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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시대의 흐름

우면산의 봄 31 : 헨리 키신저, 그는 누구인가?

 

 

 

 

우면산의 봄 31 : 헨리 키신저, 그는 누구인가?

 

  

 

 

한.중 국방장관 직통 전화설치 문제가 거론되면서 양국이 협의 하는 과정에 중국측의 요구로 암초에 봉착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대만의 소령급 장교가 한국에서 연수를 받는 모양인데 그것을 중단해 달라는 요구라고 한다. 이에 우리 정부가 긍정적으로 검토하려는 눈치를 보고 미국측에서 강력하게 저지요청을 해 온 모양이다. 한중이 밀착하는데 우려를 표시한 모양이다. 싱가포르의 경우는 동시에 수용하고 잇어 우리 정부도 절충안을 마련중이라고 한다. 고래같은 미중 사이에서 새우같은 우리가 덩어리가 터지는 꼴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우리는 미국의 눈치를 언제까지 보아야 하며 중국과의 원활한 외교 관계를 이룰수 있을 지 걱정이다.

 

한반도 통일에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등장했던 중국, 국민당이 대만으로 쫒겨난 다음 중국은 모택동의 강력한 지도아래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하면서 56개 소수민족을 포함하여 신장 위그루 탄압, 티벳 침공, 외몽고 자치주, 만주 경략, 한국전쟁 참전, 중소국경지역의 분쟁까지 오합지졸의 중국 인민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권력투쟁을 겪으면서 영역확보와 외세침공에 대응하면서 근대화의 기초를 다져온 것은 사실이다. 그럴즈음 미국은 중국에 대해 원거리 포위망을 구축하면서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였고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호치민의 월맹은 미국의 엄청난 인적.물량 공세에도 굴하지 않고 비정규전을 전개한 결과 결국 부폐한 월남을 무너뜨리고 월남을 적화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은 중국 국민당 장개석을 지원하면서 모택동과의 싸움을 지원하였으나 결국 부폐한 국민당은 중국 공산당에게 밀려 대만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된 것처럼. 월남도 미국의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부폐한 정권은 결국 무너졌다는 것을 우리들은 가슴깊이 인식해야 될 것이나 작금의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반전분위기가 확산되었고 결국 엄청난 피해와 손해를 보고서 월남을 포기했다. 따라서 미국은 중국의 포위망을 구축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고 중국은 그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내부적 발전을 다져온 결과 70년대 키신저에 의해 중국과 핑퐁외교가 전개되면서 미.중의 외교관계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핑퐁 외교(Ping-pong 外交)는 1971년 4월 6일에 열린 제31회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탁구 선수를 비롯한 미국 선수단 15명과 기자 4명이 같은 해 4월 10일부터 4월 17일까지 중국을 방문, 저우언라이 총리와 면담을 가진 데 이어서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을 순방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이후 20년 이상 막혔던 미국과 중국에 교류의 징검다리를 놓은 사건을 말한다.

 

이 일을 계기로 1971년 7월 헨리 키신저 미국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이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했으며 1972년 2월에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 미국과 중국 양국이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헨리 키신저, 그는 누구인가?

 

헨리 키신저 노벨상을 수상한 인물 또는 단체입니다.
Henry Kissinger
헨리 키신저 (1976년)
본명 Heinz Alfred Kissinger
출생 1923년 5월 27일(1923-05-27) (87)
독일의 국기 독일 바이에른 주 퓌르트
직업 외교관, 학자
정당 공화당
종교 유대교
배우자 앤 플라이셔 (1949년-1964년)
낸시 키신저 (1974년-현재)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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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앨프리드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 1923년 5월 27일 - )는 독일계 미국인 정치인이자 외교관이다.

 

생애

그는 독일 퓌르트 출신이며 그의 독일 이름은 하인츠 알프레트 키징거(Heinz Alfred Kissinger)이다. 유대인이었던 그의 가족은 독일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8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종군하였고, 1943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3개의 학위를 받았고, 거기서 국제 관계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1969년 닉슨 행정부가 출범하자 대통령 안보 보좌관으로 합류했다. 1973년에는 윌리엄 P. 로저스 국무 장관이 사임하자 56대 국무 장관이 되었으며, 포드 행정부때 까지 그 직을 맡았다.

 

업적

그 후 1971년에는 중국을 극비리에 방문해 미국과 중국의 정상 회담을 이끌어냈다. 1969년1973년 사이에 그는 베트남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북베트남의 외교관들과 비밀적으로 협상을 지도하였다. 1973년에 미국, 북베트남, 남베트남, 베트콩 사이에 평화 조약이 맺어졌다. 그 공로로 북베트남 교섭인 레득토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레득토는 수상 거부) 그러나 그 조약은 종이 조각에 불과, 전쟁이 2년을 더 끌었다.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 관련된 이집트시리아에서 이스라엘군의 해체할 동의서 조정에 도움을 주었다. 닉슨과 포드 정권 아래 빛나는 외교 정책을 펴내기로 알려졌다.

 

키신저에 대한 비판

그는 1969년1977년 사이(1973년부터 1977년까지는 국무부 장관이었다)에 미국 정부의 외교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외교정책은 철저하게 국익중심이었으므로 좌파 정당인 인민연합의 살바도르 아옌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1970년)되어, 칠레 역사상 첫 사회주의 정권이 평화적으로 들어서자 피노체트군사 반란을 지원하는 과오를 미국 정치사에 남겼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정권이 확인된 희생자만 3197명(유골을 찾지 못해서 실종자로 분류된 1197명 포함)이나 될 정도로 엄청난 국가 폭력 희생자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키신저 내각과 CIA의 피노체트의 군사반란 지원은 칠레인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과 협상을 해서 전쟁을 지연시켜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을 죽였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베트남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던 캄보디아를 폭격하여 킬링필드를 만드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베트남 전쟁과 관련하여 노벨 평화상을 받는 등 당시에는 그에 대한 평가가 널리 왜곡되어 있었다.

 

또한 방글라데시에서는 민주정권을 몰아내는 극우 군사정권을 묵인하였으며 동티모르 학살을 묵인하였다는 잘못도 비판 받고 있다.

 

저서

그가 쓴 저서로는 〈핵무기와 외교〉(1957년)와 그의 추억을 쓴 〈백악관 시절〉(1979년), 〈대변동의 세월〉(1982년), 〈부흥의 세월〉(1999년) 등이 있다.

 

 

 

                         

 

 

천년, 백년, 그리고 5년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는 미수(米壽·88세)다. 1923년 5월 27일생이니 88번째 생일이 며칠 안 남았다. 그가 어제 역작을 내놓았다. 『중국에 대하여(On China)』다. 과거를 회고하기도 버거운 나이에 정력적인 그의 활동은 놀랍기만 하다.

 그의 경력은 화려하다. 하버드대 교수와 대통령 외교안보보좌관, 국무장관. 죽(竹)의 장막을 뚫었고, 베트남 휴전 중재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전설적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현역이다. 그의 전기를 준비 중인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 하버드대 교수는 키신저가 “존 F 케네디부터 버락 오바마까지 모든 대통령에게 공식·비공식 조언을 해줬다”고 말했다. 청와대 행사처럼 밥 먹으며 대통령 연설을 들어주는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중요한 역사적 고비마다 뉴욕 타임스에 싣는 장문의 칼럼을 보면 날카로운 통찰력이 번득인다.

 1971년 7월 9일 그의 극비 중국 방문은 역사적 사건이다. 하지만 닉슨 대통령의 방중을 수행 취재했던 막스 프랭클(Max Frankel) 전 더 타임스 편집장은 “그건 너무 쉬운 일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그 이후 고비고비마다 역대 정권에 조언해 오늘날 G2로 공진화(共進化·coevolution)하도록 만든 그의 역할이 훨씬 더 컸다는 말이다. 미국의 지도자와 중국의 지도자가 생각하는 방식은 너무 달랐다. 가치관의 차이가 세계적 위기로 급전될 수 있는 결정적 순간마다 키신저는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통역'을 맡았다.

 키신저가 본 중국 지도자들의 사고는 서양인이 생각하는 시공(時空)의 벽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먼저 시간 개념이다. 키신저는 미국 지도자들이 어떻게든 빨리 결론을 내려고 조급해한다고 지적했다. 분초를 다툰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 지도자의 가치관은 참을 '인(忍)'자다. 마오쩌둥은 언젠가 키신저에게 “우리는 천년 단위로 시간을 잰다”고 말했다고 한다. 40년 전 오늘의 G2를 내다보며 손을 잡은 것도 긴 시간을 설계한 덕분이다.

 키신저가 중국 지도자에게서 본 또 한 가지는 실용적인 유연성이다. 키신저는 마오쩌둥의 선생은 마르크스나 레닌이 아니라 BC 247년에 즉위한 진시황이라고 말한다. 미·중 관계 개선을 처음 제안한 것은 마오다. 미·소 국경분쟁이 한창이던 1969년 마오는 자신의 주치의에게 이렇게 물었다. “북쪽과 서쪽에 소련, 남쪽에 인도, 동쪽에는 일본이 있다. 이들이 손을 잡고 우리를 공격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오는 진시황의 원교근공(遠交近攻)책을 따랐다. 멀리 있는 미국의 손을 잡았다. 중국 지도자들에게 이념은 중요한 게 아니란 사실을 키신저는 간파했다.

 키신저의 혜안, 40년 동안 현장을 누비며 자신의 전략을 구체화해온 정력이 부러운 것은 우리야말로 장기적 비전이 필요한 분단국이기 때문이다. 한국도 키신저의 방중 직후인 71년 11월부터 북한과 비밀 접촉을 시작했다. 이듬해 5월 초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해 7·4 남북 공동선언을 만들었다.

 그러나 남도 북도 국내 정치에 이용하고 말았다. 당시 서울에 파견된 CIA 지부장이었던 도널드 그레그(전 주한 미국대사)는 평양을 다녀온 이후락이 “(김일성은) 매우 강한 인물이다”라는 말만 반복했다고 회고했다. 방북(訪北)이 통일 대신 유신(維新)의 빌미가 됐다는 증언이다. 정권을 초월해 일관성을 지녀야 할 남북관계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요동쳤다. 100년은커녕 10년을 지속할 그림도 그리지 못했다. 5년 단임 정권의 업적 장식에만 골몰한다.

 협상의 상대가 있으니 이런 기복들이 남쪽 탓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한 사과를 하느냐 마느냐는 북한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북한의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는 원칙론이다. 원칙만 고수하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변화를 위해 필요한 건 키신저처럼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뛰어넘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창의적 사고, 나아가 직접 뛰어들어 새 판을 짜는 추진력이다.

 중국처럼 1000년, 미국처럼 100년은 아니더라도 조금 더 길게 내다보는 전략을 세울 수는 없는 걸까. 키신저 같은 거물이 없다면 다수 전문가들이 손을 잡아 대안을 찾아내는 방법도 있다. 키신저의 현실주의와 마오의 실용주의가 빚어 놓은 'G2 시대'에 이념이란 너무나 작은 곁가지가 아닌가.

김진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