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과 넌픽션
우리에겐 진짜 드라마가 필요해
얼마 전에 종영한 <슈퍼스타K>는 예상을 뛰어넘는 인기를 누렸다. 최근 믿거나말거나인 슈퍼스타K 법칙이 떴다. 이승철이 칭찬하면 떨어진다, 여자 심사위원을 울리면 떨어진다, 떨어지는 남녀 성비는 같다 등. 오래도록 살아남거나, 우승을 차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법칙도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드라마 같은 개인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 이번 시즌에서 1등을 한 허각은 환풍기 수리사를 하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다. 좁은 환풍기통 안에서 노래연습을 했다는 이야기는 드라마로서 충분히 감동적이다. 그리고 그런 그가 중졸 아저씨의 신화를 만들며 1위를 한 것이야말로 드라마의 완성이다.
영국의 리얼리티 TV 프로그램 <브리튼스 갓 탤런트>를 통해 휴대폰 판매원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주목받게 된 오페라가수 폴 포츠가 생각난다. 그 역시 허름한 입성과 외모로 무시를 당하다가 멋진 고음으로 좌중을 놀라게 한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최종 3인 안에 들었던 장재인도 학창시절의 왕따 사실을 털어놓아 주목받았다. 그녀가 바닥에 앉아 기타를 칠 때 사람들이 진정성을 느낀 것도 “어리지만 뭔가 겪어낸 아이”의 연주였던 덕분이다.
중국 광저우에서 활약하고 있는 우리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임신 7개월의 김윤미 사격선수가 태아가 놀랄까봐 공기권총으로 종목을 바꿔가면서도 결국 금메달 2개를 따낸 일, ‘세 쌍둥이 아빠’인 김학만 사격선수가 쌍둥이의 생일날 생일선물로 금메달을 딴 것도 훈훈한 드라마이다. 왕기춘 유도선수가 상대의 부상 부위를 공격하지 않는 모습에서는 그야말로 ‘오빠!’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리고 금메달 3관왕 박태환 선수가 딴 7개의 메달도 특별한 감동이었다. 그는 베이징올림픽 이후에 부진을 겪으며 심리적 스트레스를 겪어왔다. 하지만 성공한 드라마에는 시련이 양념처럼 따르는 법. 박태환이 이번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며 등의 피부가 몇 번씩 벗겨지도록 연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감동은 더욱 짙어진다.
온 몸으로 드라마를 쓰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새 나도 욕심이 생긴다.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 같은 삶은 아니더라도, 당장 주변 사람들에게 위안과 행복을 주는, 그런 책을 하나 쓰듯이 살고 싶다고.
공정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
<슈퍼스타 K2>의 생명력이 질기다. 지난 몇 달간 안방의 시선을 휘어잡더니, 요즘은 우승자 허각이 공정사회의 상징처럼 부각된다.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꿈과 희망의 상징’,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은 ‘공정사회의 대표적 사례’, 김정권 한나라당 의원은 ‘평등과 공정에 대한 국민적 열망의 표현’, 이재오 특임장관은 ‘출근길에 만나는 포장마차 아주머니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로 허각을 부각시켰다.
이들이 허각을 내세워 하고 싶은 말은 뭘까? 한국 사회가 현재 공정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앞으로 한국 사회가 공정해져야 한다는 염원을 내비치고 있는 것일까? 그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허각은 공정사회의 물증도 아니고, <슈퍼스타 K2>는 공정사회의 모델이 될 수도 없을 테니까.
<슈퍼스타 K2>에서 공정사회의 모델을 보는 이는 중졸의 환풍기 수리공이 우승한 것을 공정성의 물증처럼 들이민다. 그리고 전문가 심사와 대중 참여를 조합한 평가방식을 절차적 공정성의 상징처럼 부각시킨다. 가진 거라곤 노래 실력밖에 없는 허각이 우승한 건 공정한 평가의 증거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 주장은 타당한가? 아마 허각이 환풍기 다는 실력으로 신일선풍기 설치담당 이사로 입사했다면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타 탄생의 배후에 성공신화를 깔아야 시청률이 오르는 오디션 프로에서 ‘타고난 가창력+중졸 학력’은 약자의 정체성이 아니라 특화된 스펙에 가깝다. 그래서 허각의 이력은 그 자체로 평가의 공정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긴 어렵다. 허각은 위안은 돼도 대안은 못 된다.
그러면 전문가 심사와 대중 투표를 조합한 평가방식은 공정한가? 적어도 참가자가 동등한 조건으로 투명하게 평가받았다는 점에서 ‘공평함’은 성취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승자독식의 보상체계와 탈락자 색출을 통한 가혹한 토너먼트식 경쟁방식에 134만명의 참가자가 2억원의 상금을 놓고 경합한 프로그램의 진행방식은 노력과 성과의 정당한 분배란 관점에서 정당한가?
즉 방송사가 설정한 방송사와 참가자 사이에 존재하는 계약의 내용은 정당한가? <슈퍼스타 K2> 전체 참가자 134만명의 일당을 하루 만원 잡으면 134억이다. 우승상금은 2억이다. 1인당 기대금액은 수백원 남짓이다. 물론 매우 다양한 부대적 가치가 참가자에게 돌아가겠지만, 집단 전체로 보면 참가자 절대다수는 손해 보고 방송사는 엄청난 이득을 보는 ‘하우스 불패의 로또 구조’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기업인 방송사가 프로그램의 설정에 대해 참가자와 토론할 의무는 전혀 없다. 선택은 철저한 참가자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퍼스타 K2>가 공정사회의 모델, 즉 부와 권리를 분배하는 국가적 차원의 틀이 되는 상황을 가정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주권자인 시민은 부와 권리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방식 자체에 의견을 개진할 권리, 주어진 경쟁방식의 정당성을 질문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권리를 삭제하고 일방적으로 결정된 경쟁방식에서 경쟁자들끼리의 공평함만 문제삼는다면 그건 반쪽짜리 절차적 공정성일 뿐이다.
과제를 제출하지 않은 학생 10명에게 교사가 10대씩 똑같이 몽둥이를 휘둘렀다면 공평한 조처이다. 하지만 정당한 조처는 아니다. (과도한) 체벌은 부당하기 때문이다. 공정성은 공평함과 정당함을 요구한다. 공정성을 공평함으로 축소하는 것은 권리의 경계를 모르는 두 유형의 인간, 노예와 폭군의 습성이다. 노예는 부당한 공평함에 안심하고 폭군은 거기서 정당성을 편취한다. 온전한 시민은 먼저 정당성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공평함을 비교해야 한다.
정치철학 개론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수십만부나 팔린 나라에서 반쪽짜리 절차적 공정성을 공정사회의 모델로 벤치마킹하자는 얘기가 스스럼없이 나온다? 이상한 일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일관된 주장은 절차적 공정성만으로 정의는 어림없다는 것 아닌가.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좌파, 도덕적 僞善 벗겨져 파탄나
큰 길 복판으로 나가 선진화 이끌어야
정치에서 도덕은 짧은 치마와 같다. 아무렇게나 걸치고 쏘다니다간 속옷이 드러나 망신하기 십상이다. 치마 아래로 삐쭉 삐져나온 속옷을 두고 위선(僞善)이라 한다. 진보·좌파가 제 발로 돌부리를 차고 넘어지는 모습을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는 곳이 이 부근이다. 지난 시대에 '법(法)보다 밥이 우선'이라며 포장마차 아주머니의 절박한 사정을 가슴으로 껴안던 정치가가 있었다. 현직 장관이 정부 시책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삼보일배(三步一拜) 행렬 곁을 지키며,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당신네와 함께 있다'는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김일성 생가(生家)를 찾아 반미자주(反美自主)의 김일성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투의 글을 남긴 선생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여러 식구가 수십억원의 부정한 돈을 만졌다고도 하고, 관저(官邸) 식사 자리에서 수억원의 정치자금이 오갔다는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으며, 자녀를 미국에 보내 놓고 거기서 어떻게 반미자주 교육을 시켰는지 모르겠다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짧은 치마를 걸치고 몸매 자랑하다 속옷을 내보이느니 맵시가 덜 나더라도 헐렁한 긴 바지를 입는 게 백 번 나았다.
보수·우파는 딴판이다. 옷차림이 털털한 정도를 넘어 아예 속옷 바람으로 나들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정치와 도덕 간의 관계는 부엌과 화장실 사이의 거리처럼 멀면 멀수록 좋다는 듯이 행동할 때도 있다. 그 탓에 도덕 불감증(不感症)이라고 흉을 잡힌다. 이런 태도의 뒤편에는 효율만 높으면 다 좋은 거라는 성과주의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쭈그러진 양푼에 밥을 퍼주며, 배만 부르면 되지 무슨 불평이냐고 타박하는 급식소 주인을 닮았다. 정치는 주식회사의 주주(株主)총회와 다르다. 배당률(配當率)을 높이겠다는 발표와 함께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는 곳이 아니다. 좋은 정치란 밥과 도덕을 적절하게 배합(配合)해 국민에게 배부른 포만감만이 아니라 이웃과의 일체감과 유대감(紐帶感)을 불어넣는 예술이다.
대북정책을 예(例)로 들어보자. 식량 사야 할 돈을 핵과 미사일 개발에 쏟아부으며 국민을 굶겨온 김정일은 부도덕한 인간이다. 뚱뚱한 아들도 싹수가 노랗다. 배곯는 이웃은 본체만체하면서 제 배만 불려온 북한 특권층의 도덕 점수 역시 빵점이다. 금강산 관광료로 들어오는 달러로 주민을 먹일 쌀을 살 리가 없다. 무기 창고부터 채우려 할 것이다. 쌀을 보내준다 해도 통째로 군량미 창고로 직행할 게 뻔하다. 따라서 이들의 파렴치(破廉恥)하고 몰(沒)도덕적이고 반민족적인 태도를 바꾸게 하려면 압력솥에 넣고 삶는 수밖에 없다. 현미는 물론이고 단단한 닭뼈도 물렁물렁하게 녹여버리는 압력솥 안에서 김씨 부자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는가. 2400만 북한 동포를 해방시키는 근원적 해결책이 여기 있다. 거칠게 설명하면 이것이 지금 대북정책의 기본 뼈대라고 할 수 있다. 90%가 옳은 지적이다.
문제는 딱 하나다. 압력솥 안의 압력을 높이려면 뚜껑에 틈새가 없어야 한다. 틈새가 벌어지면 아무리 열을 가해도 솥 안의 압력이 커지지 않는다. 그러나 알다시피 북한을 삶는 압력솥에는 중국 구멍이 뚫려 있다. 이 솥으로 완고한 북한을 삶아 개혁·개방으로 끌고 나오려면 짧지 않은 세월이 필요하다. 팔다리가 오그라드는 그곳 갓난아이와 어린이들, 그리고 틀니 없이 잇몸으로 버텨온 노인네들이 그 세월을 견뎌낼 수 있을까. 대북정책 가운데 최소한 북한의 영·유아(嬰·幼兒)와 노약자(老弱者)를 위한 식량과 의약품 공급이라도 서둘러 크게 늘려야 한다. 보수·우파가 먼저 나서야 할 대목이다. 우리가 구명(救命)보트 뱃전을 붙들고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상대로 마치 뱃삯을 흥정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쳐져서는 안 된다. 좌파들은 방아쇠를 만지작거리며 이 표적이 떠오르기를 엎드려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정치에서 도덕의 무기는 상대를 허물어뜨리기에 앞서 이쪽의 정당성과 확신을 강화시키는 효능을 발휘한다. 대평원을 휘몰아가는 토네이도(tornado)의 소용돌이처럼 그것의 시작은 미약하지만 때론 기차를 들어 올리는 괴력(怪力)을 발휘하기도 한다. 한국의 보수는 2년 후를 내다보며 이제 도덕적 호소력을 보강할 때다. 보수의 출발선이 어딘지를 잊지 않는다면 좌우 극단의 시비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도로의 양쪽 맨 끝 가장자리에 무엇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대한민국의 보수는 활짝 뚫린 큰길 복판을 내달려 이 나라를 선진국으로 밀어 올려야 한다.
[강천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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