보가 울렸다. 오전 8시 무렵, 히로시마 레이더 관측소 측에선 본토로 향해오는 비행기 기체의 숫자가 몇 안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공습경보를 해제했다. 연료와 기체를 아끼기 위해 비행편대가 지나가게끔 방치했다는 것이다. 기존 라디오 방송에서는 실제로 B-29 폭격기들이 포착될 시 방공호로 대피하라는 내용을 방송했다. 하지만 이미 아침 7시 31분에 기상 관측 비행기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고도 9,800 미터 상공에서 히로시마의 기상 상태가 양호하다는 내용을 담은 전언을 모스 부호로 보낸 상태였다. 아침 8시 9분 폴 티베츠 대령은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했다.
60 킬로그램의 우라늄 235가 담긴 포신형 핵분열 무기 리틀 보이는 히로시마 현지 시각 08시 15분에 투하됐다. 리틀 보이는 고도 9,470 미터 상공에서 43초 동안 떨어져 도시 위 580미터 상공에서 폭파됐다.B-29 에놀라 게이는 후폭풍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 도시에서 벗어나 11.5 마일(약 18.5 킬로미터)을 비행했다.
리틀 보이는 옆바람 때문에 본래 조준했던 아이오이 다리에서 240 미터 벗어난 시마 외과 병원에 투하됐다. 리틀보이는 TNT 13킬로톤에 상응하는 폭발을 일으켰으며,반경 1.6 킬로미터 이내의 모든 것을 파괴했으며 11 제곱킬로미터에 해당하는 화재를 일으켰다. 미국은 도시의 12 제곱 킬로미터가 파괴된 것으로 측정했으며, 일본은 히로시마의 69%의 건물들이 파괴됐으며 그것을 제외한 31%의 건물들 중 6~7%가 손상을 입었다고 보고했다.
히로시마의 인구 중 70,000명에서 80,000 명, 약 30%가 원폭 투하 당시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으며 70,000여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도시의 90%의 의사들과 93%의 간호사가 사망하거나 다쳤다. 이들은 도시에서 가장 큰 피해를 받은 시내에 있었다.
투하 후 상황
도쿄 NHK는 히로시마 NHK의 방송이 갑작스럽게 중지하게 되자, 다른 전화선을 이용해 방송 연결을 다시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약 20분 후 도쿄 철도 전신 센터는 히로시마 북쪽으로 향해있는 전신이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았다. 히로시마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일부 철도역들에서 비공식적으로 엄청난 폭탄 투하가 있었다는 보고했으며, 이 보고는 일본 제국 군 참모 본부에 전해졌다.
일본 제국 참모 본부는 반복적으로 히로시마 군지휘부에 연락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답변이 오지 않았으며 이것은 곧 지휘부에 혼란을 일으켰다. 당시 일제는 3기의 비행기가 그렇게 큰 폭발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참모본부는 히로시마에 즉시 비행기를 보내 피해를 조사하고 도쿄에 보고할 것을 명령했다. 지휘부는 큰일은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으며 그러한 폭탄투하는 없다며 그저 소문일 뿐이라고 단정 지었다.
비행기는 히로시마 남서쪽으로 향했다. 3시간 여 동안 비행을 한 끝에 비행기 조종사와 함께 파견된 참모 장교는 히로시마에서 약 1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원폭으로 인해 생긴 거대한 연기구름을 목격했다. 비행기는 곧 도시에 다다랐으며 히로시마에 있던 모든 것이 불타고 연기에 뒤덮여있는 광경을 목격하며 히로시마 상공을 비행했다. 참모 장교는 이 사실을 도쿄에 보고한 후 즉시 피해를 측정했다.
1945년 8월 8일 미국은 도쿄 라디오에서 히로시마 폭격을 알리는 내용을 담은 보고를 받았다. 당시 라디오 내용은 이러했다. “사람, 동물, 모든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말 그대로 죽음 속에 그슬렸습니다."
사망자
미국 에너지부의 기록에 따르면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즉사한 사망자가 대략 70,000명이라고 돼있다. 의료 물자 부족 때문에 화상과 피폭 및 관련 질병을 입은 환자들은 더욱 더 부상이 심해져 1945년 말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인해 생긴 총 사망자는 90,000명에서 166,000명이었다. 일부는 1950년까지 피폭으로 인한 암과 같은 장기질환 등 때문에 사망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약 200,000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1950년부터 1990년까지 일본에서 암과 백혈병으로 죽은 사람들 중 9%가 히로시마 원폭 당시 피폭을 맞은 사람들이라고 발표했다.
원폭 유적과 생존자
일본은 지진이 잦은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일부 강화 콘크리트 건물들은 굉장히 견고한데, 히로시마에도 이런 건물들이 있었으며 이 건물들 중 일부는 원폭에도 붕괴되지 않았다. 생존자 노무라 에이조(野村 英三)는 그라운드 제로에서 170미터 떨어진 강화 콘크리트 건물(전후엔 레스트 하우스로 바뀜) 지하에 대피해있어 살아남은 것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또한 그라운드 제로에서 300미터 떨어진 히로시마 은행에 있던 타카쿠라 아키코(高蔵 信子)도 대표적인 생존자 중 한 명이다. 원폭 투하가 이루어진 후 폭발은 샛길보다는 큰 길을 향해 퍼져나갔으며 이것은 히로시마 산업 전시관이 폭발에서 붕괴되지 않게 해주었다. 히로시마 산업 전시관은 그라운드 제로에서 15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후에 이 건물은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으로 명명됐으며 1996년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됐다. 또한 히로시마 원폭 투하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졌다.
나가사키
나가사키 시는 일본 본토 남쪽에 있는 가장 큰 항구 도시 중 하나였으며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대규모 산업 지대를 포함하고 있었고 군수품, 선박, 무기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도시였기에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도시였다.
히로시마의 모습과는 달리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가사키 대부분의 건물들은 나무로 지어진 전통 일본식 집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많았다. 수많은 공장과 사무실들 또한 폭발과 화재에 약한 재료나 나무로 지어졌었다. 또한 나가사키는 계획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민들 중 대부분이 산업 지대 공장에 굉장히 근접한 곳에서 살고 있었다.
나가사키는 원폭 투하가 있기 전에 한 번도 대규모의 공습을 겪지 않은 도시였지만 1945년 8월 1일 수많은 재래식 고성능 폭탄들이 도시 투하됐다. 이로 인해 도시 남서쪽에 있는 조선소와 부두가 피해를 일부 입었으며, 미츠비시 중공업 공장과 군수공장이 타격을 받았으며 6발의 폭탄이 나가사키 의과 대학과 병원에 떨어졌으며 그 중 세 발이 직접타격을 받았다. 피해는 비교적 적은 편이었으나 나가사키 시와 아이들을 둔 주민들에게는 큰 염려를 불러일으켰으며 곧 나가사키 주민들은 안전을 위해 도시에서 벗어나 시골지역으로 이주했다. 따라서 원폭투하가 이루어졌을 당시 도시의 인구는 줄어들고 있었다.
나가사키 북쪽에는 영국 연방 포로 수용소가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석탄 광산에서 노동했으며 원폭투하를 목격했다.
투하
1945년 8월 9일 아침 미국 찰스 393사단 비행 중대 찰스 스위니 소령이 지휘하는 B-29 벅스카가 두 번째 원자폭탄 팻 맨을 싣고 주요 목표 도시 고쿠라로 향했다. 임무 계획은 히로시마 임무와 거의 동일했다. 두 기의 B-29가 팻 맨을 실은 비행기를 뒤따라가면서 기상 관측 및 사진 촬영과 원폭 투하 결과 측정을 맡았다. 찰스 스위니 소령은 비행기에 이미 팻 맨을 장착한 상태였지만 전기 안전 플러그는 해제하지 않은 상태였다.
기상 관측을 담당하는 비행기가 고쿠라, 나가사키 모두 시야확보를 찰스 스위니 소령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벅스카가 일본 해안에 있는 재 집합 장소에 도착할 무렵 그 뒤를 따르던 세 번째 B-29 빅 스팅크를 조종하던 제임스 I. 홉킨슨 중령이 재 집합에 실패했다. 벅스카와 다른 B-29는 빅 스팅크 없이 40여분 동안 상공을 활주했지만 원폭 투하 계획에서 30분이나 지연됐기 때문에 찰스 스위니 소령은 홉킨슨 중령 없이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30분 후 B-29는 고쿠라에 다다랐으나 이미 구름이 도시 70%를 가려버려 육안으로 폭격을 하지 못하게 됐다. 도시 상공을 3회 배회한 찰스 스위니 소령은 이륙 전 예비 탱크의 연료 공급 펌프를 수리 받지 못해 연료가 부족하게 된 상태가 되어 대체 목표 도시인 나가사키로 향했다. 나가사키에 대한 시야가 확보되지 못할 시 벅스카는 오키나와에서 원폭을 옮겨 필요한 경우 바다에 버려야할 상황이었다. 당시 핵폭탄 발사 준비원이었던 미 해군 중령 프레드릭 에쉬워스는 나가사키의 시야가 확보되지 못 할 시, 레이더를 이용해 원폭 투하를 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현지 시각 07시 50분 경, 나가사키에 공습경보가 울렸으며 08시 30분에 경보가 완전 해제됐다. 10시 53분, 두 대의 B-29가 포착되자 일본군은 정찰 비행기로 확정하고 아무런 경보를 울리지 않았다.
몇분 후 11시 00분, B-29 그레이트 아티스트를 조종하던 프레드릭 C. 벅 대위는 세 개의 기기들을 낙하했는데, 이 기기들 안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세 명의 과학자들과 함께 원자 폭탄을 연구한 도쿄 대학 사가네 료기치 교수에게 담긴 편지가 담겨있었다. 이 편지의 내용은 사가네 료기치 교수는 대중들에게 원자폭탄의 위험성을 알리라는 것이었다. 이 편지는 일본군 장교들에 의해 발견됐으나 한 달이 지나서야 사가네 교수에게 전해졌다. 1949년 이 편지에 관련된 인물인 루이스 알바레즈는 사가네 교수를 만나 사인했다.
11시 01분, 나가사키에서의 마지막 1분에 벅스카의 폭격수였던 커미트 비핸 대위가 타격지점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약 6.4 킬로글램의 플루토늄 239가 담긴 팻 맨이 나가사키 산업 지대에 투하됐다. 팻 맨은 43초 후 나가사키 남쪽에 있는 미츠부시 중공업 공장, 군수공장과 북쪽에 있는 미쓰비시-우라카미 어뢰제작공장 사이에 정확히 투하돼 도시 위 상공 439 미터에서 폭발했다. 본래 타격지점에서 북서쪽으로 거의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폭발된 것이다. 폭발은 우라카미 계곡에서 한정된 채 일어나 나가사키의 주요 부분은 언덕으로 인해 보호를 받았다. 팻 맨은 TNT 21 킬로톤에 상응하는 폭발을 일으켰으며, 진주만에 91타입 어뢰를 공급하던 미츠부시-우라카미 어뢰 제작공장이 파괴됐다. 폭발반경은 약 1-2 킬로미터로 측정됐고 후에 화재가 북쪽에서 남쪽까지 3킬로미터 퍼졌다. 폭발지점에는 순식간에 섭씨 3,900도의 열이 달아올랐으며 후폭풍의 바람 속도는 1005km/h로 측정됐다.
원폭 투하 후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후 히로시마 주민들
사망자
이 원폭 투하로 인해 40,000명에서 75,000명에 이르는 사람이 즉사했으며, 1945년 말까지 총 80,0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측정됐다. 또한 최소 8명에서 최대 13명의 전쟁 포로가 원폭 투하에 사망된 것으로 확인됐으며, 그 명단은 이러하다.
- 영국 연방 시민 한 명
- 네덜란드 전쟁 포로 일곱 명(이 중 두 명의 이름은 알려졌다)
- 전하는 바에 의하면 최소 두 명의 국적불명 전쟁포로가 피폭을 입어 전후 암으로 사망
추가 원폭 투하 여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후 미국은 그 해 8월 셋째 주에 한 기, 9월과 10월에 각각 세 기를 추가로 투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맨해튼 프로젝트 총 책임자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이 8월 10일 미군참모총장 조지 마셜에게 ‘다음 투하는 8월 17일 혹은 18일 뒤에 날씨조건이 만족 되는대로 이루어져야한다’라는 제안을 했다. 조지 마셜은 이 제안에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았지만 동시에 ‘대통령의 허락이 있을 때까진 그 시기에 투하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답변을 보냈다.
또한 다운폴 작전 계획 수립이 시작되기 전 이미 미국 육군성에서는 일본이 항복을 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어떤 식으로 본토공습을 시행할지 의논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항복을 하자 곧 추가 원폭 투하 여부 의논은 종식됐다.
일본의 항복
미 전시 내각은 8월 9일까지 일본에게 네 가지 조건을 수용하여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8월 8일 소련이 얄타 협정에 근거를 두고 소-일 불가침 조약을 파기,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히로히토는 기도 고이치에게 “소련이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했으니 즉시 상황을 수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도 1945년 9월에 일본을 공격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다. 기도 고이치는 즉시 제국 회의를 열어 외무 대신 도고 시게노리에게 연합군의 항복 요청을 기존의 네 가지 조건에서 한 가지 조건으로 축소시켜 수락하라고 이야기했으며 동시에 “천황의 지위에 흠이 갈 수 있는 요구에는 타협하지 말 것”이라고 전했다. 8월 12일 히로히토가 황가에 항복의사를 밝혔으며 연합군 측에서 천황제를 방치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이틀 후 14일 히로히토는 연합군 측에 항복을 선언하는 내용을 일본 전역에 방송했다. 이에 다음날 군부 측에서는 항복 선언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으나 곧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이후 4만여 명의 미군이 히로시마를 점령했고, 2만 7천명이 나가사키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 바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제 2차 세계대전에 정식으로 참전하지 못하고 결국엔 비공식 참전국이 되었다. 또 9월에 연합국( 영국, 미국, 중화민국, 소비에트 연방)이 일본을 분할 점령할 목적이 있었는데 이 역시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다음은 히로히토의 옥음방송 중 원자폭탄에 관한 부분이다.
"(중략)…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인한 폭탄으로 죄없는 백성들을 끊임없이 죽이니, 그 참혹함은 참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리하여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는 일은,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불러올 뿐만 아니라, 인류의 문명 또한 부수어버릴 것이다. 이리 되면 짐은 어찌 수많은 백성들을 지키고, 황실과 조상의 신령께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이것이, 짐이 제국 정부에게 하여금 공동 선언에 응하도록 명한 연유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끝까지 동아시아의 해방을 위해 노력한 모든 맹우 (盟友; 벗)들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 사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새 저서 ‘미국, 그리고 글로벌 파워의 위기’에서 한국의 핵 무장 가능성을 거론했다.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지배하는 유일 강대국 시대에서 중국과 인도의 부상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글로벌 파워 시대를 맞고 있다”며 “미국의 쇠퇴는 핵우산에 대한 신뢰성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한국이 미국 대신 중국 등 다른 곳에서 핵우산을 찾거나 스스로 핵 무장을 해야 할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핵 비확산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에서 나온 한국 핵 필요론(論)이어서 예사롭지 않다.
▷2002년 4월 후진타오 중국 부주석이 미국을 방문하자 워싱턴에 “후가 누구냐(Who is Hu)”는 농담이 나돌았다. 후(Hu) 부주석이 그해 11월 공산당 총서기에 올라 10년간 중국을 이끌 거물인데도 미국은 그를 너무 몰랐다. 13일 시작되는 중국 차기 지도자 시진핑의 방미(訪美)는 10년 사이 미중의 위상 변화를 잘 보여준다. 미국은 시 부주석을 환대하기 위해 광둥 성장을 지낸 그의 아버지가 32년 전 방미 당시 찍은 사진을 찾아내 선물로 준비했다.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은 시 부주석이 1985년 방문했던 아이오와 시골마을까지 동행한다. 브레진스키의 한국 핵 필요론은 현실로 다가온 미국의 쇠퇴와 중국의 팽창을 반영한 것이어서 단순한 예측 이상의 무게를 갖는다.
▷한국에서도 핵 필요론이 제기된 바 있다.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해 북핵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술 핵무기 재배치를 주장했다. 이후 게리 세이모어 백악관 대량살상무기 정책조정관이 “한국이 전술핵무기 재배치를 공식 요구한다면 응할 것”이라고 말해 관심을 증폭시켰다. 북핵 폐기 관철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위(自衛) 차원에서 핵개발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우리가 핵 무장을 추진하면 북핵 포기를 압박할 명분이 사라지지만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브레진스키가 예고한 지구촌의 세력 전이(轉移)에도 대비해야 한다. 미국과의 동맹을 바탕으로 중국과 협력기반을 강화하는 연미화중(聯美和中), 중국과 협력하되 한미 동맹에 기우는 연미통중(聯美通中),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연미연중(聯美聯中) 가운데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월남 패망 후 바다위를 떠도는 보트 피플
조선일보 사설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국가 전략 문제의 태두(泰斗) 브레진스키가 가까운 미래에 중국과 인도가 부상하고 미국이 쇠퇴하면서 '지정학적 위험'에 빠질 대표적인 나라로 한국을 꼽았다. 그가 최신 저서에서 세계 패권 국가의 질서 변화에 따른 영향을 가장 먼저, 그리고 직접적으로 받을 나라로 한국보다 앞서 든 나라는 구(舊) 소련에 속해 있던 인구 460만명의 소국(小國) 조지아와 대만뿐이다.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쇠퇴는 한국이 고통스러운 선택에 직면하도록 할 것"이라면서 한국 앞에 놓인 길로 '중국의 지역적 패권을 받아들여 중국에 더 기대는 방안'과 '역사적 반감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관계를 더 강화하는 방안'을 거론했다. 그는 그러나 "미국의 강력한 지원이 없을 경우 일본이 중국에 맞설 수 있는가는 회의적"이라면서 "한국과 일본 등은 미국의 쇠퇴로 미국이 제공해온 핵우산(雨傘)에 대한 신뢰 위기가 닥쳐올 경우 (미국이 아닌) 새로운 핵우산을 찾거나 스스로 핵무장을 해야 할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국이 한반도 통일 문제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면서 "이 경우 한국은 '중국이 지원하는 통일'과 '한·미 동맹 축소'를 주고받기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브레진스키는 대한민국의 생존 여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국제 환경의 변화 시기를 중국이 경제적으로는 물론 군사적으로도 미국을 추월할 향후 20년 전후로 내다봤다. 세계의 패권 국가 미국이 태평양 건너편에서 자기들에게 맞설 수 있는 경쟁적 패권 국가 중국이 부상(浮上)하는 영향을 20년 후에 받게 된다면 중국과 육지와 바다로 접속(接續)돼 있는 한국은 그보다 훨씬 이른 앞으로 5년 10년 후부터 거대(巨大) 중국의 압박감을 정치·경제·군사 면에서 절감하게 되리라는 말이다.
브레진스키가 이번에 내보인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세 전망은 노무현 정권이 전시작전지휘권을 한국에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미국이 기다렸다는 듯이 선뜻 응했을 때 이미 예견(豫見)됐던 일이다. 한국의 미래 대통령이 되겠다는 인물들과 차기 집권을 경쟁하는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브레진스키의 냉혹한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 그는 한국이 붙들고 주저앉히려 해도 미국이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 하는 시대가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상황에서 한국은 중국에 기댈 것이냐 일본과 손잡을 것이냐'고 묻고 있다. 중국에 기댄다는 말은 중국의 패권적 국제 질서 속에서 부속품처럼 굴종(屈從)하고 연명(延命)하면서 중국의 압도적 영향 아래 살아간다는 뜻이다. 일본과 손잡을 것이냐의 의미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 여(與)든 야(野)든, 좌(左)든 우(右)든 한국 정치 세력은 이 상황에서 5000만 국민을 어디로 이끌고 갈 것인지를 대답해야 한다.
한국 정치 세력들은 브레진스키가 한국이 통일 과정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는 중국과 '한·미 동맹의 축소'와 '중국의 통일 지원'을 맞바꿀 가능성이 있다고 한 지적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도 되새겨 봐야 한다. 미국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과 미국은 함께 피를 흘린 혈맹(血盟)임을 강조해왔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한국이 현재와 미래에 국익(國益)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주시(注視)하고 그에 따른 대응책을 숙고(熟考)해왔다. 미국 조야(朝野)가 한·미 FTA 협상을 시작하고 결론지은 한국의 과거 집권당 민주당이 한·미 FTA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폐기를 공식 선언하는 사태 앞에서 자신들이 한국에 제공해온 안보적 지원의 시효(時效)를 따져 본다고 해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브레진스키 마지막 질문에도 한국 정치 세력은 답변을 준비해야 한다. 핵우산을 제공할 미국이 아닌 다른 강대국을 찾을 것이냐, 아니면 한국이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냐다. 이 문제 역시 한국의 안보적 진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세계 '동맹의 역사'에는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이웃 국가에 흡수되거나 끌려다니지 않으려고 그 강대국의 영향력을 상쇄해줄 다른 동맹 상대를 찾으려는 중간(中間) 국가들의 고심(苦心)이 배어있다. 지난 60년간 미국이 그 역할을 해온 한국에도 결정적 국면이 다가오고 있다. 한국 정치 세력들은 나꼼수처럼 시건방지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나라와 5000만 국민이 위태롭다. 집권하겠다는 세력은 다가오는 국가 생존의 결정적 국면에서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의 활로(活路)를 제시할 의무가 있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우리들의 슬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면산의 봄 3 : 한반도의 쌍곡선 (0) | 2012.03.17 |
---|---|
우면산의 봄 2 : 암울한 현실과 미래 (0) | 2012.03.11 |
우면산의 겨울 5 : 빈곤의 덫에 빠진 한국 (0) | 2012.01.15 |
우면산의 겨울 2 : 이혼이 무슨 스팩인가? (0) | 2011.12.10 |
우면산의 겨울 1 : 꼼수가 판치는 사회 (0) | 2011.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