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기 폭파범 김현희 남한 생활 24년 풀 스토리
대한민국을 분노와 슬픔에 빠뜨렸던 'KAL858기 폭파' 사건이 터진 것이 1987년이니 벌써 24년이 흘렀고 1997년 자신의 경호원이었던 정모 씨와 결혼한 후 세인의 관심권에서 사라졌으니 그 또한 14년이나 됐다. 지인으로부터 '김현희 씨를 만나는 자리에 동석하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기억 속의 시곗바늘을 열심히 거꾸로 돌렸다.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녀의 나이 스물다섯. 지금은 쉰을 바라보는 아주머니로 변했을 터. 네 살 때까지 쿠바에서 자랐다고 하니 그녀의 인생에선 북한보다 남한에 산 시간이 더 길다. "이젠 여자로 살고 싶다"고 했던 그녀는 과연 대한민국의 '보통 여자'로 살 수 있었을까.
서울 광화문 근처의 한 식당.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선 기자를 문 앞에서 먼저 맞은 것은 경호원들이었다. 익숙지 않은 분위기에 쭈뼛거리는 중 방 제일 안쪽에서 "안녕하세요"라는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기자와 경호원들과의 짧고도 어색한 인사가 이어진 후 재빨리 방 안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긴 머리에 통통한 볼살로 기억되던 그녀는, 얼굴은 시쳇말로 콤팩트디스크(CD) 한 장 만하게 작아졌고 길었던 생머리는 산뜻한 쇼트커트로 변신해 있었다.
그녀의 옆자리는 그간 지면을 통해 이니셜로만 밝혀졌던 남편 정 씨가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만난 것이 2010년 12월. 여러 차례에 걸친 설득 끝에 1월 중순에 다시 만났다. 만남의 '목적'을 알고 서울을 다시 찾았겠지만 그의 얼굴에 흐르는 긴장감은 감출 수 없는 듯했다.
얼굴이 너무 작아져 일간에 돌았던 '성형설'이 사실이 아닌가 싶은데요. 생각보다 마르셨습니다.
다들 성형했느냐고 묻는데, 아니에요. 살이 빠져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눈 아래 자글자글한 주름 보세요. 저도 이제 나이 든 아줌마인데요, 뭐.(웃음)
지내시긴 어떠신가요.
좌파 정권(그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을 이렇게 표현했다) 시절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하고 나온 후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제자리로 돌려지지 않네요. 생활하기도 어렵지만 우리 나름대로 투쟁해야죠.
지난 정부 때 '김현희 가짜설'이 제기되면서 오랜 시간 칩거하신 것 같은데, 계속 그렇게 은둔 아닌 은둔 생활을 할 생각입니까.
제가 상황이 무척 어렵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의) 저를 '가짜'로 몰아 잠자고 있던 한밤중에 MBC 방송 프로그램(PD수첩)팀들이 카메라를 들고 집을 거의 습격하다시피 들어오는 바람에 자던 아이들을 들쳐 업고 제 집을 나와 산 것이 벌써 8년째예요(2010년 봄 그녀가 12년 만에 말문을 열었던 국내 한 매체와의 인터뷰 기사에는 현재 쥐와 바퀴벌레가 돌아다니는 허름한 옥탑방에 산다고 묘사돼 있다).
네 식구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좁은 집에 있다 보니 아이들이 친한 친구도 마음대로 데려오기가 힘들어요. 계속 이렇게 살 수 없을 것 같아 조금씩 대외적인 활동도 할까 고민 중이에요.
결혼하신 지 14년째인데, 슬하에 자녀는 어떻게 됩니까.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습니다. 결혼을 너무 늦게 해서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생이에요. 공장 문 닫기 직전에 낳은 셈이죠.(웃음)
한창 키우기 힘드실 때네요.
예, 엄마 손이 많이 갈 때죠. 숙제 봐주느라 힘들어요.
북한에서 배운 교과 내용과 달라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 그래서 무척 어려워요. 북에서는 어릴 때부터 주체사상 교육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남한 교과과정과는 완전히 다르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이 물어보면 단원 요약부터 미리 읽어보고 공부합니다. 제가 먼저 공부하고 가르쳐 주는 식이죠.
오늘 어떻게 오셨습니까.
뭐, 그리 어렵지 않게 왔습니다. 가끔 일이 있거나 하면 오니까요.
경호원이 24시간 따라다니는데, 보통 주부처럼 마트에도 가고 미장원에도 가십니까.
예, 경호원들과 같이 갑니다. 우리는 마트보다 조금이라도 싼 재래시장을 이용하는 편이에요. 재래시장은 단골이 되면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살 수 있잖아요. 남편이 외모와 달리 굉장히 섬세하고 꼼꼼한데 시장에 가면 가격 대비 품질을 일일이 비교해 물건을 살 정도예요.(웃음)
경호원 보호 하에서 이 인터뷰는 어떻게 가능합니까.
경호원들은 제 신변 보호만 하기 때문에 인터뷰까지 못하게 막지는 않습니다.
북한의 위협을 감지한 적은 없으십니까. 이한영 피살 사건 때는 어떠셨나요.
이한영 피살 사건(김정일의 처조카인 탈북자 이한영 씨가 1997년 남파 간첩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 당시에는 경찰이 전화해 알려주는 바람에 바짝 긴장했었죠. 한두 달 정도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여행은 자주 다니십니까. 해외여행도 가시나요.
멀리는 못 가고 사는 곳 주변만 다닙니다. 해외여행은 2010년 (납북된 일본인 문제로) 일본에 갔던 것이 처음이었어요. 납북자 문제니까 (정부에서도) 협조했던 것 같아요. 특별히 배려해 줘서 허가를 받았죠.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수한 신분인데 하루 일과는 어떻습니까.
남한에 온 뒤로는 늘 경호원들(경호팀은 주기적으로 바뀐다)이 있어서 보통 사람과는 아무래도 처지가 좀 다르죠. 처음 10년 동안은 강연과 간증도 열심히 했습니다만, 1997년 결혼하면서 조용히 살려고 마음먹었어요.
그런데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KAL기 폭파 조작설'이 돌기 시작하더니, 특히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과거사위원회 같은 정부 기관과 천주교사제단 등이 앞장서 저를 '가짜'로 모는 작업을 하는 동안 살던 집에서 쫓겨났는데 아직 해결이 안 돼 방황 생활을 하고 있어요.
너무 괴로워 자살까지도 생각했는데 그러면 '그들'의 의도대로 내가 가짜가 되고 말겠다는 생각에 참고 견뎠죠. 신앙심과 가족이 있어 그 어려운 고비를 넘겼구나 싶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완전히 적응하셨나요.
저는 좀 특수합니다만 보통 탈북자들이 (남한에) 오면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은행 '이자'입니다. '이자'라는 게 왜 생기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되거든요. 북한에는 은행이란 말 대신 '저금소'라고 부르는데 이자란 게 없어요. 이자가 없는 대신 저금액이 많은 사람에게는 새 TV를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선물을 줍니다.
이자가 이해되지 않았다면 주식 투자는 두말할 필요도 없겠네요.
그럼요.(웃음) 저는 형편도 어렵고 주식이란 게 위험해 보여서 생각도 안 했지만 다른 탈북자들에게는 환상 같은 것이 될 수 있겠죠. 탈북자들이 보통 귀가 아주 얇거든요.
특별한 취미 생활이 있습니까.
아직은 취미 생활하기가 어렵습니다. 가끔 등산을 하거나 책을 읽는 게 전부죠. 책은 여러 가지로 많이 봅니다. 잡지도 보고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도 다시 봤는데, 다시 보니 그 책 내용이 북한과 너무나 흡사하더라고요. 일본어 책도 보고 그럽니다.
등산 갈 때도 경호원과 함께 갑니까.
예, 같이 가야죠.
"북한은 경제 위기로 자멸할 것"
24년의 이야기를 짧은 시간에 정리하기란 어차피 불가능했다. 어떻게 살았는지 '생활인 김현희'를 알아가는 동안 겨울바람에 시달렸을 손도 녹일 겸 대접했던 찻잔도 어느새 식어가고 있었다. 따뜻한 차 한잔 더 하겠느냐고 권한 뒤 화두를 옮겼다. 어쩌면 기자보다 그녀가 더 하고 싶은 얘기들이 있을 법해서다.
노무현 정부 때 MBC TV 'PD 수첩'과의 '앙금'이 남아 있는 것 같은데요, 그 후로 어떤 식으로든 접촉이 있었습니까.
저는 MBC 때문에 제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왔고 그들은 아직까지 침묵하고 있을 뿐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 같은 곳에 진정해 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그렇게 말씀하신 분들도 있었는데, 그런 곳에 얘기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정부 차원에서 결단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아직도 알아봅니까.
요즘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더라고요. 2010년 국가정보원 신입 직원 교육 때 특강을 했는데 신입 사원 대부분이 1980년대생이더군요. KAL기 사건 이후에 태어난 세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안보 교육을 더 잘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친구들은 (KAL기 사건 자체도) 긴가민가할 것 아니겠습니까.
남한에 산 것이 햇수로 벌써 24년입니다. 지난 24년은 어땠나요.
(그는 바로 답변을 못하고 한동안 침묵했다) 제가 사실 큰 죄를 짓고 당시만 해도 한국에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왔고…. 제 운명이 그런가 봐요. 사형 판결까지 받았으니…. 느낀 게 많죠.
사실 북한과 남한은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완전 승리가 이뤄지면 모든 주민들이 기와집에서 고깃국 먹으며 잘 살고 도시와 농촌의 차이도 없으며 여성들이 가사에서 해방된다고 선전해 왔죠.
하지만 김정일 시대에도 안 됐고, 지금은 김정은(3대) 시대인데 오히려 상황은 더욱 나빠지기만 해서 북한 주민들이 아사 직전 상태입니다. 물질적인 면에서는 남북한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하지만 물질적으로 풍부하니까 젊은 사람들의 안보 의식이 부족한 게 아닌가 우려됩니다. 2010년 천안함 사태 등이 남한 국민의 안보 의식을 고양하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동안 북한을, 즉 '적'을 동무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북한을 해롭게, 남한을 이롭게 한 사람들을 (정부가) 힘들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죠. 물질적인 것만큼 정신적인 것도 건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안타까웠습니다. KAL기 사건은 북한의 대표적 테러 사건인데 그걸 뒤집으려 했던 자체가 놀라웠습니다.
8년째 칩거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결혼 전엔 (강연과 간증으로) 전국에 안 다닌 곳이 없을 정도로 활동을 많이 했는데, 결혼 후엔 시골에서 조용히 참회하면서 살려고 했어요. 제가 활동을 너무 많이 하니까 싫어하는 분들도 있었거든요.
1997년에 (KAL기 사건) 유가족 분들을 만났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면서 대화를 나눴죠. 제가 수기를 썼었는데, 책으로 벌었던 인세를 드리는 자리였습니다. 그때 유가족 대표께서 마음고생했다고 이제 마음 편히 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바로 이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어요. 그땐 이제 막 아이를 낳아 키우는 저를 공격하기도 뭐했는지 조금은 조용히 지나갔는데, 노무현 정권 때는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힘들었습니다. 그 후론 전혀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PD수첩' 팀이 밤에 쳐들어 왔었다고요.
그땐 'PD수첩'뿐만 아니라 모두 연대해 저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죠. 아이들이 한 살, 세 살로 어릴 때여서 당장 갈 데도 없고 허름한 단칸방으로 도망갔어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거사정리위원회 등이 조사하겠다고 계속 찾아왔었습니다. 처음엔 왜 쫓겨났는지도 몰랐는데 지나 보니 처음부터 모든 것이 다 연결이 됐구나 싶더라고요.
그렇게 힘들 때 같은 편이 돼 준 사람이 없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생활은 어떻게 하십니까.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예요. 북한에서는 회랑식 아파트(남한의 복도식 아파트, 그녀는 인터뷰 중 부지불식간에 북한식 용어를 사용하곤 했다)에 살았는데 겨울이면 보일러가 터져서 물 길으러 다니곤 했어요.
그런데 같은 상황을 남한에서 다시 겪게 됐죠.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아서 고생하고, 쥐와 바퀴벌레가 들끓는 곳에서 살면서 너무 힘들었지만, 북한에서도 살았는데 내가 이걸 왜 못 이겨내랴 생각하고 참았습니다.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까.
친구도, 친지도 모두 외면하더라고요. 국가 기관이 '가짜'라고 하니까 도와주지 않죠. 그땐 최악이었습니다.
정신력이 강한 것 같습니다.
북에서 공작원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저더러 항복하라고 압박을 해 오는데 거기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너무 괴로워서 죽고 싶기도 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북한 주민들이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북한이 무너진다면, 경제 때문일까요.
예. 한마디로 경제 때문에 북한은 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이기 때문에 계획경제 시스템입니다. 조직 속에서 일하고 월급을 타고 하지만 식량은 배급제죠. 1986년부터 상황이 나빠져 그것마저도 어려워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1986년께부터는 북한에서도 시장이 활성화됐어요. 돈만 있으면 시장에서 뭐든 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계획경제는 점차 무너진 거죠. 1997년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고 하잖습니까.
'김정일-김정은'에 이어지는 후계 체제 속에서 경제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북한이 망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그들도 알고 있지만 경제가 해결 안 되니까 주민들 불만이 생기는 거죠. 제가 살 때만 해도 지금처럼 불만이 크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2009년에 화폐를 개혁한다고 중산층 돈을 다 거둬가는 바람에 더 어렵게 된 거죠.
북한 주민들의 의식도 예전보다 많이 깨어서 당 지도부에 불만이 많아졌다고 들었습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북한에 핵은 생존·존재감의 표현이죠.
2010년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 사건을 지켜본 소감은 어떠셨습니까.
북한의 도발을 보면서 1987년 KAL기 사건 때나 지금이나 북한은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싶었습니다. 연평도 사건은 북의 내부 사정이 다급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겁니다. 한 해 두 번씩이나 직접적인 도발을 한 것은 북한으로서는 모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남한으로 와서 자백하고 사형 선고까지 받는 과정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때 박세직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국정원장으로 부임하셨어요. 국정원에 1년 남짓 계셨는데 어떻게 하면 저를 도와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신앙으로 인도해야겠다는 생각에 여의도에 있는 한 교회를 소개해 주셨어요.
하나님 말씀 듣고, 기도하고, 재판장에 들어갈 때도 기도하고 그랬죠. 그 후로도 도움이 많이 됐어요. 좌파 정부 시절 어려울 때도 가족과 함께 신앙의 힘으로 극복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자주 가지는 못하고 가끔 가는데 요즘은 기독교 방송을 보며 집에서 기도합니다.
요즘 기도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주로 아이들에 관한 것이죠. (천안함 사태 등) 사건 있을 때마다 이 나라 안보에 대해 기도드립니다. 저는 KAL기 사건의 산증인이잖습니까. 그런 사건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제가 살아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일본에서 제작된 드라마 'K 프로젝트(KAL기 폭파범 김현희를 일본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일본 TBS의 특집 드라마. 일본 스태프 외에 한국 스태프도 참여했다)'가 국내에는 방영되지 않았는데 혹시 보셨는지요.
얼마 전에 (일본에서) 테이프를 보내왔는데 아직 보지는 못했습니다. 거의 1년 동안 기획해 KAL기 사건 23주기에 맞춰 방영할 계획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연평도 사태가 일어나 방영 시기가 미뤄졌어요. 한국인 배우가 (김현희로) 나왔죠. 일본에서는 시청률이 굉장히 높았다고 들었습니다.
북한 소식은 어떻게 접하십니까.
신문을 통해서 보기도 하고 PC방에 가서 자료를 뽑아오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요즘은 탈북자들이 많아서 소식이 잘 들어옵니다.
통일에 대한 솔직한 생각은 어떻습니까.
통일이야 돼야죠. 가족도 거기 있고요. 통일되면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습니다. 언젠가는 돼야죠. 남한도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김정일 체제가 그렇게 오래가겠습니까. 지켜봐야 할 문제죠. 하지만 지난 정부 때처럼 맹목적으로 북한을 도와주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소식은 들으십니까.
제가 맏딸로, (남한에) 올 때는 밑으로 여동생·남동생·부모님이 계셨는데, 부모님은 돌아가시지 않았나 추측만 합니다. 온 뒤에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가족 때문에 힘들었죠. 북한이 가족을 인질로 잡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죠.
아이들이 엄마가 '마유미'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아직은 어려서 뭐든 '그게 뭐야'라고 묻는 정도인데,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얘기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나요.
남편이 보내는 것을 싫어해 안 보냅니다. 남편이 남다른 철학을 가진 사람이어서 아이들은 자유롭게 놀면서 커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그래도 아이 둘 다 유치원 못 보낸 건 마음에 많이 걸려요. 8년 전에 갑자기 집을 나오면서 형편이 여의치 않아 유치원을 보낼 수 없었는데, 학교를 보내놓고 보니까 아무래도 우리 아이들이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남편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처음 왔을 때부터 만났던 사람(수사관)이죠. 그때는 남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여러 수사관 중에 한 사람이었죠. 시간이 흐르면서 좀 지나고 보니 남편이 마음이 따뜻하고 중심이 잘 잡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려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과 다르게 느껴졌었죠. 나이 들면서 그런 면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어떤 계기가 있어 남편과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게 됐어요. 2년 정도 데이트했는데 정부가 승인해 주지 않아 결혼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어요.
남편께서 결혼과 함께 국정원을 그만두셨죠.
저와 결혼하고 그 직장을 계속 다니는 것은 어려우니까 그만뒀죠.
두 아이들에게는 '북한'을 어떤 나라로 말해 주십니까. 엄마의 고향이라는 건 알고 있나요.
이모와 삼촌이 있다고 말하긴 했는데, 가끔 어디 계시냐고 물어봐요.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는 않는데 큰아이는 눈치로 아는 것 같아요. 남자 아이라 입은 무거운데, 동생한테 '북에 있지'라고 말해주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해 어떤 일을 했으면 하십니까.
하고 싶은 것을 했으면 합니다. 자유롭게 해 주고 싶어요. 제가 너무 이런 생활을 해 와서 자유롭게 살았으면 해요.
아이들과 노래방도 가십니까.
한 번인가 두 번 간 적 있어요. 옆에 계신 분들(경호원들)이 가자고 해서 갔는데 아이들이 좋아하더군요. 처음엔 귀 막고 있더니 나중엔 마이크를 놓지 않더라고요.
가계부도 쓰시나요.
가계부는 제가 쓰지 않고 남편이 쓰죠. 남편은 대학 때부터 서울에서 혼자 자취 생활을 했는데, 그때부터 가계부를 꼼꼼히 쓰면서 한 달 생활비를 아끼고 또 아꼈다고 해요(옆에 있던 남편은 그 당시 철저한 생활비 관리 덕에 어려웠지만 소주 한 잔 마실 비용도 마련했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때 습관이 남아서 그런지 지금도 저한테 잔소리도 많이 해요.(웃음)
요리 솜씨는 어떻습니까.
남한에 온 지 얼마 안됐을 때는 이북에서 친정어머니가 해 주시던 개성 음식을 해 먹다가 점차 남한 음식을 시도하게 됐는데, 썩 잘하지도, 그렇다고 형편없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남편이 경상도 출신이라 맵고 짠 찌개를 엄청나게 좋아해요.
갈치조림도 하고 찌개도 하고 남편 좋아하는 것들 대충 흉내 내서 만들다 보니까 제 입맛도 변했고요. 이제는 재료만 있으면 기본은 하는 것 같습니다.
24년을 남한에 살았으니 북한에서 산 기간보다 깁니다. 지금은 스스로를 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예. 북한에서는 교육받은 것밖에 없고 산 것으로 따지자면 남한에서 산 시간이 더 깁니다. 이제는 남한 사람이죠, 뭐. 남한 식으로 생각하고, 신문 보고, 공감하고 그러니까요. 물론 북한은 나서 자란 곳이고 부모 형제가 있어서 안타까운 면도 있지만, 연평도 사건이 났을 때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울분을 토하기도 했고 보복을 못해서 화가 났었어요.
대한민국(남한)을 위해 할 일이 있다면요.
KAL기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와 증인으로서 사건을 증언해 드려야죠. 사건을 진짜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알고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건 결국 통일을 방해하는 일입니다. 지난 10년간 (남한)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고 느꼈습니다. 집안에서 내부의 적을 단속하지 않고 어떻게 바깥의 적과 싸워서 이기겠습니까.
휴대전화도 없이 친지나 지인과 연락도 쉽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과 어떻게 연락하십니까.
친지들과 연락을 별로 안 합니다. 집에서 나오고 난 뒤로 일절 끊었습니다. 오히려 휴대전화 같은 것이 있는 게 도움이 안 됩니다. 휴대전화 끊고 사니까 나름대로 편합니다.(웃음) 남편이 어디 가서 연락이 없어도 그저 오겠지 합니다.
남한에 오신 뒤 친구는 만드셨나요.
항상 보호를 받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에 편안하게 친구를 사귈 수 없었습니다. 수사관 중에 후에 한 번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이 남편 한 사람이었어요.(웃음) 말이 통할 것 같더라고요. 친구는 없지만 가족이 있어서 다행이죠.
여생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바레인공항에서 음독자살에 실패하신 후 어쩌면 다시 받은 생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책도 쓰고 그랬는데, 너무 공인화되니까 불편하더라고요. 평범하게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그럴 운명도 아닌 것 같아요. 북에 납치된 일본인들 문제도 제가 제기했던 것인데, 그런 일도 제 사명이 아닐까 합니다. 그분들도 북한에 의한 피해자들이기 때문에 돌아올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생을 통해 가장 고마운 사람이 있다면요.
고마웠던 분들도 많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은데, 지금은 남편이 제게는 제일 고마운 사람이죠. 어려울 때 옆에서 항상 지켜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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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KAL858기 폭파 사건은…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KAL858기(機)가 인도양 상공(미얀마 안다만 상공)에서 폭파돼 승무원과 승객을 포함해 115명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수사 이틀째인 12월 1일, 사고 비행기에 한국 입국이 금지된 일본인 2명이 탑승, 기내에 폭탄을 두고 내린 사실이 알려졌다. 일본인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의 정체는 일본인 승객으로 위장한 북한 대남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로 밝혀졌다.
두 사람은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붙잡혀 조사를 받던 중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김승일은 음독 직후 사망했고 김현희는 조사원들의 제지로 자살에 실패, 한국 정부가 신병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김현희는 한국 정부의 보호 하에 압류됐다가 1990년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됐지만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고 한국에 전향했다. 이후 정부 '관리'를 받으며 국가 안보와 관련한 강연과 간증 활동도 벌였고, 세간의 화제가 됐던 에세이집도 내고 '남한 여자'로 살다가 1997년 전 국가안전기획부 수사관 출신 정모 씨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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